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34화 (34/66)

34화. 결전

삑!

짧은 전자음이 들리자, 베이스캠프에 있던 마법사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디지털 시계를 바라봤다. 시계의 날짜가 10월 6일을 가리켰다.

이강우 역시 시계를 봤다.

‘4개월이 지났구나.’

6월 6일 4등급 유적에 입장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시간부로 10월 6일이 됐다.

그렇다.

4개월을 보낸 것이다.

‘하선우가 좋아하겠군. 이건 분명히 역사적인 현장이니까. 전 세계에서 4등급 유적에서 4개월 이상 버틴 건…… 밖은 아주 난리가 났겠군.’

6등급 유적에서도 4개월을 버티면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런데 4등급 유적에서 4개월 이상을 버틴다?

기념비적인 일이다. 이번 유적 사냥을 기점으로 한국 마법계의 역사는 물론 세계 마법계 그리고 모래시계문 역사가 새롭게 바뀔 것이다.

물론 밖에 있는 마법청 및 관계자들은 초조할 것이다.

혹시 지금 유적 안에서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는 건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건지, 후속 조치를 해야 하는 건지…… 고민 때문에 담당자들은 잠조차 설칠 터.

‘여기까지.’

그러나 반대로 4개월이란 시간은 통보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한계야.’

이강우가 곁눈질로 베이스캠프 내의 마법사들을 살폈다.

수색활동 중인 여섯 명을 제외하고 남은 아홉 명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는 모두가 괜한 생각을, 괜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연구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 머릿속으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아무리 보급품이 넘쳐나도, 먹을거리가 넘쳐나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식을 즐길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까.

하물며 유적이란 공간에서 4개월 동안 갇혀 있었다. 이제는 여유보다는 스트레스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아직 지도는 만드는 중이고.’

여기에 유적 탐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현재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었다.

이번 유적은 정말 넓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방의 숫자만 해도 99개가 넘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방의 크기도 커졌고, 가는 통로도 커졌다.

심지어 현재까지 잡은 몬스터의 숫자만 459마리였다. 평균 몬스터 등급은 7등급이었고, 5등급 몬스터만 네 마리를 잡았다.

멜트 드래곤만큼 어려운 녀석은 없었지만,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6등급 몬스터는 23마리를 잡았다. 7등급 몬스터를 얼마나 잡았는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마나스톤은 정말 산더미처럼 확보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강우]

-마력: 5서클 개발 중(51%)

-보유 마법: 7개

-마법 슬롯: 5개

-섭취 마력: 98,371포인트

이강우 역시 엄청난 성장을 거뒀다. 49퍼센트만 더 개발하면 5서클 마법사가 된다. 이번 유적 탐사 한 번만으로 50퍼센트 넘게 가깝게 마나 서클을 개발한 셈이니, 놀라운 성과다.

가장 큰 성과는 역시 섭취 마력이다.

갑자기 30만을 넘어가던 마력이 사라진 이유, 당연히 구매를 했다는 증거다.

50만 포인트를 들여서 플래티넘북을 구매했다.

달리 말하면, 이강우가 유적에서 얻은 포인트가 어마어마하다는 의미다.

‘히든카드는 마련됐고.’

이강우가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런 이강우에게 이번 유적 최후의 과제가 왔다.

* * *

거미 로봇이 멈췄다.

녀석을 멈추게 한 건 다름 아니라 혹한이었다. 단순히 차갑다, 그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냉기가 거미 로봇이 가진 모든 기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런 거미 로봇이 마지막으로 보내준 영상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인 통로, 그 통로 끝에 펼쳐진 어둠이었다.

그 영상을 비추던 모니터 앞에 선 안중현이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탐사 장치로 이 이상 진입이 불가능합니다.”

“온도가 문제인가?”

“아닙니다. 온도는 영하 30도 수준입니다. 춥지만, 탐사 로봇이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 말에 마법사들은 놀라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영향…… 몬스터가 있다는 의미로군.”

“그런 종류가 있지. 몸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전자장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놈들. 디지털 킬러들.”

그 상황에서 안중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말하자면, 이곳에 4등급 몬스터 및 출문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처음이었다.

안중현은 이제까지 수색팀 리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4등급 몬스터와 출문이 있으리란 추측을 뱉은 적이 없었다.

수색팀 리더인 본인이 그런 추측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그 말을 꺼냈다.

모두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안중현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그만한 확신이 있다는 의미.

무엇보다.

“드디어 왔군.”

“그래,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지.”

모두가 그 말을 기다렸다. 이제 더 이상 스트레스밖에 남지 않는 이 유적 사냥을 끝내고 싶기에.

물론 이 끝내기는 그 무엇보다 어려울 것이다.

안중현은 좌중의 소란이 끝나길 기다렸고, 좌중의 소란이 잠잠해졌을 때 말을 이어갔다.

“때문에 4등급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그 순간 공은 몬스터 사냥을 지휘하는 돌격팀의 리더인 김지홍에게 넘어갔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4등급 몬스터가…… 12종이었나?”

4등급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일단 4등급 유적 자체를 클로즈 할 수 있는 세력이 몇 곳 없다. 한국 정부가 스택 레코드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다. 칠성문이나, 이존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는 확보할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알고 있는 12종도 대략적인 형태와 특징 정도를 알고 있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확실한 공략법, 정말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약점을 알고 있는 경우는 없다.

아니, 4등급 몬스터쯤 되면 약점을 노린다…… 같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일단 4등급 몬스터에 대한 논의를 하기 전에 4등급 몬스터를 잡아 본 경험을 토대로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4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약점을 찾는 건 무의미하네.”

꾀를 쓰는 건 좋다. 함정을 파는 것도 좋고, 미끼를 쓰고, 유인을 하고, 독을 쓰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건 아무래도 좋다.

“약점을 만들어야지, 찾으려고 하면 안 돼.”

하지만 여기가, 이게 약점이니 거길 공략하자, 그런 마음은 안 된다.

약점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한다.

김지홍의 조언에 모두가 긴장했다.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봤던 4등급 몬스터는…… 폭탄방울뱀이었지.’

이강우도 4등급 몬스터를 본 경험이 있다. 총꾼이 되기 전, 군인 시절에 본 4등급 폭탄방울뱀을 본 경험이다.

솔직히 이강우는 지금도, 나름 마법사가 됐고, 바츠무의 손을 비롯해서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은 지금도 폭탄방울뱀 같은 괴물은 도무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녀석의 꼬리에 맞으면 건물이 날아갔는데, 아무리 아이기스 슈트에 강화 마법이라고 해도 맞으면…… 끔찍하겠군.’

그런 괴물과 싸우는 일.

아차, 하는 실수가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

“일단 폭탄방울뱀은 아니겠군.”

그렇게 논의가 시작됐다.

“녀석은 전자파 차단 기술 같은 것도 없고, 얼음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가장 먼저 배제된 건 폭탄방울뱀이었다.

폭탄방울뱀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인 중에는 없다. 한국에 등장한 최초의 4등급 몬스터였고, 몬스터에 대한 경각심을, 적어도 정부가 몬스터 처리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써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게끔 해준 녀석이다.

그런 만큼 폭탄방울뱀에 대한 정보는 다른 4등급 몬스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국 정부는 녀석의 사체를 가져다가 마법청이 세워지기도 전에 한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 연구를 했으니까. 공략법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폭탄방울뱀이 이 유적의 주인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폭탄방울뱀은 추운 공간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얼음…… 블리자드 리자드가 떠오르는군.”

“역시 지금 주어진 정보라면, 모든 마법사가 그놈을 떠올리겠지.”

