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2.22
크로포드의 1년 일정은 빠듯하다.
유적 사냥은 물론, 높으신 분들과의 만남에, 주요 이벤트에 귀빈으로 얼굴도 비추고, 공동 연구 및 개인 연구까지.
크로포드의 1년 일정표를 본 사람은 그가 게으르다는 측근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치부한다.
어쨌거나 이런 빠듯한 나날 속에서 크로포드가 유일하게 꿀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오직 하나, 개인 연구 시간밖에 없었다.
지금 크로포드가 그 개인 연구 시간을 꿀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연구실, 그 연구실에 마련된 사무용 의자에 시체처럼 걸려있는 크로프드의 입과 코에서는 새근새근, 숨소리만 흘러나왔다.
정말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깨우는 게 미안해질 정도.
하지만.
“이강우가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 크로포드의 꿀맛 같은 잠을 누군가 깨웠다. 크로포드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끄응…….”
크로포드는 눈을 뜨자 보이는 흐릿한 영상, 콜먼의 모습을 보며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크로포드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도 썩 밝지 못했다.
“콜먼, 이강우가 떠났다는 소식 때문에 꼭 내 꿀맛 같은 단잠을 깨워야겠어?”
크로포드가 기어코 한소리 했다. 콜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콜먼의 모습에 크로포드는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보통 놈은 아니지. 대단한 놈이긴 하지. 적어도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단 말이야.”
말과 함께 크로포드는 이강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괴물.’
조금 전에는 이강우를 정말 별거 아닌 듯 말했지만 크로포드의 머릿속에 있는 이강우는 괴물…… 그것도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를 거부하는 어마어마한 괴물이었다.
‘그걸 소화하다니.’
이강우의 재능이 자신 이상이라는 건 이미 엘릭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강우가 보여준 그릇의 크기는 크로포드를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아니야.’
너무 대단해서, 그릇의 크기가 인간의 범주를 가뿐하게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서, 그래서 이강우가 정말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제는 마냥 이강우의 재능에, 그릇의 크기에 기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금 크로포드는 이강우를 의심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런 그릇이 존재하는 거지?’
크로포드는 과학자답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학자 크로포드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강우의 그릇은…… 단순히 감탄하기보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게 걱정 어린 표정을 짓기 시작한 크로포드에게 콜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
아무래도 콜먼이 크로포드의 꿀잠을 깨운 이유는 이강우 소식 때문이 아닌 모양이다.
“누가 보낸 건데?”
“괴식가가 보냈습니다.”
여기서 크로포드는 눈빛을 바꿨다. 콜먼이 자신의 꿀잠을 깨울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괴식가? 그 양반이 나한테 왜? 설마 내가 가진 기예르모 레시피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콜먼은 대답 대신 편지를 건네줬고, 편지 내용물을 본 크로포드는 일단 눈살부터 찌푸렸다.
“이 인간은 여전히 악필이네. 글자가 아니라, 암호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크로포드는 그 자리에서 이렇다 할 해석도 필요 없이 기예르모의 편지를 술술 읽었다. 기예르모 레시피를 번역하면서 기예르모의 크로포드는 그의 필체를 읽을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물론 크로포드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흠…….”
그렇게 편지 내용 전부를 읽은 크로포드는 편지를 찢었다. 찢은 후에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크로포드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일렁거렸고, 편지는 재가 됐다. 크로포드는 그 재를 휴지통 안에 툭툭 털어 넣었다.
“여하튼 세상은 날 한시도 쉬게 만들지 않는다니까.”
아무래도 편지의 내용이 보통 내용이 아닌 모양이다.
“콜먼, 안드레이 장군에게 연락해.”
“알겠습니다.”
* * *
2022년 구정은 1월 31일 월요일부터 2월 2일 수요일까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설날이다. 달력을 만든 사람이 옆에 있다면 뽀뽀라고 해주고 싶을 정도로 멋진 위치 선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설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이강우에게 이번 설날은 그리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지 않았다.
‘아, 벌써 두 시간 째…….’
전기 프라이팬 앞에서 두 시간 내내 전을 부쳤다.
그렇게 부친 전을 차곡차곡 쌓으니 산이 됐다. 전을 파는 가게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5서클 마법사가 되고 처음 하는 중노동이 설마 전 부치기가 될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어휴!”
짧게 한숨을 내뱉은 이강우가 고개를 돌려 여동생을 바라봤다. 거대한 스테인리스 대야를 가득 채운 잡채를 비닐장갑을 낀 양손으로 열심히 섞는 여동생의 표정도 이강우만큼이나 안 좋았다.
‘진짜 우리 엄마 손 큰 건 변하지 않았구나.’
예전에는 이런 광경이 정말 보고 싶었다.
정말 못 먹을 정도로, 남에게 주기 위해 푸짐한 요리를 만들던 광경을, 명절 때마다 당연하게 보던 광경을 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다. 그 광경만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런 광경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게 되니, 그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르기보다는 한숨이 나왔다.
‘이거 만들어도 다 못 먹을 텐데, 좀 싸서 유리나 가져다줘야지.’
그때 이강우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응?’
이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발신자 이름을 보는 순간 이강우가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동생이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도 여동생을 바라봤다.
여동생이 눈빛으로 말했다.
요리하다 말고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강우는 그런 여동생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길드 전화야, 길드 마스터. 보스 전화라고.”
그 말에 여동생은 자신의 표독스러운 눈빛을 죽였다. 높으신 분 전화라는데 받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날에 전화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그녀가 짧게 푸념을 내뱉었고, 이강우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몸 한 번 푸는구나!’
드디어 전 부치기에서 해방된 이강우는 가볍게 몸을 푼 후에 전화기를 받았다.
-설날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미안합니다. 가족하고 오붓하고 보내고 계실 텐데, 정말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안부 전화를 하실 리는 없으실 테고.”
-일단 좋은 소식부터 말해드리겠습니다. 이강우 씨의 제안, 마법청이 정식으로 수용하겠다고 대답을 줬습니다.
이강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이강우의 브랜드 계획!
그 계획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한국의 마법청에 제안을 했다. 한국 내 모래시계문을 자유롭게 사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본래는 이강우가 직접 마법청과 교섭을 하려고 했지만, 미국에서 일이 길어지면서 즈믄나래에 위임을 했다.
