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선의 방
큰 통로였다. 폭은 6미터 남짓,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8미터 정도 되는 통로. 거대한 트럭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통로를 가득 채운 어둠 속으로 드문드문 빛이 박혀 있었다.
빛을 내는 건, 반듯하게 잘려나간 벽돌 사이에 박힌 수정 비슷한 놈이었다. 반딧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불빛은 통로 전체를 밝히기엔 부족했으나, 어둠으로 가득 찬 통로에 묘한 활기와 숨통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
츠츠, 츠츠!
그런 통로 위를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괴상한 거미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츠으, 츠으…….
실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거미는 참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려는 듯, 그 움직임이 어떻게 보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때.
크릉크릉!
멀찌감치 떨어진 곳, 어둠 너머에서 콧김이 터져 나오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거미는 기겁하며 다리를 접은 채 바닥에 엎드렸다. 거미가 단숨에 길가에 돌아다니는 돌멩이 비슷한 모양새가 됐다.
크릉!
그러는 사이 거미와 콧김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거미의 지척에 콧김 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곰이었다.
크르, 크르…….
묘한 울음을 토해내는 곰은 거대했다.
몸길이는 약 5미터 정도. 고슴도치 가시처럼 돋아난 흑색의 털은 그 자체만으로도 섬뜩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다리였다. 곰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울 정도, 길쭉한 앞다리와 뒷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6등급 몬스터, 긴팔흑곰이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지만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운동능력을 가진 괴물이다.
거대한 몸뚱이는 단숨에 가속할 수 있으며, 최대 속도는 육지에서 뛰는 동물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다. 특히 날렵하기까지 한 녀석의 몸놀림 속에서 휙휙, 날아오는 긴 팔은 채찍보다 더 무시무시하다. 상대를 때리는 게 아니라 잘라 버린다. 긴팔흑곰에 당한 먹잇감의 사체가 칼에 잘린 듯 반듯한 절단면을 보이기 때문에 절단곰이라는 별명마저 가지고 있을 정도.
그 무시무시한 긴팔흑곰이 거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무언가 낌새가 있었는데…… 하는 표정으로.
크르, 크르.
낌새를 느끼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조금은 화가 난 듯한 기색으로.
크릉!
그런 기색으로 거칠게 콧김 한 방을 토해낸 긴팔흑곰은 지척에 있는 거미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때.
크어엉!
갑자기 거친 울음과 함께 긴팔흑곰이 통로 반대편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크엉, 크엉, 크엉…….
녀석의 울음이 통로 안을 메아리쳤다.
그렇게 녀석의 울음이 멀어질 무렵, 거미가 다시 다리를 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긴팔흑곰 발견했습니다.”
탐색용 거미 로봇, 스파디를 조종하던 마법사의 말에 안중현이 펼쳐진 종이 위에 6이라는 숫자가 조각된 체스 말 비슷한 말을 올려놓았다.
동시에 안중현이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를 바라보는 안중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 이유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지도는 무척 복잡했다.
각기 다른 크기의 동그라미들이 나선 형태로 모여 있고, 그 동그라미들을 무수히 많은 선들이 연결된 모양새. 솔직히 그냥 보면 지도가 아니라 낙서처럼 보일 정도다.
그 지도를 옆에서 같이 보던 하선우가 입을 열었다.
“평면으로 보니 이해가 안 되는군요.”
“일단 1차 조사가 끝나면 3D 이미지로 변형해야겠지.”
대답을 해준 안중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가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200평 남짓한 넓이, 돔 형태의 공간.
이 공간이 지금 현재 4등급 유적 사냥 파티가 머무는 베이스캠프였다. 넓은 공간이었고, 천장도 높았으나, 열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각자 가지고 온 물건들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니 넓은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그때 두꺼비를 닮은 사내, 김지홍이 안중현을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안중현이 자세를 바로 했다.
“소득은 있나?”
“이번 유적의 형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했습니다.”
김지홍이 슬쩍 지도를 봤다. 안중현이 수필로 만든 지도를 김지홍이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군.”
“죄송합니다. 제가 그림을 못 그립니다.”
안중현은 짧게 사과한 뒤.
“동그라미는 방입니다. 크기는 제각각입니다. 이런 방이 나사처럼, 나선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선은 통로입니다.”
곧바로 설명을 했다. 김지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향하는 구조인가?”
“예. 이곳이 최상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기는?”
“현재 파악 중입니다만, 크기가 상당합니다. 전체를 파악하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어느 정도이기에?”
“확실치 않지만, 대충 여의도 정도 크기는 염두에 두어야 할 듯싶습니다. 방 하나하나의 크기가 상당할뿐더러, 그 사이를 잇는 통로의 크기와 길이도 범상치 않습니다.”
김지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모래시계문 너머에 여의도만 한 공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사실.
하지만 김지홍은 놀라지 않았다.
“크군.”
그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큰 만큼 몬스터도 많고, 크겠지.”
자신의 경험에 따른 추측을 내놓았다.
“만약 여의도 크기라면, 지금까지 파악된 몬스터의 숫자와 발견 빈도수, 몬스터의 행동 범위 등을 고려했을 때 353마리 정도의 몬스터가 있다고 나옵니다.”
“요즘은 그런 것도 계산이 되는 모양이군.”