반면 4등급 몬스터인 블리자드 리자드는 단숨에 1순위 후보가 됐다.

이강우도 블리자드 리자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4등급 유적에 들어오기 전, 마법청이 4등급 몬스터에 대한 정보 전부를 줬으니까.

‘몸길이 5미터 남짓. 덩치는 작은 편이지만, 녀석의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으면 동상(凍傷)으로 사지 절단, 운이 나쁘면 동사(凍死)로 저승행.’

큰 놈은 아니지만,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냉기를 내뿜는 놈이었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뿜어진 냉기는 그 어떤 갑옷보다 단단했으며, 냉기로 만들어진 만큼 손상을 입어도 순식간에 복구가 됐다. 특히 도마뱀 주제에 드래곤 브레스처럼 입에서 어마어마한 냉기를 내뿜는데, 그 냉기는 거의 사망선고나 마찬가지다. 노출되면 죽는다. 그 냉기를 조금이라도 흡입하면 폐가 얼어 버려 수술마저 불가능해지니까.

‘아니길.’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다.

하물며 그런 놈이라면 이강우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감히 달라붙을 수 없는 놈을, 근접전을 펼치는 이강우가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닌가?

“설귀신(雪鬼神)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

“하긴, 녀석이 어떤 의미에서는 몬스터 중에 가장 유명한 디지털 킬러이니까.”

설귀신도 후보에 올랐다.

2015년 무렵 중국 상해에 등장한 놈은 설인처럼 하얀 털로 뒤덮인 4미터 신장의 괴물 원숭이로, 블리자드 리자드와 다르게 한기를 내뿜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마치 EMP처럼, 자신 주변의 전자 기기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속칭 디지털 킬러로 불리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과 별개로 설귀신은 꽤 수준급의 은신 능력과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설귀신이면 좋겠군.”

“디지털킬러 능력으로 4등급이 됐을 뿐, 전투 능력 자체는 5등급 수준이니까.”

하지만 특수 능력을 제외하면 현재 여기 모인 마법사들이 알고 있는 12종의 4등급 몬스터 중에 전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놈이었다.

그냥 최하위다.

만약 녀석이 적이라면 이번 유적 사냥은 정말 깔끔하게 끝이 날 것이다.

“신종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지.”

물론 이런 논의 자체가 무용지물일 수도 있다. 신종 몬스터와 조우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실제로 4등급 몬스터의 종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4등급 유적 사냥은 현재 진행형이니까.

“신종일 경우에는?”

“주변 상황을 통해 예측을 해야지.”

“목숨을 건 도박이군.”

신종이라면 결국 예측을 통한 공략으로 나서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유적 사냥이 순조로웠던 건 축적된 정보 덕분이었고, 반대로 정보의 부재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는…… 도박이란 표현이 틀린 게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얻으면 도박에서 이길 확률이 올라간다.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안중현이 입을 열었다.

“수색팀의 희생을 감수하고 정보를 파악하는 것도 작전의 한 가지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수색팀의 역할은 본래 목숨을 담보로 정보를 확보하는 일이다. 지금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수색팀이 목숨을 너무 아끼면, 오히려 전체가 위험해진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이번 유적 사냥은…… 그리고 앞으로 이들이 하게 될 유적 사냥은 언제나 그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안중현이 가장 먼저 목숨을 걸 것이다. 멜트 드래곤 때도 그랬고, 이후 5등급 몬스터를 세 마리나 더 잡는 과정에서도 안중현은 앞장서서 활약했다.

‘안중현을 이번 유적 사냥에 포함시킨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

‘어중간한 5서클 마법사보다는 안중현이 유적 사냥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 이건 확실해.’

‘이번 유적 사냥이 끝나면 안중현은 앞으로 마법청이 주관하는 4등급 유적 사냥에서 무조건 베스트 멤버에 포함되겠지.’

이번 유적 사냥에서 새로운 발견은 아마 안중현이 될 것이다. 안중현이란 사내의 주가는 아마 엄청 솟아오를 것이다.

물론 그런 부분에서는 독보적인 건 따로 있다.

‘이강우의 주가는 이제 그 무엇과도 비교 불가한 것이 될 테고.’

바로 이강우다. 안중현의 경우에는 4서클 마법사란 점만 빼면 나머지 부분에서 이미 나름의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이강우는 소문만 있었다. 소문이 무성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강우가 이번 유적 사냥에서 어마어마한 진가를 드러냈다.

4개월 동안 소모한 보급품은 1개월 치도 채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보급 식량을 간식, 별식 취급하듯 먹을 정도였다.

동시에 이강우가 아니었다면 이번 유적 사냥은 어떤 의미에선 위험했다. 보급품만으로 4개월을 버티는 건 정말 힘들었을 테니까. 물론 도축 기술이 이강우만의 기술은 아니고, 요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요리를 먹는 걸 낙으로 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식사 자체가 또 다른 곤욕이었을 뿐.

결정적으로 이강우의 요리에는 힘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마나 서클을 자극하는 진짜 힘이.

새로이 마나 서클을 개방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산이란 게, 정상에 다다라야만 산이란 걸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초입에만 올라도 산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법이다. 마나 서클도 똑같다.

‘이번 유적 사냥이 끝나면 이강우의 이름과 그의 별명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겠지.’

안중현이 정말 데려갈 만한 인재라면, 이강우는 그런 안중현이란 인재를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설 것이다.

물론 지금 논의할 건 그게 아니다.

수색팀이 리스크를 담보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정보를 얻느냐, 그걸 논의할 때다.

사실 논의하고 자시고도 없다.

수색팀이 리스크를 짊어지는 건 당연하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김지홍이 입을 열었다.

“안중현,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겠네.”

그 말에 안중현은 당연히 모두가 예상하는 판단을 내렸다.

“수색팀이 진입하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감탄했다.

‘정말 멋진 사내군.’

‘5서클 마법사라면…… 5서클만 된다면 정말 엄청난 활약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대신에 이번 수색에 앞서서 부탁이 있습니다. 5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안중현의 말에 모두가 경악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이번 유적 사냥에 정말 기분 좋은 변수가 등장했다.

* * *

안중현이 자신이 5서클에 도달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건, 유적 입장 110일째 무렵이었다.

지금 이 순간, 5서클에 도달했음을 밝히는 순간으로부터 열흘 전에 짐작은 했다.

그런데도 당장 그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건,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5서클 마법사란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5서클 마법을 써보는 게 가장 확실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자신의 가슴 속에 피어난 이 힘이 정말 다섯 번째 서클인지 아니면 자신의 착각인지 처음에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과거 단계적으로 마나 서클을 개봉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으니까.

그 전에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강우에게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마나 서클 근처에 새롭게 피어난 싹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어제 확신이 섰고.

‘난 5서클 마법사다.’

확신이 섰기에 그 사실을 처음으로 타인에게 공개했다.

당연히 모두 놀랐다. 경악했다. 하지만 그 경악이 의심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지금 일어난 일을 여기 모인 마법사들은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이강우, 그가 있으니까.

곧바로 모두가 이강우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누군가는 곁눈질로.

분명한 건, 모두가 바라봤다.

그리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

‘결과가 나오다니!’

‘느낌은 왔지만, 진짜라니!’

모두가 나름 효과는 직접 체험했다.

아니, 자신들의 마나 서클이 계속해서 외부 요인으로 자극받는 느낌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작 몬스터 고기 좀 먹는다고 당장 없던 마나 서클이 새로이 개방될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이 세상에 6서클, 7서클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결과가 나왔다.

우연?

