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미식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5등급 유적 사냥을 앞두고 즈믄나래에 스카우트 됐을 때였네. 즈믄나래 길드와 본격적인 계약을 위해 즈믄나래 본부를 찾았는데, 거기서 그녀를 스쳐 지나가듯 봤지.”
“기억력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을 기억하는 거 쉽지 않은데.”
“내 기억력이 좋다기보다는 아마 자네도 그녀를 한번 만나 보면 이름은 잊어도 얼굴은 잊지 않을 걸세.”
“예?”
“직접 보면 알게 될 걸세.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때는 그냥 얼굴만 기억했고, 궁금해서 그녀의 정체를 물어봤지.”
“정체가 뭐였습니까?”
“한국 최고의 의법사. 치료 마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야말로 신의 손을 가진 여인.”
“아…….”
“하지만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그때 이후로 공식적으로 은퇴를 했지. 때문에 그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녀의 실력은 비공식적으로만 인정받았으니까. 어쨌거나 워낙 인상적인 사람이라서 은퇴 이유를 물어봤지.”
“이유가 뭡니까?”
“그녀는 어마어마한 미식가였지만, 그녀의 그 혀를 만족시켜줄 마법사가 없었거든. 때문에 마법사 세계에 굳이 더 이상 있을 필요성이 없다면서 은퇴를 했지.”
“특이하군요.”
“그래서 더더욱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미식가란 별명으로 부르고 있지.”
“공식적인 닉네임이 아닙니까?”
“일단은 공식적인 경력이 없다시피 하니까. 유적 사냥 경력은 단 한 번도 없네. 그저 자기 능력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줬을 뿐. 어쨌거나 그런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손이란 별명으로 부르지.”
“그런데 그런 사람을 제가 섭외한다는 게 가능합니까? 은퇴까지 했다면서요?”
“지금 한국에서 자네 말고 은퇴한 그녀를 현역에 복귀시킬 만한 사람은 없다고 보네. 물론 그게 내가 그녀를 추천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세. 지금 중요한 건 실력보다 신뢰이니까. 그녀가 자네의 비밀 혹은 행보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가능성, 다른 누군가에게 회유되어서 자네를 배신할 가능성. 이게 중요하지. 이 가능성을 논하자면, 가능성은 낮네.”
“정확한 근거가 있습니까?”
“일단 그녀는 돈에 회유되지 않네. 그 증거로 5등급 유적 클로즈 프로젝트 당시 마법청과 즈믄나래, 두 집단이 그녀에게 보장해줬던 클로즈 보수가 1천억 원 정도였네.”
“4등급 유적 클로즈하는데 100억 원 받은 저하고 너무 차이가 나는군요.”
“그럴 가치가 있었지. 그녀는 다리가…… 그러니까 여기, 허벅지가 잘려나간 사람을 그 자리에서 고친 후에 6시간 만에 걸을 수 있게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녀가 유적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아마 한국은 최소 3번 이상의 4등급 유적 클로즈를 마쳤을 걸세. 더 나아가 저번 4등급 유적 사냥에서 도망치듯 나올 필요도 없었겠지. 팔다리 잘릴 각오를 하고 덤벼들 수 있을 테니까. 자네가 도중에 리타이어 될 일도 없었을 테고.”
“딱히 팔다리 잘려나가면서까지 싸우고 싶진 않습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중에서 최고 대우를 제안받았음에도 거절했네.”
“대우 때문은 아니겠군요.”
“멤버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게 이유네. 그녀는 유적에서 자기 입맛을 만족시켜줄 사람을 넣어달라고 했지만, 그 당시에 실전에서 그녀가 요구하는 수준의 도축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천 노인이 거의 유일했지. 문제는 천 노인은 마법사가 아니었고, 요리 실력은 별로였지. 물론 시간은 있었고,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서 즈믄나래도 급하게 그녀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지. 즈믄나래가 몬스터 고기 유통을 하게 된 것도 그게 계기였네.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구한 정보들을 그냥 놔두는 게 아까웠으니까.”
“전화위복이네요. 요즘은 연예인들이 몬스터 고기 먹는 걸 훈장으로 여기는 시대이니까요.”
