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전야제
어느 조직이든, 중요한 일이 생기면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긴급하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다.
고급스러운 일식집에 강희를 비롯해 안중현과 하선우가 모인 이유는 당연히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
그렇게 모인 셋은 대화로 나누기도 전부터 표정으로 각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채유리 양이 여섯 번째 마나 서클 개방에 성공했습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강희가 인사말을 배제한 채 첫 말을 곧장 꺼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선우와 안중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크게 놀라진 않는 모양이군요.”
강희의 물음에 하선우가 대답을 했다.
“놀랐다기보다는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죠.”
채유리의 여섯 번째 마나 서클 개방.
대단한 사건이다.
현재 즈믄나래는 6서클 마법사가 없다. 당연히 채유리의 성장은 즈믄나래의 가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이다.
그동안 채유리를 손에 쥐기 위해 즈믄나래가 치른 고생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된 셈. 그 부분에서 나름 고생의 일부분을 담당한 하선우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이자 동시에.
“그런데 정말 이강우 씨의 요리를 먹고 6서클을 개방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이었다.
채유리의 6서클 개방은 어떻게 보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그녀의 6서클 개방에 묘한 사건이 끼어들었다.
“예, 일단 상황은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하면, 이강우가 만든 요리를 먹고 채유리가 여섯 번째 마나 서클을 개방했습니다.”
채유리가 이강우의 요리를 먹고 6서클을 개방했다는 것.
하선우와 안중현이 후우! 동시에 숨소리를 냈다.
강희의 말은 계속됐다.
“그리고 이강우는 리볼버의 후계자이며, 이 모든 과정을 권재용 박사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렇게 말이 끝났을 때 안중현과 하선우는 이 말의 핵심 파트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이다.
“권재용 박사의 입을 타고 알 사람은 알게 됐겠군요.”
하선우의 말에 강희와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재용 박사는 즈믄나래 연구소 소속이지만, 그를 즈믄나래 차원에서 강력하게 압박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유적 연구 분야의 권위자다. 즈믄나래가 아니더라도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넘쳐나며, 마법청과도 접점이 있다. 즈믄나래를 떠나도 아쉬울 것 없는 자다.
또한 권재용 박사는 전 세계에 유적 관련 관계자들과 적잖은 친분을 유지 중이다. 즈믄나래가 권재용 박사를 손에 쥐고 흔들고자 한다면, 권재용 박사는 유적 연구소를 나와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거야말로 진짜 손해다.
물론 권재용 박사가 입이 가벼운 건 아니다.
“권재용 박사라면 이 정보를 적당히 이용해먹을 테니.”
문제는 그가 정보를 거래 품목, 거래를 위한 화폐쯤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필요하면 자신의 정보를 팔아서 원하는 정보를 구한다.
그리고 그는 사고 싶은 게 많은 사내이기도 하다. 이강우와 채유리 사이에서의 사건은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는 꽁돈이 생긴 계기나 다름없을 터.
“이미 소식은 퍼졌습니다.”
실제로 이미 권재용 박사는 팔 만한 곳에는 다 팔았다.
“덕분에 이강우 씨에 대한 러브콜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설마 정말로 요리를 먹고 6서클 개방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안중현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강우의 능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반대로 이강우의 요리 때문에 정말 6서클 개방이 가능했다는 건 어폐가 있다.
우연이 겹쳤을 것이다. 채유리는 언제든 6서클이 돼도 이상할 게 없던 사람이다. 더군다나 채유리는 이강우랑 자주 같이 다닌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이강우의 요리에 그런 재주가 있다면, 이강우 본인은 지금 7서클쯤은 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하나의 진실도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법.
“정말로 순수하게 요리 하나 먹고 6서클 개방에 성공했다는 걸 믿는 인간은 없겠죠. 하지만 어떠한 계기를 만들 정도는 된다, 그걸 믿는 이들은 제법 있지 않겠습니까?”
믿는 인간은 있다. 실낱같은 이야기라고 해도, 그 실낱에 베팅을 해보고 싶은 마법사는 부지기수, 결정적으로 이강우는 그 분야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리볼버의 제자 아닌가?
러브콜은 온다.
남은 건 그 러브콜에 대한 대응.
‘이강우 씨에게는 클로저 라이센스가 있다.’
‘이강우에게 연달아 운이 따르는 모양새군. 하늘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야.’
여기서 상황이 꼬인다. 이강우는 길드나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작심하면, 전 세계에서 날아오는 러브콜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만약 여기에 4등급 유적 클로즈라는 경력까지 추가된다면?
‘이것저것 요소들을 고려하면…….’
‘이강우의 이름값은 내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되겠군. 지금도 차원이 다르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야.’
이강우란 이름이, 그의 별명인 포식자란 타이틀이 하나의 브랜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모인 이들이 알고 있는 이강우라면, 이런 조건들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이강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강우는 분명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다. 자신이 주변에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자신의 처지에 맞게 저울질을 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을 할 법한 인간이다.
이 순간 하선우와 안중현은 각기 다른 계산을 했다.
‘어차피 이제 당분간 이강우 씨 밑에 들어가야 하니, 나로서는 오히려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네. 아니, 오히려 전화위복인가?’
하선우는 이 상황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4등급 모래시계문 클로즈가 끝난 이후에는 이강우 밑에서 지내야 하는 몸, 이런 상황이면 오히려 이강우를 따라 전 세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절호의 기회다.
‘이강우의 이름값이 점차 커지는 중인데, 그런 그를 그저 아는 사람으로 두는 게 옳은 걸까, 그의 등에 오르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게 옳은 걸까?’