“머리 좋은 사람들이 다들 여기에 목을 매지 않습니까? 좋은 프로그램이 많죠. 물론 오차는 큽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자네가 생각하는 이번 유적의 장단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툭툭, 안중현이 곧바로 지도의 선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통로가 핵심입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개의 통로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 고리도 복잡합니다. 거리를 무시한다면, 루트는 거의 무한에 가깝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도주 루트를 다양화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사실은 몬스터에게도 적용됩니다.”
“잡을 땐 확실하게.”
“예, 몬스터가 도망치면서 야단법석을 피우고, 격전(激戰) 형태로 전황이 바뀌면 사방에서 몬스터가 몰려올 겁니다.”
“그런데 이 공간은 통로가 하나뿐 아닌가?”
안중현이 고개를 돌려 통로를 바라봤다. 입구 근처에는 마법사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은 무기 장착을 마친 슈트에 탑승한 채, 통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가 시작점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김지홍의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배려심이 넘치는 유적이야. 유적이 우리를 깔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깔본다.
그 표현에 안중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죠. 마치 유적이 우리를 시험하려는 듯,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좋아,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이제는 대화를 정리할 때.
“결국 이번 유적은 몬스터를 신속 정확하게 제거하는 겁니다. 안전을 꾀할 수 있는 몇 개의 방을 확보한 뒤에 그 안에 몬스터가 들어오면 신속하게 사냥을 할 겁니다. 사냥 기한은 모든 몬스터를 제거할 때까지입니다.”
“결국 시간 싸움이군. 현재 가지고 온 보급품으로는 3개월 안팎을 버틸 수 있을 터. 그 안에 가능하겠나?”
3개월.
그 말에 안중현이 채유리와 같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강우를 한 번 바라본 후 말했다.
“만약 정말로 몬스터가 3백 마리가 넘어간다면, 1년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 * *
마치 피부를 빨아들일 듯한 기세로 피부에 접착된 아이기스 슈트를 입은 네 명의 마법사들이 어둠 속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막이 마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냄새와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막을 앞세운 채 이동하던 그들이 멈춘 건, 야간 투시경 너머로 보이던 길이 끊기고 시커먼 어둠이 보일 무렵이었다.
그들이 보는 어둠은 방이었다. 약 200평 남짓한 거대한 방. 그리고 현재 그 방 안에는 그들이 잡아야 할 몬스터가 머무르고 있었다.
이 네 명 중 한 명인 이강우는 이미 피부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몬스터의 존재감에 속으로만 숨을 골랐다.
그러나 긴장감이나, 주체할 수 없는 떨림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반대.
‘여기서 심장이 차갑게 식는 걸 보니까, 나도 괴물이 다 됐군.’
이강우는 오히려 이 긴박한 상황, 강력한 몬스터 사냥을 앞두고 조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평상시보다 더 느긋하게 고동을 치는 심박 수에 자신의 심장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때 가장 앞에서 이동하던 김지홍이 신호를 줬다. 그가 수신호를 보내자, 김지홍 뒤에 줄지어 있던 하선우와 김재범이 잽싸게 움직였다.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 건 김재범이었다. 그는 왼손 다섯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중 두 개를 뺐다. 엄지와 약지에 걸린 반지를 뺐고,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윽고 마력을 머금은 반지가 독액을 뿜어댔고, 김재범이 손가락을 바닥을 향하게 만들자, 독액이 손끝에 방울방울 맺혔다. 김재범은 그 독액을 가지고 다니는 특수 제작된 컵, 칵테일 셰이크와 비슷한 형태의 컵 안에 떨어뜨렸다.
똑똑,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 양으로 따지면 정말 땀방울 정도였다.
그렇게 컵에 독을 넣은 김재범은 곧바로 뚜껑을 닫고, 뚜껑에 있는 또 다른 입구를 통해 별사탕 크기의 하얀 알약을 집어넣었다.
또르르…….
컵 안으로 들어간 알약이 쟁반 위를 구르는 옥구슬 같은 소리를 냈고, 김재범은 그 상태에서 컵을 가볍게 흔들기 시작했다. 흔들면서 김재범의 어깨도 들썩였다.
그 광경을 보던 하선우는 인상을 찌푸렸고, 이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 양반 성격 대충 견적이 나오네.’
만약 여건이 됐다면, 김재범은 정말로 눈앞에서 칵테일 바에서 볼 법한 쇼를 보여줬을 것이다.
이내 작업을 마친 김재범이 그 통을 하선우에게 건네줬다.
그 무렵 하선우도 작업을 마친 상황이었다. 방음막 마법, 바람막이 마법을 유지한 채 오른손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하선우가 그 소용돌이 위에 김재범이 준 컵을 따랐다. 투명한 아지랑이 비슷한 게 컵에서 흘러 내려와 소용돌이와 어우러졌다.
이윽고 하선우가 소용돌이를 움직였다.
휘휘.
소용돌이는 바람 소리만을 낸 채, 헬리콥터의 날개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통로를 지나 어둠 속,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간 소용돌이는 천장 위에서 점차 제 몸집을 부풀리며 김재범이 만든 독을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288초, 287초…….
안중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귓속이 아닌 머릿속.
마인드맵 마법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마법이다.
지금 같은 상황, 통신망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 속에서 이보다 편리한 마법은 없다.
그만큼 다루기 힘든 마법이기도 했다. 마인드맵은 시전자를 중심으로 정보가 오고 가는데, 타고난 정신력과 능력이 아니면 보통은 지독한 두통에 마법을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번 유적 사냥 파티에는 5서클 마법사이자, 심리학자인 구소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분야 마법의 권위자인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최대 10시간 동안 마인드맵 마법으로 열다섯 명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마법으로 시작해 마법으로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마법사 드림팀!
