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멜트 드래곤
“똑같은 마법, 똑같은 마나 서클, 똑같은 양의 마력을 쓰더라도, 결과물은 마법사의 재능과 자질과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 하물며 손을 떠난 마법도 마법사의 영향을 받는데, 손에 잡힌 칼과 그 칼에 적용된 마법이 마법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습다기보다는 멍청한 소리일 터.”
김지홍은 거래대로 이강우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자신이 한국 최고의 칼잡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 줬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법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숙련도가 주어지면, 똑같은 마법을 써도 보다 단단하고, 보다 날카로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물론 이 이해도와 숙련도는 체감하는 게 어렵지. 요즘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냥 마법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하는 연료 탱크에 불과하니까.”
김지홍은 단순히 마나 서클이 많아서 비수라는 섬뜩한 별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니다.
그는 6서클 마법사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6서클 마법사보다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가 쓰는 절삭 마법들은 다른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이는 게 그 증거다.
단순히 마나 서클이 많다는 수준에서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차이. 남들이 80퍼센트 밖에 꺼내지 못하는 걸, 그는 120퍼센트를 꺼낸다.
그 차이가 6서클 마법에 적용된다면? 아득한 차이가 된다. 남들은 자를 수 없는 걸 김지홍은 자를 수 있게 된다. 그의 칼은 어떤 몬스터든 꿰뚫을 수 있는 비수가 된다.
그럼 과연 김지홍은 어떻게 100퍼센트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일까?
그 비결!
“핵심은 조절일세. 마법을 쓰고 멈추는 게 아니라, 본인의 의도대로 마법이 만들어낸 날카로움을 조절할 줄 알아야지.”
바로 조절이다.
백문불여일견!
“말로 떠들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시연을 해주지.”
김지홍은 그 과정을 말로 짧게 설명하고, 곧바로 직접 나서서 보여줬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칼 중 하나를 칼집에서 뽑았다. 길고 폭이 좁으며, 완만한 호선을 품고 있는 칼이었다. 검이라기보다는 도(刀)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 상태로 김지홍은 자신의 약지에 차고 있는 반지, 3서클짜리 절삭 마법인 마나 블레이드 마법이 걸린 마법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마력을 머금은 마법 아티팩트가 푸르스름한 아우라를 토해냈고, 김지홍이 쥐고 있는 칼을 단숨에 휘감았다. 마치 칼날에 얇은 막을 씌운 듯했다.
스으…….
김지홍은 칼의 날이 천장을 향하도록 세운 후에 그 위로 성인 남자 주먹 2개를 합친 크기의 돌멩이 하나를 올렸다. 돌멩이는 외줄 타기를 하듯 칼날 위에 올라섰다.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神技)였다.
그런데 그 순간, 칼날 위에 서 있던 돌멩이가 바닥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딱히 칼을 움직이지 않음에도 갑자기 돌멩이가 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돌멩이가 멈췄다. 칼날이 돌멩이의 반쯤을 파고든 모양새가 연출됐다. 잠시 시간이 흘렀고, 다시 돌멩이가 움직이더니 이내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의 마법을 썼음에도 절삭력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가 절삭력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는 증거였다.
대단한 모습이다.
이런 김지홍의 모습에 이강우는 감탄사를 내뱉진 않았다. 감탄 대신.
‘대충 알겠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강우의 모습이 김지홍의 심기를 살짝 자극한 듯, 김지홍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 녀석이?’
김지홍은 이강우가 좀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길 기대한 모양이다.
그게 이유였다.
“이게 기본이지. 하나의 마법이 가진 절삭력의 위력을 조절할 수 있어야 최대한의 절삭력을 이룩할 수 있는 법.”
본래는 설명으로 끝낼 것을.
“그러니 곧장 해보게.”
곧바로 실전으로 넘어간 이유.
휘익!
그가 말과 함께 자신이 낀 반지와 자신의 칼을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응?’
이강우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설마 자신의 무기와 마법 아티팩트를 이 자리에서 직접 주다니?
‘이거 완전히…….’
일종의 압박이었다.
괜한 변명으로 거절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 김지홍이 이렇게 나오는데 이강우가 두 손을 내저으며 훈련을 사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강우가 얼떨결에 반지를 손에 착용하고, 칼을 쥐었다.
그 순간.
‘칼 괜찮네? 어디 제품이지? 핸드메이드인가? 나도 이거 하나 주문해 볼까? 그러고 보니 나도 칼 좀 쓰는데 제대로 된 제품을 잡아 본 적이 없네.’
이강우는 손에 착착 감기는 칼자루의 감촉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이제 총꾼이 아니라 칼잡이가 됐다는 증거였다. 그런 이강우에게 김지홍은 재촉하듯 말했다.
“마법을 쓰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시작.”
김지홍이 재촉과 함께 벽돌을 들었다. 이강우가 살짝 긴장했다.
‘저걸 올리는 거 자체가 가능할지 모르겠군.’
상식적으로 칼날 위에 벽돌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묘기나 다름없다.
김지홍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이강우는 그런 묘기 같은 짓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해볼 이유도 없었다.
사실 지금 김지홍이 쓰는 종류의 칼을 쥐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강우가 쓰는 도축용 칼과 무기로 쓰는 김지홍의 칼은 목적성이 전혀 달랐으니까.
‘뭐,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그때 이강우가 마력검 마법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했다. 김지홍이 곧바로 칼날 위에 돌멩이를 올렸다.
그 순간.
‘어?’
놀랐다.
‘이 녀석?’
이강우가 아닌 김지홍, 그가 놀랐다.
놀랄 만했다. 이강우는 칼날 위에 돌멩이를 잘 세우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이다.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강우는 여기서 놀라지 않고, 집중했다. 조금 전 봤던 김지홍의 기술을 직접 실행했다.
‘마력의 컨트롤. 결국 이미지. 당황하지 말고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그대로 실행하면 돼.’
이강우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냥 도화지 위에 그리듯, 간단하게 생각했다. 마력을 쓰는 법은 이제 충분히 익숙하다.
특히 클로저 라이센스를 치르면서, 이미지를 실현하는 방법 역시 쉴 새 없이 실전에서 해봤다.
그 순간.
츠츠!
이강우의 칼날 위에 있는 돌멩이가 꺼지기 시작했다. 김지홍의 큼지막한 눈매가 가늘어졌고, 이강우는 다시 집중을 했다. 꺼지던 벽돌이 멈췄고, 이강우가 다시 마력을 컨트롤하자, 벽돌이 두 동강이 났다.
“후우!”
작업을 마친 이강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김지홍을 바라봤다.
“확실히 연습이 좀 필요할 것 같군요. 쉽진 않네요. 집중도 필요하고, 실전에서 쓰는 건…… 꽤 걸릴 것 같네요?”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김지홍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괴물을 가르치게 됐군.’
* * *
한국 정부는 한국에서 두 번째 4등급 모래시계문을 발견하는 순간, 그 모래시계의 처리를 놓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논의를 했다.
사냥에 대한 허가 역시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지의 세계, 실패할 경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들 다수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을 앞두고 시간에 쫓겨 섣부른 결단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정도다.
4등급 모래시계문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건, 개인이 국가적 사명감을 각오로 품어야 한다.
당연히 이번 4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에 참가한 마법사들은 그 각오를 품고 모래시계문을 넘었다.
그렇게 두 달째에 접어든 지금.
“체중이 또 늘었군.”
“대체 누가 보급품에 체중계를 가져온 거야?”
“어쩔 수 없잖아. 체중은 신체 상황을 당장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도구니까.”
“당신이 가져왔어?”
“이거 원, 살쪘다고 안 먹을 수도 없고,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유적 내부에서 조깅을 할 수도 없고…….”
4등급 모래시계문을 넘어온 마법사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그들의 늘어나는 체중이 되어버렸다.
두 달 동안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유적에서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긴장감과 피로감 같은 건 베이스캠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좀 과할 정도로. 약간은 긴장감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나쁠 건 없었다.
적어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절박함에 쫓기는 것보단 훨씬 나았으니까.
“몬스터는 말이야, 내가 봤을 때는 자연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누군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생물학적으로 몬스터 같은 건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이야기가 꽃피었다.