분명 이강우의 요리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러 요소가 겹쳤을 것이다. 안중현의 경우에는 4서클이 된 지 제법 됐다. 그가 즈믄나래에 들어올 때부터 그는 4서클 마법사였으니, 그가 4서클에 도달한 지 3년 이상은 된 셈이다. 그 상태로 그는 답보 상태에 빠졌지만, 안중현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가 훈련을 게을리했을 리는 없다. 안 되더라도, 주어진 훈련은 계속할 것이다. 티끌의, 일말의 희망과 가능성을 가진 채로.

그렇게 쌓인 것이 작은 자극으로 터진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정황으로 보면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강우는 그저 정상 근처에서 길을 찾지 못해 맴도는 인간에게 정상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준 것 정도, 그 정도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효과는 효과다.

그건 곧 이강우는 모든 마법사가 마나 서클 개방을 앞두고 부족한 2퍼센트를, 라스트 피스를 채울 수 있는 능력,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

이강우 역시 놀랐다.

‘벌써?’

나름 의도는 했다.

그리고 안중현에게는 더 많이 신경을 써 줬다. 이강우, 본인이 먹기 위해 따로 쟁여둔 것 중에 일부를 나눠줬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효과를 볼 줄이야?

‘채유리랑 비슷한 케이스였나?’

물론 이강우도 순전히 본인의 역할 때문에 안중현이 5서클에 도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 내가 손해 볼 건 없지.’

분명한 건 이강우는 이 사실을 거부할 필요도, 싫어할 필요도, 마다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안중현의 5서클 개방, 이강우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득이다.

‘베스트 시나리오군.’

일단 이걸로 이강우는 안중현에게 확실한 끈을, 절대 안중현 본인이 먼저 끊을 수 없는 끈을 연결했다.

안중현은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니니까.

이강우가 준 이득 이상을 돌려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광고도 확실히 됐고.’

더불어 이번 일은 분명한 근거가 될 것이다.

안중현은 수년 동안 4서클에서 정체기를 겪었다. 누가 보더라도, 모든 마법사들이 보더라도 안중현의 재능이, 한계가 4서클이란 증거였다. 그런데 이강우가 그걸 깼다. 대한민국 최고의 마법사들 앞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이 효과?

‘리볼버도 하지 못한 걸 내가 한 셈이군.’

마나 서클 자극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리볼버 크로포드도 이강우 정도 되는 결과를 보여준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크로포드가 그런 걸 할 리가 없다. 자기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하는 양반 아닌가?

심지어 그런 식으로 유명해지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 기회가 와도 일부러 하지 않을 터.

실제로 그가 만든 마나 서클 자극 비약 엘릭서도 세간에서는 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이강우에게도 기회를 준 건, 이강우가 자신을 대신해 노예처럼 굴러줄 자질이 있어서 그런 거지, 다른 사람에게 그가 호의를 보일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법, 더욱이 크로포드는 이강우의 명성을 반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중현이란 전력이, 5서클 마법사가 새로이 추가됐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큰 메리트가 있다.

다다익선, 많아서 나쁠 건 없다. 또한 안중현은 마나 서클만 없을 뿐이지, 마법을 쓰는 센스는 정말 훌륭하다.

당연히 그런 안중현이 5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 반대는 없었다.

“내 것을…….”

“내 거를…….”

“내 것을 쓰, 어?”

곧바로 5서클 마법사로 새롭게 태어난 안중현을 위한 돌잡이 자리가 마련됐다.

* * *

안중현이 혼자서 수색을 나서겠다고 각오를 밝히는 순간, 모두가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게 마지막.’

‘모든 걸 얻거나, 모든 걸 잃거나.’

수색을 한다는 건, 결국 작정하고 마지막 결전을 치르겠다는 의미. 그런 상황에서 최후방이나 다름없는 현재의 베이스캠프에서 최전방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지원을 간다고 해도 그 지원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

“이동에 앞서서 청소를 시작하지.”

그럼 당연히 전진기지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예.”

그것을 위해서 몬스터를 몰살시켰다. 몬스터의 위협을 최대한 줄인 채 활동이 가능하도록, 오직 4등급 몬스터만을 상대할 수 있는 무대를 위해서.

그렇게 새로운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몬스터를 제거하고, 안전이 확보된 루트를 통해 필요한 물품을 운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후에 하루가 더 지난 뒤 안중현이 수색에 나섰다.

준비는 철저했다.

안중현은 멜트 드래곤과의 조우에서 파손당한 자신의 아이기스 슈트 대신 다른 마법사의 아이기스 슈트를 착용했고, 그 외에 마법 무기를 비롯한 포션과 마법 아티팩트까지,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착용했다.

온몸에 빌딩 한 채 값을 둘렀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

직접 4등급 몬스터가 있을 방을 향해 이동하는 안중현은 당연히 긴장했고, 그런 안중현에게 마인드맵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게 될 마법사들 역시 긴장했다.

‘후우.’

89번 방에 대기하던 안중현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진입하겠습니다.

그가 마인드맵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동시에 안중현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말했다.

‘낌새만 보면 된다. 지금 상황은 내가 목숨을 희생하는 것보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

이번 수색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희생이 숭고해지는 상황이 절대 아니다.

지금 등장한 몬스터는 디지털 킬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 기기를 이용할 수 없다.

카메라 같은 장치를 이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결국 안중현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은 안중현 본인이 그대로 전달하는 게 베스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무엇보다 위험한 짓을 자처하면서, 살기는 바란다는 것, 어찌 보면 모순이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믿어라.’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난 5서클 마법사다.’

그리고 이 순간 안중현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안중현이 그 각오를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돌격팀 그리고 지원팀도 움직인다.”

다른 마법사들 역시 움직였다.

* * *

계획대로 상황이 끝난다면, 안중현이 수색을 통해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하고 전진기지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대로 상황이 진행될 가능성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안중현이 수색 도중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4등급 몬스터와 교전을 치를 수도 있고, 반대로 4등급 몬스터를 적당한 장소로 유인해서 오히려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나쁜 상황이든, 좋은 기회든 그냥 모두가 마인드맵을 통해 머릿속에 울리는 안중현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건 의미가 없다.

때문에 시나리오 외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두 개의 팀을 만들었다.

돌격팀 그리고 지원팀.

돌격팀의 역할은 만약 안중현이 4등급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하고 유인에 성공했을 때, 그 몬스터를 향해 돌격을 하는 것이었고.

지원팀은 안중현이 위기에 빠지거나 전투가 시작됐을 경우 전체적인 지원하는 게 역할이었다.

돌격팀의 경우에는 김지홍, 고재응, 채유리, 이렇게 6서클 마법사 세 명과 하선우, 김재범을 더해 다섯으로 구성됐고, 전진기지에 남는 두 명의 마법사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은 지원팀에 포함됐다.

여기서 이강우는 전진기지에 남는 역할을 맡았다.

도축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럼 전투력을 기준으로 팀을 구성해야 하는데, 아무리 이강우가 센스가 좋고,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강우는 지금 이 파티의 유일한 4서클 마법사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화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가 가장 먼저 전투에서 배제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이강우는 이런 자신의 역할과 처지에 불만을 가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이 잘 풀리면, 그것으로 오케이다. 자신이 딱히 하는 것 없이 전투가 끝나면 그건 베스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치고 이강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그 누구도 절대 믿지 못하겠지만, 이강우는 만약 이번 유적 사냥 파티가 4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궤멸에 가까운 위기를 맞이했을 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최강의 카드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게 이강우가 표정을 구기고 있는 이유였다.

‘과연 내가 나서야 할까?’

물론 그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역시 고민의 이유였다.

