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브랜드
그야말로 영화, 그것도 클라이맥스 장면이었다.
이강우가 거룩한 희생으로 구소영을 대신해 증식된 신기루호랑이를 상대했고, 치명상을 입은 채 어둠 속에 외로이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돌격팀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돌격팀은 이강우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를 데리고 100번 방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들 앞에 기다리는 건 길목마다 대기하고 있는 증식한 신기루호랑이들이었다.
은신을 한 채 갑자기 튀어나오는 놈들은 그야말로 지뢰였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은 발톱과 이빨을 앞세웠고, 몸통박치기도 날렸다.
발톱에 긁히고, 이빨에 물리고, 몸통박치기에 맞아 벽에 부딪히고…… 혼전 속에서 돌격팀은 계속 돌격을 했다.
그러다가 위기가 등장했다. 100번 방으로 가는 길에 오리지널이 돌격팀 앞을 막았다. 증식된 개체를 이용해서, 은신한 상태로 돌격팀이 지나가길 기다린 다음 지나간 후에 모습을 드러낸 십여 마리의 신기루호랑이들이 방 하나에 돌격팀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적지 않은 상처, 피로감, 거듭된 전투로 인한 마력 소모…… 더 이상 무언가를 쥐어짜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마주한 최악의 적. 보물과 목숨,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반전시킨 건 지원팀이었다. 도주하던 지원팀이 영웅처럼, 영화처럼, 각본처럼 5서클 마법을 이용해 단숨에 탈출을 위한 길을 만들어줬다. 지원팀과 돌격팀이 하나로 합쳐졌다. 흩어졌던 열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드디어 전부 모였고, 그들은 그 상태로 100번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문을 열고 나가는 것뿐.
그러나 이 순간 영화처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가 등장했다.
문이 얼음 속에 묻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꽁꽁! 하필이면 얼음과 비슷한 크리스털수정 재질이었기에,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빨리 얼음을 깨! 누군가 소리쳤고, 뭐로? 곡괭이도 없는데? 누군가 대답했다. 누군가는 대답 대신 화염계 마법을 썼다. 4등급 모래시계문이라면 어지간한 공격은 아주 우습게 버텨낼 테니까.
활활, 강력한 화력으로 얼음을 녹여냈고 녹은 얼음을 다른 이들이 온갖 방법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신기루호랑이들 100번 방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 근처에 모였다. 그 숫자는 열 마리 단위를 넘어 스무 마리에 가까웠다.
놈들이 100번 방 안으로 난입할 경우, 난전이 시작될 것이며, 시계(視界)와 움직임이 제한된 공간에서 은신 능력을 가진 괴물과 심지어 머릿수로 밀리는 상황에서 난전을 시작된다면,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을 게 뻔한 상황.
일부 마법사들이 얼음을 부수며 문을 캐내는 사이 나머지 마법사들은 문 앞에 선 채 방어벽을 구축한 채 쉴 새 없이 마법을 난사하며, 신기루호랑이의 접근을 거부했다. 마법을 쓸 때마다 포션을 마셨다.
긴박한 1초가 1분처럼,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때 마법을 난사하던 마법사들 중 세 명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쓰러졌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누가 보더라도 마력 쇼크 현상이었다.
설상가상.
정말 이게 영화였다면, 감독이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조금 무리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
그렇게 세 명의 마법사들이 쓰러지는 순간, 저지선이 붕괴했다. 신기루호랑이들은 틈을 놓치지 않았고, 놈들이 통로를 질주하며 100번 방을, 본래 자신의 방이었던 그 안으로 난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때 거대한 얼음벽이 등장했다. 동굴 안으로 난입하려던 신기루호랑이들 앞에 얼음이 생겼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얼렸다. 그 공간 안에 일부는 갇혔고, 일부는 얼음벽에 부딪히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채유리,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해 시간을 번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과 함께 모래시계문을, 출문을 덮고 있던 얼음이 녹았고, 문이 열렸다. 마법사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짊어진 채, 그리고 보물을 챙긴 채 출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내가 채유리에게 업히는 장면만 수정하면 당장 영화로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스토리야.’
왼쪽 어깨에 깁스를 한 채 병상에 누워있던 이강우는 나흘 전의 광경을, 4등급 유적에서 본 마지막 광경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
모두가 살아남았다.
단 한 명의 죽음도 없었다.
그야말로 기적!
하지만 이강우는 그 기적이란 단어 앞에서조차 옅은 미소를 짓지 못했다. 미소를 짓는 대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이제 시작이군.’
* * *
4서클 마법 아티팩트 22개, 5서클 마법 아티팩트 7개, 6서클 마법 아티팩트 1개. 400개가 넘는 마나 스톤, 그리고 4개월이 넘는 탐사 시간.
이 모든 것이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4등급 유적 클로즈로 이룩한 성과였다.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해 가지고 들어갔던 값비싼 장비들과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어줄 4등급 몬스터의 사체, 4등급 마나스톤을 챙기지 못한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건 옥의 티에 불과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히 기념비적인 일이었고, 기존 유적 사냥의 판도를, 트렌드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상 4등급 유적 탐사에 대한 브리핑을 마칩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러한 내용들을, 비밀리에 진행했던 4등급 유적 탐사 과정을 10월 14일, 대중에, 세상에 공개했다.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언론들은 일주일 내내 이 유적 사냥에 대한 뉴스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대한민국, 드디어 4등급 모래시계문을 정복하다!