“그럼 모래시계문도 누군가 만들었다는 건데, 그럼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무엇보다 모래시계문이 갑자기 생기는 원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마치 신기루가 현실이 되는 것처럼, 생기지.”
그 어떤 즐길 거리도 없는 유적 속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대화를 하는 것이었으니까.
“심리학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모래시계문을 만든 사람은 치밀한 성격의 선생이거나 혹은 치밀한 성격의 학살자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그런 그들의 이야기는 이강우에게는 단비와도 같았다.
전문가인 그들이 나름 오랜 시간 연구를 해서 내놓은 가설들과 정보들은 이강우가 만들어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중 많은 이야기들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줬다.
김태훈의 머릿속에서 가설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래시계문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어.’
세상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모래시계문의 신비에 대해서 거듭해서 의문을 던지고,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아마 이강우와 비슷한 생각, 모래시계문이 인류를 위협하기 위해 누군가 만든 도구라는 생각을 하는 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강우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의심을 하는 사람이 한둘일 리가 없단 말이야.’
그냥 멀쩡한 사실을 앞에 두고도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음모론자가 존재하는 게 사람이란 동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지?’
그런데 모래시계문의 존재를 사회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위험하지만, 충분히 컨트롤 가능한 가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모래시계문은 분명 인류가 넘지 못했던 것을 넘게 해줬다.
하지만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있을 테고, 그런 이들이 세력을 만들었다면 필시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런 종류의 목소리는 의외로 듣기 힘들었다.
그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새로운 이야기가, 음모론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섬뜩하군.’
이강우에게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는 이야기였기에, 이강우는 그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쨌거나 이제 분명한 건, 이강우가 마주할 적은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점이다.
‘빨리 강해져야 돼.’
그런 적으로부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유적 사냥은 이강우에게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강우]
-마력: 5서클 개발 중(29%)
-보유 마법: 7개
-마법 슬롯: 5개
-섭취 마력: 373,223포인트
이강우는 작은 손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상태창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소득이 상상 이상이야.’
4등급 유적에서 두 달 동안 활동하면서, 섭취한 마력이 무려 10만 포인트에 가까웠다. 잡은 몬스터가 30마리를 훌쩍 넘기고,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7등급 이상이었기에 가능한 수치였다.
물론 바츠무의 손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마나 서클 개발 속도도 섭취한 마력 포인트 이상으로 빨랐다. 효소를 이용해 만든 마나 서클 자극 비약 덕분이었다.
‘이 페이스면, 클로즈를 마칠 무렵에는 5서클 개방에 50만 포인트로 플래티넘북도 구매할 수 있겠는걸?’
생각보다 빠른 성장.
특히 플래티넘북의 존재는 이강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잡다한 게 아니라, 한 방이야.’
이강우는 이제 어지간한 마법은 그냥 마법 아티팩트를 통해 쓸 수 있는 처지가 됐다.
필요하면 마법청이든, 즈믄나래 길드든, 리볼버의 아티팩트 룸이든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자잘한 마법을 습득하기 위해 브론즈북 따위를 구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예전과는 처지가 다르다.
그러니 마법 아티팩트로 구할 수 없는 마법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실제로 지금 세상은 6서클 마법사들조차 6서클 마법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을 정도로 6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귀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플래티넘북을 구매하는 게 지금 이강우에게는 합리적이었다.
‘13만 포인트. 5등급 몬스터 한 마리만 통째로 먹어 치우면 거의 최소 절반은 채울 수 있을 텐데.’
이 밖에도 김지홍에게 배운 노하우 역시 빠르게 이강우의 노하우가 됐다.
이강우는 스펀지가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김지홍의 기술을, 마력 컨트롤 기술을 흡수했다.
이미 이강우는 두 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물론 만족은 없었다.
‘더. 더 먹어 치워야 돼.’
기대 이상의 성과지만, 이강우는 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배가 부르더라도, 스스로가 배가 고프다고 착각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말했다.
그런 이강우에게 허기를 채울 기회가 왔다.
5등급 몬스터, 멜트 드래곤을 먹어 치울 수 있는 기회 혹은 놈에게 먹힐지도 모르는 위기가.
* * *
4등급 유적 사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유.
그러나 그런 여유 속에서 억지로 여유를 거부하는 이도 있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군.’
수색팀 리더, 안중현.
그 역시 유적에 들어오기 전보다는 살이 붙어 있었다. 이강우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지 못한 증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음식을 먹고 나면 마치 당장에라도 새싹을 피울 듯이 꿈틀거리는 마나 서클은 안중현의 의지를 너무나도 쉽게 꺾었으니까.
과식을 하지 않으려고 참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안중현은 자신의 몸에 살이 붙을지언정, 여유가 제 몸에 달라붙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
안중현은 이 여유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유적에 입장하는 순간 사람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버틸 수 있는 리미트는 대개 20일 정도다.
20일이 넘게 되면 체력은 멀쩡해도, 정신력과 집중력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유를 가진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 인내를 통해, 스트레스를 억누르고 정신력과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고, 그마저도 적지 않은 심력이 소모된다.
그런데 지금은 두 달이 됐음에도 여유가 있었다.
몬스터 사냥에 대한 거부감이나 공포감은 없었고, 결정적으로 피해도 없었다. 가지고 온 보급품은 여전히 넉넉했고, 탐사 역시 순조로웠다. 3D로 지도 제작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지.’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으니까.’
여유가 넘치다 보니, 긴장감이 결여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익숙해지고 있다.
너무나도 여유가 있다 보니 이 상황에 불편함을 잊게 되고, 불편함이 없으면 사람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익숙함과 여유 그리고 방심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우리는 유적에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유적이다. 5등급 이하의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4등급 유적이고, 아직 4등급 몬스터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으며, 유적 탐사 성과가 크지만 완료된 것 역시 아니고, 출문을 발견하지도 않았다.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고가 나면, 피해가 클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이 여유를 깨부수고, 정신무장을 한답시고 나서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짓.
터질 일은 결국 터진다.
중요한 건 일이 터진 후다. 피해를 그냥 손해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위한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내 역할은 경고등이다.’
안중현이 여유를 거부한 채 긴장이란 옷을 입고 집중력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한 명은 그래야 한다. 남들이 편하게 쉴 때 경고등은 언제든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필요하면 내가 죽어서라도 경고등을 켜야겠지.’
이걸 희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솔직히 안중현은 지금 이 파티 구성원 중 전투능력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다른 이들처럼 학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안중현의 지금 행동과 각오가 희생이라면,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안중현을 데리고 유적 안으로 들어온 다른 마법사들의 행동도 희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색팀, 수색에 나서겠습니다.”
그렇게 안중현은 마치 시계처럼, 정해진 휴식이 끝나자 다시금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실제로 그의 행동은 이미 시계나 다름없었다. 안중현의 수색 소식에 모두가 자신들의 역할을 가늠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는 표정과 함께, 다음 식사 메뉴는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표정이 썩 좋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하선우가 그랬다. 수색팀 소속인 하선우는 안중현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특별한 문제도 없는 상황인데 좀 쉬시죠? 강행군이나 다름없는데…….”
하선우는 안중현이 걱정됐다.
그리고 걱정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현재 수색팀은 5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3인이 2개 조로 나뉜 채 일정 시간 단위로 직접 수색을 펼치는 중이었다. 여기서 안중현이 두 사람 몫을 하고 있었다.
수색 시간은 1시간에서 2시간 남짓, 휴식 시간은 충분히 보장되지만, 피로는 누적되는 법.
그런 하선우의 말에 안중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여기 들어와서 전투란 걸 해본 적도 없네. 마법을 써본 것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야. 심지어 주는 밥이 맛있어서 살까지 쪘지. 그런 내가 피곤하겠나, 쉴 새 없이 방음벽 마법을 쓰고, 몬스터 사냥 때마다 몬스터 사냥에 참가해서 김재범의 독을 컨트롤하는 자네가 피곤하겠나?”
안중현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말.
후우…… 하선우는 조금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저런 안중현을 그가 말릴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안중현이 두 명과 함께 수색에 나섰다.