‘그런데 진짜 해줬네?’
그래서 사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즈믄나래 입장에서도 이강우가 혼자서 날뛰는 걸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을 테니, 마법청과 즈믄나래 길드 입장에서는 굳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이강우를 다룰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이룰 게 분명했으니까.
당연히 이강우는 자신이 제시한 기준에서 꽤 뒤로 물러난 조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원안 그대로 통과를 했다?
-이강우 씨가 원하는 대로 한국 내의 모든 모래시계문에 대한 사냥권을 마법청이 보장 및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강우 씨가 제시한 조건 역시 그대로 수용됐습니다. 마법 아티팩트는 한국 정부에 기증하고 우선 소유권을 받는 형태이며, 마나스톤의 경우에는 마력 회복 포션 및 마나 서클 자극 비약 제작에만 쓰일 수 있고, 생산된 제품은 국내에서만 유통할 수 있다는 내용의 조건. 혹시 이 내용 중에 틀린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확합니다.”
더군다나 이강우의 제안은 의외로 강했다.
마법 아티팩트를 한국 정부에 기증한다고 하지만, 그 대가로 우선 소유권, 즉 사용 지분을 받는다는 건 그냥 본인이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기 임대이니까.
여기에 마나스톤은 아예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사용 조건이 붙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일이다. 어떤 마법사도 얻지 못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하면 유적에서 얻은 소득은 전부 이강우의 것이지만, 그 자격증만 내세우면 한국 정부의 협조를 받을 수 없었을 터.
그런데 그게 전부 통과됐다.
파격이다.
‘일단 내가 미쳐 날뛰는 꼴이 어떤지 보고는 싶다는 건가?’
이강우가 제법 제대로 된 준비를 했다는 걸 마법청이 인지하고, 마법청도 크게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을 먼저 들려주신다면, 안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데, 맞습니까?”
이강우는 이 좋은 소식에 마냥 기뻐하지 않은 채, 조금 전 강희가 한 말의 숨은 뜻을 찾아냈다.
-맞습니다.
역시나!
단순히 좋은 소식이기만 한다면, 굳이 명절 휴일에 이렇게 전화를 걸 이유가 없다. 명절이 끝나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내용 아닌가?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소집령.
이강우가 그 단어를 머릿속으로 검색했다. 의외로 검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긴급 사태에 마법청 권한으로 마법사들을 강제로 소집하는 그 소집령 말씀하시는 겁니까?”
-잘 아시는군요.
“그건…….”
-말씀하신 그대로 긴급 사태에서 이루어지는 소집입니다.
소집령이 떨어지는 경우는 제법 많다. 특히 몬스터가 현실에 출몰했을 경우 소집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런 종류의 소집령이 절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적어도 몬스터를 때려잡기 위해 소집령으로 이강우를 불렀을 리는 없다.
“언제까지 가면 됩니까?”
-2월 2일까지 마법청으로 오면 됩니다.
심지어 설날이 끝난 후도 아니고, 설날 연휴 마지막 날 모이라니? 보통 사안이 아니다. 정말 급한 상황이란 의미다.
“마법청도 공무원인데, 안 쉰답니까?”
-그만큼 이번 사안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자세한 건 저도 들은 바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아닌 즈믄나래 길드의 길드 마스터에게도 중요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보안 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였다.
이강우가 표정을 구겼다.
‘이번에는 또 뭐가 날 괴롭힐지, 이제는 기대마저 되는군.’
아무래도 2022년도 쉽게 지나갈 것 같진 않았다.
* * *
이강우가 마법청 청사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안중현이 그를 발견했다.
“잘됐군.”
안중현은 이강우를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말을 꺼냈다.
“자네가 말했던 역사…… 자료로 정리했네.”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강우가 살짝 놀랐다.
‘무슨 역사…… 아!’
그제야 이강우는 자신이 병실에서 안중현을 상대로 했던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이강우가 좀 더 놀란 표정으로 안중현을 바라봤다.
‘난 필요 없다고 했는데 준비를 했다고?’
그때 이강우는 분명 굳이 안중현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를 위해서 나름 열심히 조사를 하고, 자료를 정리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안중현의 자료 정리, 보고서 작성 솜씨는 즈믄나래는 물론 한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작심하고 정리를 했다면, 책으로 내도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쉬는 동안 소일거리를 했을 뿐이네. 괜히 마음에 둘 필요는 없네. 그리고…… 생각보다 나한테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고.”
의미가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때 안중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안중현의 눈이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걸어가는 두 명의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이강우도 안중현을 따라 두 사내를 바라봤다.
‘저런 걸 입고 다니는 인간이 있구나.’
어지간한 얼굴과 몸매가 아니면 쉽사리 소화하기 힘든 바바리코트를 당연하다는 듯이 입고 다니는 둘.
당연히 이강우는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 둘을 본 안중현의 표정이 굳는 걸 보면, 그는 그 둘의 정체를 아는 모양.
“아시는 분들입니까?”
“애기살 길드의 5서클 듀오네.”
“애기살 길드면…… 일류 길드 아닙니까?”
애기살 길드는 즈믄나래 길드와 비슷한 일류 길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 중 한 곳.
그런 길드 관계자가 이곳에 온다?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중현의 표정이 쉽사리 풀리지 않는 걸 보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안중현이 이유를 말해줬다.
“애기살 길드는 몬스터보다 마법사를 더 잘 잡는 길드야. 그런 애기살 길드가 소집령 대상이란 건…….”
거기까지였다.
안중현은 그 이상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강우는 금방 안중현의 의중을, 그가 굳이 내뱉지 않은 말이 무슨 말인지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이강우의 표정도 곧바로 굳었다.
* * *
열세 명.
적지 않은 마법사가 모인 50평 남짓한 회의실 내의 분위기는 묵직하기 그지없었다. 저마다 한가락 있는 이들이 모여 있으니, 기 싸움이 아니더라도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 당연한 일.
이강우는 종이컵을 가득 채운 싸구려 코코아를 홀짝이며, 그런 분위기 속의 마법사들 면면을 살폈다.
‘다 모르는 얼굴이네.’