안중현은 고민했다. 이강우의 성장에 여러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 감정은 중요한 게 아니다. 이강우의 행보에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게 핵심이다.
그런 그 둘을 보며 강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 이강우 씨가 되도록 즈믄나래의 타이틀을 달고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강희의 말에 둘이 생각을 멈추고, 강희를 바라봤다.
“전 이강우 씨에게 두 분을 심어둘 겁니다. 두 분은 이강우 씨의 조력자이자, 동시에 이강우 씨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적당히 제거하고, 동시에 제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강우 씨를 속여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겁니다. 해주실 수 있습니까?”
강희, 그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본론을 꺼낸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뱀처럼 빛나고 있었다.
* * *
이강우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장장 14시간에 걸친 수면은 어떤 방해도 없었다. 이강우는 긴 수면 끝에 명쾌해진 머릿속을 제대로 음미하려는 듯, 기지개를 있는 힘껏 폈다.
“으아아아!”
‘불사황제든 뭐든 꿈에 안 나오니까 아주 그냥 기분이 날아갈 것 같네.’
짧은 푸념과 함께 이강우가 코를 킁킁거렸다. 여러 기름진 냄새가 이강우의 코끝을 간질였다.
‘뭐지?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네? 전이라도 부치나? 잡채?’
평소에는 흔히 맛보기 힘든 음식 냄새에 이강우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후 이강우는 주변을 봤다.
‘넓구나.’
이강우 그는 자신의 넓은 방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이만한 원룸에서 살았는데…….’
예전에는 그가 지내던 원룸 크기의 공간, 그러나 이제는 이 공간이 이강우의 방 중 하나일 뿐이다.
‘72평, 실거래가 25억 원.’
집을 샀다.
그것도 평생 모은 돈이 가소로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집을.
예전에는 과연 이런 집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던 집.
물론 대출이 대부분이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당장 4등급 유적만 클로즈 하면 일시불로 갚을 수 있는 돈이다.
오히려 이강우는 이 순간 방을 돌아보며 대출금 생각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 여길 좀 꾸며야지. 나중에 화랑 같은 데 가서 천만 원짜리…… 옜다! 통 크게 1억 원짜리 그림 사서 저기 좀 걸어두고, 최고급 홈시어터도 꾸미고, 그래 스피커도 사야지. 한번 음악 듣는 데 억 단위 돈을 써보자고.’
돈 쓸 생각들…… 그 생각에 이강우는 피식 웃었다.
예전이라면 이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아무리 해도 몸은, 감정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강우가 그 웃음을 지은 채 방 밖으로 나왔을 때, 거실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냄새의 시발점은 부엌, 그 부엌에서 바닥에 앉은 여동생이 열심히 부치고 있는 전이었다.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이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는 이제 일어난 거야?”
“요즘 꽤 피곤한 일이 많아서.”
“그래, 피곤한 거 알아서 이제까지 자게 둔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등짝을 밟아 깨워서 나 대신 오빠가 전을 부치고 있었을 테니까.”
“너 요즘 입이 험하다?”
이혜연은 대답 대신 옆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산더미처럼 쌓인 전이 보였다. 전이란 게 일일이 부쳐야 하고, 빨리한다고 빨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산더미처럼 전을 쌓으려면 한두 시간은 전만 부쳐야 가능하다.
여동생이 까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악한 이강우가 알아서 꼬리를 내렸다.
“아니, 무슨 전을 이렇게 갑자기 많이 부치는 거야? 아직 추석까진 많이 남았잖…… 아.”
그 순간 이강우는 떠올렸다.
“아버지 기일이구나.”
딱히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사실. 이강우는 한숨을 내뱉었다.
“전 말고 또 할 건? 아버지 생전에 전보다 냉면 좋아하셨는데 내가 가서 냉면 좀 사 올까?”
“냉면은 좀 아니지 않아?”
“술은? 아버지 와인 좋아하셨으니까 와인으로 올릴까?”
“응, 그래서 이미 사뒀어.”
“어떤 거로?”
“내가 조금 모아둔 돈이 있어서, 그 돈으로 샀어.”
“그러지 말고 그냥 이번 기회에…….”
그 순간 이강우는 로드리게스 회장이 준 카드를 떠올렸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그 카드로 샀다면 비싼 와인 하나가 아니라, 와인 매장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접었다. 이강우가 하던 말을 멈추자 이혜연이 그런 이강우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버지 제사상마저 남의 돈으로 채우는 건 좀 그렇지.’
그때 이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판을 벌인 걸 보면 어머니 솜씨가 분명했다.
‘그보다 손 큰 건 여전하시네.’
어머니는 정말 요리 한번 하면 제대로 했으니까. 손이 큰 정도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명절 오면, 이강우 주변 이웃집이 기대를 했을 정도였다. 솜씨도 좋다. 정말 음식 만드는 솜씨가 제일이다. 몸만 건강하셨다면, 이강우는 그냥 어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서빙만 했어도 빚 걱정, 돈 걱정은 없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벌이신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엄마는?”
“부족한 게 있어서 잠깐 장 보러 가셨어.”
“장 보러? 근처 마트까지 거리가 꽤 되는데 너랑 같이 안 가고? 엄마 차 운전 못 하잖아?”
“괜찮아. 실력 좋은 운전기사가 있으니까.”
실력 좋은 운전기사라는 말에 이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더불어 여동생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묘하게 불안했다.
‘뭔 소리야? 설마 나 모르는 사이에 운전기사 고용한 건가?’
그런 이강우의 의문을 곧장 풀어주겠다는 듯, 곧 그 운전기사가 등장했다. 문이 열리고, 양손에 재료로 꽉 찬 봉투를 든 채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아이고.’
