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39화 (39/66)

39화. 포로들

4등급 모래시계문은 모든 이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산의 산봉우리라고 한다면, 5등급 모래시계문은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한 트레이닝 코스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4등급 모래시계문의 공략 성공 여부는 마법사의 실력과 수준도 중요하지만, 5등급 모래시계문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고, 공급할 수 있는가, 그 부분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중국과 미국이 마법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부분 때문이었다.

두 개의 나라는 각자 가진 특성을 이용해 넓은 땅덩어리에서 5등급 모래시계문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그들보다 국토도 적고, 확보한 모래시계문도 많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 5등급 모래시계문의 귀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5등급 모래시계문에 도전하고 싶은 길드가 있어도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알아서 다 하겠다고 해도 마법청이 허가를, 모래시계문을 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류 길드가 그 정도고, 이류 이하 길드는 시도조차 못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법청이 이강우에게 5등급 모래시계문을 제공해준 건, 나름 마법청 입장에서는 통 큰 결단이었다.

사실 안대욱은 5등급 모래시계문을 허락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단 5등급 모래시계문 자체가 공급보다 수요가 많을뿐더러, 이강우의 경우에는 독식을 허락한 상황이었다.

유적에서 가지고 나오는 모든 것을 이강우가 가질 수 있는 상황.

마법청 입장에서는 투자가 아니라, 그냥 지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안대욱의 처지는 예전과 달랐다. 예전이라면 독단으로 뭔가를 해도 딱히 그 독단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마법청의 얼굴마담이었던 이부성 마법청장이 이제는 얼굴마담이 아니라 실권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실권을 쥐고자 하면, 당연히 안대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안대욱 부청장이 독단으로 이강우에게 과한 지원을 해줄 경우, 마법청 내부는 몰라도 마법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길드가 이부성에게로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다.

꼬투리가 될 여지가 충분한 일이었다. 견고하던 안대욱에게 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신의 손을 포섭할 줄이야.’

그러나 그런 안대욱의 마음을 바꾼 건, 이강우가 자신의 팀에 신의 손 김수애를 포섭한 것,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6서클 마법사보다 귀한 전력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치료 마법의 수준은 단순한 의법사의 수준을 벗어나니까.

그녀의 능력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게임 속에 나오는 마법 수준이었다. 보통 유적 사냥에 치료 마법을 할 줄 알고, 의학적 지식을 가진 마법사를 포함하긴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최악의 상황을 막는 것이지, 부상 당한 사람을 뚝딱 고쳐서 곧바로 실전에 복귀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김수애는 그게 가능하다. 심각한 부상자도 금방 뚝딱 고쳐놓고는 전력에 투입할 수 있다.

‘사전에 합의가 있었던 건가? 이미 준비를 했던 건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그래서 안대욱은 오히려 이강우가 김수애를 영입하는 순간 그를 의심했다.

이제까지 마법청의 꾸준한 회유에 흔들리기는커녕,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김수애가 이강우의 영입 제안에는 이렇다 할 잡음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안을 받았다.

남들은 퍼즐 조각을 찾기 위해 움직일 때, 이강우는 행동에 나서는 순간 이미 퍼즐 조각이 알아서 그를 찾아오는 상황.

마치 한국 정부가, 마법청이, 안대욱이란 권력자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는 느낌.

거기서 시작된 의심이 오히려 안대욱의 과감한 결단과 지원을 가능케 해줬다.

‘준비를 했다면, 다음 시나리오도 있다는 의미.’

이강우의 의중은 모른다.

하지만 이강우가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면 앞으로 그는 순풍을 맞은 배처럼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 김수애는 좋은 포장지다. 이제까지 모두가 탐냈으나,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포장지.

상표 없는 명품 가방에 상표가 되어줄 존재다.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렇게 이목이 끌리는 사이, 안대욱은 장애물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처음은 이부성.’

당장은 이부성이다.

얼굴마담으로 남아 있다면 모를까, 그가 안대욱의 권위를 위협한다면 제거해야 한다. 그가 제대로 실권을 쥐고 흔들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계획은 이미 충분했다. 이런 날을 위해 안대욱은 내실을 다져두었다. 마법청 내부에서 이부성이 실권을 마음대로 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부성의 처리는 어렵지 않지.’

장담컨대 그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그다음.

이부성을 내치고, 확실한 실권을 쥐면 그때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문제는 그 음 타깃인 강희.’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 강희.

그가 지금 안대욱이 노리는 진짜 표적이었으니까.

* * *

“지원이 빵빵하군.”

김재범은 자신들이 입장하게 될 5등급 모래시계문과 그 모래시계문 주변에 배치된 보급품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휘파람을 불었다.

“마법청이 우리 대장님을 진짜 제대로 좋아하나 봐. 자기들은 수익 하나 나지 않는 일에 이 정도 지원을 해주다니. 그동안 마법청 앞에서 내가 꼬리 흔든 게 후회될 정도야.”

이번 포식자 팀의 유적 사냥은 마법청 입장에서는 조금의 수익도 올릴 수 없다.

수익이 불투명한 게 아니라, 이강우가 배려를 해주지 않으면 수익 자체가 없다는 의미다.

물론 이강우가 유적에서 가지고 나온 마법 아티팩트를 다른 나라에 파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게 꼭 이강우가 한국 정부에만 마법 아티팩트를 팔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강우가 그냥 가지고만 있을 수도 있다. 때문에 한국 정부가 유일한 수요자라고 해도, 그들이 가격을 후려치는 건 한계가 있다.

“진짜 이런 게 가능하긴 하구나.”

어쨌거나 이런 식의 유적 사냥은 김재범의 마법사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김재범은 여기서 이강우에게 확실한 충성을 보였다. 이제까지 마법청을 상대로 언제나 하청업체나 다름없었던 상황에서 이젠 마법청을 상대로 배짱을 부리는 이강우란 줄이 어떤 줄보다 가치 있는 줄이라는 계산을 확실하게 마친 것이다.

“대장, 우리 이러지 말고 좀 크게 벌립시다. 6서클 마법사 죄다 불러서 배짱 좀 부립시다.”

덕분에 예전에는 이강우를 아랫사람 취급하던 김재범이 이제는 이강우를 대장으로 부르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여러모로 유쾌한 사내.

물론 하선우는 그런 김재범의 모습에 이강우에게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믿을 순 있지만, 어지간하면 저 입은 다물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의 마법 능력은 뛰어나지만, 입은 조금의 생산성도 없으니까요.”

여전히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하선우다.

한편 김재범처럼 보급품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 있었다.

‘이거 하나 얻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로비를 했는데…… 이제는 그냥 거저 주는군.’

안중현 그리고 이번에 팀 포식자의 일원이 된 총꾼 네 명이었다. 그들은 보급품 목록에 있는 무기 목록 등을 보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원이 어마어마하군요.”

“정말 이렇게 지원받는데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겁니까?”

“워머신은…… 10명 유적 사냥인데 2대나 지급해주는군요. 예전에는 이거 한 대 얻으려고 안 대장이…… 아, 대장이 아니죠. 안 선배가 마법청이랑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는데…….”

“그런데 이거 추가 주문도 가능하다는데 진짜입니까?”

팀 포식자에 추가 멤버 영입을 앞두고 이강우와 안중현은 여러 차례 논의를 했다.

가장 좋은 건 4등급 유적 사냥 때처럼, 다양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 확실하게 이강우에게 충성을 바치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다른 길드 소속이란 게 걸렸다. 아무래도 기존의 멤버들 전부가 즈믄나래 길드 소속인 만큼 다른 길드 소속이 끼어들면 개인 간에는 문제가 없어도 길드 차원에서 잡음이 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이우희를 추가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안중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우희를 추가할 바에는 차라리 다른 부분…… 로봇 조종이나, 저격 같은 보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추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 결과 네 명의 총꾼이 추가됐다.

이 선별 과정에서도 안중현의 역할이 컸다.

그동안 안중현이 다수의 유적 사냥을 통해 그리고 리더다운 모습을 통해, 그를 믿고 따르고 반대로 믿고 데려갈 수 있는 총꾼 후보는 정말 많았으니까. 이강우 입장에서는 안중현의 영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열 명이 구성됐다.

이강우는 자신과 함께할 아홉 명의 동료들을 바라봤다.

‘책임감이 무겁네.’

이번 무리의 리더는 이강우다. 결국 문제가 생기면, 이강우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책임감에서 자유로웠던 이강우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었다.

한편으로는 새삼스러웠다.

‘타인에게 목숨을 팔던 내가 이제는 타인의 목숨을 책임지는 역할까지 왔구나.’

총꾼.

푼돈에 목숨을 팔던 이강우가 이제는 타인의 목숨을 계산하는 자리까지 왔다.

상전벽해.

정말 많은 게 변했다.

그러나 신기한 점은 이강우는 이 무게감을 느낄지언정 짓눌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임감이 이강우의 머릿속을 맑게 해줬다.