그런 마법사 드림팀이 노리는 첫 사냥감은.
-3초, 2초, 1초. 돌입. 긴팔흑곰 사냥을 시작합니다.
바로 6등급 몬스터 긴팔흑곰이었다.
* * *
긴팔흑곰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크르르!
묘한 것이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놈을 잡기 위해 나섰으나 헛물만 켰다.
그런 와중에 다른 괴물이 자신을 자극했다. 한 번 제대로 싸워보려고 달려갔지만 그 괴물은 자리를 피했다. 피가 끓었으나, 끓는 피를 소모할 계기가 없었다. 심기가 더 뒤틀렸다.
그런 긴팔흑곰의 눈앞에.
스윽!
가벼운 소리를 내며 처음 보는 놈이 등장했다. 작은 놈이었다. 딱 한 입 거리 정도 될 법한 놈이었고, 개구리를 닮은 놈이었다. 긴팔흑곰의 기준에서는 사냥해서 먹어 봤자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놈이었다.
크르르…….
그런데 그런 보잘것없고 초라한 놈을 상대로 긴팔흑곰은 어느 때보다 긴장된 기색을 내보였다. 긴팔흑곰은 단숨에 자신의 몸뚱이를 살의와 적의로 무장했다.
낌새를 느끼지 못한 게 이유였다.
긴팔흑곰은 눈앞의 존재가 등장하기 전까지 녀석의 그 무엇도 감지하지 못했다. 냄새도 맡지 못했고, 소리도 듣지 못했다. 녀석은 갑자기 환상처럼 등장했다.
마땅히 긴장해야 하는 일이었고, 덕분에 긴팔흑곰은 이미 전투태세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언제든 몸을 날려 상대를 제 앞다리로 후려치고, 물어뜯을 준비를 마쳤다.
그런 긴팔흑곰을 마주한 사내, 김지홍은 긴팔흑곰의 그 기세 앞에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칼 중 하나를 뽑았다. 특별할 것 없이, 천천히 꺼냈다.
그 순간 긴팔흑곰이 김지홍을 향해 돌진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30미터 남짓.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긴팔흑곰의 운동능력이라면 약간의 가속과 한 번의 도약이면 충분히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상대와 거리를 좁히고, 좁히면서 앞다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면 상황은 끝.
긴팔흑곰은 자신의 다리가 김지홍을 단숨에 토막을 내리란 사실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크릉!
긴팔흑곰이 빠른 돌진을 감행하는 순간, 녀석의 몸은 휘청거렸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약에 취한 듯 녀석의 몸이 비틀거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거꾸로 된 세상에 놓인 듯했다. 돌진은커녕 자신의 몸을 제대로 지탱하는 게 시급했다.
그렇게 녀석이 허우적거리는 사이, 김지홍은 오히려 본인이 녀석과의 거리를 좁혔다. 4서클 헤이스트 마법을 발동시킨 김지홍에게도 30미터의 거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좁힐 수 있을 법한 거리였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졌을 때 김지홍은 양손으로 쥔 칼을, 자루부터 칼끝까지 약 1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칼을 양손으로 잡은 채,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칼을 올려쳤다. 긴팔흑곰의 목을 아래에서 위로 단숨에 잘라버릴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움직임이었다.
푹!
김지홍의 칼은 단숨에 긴팔흑곰의 질기기 그지없는 털가죽을 자르고, 두꺼운 지방과 견고한 근육까지 잘랐다.
하지만 뼈를 자르진 못했다.
픕!
기세 좋게 움직인 김지홍의 칼이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 순간 긴팔흑곰은 기회가 왔음을 파악했다. 지금 자신의 목을 깊게 파고든 칼날, 이미 이 상처만으로도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지만 긴팔흑곰의 목은 여전히 붙어있었고, 움직일 힘 역시 남아있었다.
한 번.
바로 지척에 있는 김지홍을 향해 팔을 한 번 휘두르면 최소한 동사(同死)는 꾀할 수 있을 터.
녀석이 마지막 반격을 위해 거센 울음을 토해내려고 했다. 거센 울음과 함께 힘을 쥐어짜 내려고 했다. 그러나 녀석은 배 속에서 나와 목 끝을 지나던 거센 울음을 토해낼 수 없었다.
푸홧!
목이 잘렸으니까.
분명 뼈를 자르지 못해 막혔던 김지홍의 칼이 단숨에 목뼈를 잘라냈고, 목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잘려나간 긴팔흑곰의 거대한 머리통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김지홍은 긴팔흑곰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러자 목을 잃은 긴팔흑곰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김지홍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3서클짜리로는 역시 6등급 몬스터를 잡는 게 쉽지 않군. 참으로 매정한 세계야.”
* * *
6등급 몬스터 긴팔흑곰이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단칼.
혹은 두 칼.
여하튼 그 무시무시한 6등급 몬스터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을 잃었다.
대단한 광경이다.
-어떻습니까? 제 독, 어설픈 누구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광경을 바라본 김재범의 첫 감상은 놀람과 감탄이 아니라 자기 자랑이었다.
마인드맵의 마법 덕분에 모두의 머릿속에 김재범의 말이 들어왔고, 하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훌륭하군.
김지홍은 그런 김재범의 자랑에 맞장구를 쳐줬다.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이강우 역시 김지홍의 심정과 똑같았다.
‘대단하군.’