“글쎄…… 그게 전화위복일지 아니면 세기말 풍경일지…… 우리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우습지만 몬스터 고기를 즐긴다는 게 그리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되진 않네.”
“동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녀는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억만금을 줘도 움직이지 않네.”
“돈에 회유되지 않는다.”
“그렇지. 동시에 그녀는 원하는 목적이 뚜렷하네.”
“미식.”
“정답. 미식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괴상할 정도야. 어쨌거나 자네 이름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면, 교섭 무대를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배신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그녀가 누군가에게 회유될 가능성이 없진 않네. 하지만 그녀가 회유된다면 아마도 미식에 관련된 것이어야겠고, 자네가 그녀의 혀를 만족시켜주면, 배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네. 확신은 금물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완벽한 건 없는 법이지. 저울질을 해보게. 그녀를 포섭해서 얻을 수 있는 메리트. 소수정예로 움직인다면 더더욱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네.”
“알겠습니다. 자리, 마련해주십시오.”
* * *
차를 운전하던 이강우의 온몸이 들썩였다. 비포장도로에 접어든 자동차가 신나게 위아래, 위아래, 춤을 췄다. 이강우는 자신의 시선이 들썩일 때마다 쯧쯧, 혀를 찼다.
‘이 차 뽑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젠장.’
페라리.
이강우가 4등급 유적 사냥에 들어가기 전 주문한 차량이었다. 5억 원이 넘는 차량으로, 4등급 유적 사냥이 끝내면, 무사히 살아 돌아오면 스스로에게 주기로 한 축하 선물 같은 놈이었다.
지금 그 축하 선물의 뱃가죽이 비포장도로 덕분에 아주 제대로 엉망이 되고 있었다. 운전하고 있는 이강우의 엉덩이가 아니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니, 돈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서울 강남에 번듯한 펜트하우스나, 강북에 전원주택에서 살면 안 되나? 왜 이런 시골에서 사는 거지?’
이강우가 이를 살짝 갈았다.
하지만 그런 이강우의 푸념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이강우는 비포장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광경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맙소사.’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텃밭이었다. 크진 않지만, 어지간한 작물은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텃밭 너머에는 유리온실도 보였다. 크기 역시 작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작물은 전부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과 소가 이강우를 반겼다. 양과 소가 있는 반대편 산자락에는 닭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멋지군.’
팔기 위해 키우는 것들이 아니었다. 본인이 먹기 위해서, 최고의 것을 스스로 만들어 먹기 위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식가다운 모습이다.
‘이거…….’
하지만 감탄이 어렸던 이강우의 표정은 이내 구겨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프겠어.’
미식가도 종류가 많다. 맛있는 음식, 그 자체를 즐기는 부류가 있고 맛있는 게 아니면 안 먹는 부류가 있다.
대충 느낌이 이번에 만나게 될 미식가 김수애, 그녀는 후자다.
‘상대하기 까다롭겠는데?’
맛 앞에서 까다로운 인간은 정말 장난 아니다. 심지어 맛이란 건 결국 개인의 취향이다. 답이 없다. 시험처럼 몇 점 이상 맞아라, 이런 게 아니다.
‘좀 더 준비했어야 했나?’
솔직히 말해서 이강우의 요리 실력은 보통 사람치고는 대단한 거지, 전문적인 요리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때문에 이강우는 이 정도 스케일의 텃밭을 소유한 미식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젠장.’
분명한 건 이강우에게 미식가의 능력은 꼭 필요했다.
이강우는 봤다. 그녀가 사람을 치료하는 영상을. 놀라웠다. 이강우도 마법사지만, 그 마법은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강우의 편이 되어준다면, 단순히 유적 사냥만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해보는 거다.
‘밑져야 본전.’
이윽고 이강우가 빌어먹을 비포장도로를 지난 후에 목적지인 전원주택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이강우가 전원주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 사이의 철문 앞에 섰다. 철문에 설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연락드린 이강우입니다.”
짧은 자기소개.