이강우가 뚱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이강우를 발견한 채유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 씨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평소에는 강우, 강우, 반말로 말하던 채유리가 씨를 붙여준다는 사실에 이강우가 실소를 머금었다. 이런 채유리의 모습에 딱히 불만 같은 건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이강우에게 채유리는 더 중요한 사람이 됐다. 6서클 마법사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진짜 나한테 호감이 있긴 있는 모양이야.’
이강우를 대하는 채유리의 행동은 이제 티가 난다.
‘그럼 나도 태도를 정확하게 해야지. 아니면 아닌 거고, 맞으면 맞는 거고. 어영부영 아닌 척 부정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감정적인 부분으로도 채유리와 이강우는 묘한 사이가 됐다. 이 부분은 꼭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건 괜한 착각이나,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명확해야 한다.
“강우야, 숙녀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데 넌 그냥 그렇게 지켜만 볼 거니?”
그때 어머니의 일침에 이강우가 잽싸게 채유리의 손에 잡혀 있던 짐을 건네받으며, 한마디 뱉었다.
“이런 거 있으면 저 깨우시지. 같이 가면 좋았잖아요?”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깨우기 미안하더라.”
“아니, 그런데 무슨 장을 이렇게 봐오신 거예요? 엄마 손이 큰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너무 많이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이거 만들어봤자 주변에 돌릴 이웃도 없는데.”
“걱정 마라. 이웃집에 돌릴 필요도 없으니까.”
말과 함께 채유리를 바라보는 이강우의 모친. 채유리는 그 시선에 방긋,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채유리의 식성을 아는 모양이다.
그 웃음 사이로 이강우의 모친이 이강우에게 짧게 말했다.
“만약 둘이 결혼하면, 유리 대신 요리는 네가 해라. 난 유리가 요리 못한다고 구박할 생각 전혀 없다.”
“예?”
“너도 빨리 가정을 꾸려야지.”
어머니의 눈빛에 깃든 초조함, 이강우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강우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고, 위험한 일이 아닌 평범한 가정을, 나날을 보내기를 원하는 눈빛이다.
이강우가 입가에 그어지려는 쓴웃음을 꾹 참았다.
“엄마, 걱정 마세요. 이 잘난 아들이 설마 장가를 못 가겠습니까?”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한테 가는 게 중요한 거지. 난 아무한테는 절대 못 보낸다.”
“채유리 씨는 ‘아무한테’에 포함 안 되는 겁니까?”
“예쁘고 참하잖니? 조신하고, 얌전하고, 예의 바르고.”
“아, 예…….”
아무래도 채유리가 자기 이미지 관리는 제대로 한 모양이다.
그 순간 스마트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2개의 소리가. 이강우와 채유리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고, 이강우는 단숨에 직감했다.
‘드디어 왔구나.’
마법청.
드디어 그들이 전야제 일정을 잡은 모양이다.
* * *
5월 10일, 마법청은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한 파티 멤버 23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5월 13일, 그들 모두를 한자리에 모았다.
장소는 문 관리센터에 위치한 회의실. 200평은 될 법한 그 넓은 공간을 듬성듬성 채운 의자들 위에 23명의 마법사들이 앉아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네.”
“조용하군.”
“딱히 자기 광고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잖아?”
소란은 없었다. 소란을 피울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더욱이 이 무대는 탐색과 화합을 위한 무대이기도 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상생을 해야 한다. 당장 서로를 물어뜯고 증오하는 사이라고 해도, 유적에 들어가는 순간은 자신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케케묵은 것들은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야말로 맞선 자리인 셈.
‘다들 한가락 하네.’
이강우 역시 주변의 낌새만 살폈다.
그렇게 모두가 나름 상대방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게 됐을 때, 안대욱이 등장했다.
언제나 그렇듯 특유의 카리스마를 품은 채 등장한 그는 단상 앞에 섰고, 곧바로 말을 꺼냈다.
“오늘 할 말이 많습니다. 때문에 필요 없는 말은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거두절미.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나는 클로즈 경력을 남기는 것. 이번 유적 사냥은 국가적 사업입니다.”
4등급 유적 사냥이 가지는 가치는 매우 많다.
일단 4등급 유적 사냥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그 국가의 마법 전력이 가늠된다.
2021년을 기준으로 만약 마법 전력에서 일류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면, 최소 세 번 이상의 4등급 유적 사냥을 마쳐야 한다. 실제로 그 조건을 충족하는 국가는 현재 다섯 곳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 독일과 프랑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그깟 마법 전력이 무슨 소용이냐?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체감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런 게 자신들에게 밥을 먹여준다고 생각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마법 전력이 우수한 국가는 당연히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세계 각국의 공조 하에 이루어지는 모래시계문 관련 행사, 프로젝트에서 이 발언권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더군다나 모래시계문은 앞으로 인류 미래를 바꿀 것들이 가득하다. 이 발언권은 경제적, 군사적 발언권에 버금간다.
“두 번째는 6서클 아티팩트의 확보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가치는 역시 6서클 아티팩트다.
6서클 마법사만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 6서클 마법사를 6서클답게 만들어주는 무기가 있어야 진짜 의미가 있는 거지. 또한 6서클 마법 아티팩트의 보유 개수는 다시 국가의 마법 전력으로 이어진다.
3등급 혹은 그 이상…… 2등급 모래시계문의 탐사는 절대 한 국가가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당연히 국제적인 공조 하에 이루어질 터인데, 그때는 최소 6서클 마법사를 중심으로 파티가 구성될 것이다.