-최장, 최고, 최소 모든 신기록을 갈아치우다!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마법의 강국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국가들도 이번 일에 관심을 가졌다.
“정말 몸이 10개라도 모자라겠어.”
“이렇게 대접받고 해외 출장 가는 건 처음이네.”
“그동안 아쉬운 소리만 하다가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듣겠구먼.”
마법청 직원들이 전 세계 주요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무려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해외로 출장을 나갈 정도였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런 한국의 활약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 정부가 희생자 없이 4개월 넘게 유적에서 버틴 노하우는 모래시계문을 놓고 벌이는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앞선 고지를 점령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안달이 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동시에 이 유적 사냥에 참가한 마법사들의 이름이 공개되면서, 그들은 단숨에 영웅이 됐다. 이미 영웅이나 다름없던 자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명성이 더 커진 건 뻔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 이강우의 이름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되는 일은 없었다.
“이름만 밝혀도 영웅이 될 수 있을 텐데, 이름을 밝히지 않다니.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나?”
값비싼 멜론을 잔뜩 사 들고 이강우의 병문안을 와준 안중현이 질문을 던졌다.
이강우는 움직이지 못하는 왼팔은 놔둔 채 오른쪽 어깨만 으쓱했다.
“하선우 정도 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야, 당장에 이름을 밝힌 다음에 영웅이 되어서 연예계 생활도 좀 해 보고, 유명 여배우들하고 스캔들도 내봤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이미 코가 꿰였는데 새로운 스캔들은 좀 그렇죠. 그거 빼면 굳이 대중을 상대로 유명해질 필요가 없죠.”
그 대답에 안중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안중현은 이강우가 정말 그런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 이유? 뻔하다.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이 되어봤자 생기는 건 의무와 주목뿐이지.’
영웅이 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한 손해를 보는 일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이강우는 굳이 자신의 이름 앞에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매국노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되면 이강우는 한국 정부에 휘둘리기만 해야 한다는 게 문제일 뿐.
대한민국을 위해서…… 그 말에서 이강우는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거다.
앞으로 한국 정부와 얼굴 붉힐 일도 생길지 모르는 이강우 입장에서는 지금 포지션이 적당하다. 문어발처럼, 이런저런 세력 속에 발을 걸친 채 엑기스만 빨아먹으면 된다.
‘현명해.’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의 심중을 나름 눈치채고 있었고, 그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강우는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흐름을 바꿀 만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굳이 스스로의 가치를 한 집단에만 맡길 이유는 없다.
물론 이런 선택을 한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이강우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내 도움이 필요 없겠어. 내 의견은…… 괜한 간섭이 되겠군.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니까.’
안중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십니까?”
정말 조금 전, 아직 병실에 들어온 지 10분은커녕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는 안중현을 보고 이강우가 말을 건넸다.
“연인끼리 있는 자리에서 굳이 없는 이야기까지 하면서까지 버티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 말과 함께 안중현이 채유리를 바라봤다.
채유리는 안중현이 사 온 멜론을 이미 반으로 가른 후에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처럼 파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안중현의 시선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멜론 고마워요, 안중현 씨. 잘 먹을게요.”
안중현은 그런 채유리의 반응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원래 채유리라면 여기서 그냥 자신을 무시한 채 열심히 멜론만 파먹었을 것이다.
채유리, 그녀도 많이 바뀌었다.
변화의 원인은 당연히 이강우다.
“그렇긴 하죠. 솔직히 민폐이긴 했습니다.”
이강우가 곧바로 말을 받아치자, 안중현이 옅게 웃었다. 이런 대화가 나쁘진 않았다.
“그럼 민폐는 물러갈 테니, 좋은 시간 보내게.”
그때.
“혹시 모래시계문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 같은 거 있습니까?”
이강우가 툭, 말을 던졌다.
안중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역사?”
“역사라는 표현이 조금 애매하긴 한데…… 모래시계문의 등장 이후부터 어떤 조직이 만들어졌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야 스택 레코드에…… 하긴, 그런 정보는 없겠군. 스택 레코드는 어디까지나 유적 관련 정보 목록이니까. 역사라…… 그러고 보니 그런 건 본적이 없군.”
모래시계문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은 있어도, 모래시계문의 역사를 정리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역사라고 하기에는 모래시계문은 등장한 지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즉, 역사라는 이름 아래에 무언가를 기록하기에는 너무나도 짧다.
최소한 10년은 지나야, 언제 모래시계문이 등장했고, 모래시계문 등장과 함께 각국 정부가 어떤 대응을 했고, 길드가 언제 창립됐고, 각국의 마법관련 기구가 어떻게 생겨났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런 것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될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이르긴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그 역사를 정리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부탁할 게 있나?”
안중현이 되물었다.
이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필요 없다는 제스처.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유적 안에서는 자네의 도움만 받는 처지지만, 유적 밖에서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그때 안중현이 채유리를 바라봤다. 여전히 멜론을 먹으며, 안중현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채유리의 모습에 안중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연인이랑 사이좋게 지내게. 참고로 한마디 하자면, 내가 자네라면 절대 싸움 따윈 하진 않겠네.”
안중현의 충고에 이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 말 안중현 씨가 세 번째입니다. 하선우 씨랑 김재범 씨가 이미 하고 갔습니다.”
안중현이 옅게 웃었다.
“아마 앞으로 두 번은 더 듣게 될 걸세.”