개중에 이강우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기억을 뒤집으면 뭔가 나오겠지만, 그 정도라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강우가 얼굴을 아는 마법사보다 모르는 마법사가 훨씬 더 많다. 이강우는 마법사가 된 지 그렇게 오래된 케이스도 아닐뿐더러, 마법사가 된 후에 다른 마법사들과 인맥을 다질만한 기회가 많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행사 같은 곳에 참석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곳에서 이강우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긴급한 사안인 만큼 그래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대단한 마법사를 불렀는데, 내가 아는 얼굴이 없다니…… 심지어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한 멤버도 없잖아?’
공무원들이 연휴를 반납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 모인 이들도 나름 분위기는 대단하다.
그런데 이강우가 모른다는 건, 애초에 그들이 이강우가 활동하는 것과 다른 세계에서 활동한다는 의미이니까.
‘애기살 길드…….’
이강우가 슬그머니 안중현을 바라봤다. 그가 했던 말이, 그가 보여준 반응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안중현은 여기 모인 이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런 이강우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안중현은 이강우와 다르게 여기 모인 이들 중 대부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잡을 모양이군.’
사람을 잡는다.
섬뜩한 소리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들으면, 오해를 받기에 딱 좋은 표현이다.
‘꽤 거물이 들어온 모양이군. 이 정도 멤버를 소집한 걸 보면. 어마어마한 테러리스트라도 들어온 건가?’
하지만 마법사들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몬스터 사냥보다 중요한 일이다.
클로즈에 실패한 모래시계문, 그로 인한 몬스터 출몰 피해가 적은 건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도심 지역이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몬스터 출몰로 인한 피해는 굉장히 줄어들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인구가 밀집되지 않은 산간 지역 같은 곳에서 문제가 생기고는 했다.
문제는 마법사가 저지르는 범죄.
마법사가 목적을 가지고 범죄를 저지르면, 그 파급력과 피해는 상당하다. 당장 서울 강남에 있는 빌딩이 마법사의 마법에 의해 붕괴하게 된다면? 피해도 피해지만, 그게 목적을 가진 테러라면 파급은 확실하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공포에 잠들 테니까.
그리고 이런 마법사 범죄, 특히 충동범죄가 아니라 테러와 같은 계획범죄는 늘어나는 추세다.
그나마 한국은 이런 마법사 관련 테러 사건이 적은 편이었다. 적은 정도가 아니라, 2016년 이후 한국은 마법 테러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이 굵직한 사건 때문에 한 차례 홍역을 치른 것과는 대조적이다.
운이 좋은 것도 이유지만, 그만큼 마법청이 나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
‘그런데 왜 이런 자리에 나와 이강우를?’
하지만 이강우와 안중현이 이 자리에 참석하는 건 이상한 이야기다.
안중현과 이강우는 몬스터 사냥의 전문가다. 마법 테러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다.
그런데 그런 그 둘이 그냥 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설날 연휴 도중에 갑자기 소집이 됐다? 꿩 대신 닭이라도 구하고 싶어서? 하지만 이강우와 안중현이 이쪽 일에서 꿩 대신 닭이라고 보기도 뭐하다.
‘느낌이 안 좋아.’
안중현이 표정을 구겼다.
그때 새로운 인물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새로 등장한 인물을 향했다.
새로 등장한 인물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모두를 향해 곧바로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훤하게 벗겨진 그의 정수리를 정말 확실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사내가 다시 허리를 펴는 순간 사내를 보고 실소를 짓거나, 웃음을 참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술한 머리털과는 다르게 눈빛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으니까. 이강우 역시 그 눈빛을 보고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군인 출신인가? 기세가 보통이 아니네?’
풍기는 분위기가 날카롭다. 여기에 그냥 날카로운 게 아니라 각이 분명하게 잡혀 있다. 분명 일반 공무원은 아니다.
안중현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채경웅 반장.’
그는 등장한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마법 테러 사건이군.’
채경웅.
마법청에 소속된 마법테러대책반 반장이다. 마법사들이 공적인 이유로 가장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왔으니, 이 자리의 목적은 분명해졌다.
“마법테러대책반 소속 채경웅 반장이라고 합니다. 귀한 휴일에도 이렇게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강우도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왜 이 자리가 마련됐는지.
동시에 이강우는 더 짙은 의문을 가졌다.
‘아니, 그럼 나보고 테러리스트를 잡으라는 건가? 그래서 여기에 부른 거야?’
마법 테러를 막는 건 국가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강우를 불러서는 안 된다. 이강우가 낄 만한 자리가 아니니까. 이강우 본인이 자원을 해도, 마법청이 막아야 하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깽판을 부릴 순 없지.’
그러나 이강우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것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이강우에게 하등 도움되지 않는 일이니까.
그러는 사이 채경웅 반장이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실내등이 꺼졌고, 채경웅 반장의 등 뒤로 영상이 출력됐다. 영상에 뜬 건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모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긴 다리와 키를 가진 탐스러운 흑발의 여인이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를 입은 채로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모습이었다.
“이름은 전혜수. 직업은 브로커입니다. 아마 그녀의 명함을 받으신 분이 이 중에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혜수.
브로커인 그녀의 역할은 다름 아니라 국내의 마법사에게 해외 취업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한국 국적 마법사를 일본이나, 중국 등으로 유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법청 입장에서는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그녀를 제재할 수단은 없었다. 그런 브로커를 제재하기 위해 마법사의 이민은 물론 해외 출국마저 막는 건 오히려 악수가 될 테니까.
“그녀가 일주일 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을 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브로커 역시 범죄자는 아니다. 만약 그녀가 범죄자였다면, 이런 자리를 마련할 필요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잡혔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입국하자마자 정보를 풀었습니다. 자신에게 마나 서클을 개방할 수 있는 비약이 있으니, 자신을 통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마나 서클을 가지고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그러니 관심이 있으면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고.”
그 설명과 함께 채경웅 반장은 그 누구도 아닌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도 불만 어린 표정을 지우며, 자세를 고쳤다.
이강우가 여기 불릴 만한 근거 하나가 추가됐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브로커 전혜수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을 떡밥으로 던졌다.
그런 만큼, 그쪽에 있어서는 완벽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강우의 조언이 분명 필요할 터. 하지만 단순히 조언만 필요했다면, 통화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더 있다.
이강우가 불린 이유가 더.
“그리고 엊그제 그녀에게 한 사내가 접근했습니다.”
그 순간 사진이 바뀌었다.