삐익!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고, 이강우가 전원주택을 향해 움직였다. 2층짜리 전원주택은 사람 한 명이 지내기에는 꽤 컸다. 그 전원주택의 문이 열리면서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강우는 그 순간 안중현의 말을,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잊기 힘들겠네.’
완벽한 몸매,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긴 흑발의 미인이 이강우 앞에 있었다.
“반가워요.”
“예, 반갑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지금 안에 아무도 없어서 드릴 건 없지만.”
안에 아무도 없다는 말, 이강우가 그 말에 잠시 설레는 스스로를 향해 소리쳤다.
‘임자 있는 새끼가 이러면 안 되지. 이강우, 정신 차려. 채유리가 이걸 봤으면 널 죽였을 거야.’
일편단심.
이강우가 그 단어를 곱씹으며 미식가 김수애를 따라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어?’
묘한 향기가, 계피향 비슷한 향기가 이강우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러나 평범한 계피향이 아니었다. 들이마시는 순간.
[1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마력이 오른다는 것.
유적에서 나온 거다.
“쇠뿔사슴사향?”
“잘 아시네요. 역시 소문대로 식견이 상당하시군요.”
쇠뿔사슴.
7등급 몬스터로 예쁘장한 이름과는 다르게 정말 무시무시한 몬스터다. 몸길이 3미터의 단단한 뿔을 가진 쇠뿔사슴은 수십 미터 거리를 총알처럼 단숨에 좁히는 무시무시한 각력을 가지고 있다. 그 각력에서 내지르는 쇠뿔 공격은 사람을 그냥 뚫어버린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총알사슴이다.
또 다른 특이사항은 독특한 육질이다.
“쇠뿔사슴, 먹어보신 적 있나요?”
“쇠뿔사슴의 다리 살은…… 근육의 섬유질이 면처럼 탱탱하죠. 피를 제대로 빼낸 뒤에 적당한 숙성을 거친 뒤 다리 살을 결에 따라 길게 찢은 후에 면 요리처럼 여러 요리에 넣어 먹으면 식감과 맛이 환상적이죠.”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진짜 진미는 내장이죠. 쇠뿔사슴의 간을 삶으면 푸딩처럼 변하는데, 그 식감과 단맛은 꽤 인상적이죠.”
그 순간 김수애가 갑작스레 이강우를 덥석 안았다. 풍만한 가슴 때문에 이강우가 튕겨 나가려는 걸 제 팔로 막듯이. 이강우는 기겁했다. 예전에 벽두꺼비에게 잡혔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김수애가 기쁨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렸어요!”
들뜬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그러나 이강우에게는 그런 목소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것 좀…….”
“정말 이제야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네요.”
“좀 놓고 이야기합시다.”
“혹시 결혼하셨나요?”
이 순간 이강우는 직감했다.
‘미치신 분이다. 좀 많이.’
이강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 * *
“합의가 잘 됐다니, 다행이군.”
이강우와 통화를 하던 안중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본인이 추천하긴 했지만, 안중현도 사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강우는 단숨에 미식가의 입맛을 훔친 모양이다.
-저기,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응? 무슨 문제?”
-아니, 그러니까 감정적인 문제랄까…….
“통화로 설명 가능한 문제인가?”
-통화로는 힘들 듯합니다.
“그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그녀가 합류한다면, 다시 모두 모여 팀워크를 다질 필요가 있을 테니까.”
-아.
짧은 탄식.
안중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이번 합의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중현이 어떤 억측을 통해 이강우에게 조언을 하는 건 위험하다.
상황 파악이 우선.
“문제가 제법 심각한 모양이군. 그럼 만남 일정은 좀 더 빨리 잡도록 하지. 김재범과 하선우에게는 내가 연락을 할 테니, 자네는 미식가와 함께 채유리를 데리고 약속 장소로 오게.”
-아.
재차 탄식이 터졌고, 안중현은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이강우가 대답을 했고, 통화는 그것으로 종료됐다. 안중현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큰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 * *
모든 일에는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안중현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함께할 동료들의 첫 모임을 최대한 훌륭하게 성사시키고 싶었다. 제법 큰돈을 들여 유명 레스토랑 하나를 전세 냈고, 요리사를 고용했다. 한 끼 식삿값이 상당했지만, 안중현은 돈에는 의미를 두지 않았다. 돈이 아까울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모임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약속된 시간 10분 전까지 유효했다.