김재범이 독을 쓰는 건 처음 봤다. 아니, 독 마법을 본격적으로 쓰는 마법사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하선우가 독을 쓰는 걸 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쓴다는 느낌보다는 어디까지나 보조 마법으로 쓴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처음 본 돈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저주 마법보다 위력적이네.’
위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놀라운 건 시간이었다. 김재범이 만든 독은 정해진 시간만큼만 효과를 발휘했다. 6등급 몬스터를 허우적거리게 만들 정도의 독이라면 지독한 독일 텐데, 지금 긴팔흑곰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독의 영향을 조금도 받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강우가 생각하는 독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해야지. 유적에 입장해서 먹는 몬스터 요리가 곰 요리라니, 벌써 기대되는걸. 다들 아는지 모르겠지만 포식자의 요리 실력이 이름에 걸맞게 대단하거든.
김재범의 말에 이강우가 감탄을 뒤로하고 도축을 준비했다.
그때.
-이강우 씨, 긴팔흑곰의 위장은 꼭 가져와 주십시오.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마인드맵을 통해 이강우를 향해 주문이 날아왔다.
-저는 심장을 부탁합니다.
-해부 과정에서 장기의 배치 상태를 알고 싶은데, 그 과정을 촬영해주십시오.
한 가지 주문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주문들이 이강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강우가 실소를 머금었다.
‘보통 마법사들은 아니군.’
넘치는 탐구심을 가진 그들에게 접하기 힘든 6등급 몬스터의 사체는 무시무시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강우는 곧바로 실소를 지웠다. 지금은 도축에 집중할 때다.
이번 도축은 쉽지 않다. 긴팔흑곰은 해부도는 있어도 도축 매뉴얼은 없다. 어쩌면 이번에 이강우가 도축하는 방법이 스택 레코드에 긴팔흑곰 도축 매뉴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강우 입장에서는 매뉴얼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도축을 해야 하는 상황.
‘스탠다드하게.’
이강우는 여기서 굳이 잘하기 위해서 무모한 짓을 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했다.
피를 빼는 방혈 작업과 함께 가죽을 벗기는 박피 작업을 마친 후 내장을 빼내는 작업, 이후 순차적으로 긴팔흑곰의 몸을 부위별로 자르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강우는 담담하게 처리했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장관이었다.
‘몬스터 도축이 한국 제일이라고? 이 정도면 그냥 세계에서도 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는데?’
‘긴팔흑곰의 도축 매뉴얼은 없을 터. 그럼 결국 경험과 숙련도, 타고난 감으로 자른다는 건데…… 대단하군. 한 번도 상대해보지 못한 몬스터의 결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이 타고난 감을 전투에 적용하면 가위손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주겠군. 하지만 리볼버와는 스타일이 다른데…….’
‘예전에 봤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 이제 내가 밑에 두고 자시고 할 실력이 아니야.’
5미터의 몸길이를 가진 거대한 긴팔흑곰이 괴물이 아닌 고깃덩이가 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처럼 보였다.
실제로 이강우는 해체 작업을 하는 데 40분 남짓한 시간만 소모했다. 근력 강화 마법과 마력검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보통은 40분이 아니라 4시간을 줘도 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그렇게 해체가 끝난 후 가지고 온 큼지막한 특수 비닐로 고깃덩이를 감싼 후 네 명이 고깃덩이를 짊어졌다. 근력 강화 마법의 도움으로 각자 백 킬로그램은 훌쩍 넘는 고깃덩이를 쉽게 들 수 있었다.
물론 전부를 들진 않았다. 몸무게가 톤 단위인 긴팔흑곰의 몸뚱이 전부를 들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 혹여 전부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해도 일부러 사체의 일부를 놔둘 생각이었다.
-돌격팀 복귀한다. 수색팀 감시를 부탁한다.
그 사체가 다른 몬스터를 부르는 미끼가 되어줄 테니까.
* * *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 마법사들이 사냥을 마친 사냥꾼들을 반겼다. 정확히는 사냥꾼들이 가져온 것들을 반겼다.
“정말 깔끔하군.”
“진짜 이렇게 보니까 먹음직스러워 보일 지경이야.”
마법사들은 평소 먹는 소나 돼지처럼 깔끔하게 도축된 긴팔흑곰의 고깃덩이를 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나름 경험이 제법 쌓인 그들도 이 정도로 좋은 솜씨의 결과물을 다른 곳도 아닌 유적 내에서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까.
개중에서 이강우에게 위장을 꼭 가져와 달라고 주문한 김두형은 박수까지 쳤다.
“대단해.”
말과 함께 김두형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이강우가 가져온 위장을 갈랐다. 이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툭, 질문을 던졌다.
“위장은 왜 필요하신 겁니까?”
“이걸 봐야 녀석이 뭘 먹었는지 알 수 있으니까.”
김두형, 그는 마법사이자 생물학자였다.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공략 대상이 아닌 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건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게 중요합니까?”
“생태계를 알 수 있는 좋은 근거니까. 그런데 사실 중요성으로 놓고 보면 별로 중요하진 않아.”
좋은 근거다, 그런데 중요하진 않나?
“무슨 의미입니까?”
“어디까지나 내 가설이고, 나만의 생각이지만, 내가 봤을 때 몬스터는 생태계란 개념이 없거든. 그저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을 뿐이지.”
“그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는 건…….”