짙은 구레나룻과 눈썹을 가진 선 굵은 미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백영광. 현재 우리 대책반의 감시 대상 최고 레벨에 위치한 사내로 위스프 소속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위스프!
그 단어가 나오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까지는 이강우와 비슷하게, 고작 브로커가 내뱉은 헛소문 때문에 설날 연휴 도중에 자신들을 이렇게 부르다니? 너무 우리를 핫바지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라는 표정은 사라지고 대신에 굉장히 진지한 표정을, 일부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숨 막히네.’
위스프란 단어의 등장에 이강우도 본격적으로 긴장했다.
‘진짜 테러집단이잖아?’
위스프.
마법사들로 구성된 테러리스트 집단이다. 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이 집단의 목적은 세계열강들의 아프리카 수탈을 막는 것이다. 당연히 테러 대상은 세계열강들.
실제로 이미 2018년을 시작으로 매년 최소 1차례 이상 굵직한 테러를 일으켰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각각 테러의 대상이 됐고,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일어난 8.23호텔테러 사건은 무려 7백 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그 사건을 기점으로 위스프는 마법 테러를 대표하는 조직이 됐다.
그런 그곳의 멤버 중 한 명이 한국인이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잡아넣으면 안 되는 건가?’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런 의심을 받는 위험인물이 여전히 길거리를 활보하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터.
하지만 마법청도 그를 그냥 놔둔 이유가 당연히 있었다.
“백영광의 역할은 정보 제공자,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백영광을 감시하며 위스프의 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백영광이 전혜수와 만남 이후 다이아몬드와 금의 시세를 알아봤다는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뭔가를 팔려는 브로커와 만난 테러리스트 조직 끄나풀이 다이아몬드와 금이라는 달러보다 더 확실한 만국 공용의 화폐 시세를 검색했다면, 건장한 성인남녀가 모텔에 들어간 것만큼이나 뻔한 일이다.
“백영광이 전혜수로부터 마나 서클을 올려주는 비약을 구매할 계획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우리 쪽 조사에 따르면 전혜수에게 그런 비약 같은 게 없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법테러대책반은 이 기회를 이용해 백영광의 뒤에 있는 꼬리 주인을 뽑기로 했습니다.”
이 순간 이강우와 안중현의 머릿속에는 완벽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나보고 만들어 달라, 이거군.’
위스프가 마나 서클 자극 비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가짜가 아니라 진짜 효과가 있는 걸 미끼로 삼아서 그들을 낚을 생각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는 이강우의 분명한 협조가 필요하다. 지금 국내에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 수 있는 건 이강우뿐이니까.
더불어 이렇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주는 건, 이강우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이강우의 협력을…… 쉽게 말해서 국가를 위한 열정으로 계산을 마치기 위함이다. 이강우가 마법청 소속 마법사라면 소집령에 응할 수밖에 없으니까.
‘거, 내 몸값이 몇 푼이나 한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열정페이로 다루려는 거지?’
살짝 뒤틀리는 심기.
그러나 반대로 이강우는 이번 일을 거절하거나, 깽판을 부리거나, 어떠한 이익을 얻어낼 생각이 없었다.
테러 조직을 소탕하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앞에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면 안 된다.
더군다나 보통 조직도 아니고, 일반인도 들으면 알 법한 세계적인 마법 테러 조직의 꼬리를 잡는 일.
‘위험할 건 없지.’
더불어 이번 일의 리스크는 그리 크지 않다. 이강우의 협조가 필요할 뿐, 이강우가 현장에 나가서 직접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
“둘의 거래일은 2월 22일. 때문에 이제부터 여기 모인 분들은 마법청은 물론 군경(軍警)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당분간 외부와의 연락 역시 제한됩니다.”
단지 귀찮은 일이 생겼을 뿐.
이강우가 혀를 찼다.
‘그냥 일단 불러놓고, 강제로 이용해먹겠다…… 대단하네.’
그렇게 1차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그럼 질문 있으십니까?”
곧바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우 옆에 앉은 안중현이 손을 들었다.
이강우는 여기서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안중현은 왜 불렀지? 나야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강우를 부를 이유는 충분하지만, 반대로 안중현은 이 자리에 올 만한 이유가 없다. 그 역시 마법사 사냥보다는 몬스터 사냥의 전문가니까.
그런 그가 손을 들었고, 질문을 했다.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위스프의 관계자를, 테러를 계획하고 지휘할 수 있는 간부를 파악했다고 했을 때, 그를 국내로 유인한 다음 잡는 것도 계획의 일부입니까?”
“예.”
“그럼 만약 그들이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자폭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일을 벌일 경우에 대한 대응책은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 이강우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이들 역시, 나름 이쪽에서는 뼈가 굵은 이들 역시 안중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을 확실하게 찌른 안중현의 안목과 솜씨를 인정한다는 의미.
“대응책은 세워뒀습니다. 문제는 일이 터졌을 경우, 그 대응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부분입니다. 때문에 안중현 씨를 비롯한 여러분을 이곳이 불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한 대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그 말이 안중현을 부른 이유였다.
중요한 일에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필요하다면 믿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안중현이었으니까.
이강우도 당연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순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침을 삼켰다.
‘최악이군.’
믿을 수 있는 안중현을 불렀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를 불러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으니까.
* * *
1차 브리핑이 끝난 이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대신 본부에 있는 전화는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안이 생명인 작전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강우는 마법청 본부에 위치한 전화기를 이용해 여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아무래도 당분간 일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통화도 힘들 거야. 아니, 위험한 일은 아니야. 유적 사냥은 절대 아니야. 주기적으로 통화는 할게. 단지 스마트폰으로 통화는 불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일단 엄마한테는 네가 잘 설명해줘. 그래, 설날 동안 너도 수고했어.”
통화를 마친 이강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새해부터 아주 빌어먹을 일에 발목이 잡혔군.’
내키지 않는 일을 맡게 됐다.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커피 좀 마시지.”
그런 이강우를 안중현이 불렀다.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이강우에게 건네준 안중현은 그를 데리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은 마법청 본부 내에 위치한 실외 흡연실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 때문에 한기 가득한 그곳은 찾는 사람이 없었다. 마법청 본부에는 실내 흡연실도 있었고, 이 추운 겨울에 실내 흡연실을 놔두고 실외 흡연실을 찾는 이는 없을 테니까.