때문에 이쪽 바닥에서는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핵 보유 상황에 비유할 정도다.
“세 번째는 조사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 바로 진실과의 접촉이다.
일반인들에게 모래시계문은 그저 몬스터와 마법 아티팩트가 존재하는 노다지 정도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런 관점으로 모래시계문을 접근하는 국가는 없다.
지금 인류는, 범인들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모래시계문의 진실을 빠르게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마나스톤으로부터 마력을 채취하는 기술은 물론, 그 마력을 유효하게 쓸 수 있는 마나 포션 제조기술도 만들었고, 대중화되진 않았지만 마법사의 마나 서클을 자극하는 자극 비약도 만들 수 있게 됐다. 놀라운 발견이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마법 아티팩트에 부여된 마법을 분석하고, 해석해서 마법 아티팩트를 복제 혹은 개량하는 것 역시 현재 진행 중이다. 1서클 마법과 2서클 마법 중 몇 개는 이미 분석이 되어, 일명 룬 코드를 확보한 상황이다. 재료만 있으면 얼마든지 룬 코드를 이용해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정도까지 왔다.
당연히 유적의 가치도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이나 중국은 유적 사냥이란 표현조차 최근에는 쓰지 않는다. 그들은 유적 탐사라는 표현을 쓰며, 유적 탐사를 화성을 탐사하는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인다.
몇몇 전문가들은 인류가 화성에서 살기 위해서는 최소 반세기가 더 필요하지만, 유적에서 사는 건 10년 후에도 가능하다, 그런 말을 할 정도. 모래시계문은 이미 한계에 봉착한 인류의 미래를 열어줄 문으로 판단되고 있다.
조사를 통한 정보의 획득은 어떤 의미에서 마법 아티팩트 확보만큼이나 중요하다.
때문에.
“1차로 유적에 진입할 열다섯 명은 다시 세 개의 팀으로 나뉩니다.”
이번 유적 사냥은 단순히 사냥만을 위한 조직만이 아니라, 여러 목적을 가진 하부 조직을 만들게 됐다.
“수색팀과 연구팀 그리고 돌격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수색팀의 역할은 말 그대로 수색이다. 폭넓은 지식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을 이용해 전체적인 판을 그려내는 팀. 레이더와 같은 역할이며, 적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은밀함도 필요한 팀이다.
“수색팀의 리더는 안중현입니다.”
수색팀의 경우에는 안중현과 하선우를 비롯해 네 명의 마법사가 포함됐다.
안중현의 경우에는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할 때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이강우보다 말이 없었다. 4서클 마법사란 것만 제외하면, 그 외적인 요소로 안중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실력자였으니까.
특히 그가 쓴 보고서를 한번 읽어보면, 길드에 속해본 마법사는 무조건 그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연구팀의 리더는 김재범입니다.”
연구팀은 김재범을 포함해 다섯 명이 배치됐다. 겉으로는 멋만 부리고 양아치처럼 생긴 김재범이지만,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독 마법사 중 한 명이다.
독이란 건, 그냥 감과 재능만으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독에 대한 깊은 지식, 그리고 독을 사용할 때 필요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김재범은 생물학 관련 석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고,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이다.
그런 그를 포함해서 연구팀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전부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나름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보통은 보기 힘든 케이스다. 마법사 중에 유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연구원들이 있긴 하지만 그 비중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연구가들의 비중이 높은 건, 그런 부류들이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목숨마저 거는 자들. 그게 아니라 그저 지금의 지위에 만족할 만한 자들이라면 4등급 유적 사냥에 지원할 이유가 애초에 없다.
“돌격팀의 리더는 김지홍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팀인 돌격팀.
비수 김지홍을 포함해, 명궁과 이제 대한민국 세 번째 6서클 마법사가 된 채유리 그리고 포식자 이강우가 포함됐다.
이 팀의 목적은 다른 건 없다. 무조건 전투다. 최악의 상황 혹은 최고의 상황, 긴급한 상황, 위급한 상황 여하튼 전투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이들이 무조건 나선다.
물론 모든 전투를 이들이 치르는 건 아니다. 전투는 열다섯 명이 전부 협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로 돌격팀을 마련하는 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강력한 조합을 하나로 뭉쳐두고, 그들 위주로 전투를 진행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놓을 수 있는 에이스 카드 4장, 포카드를 미리 짜두는 건 나쁠 게 없으니까.
여기에 이강우가 포함된 건, 신속한 도축을 통한 식량 확보를 위해서였다. 전투 때마다 이강우를 불러서 일을 처리하고, 다시 이강우를 베이스캠프에 보내고, 이런 건 시간 낭비다.
‘연구팀에 들어갔으면 내 밑천이 뽀록났겠지.’
물론 이강우에게 마법청이 의사를 묻긴 했다. 혹시 연구팀에 관심이 있지 않으냐고. 그들 입장에서는 마법사로도, 연구가로도 어마어마한 명성을 이룩한 크로포드의 제자라면 당연히 그에 준하는 학식(學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고, 소름만 돋는 생각이었고 당연히 거절했다. 단순히 연구를 위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니, 굳이 그런 배려를 해줄 필요가 없다고.
“이 팀에 대해 불만이 있으신 분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의견을 표명해주시면 됩니다.”
안대욱의 질문에 반문은 없었다.
사실 팀을 나눴다고는 하지만, 유사시에는 다시 팀이 개편될 수 있다. 사망자가 생겼을 경우, 도무지 연구나 탐사가 불가능한 경우, 예상치 못한 경우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미 사전에 마법청이 마법사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반영한 결과물이다.