* * *
안중현이 병실 밖으로 나갔을 때 이강우는 멜론 한 통을 벌써 까먹고, 두 통째를 까먹을 준비를 마친 채유리를 바라봤다.
채유리는 멜론을 반으로 가른 뒤 하나는 먹기 좋게 자른 후에 포크와 함께 이강우가 먹을 수 있는 근처에 놓았고, 나머지 반은 본인이 숟가락으로 파먹었다.
이강우는 그런 채유리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이제 먹을 것도 주네.’
어마어마한 변화다. 예전에는 자기 먹을 것도 없어서 이강우 것까지 먹으려고 했던 그녀가 이제는 이강우를 나름 먼저 챙겨주려고 하고 있으니.
“고마워요.”
“헤헤.”
이강우의 감사 인사에 채유리가 밝게 웃었다. 이강우는 그런 채유리를 보며 김재범과 하선우가 해준 설명을, 이강우가 위험에 빠졌을 때의 상황 설명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 순간 이강우가 속으로만 한숨을 내뱉었다.
‘위험해.’
이강우가 위험에 빠졌다는 걸 파악하는 순간, 채유리는 명령을 무시하고 무조건 이강우를 구하고자 했다. 이강우가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도달하고자 했다.
물론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살기와 적의를 뿜었다. 하선우와 김재범의 설명에 따르면 4등급 몬스터, 신기루호랑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기였다고 한다.
고맙긴 하다.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강우를 구해주려는 마음이.
하지만 그런 채유리의 행동은 적어도 현명하거나 이성적인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지금과 다르게 좀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바뀌어야 해.’
지금까지는 그런 채유리의 성정이 문제가 안 됐을 뿐이다. 운 좋게. 그야말로 운 좋게 문제가 안 됐을 뿐, 채유리가 이강우와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문제가 터질 것이다.
이강우는 이제부터 더 위험한 것들과 맞서 싸워야 하니까.
그때에도 채유리가 앞뒤 가리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고 이강우의 위기에만 반응한다면 그녀도 위험하다.
‘……정말 안 되면 그녀를 내 브랜드에서 배제해야지.’
만약 그녀가 변화를 거부한다면, 이강우는 그녀를 자신의 계획에서, 자신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에서 제외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아끼니까, 굳이 자신의 위기에 채유리마저 휩쓸리는 걸 원치 않았다.
‘후우.’
결국 이게 문제다.
‘기어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으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 더 큰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
‘그럼 당장은…… 정산부터 받아야지.’
일단은 정산이다.
이번 유적에서 얻은 소득을 명확하게 정산을 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다. 정산된 소득은 이강우의 재산이다. 그리고 이제 그 재산으로 새로운 투자를 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투자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업 파트너들.
‘즈믄나래, 블랙 스택, 로드리게스 회장, 마법청.’
현재 이강우에게 투자한 파트너는 크게 네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네 곳 전부에 빨대를 꽂고 싶지만…… 네 곳이 그걸 쉽사리 허락해줄 리 없지.’
이 네 곳은 이제까지 이강우를 공유했지만, 이제부터는 이강우 쟁탈전을 벌일 것이다.
모두가 이강우를 손에 넣기 위해, 서로를 향해 적의도 드러내고, 살벌한 기 싸움도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강우에게 강압적인 무언가가 작용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나도 그놈들 손아귀에서 멋대로 놀아날 생각이 없지만.’
하지만 이강우는 그런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이강우는 그저 도구에 불과해진다. 자기 의지대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도구.
그렇다면 이강우가 이 어마어마한 권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나는 나다.’
그들을 고객으로 바꾸는 것!
공급자는 한 명이고 수요자는 다수라면 공급자의 지위가 올라가는 것처럼, 사고 싶어도 쉽사리 살 수 없고, 사고자 하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존재로, 이강우는 자신을 이제부터 그런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나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야 해.’
이강우, 이제 그는 스스로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
* * *
유적에서 나왔을 당시 이강우의 상처는 심각했다. 보통 사람으로 따지면, 사자 우리에 들어갔는데 사자가 작심하고 그 보통 사람의 어깨를 뜯어버릴 기세로 물어버린 것과 비슷한 수준의 상처였다.
목숨을 구하면 다행, 목숨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으로 왼팔을 쓸 수 없는 처지가 되어도 누굴 탓할 수 없는 수준의 부상.
그러나 이강우는 그런 심각한 상처를 입은 주제에 3주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니까 거금을 들여서라도 마법 치료를 받는 거구나. 진짜 장난 아니네.’
마법 치료 덕분이었다.
이강우는 나오자마자 곧바로 문 관리센터에 항시 상주하는 의법사로부터 집중 치료를 받았고, 정말 하루가 다르게 상처가 회복됐다. 나중에는 흉터마저 사라졌다.
‘이런 치료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는군.’
어쨌거나 마법 치료 덕분에 이강우는 좀 더 빨리 준비했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일단 목표는 확실하다.
브랜드 설립.
이강우는 부하가 아니라 공급자 지위로 나머지 수요자들과 최소한 동등한 위치를 유지할 것이다.
메인 상품은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이다.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해 유적에 들어가서, 직접 몬스터를 잡아 생산한 뒤 판매하는 식이다. 생산, 제작, 유통을 혼자서 하는 셈.
물론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메인 상품으로 내세운다면, 꼭 허락을 받아야 할 상대가 있다.
리볼버 크로포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어낸 그의 허락 없이 일을 진행하는 건, 모래사장 위에 성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그의 도움을 받으면, 여러모로 상황이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다. 리볼버 크로포드란 우산은 태풍도 막아줄 수 있으니까.