10분 전까지만.
‘이강우, 확실히 사람을 유혹하는 재주는 있어. 여러모로. 좋든, 안 좋든.’
그리고 지금 안중현은 자신의 기대를 알아서 고이 접어 머릿속 한구석으로 던졌다.
처음부터 느낌이 싸했다. 이강우의 팔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정말 매력적인 여인이 매미처럼 달려 있고, 그런 이강우의 뒤에서 채유리가 정말 섬뜩한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는 걸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 이후에도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마련된 널찍한 테이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어도 무방할 그 자리에 두 여인은 이강우 가까이 앉았다. 손을 뻗으면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에서 이강우를 놓고 신경전이 시작됐다.
식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싸했다. 채유리는 애피타이저가 나오자 본격적으로 예법을 지키며 먹었다. 이제까지 우악스럽게 먹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우아하게 먹었다.
나름 여자다움을 어필하려는 모양.
한편 새롭게 합류한 미식가 김수애는 자신 앞에 놓인 요리를 이강우 앞에 가져다 놓으며 더 먹으라는 말을 건넸다. 이 순간 채유리와 김수애 사이에서 스쳐 지나간 기류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이에 낀 이강우의 표정은 4등급 몬스터, 신기루호랑이와 싸웠을 때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요리 메뉴가 나올 때마다 그 분위기는 심각해졌고, 메인 디시인 양고기 스테이크가 나올 무렵에는 보다 못한 김재범이 한마디 했다.
“요리는 끝내주는데 지금 광경을 보고 먹기는 좀 그러네. 다음 메뉴로 팝콘 좀 안 나오려나? 치즈 가루 잔뜩 뿌려서 콜라랑 같이 나오면 끝내주겠는데?”
나름 분위기 반전을 위해 김재범이 작정하고 말을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악은 오늘 요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인이 나왔을 무렵이었다. 정말 고가의 와인을 준비해왔다. 그런데 그 와인이 나오는 순간, 와인 마개를 여는 순간, 김수애가 한마디 했다.
“죄송하지만, 이 와인 관리가 잘못됐네요. 맛이 변했을 텐데, 그냥 치워주세요. 어차피 전 맛볼 생각도 없었지만. 그보다 와인 고르는 솜씨가 별로네요. 이 와인이면 16년산보다는 17년산이 여러모로 곱절이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을 텐데.”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상황이었고, 와인을 가져온 요리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죄송합니다. 새로운 와인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때 채유리가 와인을 가져가는 요리사를 잡았다.
“병째로 줘요.”
말과 함께 요리사로부터 와인을 병째로 뺏다시피 한 채유리가 와인 잔 안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와인이 찰랑거리다 넘치기 직전까지. 그 후에 맥주 마시듯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이제까지 나름 예의를 지키던 채유리가 망나니로 변했다. 괜한 가면 쓴 채 애매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김수애는 그런 채유리의 모습에 눈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자 김재범이나 하선우, 안중현은 긴장했다.
일단 김수애의 능력이 어떤지는 몰라도, 채유리의 능력은 확실하다. 마법 한 방이면 이곳, 음식점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3명밖에 없는 6서클 마법사이니까.
결국 이강우가 나섰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이강우가 입을 열었다.
“경쟁은 인정하지만 상쟁은 인정 안 합니다. 심기가 어떻든 여기서는 꾹 삼키십시오, 안 그러면 국물도 없을 겁니다.”
국물도 없다.
우스꽝스러운 협박이었지만, 채유리와 김수애에게는 여러 의미로 바로 통할 법한 확실한 협박이었다. 그 둘이 이강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이 순간 이강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여난(女難)이라니.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오는군.’
김수애는 처음부터 이강우에게 호감을 보여줬다. 이강우 입장에서 기겁할 만큼의 호감.