남은 여덟 명, 유사시에 대비해 후보로 남은 이들 역시 큰 반문은 없었다. 그들의 의사 역시 반영된 결과물이었고, 그들의 참가는 상황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질 테니까. 지금 정해둔 포지션은 사실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안대욱은 잠시 침묵을 고수한 뒤, 여전히 질문이 없자,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다음은 계약에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겠습니다. 6서클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민감한 주제.
모두가 자세를 고쳤다.
“6서클 아티팩트에 대한 소유권은 정부가 가집니다. 대신에 사용권의 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용권은 영구적입니다. 한국 정부가 존재하는 한 영구적입니다. 이 사용권의 지분을 10할이라고 했을 때 9할을 여기 모인 스물세 분이 나누게 됩니다. 유적 사냥에 직접 참가한 열다섯 명이 각각 5푼의 지분을 가지게 되며, 후보로 대기 중인 여덟 명이 2푼의 지분의 지분을 가지고 남은 건 한국 정부 및 마법청의 소유가 됩니다.”
사용권이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함이다.
“이 사용권은 매년 추첨을 통해 지분만큼의 시간이 무작위로 배분됩니다. 또한 이 사용권은 얼마든지 마법청의 주관 아래에 위임할 수 있고,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단, 마법청에 소속된 마법사 및 한국 정부에 정식 인증을 받은 길드에만 판매 및 위임을 할 수 있습니다.”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앞으로 6서클 마법사가 늘어나면, 이런 사용권 지분 가치는 더더욱 증가할 것이다. 5년, 10년 후에는 정말 어지간한 돈으로는 거래할 수 없는 가치가 될 터.
‘내 지분이 5푼. 365일 중 20일 정도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군.’
6서클 마법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본적이 없으니 가늠할 수 없지만, 그 가치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특히 조건만 부합되면 얼마든지 대여할 수 있다는 건, 이강우가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한 개인적인 유적 사냥에도 써먹을 수 있다는 의미다. 20일이면 유적 사냥에 부족하지만, 그럴 경우 지분을 구매하거나 위임받으면 된다. 효용 가치는 절대적.
혹은 즈믄나래 길드에 팔아도 된다. 1년이 아닌 영구적인 권리인 만큼, 아마 이강우가 이번에 산 아파트를 가족 머릿수대로 사도 넉넉하게 남을 것이다.
‘이쯤 되니까 돈 감각이 무색해지네.’
어쨌거나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 일인 만큼, 이 지분을 놓고 이야기가 많았다. 몇몇 마법사들이 지분 조정 이야기를 꺼냈다. 계약서에 이미 사인을 한 처지이지만, 이렇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싫을 터.
2푼을 받는 후보자들은 지분의 상향을 요구했고, 참가자들은 여유 지분을 놓고 유적 내 활약에 따라 지분을 추가 배분받는 방식을 요구했으며, 몇 명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부가 그냥 날로 1할 가까이 먹는 건 좀 너무하네. 나중에 그거 이벤트로 풀려고?’ 같은 푸념 섞인 발언도 했지만 그 발언은 안대욱의 눈빛에 금방 사그라졌다.
이 지분 이야기만 한 시간 동안 진행됐고, 결국 회의는 잠시 휴식을 가지게 됐다. 회의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강우는 회의가 끝나는 순간 한숨을 내뱉었다.
‘참 인간이란 대단해. 이런 일을 앞두고도 모두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걸 보면.’
인간의 욕심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
때문에 이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나중에는 이것 때문에 전쟁을 벌이겠지. 모래시계문 때문에 인간끼리 전쟁이라…….’
짧은 상상이었다.
하지만 망상은 결코 아니었다.
* * *
회의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았다. 목숨이 건 베팅을 두고 이루어지는 회의가 고작 4시간 만에 끝날 리 만무, 당연히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모두 숙소로 돌아가시고, 다음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는 순간 이강우는 멤버를 소집했다. 안중현과 하선우 그리고 채유리. 이강우까지 포함한 네 명이 술판을 벌였다. 안주는 당연히 이강우의 몫.
‘맛있는 소시지, 구워도 맛있고, 삶아도 맛있고 튀겨도 맛있는 소시지. 유적 들어가면 소시지나 만들어봐야지.’
이강우는 이제 요리하는 걸 즐기는 수준이었고, 그 즐거움은 음식에도 반영됐다.
이번에도 소시지를 이용해 멋진 안줏거리들을 만들었고, 채유리는 기쁜 마음에 그걸 먹었다.
그렇게 채유리가 소시지로 배를 채우고, 남은 세 명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을 무렵.
새로운 참가자가 자리에 꼈다.
“같은 즈믄나래 소속인데 나만 왕따 시키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김재범, 그가 끼어들었다.
하선우는 그가 등장했을 때 눈을 피했다. 하선우는 김재범에게 이제부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김재범은 하선우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판을 엎고도 남을 인물이니까.
반면 안중현은 김재범을 반갑게 맞이했다. 원래 안중현은 김재범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어서 오게.”
“여기서 술자리라, 엠티 온 거 같네. 오! 안주가 엠티 수준이 아니라 잘나가는 홍대 호프집 수준이네. 이렇게 된 거 엠티 분위기 낼 겸 폭탄 좀 말고 게임 좀 할까요?”
김재범은 생각보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곧장 맥주캔 하나를 따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캬아!”
상쾌하게 원샷의 기쁨을 소리로 내뱉은 그가 맥주캔을 가볍게 옆에 놓으며 말했다.
“이 다섯 명이 이대로 유적 들어가서 죽으면 즈믄나래 길드는 단숨에 추락하겠네. 우리 마스터도 꽤 초조하겠지?”