사고가 터진 건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 * *
나선의 탑이라 명명한 4등급 유적에서 두 달 동안 수색 활동을 벌였고, 그 수색을 통해 현재 44개의 방을 파악했으며, 그 통로를 잇는 493개의 통로를 발견했다.
당연히 이 전부를 감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지고 온 장비는 둘째 치고, 장비를 설치했다고 해도 최소 44개 이상의 모니터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했으니까.
때문에 현재 감시 가능한 지역을 정해두고, 그 지역 내에 몬스터가 들어올 경우, 그 몬스터를 제거하는 식으로 몬스터 개체 수를 줄이는 게 현재 유적 사냥 파티의 루틴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시 체제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도 있었다. 꽃등도마뱀만 하더라도 문명의 이기가 쉽사리 통하지 않는데, 그보다 더한 놈들도 있다.
그게 수색이 필요한 이유였다.
카메라나, 감시 장치로는 파악할 수 없는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신의 오감으로 직접 판단을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미끼도 뿌려놓았다. 몬스터가 지나간다면 반응할 법한 미끼들의 변화를 체크하면서 감시 장치에 파악되지 않는 몬스터를 파악했다.
‘음.’
이번에도 그랬다.
33번 통로.
안중현은 그 통로의 일부분이, 약 6미터 남짓한 길이 깨끗하게 청소된 걸 발견했다.
말 그대로 청소다. 벽돌이 매끈매끈해질 정도로, 이끼나 흙 따위가 가득해야 할 장소가 물청소를 한 것처럼 깨끗했다.
‘뭐지?’
손으로 깨끗해진 통로 바닥을 만져봤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분명한 건.
‘뭔가 들어왔다.’
감시 체제에 걸리지 않는 무언가가 지금 이 근처를 지나갔다는 사실.
여기서 안중현은 각오대로, 스스로를 경고등으로 만들었다.
-몬스터 침입. 33번 통로를 기점으로 주변 분석 요망. 긴급 상황.
안중현은 곧바로 마인드맵 마법을 통해 베이스캠프의 마법사들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동시에 수신호로 자신을 따라온 두 명의 마법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먼저 움직일 테니, 25미터 단위로 한 명씩 따라오라는 수신호였다.
그런 안중현이 향하는 곳은 33번 통로와 연결된 12번 방이었다.
-12번 방에 보이는 게 있나?
-아무런 움직임이나,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현재 12번 방에 설치된 카메라는 천장에 달린 카메라로 360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였다. 사각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동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카메라다.
그런데 그 카메라를 통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건, 보통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긴 보통의 공간이 아니다.
‘안 좋아.’
유적이다.
이 순간 안중현이 수신호를 다시 줬다.
안중현과 25미터, 50미터의 거리를 각각 유지하고 있던 그들이 수신호를 보고 멈칫했다. 그 상황에서 안중현이 12번 방을, 어둠을 향해 오른손을 겨누었다.
그리고.
탁!
손가락을 튕기자.
팟!
12번 방에 불똥이 튀었다. 그 불똥과 함께 무언가를 발견한 안중현이 소리쳤다.
“도망쳐!”
* * *
영상을 보던 수색팀 일원, 모니터링 담당자라고 할 수 있는 이연성은 긴장을 조금 풀고 있었다.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낌새는 없어. 뭔가 있어도 12번 방은 이미 지나갔을 거야.’
긴급 상황이란 건 알고 있었다. 감시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몬스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안중현이 들어가는 12번 방에 무언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허무한 결과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갑자기 안중현이 12번 방을 향해 불똥 마법을 썼을 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움직였다.
‘뭐야? 액체? 물?’
슬라임, 굳이 비교하면 그런 종류의 몬스터와 비슷했지만 모니터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그 존재의 압박감이, 강렬함이, 무지막지함은 분명하게 말해줬다.
놈은 게임 속에서 1레벨 주인공이 잡는 슬라임 수준의 몬스터 따위가 절대 아니라고.
“긴급!”
그 순간 마인드맵 같은 건 머릿속에 없었다. 이연성이 베이스캠프를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상황이 변했다.
여유가 사라졌고, 위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 * *
“멜트 드래곤.”
그 말을 꺼낸 건 다름 아니라, 명궁 고재응이었다.
더불어 그가 내뱉은 그 말은 그가 최근 한 달 동안 한 말 중에 가장 긴 말이었다.
30대 중반의 외모, 거친 수염이 턱을 덮고 있는 얼굴과 작은 체격, 작은 신장의 그는 정말 말이 없는 사내였으니까.
그는 먼저 질문하는 경우도 없었고, 대답을 하더라도 단답형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꺼낸 다섯 글자짜리 단어는 이제까지 유적 사냥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내뱉은 무수히 많은 말 중에서 가장 파괴력이 셌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곧장 반응한 건 김지홍이었다.
“소말리아. 그래, 자네가 블랙 드래곤 다운 작전 후방 지원 팀이었지.”
대략 1년 전, 소말리아에 등장한 5등급 몬스터 멜트 드래곤을 잡기 위한 작전, 일명 블랙 드래곤 다운 작전에 고재응이 참가했던 사실을 김지홍이 떠올린 것이다.
그러면 확실하다. 고재응의 눈썰미는 최고다. 여기 모인 이들은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을 놓고 보아도 고재응의 눈보다 나은 눈을 가진 인간은 없다.
적어도 김지홍은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다. 당연히 멜트 드래곤에 대해 고재응보다 아는 인간도 없다.
“멜트 드래곤이라니, 진짜 골치 아픈 놈이 나왔군.”
“정말 한번 연구하고 싶은 놈이지만, 지금은 연구 따위를 운운할 때가 아니지.”
멜트 드래곤은 희귀종이다. 만나기도 힘들다. 굳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시체라면 모를까.
하지만 놈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는 알고 있다.
기본적으로 드래곤 타입은 마법 방어력과 물리 방어력이 동급 몬스터 중에서 최상위다.
여기에 멜트 드래곤은 자신의 형태를 액체 상태로 자유자재로 바꾼다. 1년 전 멜트 드래곤 포획 작전에 참가한 마법사는 인터뷰에서 T-1000 터미네이터를 상대하는 존 코너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물론 멜트 드래곤은 터미네이터 영화에 나오는 T-1000처럼 변신 능력은 없다. 그래도 녀석의 액체화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당시 녀석을 포획한 이후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제대로 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소말리아였기에 녀석을 포획할 수 있었지, 만약 복잡한 수도시설과 배수시설이 갖춰진 대도시에서 녀석이 등장했다면 2015년 수준의 대재앙이 일어났을 것이다.
좀 더 간단히 정리하면 멜트 드래곤은 수도꼭지를 통해서도 제 몸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런 녀석의 몸뚱이는 물과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을 칼로 베는 건 불가능하다.
“쯧.”
김지홍이 먼저 혀를 찬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타입은 힘들지.’
비수, 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약해지는 상황이니까.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화력.’
‘그것도 5등급 드래곤 타입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대미지를 줄 만한 화력이라면…….’
‘5서클 중에서도 강력한 마법. 여차하면 6서클 마법을 주력으로 써야 하는 셈이네.’
멜트 드래곤 같은 타입을 잡기 위해서는 결국 강력한 화력을 퍼부어야 한다.
동시에 놈이 도망갈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이번 유적, 나선의 탑은 도망갈 구석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작은 구멍만 있어도 멜트 드래곤은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녀석을 가두는 건 보통 작업으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모두가 거기까지 생각했다.
이강우는 여기서.
“안중현을 구할 겁니까, 아니면 나중을 기약할 겁니까?”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강우만이 좀 더 나아간 생각을 했다.
멜트 드래곤이 무시무시하다는 사실, 녀석을 잡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 상황을 판단하는 것, 다 좋다.
문제는 현재 안중현이 외로이 고립된 상황이란 점이었다.
잡히진 않았다. 또한 아직 안중현과 대화는 이루어진다.
그러나 안중현은 멜트 드래곤을 피해 도망치면서, 홀로 외로이 이 넓은 유적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투 능력이 부족한 안중현은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수색팀 마법사가 영상을 통해 주는 정보를 토대로 안전한 루트를 파악하며 움직이는 중이지만, 쉽지 않다.