책임감이 긴장감을 유도했고, 그 긴장감이 집중력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래, 이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실패는 없다. 사망자도 없다. 포식자답게 우아하게 만찬을 즐기면 될 뿐.’

이강우, 그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또 다른 자질을 알게 됐다.

“좋아.”

이강우가 모래시계문을 보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후, 본인 역시 보급품 체크에 나섰다.

“밀가루하고 소금은 챙겼어? 쌀은? 품종하고 등급 좀 누가 확인 좀 해봐.”

그렇게 보급품 체크를 마친 팀 포식자가 유적에 진입했다.

* * *

천장을 가득 채운 빛 아래로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그 우거진 숲 사이로 사슴 한 마리가 통통, 움직이고 있었다. 숲속을 뛰어노는 사슴, 참으로 가슴 따스해지는 광경이겠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광경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숲을 뛰어다니는 사슴이 꽤 컸다. 소형차 정도는 가소롭게 만드는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머리에 달린 뿔은 나뭇가지 같은 뿔이 아니라 거대한 송곳처럼 생긴 뿔이었다. 녹용이라기보다는 쇠뿔이란 느낌이 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리였다. 사슴의 거대한 몸통에 달린 네 개의 다리는 얄팍한 사슴의 다리와는 비교를 거부했다. 마치 보디빌더의 근육처럼, 다리근육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기세였다.

그 근육에서 나오는 다리 힘도 엄청났다. 움직일 때 모습이 마치 탄력 좋은 고무공이 튕겨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쇠뿔사슴.

7등급 몬스터로 동급의 7등급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먼저 덤벼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성과 전투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몬스터다운 몬스터였다.

특이점은 그 무시무시한 호전성에 어울리지 않게 초식을 한다는 부분.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자기 뿔로 찔러 죽이지만 먹는 건 초목 따위다. 특히 뭐든 간에 어린 것을 좋아한다. 새싹이 보이면 배가 부르더라도 무조건 뜯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지금도 그랬다.

열심히 숲을 돌아다니던 쇠뿔사슴은 흙 위로 돋아난 새싹을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고는 작게 돋아난 새싹을 주둥이로 가뿐하게 물어뜯었다. 그 순간 녀석의 몸이 움찔했다. 쇠뿔사슴은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새싹을 그냥 뱉어버렸다.

고오오!

그리고는 묘한 울음과 함께 목을 내려 뿔을 앞세운 채 당장에라도 총알처럼 날아갈 준비를 마친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망원경을 통해 확인한 안중현이 실소를 지었다.

‘혀가 민감하군. 독 맛을 구분한다?’

안중현 옆에 있던 김재범 역시 같은 풍경을 보고 표정이 확 바뀌었다.

‘무색 무취였는데 그걸 눈치채? 이것 봐라? 내가 조합을 잘못한 건가?’

그들이 각자 감상을 하는 동안 쇠뿔사슴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하선우 역시 감상을 했다.

‘김재범을 놀리기 딱 좋은 경우가 생겼군.’

자신만만하던 김재범의 독을 몬스터가 눈치챘다. 하선우 입장에서는 김재범을 상대로 한마디 할 계기가 생긴 법.

물론 당장 하선우가 해야 하는 건, 독을 눈치챈 쇠뿔사슴을 중독시키는 것이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하선우가 독을 머금은 바람을 움직였다.

강제로 쇠뿔사슴의 호흡기 안으로 독을 집어넣었다.

큽큽!

쇠뿔사슴이 숨을 멈췄지만, 소용없었다. 하선우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처럼, 쇠뿔사슴의 코와 입을 통해 들어간 뒤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쇠뿔사슴의 몸이 굳기 시작했다. 마비독의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낌새를 느끼는 순간 하선우가 신호를 줬고, 동시에 숨죽인 채, 거지꼴을 한 채 바닥에 엎드리고 있던 두 명이 달렸다.

이강우와 채유리.

팀 포식자의 유일한 커플인 그 둘이 쇠뿔사슴의 앞뒤로 접근했다.

헤이스트 마법이 걸린 둘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쏜살같이 쇠뿔사슴과의 거리를 좁혔다.

마비독에 의해 굳어버린 쇠뿔사슴은 그 둘의 등장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5서클 그리고 6서클 마법사를 상대로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게임이 끝났단 의미.

쇠뿔사슴의 정면에서 등장한 채유리는 녀석의 목덜미에 깊숙한 상처를 만들었고, 쇠뿔사슴의 후방에서 등장한 이강우는 쇠뿔사슴의 왼쪽 뒷다리의 발목을 잘라내고, 그 기세를 이용해 단숨에 쇠뿔사슴의 왼쪽 앞다리 발목도 잘라냈다.

이강우와 채유리가 그렇게 쇠뿔사슴을 두고 교차하자, 쇠뿔사슴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잘린 발목과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를 통해 피를 쉴 새 없이 토해내면서.

그 광경을 확인한 하선우가 곧바로 새로운 마법을 썼다. 쇠뿔사슴 주변에 바람막을 쳤다.

방음 그리고 방향.

소리와 냄새를 막아주는 그 바람막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강우가 과감하게 도축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이 되어줬다.

이강우는 신속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아직 죽지 않은 쇠뿔사슴의 몸 곳곳에 마력검을 이용해 칼을 찔러넣어 주요 혈관을 베어냈다.

콸콸!

녀석의 몸에서 핏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과다출혈.

쇠뿔사슴은 마비독에 굳은 채로 죽었다.

심지어 이강우는 여기서 보다 빨리 피를 뽑아내기 위해 바츠무의 손을 사용했다.

[31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이강우의 시야에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떴지만, 이강우는 알림을 무시한 채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다리부터 절단했고, 절단한 다리를 빼놓자, 채유리가 능숙한 솜씨로 자기 몸뚱이만 한 다리를 특수 비닐로 포장한 후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그 끈을 이용해 네 개의 다리를 가방처럼 등에 멨다.

머리와 몸통은 이강우가 채유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포장을 한 뒤 짊어졌다.

큼지막한 쇠뿔사슴이 운반하기 좋게 다듬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운반할 준비를 마친 그 둘이 바람막을 빠져나왔다.

바람막이 천천히 사라졌다. 하선우 역시 자리를 떴다는 의미.

바람막이 사라지자, 쇠뿔사슴의 몸에서 나온 핏물의 피비린내가 우거진 숲 사이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진 바라보던 안중현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퍼펙트.’

동시에 안중현이 대기 중인 다른 동료들에게 말했다.

“복귀한다. 물 끓이도록.”

* * *

“음!”

육수 맛을 확인한 이강우가 터져 나오려는 감탄사를 입 안 가득 채운 육수의 감칠맛과 함께 그냥 삼켰다.

‘역시 백우는 고기 질은 별로지만, 육수는 최고라니까. 물이 펄펄 끓은 덕분에 잘 우러났어.’

8등급 몬스터 백우(白牛)의 뼈를 고아 만든 육수는 훌륭했다. 고기 뼈를 고아 만든 육수 특유의 감칠맛과 진한 맛은 풍부하면서도 누린내나 기름기, 무거운 맛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해물 육수처럼 끝 맛은 정말 가볍기 그지없었다.

‘자, 그럼 마무리해야지.’

육수를 끓는 냄비의 불을 줄인 이강우는 길게 찢어놓은 쇠뿔사슴의 다리 살을 적당히 집어 그릇에 넣었다. 쇠뿔사슴의 다리 살은 마치 라면의 면발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의 굵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릇 안에 쇠뿔사슴의 다리 살을 넣고, 육수를 부었다. 그 위에 파와 비슷한 맛을 가진 허브, 이강우가 파브라고 이름 붙인 허브를 얇게 썰어 올렸다.

열 그릇이 금방 완성됐고, 이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참나…….’

고개를 돌린 이강우의 눈에 비친 건, 야유회에 온 것처럼 식사 준비를 마친 팀원들이었다. 비닐을 바닥에 깔고 저마다 앞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놓았다. 경계를 서고 있는 두 명을 제외한 일곱 명은 그 상태로 이강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물고 오기를 기다리는 아기 새의 모습.

“다 됐습니다.”

이강우가 완성을 알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배식을 받는 것처럼 차례를 지키며 자기 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경건하게 식사를 준비했다. 누군가는 기도를 했고, 누군가는 국물부터 잽싸게 맛을 봤다.

“후우, 후우!”

“음, 좋아.”

그 모습 어디에도 단순히 허기를 달래기 위한 식사를 하는 낌새는 없었다. 맛, 그 자체를 탐미(耽味)하기 위한 미식가의 자세들이었다.

이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먹는 게 유일한 낙이 됐군.’

사람은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 나름 그 제약 속에서 즐길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찾는다. 지금은 먹는 게 낙이 된 것이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단순히 유적 사냥, 몬스터 사냥과 탐색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이런 것을 낙으로 삼고 유적 사냥을 즐길 수 있다면 나쁠 건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이강우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진다.