그의 입에선 생각보다 소름이 끼치는 말이 나왔다.
안중현을 비롯한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채유리 역시 평소와 다르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합니다. 괜한 말을 했네요.”
김재범이 사과를 했지만, 기색을 보면 실수로 한 말이 아니라, 의도한 말이었다.
그때 이강우가 말을 받았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5서클 마법사 두 명에 6서클 마법사 한 명, 4서클 마법사 두 명을 잃으면 길드 입장에서는 전력의 절반을 잃는 셈이니까요. 혹은 절반 이상.”
안중현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자리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 맛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이야기지.”
그 순간 안중현이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맥주캔을 김재범처럼 옆으로 치워두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그의 분위기는 진지했고, 엄중했다.
“포기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 말리고 싶다면 그 역시 지금이 마지막 기회.”
사람 목숨이 걸린 일.
그것도 앞날이 창창한 이들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목숨을 걸 타당한 명분이 필요하다.
“이번 유적 사냥에 참가하는 이유를 말하게. 타당하지 않으면 내가 모든 수단을 써서 유적 사냥 참가를 막아주지.”
이 무리에서 리더이자, 연장자인 안중현이 그 사실을 모두에게 상기시켰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하선우였다.
“이번이 어떻게 보면 마지막 기회입니다. 제가 제 이름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은 4등급 유적까지 한계이니까요. 전 이것만 치르면, 여생은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물론 이미 모셔야 할 분이 계신지라, 그분 마음에 따라 제 앞날은 달라지겠지만요.”
하선우의 말에 김재범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곧바로 김재범이 말을 이어갔다.
“누구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약속을 한 게 있으니 오늘은 참지. 일단 전 누구처럼 이번이 마지막이나, 한계다, 이런 소리 할 생각 없습니다. 죽을 생각도 없고, 죽을 이유도 없습니다. 내 독은 최고입니다. 어떤 몬스터도 죽일 수 있어요. 4등급 몬스터? 좋은 실험 대상이 될 겁니다. 난 이 독으로 세계 최고가 될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경력이 필요합니다. 내 목표는 내 이름을 딴 연구소를 만드는 거거든요. 연구소 만들고, 그다음은 대학. 재범 대학! 이름이 좀 그렇긴 하네. 개명을 할까요? 이름을 서울로 바꾸면 괜찮으려나?”
의외로 굉장히 학문적인 꿈이다.
그 꿈에 안중현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하선우와 비슷하네. 난 마법사가 되고, 유적 사냥에 나서면서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싶었고, 보다 높은 곳에 도달하고 싶었지. 족적을 남긴다기보다는 구경이라도 좋으니, 내가 볼 수 있는 한 모든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 그 기회가 왔으니, 마다할 생각은 없네.”
“이유치고는 가장 빈약한 것 같은데요?”
김재범의 말에 안중현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자네들보다는 많이 살았으니, 참작될 만하지.”
“에이, 가는 건 순서 없습니다.”
그때 남은 이들이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제는 이강우의 차례.
사실 어떻게 보면 이강우는 그들과 다르게 정말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이번 일도 본인이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니다. 그런 만큼 그가 이번 일에 참가한 이유가 궁금할 터.
“사실 이번 참가는 제가 기획했던 바가 아닙니다만, 전 이번 유적 사냥을 통해 내 가치를 바꿀 겁니다. 이번 유적 사냥이 끝나면, 내 이름은 날 후계자로 정한 그 사람처럼 하나의 브랜드가 될 테고, 내가 가진 걸 이용해서 앞으로 보다 전문적인 유적 사냥을 나설 겁니다.”
“보다 전문적인 유적 사냥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뭔가? 돈인가?”
“전부입니다. 돈, 힘, 권력, 명예. 전 생각보다 욕심이 많아서 지금 제게 온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거든요.”
그때 채유리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전 솔직히 들어가기 싫어요.”
의외의 충격 고백이었다.
“난 마법을 쓰는 게 재미있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도 잘하지만, 유적 사냥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이제까지는요.”
채유리의 말에 하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관리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그녀가 유적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 모인 그녀 외의 네 명이 어떤 식으로든 이유를 가진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유적 사냥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전 이강우가 좋아요. 그리고 부탁도 받았어요. 강우를 제발 옆에서 지켜달라고, 강우 여동생분하고 어머님께서 만날 때마다 부탁을 하셨어요. 두 분은 좋은 분이에요. 그 부탁 때문이라도 전 이번 유적에 들어갈 거예요. 들어가서 이강우를 지킬 거예요.”
갑작스러운 고백.
하선우와 안중현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낌새는 느꼈지만 채유리가 이렇게 먼저 프러포즈를 이런 자리에서 할 줄이야?
반면 이강우는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애틋함을 느꼈다.
‘이래서였군.’
이제야 이강우는 최근 왜 자신의 여동생과 어머니가 자신보다 채유리를 더 살갑게 대하고, 챙겼는지 알 수 있었다.
부탁을 한 거다.
이강우가 그저 운 좋게 마법사가 됐으리라 생각했던 그 둘은 이강우보다 더 선배라고 할 수 있고, 스스로 밝히진 않았지만 대단한 마법사일 게 분명한 채유리에게 이강우를 잘 부탁한다고, 잘 지켜달라고 애절하게 때로는 구걸하듯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래, 아들내미나 오빠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물가에 내놓은 애나 다름없겠지.’
그래서 애틋했다.