‘모두가 전멸을 앞두고 있을 때, 누군가의 죽음을 앞두고 내 비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비밀이 공개되는 걸 감수하고 전투에 나설 것인가…… 골치 아프군.’

이강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건 새롭게 습득한 마법, [절망의 태양] 때문이었다.

‘역시 인생은 한 방인 것 같아.’

[절망의 태양]

-5서클 마법.

-적에게 절망을 선사하는 마력의 태양을 만들어냅니다.

플래티넘북을 개봉했을 때, 이강우는 솔직히 이 마법의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느낌이 오지 않았으니까.

무언가 특별한 마법일 테고 기대는 됐지만, 절망 그리고 태양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상상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사용할 틈이 없었다.

5서클 마법이라면, 이강우의 지금 능력으로는 버닝 마나를 쓴 상황에서만 사용 가능한 마법이다.

남들 눈이 없는 곳에서나 시험해 볼 수 있는데, 그런 개인적인 활동은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회만 가늠하고 있었다. 이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다행히도 그런 기회는 금방 왔다.

그런 이강우를 위해 불사황제가 다시 한번 나서줬으니까.

‘이럴 땐 고맙단 말이야.’

전진기지에 제2의 베이스캠프를 확보하고 수면을 취했을 때, 이강우의 꿈에 불사황제가 다시금 등장했다.

그 꿈에서 불사황제는 이강우에게 절망의 태양이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줬다.

불사황제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의 마력이 손바닥에 모였다. 모인 마력은 검은색 구체가, 지름 2미터짜리 구체가 되었고, 그 검은 구체는 이윽고 불사황제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불사황제는 제 손을 칼처럼 휘두르며 이강우의 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러나 이강우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고, 그렇게 불사황제가 이강우를 난도질할 때마다 이강우의 몸에서 잘려 나온 살점과 상처를 통해 흘러나온 핏물이 불사황제의 머리 위에 있는 검은 구체로 빨려 들어갔다.

단순히 살점과 핏물만을 먹어 치우는 게 아니었다.

이강우가 가진 힘도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력은 물론 정신력과 체력, 집중력까지! 비명을 내지를 힘까지 빨아들였다.

그렇게 이강우의 모든 힘을 빨아들인 구체는 점차 커졌다. 점차 커지면서, 섬뜩한 열기를 만들어냈다. 사막 위에 떠 오른 태양처럼, 그 구체가 내뿜는 열기는 점차 강해지면서, 모든 걸 빨린 이강우를 더 바짝 메마르게 만들었다.

지옥이었다.

꿈이었지만, 그 꿈속에서 그냥 죽고 싶었다. 자살을 하고 싶은데, 자살할 힘조차 없어서 자살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제까지 불사황제가 나온 꿈 중에서 좋았던 꿈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동안의 꿈이 정말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희열도 차올랐다.

이 힘이!

이 놀라운 마법이!

이 어마어마한 것이 자신의 것이 됐다는 사실에 대한 희열감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힘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렇게 메마른 채, 모든 것을 빨린 채 많은 절망과 약간의 희열만이 남은 이강우에게 불사황제는 말했다.

“너를 위한 마법이다. 너를 위해, 나의 그릇을 위해, 나의 숙원을 위해 나의 권능을 쪼갰다. 오롯한 권능을 얻고 싶다면, 네 스스로를 살찌워라. 검붉은 책이 그것을 가능케 해줄 것이다. 절망의 태양을 놈들조차 겁에 질리게 만드는 재앙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명심하라, 검붉은 책이다.”

검붉은 책.

구매 시도조차 자격이 없어 하지 못했으며, 가격조차 알지 못했던 그 책의 정보를 알게 됐다.

어쨌거나 이후 꿈에서 깨어난 이강우는 꿈에서 겪은 그 고통과 절망에 대한 후유증 속에서도 그 힘을 제대로 가늠하며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렸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만난 네 마리의 5등급 몬스터들, 그들의 머리 위에 절망의 태양을 뜨게 했을 때의 광경을 상상했다.

필승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패배하는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겁에 질린 채 도망치는 몬스터들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이게 자신감의 이유였다.

동시에 근심의 이유였다.

‘이 힘을 다른 마법사들이 본다면, 가뜩이나 멜트 드래곤 전투 후에 의혹이 남은 상황에서, 그들은 나를 분명하게 의심하겠지.’

절대 남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는 힘이 아니었으니까.

몰래몰래 써먹을 수 있는 바츠무의 손과는 차원이 다른 마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꼭꼭 감추는 게 정답일까? 그것 역시 아니다.

만약 채유리가, 안중현이 위기에 빠졌을 때, 4등급 몬스터를 어떻게든 처치해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게 됐을 때 혹은 이강우 본인이 4등급 몬스터를 처치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때도 과연 감출 수 있을까?

아니, 4개월 넘게 동고동락한 동료들이 몬스터에게 죽어가는 와중에, 비밀 유지를 위해 그들 전부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만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안중현이 목숨을 건 수색에 나서는 순간에도 내놓지 못한 채 고민 중인 상황.

‘그냥 이대로 순조롭게 사냥이 끝나는 게 베스트.’

때문에 이강우는 부디 이번 사냥이, 안중현의 활약과 다른 마법사들의 활약으로 무리 없이, 계획대로 끝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를 하는 이강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기도하는 대상은 단 한 번도 이강우의 기도를 제대로 들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마지막 방에 걸린 숫자는 100이라는 숫자였다.

100번 방.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숫자다. 혹은 완벽한 숫자라고 할 수도 있을 터.

그 100번 방과 이어진 통로, 현재까지는 발견된 유일한 통로인 782번 통로에 진입한 안중현은 슬슬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기스 슈트 덕분에 몸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한 수준의 오한.

안중현은 좀 더 전진했고, 그의 시야에 정지된 로봇이 보였다.

‘여기서부터군.’

저 로봇이 정지된 부근이 지금 찾고 있는 4등급 몬스터의 특수 능력, 디지털 킬러 능력이 미치는 부근이란 의미다.

굳이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그 사실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안중현은 여기서 야간 투시경을 벗었다. 시야가 어둡게 변했다. 그 어두운 시야 속에서 안중현은 자신의 목덜미를 통해 나온 고무 빨대를 이용해 마력 회복 포션을 입안에 머금었다. 개구리처럼 볼을 부풀린 채로 안중현이 4서클 마법, 뷰(View)를 발동시켰다.

뷰 마법.

어둠 속 세상에서 어둠을 삭제해주는 마법이다.

4서클 마법이다. 야간 투시경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냥 사람의 눈 자체를 야간 투시경을 초월하는 눈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잿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둠으로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을 뚜렷하게 분간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시력 자체도 엄청나게 증가한다. 매의 눈 정도가 된다.

효용 가치는 무궁무진, 하지만 문제는 마력 소모가 상당하다. 마법을 시전할 때만 마력이 소모되는 게 아니라 마법을 유지하는 데에도 상당한 마력이 소모된다. 5서클 마법사가 된 안중현이 마력 회복 포션을 야금야금 목으로 넘겨야 할 정도다.

‘보인다.’

어쨌거나 뷰 마법 덕분에 밝아진 시야를 통해 안중현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안중현은 그렇게 선명해진 시야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얼음으로 덮인 통로 너머 100번 방 속에서, 잿빛 시선 속에서 보이는 호랑이 한 마리.

-외형은 호랑이. 평범한 호랑이와 형태는 비슷하다. 색은 정확히 구분이 가지 않으나, 줄무늬가 살아 있는 것처럼 몸 위를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몸길이는 4미터, 꼬리를 합치면 5미터는 넘을 듯하다.