“그렇긴 한데, 생물이란 게 생존본능이 엄청나거든? 먹히는 놈은 안 먹히려고 진화를 하고, 먹는 놈은 어떻게든 먹기 위해 진화를 하지. 하지만 몬스터의 외형은 그런 진화의 흔적이 없어. 마치 누군가가 디자인을 한 것처럼, 마치 몬스터란 괴물을 만든 것처럼, 독특한 형태만 갖추고 있을 뿐이지. 긴팔흑곰만 봐도 그래. 곰의 외형을 가졌지만 팔이 길지. 그럼 왜 팔이 길까? 팔이 길어야만 하는 생태계 속에 있어서? 내가 보기엔 아니란 말이야.”
말을 하던 김두형은 옅게 웃었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줄까?”
그 말에 이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지금 이강우도 할 일이 많았다. 가지고 온 고깃덩이를 숙성실에 집어넣고, 몇 개는 요리로 만들어 대접해야 한다.
또한 언제 다시 몬스터가 포인트 지점에 등장할지 모른다. 이강우에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중에 식사할 때 듣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그보다 위장 고마워.”
“아닙니다.”
“그런데 쓸개는 없나? 곰 내장이면 당연히 쓸개가 있어야 하는데, 쓸개가 안 보이네.”
“아…….”
그 말에 이강우는 잠깐 고민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다른 곳에 있을 겁니다. 챙기긴 챙겼으니까요.”
‘마력은 내가 다 뽑아먹었지만.’
웅담, 당연히 챙기지 않았을 리 없다. 분석 마법을 통해 금방 발견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웅담에 담긴 마력 포인트는 4천 포인트!
이강우는 그 마력을 바츠무의 손을 이용해, 도축 작업을 하면서 단숨에 흡수했다. 그 외에도 도축을 하면서 마력이 농후하게 몰린 부위는 여지없이 바츠무의 손을 이용해 마력을 흡수했다.
‘역시 짭짤하다니까.’
긴팔흑곰을 잡아 흡수한 마력 포인트가 6천 포인트가 넘어갔다. 여기에 요리를 해서 먹고, 요리 과정에서도 흡수할 수 있는 마력 포인트를 가늠하면?
이강우가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김두형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정력에 좋을까? 웅담이면 역시 그거잖아?”
정력이란 말에 이강우가 옅게 웃었다. 역시 대한민국 남자의 관심사는 하나인 모양.
“지금 여기서 정력이 필요나 하겠습니까?”
“나야 필요 없지만.”
여기서 김두형이 묘한 눈빛으로 이강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쪽은 필요하잖아?”
당연히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김두형이 이강우의 굳은 표정을 보며 푸념 섞인 말을 뱉었다.
“아, 나도 금발에 어여쁜 애인 가지고 싶다. 여기에 6서클 마법사이면…… 아이고, 부부싸움은 무서워서 못하겠네.”
아무래도 이강우와 채유리의 관계가 퍼질 만큼 퍼진 모양이다. 누군가 그 사실을 입 가볍게 놀린 모양이다.
그 누군가를 추측하는 건 당연히 어렵지 않았다. 안중현, 하선우가 입을 놀렸을 리는 없으니까.
‘김재범.’
이강우가 쯧! 짧게 혀를 찼다.
* * *
강희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역시 아프리카로군. 지금 상황에서 기예르모가 자기 수준에 맞는 모래시계문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아프리카 정도밖에 없으니까. 그보다 녀석의 뒤에 후원자란 인물이 붙은 것 같은데?”
통화를 하는 강희의 기세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 그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란 직위에 어울리지 않게 유순하고, 부드럽고, 살가운 사내였지만 지금 그는 살벌했고, 섬뜩했고, 비릿했다.
말을 뱉을 때마다 눈빛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번쩍였다. 먹잇감을 발견한 뱀처럼.
“후원자란 인물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쪽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런 기세는 통화 내내 유지됐다.
“슬슬 놈들도 조직화되고 있군. 예상했던 바지만, 그래도 골치가 아프군. 그나마 다행인 건 전체적인 흐름은 계획한 대로 흐르고 있다는 점과 이강우가 우리 손에 있다는 점이겠지.”
그런 통화는 좀 더 이어지다, 끝 무렵에 도달했다.
“잘 지내게, 마르쿠스.”
그리고 그 끝 무렵에 강희는 자신의 통화 상대에게 안부의 인사를 건넸다.
통화를 마친 강희는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스마트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강희가 그 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예, 마법청장님.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강희입니다. 잠시 일이 있어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순간 강희, 그는 평소와 같이 유순하고 부드러운 사내로 변해 있었다.
* * *
마법청은 4등급 모래시계문 사냥에 나선 마법사들을 위해 특별한 보급 식량을 준비했다. 부피를 최대한 줄이면서 열량과 필수 영양소는 완벽하게 갖춘 식품이었고, 보존 기간도 훌륭했으며, 맛도 나름 괜찮았다.
물론 그 맛이란 게 가끔 생각날 때 먹을 만한 수준이지, 주식으로 먹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메뉴 역시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나름 다양한 메뉴라고 하지만, 원래 이런 종류의 식품이란 게 메뉴가 많아도 먹는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이다.
그 사실을 유적 사냥을 해볼 만큼 해본 마법사들이 모를 리 만무했다.
때문에 긴팔흑곰이 깔끔하게 도축된 채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당연히 이강우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강우가 만들어낼 요리, 유적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를 눈빛으로 표현했다.
‘자, 그럼 한번 내 몸값을 올려볼까?’
이강우 역시 이런 관심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강우는 이번 한 번의 요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이 파티에 확실하게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아니, 각인 그 이상을 노리고 있었다.
‘원래는 첫 요리는 숙성을 거쳐서, 진짜 제대로 만들려고 했지만…….’