또한 부상도 입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아이기스 슈트 덕분이었다. 아이기스 슈트가 찢어지긴 했지만,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 슈트가 아니었다면 팔이 찢겼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나름 신속하게 상처를 막고 탈취제를 뿌렸지만, 완벽하진 않다. 결과적으로 그가 풍기는 피 냄새는 꼬리가 된다. 추격자들을 유혹하는 꼬리가.
그런 안중현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는 상황. 결정적으로 멜트 드래곤이 그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혼자서 생환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그의 생환 가능성을 높이려면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제는.
“안중현의 목숨값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멜트 드래곤의 위치를 지금 우리 능력으로 파악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움직임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세상일이란 게 휴머니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안중현의 역할, 헌신, 그의 목숨이 귀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를 구하기 위해 다른 이가 리스크를 감수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안중현은 죽으면 손해지만, 6서클 마법사의 죽음에 비해서는 손해가 아니다.
김지홍은 그 부분을 분명하게 말했다. 돌격팀 리더인 그가 결국 전투의 여부를 가늠하는 만큼, 그의 생각은 절대적이다.
이강우는 그런 김지홍에게 분노 같은 걸 표현하지 않았다. 총꾼으로 제 목숨을 방탄조끼처럼 다뤄봤던 그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마땅한 생각이다. 말싸움을 할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이강우 역시 감정에 취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이강우는 지금 굉장히 합리적인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결국 잡아야 해.’
5등급 몬스터를 놔두고, 4등급 몬스터를 잡는다? 있을 수 없다.
결국은 멜트 드래곤은 언젠가는 잡아야 한다. 어차피 몬스터 몰살이 이번 유적 사냥 파티의 목적 아니었던가?
‘멜트 드래곤은 대단한 놈이다.’
그리고 멜트 드래곤의 시체, 놈의 배 속에도 들어가 봤던 이강우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멜트 드래곤의 존재를 좀 더 뚜렷하게 이미지화시킬 수 있었다. 녀석의 형태, 녀석이 뿜는 아우라…… 대단한 놈이다.
대단한 놈이니까 오히려 잡을 수 있을 때 잡는 게 정답 아닐까? 막말로 다른 몬스터, 5등급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 멜트 드래곤이 난입한다면?
놈은 이미 정해둔 영역 안에 아무런 낌새도 없이 등장했다. 정해둔 구역에서 거듭 사냥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지금 아무런 몬스터가 없는 상황에서, 놈을 잡는 게 베스트 아닐까?
‘감정을 배제해. 안중현처럼, 안중현처럼 객관적으로 사실을 보고 판단해야 해.’
이강우가 관자놀이를 한 번 꾹 눌렀다. 마치 버튼처럼, 관자놀이를 누르자 말이 나왔다.
“여기서 안중현을 구하러 가는 와중에 멜트 드래곤을 만나면, 멜트 드래곤만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반대로 안중현을 구하러 가는데 멜트 드래곤과 만나지 않으면? 안중현을 안전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멜트 드래곤과 지금 당장 싸우는 건 리스크가 있지만, 그 리스크는 언젠가는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라고 봅니다.”
이강우의 말, 당연히 모두가 금방 이해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어차피 잡을 놈이야.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놈의 존재를 자각한 상태에서 잡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집중력을 오로지 놈에게 쏟을 수 있는 상황이니까.’
김지홍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강우의 말은 타당하다.’
이강우가 제시한 의견, 모 아니면 도 같은 의견이 아니다. 멜트 드래곤을 잡는 것 역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 맞다.
하지만 반대로 돌격팀 리더이기에, 그의 선택이 타인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기에 김지홍은 심사숙고했다.
솔직히 합리적인 계산으로 답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은 솔직히 아니었다.
결국 감정적인 부분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안중현, 그에 대한 심정이 저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답은 뻔하다.
안중현은 이제까지 파티를 위해 나름 많은 노력을 했다. 이번 일도 결국 본인이 희생해서 만든 결과물. 그런 그를 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김지홍이 답을 내리려고 했다. 안중현을 구한다, 그리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답을 뱉은 건, 이 대화 과정을 마인드맵을 통해 간략하게 보고받던 안중현이었다.
-저를 미끼로 쓰면 됩니다. 통로가 2개인 방이 좋을 겁니다. 7번 방이 좋을 듯합니다.
이 순간 가장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안중현이 내렸다.
* * *
녀석에게 세상은 물결이었다. 녀석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실처럼 보였다.
그런 녀석은 그 실 사이에서, 잿빛 실의 세상 속에서 붉은 실을 찾아냈다. 붉은 실을 찾는 순간 녀석은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녀석의 몸은 실 위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같았다. 형태는 출렁거리지만, 빠르게 실 위를 미끄러지듯, 정말 빠르게 움직였다.
이윽고 녀석은 회색빛 공간 속에 붉은 실타래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허기로 가득 찼던 녀석은 참지 못했다. 보통 때라면 사냥감에게 접근하기 전까지 낌새를 감추고, 녀석에게 접근한 후에 정체를 드러냈을 터인데, 허기가 녀석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녀석이 슬그머니 진면목을 드러냈다. 틈조차 찾을 수 없는 매끈한 비늘을 두른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이름은 멜트 드래곤.
물론 녀석은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 그에게 있어 그는 그저 배고픈 괴물일 뿐.
* * *
7번 방.
안중현은 두 개의 통로가 보이는 곳, 방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안중현의 오른팔을 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안중현은 지혈을 하지 않았다.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안중현은 피가 계속 흐르도록 놔두었다. 안중현은 그런 상처에 관심도 없는 듯했다.
그 오른팔대신 안중현은 왼팔에 관심이 더 많았다. 오른손에 차고 있던 팔찌와 반지를 왼손에 착용했다. 불똥 마법과 불지뢰 마법 아티팩트를 왼손에 찼다는 것……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왼손을 써서라도 마법을 쓸 각오의 표현이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이런 날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연습을 해두길 잘했어.’
안중현은 마법을 쓸 때 오른손을 총구처럼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마법의 명중률이, 거리감이 더 좋아진다. 아무래도 그의 마법은 거리감이 중요한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명중률을 높이는 건 중요했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없진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중률이 떨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안중현은 왼손을 쓰는 연습을 했다. 오른손에만 의존하다가 오른손을 잃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힘들 건 없었다. 일주일 14시간 정도 투자하는 거면 충분했다. 시간이 없을 때는 일주일에 7시간, 하루에 한 시간만 투자해서, 그렇게 해서 반년 정도 연습하자 왼손으로도 충분히 조준이 가능해졌다.
물론 말만 쉽다. 보통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런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는 게 더 낫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인간 아닌가?
‘고작해야 3서클 마법이 얼마나 통할지, 상상도 안 되지만.’
물론 지금 그렇게 연습을 한 게 먹힐 것 같진 않았다. 상대는 자신의 3서클 마법쯤은 가뿐하게 짓밟을 수 있는 괴물 아닌가?
‘여기도 무덤으로는 나쁘지 않지.’
이 순간 안중현은 참으로 독특한 감정을 품었다.
죽을 고비다.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다.
미끼란 건 사냥에 성공해도, 낚시에 성공해도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혹은 미끼만 빼먹고 유유히 사라지는 놈들도 부지기수다. 낚시를 하면 정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안중현은 그 사실에 크게 겁을 먹거나 후회를 가지진 않았다.
자포자기?
그 역시 아니다.
오히려 안중현이 미끼를 자처한 건 희생정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자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처우에 대한 결론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결론이 나오더라도, 안중현을 구하겠다는 결정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미끼를 자처한 건 그 망설임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안중현이란 경고등은 마법사들의 머릿속에 안중현을 미끼로 멜트 드래곤을 확실하게 잡아낼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단숨에 집중력이 완성됐다. 그동안 보낸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과적으로 안중현의 목숨을, 생환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가 될 것이다.
‘음.’
잡념은 거기까지였다.
안중현이 고개를 돌렸다. 낌새가 느껴졌다. 안중현이 감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놈…….’
놈이 스스로 낌새를 드러냈다.
실수인지 혹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가 보여주는 위엄인지, 허세인지…… 어쨌거나 모습을 드러냈다. 안중현은 그곳을 향해 왼팔을 겨누었다.