여기서 안중현은 이를 꽉 물었다.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 놈이 자신을 바라보는 안중현을 발견하고 안중현을 향해 눈빛에 살의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놈이 사라졌다.

안중현을 향해 살의를 품던 녀석이 품었던 살의와 적의, 두 가지와 함께 존재를 감췄다.

꿀꺽!

여기서 안중현은 단숨에 마력 회복 포션을 삼켰다. 고민할 틈도, 보고할 틈도 없다.

녀석이 움직였다.

그럼 대응해야 한다.

안중현은 마력 회복 포션 덕분에 금방 차오른 다섯 개의 마나 서클, 그 마나 서클을 손에 차고 있는 팔찌에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발로 땅을 한 번 크게 굴렀다.

그러자 안중현의 발자국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길은 앞으로 전진했고, 전진하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신의 몸집을 키웠다. 단숨에 거대한 통로를 꽉 채울 정도가 됐고, 그 상태로 빠르게 전진했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을 하는 속도로 질주했다. 화력도 무시무시했다. 질주하면서, 통로를 덮고 있던 얼음이 삽시간에 물이 되고, 증발했다.

5서클 마법 불도저!

보통은 그냥 다가오는 몬스터조차 불도저처럼 밀어 버리고, 태워 버리는 무시무시한 마법이지만 지금은 시간 벌이용이었다. 안중현은 마법을 쓰자마자 고무 빨대로 마력을 머금으며, 곧바로 후퇴를 했다.

그제야 안중현이 보고를 했다.

-놈에게 은신 능력 혹은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다. 또한 놈이 내 존재를 파악했다. 추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96번 방으로 이동하겠다.

* * *

안중현이 정보를 건네주는 순간, 마인드맵이란 공간은 모든 마법사들의 의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몸길이가 4미터에서 5미터 사이?

-작군. 4등급 몬스터 치고는 소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유적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대형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은신 능력이 있는 건가?

-신기루 같은 건가?

-그럼 가칭으로 신기루호랑이란 이름을 붙여야겠군.

-글쎄, 멜트 드래곤이나 불꽃꼬리처럼 형태를 바꾸는 능력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지. 그보다 몸에서 냉기가 나오는 건 녀석의 능력인가? 아니면 녀석의 방에 얼음을 만든 다른 요인이 있는 건가?

-녀석이 디지털 킬러 능력을 가졌다면…… 감시 장치를 통해 녀석의 위치를 한 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군! 방마다, 길목마다 카메라나 감시 장치가 있으니까, 녀석의 동선을 한 번은 파악할 수 있겠군!

그 토론은 난잡했지만 귀한 정보들, 판단들이 속속 등장했다. 가치가 넘치는 토론이었다.

물론 가장 긴박한 건 안중현과 돌격팀이었다.

-안중현, 지금 어디에 있지?

-96번 방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2분 안에 도착합니다.

-이쪽은 준비가 끝났다. 추격 중인가?

-알 수 없습니다.

-전진기지입니다. 현재 안중현의 이동 루트에서 10초의 텀을 두고 카메라를 비롯한 감시 장치가 무용지물이 되고 있습니다. 놈이 안중현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안중현, 절대 통로의 직선경로에 서 있지 마라. 지원팀은 대기하라.

96번 방은 2개의 통로를 가진 방으로, 특징은 2개의 통로 입구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방이 사과라면, 2개의 통로는 사과를 관통하는 화살과 같은 형태였다. 통로 자체도 굉장히 곧게 뻗어 있었다.

저격을 위해 이보다 좋은 방은 없다.

그래서 이 방이 함정으로 선택됐다.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명궁이란 최강의 저격수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안중현이 96번 방을 향하는 사이, 다른 이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베타팀, 빈집 텁니다.”

지원팀 내의 마법사 중 한 명이 곧바로 로봇을 원격으로 조종했다.

안중현이 디지털 킬러인 가칭 신기루호랑이를 밖으로 끄집어냈다면, 이제 방 안으로 로봇이 들어갈 수 있을 터.

그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다.

또한 은밀하게 속도를 낮출 필요도 없었다. 로봇 역시 은밀한 거미 로봇이 아니라, 바퀴 달린 RC카 로봇이 빠른 속도로 100번 방을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 100번 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오케이! 출문 발견!

500평은 될 법한 100번 방, 얼음으로 뒤덮인 그 공간 안에 있는 크리스털수정 재질의 거대한 문을.

-드디어!

-이제 탈출구는 찾았군.

얼음 때문에 그 형태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았지만 분명 출문이었다.

장장 4개월이 넘는 탐사 끝에 드디어 출문을 발견한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통로는 없었다. 들어오는 통로가 유일한 통로, 마지막 방이라는 의미!

-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100번 방의 천장 위에 칼 한 자루가, 자루 없이 날만 있는 칼날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 칼날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강력한 한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누가 보더라도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그냥 아티팩트가 아니라 전후 사정을 보면, 필시 6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6서클 아티팩트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100번 방 내의 얼음은 6서클 마법 아티팩트 때문으로 추측된다.

유적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출문 근처에 있으니 회수하자마자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점이 아니었다.

-그럼 신기루호랑이와 방을 얼린 냉기는 연관이 없는 건가?

얼음은 마법 아티팩트에 의한 현상.

호사(好事)의 연속이다.

출문을 발견했고,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발견했고, 신기루호랑이가 냉기 발산 능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여기에 지금 신기루호랑이는 함정으로, 최강의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알아서 가는 중이다.

녀석만 잡으면, 모든 건 끝이다. 남은 건 파티를 즐기는 것뿐. 그것도 이 칙칙한 유적 속이 아닌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이 마련된 곳에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유적.

거듭된 호사(好事)를 누리면.

-긴급! 긴급! 현재 지원팀이 위치한 93번 방으로 향하는 통로의 감시 장치가 연달아 기능이 정지하고 있다.

다마(多魔)를 의심해야 하는 곳이다.

-뭐?

-96번 방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둘이다! 둘이 움직인다!

적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아, 아니, 셋인 것 같다. 세 방향에서 감시 장치 기능이 정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마(多魔)였다.

* * *

5서클 마법사 정도 되면, 연달아 혹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가 달라진다.

그런 만큼 마법 세팅의 폭이 넓다. 지원팀과 돌격팀이 나뉜 이유는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었다.

지원팀의 경우에는 5서클 마법이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외의 마법들 세팅은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적에게 강력한 대미지를 주기보다는 적의 이목을 가리거나, 시간을 끌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버프 마법을 걸어주거나.

그 덕분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원팀은 용케 피해 없이 도주할 수 있었던 건.

한편 전진기지에서 이런 상황들을, 모니터링을 하면서 정보를 전달해주는 이강우는 당황했다.

‘갑자기 세 마리로 늘어나다니?’

신기루호랑이.

분명 안중현을 추격할 때는 한 마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두 마리가 되더니, 어느 순간 세 마리가 됐다.

그럼 세 마리가 있는 걸까? 원래 세 마리가 있었던 걸까?

하지만 세 마리였다면 안중현이 놓쳤을 리 없다. 그럼 신기루호랑이 외에 다른 몬스터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다른 종류의 몬스터까지 디지털 킬러 능력을 가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디지털 킬러 능력은 쉽게 볼 수 없는 능력이다.

‘분신 혹은 증식.’

여기서 이강우는 신기루호랑이가 분신을 만들어내거나 혹은 자신 자체의 존재를 증식하는 능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비단 이강우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분신인가?

-분신이면 차악. 증식이면 최악.