그야말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올 일도 없는 장소. 안중현은 그런 장소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일, 발을 뺄 수 있으면 빼는 게 좋겠군.”
안중현의 말에 이강우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 일은 자네에게 손해야. 무조건.”
“알고 있습니다.”
이강우가 한숨을 내뱉었다.
“공짜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어다 바쳐야 할 판이니까요. 열정페이 수준이죠.”
“단지 그뿐이라면 상관없지. 그에 따른 보상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뿐이면 상관없다?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특히 이강우는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안중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정부란 게 돈 쓸 때는 짠돌이지만, 곳간을 빼먹으려고 작심하면 이보다 쉽게 빼먹을 수 있는 곳도 없지. 여차하면 마나 서클 비약에 필요한 재료를 과다 청구한 뒤에 남은 것들을 횡령하는 것도 가능하지. 자네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아. 금전적인 부분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나라 곳간은 감시하는 이들 게 아니거든.”
듣고 보니 맞는 이야기다. 이번 일의 경우에는 마나스톤을 재료로 요구하게 될 텐데, 이강우 입장에서는 마나스톤을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요구하고 남은 것들은 본인이 날름 먹을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인건비 정도는 뽑는 셈이 된다.
“하지만 자네는 돈이 급한 게 아니잖아?”
“돈이란 게 많이 있어서 나쁠 건 없지요.”
“그렇긴 하지만, 돈에 목을 맬 처지는 아니지.”
“위험하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이강우가 곧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안중현은 다시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오늘은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지금 마법청 본부에는 평소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들만이 근무 중이다.
그럼에도 안중현은 주변을 경계했다.
그 정도로 사안이 중대하다는 의미였다.
“테러리스트에게 미끼를 던지는 일이야. 그 미끼를 만드는 건 자네고. 그것도 상대는 그냥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제적인 악명을 떨치는 마법 테러 조직 위스프. 이번 일을 통해 위스프를 뿌리째 뽑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잘해야 위스프 간부 한둘 정도 잡는 게 될 텐데…… 당연히 이번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보복이 시작되겠지.”
보복.
섬뜩한 단어가 등장했고, 그제야 이강우도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맙소사.’
그제야 이강우도 상황을 판단했다.
상대는 그냥 단순한 마약 밀수 조직이나, 조직 폭력배 같은 어중이떠중이 조직이 아니다.
심지어 이번 일의 경우에는 위스프가 이렇다 할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물론 위스프란 단체가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하는 놈들인 건 맞다.
하지만 한국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려는 것도 아니고 물물거래를 하려다가 잡히면 그들 입장에서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더더욱 복수심에 불타오를 것이다.
그럼 그 보복 대상은?
만약 이강우가 개입된 게 알려지면 이강우 역시 녀석들의 보복 명단에 올라갈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나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집에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다…… 그런 변명이나, 설명은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게 그들에게 통했으면 테러라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상황을 이해하고 굳어버린 이강우의 표정을 본 안중현은 팔짱을 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마법청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저 간부 하나를 잡기 위해 이번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테지.”
이런 사실을…… 안중현도 눈치챈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모를 리 만무하다.
위스프의 간부를 잡는다? 좋은 일이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이 위스프의 타깃이 될 가능성도 있다. 속된 말로 벌집을 들쑤시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벌집을 처리하는 방법은 하나다.
벌집을 통째로 뜯어내서 불에 태우는 것.
“그렇기에 이번 일은 한국 정부만 추진하는 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네.”
한국 정부의 힘만으로 위스프를 일망타진하는 건 불가능하다. 국제적 공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세계가 움직인다는 겁니까?”
“위스프를 잡겠다고 하면 나서서 도와줄 국가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EU쪽은 예전부터 위스프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은 두말할 것도 없지. 마법 테러는 물론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나라니까. 그리고 중국…… 아마 중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야. 위스프의 다음 타깃이 미국 아니면 중국 혹은 둘 다가 되리라는 건 예상도 아니고, 기정사실이니까.”
“중국이 아프리카와 관계가 깊습니까?”
“위스프의 첫 타깃이 아닌 게 이상할 정도로 깊지. 아프리카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건 그 어디도 아닌 중국이야. 아프리카의 국가, 그 국가 정부의 관계자들에게는 미국 대통령보다 중국 주석이 더 믿을 수 있는 인간이지.”
중국은 모래시계문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에 적지 않은 투자를 했다.
“문제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다지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는 거지.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부를 포함해 모든 게 도둑놈이야.”
그리고 투자한 것 이상을 가져갔다.
“위스프는 세계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걸 명분으로 삼는 집단이고.”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에서 가져가는 모든 걸 약탈로 규정하고, 그에 따른 응징을 명분으로 삼는 위스프 입장에서는 중국은 절대악이나 다름없을 터.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강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젠장, 소집령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아주 제대로 이상한 일에 휘말렸군.’
이강우가 브랜드가 되어 받게 된 첫 일감이 이 정도까지 최악의 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절할 수 있을까?’
심지어 가장 큰 문제는 이걸 거절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안중현은 발을 뺄 수 있으면 빼라고 말했다.
하지만 테러 사건을 막는 일이다. 이런 중요한 일에 개인적인 안전을 위해 빠지는 건…… 더군다나 이강우가 없으면 이번 일은 사실상 진행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물론 굉장히 이기적으로, 자기 보신을 위해 빠지고자 하면 빠질 수 있다. 대신에 여기서 빠지면 마법청과 한국 정부는 이강우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 계약이 미끼였군.’
그제야 이강우는 한국 정부가 자신의 조건을 여과 없이 수용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근이다. 이강우가 앞으로 겪게 될 쓴맛들을 그나마 잊게 해주는 당근.
여기서 이강우가 쓴맛을 거부하면 당근도 없다.
“안중현 씨가 제 입장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이강우는 안중현의 의중을 물었다.
“나라면 하네. 대단한 애국심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정부가 국가를 위해 하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지금 내가 자네의 입장이라고 했을 때, 내가 없으면 계획 자체가 될 수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위스프 같은 악당들은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하는 게 원론적으로는 맞는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분명 위험하긴 하지만, 일선에서 그들을 잡는 경찰과 군인, 마법사들을 생각하면 감수해야 위험도 위험이 아닐 수 있지.”