사실 이강우는 첫 요리를 작정하고 만들 생각이었다. 그저 금방 도축한 생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아니라, 숙성을 통해 재료가 가진 맛을 극한까지 끄집어낸 최고의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더불어 이런 계획을 세운 건 이제는 유적 내에서도 고기 숙성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원래 고기는 어느 정도 숙성을 거쳐야 한다. 막 도축한 고기는 신선한 맛은 있어도 깊이 있는 맛은 찾기 힘들다. 숙성을 통해 사후경직 상태였던 고기의 육질이 풀어지고, 아미노산 등 감칠맛을 내는 요소들을 증가시켜야 그 고기의 진짜 맛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숙성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저온의 상태, 냉장고 수준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꽁꽁 얼리는 것과는 다르다. 얼리면 보존 기간은 늘어나지만, 숙성과는 거리가 멀다. 상온에서의 숙성은 부패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온의 기온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5등급 몬스터, 얼음뿔 드래곤의 뿔 조각을 이용한 냉장고를 구한 덕분이었다.
얼음뿔 드래곤은 얼음처럼 보이는 뿔을 머리에 여러 개 달고 있다. 그 뿔은 머리에서 뽑아도 한기를 풍긴다. 물을 뿔 가까이 가져다 놓으면 그 물을 얼릴 정도의 한기가 영구적으로 뿜어진다. 그런 뿔의 한기를 이용하면 간이 냉장고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이번에 유적으로 가지고 들어온 보급품 상자 역시 냉장고로 써먹기 위해 적당한 개조를 맞춘 상황이었다. 보급품 상자의 측면에 위치한 구멍 안에 얼음뿔 드래곤의 뿔 조각을 넣으면 보급품 상자가 냉장고가 된다.
물론 기껏해야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 5등급 몬스터의 뿔을 쓰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냉장고는 인류 문명에서 정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도구다.
특히 먹을 게 중요한 유적에서 식품 보관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려준다는 건, 유적 사냥꾼들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긴팔흑곰이 첫 재료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그런데 이강우는 긴팔흑곰의 숙성을 포기했다.
‘기예르모 레시피를 써먹어 봐야지.’
대신 기예르모 레시피의 방법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클로저 라이센스 응시를 앞두고 이강우는 리볼버에게 응시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로 받은 게 기예르모 레시피 5권과 8권의 사본. 당연히 받았다. 이강우가 제 몫을 챙기지 않았을 리 없다. 더불어 영어로 번역된 그 사본을 해석하느라 제법 고생도 했다.
그런 기예르모 레시피 8권에 긴팔흑곰의 요리 방법이 있었다.
‘기예르모, 참 무식하면서도 대단한 인간이야.’
기예르모 레시피 8권에 긴팔흑곰에 대한 내용은 꽤 재미있었다.
-긴팔흑곰을 잡았다. 맛있을 것 같다. 먹을 건 굽고, 남은 건 꽁꽁 얼렸다.
-구워 먹었다. 질기다. 버렸다.
-이상하게 맛이 떠오른다. 얼린 걸 부쉈다. 먹었다. 먹을 만하다.
-얼린 걸 부숴서 녹여서 구워 먹었다. 괜찮다.
기예르모의 요리법 특징 중 하나는 도구나 현실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기예르모는 먹을 걸 구하면, 특히 육류를 구하면 두 가지 방법을 쓴다. 먹을 건 불에 구워 먹고, 남은 건 보관을 위해 꽁꽁 얼린다.
그런 기예르모의 방식이 긴팔흑곰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긴팔흑곰의 육질은 그냥 먹기엔 너무 질기다. 거대한 몸뚱이를 바람처럼, 채찍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근육이 질긴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질긴 고기를 연하게 만드는 방법, 숙성을 거치고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가진 재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도 아마 쉽게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지 못할 터.
물론 칼꼬리전갈독이란 만능 재료가 해답이 되겠지만, 이강우는 기예르모의 방법을 따르기로 했다.
이강우는 마법을 이용해 먹을 만큼 분량의 긴팔흑곰의 등심을 꽁꽁 얼리기 시작했다.
얼린 후에는 망치로 두드려 깼다.
그 과정을 보던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요리를 하는 거야, 아니면 퍼포먼스를 하는 거야?’
‘고기를 얼린 후에 망치로 부순다? 지금 그걸 우리 보고 먹으라고 만드는 건가?’
그런 그들의 의구심 가득 찬 시선 앞에서 이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더욱더 주목해라. 정말 그 어디에서도,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줄 테니까.’
* * *
“식사하십시오.”
이강우의 말 한마디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역할에 충실했던 모든 마법사들이 이강우를 주목했다. 그리고는 모두가 식사를 위해 줄을 섰다.
‘완자탕이네?’
‘완자라…… 스테이크 같은 걸 기대했는데, 좀 깨는군.’
‘탕 요리가 들어가려나?’
긴팔흑곰의 등심과 안심 그리고 밀가루를 섞어 만든 고기완자, 그 고기완자를 이용한 완자탕이었다. 이강우는 큼지막한 냄비에 담긴 완자탕을 그릇에 담아 차례차례 건네줬다.
가장 먼저 요리를 받은 건 김지홍이었다.
“많이 담아주게. 자네 요리가 내 입맛에 맞아.”
그 말에 이강우는 고기완자를 듬뿍 담아 그릇에 담아줬다. 그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진 않았다. 채소도 없이 뽀얀 국물과 회색빛 고기완자가 전부인 완자탕은 솔직히 눈으로 봤을 때는 조금도 맛이 기대가 되지 않았다.