다른 마법사들도 비슷한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분신의 경우에는 본체가 따로 있고, 분신이 여러 개 생기는 타입을 의미한다. 본체만 죽이면 분신도 죽는다. 그래서 이 경우는 차악이다.

반대로 증식은 똑같은 개체가, 본체가 계속 생겨난다.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다.

물론 증식에는 대개 한계가 있다.

또한 증식을 거듭하면 제아무리 대단한 몬스터도 약해진다는 게 현재는 정설이다.

하지만 상대는 4등급 몬스터다. 약해진다고 해도, 그 강함은 어마어마하다. 특히 이곳 유적은 머릿수가 많은 게 어떤 식으로든 변수를 만들 수 있다. 만약 신기루호랑이의 개체 수가 열 마리가 넘어간다면…….

-생각보다 상황이 꼬일 수도 있겠어. 그러니 출문을 통한 탈출도 염두에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위험성을 자각한 누군가가 의견을 내세웠다.

타당했다.

긴급 탈출을 하면 값비싼 외골격 슈트를 비롯해 유적에서 얻은 모든 수확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연구 자료와 마나스톤을 비롯해 마법 아티팩트는 충분히 가지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 가지고 나가도 적지 않은 수확이고, 때문에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언제든 그것들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잘 보관하고 있었다.

전진기지에 남아있는 이강우와 구소영의 역할이기도 했다. 마인드맵 마법을 펼치는 구소영은 이동하면서도 마인드맵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때 모니터링을, 분할된 화면을 보던 이강우의 눈에 화면 하나가 꺼지는 게 보였다.

이강우가 머릿속으로 말했다.

-769번 통로 감시 장치 기능 정지!

96번 방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 * *

96번 방에 도착하는 순간, 안중현은 반대쪽 통로가 아니라, 통로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몇 초 후.

-769번 통로 감시 장…….

이강우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찰나였다.

이강우가 말을 뱉는 순간, 기능 정지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96번 방 통로 반대편에서 날아온 섬광 하나가 96번 방을 지나친 후, 그 너머의 통로를 향해 곧게 날아갔다.

-……치 기능 정지!

빛이 지나간 후 안중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 빛화살이 날아온 통로로 향했다. 향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통로를 향해 예의주시했다.

여기서 안중현은 다시금 뷰 마법을 썼다. 잿빛 세상 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옆구리에 성인 남자 주먹 크기의 구멍이, 관통상이 있었다.

‘피했군.’

가장 원했던 건 빛화살이 녀석의 미간으로 들어가 꼬리를 통해 나오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신기루호랑이는 몸을 옆으로 비틀어서, 빛화살은 피한 모양.

‘어마어마한 반사신경과 운동능력.’

그러는 사이 신기루호랑이가 96번 방으로 들어왔다. 녀석은 안중현을 바라보며 여전히 적개심과 살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맹수다운 기세였다.

그러나 그 적개심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신기루처럼 사라지려는 모양.

그때 신기루호랑이의 머리 위에서 강력한 힘이 꿈틀거렸다.

꽈릉!

꿈틀거린 힘은 곧바로 벼락이 되어 떨어졌다. 푸른빛이 번쩍이며 어두운 동굴 안을 잠시 동안 밝혀 줬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은, 청뢰 마법은 신기루호랑이에게 닿지 못했다.

‘벼락을 피했어?’

신기루호랑이는 청뢰 마법도 피했다. 청뢰 마법은 바닥에만 깊은 상처를,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놀라운 반사능력.

그러는 사이 신기루호랑이가 사라졌다.

사라지자마자 녀석이 있던 자리에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연이었다. 김재범의 독을 품은 하선우의 바람이 녀석을 붙잡기 위해 움직였지만, 한발 늦었다.

어마어마한 은신능력이다. 어디에서도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증식에 은신이면, 최악의 조합이군.’

그때 안중현은 돌격팀과의 합류를 위해 통로를 달렸다.

달리면서, 김재범에게 말했다.

-야간 투시경은?

-착용 중입니다.

-작동 중인가?

-꺼지면…….

-꺼졌습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던 김재범의 야간 투시경 기능이 정지했다. 디지털 킬러 기능이 발동했다는 거고, 그건 곧 안중현을 따라 움직인다는 의미였다.

그때 그 대화의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한 건, 김지홍이었다.

안중현의 반대편에서 김지홍이 달려왔고, 안중현이 김지홍을 지나가는 순간, 김지홍이 사선으로, 크게 칼을 휘둘렀다. 김지홍이 휘두른 칼에서 뿜어진 무형의 검기, 가름칼 마법이 통로에 깊은 칼자국을 만들어내며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아도 실체는 있을 터.

‘닿았다.’

이 순간 김지홍은 자신의 가름칼 마법이 신기루호랑이를 자르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느낌은 현실이 됐다.

보이지 않던 신기루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몸이 사선으로 잘린 채로.

가름칼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

하지만 반대로 김지홍은 우려했다. 가름칼이 6서클 마법 중에서도 손꼽히는 위력을 가진 마법이라지만, 4등급 몬스터를 단칼에 토막 낼 정도는 아니다.

그 증거로 멜트 드래곤만 하더라도 토막을 내진 못했다.

신기루호랑이의 방어력이 약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설.

4등급 몬스터에는 4등급이 분류된 이유가 있는 법 아닌가?

약한 만큼, 다른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의미.

이미 은신 능력과 분신 혹은 증식 능력으로 판단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디지털 킬러 능력까지. 녀석과 가까워지면 야간 투시경은 제 역할을 못 한다. 다른 감시 장치 역시 일회용 감지기가 될 뿐이다.

그때 신기루호랑이의 사체가 사그라졌다. 하얀색 돌멩이만이 자리에 남았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멩이 정체는 마나스톤이었다.

마나스톤을 본 김지홍이 쓴웃음을 지었다.

‘손가락 하나 베어낸 정도로군.’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자신의 개체 수를 늘릴 수 있는 증식 능력과 아무런 조짐도 없이 단숨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은신 능력.

여기에 다수의 방이 다수의 통로로 연결된 유적의 특성과 작은 불빛이 듬성듬성 존재할 뿐, 시야를 가득 채운 어둠.

카메라를 비롯한 감시 장치 및 야간 투시경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디지털 킬러 능력.

마지막으로 마법으로만 타격을 줄 수 있는 환수 타입.

하모니다.

‘악질적인 수준이군.’

베테랑인 안중현은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었지만, 설마 이런 능력과 환경이 조합된 몬스터를 자신이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안중현은 이 상황을 두고 악질적이다, 라는 표현을 썼다.

‘정말 악질적인 수준이야.’

만약 이 유적 그리고 4등급 몬스터를 디자인하고 설계한 놈이 있다면, 그는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안중현은 그런 불평불만을 입으로만 머금고, 곧바로 뱉었다. 가슴에 품지는 않았다.

가슴에 품는다고 해서 상대하는 몬스터의 능력치가 게임 패치처럼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몬스터가 이런 불평불만에 스스로 핸디캡을 안고 싸워주는 건 아니기에.

정말로 이 판이 마음에 안 든다면, 판을 떠나는 것만이 지금 안중현과 그의 동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덕분이었다.

‘클로즈. 이제 더 이상 유적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어.’

덕분에 안중현은 쉽게 결단을 내렸다.

‘4등급 몬스터와의 전투에도 목숨을 걸 필요는 더더욱 없고.’

신기루호랑이를 잡는 건 쉽지 않다. 생각보다 리스크가 크다.

특히 이 리스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야간 투시경, 감시 장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싸우기엔 주변 환경은 신기루호랑이에게 유리하다.

체력 싸움 역시 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식량 보급도 쉽지 않다. 여기서 체력전으로 가면 당연히 신기루호랑이가 유리하다.