맞는 말이다.
안중현이라면 이강우처럼 고민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단호한 의지를 가진 사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영웅이 될 필요는 없지. 절충점을 제안하게.”
그렇지만 이강우가 안중현이 될 필요도, 안중현이 이강우가 될 필요도 없다.
“필요한 건 마나 서클 자극 비약뿐. 그럼 굳이 자네가 이번 일을 위해서 특별하게 만들어줄 필요는 없지. 자네가 만들어둔 걸 마법청이 제멋대로 사용한 것처럼 일을 꾸미면 되네. 그럼 자네가 얻어가는 메리트도 줄지만, 리스크도 줄어드네.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아.”
이강우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 이강우가 굳이 얼굴 팔면서까지 나설 일이 아니다.
“물론 자네가 여기에 온 것부터가 이미 꼬인 상황이지만. 만약 사전에 상황을 설명해줬다면 자네는 여기 오지 않았을 테고, 그럼 자네는 이번 일에 연관될 필요가 없지. 어쨌거나 자네는 여기 왔고, 열 명이 넘는 이들이 그 광경을 봤지. 마법청이 함정을 판 셈이지.”
“그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겠군요. 제가 아주 빌어먹을 새끼가 되는 연기를.”
이강우 입장에서는 안중현의 제안이 제일 낫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연기가 필요하다. 이강우가 오늘 모인 마법사들 앞에서 참가를 거부하는 연기. 적어도 그들에게, 오늘 여기 국가를 위해 모인 마법사들에게 이강우는 비협조적이고, 이기적인 놈이 될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위스프 같은 테러 조직을 상대로 찍히고 싶진 않아.’
그러나 이 순간.
‘가만.’
이강우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한국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날 써먹는다는 건, 언젠가는 날 엿 먹일 수 있다는 의미잖아?’
여기서 빠진다?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이번에 빠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정부와 거래를 하는 이상, 한국 정부는 계속해서 이강우를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고 할 것이다.
국익이란 대의명분 하에!
이강우가 국적을 바꾸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발만 뺀다?
‘소극적으로 나가면 결국 호구가 될 뿐이지.’
이강우의 생각을 바꿨다.
“안중현 씨.”
“말하게.”
“내가 이번 일로 정부를 상대로 최고의 메리트를 얻으려면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야 합니까?”
그 질문에 안중현이 옅게 웃었다.
“판을 더 크게 벌리고, 강짜를 부리면 되네.”
* * *
2022년 2월 22일.
의미를 부여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어찌 보면 그저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하루에 불과한 날, 남녀 둘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남선녀였다. 여인은 모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늘씬했고, 남자 역시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미팅 혹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인의 눈빛은 차가웠고, 남자 역시 표정에 이렇다 할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그 둘 분위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 침묵 속에서 이윽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약속과 다르군요. 분명히 말하지만, 전 이걸 팔 생각이 없어요.”
말을 뱉는 여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큰 잘못을 한 모양.
“2배 이상 값을 치르겠습니다.”
남자는 그런 여인의 소박에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현금으로 주실 수 있나요?”
“그건 힘듭니다.”
그 말에 여인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곧장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끝이겠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 통보를 했다.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사내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내는 한숨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가방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여인이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만약 그게 제 소유였다면 그쪽 가격에 두말하지도 않고 팔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제 게 아니죠.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브로커, 다리 역할일 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소개료만 주신다면, 그분과의 다리를 놔드리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죠.”
그 말에 사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흥미가 돋는군요.”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말, 설득력이나 호소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투였다.
이윽고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통화를 하겠습니다.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그렇게 통화를 위해 사내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그 대화의 공간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추적, 추적은?”
“정확한 추적은 당장 불가능할 듯합니다.”
“뭐든 좋아.”
“위치 추적됐습니다. 일단 국내로 잡힙니다.”
국내라는 말에 채경웅 반장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국내…… 가짜겠지?”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설마 이렇게 뻔하게 자신들의 추적을 허용할 리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추적되는 곳에 사람 보내봐. 그래서 위치는 어디야?”
“서울입니다.”
“서울에 구가 몇 갠지 너 읊어볼래?”
“강남구입니다.”
그 대화 과정을 안중현과 이강우는 다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걸 직접 경험하게 되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하니까 기분이 새삼스럽군.”
“원래 이런 거 하셨나 봅니다?”
“내가 원래 경찰 출신인데, 몰랐나?”
“예?”
“자네에게 말한 적 없나 보군.”
처음 듣는 이야기.
어쨌거나 이강우는 안중현이라면 정말 경찰이 잘 어울리는 사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사람이 경찰이면 정말 보증도 서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보다 이걸로 정말 위스프 간부가 낚일까요?”
“범죄 조직의 특성은 그들이 운운하는 신뢰라는 놈이 겉보기에는 금처럼 순수해 보이지만, 실상은 도금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중요한 상황이 될수록 도금이 벗겨지고, 진실이 드러나지. 자네 덕분에 스케일이 커졌으니, 백영광 수준에서 일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할 터. 미끼는 물 걸세.”
그 순간.
“강남구 삼성동입니다.”
보다 자세한 위치가 추적됐다.
“정말 고작 통신 추적으로 간부를 낚진 않겠죠?”
“아무렴. 설마 위스프의 간부가 서울 강남에서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폰으로 말단 조직과 대화를 나눌 리가 없지.”
안중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비단 안중현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이들 중 그 누구도 설마 이번 통신 위치 추적 하나로 그들이 원하는 대어가 잡히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예의상 작업을 하는 셈.
“삼성동 코엑스 위치 파악했습니다.”
“알았으니까 사람 보내거나 CCTV로 볼 수 있는 곳이면 보고 정리해서 알려줘.”
그런 작업이었다. 예의상 하는 일.
예의상 하는 일이었는데…….
“바, 반장님! 그리고리 볼코프! 볼코프입니다!”
“뭐?”
“위스프 서열 3위, 볼코프 같습니다!”
더 이상 예의가 불필요한 상황이 됐다.
* *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채경웅 반장이 이번 작전, 일명 위스프 스윕 작전을 기획한 건 2022년 1월 23일, 미국 정부로부터 정보를 받은 그 순간부터였다.