모든 게 그렇다. 모든 동물은 먹는 거로 조련을 할 수 있다. 인간도 다를 바 없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는 먹을 걸 주는 자를 일단 따르고 본다. 최소한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먹어야지.’

이강우도 자리 하나를 차지한 후 식사를 시작했다.

이강우는 면이나 다름없는 쇠뿔사슴의 다리 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뒤 입에 넣었다. 그리고 적당한 양이 입에 들어오자 이로 다리 살을 끊었다.

통통!

다리 살 근섬유의 탄력이 이를 통해 느껴졌다. 탄력 좋은 면발을 씹을 때의 식감, 유쾌하며 즐거운 식감이 느껴졌다.

그 후에 곧바로 백우 특유의 깔끔한 육수와 쇠뿔사슴의 다리 살에서 나오는 특유의 풍미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식감은 면의 요리지만, 맛은 기타 면 요리와 달랐다. 그야말로 쇠뿔사슴과 백우 육수로만 낼 수 있는 독특한 요리였다.

별미(別味)다.

그렇다고 특이함이 도가 지나쳐서 호불호가 갈릴 법한 수준의 별미는 아니었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수준의 별미였고, 모두가 즐겼다.

후루룩, 쩝쩝.

곳곳에서 면 요리를 먹을 때 나는 특유의 소리가 났다. 그 외의 소리는 없었다. 잡담도 없었고, 모두가 요리에 집중했다. 요리를 만든 이강우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 맛이야.’

쇠뿔사슴도 그렇고, 몬스터를 잡은 후 곧바로 도축을 하면 사후강직이 남아있다.

보통은 고기를 연하게 만들고, 감칠맛을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숙성 과정을 거치지만, 쇠뿔사슴의 다리 살은 사후강직 상태에서 오히려 면발과 비슷한 통통한 식감을 준다.

도축과 숙성을 거친 쇠뿔사슴 다리 살로는 느낄 수 없는 맛, 유적 안에서 몬스터를 잡은 직후 혹은 모래시계문을 박차고 나온 쇠뿔사슴을 잡아야만 볼 수 있는 요리다.

이강우가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곧바로 한 그릇을 더 먹었다.

사실 이강우의 입장에서는 바츠무의 손이 있는 이상, 굳이 음식 섭취로 마력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 바츠무의 손을 쓰면 배부를 걱정도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마력 섭취가 가능하다.

하지만 크로포드와의 대화 이후 이강우는 생각을 바꿨다.

‘결국 먹어야 강해질 수 있으니까.’

이강우가 6등급 유적 사냥에 성공했을 때, 크로포드는 이강우를 인정했다.

자신의 후계자가 될 재목으로,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대신해줄 재목으로.

거기서 크로포드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새로운 지식을 이강우에게 말해줬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마나 서클을 자극해서 성장을 촉진하지. 그런데 이거 말고 마법사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지. 바로 몬스터를 먹는 거야.”

크로포드는 몬스터를 섭취하는 게 강해지는 비결이라고 했다.

“몬스터와 마력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결국 몬스터 몸에도 마력이 풍부하다는 걸 알게 됐지. 그런 몬스터를 섭취한다는 건, 마력을 섭취한다는 의미. 재미난 건 인간의 소화 기능은 마나스톤은 소화하지 못해도 몬스터 고기는 소화할 수 있어. 소화를 한다는 건 몸의 일부로 만든다는 의미. 몬스터 고기를 많이 먹은 사람은 육체 자체가 마력에 대한 내구성이 늘어나. 쉽게 말해서 보다 많은 마력을 품을 수 있는 육체가 되는 거지. 괴식가를 추종하는 몇 놈을 데려다가 연구를 해서 나온 결과다. 그리고 육체가 마력에 대한 내구성이 늘어나면 수용 가능한 마력의 양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마나 서클의 개방 가능성을 높여주지.”

동시에 크로포드는 충고를 했다.

“즉, 마나 서클만 자극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마나 서클의 개방을 육체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면…… 그러니까 이강우 너 같은 경우는 나중에 네 마나 서클의 마력이 육체의 내구성을 갉아먹을 수 있어. 평상시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강력한 마법을 쓰면, 딜레이에 빠지거나 마력 쇼크를 경험하게 되는 거지.”

빠른 성장이 언제나 답은 아니다. 육체의 성장 역시 중요하다.

그 설명을 들었을 때 이강우는 불사황제가 왜 자신에게 이런 능력을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게 내게 불사황제가 이런 우습지도 않은 방법으로 힘을 준 이유였겠지.’

불사황제는 당장 이강우의 육체가 자신의 힘을 받아들일 만큼 훌륭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권능을 파격적으로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강우의 파멸로 이어지리란 걸 불사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강우에게 몬스터를 먹도록, 그를 통해 마나 서클은 물론 육체도 강해지도록 유도했다.

이강우가 다시금 몬스터를 먹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불사황제의 말 그대로, 정말로 그의 힘을 가지고 싶다면 모든 것을 먹어 치워서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다.

‘그보다…….’

여기에 하나 더.

크로포드는 지식을 말해주고, 경고를 해준 후에 가능성 하나를 더 말해줬다.

“육체가 성장하면 마나 서클이 개방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럼 육체를 도핑을 통해 강제로 마력에 대한 내구성을 늘린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아? 난 그게 요즘 제일 궁금하더라고.”

마나 서클 자극 비약과 함께 육체의 성장을 유도한다면, 마법사의 폭발적인 성장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가설을 들었을 때 이강우는 섬뜩한 상상을 했다.

‘강력한 마법사를 인위적으로, 외부 요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만약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사가 인류를 위협한다면 과연 지금 사회 시스템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만약 모래시계문을 풀어놓은 자들의 목적이 인류의 파멸이라면, 그들이 마법사를 이용하지 않을 리 없다.

이강우가 그들이라면, 마법사를 이용해 세상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렇게 몬스터에 대항할 사냥꾼으로 평가받는 마법사가 오히려 몬스터 그리고 모든 것을 품은 모래시계문을 이용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온다면, 세상은 그 혼란을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있을 리가 없지.’

그 상황을 생각하던 이강우는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릇을 가득 채운 맛있는 요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평생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아픈 적은 없었는데…… 이러다가 위에 구멍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그 정도로 이강우가 한 생각은 섬뜩했고, 결정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마법을 이용한 테러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다.

당장 모래시계문을 세상에 뿌린 족속들이 위스프에 몇 가지 수작만 부리면, 위스프는 정말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공포를 뿌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위스프의 배후에 불사황제가 말한 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미 이강우가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 현재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끄응.’

이강우는 순간 속이 쓰려 오는 걸 느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강우는 꾹 참고, 억지로 요리를 입안에 넣었다.

‘무조건 먹어야 해.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꾸역꾸역, 이강우가 억지로 요리를 입에 넣고 곧바로 세 그릇째를 먹었다.

* * *

유적 입장 10일째.

숲 타입의 유적은 넓었다.

여기에 숲을 채우고 있는 나무들 중에 10미터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기둥나무들이 비율이 굉장히 높아, 숲은 넓은 건 물론 거대하게 느껴졌다.

포식자 팀은 이번 유적 사냥에서 무리를 하지 않았다. 탐색을 하되 무리를 하지 않았고, 몬스터의 개체 수를 줄이는 것에 중점을 뒀다.

동시에 다양한 시도를 했다.

“채유리, 다음 사냥에는 나랑 호흡을 맞춘다.”

“안중현 씨하고요?”

“하선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해보도록.”

“꼭 해야 하나요?”

“이강우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어떤 식으로 돌격대가 조합될지 모르니까.”

“그러면…… 알았어요.”

이번 유적 사냥을 기획하면서, 몇 가지 목적을 뒀다.

일단 유적에서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몬스터, 마나스톤, 마법 아티팩트. 얻는 모든 것이 이강우의 소유가 되는 이상, 최대한 많은 것을 수확하는 게 이득이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조직된 팀의 팀워크를 다지고자 했다.

4등급 유적 사냥 당시와는 멤버도 달랐고, 그때와는 상황도 여러모로 달랐다. 앞으로 유기적인 전투와 유적 사냥을 위해서는 새로이 호흡을 맞출 필요가 있었으니까.

때문에 팀 포식자의 활동은 유적 사냥이라기보다는 트레이닝에 가까웠다.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트레이닝을 하고, 이후 잡은 몬스터를 먹으면서 배를 채우고.

이 과정 속에서 유일하게 트레이닝에서 배제된 채 먹고 놀기만 하는 이가 있었다.

“오늘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김수애.

그녀는 그야말로 식도락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딱히 불만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비전투 인원이었고,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그녀가 나설 일이 없는 게 팀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던 채유리가 기어코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그렇게 먹기만 하다간 돼지가 되겠네.”

김수애가 먹는 것보다 곱절은 먹는 채유리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채유리의 말에 김수애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매일매일 배부르게 먹어본 경험은 처음이에요. 전 제가 내키는 음식이 아니면 죽어도 먹지 못하거든요. 때로는 너무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링겔을 맞는 경우도 있었죠.”