어쨌거나 그녀는 이강우의 제안을 곧바로 수용했다. 오히려 이런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이, 김수애가 더 적극적이었다.
이후 그녀는 약속 장소를 모르겠다면서 이강우에게 에스코트를 요청했고, 채유리를 옆자리에 태우고 있던 이강우는 그녀도 태웠다. 그때부터 이 광경이 시작됐다.
물론 이강우도 바보가 아닌 이상 확실하게 말했다. 채유리와 연인이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김수애는 여전히 이강우를 향해 지금과 같은 관심과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채유리와 신경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이 둘을 유적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게 폭탄을 안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잘 터뜨리면 상대편을 몰살시키겠지만, 제멋대로 터지면 아군을 몰살시키는 폭탄.
‘여하튼 내가 하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애물이 생기는군.’
안중현 말대로 화합을 위해, 단호한 결의를 위해 마련한 이 모임이 별 소용이 없게 된 상황.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이대로 자리를 망치고, 다음을 기약하는 건 의미가 없다.
“식사가 끝나가니,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강우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제 목적은 유적을 독식하는 겁니다.”
독식.
실상 그 어떤 마법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마법사들이 몰래 크루를 통해 유적에서 얻은 것들을 먹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것도 독식이라면 독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래, 별로 관심을 받지 않는 것들, 굳이 표현하면 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먹는 것일 뿐이다.
“마법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서, 그들이 마련해 놓은 밥상을 우리들만이 독식할 겁니다.”
그러나 이강우의 팀은 다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치 사냥에 성공한 맹수가 고고하게 사냥감을 독식하듯, 그렇게 먹는 거다.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모든 마법사들, 특히 길드 소속 마법사들은 마법청의 관리와 감시 아래에서 유적을 사냥했다. 배급을 받듯 모래시계문을 배정받고, 배정받은 모래시계문만을 식사 거리로 삼았다.
그 굴레를 이강우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부순 셈이다. 특별함을 부여하자면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다.
“유적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겁니다. 몬스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렇기에 이강우는 작정할 생각이었다.
전부 먹어 치울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몬스터든 뭐든 유적에서 먹을 가치가 있는 것들은 전부 먹는 거다.
보통 마법사가 했다면 허튼소리.
그러나 이강우가 했기에 모두가 그 말에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이것으로 이강우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숨기는 것 없이, 원하는 바를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다음으로 넘어갈 때다.
“하지만 모두가 저와 같은 뜻을 가지진 않았을 겁니다.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툭툭.
이강우가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협상 테이블입니다.”
원하는 바를 말해라.
이 연출이 안중현과 이강우가 합의 하에 기획한 연출이었다. 어렴풋했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끈끈하게 만들기 위한 연출. 김수애의 등장으로 기획했던 장면이 연출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준비한 기획대로 계속 이야기는 진행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런 이강우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김재범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유적에서 나오는 모든 독은 내 소관이야. 동시에 유적 내에서 독에 대한 연구 시간 보장. 이 두 가지만 해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지. 세계 최고의 독술사를 부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김재범은 이강우의 포부가 마음에 들었다. 이강우 팀에서는 그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강우를 따라가면 유적에서 가지고 나오는 독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을 터. 유적 사냥을 마치자마자 온몸을 수색받고, 연구용으로 채집한 샘플마저 검열을 거친 후에야 연구 자료로 소량만 쓸 수 있는 빌어먹을 상황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김재범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 하선우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야 지은 죄가 있으니 묵묵히 따르겠습니다. 그 이상 말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군요.”
하선우는 이강우에게 진 빚이 있다. 큰 빚이 있다. 그런 만큼, 그는 이번에는 이강우의 말에 군말 없이 따를 생각이었다.
물론 속내는 달랐다.
‘이강우는 역사를 만드는 자다.’
이제까지 이강우가 기존의 선두 주자들을 따라오는 과정이었지만, 이제는 이강우가 선두 주자가 되어 게임을 이끌어가는 트렌드 메이커가 될 것이다. 이런 이강우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하선우는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룩할 수 있을 터.
이강우가 싫다고 해도 그에게 붙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는데, 이 제안을, 이강우의 독식에 참가할 수 있는 이 제안을 거절할 리 없다.