크르르!
섬뜩한 울음과 함께 멜트 드래곤이 7번 방 안으로 머리부터 내밀었다. 전형적인 드래곤의 모습이지만, 보통의 드래곤과는 다르게 갑옷 대신 검은 막을 코팅한 듯한 외피는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줬다.
그런 녀석의 발아래에서.
콰앙!
불지뢰가 솟구치며 제법 강한 소리를 냈다.
그게 전부였다.
‘대단하군.’
3서클 마법 불지뢰, 거대한 몬스터의 몸뚱이도 뒤집는 위력을 가진 그 마법은 실체를 드러낸 멜트 드래곤에게는 물총만도 못한 모양이다. 멜트 드래곤은 불지뢰를 정말로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는 감흥도 없다는 표정으로 안중현을 바라봤다.
그런 녀석의 시선 앞에서…….
부들부들!
‘큭.’
안중현의 다리가 떨렸다.
5등급 몬스터가, 개중에서도 드래곤 타입이 내뿜는 피어를 오롯하게 마주한다는 건, 섬뜩한 일이다. 다리가 떠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다행.
아니, 안중현은 여기서 정말 사내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갑다.”
미소를 짓고,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전투 개시!”
전투가 시작됐다.
* * *
안중현의 결단 앞에서 돌격팀의 리더인 김지홍 역시 결단으로 보답을 했다.
“속전속결. 미끼를 쓰는 이상, 최대한 빨리 만반의 준비를 한다. 실패는 없다. 한 번에 낚아 죽인다.”
베이스캠프에는 세 명이 남았다.
모니터링으로 주변 전황을 알려주기 위해 두 명과 마인드맵을 실시간으로 사용해 줄 마법사 한 명.
달리 말하면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부가 공격대가 되어 움직인 것이다.
그런 그들은 다시 2개 조로 나뉜 채 안중현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안중현과 접촉은 없었다.
미끼가 손을 타면, 외면당하는 법, 괜한 흔적이나 낌새를 남겨서 멜트 드래곤의 사냥에 변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마인드맵 마법을 통해서 서로가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 상태로 기다렸다. 멜트 드래곤이 미끼를 물기를, 안중현과 접촉하기를.
그리고 그 순간이 왔을 때.
멜트 드래곤이 실체화를 한 채 7번 방에 고개를 내밀었을 때, 모니터링을 하던 마법사가 소리쳤다.
-Go!
그 말 한 마디에 모두의 머릿속에 동시에 스위치가 켜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이어트를 걱정하던 이들이지만, 본질은 마법사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들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언제든 4등급 유적에 목숨 걸고 도전할 수 있는 진짜 마법사들!
이미 적지 않은 유적 사냥을 통해 경력마저 남긴 자들이다.
전투에 제대로 집중한 그들은 헤이스트 마법을 이용해 쏜살같이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그들은 이미 마법사용을 마쳤다.
‘한 번에 끝장을 본다.’
멜트 드래곤의 공략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모가디슈에서의 멜트 드래곤 사냥은 온전한 상태의 포획을 위한 방법이다.
결국 지금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건 강력한 마법을 난사해서, 화력으로 그냥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뿐이다.
액체화?
증발시킬 각오로 마법을 쓰면 된다.
물론 이와는 별개의 목적을 가진 이가 있었다.
‘어떻게든 구한다.’
이강우, 그의 역할은 전투 참가가 아니라, 마법이 난사되기 전에 안중현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4서클 마법사인 그가 전투를 위해 마법을 쓰는 건 무의미했으니까. 버닝 마나의 도움을 받으면 5서클 마법도 쓸 수 있지만, 논외의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이강우가 가장 빨리 7번 방에 도달했다. 그런 이강우의 눈에 들어온 건 멜트 드래곤이 가볍게 휘두른 앞다리에 맞고 날아가 벽에 부딪힌 채 힘없이 바닥에 추락한 안중현의 모습이었다.
긴급하고, 기겁할 만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강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지척에, 방 한가운데가 아니라 통로 입구 근처까지 알아서 날아온 안중현을 잽싸게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전화위복.
그 과정을 본 멜트 드래곤이 보석 같은 눈동자로 안중현과 이강우가 사라진 통로를 바라봤다.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먹잇감을 단숨에 뭉갠 후 먹어 치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먹잇감을 가지고 도망쳤다. 그러나 멜트 드래곤은 도둑을 쫓지 않았다.
녀석의 시야, 회색빛 실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온갖 잡다한 색들이 끼어들기 시작했으니까.
크르…….
녀석이 짧게 울음을 토해냈고, 그런 멜트 드래곤을 향해 마법이 난사되기 시작했다.
꽈르릉!
효시는 채유리의 5서클 마법, 청뢰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멜트 드래곤의 머리를 청뢰로 강타했다.
꽈꽝!
청뢰는 실체화된 멜트 드래곤의 몸뚱이를 굳게 만들었다. 단순한 타격감만으로도 뇌진탕이 생길 법한 위력이었다.
슉슉!
그다음에 곧바로 5서클 얼음 마법, 얼음송곳이 펼쳐졌다.
멜트 드래곤의 몸뚱이 아래에서 정말 송곳처럼 뾰족하기 그지없는 얼음 기둥들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얼음송곳은 멜트 드래곤의 몸에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눈에 보이는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그거면 충분했다. 얼음송곳은 그 생채기를 파고들었다. 멜트 드래곤의 몸을 붙들었다. 녀석이 쉽사리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다음 상황을 이끈 건 바람잡이 하선우였다. 그는 강력한 마법이 아닌, 섬세한 마법을 썼다.
‘특제 독이다. 둘이 먹다 죽으면 그 둘을 장례 치른 장의사까지 세 명이 죽는 독!’
김재범이 블렌딩한 독을 바람에 섞었고, 멜트 드래곤의 호흡기를 통해, 입 안으로 강제로 그 독을 집어넣었다. 김재범이 마력을 쥐어짜 내 만든 독, 그것도 사전에 포션 2개를 먹으면서까지 뽑아낸 독이었다. 독의 위력은 폭탄보다 위력적일 것이다.
청뢰로 잠시 동안 녀석의 이성을, 자유를 빼앗고 그 틈을 노려 얼음송곳으로 발목을 붙잡은 뒤 독 마법을 강제로 주입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콤보!
시계 속 부품처럼 모든 게 완벽하게 맞물렸다.
녀석이 이제 쉽사리 액체화해서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잡은 거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꽈르릉!
무지막지한 공격뿐!
5서클 화염계 마법 세 개가 동시에 7번 방 안으로 투입됐다.
콰과광!
어마어마한 폭발이 7번 방을 흔들었다. 통로를 통해 나오는 열기가 근처의 마법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
이 화력에서 액체화를 한다? 제 몸을 증류수로 만들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짜배기는 오히려 지금부터.
명궁 고재응, 그가 6서클 마법 빛화살을 준비했다. 6등급 몬스터조차 아무런 문제 없이 단숨에 관통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관통력을 가진 빛화살이 멜트 드래곤에게 치명상을 입혀줄 것이다.
그 후 포션을 마셔 마력을 다시 채운 채유리가 6서클 마법, 번개추적자를, 표적이 사멸될 때까지 표적을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강력한 뇌전을 뿜어대는 구체를 소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요하다면, 김지홍이 6서클 마법, 가름칼을 이용해 방과 함께 멜트 드래곤을 베어낼 것이다.
여기서 끝?
당연히 아니다. 마력 회복 포션이 있는 상황이다. 한 번, 두 번…… 5서클 마법은 연거푸 나올 수 있다.
단편을 중편으로, 중편을 장편으로 만드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없어.
이 순간 고재응이, 다음 장면을 만들어야 하는 고재응이 영화를 도중에 끝났다.
-멜트 드래곤이 안중현을 쫓아갔다.
멜트 드래곤이 필요에 따라서, 긴급한 순간, 자신의 외피 일부를 미끼로 주고, 속 알맹이를 빼낸 채 도주한다는 사실을, 오키나와 미군기지 비밀 유적 연구소에서 멜트 드래곤을 조사한 연구원들만 아는 사실을 여기 있는 마법사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까.