그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이강우는 김수애가 자신에게 좀 과한 호감과 집착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김수애에게 이강우는 단순히 맛있는 걸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걸 도와주는 의사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니까 전 이강우 씨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런 이유로 김수애가 이강우에게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선언을 했다. 이강우가 그런 그녀의 각오에 나름 각오로 대답했다.

“전 채유리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김수애 씨의 관심은 사양하겠습니다.”

더 이상 애매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이강우는 채유리를 버릴 생각도 없고, 그녀를 향한 마음을 부정할 생각도 없고, 이미 남들 앞에서 프러포즈도 했다.

이런 이강우의 대답에 채유리가 눈빛을 별빛처럼 반짝였다. 역시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어! 채유리가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직 안 했잖아요? 한번 해보죠 뭐.”

김수애는 조금도 물러섬 없이, 오히려 기세 좋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채유리는 이제 오기가 돋는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도 해보지 뭐.”

그 선전포고를 받아들였다. 나름 자신의 각오로 상황이 정리되리라 생각했던 이강우은 그냥 고개를 돌려 이 상황을 외면했다.

그 무렵.

주변에서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의 서슬 퍼런 신경전이란 최고의 광경을 뒤로 한 채 로봇을 이용한 탐색, 자기 역할에 충실하던 총꾼 한 명이 번쩍 손을 들었다.

좌중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 모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봇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발자국입니다.”

로봇이 찍은 사진에는 거대한 별 모양의 발자국이 있었다. 선명하기 그지없는 그 발자국을 보는 순간 안중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별 모양의 발자국…… 아무래도 이곳 주인은 성족공룡(星足恐龍)인 모양이군.”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강우였다.

‘성족공룡? 설마 기예르모 레시피에 나온 스타풋을 말하는 건가?’

이 순간 이강우의 눈빛이 빛났다.

‘와인보다 감미로운 피를 가진 그 스타풋?’

* * *

늦은 밤, 김지홍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흥.’

눈을 뜨자마자 그는 자신의 머리말에 있던 칼을 잡았다. 곧바로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칼집은 그대로 버렸다.

김지홍은 그 상태로 방 밖으로 나갔다.

널찍한 정원이,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수려한 외모를 가진 바위로 꾸며진 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김지홍은 그것들을 무시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무시했다. 대신 숨을 죽인 채 주변의 소음에 집중했다.

이윽고 김지홍이 오른손에 쥔 칼을 가볍게 머리 위로 들었다. 칼날에 반사된 달빛이 묘한 느낌을 풍겼다.

모두가 그 빛에 몽롱하게 취할 것만 같은 상황.

그 상황에서.

탕!

김지홍의 왼손이 총성을 토해냈다.

허리춤에 숨겨둔 총을 단숨에 뽑아 자신의 뒤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비수 김지홍이 칼을 든 순간, 등 뒤로 총을 쏜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효과는 확실했다. 김지홍의 총구가 겨눈 방향에서 아지랑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아지랑이는 곧바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김지홍은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주변에 집중했다.

그 순간.

“안녕하십니까?”

어눌한 한국어가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내 한 사내가 높은 담벼락을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김지홍이 최근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볼코프.”

위스프의 서열 3위 볼코프.

최근 한국에 테러 사건을 일으킨 주범으로 현상수배 중인 그가 김지홍의 눈앞에 있었다.

* * *

“성족공룡. 5등급 몬스터네.”

유적 입장 10일째, 5등급 몬스터의 흔적을 발견했다. 곧바로 긴급회의가 시작됐다.

“자세한 정보는 없네. 최초 발견 파티가 칠성문인데 칠성문은 이제까지 이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한국 정부에 공개한 적이 없네.”

“그런데 이름은 어떻게 아십니까?”

“칠성문에 아는 사람이 있네. 그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안줏거리 삼아서 등급과 이름 그리고 상징적인 특징을 말해줬네.”

안중현의 정보는 치즈 같은 정보였다. 구멍투성이였다.

만약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모두가 그 정보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안중현이기에 모두가 믿었다.

안중현은 스스로가 신뢰가 가지 않는 정보라고 생각되면 말하지 않는 자다. 신중한 그가 이런 정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건, 그 정보를 준 사람이 꽤 믿을 만한 자, 실력이 되는 자란 의미.

때문에 여기서 굳이 안중현이 받은 정보의 신뢰성과 신빙성, 정보 제공자를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포획 난이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들은 바는 없지만, 그때 정보를 준 이가 말하는 걸 보면 절대 쉽진 않을 걸세. 그 정보를 말해준 녀석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어렵다, 이 말이군요.”

나올 수 있는 정보는 다 나왔다.

이제는 추측을 할 때. 일단 주어진 정보를 중심으로 모두가 가설을 하나씩 뱉었다.

“성족은 발자국이 별 모양인 걸 뜻하겠고, 공룡이란 표현을 붙인 건 생김새가 백악기 시대 공룡과 비슷하기 때문이겠죠.”

“덩치는 크겠지만, 무식할 정도로 크진 않을 겁니다. 너무 컸다면 기둥나무 숲을 조용히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요.”

“혹은 은신 능력이 있거나.”

“멜트 드래곤 같이 특수한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죠.”

백지 위로 모두가 저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괴물 하나가 완성됐다.

그러나 그런 백지 위에 이강우가 그린 그림은 없었다. 채유리마저 나름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으며 서툴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려 넣는 와중에 이강우는 긴급회의가 시작된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그런 이강우의 조짐을 눈치챈 김수애가 제 팔꿈치로 이강우를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생각이 깊으시네요.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매혹적인 김수애의 목소리가 이강우의 귓가를 간질였다. 이강우는 그 목소리에 놀란 듯,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와인…….”

와인.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오자 김수애가 고개를 갸웃했고 이강우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먹은 요리 중에 와인과 곁들이면 좋은 요리가 있는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과 함께 이강우가 옅게 웃었다.

내뱉은 말과 이후 표정, 누가 보더라도 자기 본심을 밝히기 싫어서 장난기 어린 말로 대답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김수애는 그런 이강우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여러모로 마음에 드시는 분이군요. 조언을 하나 해드리자면 전 와인에는 정말 깐깐한 여자랍니다. 어지간한 와인으로는 절 만족시키실 수 없으실 거예요.”

이강우의 농을 농으로 받아친 김수애.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이강우가 스스로에게 쓴소리를 했다.

‘이강우, 정신 차려. 아무리 기예르모가 극찬을 했다고 해도, 지금은 사냥에 집중해야 할 때야.’

딴생각의 이유는 다름 아니라 기예르모 레시피 때문이었다.

기예르모 레시피 8권에 별 모양의 발자국을 가진 공룡, 스타풋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기예르모는 그 스타풋의 피에 대해서 최고의 극찬을 했다. 거기에 잠시 빠져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짓이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이강우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뒤, 이강우가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일단 물러납시다.”

이강우의 제안이 성족공룡에 대한 논의가 멈췄다. 모두가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는 그들에게 바로 이유를 설명해줬다.

“상상만으로 잡을 만한 몬스터가 아닙니다. 괜히 녀석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다 동선이 겹쳐서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보다는 그냥 일단 물러나는 게 우선입니다. 녀석과 멀어진 후에, 그때 가서 녀석이 어떤 놈인지 상상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명답이었다.

안중현은 이강우가 말을 하는 동안 다른 마법사들 그리고 총꾼들의 기색을 살폈다. 표정만 보더라도 그들의 심중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이강우의 말에 동조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는 없다.

솔직히 이강우의 말 그대로 정보가 없는 5등급 몬스터와는 전투 이전에 조우 자체가 부담스럽다.

피하는 게 상책.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우도 충분히 리더 자질이 있어.’

안중현은 옅게 웃었다. 사실 그는 이강우를 제치고 계속해서 포식자 팀의 지휘관이 될 생각이 없었다.

리더와 지휘관이 분리되는 건 그리 좋은 시스템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강우에게는 충분히 안중현이 가진 능력을 대신할 자격이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이강우가 지휘관이 되고, 안중현이 곁에서 그걸 보조하는 모양새다.

“그럼 새로운 베이스캠프를 확보해야겠군.”

안중현이 이강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쿡!

큼지막한 덩치,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약 12미터 남짓,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신장은 4미터 남짓한 거대 공룡이 땅바닥을 밟는 소리는 녀석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했다.

더불어 녀석이 남긴 발자국은 별 모양으로 귀여운 느낌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녀석의 외형을 본다면, 절대 귀엽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외형은 쥐라기 파크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로 일약 공룡 스타가 된 벨로시랩터와 비슷했다.

하지만 팔은 공룡과는 달랐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 두 팔로 바닥의 흙을 쥘 수 있을 정도로 길었고, 긴 팔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탄력이 넘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당한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 팔 끝에 달린 다섯 개의 손가락, 그 손가락 끝에 달린 매를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발톱에는 서슬 퍼런 예기가 듬뿍 담겨 있었다.