미국 정부가 준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세계적인 마법 테러 조직 위스프의 본거지를 발견했으며, 언제든 본거지를 타격할 준비를 마쳤고, 위스프 서열 5위인 투레의 포섭도 완료했습니다.
이런 정보, 귀한 정보를 한국 정부에 건네준 이유는 간단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위스프를 뿌리째 뽑을 작전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테러 조직이란 것이 우두머리를, 본거지를 제거한다고 해서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닌 만큼, 미국 정부는 다른 국가와의 공조를 통해 세계 곳곳에 스며든 위스프의 뿌리들을 최대한 제거한 후에 위스프의 본거지를 타격할 생각이었다.
이 정보를 받았을 때 마법청의 간부들과 정부 관계자들은 3일에 걸친 긴급 비밀 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채경웅 반장은 오랫동안 예의주시하며 언젠가 미끼로 써먹을 백영광에 대한 정보를 언급했고, 그 정보가 이번 미국의 기획에 한국이 참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문제는 없었다.’
그때부터 채경웅 반장이 작전을 이끌었다.
일단 전혜수부터 작업을 했다. 그녀에게 접근해서, 그녀가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도록 조종했다. 그녀 본인도 눈치챌 수 없도록, 그녀에 대한 작업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다음 단계를 위해 이강우를 포섭했다. 이강우가 만드는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필수였으니까.
당연히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그를 이번 일에 엮을 생각이었다. 거리낌은 없었다. 대의명분, 국익을 위한 일에 개인의 작은 희생 같을 걸 일일이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세운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됐다.
‘도중에 예상외의 일이 있었지만.’
딱 하나, 걸림돌은 도중에 이강우가 예상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위스프 스윕 작전에 참가했다는 점이었다. 안대욱 부청장이 직접 나서서 이강우와 딜을 했다는 것, 그게 채경웅 반장의 시나리오와는 조금 달랐지만 작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아니었어.’
그런 와중에 백영광이 미끼를 물었다. 그냥 미끼를 문 게 아니라, 도마 위에까지 올라왔다. 요리를 하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백영광을 요리해서, 그를 이용해 위스프의 간부를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함정 역시 이미 준비해두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상대방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쳐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작전이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볼코프, 위스프의 서열 3위인 그가 한국에 있었으니까.
‘방심인가?’
물론 단순하게 보면 대어를 낚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위스프가 한국 정부의 의중을 모르고, 방심을 해서 자신의 위치를, 존재를 그대로 노출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또한 아직 아시아 내에서 위스프의 존재감은 유럽에 비해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시아 국가들에게 위스프의 테러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남의 나라 이야기인 셈이니까.
국내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볼코프가 맨얼굴로 길거리를 지나가도 그의 정체를 알고 신고를 할 법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게 지금 상황의 비하인드 스토리일 수도 있다.
‘아니야.’
하지만 이 순간 채경웅 반장의 감이, 이제까지 이런 부류를 상대했던 그의 감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방심? 실수?
절대 아니다.
볼코프는 명백한 의도를, 목적을 가지고 등장했으며 자신의 위치를 노출해줬다.
자신이 노출이 되고, 한국 정부가 자신을 쫓아온다고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다.
아니, 어쩌면…….
“삼성동 코엑스.”
그때, 고민에 빠진 채 상황을 분석하려던 채경웅의 귓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파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강우였다.
“모래시계문의 공동묘지.”
모두가 이 긴급한 상황에 혼잣말조차 중얼거리지 못하는 순간, 그 누구도 아닌 이강우가 놀랍게도 테러리스트의 의도를 파악했다.
“문을 이용해 테러를 저지를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문을 숨기기엔 그만한 장소가 없잖습니까?”
보통 상황이라면 우스갯소리로 치부됐을 이야기.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자리에서 이강우의 말을 들은 모두가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채경웅 반장이 소리쳤다.
“당장 마법청에 알려! 테러 경보 내리라고!”
* * *
테러란 명백한 의도가 담긴 폭력 행위다.
때문에 테러는 그저 단순한 폭력과는 거리가 다르다. 보다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어야 한다. 사망자의 숫자도 중요하고, 재산 피해도 중요하지만,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떠한 테러 사건을 보고 그게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거나, 그게 영화의 소재가 된다면, 그 테러는 성공한 테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영화화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테러가 일어나고 있었다.
시작은 갑작스러웠다.
문을 닫은 가게. 사람들은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문이 닫힌 가게 문이 터지더니, 그 안에서 여러 마리의 몬스터가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처럼 등장한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터지는 비명에 연예인이라도 등장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터진 문은 하나가 아니었다. 3개의 문이 터졌다. 문에서 뛰쳐나온 몬스터의 숫자는 스물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등장한 몬스터들 전부가 9등급 몬스터라는 것.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약한 놈들이었다. 대한민국 수도를 마비시킬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맹수보다 좀 더 사납고, 강한 맹수의 등장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물론 삼성동 코엑스를 방문한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몬스터다!”
“도망쳐!”
그렇게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일단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도망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질서 없이 도망치는 광경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그것도 성난 파도가 날뛰는 것처럼 보였다.
몬스터들은 당연히 날뛰었다. 그들은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자신들을 반기는 맛있는 식량의 존재에 눈이 돌아갔다. 도망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녀석들이 날뛰면서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몬스터의 울음과 어울리며 공포를 만들어냈다.
그런 공포를 잠시 침묵하게 만든 건.
콰광!
하늘에서 떨어진 푸른색 벼락 한 줄기였다. 코엑스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자신의 존재를 태양 아래 여과 없이 드러내던 거대한 뱀의 몸뚱이가 단숨에 잿더미가 됐다.
그 모습에 몇몇 이들이 소리쳤다.
“마법사다!”
몬스터 사냥꾼, 마법사의 등장은 마법사가 사용한 벼락처럼, 공포 속의 한 줄기 빛이 됐다.
그 벼락이 효시였다.
-A팀 코엑스 내부로 진입한다.
-B팀은 외부로 나오는 놈들을 처리하겠습니다.
-C팀 벽 쌓는 중입니다.
서른 명의 마법사들이 화재 현장을 향해 걸어가는 소방관처럼, 몬스터가 등장한 코엑스 건물 안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가장 선두에는 채유리가 있었다. 헤이스트 마법을 걸고, 마력검을 손에 쥔 그녀는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은 그냥 보이는 순간 도륙했다. 6개의 마나 서클을 가진 그녀의 마력검은 총보다 위력적이었다. 9등급 몬스터는 종이 베듯 베어버렸다.