“조금 과할 정도로 야성적인 음식이군.”
김지홍이 약간은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정말 이건 맛이 별로일 것 같은데? 하는 어투로 내뱉은 그 말에 이강우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맛은 더 야성적일 겁니다.”
그다음 차례는 채유리였다. 그녀는 대부분의 이들이 실망감과 우려로 눈빛으로 요리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이강우를 바라보며 그릇을 내밀었다.
이강우는 그런 채유리의 눈빛에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그릇에 완자탕을 담아줬다. 그런데 그 고기양이 상당했다. 앞서 김지홍도 꽤 푸짐하게 담아줬는데, 채유리의 경우에는 완자가 산처럼 쌓일 정도.
채유리가 함박웃음을 지었고, 이강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배식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시간.
열네 명의 마법사들이, 당장 현실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몸값과 대우를 자랑하며 마음 내킬 때 일류 레스토랑에서 얼마든지 코스 메뉴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이 의자조차 없어 바닥이나 상자 따위에 앉은 채 꾀죄죄한 모습으로 완자탕을 먹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국물부터 후루룩! 누군가는 완자부터 쩝쩝,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는 순간, 침묵이 깔렸다.
‘이거…….’
‘정말 야성적이야.’
‘처음 보는 맛인데…… 이거 설명이 안 되네. 그런데 맛있어. 정말 맛있어.’
야성적인 맛, 긴팔흑곰의 맛은 그렇게 표현할 방법밖에 없었다.
야성적인 맛이란 건, 어떤 조미료와 요리 방법을 써도 본연의 맛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다.
긴팔흑곰의 맛이 그랬다.
자기주장이 아주 강했다. 맛을 느끼는 게 아니라, 맛이 마치 혀 속을, 온몸을 파고드는 것 같은 느낌.
또한 특이했다. 다른 무언가, 소나 돼지 혹은 양고기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기 맛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단순하게 맛이 있냐, 없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맛있었다.
고기완자는 완자인 주제에 탄력이 굉장했다. 마치 떡을 넣은 것처럼, 씹는 맛이 상당했다. 씹을 때마다 나오는 야성적인 풍미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완자의 고기 맛이 우러난 국물 역시 훌륭했다. 적당한 기름기는 목을 가볍게 넘어갔고, 속 역시 따스하게 달구어 줬다.
이 맛 앞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후루룩, 쩝쩝, 후우!
국물을 마시고, 고기완자를 씹고, 입 안 가득 찬 열기를 토해내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는 모습.
그 어떤 대화도, 맛에 대한 감상도 뱉지 않은 채 요리 자체를 먹느라 바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회심의 미소는 아니었다.
‘맛으로만 어필하면, 결국 그냥 데리고 다닐 만한 요리사일 뿐이지.’
맛은 시작이다.
이강우는 분명히 작정을 했다. 이 요리 하나로, 이번 유적 사냥 파티에서 자신의 존재를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시킬 거라고.
‘이제 슬슬 느끼겠지.’
이강우는 이번 요리에 효소를 썼다. 이미 채유리를 통해 검증을 마친 그 효소 말이다.
마나스톤을 이용해 만든 마나 서클 자극 비약만큼은 아니지만, 마법사라면 분명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 슬슬 마나 서클이 자극받는 걸 마법사들도 느끼기 시작할 터.
여기에 추가적으로 긴팔흑곰 고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원기 보양 효과가 있었다. 배가 든든해지고, 몸에 힘이 넘치는 느낌이 든다. 피로감도 사라진다.
실제로 처음에는 맛에 빠져 있던 마법사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기 시작했다.
‘이거…….’
‘과연, 리볼버의 제자라 이건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마약이나 다름없는 걸 만들어냈군.’
마법을 쓰는 상황이 아님에도 마나 서클이 마치 준비운동을 했을 때 몸이 예열되는 것처럼, 적당한 자극을 받으며 활성화됐다.
마법사라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온몸에 힘이 넘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요리, 그 이상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강우는 마지막 결정타를 넣었다.
“아, 밥 말아 드실 분?”
한국인이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결정타였다.
* * *
길드에 소속되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마법사들은 몬스터와의 전투에 큰 부담감을 느끼진 않는다.
그런 그들을 괴롭히는 건 몬스터와의 전투가 아니라, 생활에 관련된 부분들이었다.
불편한 잠자리, 식수를 아끼기 위해 제대로 씻을 수 없는 환경…… 개중에서도 생각 이상으로 마법사들을 괴롭히는 건 먹는 것이다.
평소에 필요할 때면 콜라든, 치킨이든, 피자든 마음껏 먹을 수 있던 이들이 한 달 동안 비슷비슷한 보급 식량만 먹을 경우 느끼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일부는 이 과정에서 스트레스 탈모를 얻을 정도다. 몬스터 사냥을 하면서도 찾아오지 않던 스트레스 탈모가 먹을 걸 못 먹어서 생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식탐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지금.
“몬스터 발견했습니다. 7등급 몬스터 꽃등도마뱀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꽃등도마뱀은 맛이 어떤가?”
안중현의 보고에 누군가가 이강우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건넸다.
“등심으로 탕수육 해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이강우가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몬스터 발견했습니다. 7등급 몬스터 독돼지입니다.”
그리고 사냥을 마친 이후, 다시 안중현이 몬스터의 등장을 알렸을 때.