여기에 악어가죽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친 가죽은 주변의 자연환경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하는 위장 능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나름 구별할 수 있지만 멀리서는 쉽게 주변 환경에서 놈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위장 능력은 상당했다.

그런 거대한 녀석이 기둥처럼 솟아오른 기둥나무 사이를 비집고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치 그 움직임이 뱀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동체에 어울리지 않게, 녀석은 날랬다.

가장 압권은 입이었다. 두 입을 벌리는 순간 드러난 녀석의 이빨은 그야말로 톱니였다.

그것도 그냥 톱니가 아니라…….

“치열 한번 곱네.”

정밀한 시계장인이 만든 시계의 톱니바퀴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입을 다무는 순간 딱 맞아 떨어지는 톱니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틀니도 저 정도는 안 될 것 같은데. 여하튼 유적은 말도 안 되는 곳이라니까.”

성족공룡에 대한 영상을 본 김재범의 말에 안중현이 담담하게 응수했다.

“저 녀석에게 물리면 그런 고민을 할 여유는 없을 테니, 걱정 말게.”

“에이, 제 임무는 후방지원입니다. 전 대기표를 뽑는다면 7번쯤 됩니다.”

“그래도 일이 틀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그럼 그런 일이 없도록 아주 제대로 된 독을 만들어야겠군요. 기대하시지요. 저 거대한 놈을 개다래나무에 취한 고양이로 만들어드릴 테니까.”

그 둘의 대화 덕분에 긴장됐던 분위기가 풀렸다. 마법사도, 총꾼도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럼 이제 슬슬 녀석을 잡을 준비를 해야겠지.”

잡는다.

그 말에 다시금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팀 포식자가 5등급 유적에 입장한 지 30일째가 됐다. 그동안 포식자 팀은 61마리의 몬스터를 사냥했다. 이 거대한 숲속에서 살던 몬스터들 대부분을 사냥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거대한 공룡 한 마리와 자그마한 인간 열 명뿐!

최후의 결전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을 앞에 둔 상황에서 미소를 짓긴 힘들다. 누군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결전이 될 테니까.

또한 이번에는 출문 확보에 있어서 평소와는 다른 변수가 하나 더 생긴 상황이었다.

출문을 찾아내긴 했다.

문제는…….

“그보다 이 녀석, 출문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 확실하죠?”

성족공룡의 동선, 그 중심에 출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족공룡은 마치 출문을 호위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문을 지킨다…… 그냥 우연인가?”

이 부분이 포식자 팀의 새로운 고민이 됐다.

출문의 확보는 중요하다. 여차하면 출문을 통해 모두가 탈출을 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 출문을 몬스터가, 그것도 5등급 몬스터가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출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5등급 몬스터를 어떤 식으로든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말 지키는 게 맞긴 한 건가? 그냥 녀석의 영역에 출문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확실한 건 없다.

우연일 수도 있다.

그때 하선우가 처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뱉었다.

“우연은 아닙니다. 조사 및 연구 중인 내용이지만, 모래시계문 등급이 높아지면, 다른 몬스터를 주변으로 모읍니다. 우리가 들어간 4등급 모래시계문을 찾게 된 계기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상 행동을 보이는 꽃등도마뱀의 동선을 추적했을 때 4등급 모래시계문이 있었고, 그 주변에 다른 곳에서 등장한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죠.”

예전 일이다.

이강우가 즈믄나래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현실에 등장한 꽃등도마뱀을 잡기 위해 즈믄나래에 있던 마법사들이 출동했다.

그때 꽃등도마뱀은 기존 매뉴얼과 다른 이상 행동을 보였고, 그 이상행동의 원인을 파악하던 도중에 4등급 모래시계문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실을 하선우가 처음으로 밝혔다.

김재범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보를 왜 지금 말해?”

“여전히 조사 중인 내용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남에게 쉽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보 출처가 누구?”

“권재용 박사님입니다.”

“응? 아니, 권 박사님이 너한테는 알려준 걸 나한테는 안 알려 줬다고? 아니, 대체 왜? 내가 그분한테 잘못한 거 있나? 기생망고거북도 산 채로 잡아다 드렸는데?”

그때 이야기를 듣던 채유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메로나 사다 줘 봐. 메로나 좋아하셔.”

정말 뜬금없는 그 말에 김재범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 분위기가 거기서 갑자기 뚝 끊겼다. 채유리가 뱉은 메로나 주제를 받아칠 만한 화술을 가진 사람은 없었으니까.

한편 이야기를 듣던 이강우는 살짝 놀랐다.

‘모래시계문이 몬스터를 유혹한다고?’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무슨 소식이든 나왔다 하면, 비보네.’

그러나 기분 좋은 사실은 아니었다.

‘이거 골치 아파지겠어.’

모래시계문은 빠른 처리가 답이다.

클로즈를 할 수 없고, 부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면 바닷속에 빠뜨리거나 우주 밖으로 날려 보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등장해서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 걸 고작 예산으로 계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처리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

모래시계문이 몬스터를 끌어들인다는 건 결국 모래시계문 접근을 방해한다는 의미다.

‘계획적이군.’

왜 이런 상황이 나왔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모래시계문을 세상에 가지고 온 정체불명의 집단이 계획하고, 기획한 바일 테니까.

‘차근차근 계획했던 걸 실행시키고 있어.’

모래시계문이 등장했을 때,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마법이란 사탕을 줬다. 모래시계문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신비한 힘에 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신비한 힘에 취한 인류는 인사불성의 상황에 빠졌다.

방심과 무방비의 상태, 지금 세상인 이 상태에 접어들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을 계획한 놈들은 이 틈을 노리고, 인류에게, 세상에게 치명적인 한방을 제대로 꽂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을 터.

‘이게 전부가 아니겠지.’

더 큰 문제는 이 역시도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놈들은 용의주도하다. 아마 준비한 카드는 더 많을 터.

‘또 다른 노림수가 뭘까?’

이강우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씁쓸했지만 고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런 이강우의 눈이 우연히 안중현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이강우가 고민을 접었다.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으니…… 슬슬 준비해야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고민보다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가 왔으니까.

* * *

포식자 팀을 구성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신뢰도였다.

별거 아닌 이유, 고작 푼돈 따위에 넘어가 팀을 배신할 수 있는 자들, 그저 자기 안녕을 위해 멋대로 팀의 정보를 외부에 속절없이 유출할 수 있는 자들을 걸러내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 부분은 안중현보다 이강우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 주장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리볼버에게 받은 마법 아티팩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강우에게는 최강의 카드가 있다.

절망의 태양!

이름 그대로 몬스터들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최강의 권능이 있다. 정말 강력한 마법이다.

그래서 오히려 쉽사리 쓸 수 없다.

너무 강하니까, 대놓고 쓰면 의심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몰래몰래 쓸 수는 없다. 몰래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는 마법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강우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절망의 태양은 물론 바츠무의 손이란 특이한 마법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리, 유적에 입장하기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최악의 상황에서 쓸 마법입니다.”

안중현, 그를 통해 여건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얼마나 강력하지?”

“내 목숨을 구해 줬습니다.”

그 말에 안중현은 곧장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신기루호랑이.”

이강우는 신기루호랑이와 조우했으나 살아남았다. 심지어 신기루호랑이는 보이지 않았다.

필시 이강우가 무언가 재주를 보였다는 의미인데, 이강우의 부상과 당시의 긴급한 상황 때문에 그 재주에 대한 깊은 논의는 없었다.

그때 이강우가 쓴 재주를 지금 이강우가 말해주는 모양이다.

이강우는 안중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셨다시피 최후의 카드입니다. 동시에 이 마법은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이강우는 안중현에게 불사황제에 대한 것마저 말하는 게 어떨지, 그런 고민도 했다.

그 정도로 안중현을 향한 신뢰는 견고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중현마저 불사황제라는 괴물에게 발목이 잡힐 이유는 없으니까. 이강우를 노리는 적은 이강우만 노리면 된다.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한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제물은 나 하나면 충분하다.’

자신을 믿어 주는 안중현을 향한 이강우의 최소한의 배려였다.

“의중은 알겠네.”

안중현 역시 괜한 질문 따윈 하지 않았다.

안중현은 그 마법이 무슨 마법인지, 어떤 마법인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그저 원하는 바를 물었다.

“신호를 드리면, 저만 남기고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마법이 아닙니다.”

“신호는?”

“이 반지를 착용하겠습니다.”

이강우가 말과 함께 은으로 만든 듯한 제법 두꺼운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 반지를 본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한 격려나, 대답은 없었다. 그저 어깨를 두드리는 것, 그거면 둘 사이에서 대화는 충분했으니까.

* * *

“아이고…….”

김재범, 그는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솟아오른 기둥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 김재범의 등 뒤에는 위장색으로 뒤덮인 긴 팔 가진 거대한 공룡이 있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며 김재범을 쫓고 있었다.

쿡쿡!