단지 문제는…….
‘젠장, 뭐라고 변명하지?’
이강우가 지금 리볼버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른 게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거 먹은 거 뭐라고 하지? 일단 먹었다고 변명을 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텐데…….’
정말 큰 잘못이다. 리볼버가 이강우를 보자마자 멱살을 잡고 뺨을 신나게 두들겨도 이강우가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잘못. 그런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만나러 간다?
물론 가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울며 겨자를 먹더라도, 어떻게든 가야 한다.
‘설마 폭력을 쓰겠어?’
이 순간 이강우는 몰랐다. 크로포드가 어떤 식으로 이강우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들지.
* * *
2021년 12월 3일.
2021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됐다. 이날 이강우는 인천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 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쥔 채로, 열심히 기사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는 마법사들 그리고 모래시계문과 몬스터에 의한 사건 사고들이, 전쟁이나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강우에게는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오히려 이강우의 이목을 끄는 건 몇몇 연예인들의 기사였다.
‘몬스터 고기 먹은 걸 자랑이랍시고 인터뷰를 하다니.’
연예계 소식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강우가 연예계 관련 기사를 읽는 건 최근 연예인들이 몬스터 고기로 만든 요리를 먹은 걸 자랑하는 인터뷰가 올라온 탓이었다.
‘세상 말세야.’
그 누구보다 몬스터 요리를 많이 먹어보고, 만든 이강우가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이강우는 이 기사를 보는 순간 세상이 말세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조만간 폭탄이 연달아 터지겠군.’
검색을 해보니, 이강우가 모르는 사이에 몬스터 요리를 먹는 게 트렌드가 된 모양이다.
미식가로 유명한 연예인이라면 당연히 몬스터 요리를 먹어야 미식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인정한다. 몬스터 요리는 맛있다. 기존에 누리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맛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파급효과다.
몬스터 고기가 돈이 된다는 게 알려지면, 그리고 소수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마저 몬스터 요리를 먹고 싶어 한다면, 그 어마어마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공급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크루들이 이제 몰래 빼돌린 문을 일부러 터뜨리겠지.’
그리고 이 바닥에는 돈만 되면 뭐든 하는 족속들이, 목숨이라도 파는 족속들이 넘쳐난다.
크루가 대표적이다. 고작 푼돈에 목숨 걸고 유적에 들어가는 총꾼들이 대한민국에만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다.
하물며 몬스터 고기를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모래시계문을 구하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길 기다리면 비싼 몬스터가 문을 열고 등장한다. 그럼 총으로 잡든, 독을 쓰든, 전기 충격기를 쓰든 잡으면 된다. 몬스터 고기를 구하는 김에 마나스톤도 구할 수 있다. 마법 아티팩트를 구할 수 없지만, 목숨 걸고 유적에 들어가는 것보단 쉽게 구할 수 있다.
히트 상품이 될 것이다. 미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어마어마하다. 요식업계의 크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사람은 먹는 것에 정말 돈을 아끼지 않고 쓴다.
어느 정도 권력과 인맥, 기반이 있는 크루들이 도축 및 유통업으로 종목을 바꿀 것이다.
물론 그러다 사고가 터지면 대형사고가 터지는 거다. 크루의 세계에도 최소한의 규칙은 있다. 클로즈가 불가능한 모래시계문은 파괴하는 것. 그러나 일부러 모래시계문이 열리길 놔둔다면…… 세상에 몬스터가 등장하는 빈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터.
정부가 나서서 막고자 하겠지만, 애초에 크루라는 존재 자체가 범법자 집단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매일 세상 곳곳에 생성하는 폭탄을 제거하기는커녕, 몰래 훔쳐다가 터뜨리는 셈이군.’
이 무렵에 이강우의 머릿속에는 왕지홍, 그가 떠올랐다.
‘만석루 사장…… 어떻게 보면 참 사업 아이템 잘 잡았네.’
그는 일찍부터 몬스터 고기 유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사업을 할 줄 아는 셈이다.
‘아니지.’
그 순간 이강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왕지홍, 그 양반이 만든 사업 아이템이 아니잖아? 그 양반의 배후에 있는 건…….’
잊고 있었다.
만석루 그리고 왕지홍, 그들 배후에 어떤 집단이 있는지.
‘즈믄나래잖아?’
왕지홍은 즈믄나래의 끄나풀이다. 즈믄나래가 길드 이름을 내걸고 할 수 없는 짓을 왕지홍을 통해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즈믄나래는 일찍부터 모래시계문을 의도적으로 열고, 몬스터를 끄집어내서 이용해먹는 짓을 했다는 의미다.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왕지홍을 통해 안중현을 만났고, 그를 통해 즈믄나래에 입사했다. 그런데 막상 이 중요한 점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이강우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노크를 하듯 두드리자, 이강우가 최근 동안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쌓았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모래시계문 등장 이후 사회의 변화는…….’
모래시계문의 등장과 이후의 역사. 이강우가 일일이 검색을 해서 정리했다.
그 결과 이강우는 확실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2015년 모래시계문이 등장했고 세상에 어마어마한 혼란이 등장했다. 평화롭던 사회에 몬스터란 괴물이 등장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사회가 멀쩡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 혼란은 의외로 빨리 정리됐다. 당시 군인이었던 이강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군인으로 몬스터와의 전쟁에 투입되던 그는 어느 순간 모래시계문 안으로, 유적으로 들어갔다.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 이후 세상은 평화를 되찾았다. 세상은 모래시계문을 사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이건 아니지.’