그런 채유리가 움직이는 곳, 반대편에는 김재범과 하선우 듀엣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재범이 독을 만들었고, 하선우가 바람 마법을 이용해 사람과 몬스터가 뒤섞인 공간 속에서 몬스터만을 중독시켰다.
날뛰던 몬스터가 갑자기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너부러졌고, 김재범은 그런 몬스터에게 다가가서, 특수하게 만든 주사기로 녀석의 몸에 뭔가를 주입했다.
“세상에 뛰쳐나온 걸 후회하게 해줄게.”
몬스터와의 전투만이 마법사의 역할 전부가 아니었다.
이우희와 박태중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파악하고, 실시간으로 벽을 만들며 코엑스 건물을 봉쇄하고 있었다. 박태중은 돌벽을 만들었고, 이우희는 얼음벽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 둘은 대피를 지휘하는 역할 역시 수행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가세요! 왼쪽으로!”
“이 뒤쪽은 몬스터와 전투 중입니다. 오른쪽으로 이동하십시오!”
즈믄나래.
삼성동에 본부를 가진 그들은 그 어느 집단보다 빠르게 코엑스에 등장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즈믄나래 마법사의 활약에 잊고 있었던 것, 스마트폰을 꺼내 이 광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제 공포가 사그라지고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였다. 그 여유가 곳곳에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 테러는 끝이었다. 공포를 동반하지 않는 테러는 그냥 무식한 폭력에 불과할 뿐이니까.
“빠르군.”
듬직한 체격을 가진 은발 머리칼을 가진 늑대 같은 눈빛의 사내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볼코프.
이번 테러 사건의 용의자가 될 테러 조직 위스프의 서열 3위인 그는 자신이 나름 용의주도하게, 열심히 준비한 테러가 이렇게 쉽게 정리되는 것이 조금은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에 빠지진 않았다. 볼코프는 눈가에 어린 아쉬움을 단숨에 지운 후에 주머니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꺼져 있던 스마트폰을 다시 작동시켰다.
그리고는 들고 있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스마트폰을 그 가방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 * *
2022년 2월 22일.
의미를 부여하면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는 이날을 인류는 기억할 수밖에 없게 됐다.
테러가 일어났다.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독일…… 전 세계 12개국의 수도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모래시계문을 터뜨려 몬스터를 출몰시키는 방식의 테러였고, 모든 테러는 위스프란 하나의 집단이 자행했다.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테러였다.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몬스터의 출몰에 대비한 각국의 시스템은 훌륭했다.
사망자는 12개국 전부를 합쳐도 55명에 불과. 전 세계적인 규모의 테러치고 많은 편은 아니었다.
동시에 55명의 사망자 중에 몬스터에 의해 직접 살해당한 사망자는 30명 정도였다. 나머지는 대피하는 과정에서 압사를 당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은 이들이었다.
때문에 세상은 경악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이번 테러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습니다만, 피해는 그 규모에 피해 크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몬스터의 등장에 대항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증거지요.
놀랐다.
반대로 9.11테러와 같은 경악스러운 피해는 없었다.
사망자 역시 조금 과장하면,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다. 사람들은 2015년과 같은 공포의 시대가 재림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언론 역시 그런 부분을 부각했고, 사람들은 언론의 반응을 믿었다.
그러나…….
“블랙 스택이 공식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 영상 자체가 조작된 게 아니라면, 이 영상 속의 모래시계문이 3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일 가능성이 67.55퍼센트 이상이라고 합니다.”
위스프가 남긴 공포는 세상을 패닉 상태에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한국 마법청의 수장, 이부성 마법청장은 보고 내용을 받는 순간 빠득,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지금 테러리스트 새끼들이 3등급 모래시계문을 가지고 있다고? 모래시계문을 이용해서 강남에서 그 지랄을 벌인 새끼들이?”
이부성은 정말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자, 잘 들으셨습니다.”
“미치겠군.”
이번 일이 멀쩡했던 자신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치부가 될 테니까. 꽤 높은 자리까지 탐을 내던 그는 어떤 의미에서 사망자를 제외하고, 이번 테러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한편 마법부청장 안대욱은 이부성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안경을 고쳐 쓰며 조용히 부하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심문을 통해 나온 추가 정보는?”
담담한 질문을 던졌다. 부하 직원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대욱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음 명령을 내렸다.
“10분 후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와 통화할 테니, 미리 연락을 해두도록.”
그때.
“안대욱!”
이부성이 안대욱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무래도 자신의 경고에도 자기 할 말만 하는 안대욱의 모습이 거슬린 모양.
“대체 일을 어떻게 하기에 이런 소란이 일어난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삼성동 코엑스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테러가 일어난다는 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2명이 몬스터 때문에 죽었어!”
좌중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그 시선 속에서 안대욱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 불찰입니다. 보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일단 모든 길드에 언제든 출동 가능한 긴급소집령을 내렸고, 국방부 역시 움직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대응책은? 지금 3등급 모래시계문이 테러리스트 손에 들어갔는데, 대응책은? 그거 터지면?”
“현재 국내에는 4등급 모래시계문을 아무런 피해 없이 클로즈한 전력이 있습니다.”
“4등급 몬스터도 못 잡은 전력을 어떻게 믿어?”
그 순간.
“안대욱, 이제까지는 자네가 일선에서 무엇을 하든 납득했지만 이번은 아니야.”
이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국 정부랑 중국 정부에 동시에 제안을 할 거야. 7서클 마법사를 필요에 따라서 내줄 수 있는지. 아니면 핵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는지.”
그 말에 안대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안대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그가 몸을 일으키자 좌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청장님, 미국은 몰라도 중국 쪽은…….”
“이번 일 미국이 기획했잖아! 그래서 이 꼴이 났는데, 어떻게 미국 정부만 믿고 일을 처리해? 설마 블랙 스택하고 친하게 지낸다고 그쪽 편을 들어주려는 거야?”
“아닙니다.”
“젠장, 애초에 보안을 철저히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괜히 벌집만 들쑤시는 꼴이 됐군.”
이부성이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2022년 2월 22일, 그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