더 나아가 멜트 드래곤의 집착을, 한 번 놓친 먹잇감에 대한 집착은 세상 그 누구도 몰랐다.
멜트 드래곤, 놈이 안중현을 다시금 먹어 치우기 위해 움직였다.
* * *
이강우는 안중현을 데리고 통로를 지나 9번 방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안중현의 상태를 살폈다.
“크으…….”
다행히도 안중현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살아서 다행입니다.”
“와 줘서 고맙군…….”
말도 제대로 했다. 눈동자도 멀쩡했다. 아이기스 슈트가 안중현을 구해준 것이다.
“옷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래, 이 옷 덕분이지.”
“몸은 어떻습니까?”
“실금…… 숨을 쉴 때 몸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게 크게 부러진 곳은 없지만 금이 간 곳은 있는 모양이야.”
물론 아주 상처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5등급 몬스터에게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혔는데 실금 정도로 값을 치른다면, 남는 장사다.
이강우는 그런 안중현을 임시 치료하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지금 쓸 만한 약 따위 그리고 붕대를 꺼내 오른팔의 상처도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없어.
그 순간 명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멜트 드래곤이 안중현을 쫓아갔다.
그 말에 이강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중현도 실금 따윈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머릿속에 생각 따윈 없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맹수가, 상위 포식자가 자신들을 향해 온다는 사실에 하위 먹잇감이 보이는 당연한 행동.
그러나 여기서 이강우는 먹잇감이 아닌 포식자를 상대하는 포식자의 행동을 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도축용 칼을 들었다.
‘왔다.’
그리고 이강우는 입구 너머에서 멜트 드래곤의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멜트 드래곤의 실수나, 의도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녀석은 허기에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철하게, 사냥을 하는 맹수답게,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했고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우가 녀석을 파악한 것이다.
놀라운 감?
아니다.
감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발동했다.
그러나 그다지 긍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상대는 5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강하기로 소문난 멜트 드래곤이고, 그놈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건 부상당한 전력 외 4서클 마법사와 도축과 요리 잘하는 4서클 마법사, 둘 뿐이니까. 고작 감을 초월하는 감 같은 게 도움이 될 상황은 아니다.
이윽고 9번 방 안으로 검은색 액체가 빠르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흘러들어온 액체는 곧바로 형체를 갖췄다. 갑자기 분수처럼 솟아오른 액체가 용의 목과 머리가 됐다.
그 상태로 멜트 드래곤은 내질렀다.
크아아!
드래곤 피어가 섞인 울음을.
사냥감의 다리를 후들후들하게 만들고, 심장마저 멈추게 할 무시무시한 외침을.
‘크으으!’
그 외침에 안중현의 몸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처음 마주한 피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의 피어가 자연스러운 위압감이었다면 지금은 노골적인 적의였으니까.
반면 이강우의 몸은…….
‘내가 먼저 친다.’
움직이고 있었다.
권재용 박사 덕분이다. 그가 이강우를 멜트 드래곤 연구에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 덕분에 이강우가 멜트 드래곤의 위장을 해부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조금 전 그 울음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이 멜트 드래곤의 위엄에 대한 내성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이 주는 건 내성뿐만이 아니었다.
이강우가 지금 멜트 드래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 있을 리 없다. 그런 부분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누군가가 이강우에게 멜트 드래곤 잡는 방법을 조언해주지도 않았다.
할 이유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강우 본인도 그런 방법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이강우는 움직였다. 녀석의 본능이 멜트 드래곤에게 한 방 먹힐 방법을 직감한 모양.
그렇게 이강우와 멜트 드래곤의 교전이 시작됐다.
이강우는 멜트 드래곤의 머리를 지나쳤다.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이강우를 멜트 드래곤이 제 입으로 물어뜯으려고 목을 움직였지만 이강우는 그것을 피한 후 녀석의 뒤로 이동했다.
스멀스멀.
그러는 사이 멜트 드래곤은 빠르게 제 몸을 실체화하고 있었다. 아직 통로에 남은 액체화된 몸뚱이가 통로 안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실체화까진 몇 초의 시간이 더 걸릴 모양.
그 몇 초의 시간 속에서 이강우는 이미 발동된 바츠무의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검은 액체에 이강우의 손이 닿자, 하얗게 빛나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제다.
멜트 드래곤이 원한 실체화가 아니라 바츠무의 손이 놈의 실체를 빨아들여 강제로 실체화하게 만든 것이다.
멜트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입을 벌렸으나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당황한 모양.
반대로 이강우는 침착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하얀 것을 손으로 바츠무의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5,312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4,228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5,011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용의 힘이 마나 서클을 자극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알림.
그 순간 실체화된 멜트 드래곤의 꼬리가 이강우의 몸을 세게 후려쳤다. 이강우의 몸이 날아가 벽에 꽂혔다.
“이강우!”
그 광경을 본 안중현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동시에 안중현이 왼손을 뻗었다. 보잘것없는 마법이지만, 안중현은 여기서 자신이 멜트 드래곤의 시선을 끌어, 먼저 희생당할 생각이었다.
‘제발.’
몇 초면 된다. 몇 초의 시간을 벌면 상황을 파악하고 9번 방에 도착한 마법사들이 최소한 이강우는 구해줄 테니까.
물론 이 순간 안중현의 머릿속에는.
‘대체 그게 뭐지? 하얀빛? 마나스톤인가? 그런데 왜 그게 이강우의 손으로…….’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다.
그 복잡한 생각이 안중현의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다. 안중현이 손가락을 튕기려는 순간, 멜트 드래곤은 다시금 액체화를 한 상태로 다른 방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도망쳤다.
멜트 드래곤이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푸후!”
동시에 벽에 박힌 이강우가 숨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몇 번의 기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강우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어둠 속을 밝히듯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의 눈동자가 아니라 용의 눈처럼, 길쭉한 눈동자를 품고 있었다.
안중현이 그런 이강우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이강우의 표정도 굳었다.
‘아.’
이강우는 당황했다.
‘봤구나.’
안중현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다. 바츠무의 손, 그 비범한 능력을 안중현이 봤다.
이강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하지?’
다른 누구도 아닌 안중현이다. 이런저런 변명을 해봤자 통할 리 없다. 그는 냉정하고,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니까. 변명 대신 확실한 답을 찾을 터.
그런 이강우에게 다가온 안중현이, 실금으로 인한 통증을 참느라 표정이 일그러진 안중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나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로부터 몇 초 후.
“다들 괜찮아?”
마법사들이 9번 방에 도착했다.
* * *
-잡았습니다!
-오케이, 드디어 대어를 잡았군!
-드래곤 요리다!
멜트 드래곤을 잡은 건, 멜트 드래곤을 놓치고 9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이었다.
안중현과 이강우를 노렸다가 도망친 멜트 드래곤은 이후 처음과는 다르게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녀석은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액체화도 제대로 되지 못했고, 거의 실체화된 상태로 움직였다.
실체화된 멜트 드래곤을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녀석의 행동은 처음 조우했을 때에 비해 매우 굼떴고, 약해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놈을 잡을 수 있는 정말 절호의 기회가 온 셈.
때문에 적당한 무대를 연출한 뒤, 녀석이 그 무대에 오르는 순간 다시 한번 화력을 집중해서 처치했다.
액체화를 제대로 못하는 녀석은 사실 김지홍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었다.
김지홍이 나서서 가름칼 마법으로 단숨에 녀석을 베었다. 멜트 드래곤의 마지막 발악은 비늘과 살점이 베일지언정 토막은 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멜트 드래곤 사냥은 그렇게 종료됐다.
물론 의문은 남았다.
“대체 이강우랑 안중현은 무슨 수로 거기서 놈을 도망치게 만든 거지?”
기세등등하던 멜트 드래곤이 도망을 친다?
여기서 이강우가 아닌 안중현이 설명을 했다.
“아마도 이강우가 찌른 게 녀석의 용옥, 마나스톤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액체화된 놈의 몸뚱이에서 어떻게 마나스톤이 있는 부분을 찾고, 그걸 액체화 상태에서 어떻게 찌를 수 있을까?
그 의문에 이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밝힐 수는 없지만 멜트 드래곤…… 처음 찌르는 건 아닙니다.”