김재범은 점차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가시처럼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 소름 끼치는 오한을 떨치려는 듯, 김재범은 속에 있는 공포를 토해내듯 외쳤다.

“내가 쥐라기 파크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김재범의 외침 그대로 지금 그와 성족공룡이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만약 이게 영화 속 장면이라면, 김재범의 배역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조연이라면 여기서 김재범은 자신의 죽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섬뜩하게 만들 것이고, 주연이라면 어떠한 식으로든 살아남을 터.

그러는 사이 김재범과 성족공룡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다. 약 50미터였던 둘 사이의 거리가 몇 초 만에 40미터, 10미터 이상 좁혀진 듯했다. 헤이스트 마법을 이용해 날다람쥐처럼 기둥나무 숲을 이동하는 김재범의 속도보다 성족공룡의 발놀림이 더 빠르다는 증거였다. 몇 분…… 아니, 몇 초 후면 성족공룡이 휘두르는 팔이 김재범의 몸뚱이를 가뿐하게 후려칠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가 지척이 될 게 분명했다.

김재범은 이를 콱 물었다.

‘저 덩치로 저렇게 움직이는 건 반칙 아닌가?’

이제는 더 이상 외침으로 불만을 토로할 여유도 없다. 이미 위기감은 가득했고, 김재범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자신의 오른 주먹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 부근을 퍽! 때렸다.

그러자 콰직!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그것을 시작으로 김재범은 자신의 왼쪽 어깨와 가슴, 배, 팔과 허벅지를 연달아 쳤다. 긴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수작.

그러나 그런 김재범의 수작은 정말 곧바로 김재범을 노리던 성족공룡에게 통했다.

당장에라도 김재범을 추월해버릴 기세였던 성족공룡이 김재범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 벌렸다.

갑작스러운 감속.

김재범이 멀어지는 성족공룡의 존재감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독을 품은 사냥감은 섣불리 먹을 수 없지.’

김재범.

독술사라 불리는 그는 별명 그대로 독을 제대로 쓸 줄 안다.

그럼 독의 가치는 무엇일까? 다양하다. 사냥을 할 때 독의 효용성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자연에는 사냥을 하는 포식자들만이 독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포식자의 사냥감이 되는 약한 것들도 독을 품고 있다. 독은 공격의 수단이자, 방어의 수단이기도 하다.

김재범은 그런 자연의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독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안다는 의미다.

지금 그 수법을 썼다. 그가 부순 건 독이 든 병이었고, 흘러나온 독은 김재범의 움직임과 함께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성족공룡의 감각을 자극했다.

성족공룡, 놈은 당연히 느낀다. 자신이 쫓는 게 쉽사리 먹을 수 없는 놈이라는 사실을. 독을 품은 사냥감을 보면 마땅히 보이는 반응이다.

그렇게 녀석이 멈칫거리는 사이, 김재범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어지는 순간.

푹푹!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특수 페인트 탄이 성족공룡의 몸뚱이 위에 뚜렷한 흔적을 만들었다. 성족공룡이 제 피부를 두드리는 이 기괴한 감촉에 기어코 발을 멈췄다.

‘오케이!’

녀석이 멈추는 순간 김재범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성족공룡은 김재범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쫓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 모양. 독을 품은 먹잇감을 굳이 더 멀리 쫓으면서까지 먹고 싶진 않았을 터.

이내 녀석의 몸이 주변 숲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녀석의 몸에 붙은 페인트 탄이 녀석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성족공룡이 의미 없어진 위장색을 품은 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을 때.

크르르!

녀석의 눈동자가 다시 칼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또 다른 사냥감의 존재를 파악한 것이다. 성족공룡은 망설이지 않았다. 별 모양의 족적을 남기며 녀석은 다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놈을 물어뜯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 녀석을 기다리고 있던 건.

‘어서 와라.’

안중현이었다.

김재범이 시간을 끌고, 총꾼이 성족공룡의 몸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만드는 동안 안중현은 무대를 만들었다.

안중현은 정면을 바라봤다. 정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위장색을 품은 성족공룡이 기둥나무 사이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특수 페인트가 아니었다면 아마 육안으로 쉽사리 녀석을 찾아내지 못했을 터.

물론 특수 페인트가 보이는 이상, 안중현은 성족공룡의 위치를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안중현이 오른손을 뻗었다.

‘시작.’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탁!

손가락을 튕기며 불지뢰를 터뜨렸다.

쾅!

굉음과 함께 성족공룡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성족공룡은 그 불기둥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잽싸게 옆으로 몸을 뺐다. 안중현을 향해 곧게, 직선으로 오던 녀석이 포물선을 그리며, 마치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슬라이더라는 변화구처럼 동선을 바꿔서 접근했다.

녀석의 발걸음은 여전히 빨랐다.

하지만.

쾅!

안중현의 반응과 조준은 더 빨랐다.

무엇보다 안중현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5서클이 되니, 정말 편하군.’

다섯 개의 마나 서클이 내뿜는 마력의 양은 4서클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3서클 마법인 불지뢰는 예전에 불똥 마법을 쓸 때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넘치는 여유.

물론 그 여유만으로 성족공룡을 자력으로 상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을 많이 쓸 수 있다고 해도 3서클 마법은 3서클 마법. 성족공룡에게는 그저 맨발로 가다가 레고 블록 하나를 밟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고통도 있고 짜증도 있지만 죽을 일은 없다. 오히려 화를 돋우는 격이다.

그리고 화가 난 맹수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불덩이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크왕!

거친 울음도 아끼지 않는다.

푹푹!

내지른 울음 사이로 거대한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발소리를 감춘 성족공룡이 안중현을 향해 달렸다. 전차처럼 달렸다. 지뢰가 터지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안중현이 그런 놈의 각오에 내놓은 응수는.

탁!

불지뢰였다. 대신 앞선 것과는 다르게 폭약의 도움을 받은 불지뢰였다.

콰과광!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그 불기둥을 먹어 치울 기세로 폭발이 터졌다.

김재범이 나름 목숨 걸고 해놓은 시간 벌이 속에서 안중현이 덩그러니 등장했을 리 없다. 곳곳에 폭약을 숨겨두었다. 자신의 마법이 더 위력적으로 변할 수 있도록.

효과는 확실했다.

폭발력은 물론 폭발과 함께 일어나는 불길의 위력,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기둥나무까지!

펼쳐진 불지옥 속에 갇혀버린 성족공룡,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불길을 헤치고 등장했다. 녀석은 불이 붙은 몸뚱이 그대로, 안중현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콰릉!

곧바로 두 번째 폭음이 들렸다.

첫 번째 폭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일어난 폭음은 세 번째 폭음으로 이어졌다. 소리가 겹쳤다.

하지만 그런 폭음 속에서도.

크왕!

성족공룡의 울음은 묻히지 않았다.

쩌렁쩌렁, 울음이 얼마나 컸는지 울음이 닿은 곳의 불길이 꺼질 정도였다.

녀석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녀석은 이제 정말 곧게, 이렇다 할 수작이나 페인트를 보이지 않은 채 안중현을 향해 달렸다. 안중현도 움직였다. 제자리에서 녀석과 육탄전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때 성족공룡의 머리 위로.

꽈릉!

푸른 벼락이 떨어졌다.

청뢰!

이게 진짜 노림수였다.

불지뢰와 폭약의 조합은 분명 위력적이다. 성족공룡의 몸에 충분히 대미지를 줄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치명상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5등급 몬스터 정도 되면 몸이 치즈처럼 구멍이 나도 살아남을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런 녀석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5서클 마법, 그것도 5서클 마법 중에 강한 마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채유리의 청뢰가 제격이다.

물론 청뢰에는 단점이 있다. 유도 기능 같은 게 없다는 것.

표적에 알아서 맞춰야 한다. 표적이 잽싸게 움직이고 있으면, 맞추기 힘들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다. 적당한 위치에 성족공룡이 멈춰 있을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유도했다.

안중현은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직감했다.

‘됐다.’

폭약을 이용한 공격으로 성족공룡의 몸에 최소한의 균열이 생겼을 것이고, 청뢰는 그 균열을 파고들어 처참한 결과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5등급 몬스터라고 해도 이 공격에 죽진 않을지언정 멀쩡한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물론 확인사살을 하기 전까지 안심하긴 이르다. 놈이 날뛸 가능성, 마지막 발악을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안중현은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

순식간에 성족공룡이 안중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안중현의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말도 안…….’

……돼!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안중현과의 거리를 좁힌 성족공룡이 팔을 휘둘렀다.

쉬이익!

녀석이 휘두른 오른팔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이 안중현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그나마 방심을 하지 않은 채, 거리를 벌리기 위해 움직인 덕분에 팔이 잘린 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냥 넋 놓고 상황을 지켜만 봤다면 몸뚱이가 잘렸을 터.

‘큭!’

그렇게 팔이 잘린 안중현의 몸이 휘청거렸다. 팔을 잃었는데, 균형이 잡힐 리 만무. 안중현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린 동선이 아니라,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삐뚤어진 동선을 그렸다.