솔직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된다. 당장 테러 사건이 하나만 일어나도 사회가 안정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몬스터라는 말도 안 되는 위험요소를 경험했는데 1년 만에 사회가 적응을 마친다?
유적 사냥만 해도 그렇다. 상식적으로 유적 사냥을 하기 위해 모래시계문을 그대로 놔두는 건 말이 안 된다.
마법 아티팩트를 얻기 위해서는 유적 사냥을 해야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마법이 인류의 미래를 바꿀 만한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닌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초창기 탐사 가능한 유적은 9등급과 8등급 수준이었다. 잘해봐야 7등급 유적 정도.
즉, 접할 수 있는 마법 아티팩트는 3서클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앞으로 접하게 될 마법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꿈을 꿀 수는 있어도, 확신을 가질 만한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사회는 확신을 가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유적 사냥을 위한 인프라와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해도, 개인의 의혹으로 남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자들 중 그 누구도 의혹을 품지 않았다.
‘블랙 스택…….’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꽤 인상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이 바로 블랙 스택이다. 그들이 정보를 쌓았다. 유적에 이러이러한 게 있다는 정보를 축적했다.
그렇게 스택 레코드가 만들어졌고, 이 스택 레코드는 유적 사냥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최초의 길드.’
그런 블랙 스택의 한국 지부가 바로 즈믄나래다.
그런데 그런 즈믄나래가 뒤로는 모래시계문을 터뜨려, 몬스터를 현실로 꺼내 몬스터 고기를 도축 및 유통하고 있다?
이건 절대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적어도 즈믄나래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뭔가 있어.’
이강우가 지금 이 생각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즈믄나래에 분명 뭐가 있어. 필시.’
연예계에서 시작된 생각이 즈믄나래에 대한 의심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미국으로 가는 길이 지루하진 않을 듯했다. 비행기에서 이 고민을 쉴 새 없이 곱씹게 될 테니까.
* * *
오랜만에 만난 크로포드는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게으름과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강우가 등장했을 때에도 그는 반가운 기색 대신 귀찮은 기색을 표현했다.
“영어 공부는 잘 했어?”
그런 그의 첫마디는 이강우에게 영어공부 잘 했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영어로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 이강우는 즉시 대답을 하는 대신 착용하고 있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아뇨.”
영어가 아닌 그냥 말을 뱉었다. 그러나 그 말은 크로포드의 머릿속에서 분명하게 해석됐다.
통역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그냥 이거 쓰려고요.”
이강우는 문 관리센터에서 나오면서 몇 가지 아티팩트를 추가로 가져왔다. 통역 마법이 걸린 반지도 개중 하나였다. 이것만 있으면 적어도 길을 잃었는데 영어 때문에 곤란함을 겪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내 후계자답군. 귀찮은 건 그냥 넘어가는 걸 보니.”
크로포드는 이강우의 대답에 만족한 듯했다. 그런 크로포드의 낌새를 살피던 이강우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티팩트 룸에 보관 중이던 그 특이한 돌멩이의 일부분, 제가 가져갔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각오로, 이강우는 먼저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했다.
“알고 있어. 설마 내가 내 방에 CCTV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봐? 네가 내가 쓰는 베개를 깔고 앉은 채 내가 아끼는 초콜릿 과자를 처먹고, 치우지도 않고 떠난 것도 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았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을 리가 있나? 네가 가져간 만큼을 만들려면, 5등급 몬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다 넣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여기서 뭔가를 한다고 해서 사라진 게 생기는 게 아니니까. 만약 그냥 훔쳐만 갔다면 그냥 돌려줬겠지. 그러지 못하니까 나를 보자마자 죄를 고백한 거잖아?”
정답이다.
“무엇보다 그거 가지고 뭔가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
말을 하는 크로포드는 정말 귀찮은 기색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강우를 위해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귀찮은 거다. 그걸 가지고 화를 내는 것조차, 이강우를 혼내는 것조차.
반대로 그렇게 귀찮으면서도 이강우의 만남 요청을 수락했다는 건,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관심이 있다는 의미.
“자,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고. 날 찾아온 목적이 뭐야? 달랑 사과만 하려고 왔을 리는 없고.”
이강우는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말해줬다.
브랜드를 만들 거라는 말,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메인 상품으로 내걸고, 독자적인 유적 사냥팀을 만들어서 외부 세력의 간섭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그 외부 세력에는 당연히 블랙 스택 역시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강우는 굳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하진 않았다. 판단은 크로포드의 몫이니까.
더군다나 크로포드는 이강우보다 머리가 좋다.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대충 견적을 내놓을 터.
이렇게 설명이 끝났을 때 크로포드는 정말 크로포드다운 반응을 보여줬다.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정말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적어도 널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데? 네가 지금 얼마나 많은 세력에게 발을 걸쳐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에 어느 세력을 가도, 최고의 대우와 보호를 받을걸?”
이강우는 그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브랜드는 마음에 드는군.”
이때 이제까지 귀찮은 기색만이 가득했던 크로포드의 얼굴 위로 미소가 그어졌다.
“그런 생각은 나도 했지.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은 분명 팔리니까. 그것도 아주 잘 팔릴 테니까.”
이강우가 했던 생각을 크로포드가 못 했을 리 없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하물며 그걸 독점 생산할 수 있다? 권력을 쥐는 셈이다.