어머니의 그리고 여동생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강우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노력, 차마 이강우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하며, 속으로 불안감을 삼켰을 그들의 모습에 미소가 그리고 안타까움이 동시에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채유리는 진심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말해주는 채유리에게 고마웠다. 정말 고마웠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서 유적에 들어가 준다니? 이제까지 이강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유적에 들어가 준 사람이 있었나?
‘진심에는 진심.’
그렇기에 이강우는 단숨에 맥주캔을 들이마신 후에 잠잠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채유리 씨, 평생 뭘 먹고 살지 고민은 하지 마십시오. 그 고민은 내가 할 테니까요.”
이강우, 그의 말에 채유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하선우와 안중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응? 뭐야 이거?”
영문을 모르는 김재범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이야?”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 * *
4등급 유적 사냥 파티 멤버들의 토론은 4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법청과의 협상도 있었고, 마법사 간의 협상도 있었다. 일찌감치 6서클 마법 아티팩트의 사용권에 대해 거래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각자의 노하우와 전투 및 연구, 탐사 등 유적에서의 활동에 대한 전반에 걸친 토론도 있었다.
하지만 토론에 이강우는 쉽게 집중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일을 저질렀구나.’
채유리의 고백에 응했다. 그것도 거절이 아니고, 수락을 했다. 증인마저 있었다.
심지어 당시 먹은 술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술김에 저도 모르게 헛소리를 했다, 따위의 변명이나 했던 말을 무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우.’
이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채유리 태도가 딱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그때의 프러포즈 이후 채유리의 행동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강우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고,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뭐든 사주면 맛있게 먹고. 연애를 하는 건지, 애를 보살피는 건지 여전히 구분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강우도 눈치가 있는 이상, 결국 채유리의 변화는 이강우의 변화에 달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애를 하고 싶으면 이강우가 먼저 변해야 한다.
‘연애라…….’
연애.
이강우는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묘하게 우스웠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인데, 연애를 고민하다니, 이 얼마나 우습고 씁쓸한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자격이 있나?’
그리고 그 부분이 이강우의 심중을 괴롭혔다.
채유리는 마음에 든다. 그녀는 참 예쁜 여인이다. 여기에 이강우를 위해 유적에 들어갈 정도로, 그 정도로 저돌적인 애정을 가진 여인이기도 했다. 가족과도 친하게 지내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식비가 많이 들겠지만, 결코 그게 그녀를 싫어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단지 부담스러운 건 이강우의 처지다.
4등급 유적 사냥이 이강우 인생의 마지막 유적 사냥인가? 아니다.
그다음 유적 사냥이 마지막인가? 그럴 리 없다.
이강우는 자신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질주를 계속해야 한다. 계속해서, 거듭해서 위기로 몸을 던져야 하고, 본인이 원치 않아도 그 위기란 놈이 이강우를 찾아올 것이다.
그런 이강우가 과연 채유리를 책임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빌어먹을.’
이 순간 이강우는 오히려 자신 때문에 위기에 빠질지도 모르는 채유리를 떠올리며 속이 썼다.
이거다.
남이 아닌, 자신의 사람이 된 채유리가 자신 때문에 다치는 꼴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반면 이걸로 이유가 하나 더 생기긴 했다.
‘살아남아야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강해져야 하는 이유.
‘살아남아서 유리가 입에서 배부르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요리를 만들어줘야지.’
분명한 건 이강우가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는 사실.
* * *
6월 6일.
문 관리센터는 연중무휴, 공휴일에도 일부 직원들이 남아서 활동을 계속하지만, 그래도 공휴일에는 평소보다 근무자가 줄어든다. 때문에 평일보다는 한산했다.
그 한산함 사이로 은밀하고, 위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모래시계문이 관리되는 일명 모래사장. 그 모래사장의 지하 3층,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무수히 많은 것들이 분주하게,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좋아, 내려놔!”
“식량 다시 한번 체크해 봐!”
“마법 아티팩트는? 오고 있어? 좋아, 마법사분들에게 보여주고, 확인해봐.”
“이거, 슈트가 좀 버벅거리는데, 기름칠 좀 해야겠어. 정비팀!”
그 분주함과 어수선함의 중심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크리스털과 비슷해 보이는 재질로 만들어진 듯한 문은 높이 10미터에, 폭이 20미터로 거대한 트럭도 가뿐하게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설마 이놈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모래사장 지하 3층에 도착한 이강우는 분주함 속에 혼자서 고고한 자세를 갖추고 있는 4등급 모래시계문을 보며 이를 꽉 물었다.
‘낙장불입.’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수도 없이 고민을 했고,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도전한다, 그걸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어떻게든 살아서 닫는다.’
클로즈.
그게 전부다. 이강우는 죽고 싶지도 않고, 죽을 생각도 없다. 살아남을 것이다.
‘유리를 위해서라도.’
더불어 혼자만 살아남진 않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은 전부 쓴다.’
각오를 다지며 이강우가 모래시계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 특수하게 제작된 보급품 상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것들을 눈으로 살폈다.
준비되는 물건들은 최고의 것들이었다. 가격은 상관없다. 오로지 효율과 기능에만 충실한 물건들. 연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속도만을 염두에 둔 스포츠카 같은 놈들이었다.
이강우는 그것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총꾼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마법사를 통해 빼돌린 총에 혹여 문제가 생길까 봐, 그 얼마 하지도 않는 놈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며 모래시계문 앞에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던 그때.
‘그게 고작 1년여 전.’
그리 먼 시절도 아니다. 하이에나 크루 소속 총꾼으로 뛰던 게 작년 초였으니까.
1년하고도 반년.
이 짧은 시간 동안, 이강우의 일생의 1할조차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강우의 인생은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이제 시작이겠지.’