거기까지였다.
모두가 의문을 품었지만, 밝힐 수 없는 사실을 꼬치꼬치 캐물을 순 없었으니까.
또한 그들이 캐물어야 하는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동료였으니까.
물론 몇몇 이들은 의심을 품었지만, 그 의심을 유적 안에서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그들은 의심을 씹는 것보다.
“자, 그럼 드래곤 고기는 어떤 맛일지 먹어보자고.”
드래곤 고기를 씹는 게 더 우선이었으니까.
* * *
멜트 드래곤과와 처음 조우했을 때, 멜트 드래곤이 안중현과 이강우를 놔두고 도망쳤을 때, 일행은 안중현과 이강우를 데리고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그 후 이강우는 채유리와의 면담을 했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지?”
“정말 괜찮다니까.”
“정말 몸에 아무런 문제 없는 거지?”
“자 봐.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봐봐. 멀쩡하지? 초콜릿이 멀쩡한데 설마 내 뼈에 문제가 있겠어?”
이강우의 말에 채유리는 잽싸게 이강우가 꺼낸 ABC초콜릿을 훔친 후에 비닐을 벗겼다.
그리고는 자세히, 모든 시력을 모아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초콜릿에 집중했다.
“뭉개졌어.”
그녀의 말에 이강우가 한숨을 내뱉었다.
“초콜릿은 원래 뭉개져. 멀쩡하면 그게 초콜릿이야? 돌멩이지. 난 정말 멀쩡하다니까. 저기 있는 의사가 멀쩡하다고 했어.”
말과 함께 이강우가 듬직한 체격을 가진 사내를, 지금 막 면도를 하고 있는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의사이자 마법사이자 이번 유적 사냥의 담당의인 박찬형이 면도하던 것을 멈추고는 말했다.
“채유리 씨, 당신 애인 멀쩡합니다. 밤일도 문제없어요. 문제 있으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그제야 채유리가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초콜릿을 톡, 제 입에 넣었다.
그때 김지홍이 채유리를 불렀다. 이대로 다시 멜트 드래곤을 잡으러 갈 것인가, 아니면 상황을 지켜볼 것인가, 그것을 앞두고 작전 회의를 위해서였다.
만약 멜트 드래곤을 잡고자 한다면 채유리는 꼭 전투에 참가해야 할 테니까.
채유리가 빠지자 이강우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몇십 분 전 상황이, 멜트 드래곤의 꼬리에 맞고 벽에 박혔던 광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미쳤지.’
솔직히 그때 날아가면서 아차, 싶었다. 아, 이렇게 제대로 한번 요단강 구경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후 기침을 했을 때 오히려 너무나도 멀쩡한 몸뚱이를 보며 놀랐을 정도.
물론 그 놀라움은 곧바로 안중현과 눈을 마주치면서 뇌리에서 사라졌다.
어쨌거나 이후 검사에서도 이강우는 멀쩡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갈비뼈에 금이 가면서 요양 판정을 받은 안중현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상황.
그런 이강우의 상태를 판정한 박찬형이 면도를 계속하며 입을 열었다.
“이강우 씨.”
“예?”
“제가 올해로 결혼 3년 차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절대 부부싸움 하지 마세요. 아니면 결혼을 하지 말거나.”
갑작스러운 말에 이강우가 뚱한 표정을 지었고, 박찬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강우 씨가 위험하다는 소리가 나왔을 때 채유리 씨 분위기, 어마어마했습니다. 난 솔직히 살기 때문에 숨이 막힌다는 게 영화나 만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게 가능하더군요.”
그 순간 이강우는 목각귀신을 상대로 채유리가 보여줬던 그 사나운 기세를 떠올렸다.
이강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 모양이다. 이강우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고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참 예쁘고 무서운 여인을 애인으로 두게 됐다. 그때 이강우가 안중현을 떠올렸다.
“안중현 씨는 어떻습니까?”
“갈비뼈에 실금이 났는데, 사실 알다시피 그쪽 부위 실금은 깁스도 못 하고 그냥 누워서 낫기를 기다리는 게 전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됐다고 봅니다. 두 달 내내 일했으니, 이번 기회에 좀 푹 쉬면 되겠죠. 2주 정도면 충분히 회복될 겁니다. 오른팔 쪽 부상도 출혈은 많았지만, 신경이나 근육이 크게 다치지 않았고요.”
다행이다.
죽을 위기에 빠진 것에 비하면 참으로 저렴한 대가를 지불했다.
‘후우.’
그러나 이강우는 안중현의 그 소식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우려를 했다.
‘분명 눈치를 챘어.’
안중현, 그가 이강우의 비밀을 봤다. 그 비밀의 정체는 몰라도, 이강우가 보통 마법사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더불어 안중현은 마법사 이강우를 처음부터 봤던 사내다. 이강우에 대해서 남들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에게 비밀의 일부를 들킨 상황.
‘그나마 다행인 건 안중현이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거겠지.’
그렇다고 안중현이 이강우의 비밀을 약점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천만다행.
‘미치겠군.’
하지만 결국 본론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골치 아프게 변했다. 안중현과는 언제 한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진실을 토로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쯤 되자 이강우는 다시금 고민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사실을 나만의 비밀로 남길 수 있을까?’
불사황제 야크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 존재를 이강우는 자신의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그러는 게 정답일까? 더 나은 선택일까? 아니면 믿을 수 있는 자와 공유를 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까?
골치 아픈 고민들이다. 박찬형이 그런 이강우의 고민 가득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 면도에 집중했다. 누가 봐도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박찬형을 슬쩍 바라본 이강우의 시선이 박찬형이 보고 있는 거울을 향했다. 이강우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고, 기억을 되돌렸다.
‘약 2만 포인트 정도 흡수했지?’
용옥.
멜트 드래곤의 마나스톤을 바츠무의 손을 이용해 흡수를 했다.
마나스톤의 마력을 바츠무의 손으로 흡수해본 건 이미 많이 해봤다.
하지만 그때 그 상황, 갑자기 바츠무의 손을 이용해 액체화 상태, 실체화를 마치지 않은 멜트 드래곤의 마나스톤을 흡수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머리로 한 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다.
‘왜 그랬지?’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어떻게 그런 행동을,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용옥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을까?
‘분석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검은 액체만 가득한 상황에서 정확히 마나스톤을 찾는다?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찾는 격이다. 그런데 이강우는 단숨에, 그 긴박한 상황에 찾아냈다. 물론 용옥을 한 번 직접 만져본 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흡수.’
이강우가 자신의 오른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 만능이나 다름없는 바츠무의 손.
‘단순히 흡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어.’
그 손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젠장, 고민만 늘어나는군.’
이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강우에게 쉴 여유는 없었다. 그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멜트 드래곤 고기라는 과제가.
* * *
멜트 드래곤 사냥이 끝난 이후 마법사들은 당연히 멜트 드래곤의 사체를 회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수한 멜트 드래곤을 바라보는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드디어!’
‘이제 드래곤 고기를 먹는구나.’
이제까지 별별 몬스터를 다 처먹어 봤다. 그러나 그중에서 드래곤 고기는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 타입 몬스터가 보기 힘든 타입이다.
더욱이 드래곤이란 건 뭔가 대단한 존재, 신화 속의 존재나 다름없다.
그런 몬스터의 고기를 먹는다? 기대가 되지 않으면 거짓말일 터.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도마뱀은 질리도록 먹어봤지만 드래곤 고기는…… 내가 먹어본 적이 있었나?’
이강우의 기억 속에도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먹어봤지만 드래곤 요리를 먹은 적은 없었으니까.
여러모로 대단한 경험.
때문에 이강우도 진지하게 나섰다.
‘클래식하게 스테이크로.’
괜한 재주를 부릴 때가 아니다. 이런 귀한 재료는 순수하게 즐겨야 제맛인 법이다.
‘그래, 숙성도 하자.’
여기에 정말 제대로 숙성을 통해서 최고의 맛을, 재료가 가진 맛을 제대로 끄집어낸다면?
‘환상적이거나 아니면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도 크거나.’
어쨌거나 여러모로 의미 있는 경험이 될 터.
이강우가 이제 다시 요리사가 됐다.