하지만 크로포드가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제일 귀찮은 게 사실 돈 버는 일이더라고.”
일단 어느 정도 확실한 효과를 가진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6등급 이상의 마나스톤을 재료로 삼아야 한다. 그 아래 등급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소위 약발이 없다. 술로 따지면 맥주 수준이다. 취하긴 하는데, 취하려면 많이 마셔야 한다.
하지만 6등급 이상의 마나스톤을 개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쓰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유적에서 얻는 모든 수확이 클로저 본인의 것이 되니까. 반대로 이렇게 되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게 힘들어진다.
“너도 알겠지만,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상품으로 만들려면 6등급 이상의 마나스톤이 필요한데 이걸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빼돌리려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지.”
특히 6등급 모래시계문은 대부분의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 문 암거래 시장에 6등급 모래시계문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 구하려면 아프리카 같은 정부의 영향력이 무의미한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국제법 위반이다.
유엔이 발급한 클로저 라이센스를 가지고 국제법을 위반하면, 당연히 클로저 라이센스 박탈이다.
그렇다고 정부와 협상을 하면, 정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 내 모래시계문에서 나온 마나스톤을 이용한 무언가를 다른 나라에 파는 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불허할 테니까.
“결국 국가랑 1대1로 거래를 해야 하는데, 그럼 돈을 벌 수가 없고. 당장 네가 협상할 수 있는 상대는 한국 정부 정도밖에 없지.”
이런 상황 속에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생산해서 판매한다?
이익이 날 수가 없다.
“걱정 마십시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유리한 조건을 끄집어낼 카드를 마련해뒀습니다.”
“유리한 조건을 받아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의미 없지.”
“제 팀으로만 클로즈 할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럼 그것만 확인하면 되겠군. 그런 실력이 있는지.”
갑작스러운 크로포드의 결론에 이강우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7등급 유적까지는 혼자 클로즈 했으니, 이제는 6등급 유적으로 시험을 해볼 때군.”
“자, 잠깐만요. 지금 저보고 혼자 6등급 유적에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그 정도 자신감이 있으니까 이런 계획을 세웠을 텐데?”
“그건…….”
자신감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없이 6등급 유적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만약 테스트를 거절한다면, 브랜드 프로젝트는 버리고 대신 내 말을 들어줘야겠어. 나도 하루 빨리 너를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대체품으로 만들어야하거든.”
그 말을 뱉는 크로포드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 *
“미안, 정말 미안해.”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 이강우는 화상 통화가 아님에도, 정말 미안한 기색이 그리고 곤란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수신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있었다.
“잠깐 볼일만 보고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어. 나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그래서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약속은…… 힘들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렇게 이강우가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는 대상은 그의 연인, 채유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사과를 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취소할 일이 생긴 것, 그것 때문이었다.
채유리는 이강우가 크로포드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갈 때 어떻게든 동행하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이강우는 설득 대신 협상을 통해 막았다. 약속을 했다. 크리스마스에 정말 끝내주는 호텔 뷔페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
그런데 지금 그 약속을 취소하게 됐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내가 유적에 들어가느라 약속을 취소하게 됐다고 말하면, 지금 당장 미국으로 오겠지?’
심지어 취소 이유가 갑작스러운 유적 사냥 때문이란 걸 채유리가 안다면, 그녀는 그냥 곧바로 지금 당장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입석으로 타는 한이 있더라고 타고 시애틀에 올 것이다.
당연히 이강우는 그 부분은 감췄다.
놀라운 건.
-알았어.
채유리가 이런 이강우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와 사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했다. 대답도 짧았다.
물론 원래 채유리는 말이 짧다. 길게 말하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강우가 채유리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감정을 모를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일단은 애인 사이인데.
이강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아직 제대로 연애도 안 했는데, 벌써 두고두고 잡혀 살 수밖에 없는 구실을 만드네.’
나중에 이번 일 때문에 채유리가 이강우의 바가지를 긁는 날이 어떻게든 올 것이다.
물론 이강우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빌어먹을, 사귄다고 한 게 6월 초인데 12월이 된 지금까지 제대로 데이트 한 번을 못 하네.’
6월 6일, 4등급 유적에 입장하기 전 채유리와 이강우는 사귀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그 이후 그 둘은 지금 12월까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말이 연인이지, 연인이 하는 뭔가를 해본 적이 없다. 서로 업어주는 건 해봤다. 채유리가 이강우를 업어주긴 했다. 뒤에 신기루호랑이란 무시무시한 괴물이 쫓아오긴 했지만.
사실 그래서 더더욱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다. 이강우도 나름 기대했다. 채유리와 함께 멋진 야경을 보면서 와인을 마시는 건…… 솔직히 채유리의 성격을 보면 와인을 즐기기보다는 그냥 뷔페를 작살 낼 각오로 식사에 집중하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식사를 하면서 나름 대화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에 대해 좀 더 아는 시간을 가지고…… 여하튼 그런 것들. 유적, 몬스터 같은 섬뜩한 것들이 아니라 평범하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예약도 이미 했다. 거금을 들였다. 아니, 이미 예약이 꽉 차 있는 바람에 인맥을 써서 자리를 마련했다. 이강우는 설마 자신이 4등급 유적 사냥을 마치고 얻은 인맥을 가장 먼저 쓰는 일이 크리스마스 호텔 뷔페 예약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가만, 크리스마스가 문제가 아니지. 6등급 유적 사냥을 만약 나 혼자 하게 된다면…… 구정도 힘들겠어.’