반면 출문을 발견했다. 6서클 마법 아티팩트도 발견했고, 이제까지 모은 마나스톤과 마법 아티팩트, 연구 자료도 무사하다. 결정적으로 사망자가 아직까지 없다.

수확은 이미 넘칠 정도로 많다. 그럼 이제부터는 가지고 있는 걸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안중현은 좀 더 고민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봤다.

출문을 통한 클로즈, 그게 과연 최선의 답일까? 그 과정에서 생기는 리스크는?

-현재 100번 방에 들어간 로봇 상태는?

안중현이 질문을 던졌다.

-로봇은 여전히 100번 방에서 작동 중!

신기루호랑이로부터 도주 중인 지원팀의 일원이 다급하게, 긴급하게 정보를 보냈다.

‘좋아.’

100번 방 내에서 로봇이 작동한다면, 그 안에 디지털 킬러 능력을 가진 신기루호랑이의 개체가 없다는 의미.

또한 100번 방의 입구는 하나다. 다른 방향에서 증식된 신기루호랑이가 새로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

-클로즈를 시작한다.

안중현이 결단을 동료들에게 알렸다.

반발은 없었다.

솔직히 이제 이곳에 미련이 있는 사람은 없다. 할 만큼 했고, 먹을 만큼 먹었다.

-지원팀 위치는?

-94번 방으로 이동 중.

-범은?

현재 증식된 신기루호랑이의 개체 수는 두 마리. 지원팀이 놈들을 유인 중이다.

물론 은신 능력을 가진 만큼, 쫓아온다고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폭발음 확인.

다행인 건 지원팀답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마법과 무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을 이용해서 혹은 가지고 온 폭탄 등을 이용해서, 폭발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녀석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한 마리 때문인지, 두 마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돌격팀은 보물팀과 합류한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일단 지금 이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은 보물팀, 모든 수확물을 가지고 운반 중인 이강우와 구소영이 공격을 당하는 경우다. 그들이 죽으면 모든 걸 잃는다.

심지어 그들의 전투 능력은 지금 나눈 세 개의 팀 중 최약. 신기루호랑이가 4등급 몬스터치고 약한 편이고, 증식된 녀석은 더더욱 약하다고 해도 보물팀이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까 돌격팀이 그들과 합류 후에 그들을 안전하게 100번 방으로 안내해줘야 한다.

안중현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3D 형태의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그 지도 속에서, 방과 통로로 만들어진 나선의 공간 속에서 안중현이 곧바로 보물팀과 합류할 수 있는 최단 루트를 산출했다.

-91번 방에서 만난다.

* * *

이강우는 자신의 눈앞에서 입맛을 다시는 신기루호랑이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런 상황이 나올 줄이야.’

이 순간 이강우는 기억을 아주 조금 전으로 되돌렸다.

조금 전 이강우와 구소영은 거대한 가방을 등에 멘 채, 양손에도 짐을 잔뜩 든 채로 헤이스트 마법을 이용해 전력으로 91번 방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격팀과 합류하는 게 그들에게 중요한 과제였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시야가 캄캄하게 변했다. 쓰고 있던 야간 투시경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 의미를 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둘은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동시에 멈췄다. 멈춘 채로 숨을 죽였다. 그러는 사이 구소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반면 이강우는 침착하게.

-호랑이와 조우했다.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이강우가 구소영의 낌새를 살폈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니 대충 답이 나왔다.

‘마인드맵 마법이 일시 정지했군.’

마인드맵의 중심에는 구소영이 있다. 그런 그녀가 지금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순간 마인드맵 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통신의 부재.

그런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마인드맵 마법을 다시 쓰기까지는 적어도 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다.

돌격팀과 지원팀도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서로 원거리 통신수단은 마인드맵 마법이 유일하니까. 평소 쓰던 전화기도 잠시 노이즈가 끼면 당황하고 짜증이 나는 법인데, 이런 긴박한 순간 통신 불능은…… 정말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는 일이다.

하물며 보물팀에 비고가 생기면, 앞서 말했듯이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셈 아닌가?

물론 그렇기에 보물팀이 가진 것들 때문에라도, 안중현은 보물 회수를 위해서라도 이곳으로 올 것이다.

어쨌거나 정리하면 통신의 부재가 길어지면, 지원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당연히 통신망의 복구가 우선인 상황.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상황에서 한 명이 미끼가 되어야 한다면, 이강우가 그 미끼 역할을 해야 한다. 밖에서의 가치는 이강우가 구소영보다 크겠지만, 지금 이 유적 내에서의 가치는 구소영이 더 크니까.

때문에 이강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녀석을 막을 테니까, 다른 루트로 우회해서 목적지로 가십시오.”

이강우의 말에 구소영의 얼굴이 굳었다.

“빨리!”

이강우는 그런 구소영을 다그치듯 말했고, 구소영은 곧바로 오던 길을 돌아서, 다른 루트로 이동했다.

여기까지가 조금 전에 일어난 일.

현실에 돌아온 이강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했다.

해야 할 일 자체는 간단했다.

구소영이 도망을 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마인드맵을 다시 쓸 수 있도록, 그가 신기루호랑이로부터 시간을 버는 것.

‘어쩌다 보니 4등급 몬스터와 맞짱을 뜨게 됐군.’

이 순간 이강우는 자신의 처지가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대단한 인생이야.’

이 얼마나 대단한 인생이란 말인가? 나중에 자서전을 내면, 아마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들자고 러브콜이 올 것 같다. 그 정도로 스펙터클한 인생이다.

재미난 건, 예전이라면 이런 상황에 부닥치는 순간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을 텐데, 지금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강우는 비틀었던 입꼬리 풀었다. 그리고 울상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내 운명 앞에서 더 이상 울상을 지을 필요는 없지.’

절체절명의 순간이 맞다.

아무리 이강우가 대단한 마법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본질은 4서클 마법사다. 4서클 마법사가 4등급 몬스터와 싸우는데 승리를 확신한다면 그건 자신감이나, 오만함이 아니라 그냥 미친 거다.

확신은 없다.

단지 가능성만 있을 뿐.

‘자, 견적부터 뽑아보자고.’

이강우가 분석 마법을 썼다. 이강우의 눈빛이 별처럼 빛났다.

‘그나마 증식된 놈이군.’

보이는 숫자.

[30,321/300,000]

총량은 멜트 드래곤의 곱절…… 아니, 거의 3배에 해당하는 마력 포인트다.

하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양은 3만 포인트 수준. 5등급 아래, 6등급 몬스터 수준이다. 녀석이 오리지널이 아니라, 오리지널로부터 증식되어 나왔다는 증거다.

그나마 다행이다.

녀석의 강함은 순수한 4등급 몬스터에 미치지 않는다. 5등급과 6등급 사이 수준일 것이다.

이강우가 도박수를 선택하면, 그 도박수가 통한다면 승리를 확신할 순 없어도 승산을 가늠할 순 있다.

‘상처 하나만 내자.’

이강우는 난잡한 결투를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할 수도 없었다. 이강우가 신기루호랑이를 상대로 보일 수 있는 공격 횟수는 극히 제한적이다. 다섯 번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이강우는 오직 상처 하나만을, 다수의 생채기가 아닌 깊숙한 상처 하나만을 노렸다.

툭!

이강우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을 풀었다. 양손에 들고 있던 짐도 당연히 진즉에 버렸다.

맨손이 됐다.

스윽!

그 맨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도축용 칼을 들었다. 길이는 30센티미터 남짓. 칼날은 마치 길쭉한 직각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끝은 당연히 뾰족했다. 그 외에 특별할 건 없었다. 장식이나 문양 따위는 없다. 칼자루도 평범하다.