* * *
멜트 드래곤 사냥 이후 파티는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
부상자가 있는 상황이었고, 나름 유적 내에서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였던 멜트 드래곤이 사라지면서 유적 내 서열에도 변화가 생길 게 분명했기에 당장은 관망을 하는 게 정답이었다.
여기에 멜트 드래곤이란 귀중한 연구 재료를 두고 다양한 실험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결국에 디데이가 왔다.
이강우, 그가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멜트 드래곤 스테이크를 완성한 것이다.
이미 스테이크를 굽기 전부터 모두가 하던 일을 마치고, 이강우가 스테이크를 굽는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강우는 그런 그들 앞에서 담담하게, 적당한 크기로 다른 고깃덩이들을 구웠다. 여러 번 힘겹게 굽지도 않았다. 앞면을 굽고, 뒷면을 굽고, 접시에 올렸다.
그게 끝.
‘응?’
‘이게 다?’
나름 화려한 요리도 만들었던 이강우였기에, 지금의 단순한 요리를 본 모든 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들의 의문에 이강우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아깝다.’
이 순간 이강우는 정말 진심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아까웠으니까.
‘이걸 나눠 먹는다는 게 너무 아까워.’
숙성 과정에서 맛을 체크하기 위해, 이강우는 일정 시간 단위로 숙성된 고기를 먹었으니까.
그래서 아까웠다.
이 맛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 이강우의 심정을 알 리 없는 마법사들은 조금은 실망한 기색으로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인 고깃덩이를 바라봤다.
‘채유리하고 싸웠나? 뭐 이래?’
‘설마 이게 전부야? 소스도 없이?’
속에서 맴도는 묘한 불만.
그들은 그 불만을 속으로 삭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고기를 썰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그 순간.
‘아!’
모두가 동시에 멈췄다.
마치 재생되던 영상의 정지 버튼을 멈춘 것처럼, 심지어 그들은 고기를 입에 넣은 채 씹지도 않았다.
씹을 필요가 없었다. 멜트 드래곤의 고깃덩이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녹았다. 아니, 사라졌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사라졌다.
그러나 맛은 남아있었다.
그 맛도 대단했다. 고기의 맛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을 다섯 가지로 정한다. 쓴맛, 짠맛, 단맛, 신맛 그리고 최근에는 여기에 감칠맛을 추가한다.
그 다섯 가지 맛이 멜트 드래곤의 고깃덩이에 담겨 있었다. 아우러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집중.
입 안을 가득 채운 맛에 집중을 하면, 택할 수 있었다.
단맛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초콜릿과 비슷한 위엄과 고급스러움 그리고 부드러움을 품고 있었다.
쓴맛은 마치 커피의 쓴맛처럼, 쓰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오히려 계속 맛보고 싶은 느낌이었다.
신맛은 과일처럼 산뜻한 느낌과 함께 와인을 마실 때와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있었다.
짠맛 역시 완벽했다. 자극이 아닌 적당한 수준, 심심한 맛을 그렇지 않은 수준으로 만들어줄 정도로, 정말 완벽하게 고기 자체가 간이 됐다고 느껴질 정도로, 심지어 짠맛 자체도 깔끔했다.
마지막 감칠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미로웠다. 무어라 설명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그냥 이 맛 자체를 감칠맛이라고 정의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다섯 가지 맛을 집중만 하면, 입을 꽉 다문 채 느끼기만 하면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요리가 아니다.
‘맙소사.’
체험이다.
그저 배가 고파서, 맛있는 걸 먹고 싶어서, 그래서 요리를 먹는 미식과는 달랐다.
그 자체가 새로운 경험, 이제까지 미각으로 누린 모든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그 경험 속에서 모두가 입을 꽉 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입 안에 계속 맴도는 맛이 입을 열면 날아갈 것 같았기에.
더 이상 새로운 고깃덩이를 입에 넣을 필요도 없었다. 입을 열지만 않으면 된다. 숨을 참기만 하면 영원토록 이 체험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짝!
이강우가 박수를 쳤다. 모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맛있더라도 숨은 쉬면서 먹읍시다.”
말도 안 되는 경험 속에서 모두가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똑같이, 숨을 한 번 돌린 후에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 * *
감히 식사라고 부를 수 없는 체험이었다.
새로운 미지의 체험, 마치 태어나서 스킨스쿠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호주에 위치한 위대한 경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처음으로 스킨스쿠버를 즐기며 산호초가 만들어낸 바닷속 절경을 볼 때처럼, 황홀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안중현 역시 그 경험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그 맛을 즐기는 동안은 갈비뼈에 생긴 실금으로 인한 통증마저 잊을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식사가 끝났을 때 여유가 아닌 여운으로 가득 찼다.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한 맛이었다.
만약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요리를 맛본다면 긴장이 풀려서, 여운이 남아서 제대로 전투조차 치를 수 없을 테니까. 장담컨대 전투 전에 결코 맛봐서는 안 되는 맛이었다.
그렇다고 중독성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마약과는 달랐다. 그 자체로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평생을 즐길 수 있는 경험이었다. 집착보다는 추억이 남는 맛.
물론 모두가 기대했다.
“다음 메뉴는 뭐지?”
“스테이크입니다.”
“그다음은?”
“스테이크죠.”
“차이가 뭐지?”
“오늘 먹은 건 목살이고, 내일 먹을 건 등심입니다. 그다음에 먹을 부위는 꼬릿살이고, 그다음은 다리 살, 갈비, 안심 순으로 들어갈 겁니다.”
“완벽하군.”
삼시 세끼 스테이크를 먹어야 한다면 모두가 질색을 하겠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그 메뉴 선정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중현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름 만족했다.
‘살아남은 덕분에 호사를 즐기는군.’
막상 살아남았을 때 그렇게까지 큰 기쁨을 느끼진 못했는데, 지금은 살아남은 게 기쁠 지경이었다.
그런 안중현에게, 식사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에게 이강우가 몰래 무언가를 건네줬다.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멜트 드래곤 피입니다. 해독 마법을 썼고, 먹어본 결과 인체에 무해합니다.”
이강우는 그 말과 함께.
“도와주신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이걸 몰래 주는 이유를 붙였다. 안중현이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밀이 없을 리가 없지.’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강우는 너무나도 급격한 변화를 보여줬고 동시에 파격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그리고 영웅에게는 언제나 비밀이 있다.
하지만 안중현은 그 비밀을 궁금해할지언정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이용할 생각도 없었다. 이강우 덕분에 살아남았고, 이강우 덕분에 나름 좋은 경험도 했다. 그가 이강우를 위해 도와줄 건 없더라도, 걸림돌이 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게 이유였다.
“값으로는 충분하겠군.”
값으로 충분하다는 말, 이거 한 잔에 이강우에 대한 비밀을 잊어버려 주겠다는 의미의 말과 함께 안중현은 단숨에 멜트 드래곤의 피를 들이켰다.
‘끝내주는군.’
멜트 드래곤의 피는 와인처럼 감미로웠다.
마시는 순간, 화사하기 그지없는 향이 코가 아닌 뇌리에 가득 퍼질 정도였다.
약간의 떫은맛이 그 향을 보다 선명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약간의 신맛이 그 향을 좀 더 우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약간의 단맛이 그 향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해줬다.
안중현의 눈동자 색이 살짝 희미해졌다. 이 황홀한 향에 취한 모양.
그 순간.
‘음.’
안중현은 느낄 수 있었다.
‘이거…….’
묘한 꿈틀거림, 가슴 속에 무언가 반짝이는 새싹이 솟아오르는 느낌. 이강우의 요리를 먹고 마나 서클이 자극받았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보다 느낌이 더 강렬했다.
이제까지의 자극이 바늘로 콕콕 가볍게 찌르는 자극이었다면, 이번 자극은 송곳으로 단숨에 푹 찌르는 느낌의 자극이었다.
이강우가 그런 안중현에게 보온병 하나를 건넸다. 약 1리터 정도 되는 용량으로, 제법 큰 보온병이었다.
“두고두고 몰래 드십시오.”
말을 뱉는 이강우,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중현, 같이 갑시다.’
이강우, 그가 안중현을 자신과 함께할 파트너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