이윽고 안중현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크와와와왕!

그 광경을 본 성족공룡이 호기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잡았다!

놈은 그리 외치고 있었다.

그런 놈의 온몸에서는 피가 뿜어졌고, 뿜어진 피는 녀석의 새로운 살과 가죽이 되었다.

안중현이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콱 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회복능력…….’

몰랐다.

단순한 재생능력이 아닌, 자신의 피를 이용한 폭발적인 회복능력. 설마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 도리도 없었다.

‘염두에 두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래도 이번 무리를 지휘하는 안중현이라면 이 상황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넣었어야 했다. 아니, 그 찰나의 순간 더욱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어야 했다.

작은 틈.

정말 어떻게 보면 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것이 안중현에게 위기를 가져왔다.

물론 그 위기를 그냥 지켜볼 동료는 없었다.

펑!

갑자기 바람이 폭발했다.

폭발한 바람은 자욱한 먼지구름을 동반했고 동시에 지독한 악취 역시 품고 있었으며 끼이, 끼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잡음 역시 잔뜩 섞여 있었다.

-구조대 움직인다.

4서클 마법, 귀신바람.

살상력은 없다.

하지만 대상의 귀와 코와 눈을 방해하는 마법이다.

유용성은 쓰기 나름. 지금 같은 순간에서는 그 어떤 공격마법보다 효용 가치가 넘쳐난다.

마법을 쓴 건 당연히 하선우. 애초에 그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크르르!

귀신바람에 휘말린 성족공룡이 헤맸다. 헤매는 시간은 몇 초, 채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녀석이 쓰러진 안중현을 확실하게 삼키기 위해 안중현이 있었던 자리에 왔을 때 안중현은 더 이상 없었다.

이미 그는 채유리의 등에 업힌 채 멀어지고 있었고, 성족공룡은 귀신바람 너머에서 움직이는 채유리의 숨소리와 발소리, 안중현의 피비린내를 느낄 수가 없었다.

크와와와왕!

성족공룡이 분노 가득 찬 울음을 토해냈다. 그 울음이 자욱한 귀신바람을 흔들었지만 귀신바람은 다시금 성족공룡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보며 하선우가 자리를 벗어났다.

* * *

“깨끗하게 잘려나간 덕분이에요. 공룡에게 감사하세요.”

출혈로 인한 빈혈로 약간 정신이 없는 안중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던 자신의 왼팔을, 이제는 착 달라붙은 그 팔을 바라보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수가.’

미식가…… 아니, 신의 손 김수애.

마법청마저 그녀를 회유하기 위해 6서클 마법사인 명궁과 비수 이상의 대우를 약속했었다. 그런 그녀의 실력을 의심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직접 보니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안중현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힘들지만, 뻣뻣하지만, 잘려나갔던 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김수애가 그걸 보며 말했다.

“제대로 감각이 돌아오기까지는 6시간, 예전처럼 젓가락질을 하기까지는 72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놀랄 노릇이군.”

팔이 잘려나갔는데, 젓가락질을 하기까지 3일. 마법사들조차 믿기 힘든 마법 같은 일이다.

희소식이다.

하지만 당장 의미가 있는 소식은 아니었다. 팔을 쓸 수 없는 안중현은 리타이어다. 그는 더 이상 전투에 돌입할 수 없다. 지휘관이 전장에서 사라졌으니, 공략을 새로이 해야 한다.

‘실수.’

결정적으로 이런 상황이 그 누구도 아닌 안중현의 방심으로 생겼다는 게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안중현은 그 가슴 아픔을 참아내며, 방법을 강구했다.

후회와 탄식은 일이 다 끝나고 무덤에서 하거나, 쫑파티 때 하면 된다. 여기서 할 필요는 없다.

‘녀석의 피는 녀석을 치료한다.’

성족공룡의 피가 녀석의 상처를 놀라운 속도로 회복시킨다. 특별하지만, 허점은 있다.

피는 무한하지 않다는 것.

즉, 녀석에게 거듭된 대미지를 주면 되는 거다.

‘장기전.’

단기전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펼쳤는데, 그 작전을 뒤집고 이제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상황을 짜야 한다는 의미다. 안중현이 빈혈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사이 김수애는 이어폰에 집중했다. 귓속에 들어있는 초소형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반지를 낀다는데, 무슨 의미죠?”

그녀가 이어폰을 통해 들은 내용을 전달했다. 그 순간 안중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전부 후퇴. 그렇게 전하도록.”

* * *

이강우는 마지막 카드였다.

성족공룡을 상대하는 채유리와 안중현의 합공이 부족할 경우, 그들의 전투에 이강우가 합류하는 게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전투의 모든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당연히 안중현이 당하는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

긴박한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안중현을 구해줘야 하는 순간. 하지만 이강우는 나서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말없이 따라주는 전우인데, 그런 전우의 위기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는다면, 그 먹먹함에 몸이 달아오르지 않는다면 감히 전우라는 표현을 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 건, 마지막 카드였기 때문이다. 시계는 모든 톱니바퀴가 제 역할을 해야 돌아간다. 갑자기 톱니바퀴 하나가 급하게 돌아간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무시한다면 그 시계는 고장이 나는 것이다.

‘지휘.’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강우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결정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부터 지휘관인 안중현이 당한 이상, 이강우가 지휘관이 된다. 그런 만큼 이강우는 더더욱, 감정이 아닌 현실에 충실했다. 이강우는 지금 이 순간 안중현이 느낄 고통보다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도주.’

일단 계획이 망가졌다. 성족공룡의 회복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피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다. 물러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 일단 이게 정석이다.

‘혹은 강공.’

반대로 맞불을 놓을 수도 있다. 안중현이 전력에서 빠졌지만 나머지 전력은 유효하다. 또한 일단 녀석의 회복에는 한계가 있다. 조금 전 폭약과 청뢰 공격이 준 대미지는 무시할 수 없다. 회복은 했지만, 물통으로 따지면 가득 찼던 물통이 제법 비었을 터. 그 물통의 물이 다시 차기 전에 오히려 더 거세게 공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이강우가 있다.

‘절망의 태양이면 된다.’

절망의 태양은 대상의 마력과 피를 빨아들인다.

천적.

지금 이 상황에서 절망의 태양과 성족공룡의 능력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쓰면, 이야기는 끝이다. 더 이상의 게임을 논할 필요가 없다. 피해도 없다. 리스크도 없다. 누군가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고, 곤란함을 겪을 이유도 없고, 피곤함을 느낄 이유도 없다.

필요한 건 이강우의 결단뿐.

여기서 절망의 태양을 쓰면, 들킬 가능성이 높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들키지 않더라도, 이강우가 혼자 힘으로 성족공룡을 잡으면 모두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의구심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단지 그 의구심이 이강우를 향한 비수가 될지, 아니면 오히려 의구심을 뛰어넘어 이강우가 가진 능력이 팀원들에게 견고한 신뢰를 줄지, 그것을 이제까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을 뿐.

‘이들은 믿을 만하다.’

여기서 이강우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한 달 동안 유적 사냥을 하면서, 서로의 볼꼴, 못 볼꼴을 다 봤다. 마법사들 그리고 총꾼들, 동지애를 느낄 정도로 긴밀하게 지냈다. 필요하다면 서로를 위해 서로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런 그들에게 오롯한 진실을 공개할 수 없어도, 그들이 이강우가 가진 강함을 무서워할 일은 없다.

분명하다.

그들은 이강우의 강력함에 겁을 먹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그 사실을 좋아할 것이다.

강력한 힘은 때때로 동경의 대상이 되며, 동경하는 이와 기대는 이를 포로로 만드는 법이니까.

‘움직인다.’

이강우가 결단을 내렸다.

* * *

안중현의 후퇴 명령에 모두는 이렇다 할 반문 없이 곧바로 정해진 도주 루트를 따라 이동했다.

배치되어 있던 총꾼들이 추적을 방해하기 위해, 냄새를 지우고 족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을 했고 하선우가 귀신바람을 곳곳에서 터뜨리며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도망친 이들은 곧장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않고 정해진 포인트에 모였다. 베이스캠프로 곧장 향할 경우 베이스캠프 위치를 들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김재범과 하선우가 같은 포인트에 모였다. 먼저 와 있던 김재범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고생이 많다. 고생이 많아.”

비웃음을 지은 채 해주는 격려가 퍽 기분 좋게 들리진 않았지만, 하선우는 그 격려를 격려로 받아들였다. 이제까지 김재범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격려를 해주는 것 자체가 기겁할 이야기이니까. 나름 둘 사이도 예전보다는 나아진 상황이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서로 말싸움보다는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아졌다.

“글쎄, 후퇴했으니 다시 짜야지. 어차피 녀석은 출문을 중심으로 활동영역을 구축했으니까. 공성을 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되겠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엔 없을 듯한데. 결국 그냥 힘 대 힘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힘 대 힘…….”