그럼에도 이 칼을 든 이유, 이강우가 이제까지 몬스터를 상대로 가장 많이 휘둘렀던 칼이니까.

지금 이 순간 이 칼보다 완벽하게 몬스터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무기는 없다. 적어도 이강우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마력검.’

여기서 이강우는 칼에 마력을 집중했다.

마력검 마법의 장점은 사용자의 마나 서클에 따라서, 주입하는 마력의 양과 질에 따라서 위력이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효율은 특화된 마법에 비해서는 떨어진다.

하지만 잘만 쓰면,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 서클만큼의 위력을 낼 수 있다.

‘버닝 마나.’

그리고 곧바로 이강우는 버닝 마나를 사용했다.

생각해 보면 실전에서, 긴박한 상황에서 버닝 마나를 사용하는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게 많이 연습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그렸는데 오늘이 첫 실전 테스트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상황.

그러나 이강우는 괜한 감상에 젖기보다는 활활, 타오르며 더욱더 강렬한 마력을 뿜어대는 자신의 마나 서클에 집중했다. 열광을 넘어 발광하듯 날뛰는 마력을 도축용 칼에 주입했다.

‘날카롭게.’

그 상태에서 칼을 갈 듯, 날을 예리하게,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김지홍이 보면 기겁할 정도로, 이강우는 정말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마력검을 만들어냈다.

‘와라.’

그런 이강우의 시선에서 신기루호랑이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강우를 황홀하게 만들던 숫자도 단숨에 사라졌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콱!

이후 이강우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보이지 않는 호랑이가 이강우의 왼쪽 어깨를, 그것도 앞이 아닌 등 뒤에서 덥석 무는 소리였다. 신기루호랑이의 윗니가 이강우의 가슴팍을, 아랫니가 이강우의 등판에 깊숙이 박혔다.

‘크윽!’

하지만 물어뜯기는 일은 없었다. 아이기스 슈트가 제구실을 해줬고, 결정적으로 이강우는 물리는 순간.

푹!

당황하는 대신, 마치 자신이 물리는 걸 예상했다는 듯이, 마력검으로 자신의 어깨를 물고 있는 신기루호랑이의 머리를 찔렀다.

육참골단.

살을 주고 뼈를 취했다. 아니, 이강우가 입은 상처 그리고 신기루호랑이가 입은 상처를 보면 이강우가 자신의 뼈를 잔뜩 주고 살을 조금 취한 형세.

그러나 이강우는 그거면 만족했다.

‘들어갔다!’

환수 타입임에도 날붙이가 피륙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와 감촉이 느껴졌다.

동시에 이 갑작스러운 이강우의 반격에 신기루호랑이가 확실하게 물지 못했다. 꽉 문 채로, 거기서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해 턱에 힘을 주며 이강우의 어깻죽지를 뜯어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대신 녀석은 오히려 이강우를 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이강우의 몸뚱이가 벽에 꽂혔다.

쾅!

굉음이 터졌다. 이강우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고통?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거대한 호랑이에게 물렸다. 그 상태로 벽에 박힐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이고, 정신이 날아가는 기분이다. 너무 아파서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했다. 비명이 목구멍에서 메아리만 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강우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최근에, 정말 최근에 경험했었다.

‘불사황제…….’

절망의 태양.

그 무시무시한 마법의 고통을 꿈을 통해 경험했다. 그때의 고통에 비하면 지금 육신의 고통은 가소로운 수준이다.

덕분에 이강우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은 채, 벽에 박힌 채로 절망의 태양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마력을 모아, 손바닥을 통해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고맙다. 빌어먹게도.’

그 순간 절망의 태양이 자신을 만들어낸 창조주를 괴롭히는 적을 향해 포악한 성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고오오!

신기루호랑이의 머리에 생긴 상처를 통해 흘러나온 온갖 것들이 이강우의 머리 위에 뜬 검은 구체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기루호랑이는 은신 상태를 유지했지만,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신기루호랑이의 위치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크왕!

신기루호랑이가 처음으로 육성을 토해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울음을 토해내지 않던 놈이 일갈을 내질렀다.

사자후(獅子吼).

하지만 그 육성 앞에서 이강우가 만들어낸 절망의 태양은 오히려 거세게, 더 거세게 신기루호랑이의 힘을 흡수했다. 흡수한 다음,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팟!

작열(灼熱)이 시작됐다.

그 작열이 은신한 신기루호랑이의 힘을, 마력을, 모든 것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때 벽에 박힌 이강우의 몸이 벽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바닥에 엎어졌다.

쿵!

이강우의 몸뚱이가 나무기둥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쿨럭쿨럭!

이강우가 기침을 토해냈다. 그냥 기침이 아니라, 목에 차는 핏덩이를 토해내기 위해, 숨을 쉬기 위한 발악이었다.

‘죽겠군.’

이강우가 입은 상처는 치명상이었다.

아이기스 슈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치명상이 아니라 그냥 사망이었겠지만. 이런 치명상 앞에서 이강우는 제대로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이강우는 고개만 간신히 들었다.

‘장관이군.’

고개를 들어 절망이 태양이 만들어내는 광경을 바라봤다. 절망의 태양 아래에서 신기루호랑이가 정말 신기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작 마법 하나, 상처 하나만으로 이런 결과라니…….’

정말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저 마법이란 이름으로 규정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다. 이 힘만 있으면, 이 마법만 있으면 이강우는 무수히 많은 유적을 자신의 식탁으로 만들 수 있을 터.

지금도 훌륭한 만찬이 마련됐다.

여기서 이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통 앞에서, 그냥 잠들고 싶어 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만찬이지. 3만 포인트짜리 정식.’

그런데 그 만찬 앞에서 바닥에 엎드린 채, 바닥에 코를 박은 채 그냥 만찬이 사그라지기를, 음식이 식어서 먹을 수 없게 되기를 기다린다?

남들은 그래도 된다. 채유리, 안중현, 김지홍…… 그들은 그냥 이대로 바닥에 코를 박고 절망의 태양이 알아서 신기루호랑이에게 절망을 선사하길, 녀석을 증발시키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포식자는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포식자는 이 만찬 앞에서 포식자의 위엄을, 자격을 보여줘야 한다.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온몸에는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힘을 불어넣었다. 멀쩡한 오른팔로 몸을 들었다. 몸을 비틀고, 아등바등하며 기어코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정면을 다시 바라봤다. 절망의 태양은 어느새 이강우의 몸보다 커져 있었고, 반대로 신기루호랑이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있었다.

이강우는 손바닥을 들었다. 이강우의 머리 위에 떠있던 절망의 태양이 이강우의 손바닥 위로 내려왔다. 이 순간 이강우는 자신의 마나 서클의 힘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바츠무의 손.

그 힘을 이용해 절망의 태양이 가진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절망의 태양은 이강우에게 자신의 힘을 빼앗기자, 화가 난 듯, 더욱더 빠르게 신기루호랑이의 힘을 빨아먹었다.

고작 머리에 난 상처 하나가 기어코 신기루호랑이를 완벽한 신기루로 만들었다.

더 이상 신기루호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이강우, 지금 구하러 가겠다. 대답해라. 무사한가?

안중현의 목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마인드맵 마법이 복구된 모양. 구소영이 나름 제 역할을 수행했다. 이강우의 희생을 가치 있는 희생으로 만들었다.

이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이강우는 무릎을 꿇은 채로 기절하며 땅에 코를 박았다. 거기까지가 이강우가 기억하는 4등급 유적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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