“쟤도 먹을 수 있나?”
“해독 마치고 먹으면, 입에서 고기가 녹습니다.”
모두가 안중현보다 이강우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고, 이강우는 당연히 대답했다.
“몬스터 발견했습니다. 6등급 몬스터 사슬뱀입니다. 이강우, 이건 어떤가? 맛있나?”
나중에는 안중현이 그냥 아예 본인이 대표로 질문을 했다.
“모르겠네요. 한번 잡아서 먹어 보죠?”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몬스터를 발견할 때마다 모두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이강우를 찾았다.
모두가 이강우가 만드는 요리의 포로가 된 것이다.
‘다들 욕심은 많아가지고…….’
물론 단순히 요리가 맛만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대놓고 이강우에게 질문을 하진 않았지만, 이강우의 요리가 마나 서클 자극 효과가 있다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다. 이런 기회가 과연 얼마나 올까? 그것 때문이라도 이강우의 요리를 먹고 싶은 상황에서, 몬스터가 발견될 때마다 마법사들이 이강우를 찾는 건 당연했다.
유적에 입장한 지 보름째가 됐을 땐 오히려 이강우가 이런 상황을 자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대로 가다간, 그냥 먹지도 못하고 버리겠어.’
몬스터의 덩치는 어마어마하다. 한 마리 잡을 경우 전부 먹는다고 치면, 열다섯 명이 일주일 내내 먹어도 해치우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보름 동안 잡은 몬스터 숫자는 스무 마리! 이미 얼음뿔 드래곤의 뿔 조각을 이용해 만든 냉장고에는 고기가 가득 찬 상황이다.
결국 이강우가 안중현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먹을 게 충분한데, 몬스터 사냥 횟수나 빈도를 줄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안중현은 고민했다.
보통 때라면 고려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 4등급 유적 사냥 파티는 이강우의 요리 덕분에 어느 때보다 몬스터 사냥에 관심과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강우의 요리 앞에서 파티가, 이제까지 이렇다 할 호흡을 맞춰본 적도 없는 무리들이 하나가 된 셈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이강우의 요리가 사냥을 해야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고, 그렇게 의도할 생각이었다.
그런 만큼 이강우의 의사는 중요했다.
그리고 안중현 역시 빨리 몬스터를 전부 해치우고 나가기보다는 최대한 오래 이번 유적 사냥을 진행하며, 보다 많은 요리를 먹고 싶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굳어있던 그의 마나 서클이 이강우의 요리를 먹으면서 조금씩 움직이는 듯한 낌새를 느꼈으니까.
물론 안중현은 자기감정은 판단에서 배제했다.
‘리스크.’
이 상황에서 안중현은 정말 냉철하게, 당장의 이익보다는 리스크를 염두에 두었다.
잡을 수 있는 몬스터를 그냥 놔둘 경우의 리스크…… 그렇게 생각하자 답은 금방 나왔다.
“미안하네. 식량 확보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몬스터의 개체 수를 줄이는 게 중요하네. 이번 유적 사냥의 목적은 몬스터 몰살이니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는 잡아야지.”
이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안중현다워.’
이강우는 안중현의 대답에 만족했다. 어디까지 그는 의견을 냈을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는 안중현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신뢰감을 느꼈다. 불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이강우가 안중현과의 대화를 마쳤을 때, 그 대화를 지켜보던 한 명이 이강우에게 다가왔다.
“이강우 군.”
두꺼비 외모를 가진 중년 사내, 김지홍이 이강우에게 말했다.
“자네, 내 밑에서 제대로 칼을 다루는 방법 배워볼 생각 없나?”
이강우에게 갑자기 찾아온 기연이다.
김지홍의 솜씨는 이강우가 직접 눈으로 봤다. 그의 칼솜씨…… 정확히는 마법을 다루는 솜씨는 놀라웠다.
김재범의 독 마법처럼, 김지홍은 단순히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마법을 써서 나온 결과물을 자기 기술로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가 쓰는 3서클 절삭 마법은 그 위력이 4서클 이상이라고 판단될 정도였다. 절삭 마법 중 대표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검을 자주 써본 이강우였기에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곧장 예, 라는 대답을 뱉진 않았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김지홍과 이강우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있다.
그런데 김지홍이 아무에게나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관심은 있습니다만, 대체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그때 말했지? 조만간 지분을 판매하겠다고.”
그런 말을 했다. 이강우 자신이 스스로를 기업에 비유해서, 상장을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그 지분을 구매하고 싶군.”
여기서도 이강우는 곧장 예,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분 구매는 곧 이강우에 대한 투자인데, 투자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돈을 주는 건 투자가 아니라, 기부다.
이강우가 즉답을 하지 않은 채 눈빛을 보내자, 김지홍이 곧장 대답했다.
“명궁과 이야기를 마쳤네. 마법청을 상대로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 좀 더 체계적으로 해보는 게 어떻겠나?”
‘아!’
그 순간 이강우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이강우는 김지홍에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마법청으로부터 더 나은 대우를 받겠다고 했다. 그걸 위해서는 김지홍과 고재응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지홍은 그보다 좀 더 앞선 계획을 세웠다.
‘담합이구나.’
채유리란 6서클 마법사를 꽉 손에 쥔 이강우와 남은 두 명의 6서클 마법사가 담합을 한다면?
마법청과도 충분히 갑 대 갑으로 협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터.
물론 이런 작업은 결국 서로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지홍의 투자는 그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투자다.
그제야 이강우는 대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강우, 그에게 새로운 기연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