“그보다 우리 대장은? 대장도 같이 후퇴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포인트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그때 이어폰을 통해 채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거기 있어?

-C포인트에 없습니다.

곧장 C포인트로 이동한 총꾼들이 대답했다.

“응?”

B포인트에 위치한 김재범과 하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채유리는 안중현을 데리고 김수애가 있는 A포인트로 이동했고, 그들은 B포인트에 있는데, C포인트에 있는 총꾼들이 이강우가 없다고 말했다.

그럼?

“여기 B포인트에도 대장 없는데?”

말을 뱉은 김재범이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그들에게 안중현이 말을 전달했다.

-대장이 혼자 성족공룡을 상대한다. 지원은 필요 없다.

“뭐?”

* * *

이강우가 절망의 태양을 만들었다. 절망의 태양을 만드는 순간 이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탐욕.

그거였다.

마치 불사황제가 이강우를 처음 봤을 때, 그때의 눈빛이 이강우의 눈알에 박혀 있었다.

물론 이강우는 이 사실을 몰랐다. 제 눈빛을 볼 수 있는 동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 이거야. 이 힘이면 뭐든 가능해.’

묘한 느낌이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 이제까지 여러 고뇌와 고민, 역경으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 가득했던 이강우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마치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강우의 눈빛이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이 됐다. 그 눈빛을 한 이강우가 선택한 공격 방법은 도축용 칼을 드는 것이었다.

쓸 수 있는 공격 방법은 많다. 이강우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서클의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열 가지를 넘는다. 바츠무의 손도 있다.

그런데도 이강우가 위험을 감수하고 칼을 쥔 이유.

칼을 쓰는 것에 대한 자신감만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감 이상, 도륙을 통한 쾌락을 느끼기 위함이다.

반면 성족공룡은 이 상황이 짜증 나는 수준을 넘어서 당혹감마저 느꼈다.

크르르!

거듭된 난쟁이들의 도발로 신경이 곤두섰는데, 난쟁이 한 놈이 자신을 향해 보잘것없는 수준의 어금니를 내밀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터.

물론 녀석의 당혹감은 짧았다. 성족공룡은 당혹감에 취하는 괴물이 아니었다. 당혹감보다는 분노와 본능에 충실한 놈이었다. 녀석은 분노했고, 본능은 이강우를 씹으라고 말했다.

크왕!

호통에 가까운 울음과 함께 성족공룡이 이강우를 향해 달렸다.

녀석은 거칠 게 없었다. 눈앞의 난쟁이가 꺼내 든 작은 어금니 따위는 몸에 박혀봤자, 자신의 가죽을 제대로 뚫지도 못할 것이다. 혹여 뚫는다 하더라도 그의 핏물은 단숨에 상처를 회복시켜줄 터.

자신은 무적이다. 죽지 않는다. 불사의 짐승이다. 그 자신감 앞에 망설임이 있다면 그건 망설임이 아니라, 그냥 겁쟁이의 증거일 뿐이다.

성족공룡의 호통 앞에서 이강우는 겁먹지 않았다. 드래곤 피어 앞에서도 버텼던 이강우 아닌가?

오히려 지금 이강우에게 그 호통은.

‘소리 좋군.’

종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의 축제를 알리는 종소리. 기분 좋은 종소리다.

그렇게 각기 다른 감정을 품은 두 맹수의 거리는 단숨에 지척이 됐고, 지척이 되는 순간 성족공룡이 긴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달리던 이강우가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춰 그 팔을 피했다. 이강우의 숙인 등 위로 채찍이 지나갔다.

후우웅!

바람도 지나갔다. 이강우의 몸이 휘청거렸지만, 이강우는 그 휘청거림마저 염두에 둔 발걸음을 내디뎠다.

낙엽이 물살을 타듯, 이강우가 바람을 타며 유유자적, 흐르는 물과 같은 동선을 그리며 성족공룡의 발치에 도달했다. 이강우가 녀석의 오른 다리를 타고 등을 타고 올라갔다.

그걸 가만두고 볼 성족공룡이 아니다.

휘이이익!

성족공룡이 제 자리에서 몸을 크게 회전시켰고, 동시에 자신의 몸뚱이를 접었다. 성족공룡은 자신의 꼬리를 제 입으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등 위에서의 로데오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

하지만 이강우도 로데오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른 다리를 타고 등 위로 올라간 다음 왼쪽 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사이 상처를 만들었다. 쥐고 있는 30센티미터 길이의 기다란 직각 삼각형 모양의 칼이 푹 박힐 정도의 상처. 성족공룡의 몸 크기를 고려하면 치명적이진 않지만 가죽을 잘라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깊이의 상처가 만들어졌다. 핏물이 흘러나왔다.

화아아!

피비린내가 풍겼다.

화사하게 풍겼다.

‘아!’

그 화사함은 일순간 이강우를 취하게 만들었다.

‘끝내주는군.’

성족공룡의 피에서 나는 향은 황홀했다. 설명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화사했으나, 과하진 않았다. 상큼함 속에서는 진한 농후함마저 품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고, 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배 속이 이 긴박한 순간 허기를 느낄 정도, 매력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 앞에서 최고급 등심 스테이크를 구워줄 때의 향기 같은 느낌. 군침이 도는 수준을 넘어, 자신이 누리게 될 맛에 미리 이성마저 잊어버리게 하는 수준.

마시고 싶다. 이 향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고 싶다.

하지만 이강우는 유혹을 참아냈다.

바닥에 착지한 이강우는 단숨에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린 채 기다란 몸뚱이를 스프링처럼 밀어내는 성족공룡의 공격을 피했다. 투우를 하듯, 성족공룡의 머리통이 이강우의 왼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절망의 태양이 제 역할을 했다.

핏물이, 마력이 절망의 태양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강우의 머리 크기였던 절망의 태양은 순식간에 이강우의 몸통 크기로 몸을 살찌웠다. 커진 절망의 태양은 더욱 빨리, 더욱 많은 것을 흡수했다.

크르르!

성족공룡의 눈빛이 달라졌다.

녀석이 절망의 태양을 바라봤다. 자신의 힘과 피를 빨아들이는 알 수 없는 구체를 바라보며 녀석은 제대로 된 당혹감을 느꼈다.

그때.

파직!

성족공룡의 두 눈동자를 향해 두 개의 번개 다트가 꽂혔다.

크와앙!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성족공룡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라이트닝 다트다. 라이트닝 다트가 성족공룡의 두 눈을 잠시 동안 멀게 했고,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이강우는 무어라 말했다.

“붉은 뿌리.”

당연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강우가 잠시 경직됐다.

‘내가 무슨 소리를…….’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묘한 전율 속에서 이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성족공룡이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강우는 긴급하게 몸을 옆으로 날렸다.

이강우가 있던 자리로 성족공룡의 입이 지나갔고, 이강우는 바닥에 구르면서 착지를 했다. 곧바로 성족공룡이 고개를 돌려 이강우를 바라봤고, 이강우가 자세를 고쳤다.

‘정신 집중.’

뭔가 있었다. 뭔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이강우가 다시금 전투에 돌입했다.

그 이후 결과는 뻔했다.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채, 오히려 상처를 통해 거듭해서 피와 마력을 빨리는 성족공룡은 약해졌고, 힘을 잃고 느려진 녀석의 몸뚱이는 이강우의 마력검 앞에서 의미 없이 썰렸다. 두꺼운 가죽도 의미가 없었다.

이강우는 산 채로 성족공룡의 몸뚱이를 도축했다. 온몸을 걸레처럼 난도질했고, 어느새 거대해진 절망의 태양이 열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열기 앞에서 성족공룡이 절규를 내뱉었다.

크오오오!

단말마였다.

* * *

모든 게 정리됐다.

아홉 명의 사람들의 눈앞에는 걸레처럼 온몸이 너덜너덜한 거대한 성족공룡을 바라봤다.

그 후에 바닥을 구른 듯 약간의 먼지만 뒤집어쓴 이강우를 바라봤다.

감탄사를 내뱉는 자는 없었다. 의구심을 품는 자도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혼자 잡은 건가?’

‘저놈을?’

‘5등급 몬스터를?’

대단하다, 라는 느낌뿐.

그런 그들에게 이강우가 말했다.

“사냥이 끝났으니, 이제 정리합시다.”

담담한 그 모습에는 위엄이 넘쳤다. 이 순간 아홉 명은 영화 속 혹은 소설 속 장면을 떠올렸다.

위대한 무언가를 경험한 자들이, 밑도 끝도 없이 그 무언가를 향해 충성을 바치던 장면.

숭고한 듯 보면서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

그런데 지금 그 영화 속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람이라면…….’

위기와 공포, 위험이 넘치는 유적의 세계에서, 신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자가 눈앞에 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의문을 제기할 필요도 없다.

그저 따르면 된다. 이자를 따르면, 몬스터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예! 정리합시다, 정리해! 그래서 오늘 메뉴는 뭡니까?”

김재범, 바로 그였다.

그렇게 그들은 이강우의 포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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