그다음 곧바로 입을 연 건 김수애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물조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그녀는 이강우를 바라보며, 이강우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눈빛을, 정말 보물을 바라보는 눈빛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눈빛을 품은 채 말했다.
“저는 이런 날을 꿈꿨어요. 마법 아티팩트 따위를 위해서 유적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식도락을 위해 유적으로 들어가는 나날들을. 그동안 그 누구도 유적이 가지는 미식적 가치를 모른 채 마법 아티팩트와 맛도 없는 마나스톤에만 의미를 뒀죠. 물론 만약 이 파티가 제 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그때는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애인을 이상한 것들로부터 지키려고. 그게 내가 유적에 들어가는 이유야.”
채유리가 섬뜩한 눈빛을 지은 채 이유를 말했다.
마지막 남은 건 안중현. 모두가 안중현을 바라봤다.
“은혜를 갚는다. 내 이유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군.”
어떤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이유다. 이것으로 여기에 있는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알았고, 납득을 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다음 유적 사냥은 3월 15일, 목표는 5등급 모래시계문입니다. 모이는 장소는 문 관리센터입니다.”
팀 포식자가 움직이는 것, 그것뿐이다.
* * *
“팀 포식자. 멋진 팀 이름이군.”
보고서 내용을 읽던 강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되도록 팀 즈믄나래란 이름을 써줬으면 했지만…… 더 이상 길드란 목줄을 차고 싶지 않다, 이 말이군.’
이강우가 팀을 만들었다.
팀 이름은 이강우의 닉네임을 딴 포식자. 이강우가 원하는 대로 본인의 이름을 브랜드화시킨 셈이다.
목표는 5등급 모래시계문. 마법청은 5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을 한 상태이며, 유적에서 가지고 나오는 모든 것은 이강우의 소유를 인정해줬다.
‘안대욱, 그가 이강우를 손에 쥐고 싶어 하는군.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환기할 몇 안 되는 카드이니까.’
그런 강희의 생각을 멈추게 한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는 순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정말로 그의 그릇인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르쿠스.
미국 마법위원회 위원장이며, 클로즈 라이센스 시험진행위원회의 일원이자, 유엔 휘하 마법부 부장을 맡고 있는 세계 마법계의 강력한 권력자다.
그런 그가 대뜸 전화를 걸어 그릇을 운운했다.
그러나 강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의 대적자가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릇이 분명하네.”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을 해줬다.
-그렇다면 제거를 하는 게 정답 아닌가?
이어지는 질문에 강희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렇게 눈에 거슬렸으면 자네가 먼저 진즉에 제거를 하지 그랬나? 기회는 확실했을 텐데? 왜 자네는 그를 의심하면서 제거하지 않았지?”
-이용가치가 충분하니까.
“생각이 통했군.”
-하지만 이바노프의 생각은 다른 듯하군. 그는 그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강희는 실소를 지었다.
“우리들 중에 대적자를 상대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었나?”
-이바노프는 이강우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높지.
“대적자의 그릇을 부순다…… 독단으로 벌일 만큼 쉬운 일이 아닐 터.”
-하지만 이바노프에게는 충분한 무기가 있지. 대적자를 비롯해 방해꾼을 무찌르기 위한 무기가. 이런 날을 위해서 만든 무기가 다수 있지.
“훌륭한 무기들이지.”
-이바노프를 막을 셈인가?
그 질문에 강희는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굳이 그를 막을 필요가 있나?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보다 가치 있는 재료가 될 터고, 죽는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을 터. 하지만 쉽진 않겠지. 우리를 먹어 치우기 위해 불사를 택한 자, 그가 자신의 그릇이 망가지는 걸 지켜만 보진 않을 터.”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수화기를 틀고 있었으나, 서로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침묵은 조금 길었다. 10초 이상.
그 침묵을 깬 건 마르쿠스였다.
-계획은?
“순조롭게.”
-수확은?
“문제없이.”
-해충은?
“제거.”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마르쿠스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강희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입술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미소, 조금도 사람답지 않은 비릿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