지금 크리스마스 계획만 문제가 아니었다. 구정에도 나름 계획이 있었다. 어머니가 건강을 되찾은 이후 가족이 한곳에 모여 명절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상황에서 구정만큼은 그렇게 보내고 싶었다. 추석 때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구정마저 가족과 보내지 못한다면? 그런다고 가족들이 이강우에게 불평불만을 토로할 일은 없다. 오히려 가족들은 이강우를 걱정해주겠지.
그게 싫다.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 모든 사실을 그대로 말해줄 순 없는 노릇. 말해주면 더더욱 걱정할 것이다.
“미안. 정말 미안해. 그런데 절대 위험한 건 아니야. 그냥 일이 좀 꼬여서 그래. 금방 연락할게. 나 없는 동안 잘 지내고, 밥 챙겨 먹고. 그리고 너무 단것만 먹지 말고. 채소도 좀 먹어.”
그렇게 이강우가 채유리와 통화하고 있을 무렵.
크로포드 역시 열심히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키드, 오랜만이야. 내가 그쪽에 전화 건 건 거의 반년만이지? 특별한 건 아니고, 네가 예전에 했던 제안 말이야. 그래, 그 제안.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만약 내가 비약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면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응? 아, 내가 만드는 건 아니야. 내 후계자. 소문은 들어봤지? 그래, 포식자 이강우. 그가 내 레시피를 이용해 만들 거야. 효과? 내 후계자가 내 이름을 걸고 만드는데 지금 의심하는 건가?”
통화를 하는 크로포드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그는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는 사실 이강우가 브랜드 제안,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사업 아이템으로 써먹고 싶다고 했을 때 환호성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의 얼굴에서 귀찮은 기색이 삽시간에 사라진 것도 너무 기쁜 탓이었다.
‘정말 내가 제대로 사람을 골랐어.’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크로포드만이 만들어낸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게 가능한 이는 전 세계에 숨겨진 이가 있다고 해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연히 크로포드는 많은 제안을 받았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제공해달라는 제안. 대가도 적지 않았다. 돈은 물론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주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 했다.
이유?
‘그 귀찮은 걸 대신해주다니, 고마운 녀석.’
귀찮으니까.
크로포드는 당장 블랙 스택과 미국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유적 사냥만으로도 이미 1년 일정이 빡빡하다. 그런 와중에 정부 업무와는 별개로 유적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잡고,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든다?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또한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업무인 만큼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유적 사냥과는 상황이 여러모로 다르다.
결정적으로 한 번 제대로 만들고자 하면 한 달은 필요하다. 한 달이란 시간을 유적에서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크로포드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그에게는 한 달 동안 일해서 억만장자가 되는 것보다, 한 달 동안 만화책을 보면서 과자를 까먹고, 그렇게 24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노는 게 더 가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강우가 그걸 대신해주겠다고 나서주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 하나씩 떠넘기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강우가 유명세를 떨치고, 본인이 알아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생산해준다면, 크로포드는 그 일 때문에 귀찮은 일도 사라질 것이다.
애초에 비협조적인 크로포드를 찔러보려는 시도를 할 바에는 이강우에게 먼저 접촉할 테니까. 그러면 이강우가 알아서 잘 처리해줄 것이다. 크로포드는 그 과정에서 나오는 로열티만 받으면 된다.
무위도식!
크로포드가 꿈꾸는 삶이다.
그걸 이강우가 해주려고 한다.
‘아.’
때문에 크로포드는 좀 더 떠넘기고 싶다.
‘빨리 이강우가 7서클 마법사가 됐으면 좋겠다. 그럼 모든 걸 떠넘기고 은퇴할 수 있을 텐데.’
빨리.
더 많은 것들.
크로포드란 이름 앞에 덕지덕지 붙은 귀찮은 것들을 전부 이강우에게 떠넘기고 싶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줄 건 다 줄까?’
결국 귀찮음이 크로포드를 움직였다.
* * *
미 대륙은 매우 넓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넓다. 보통 사람은 감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게 넓은 만큼 모래시계문도 많다. 6등급 모래시계문 정도는 필요하다고 하면, 맥도날드에서 맥드라이브로 주문을 하는 수준으로 구할 수 있다.
하물며 그 주문자가 보통 마법사도 아니고, 미국과 블랙 스택 그리고 세계를 대표하는 7서클 마법사 크로포드라면?
순식간이었다.
크로포드가 6등급 모래시계문이 필요하다고 통보를 하자마자, 곧바로 12시간 만에 철두철미한 호위를 받으며 거대한 트레일러트럭 한 대가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트레일러 안에는 모래시계문을 비롯해서 모래시계문을 관리하는 관리자들과 관련 장비들이 가득했다.
이강우는 트레일러 안에 있는 모래시계문을 바라보며, 주문 12시간 만에 도착한 모래시계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여긴 모래시계문을 찍어내나? 6등급을 무슨 피자 배달하듯 배달해주네?’
심지어 이강우는 지금 제대로 된 테스트 일정조차 설명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크로포드는 그저 테스트를 하겠다, 그러니까 6등급 유적을 들어가야 한다, 그 말만 했다.
어떤 테스트를 어떻게 보는지, 이강우가 유적에 혼자 들어가는지 아니면 크로포드와 함께 들어가는지, 그에 대한 통보는 없었다.
‘보통은 같이 들어가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강우와 크로포드가 같이 들어가는 게 맞다. 크로포드는 이강우를 테스트하려는 게 목적이고, 그렇다면 이강우가 유적에서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확실한 테스트다. 이강우만 혼자 보내는 건 위험하기도 하다. 아무리 어떤 경력을 붙여도, 이강우는 지금 4서클 마법사에 불과하니까.
‘크로포드 성격을 보면 나만 들여보낼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크로포드가 누구인가? 머리를 열면 아마 뇌 주름이 게으름, 귀찮음이란 글자로 접혀 있을 법한 인간이다. 그가 6등급 유적에 들어가서 이강우를 돕는다? 상상하기 힘들다.
또한 그는 이강우를 나름 잘 알고 있다. 이강우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이강우가 괜한 자존심 같은 것 때문에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이강우가 불가능하다 생각되면, 그가 절대 6등급 유적에 들어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더불어 이강우 입장에서도 어떻게 보면 혼자 들어가는 게 편하다.
‘바츠무의 손이나 절망의 태양은…… 솔직히 누가 보는 상황에서 쓸 수는 없어. 크로포드 앞이라면 더더욱.’
이강우는 6등급 유적 사냥에 있어서 리스크는 있을지언정, 그 리스크가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절망의 태양, 이건 바이러스야.’
그에게는 두 가지 권능이, 마법사의 마나 서클과 유적의 등급, 몬스터 등급이란 시스템을, 기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유적이란 시스템을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그냥 제멋대로 망가뜨리는 바이러스.’
절망의 태양이 가진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상처 하나만 내면, 저절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 그런 주제에 나중에 마력까지 흡수할 수 있다.
버그?
그런 종류의 힘이 아니다. 게임에서 등장하는 버그는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탄생한 불합리한 요소다. 반면 절망의 태양은 특정 시스템을 붕괴하기 위해, 명백한 악의를 가진 채 등장한 요소다.
그래서 더욱 위력적이고, 그래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 차라리 혼자 들어가는 게…….’
더불어 혼자 6등급 유적 클로즈 경력을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다. 이강우가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값을 높일 기회가 될 테니까. 솔직히 크로포드 도움 없이 이강우가 혼자 6등급 유적에 들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마법청은 이강우의 생명을 위해서라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그렇게 이강우가 생각을 바꾸며 각오를 할 무렵, 크로포드가 이강우의 예상과 똑같은 말을 했다.
“혼자 할 수 있어? 난 절대 안 들어간다.”
“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이강우는 마음속으로 정한 각오와는 다르게 한 번 튕겼다.
“그럼 하지 말아야지. 한국행 비행기 표 끊어줄까?”
“정말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해도 됩니까?”
“그럴 수는 없지.”
이강우의 말에 크로포드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이강우의 손에 쥐어줬다.
손에 쥐어준 건 열쇠였다.
“비밀벙커에 가면 상자가 하나 있어. 열쇠로 열어.”
“안에 뭐가 있습니까?”
“네가 저번에 먹은 거랑 비슷한 거. 보통 사람이라면 소용이 없겠지만, 너라면 효과가 있을 거야.”
무지개 포션.
이강우가 그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기한은 열흘이다. 열흘 내에 효과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거니까 모든 계획은 무효로 만들어. 반대로 효과가 있다면, 넌 지금과 다른 자격으로 유적에 들어가게 되겠지.”
크로포드가 친절한 설명과 함께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이제까지 크로포드와 이야기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명백한 적의와 살의였다.
“그것마저 네가 먹어 치우면 내가 가진 밑천 대부분을 네게 투자하는 게 된다. 효과가 없다면 그건 아무래도 좋아. 네 탓이 아니니까. 하지만 효과가 있고, 네가 득을 봤는데 나를 배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명심해. 너는 나를 대신할 대체자다. 네가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 됐음에도 내가 여전히 블랙 스택 밑에서 휴가 없는 나날을 보내는 일이 생기면…… 리볼버가 왜 리볼버인지, 피부로 체감하게 될 거야.”
그 경고에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정 안 되면 블랙 스택을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은퇴시켜 드리겠습니다.”
위기가 기회로 변했다.
* * *
2022년, 1월 18일.
새해가 시작되고, 첫 달의 절반이 훌쩍 지나갔다. 계절 역시 절정을 맞이한 듯 매우 추웠다.
그러나 즈믄나래는 이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정확히는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인 강희는 최근 추위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작년 10월, 4등급 유적 클로즈가 끝나고 한국의 마법계는 대대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이강우가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이강우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심지어 두 명의 6서클 마법사들마저 이강우의 편을 들어주며 마법청과 묘한 벽을 만들어둔 채 즈믄나래와 접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느낀 마법청 역시 움직였다. 마법청은 즈믄나래를 통해 이강우와의 협상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강우가 지금 미국에서 크로포드와 같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마법청의 귀에 들어갔다.
그렇게 되자, 마법청은 이강우와의 협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강우의 유출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강우를 통해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얻기 위해 일본과 중국마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태풍이, 그것도 하나의 태풍이 아닌 수십 개의 태풍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부딪치는 상황이다. 그 충돌 사이에 강희가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길드 마스터 직위를 내놓고 싶을 정도로 피 말리는 나날들.
그러나 강희는 오히려 이런 자신의 상황이, 처지가 마음에 들었다.
‘판이 알아서 만들어지는군.’
이 모든 상황은 오히려 그가 원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으니까.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왔군.’
그렇기에 강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이바노프에게 신호를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