하지만 아직 진짜 변화는 시작도 안 했다.
아니, 이제는 이강우가 나서서 이 변화를 진화로 바꿔야 한다.
‘올해 내에 5서클을 개방한다.’
그렇게 이강우가 각오를 다질 무렵, 이강우를 발견한 문 관리센터 직원 중 한 명이 이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철로 만든 듯한 큼지막한 가방을 쥐고 있었고, 그 가방의 손잡이와 자신의 손을 줄이 긴 수갑으로 연결해두고 있었다.
그는 이강우 앞에서 수갑을 풀고, 가방의 비밀번호를 풀었다. 그 후에야 이강우에게 가방을 건네줬다.
“주문하신 아티팩트입니다.”
이강우는 그 설명을 듣고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은 후 가방을 열었다. 큼지막한 가방 안에 마련된 단단한 검은색 스펀지, 그 스펀지 위에 10개의 반지들이 줄을 맞추고 있었다.
‘대단하군.’
보석보다 비싼 마법 아티팩트가 그냥 평범한 액세서리처럼 있는 광경, 나름 장관이었다.
“그럼 본인에게 전달했습니다.”
“전달받았습니다.”
이강우는 이번 유적 사냥에 마법청에 10개의 마법 아티팩트를 추가로 요청했다. 여기에 이강우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마법 아티팩트들…… 즈믄나래로부터 받은 것과 리볼버의 아티팩트룸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합치면, 이강우는 현재 19개의 마법 아티팩트를 소지하고 있었다.
과하다.
솔직히 그 19개의 마법들과 이강우가 불사황제의 권능을 통해 가지고 있는 마법까지 고려하면, 이강우는 스무 개를 훌쩍 넘는 마법을 가지게 될 테고, 개중에서 주력으로 쓰게 될 마법은 다섯 개 미만이 될 것이다.
아무리 다다익선이라고 하지만, 보통은 이렇게까지 많은 마법을 준비하진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마법이 걸린 마법 아티팩트를 2개 이상 챙기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다양한 마법을 가지고 있어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니까.
그래서 대마도사의 자질이 정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유리도 스무 개 정도 추가 주문했지?’
이제 6서클까지 개방한 채유리는 무려 20개의 마법 아티팩트를 추가로 주문했다. 이강우의 곱절이다.
‘무시무시하군.’
그녀는 정말 강할 것이다. 비수 혹은 명궁,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이강우를 지켜준다고 한다. 이보다 든든한 호위는 없을 터.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부부싸움을 설마 마법으로 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어쩌면 그 힘이 이강우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마법사 부부는 없나? 만나서 이야기를 한번…… 아이고,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강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 * *
열다섯 명의 마법사들은 일단 아이기스 슈트를 착용했다. 그 위에 다시 옷을 입고, 그 후에 외골격 슈트에 탑승했다.
이번 유적 사냥을 위해 준비된 외골격 슈트는 워머신으로 유명한 디록 사(社)가 제작한 전천후 타입으로 대당 가격이 30억 원을 훌쩍 넘어가는 괴물 같은 놈이었다. 최대 1톤이 되는 물건을 들고도 이동이 가능한 놈이었고, 무기를 장착하면 곧바로 워머신처럼 이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때문에 디록 사는 이 슈트에 사명을 붙였다.
디록 슈트.
이 디록 슈트 열다섯 대가 운반할 수 있는 중량은 단순 계산으로는 15톤이 되는 셈.
더불어 모래시계문은 거대했기에, 많은 중량의 물건은 물론 부피가 큰 물건 역시 얼마든지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 준비하겠습니다! 번호대로 대기해주십시오.”
그렇게 모두가 외골격 슈트를 조종하며, 자신의 순번에 맞게 차례를 기다렸다.
“문 열겠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거대한 문을 열기 위해 마련한 특별 개조된 크레인이 문고리를, 양문의 문고리를 동시에 잡아당겼고, 두 개의 문이 열리며 그 틈을 보여줬다.
시커먼 어둠이 눈앞에 펼쳐졌다.
“입장합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두 번째 4등급 유적 사냥이 시작됐다.
* * *
어둠을 한없이 걸었다. 그런 어둠이 어느 순간 또 다른 어둠으로 바뀌었다. 앞선 어둠 속에서 소용없었던 야간 투시경이 새로이 찾아온 어둠 속에서는 제 역할을 발휘했다.
‘이건…….’
이 순간 이강우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일단 정글 타입은 아니었다. 흙, 나무 따위는 없었다. 개미굴 타입도 아니었다. 동굴 같은 통로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반듯하게 잘려나간 돌덩이를 블럭 쌓기 하듯 쌓아 만든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이었다. 통로의 크기는 상당했다. 짐을 짊어진 디록 슈트 열다섯 대가 2열로 서도 될 법한 높이와 폭을 가지고 있었다.
‘던전 타입이군.’
이번 유적은 던전 타입인 듯싶었다.
그 사실을 이강우만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 역시 파악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쁘진 않군.”
호재라면 호재다.
던전 타입은 단계적 공략이 가능하다. 만반의 준비를 한 파티에게 유리한 타입이다.
그렇게 몇몇 이들이 던전 타입 유적이란 사실에 살짝 안도를 하는 순간.
“수색팀 움직인다.”
안중현은 감상이 아닌 행동에 나섰다. 그는 슈트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 슈트에서 내려왔다. 야간 투시경을 쓰고 있던 그는 곧바로 디록 슈트에 걸어두었던 장비들…… 수색을 위한 장치들과 총으로 무장을 마쳤다.
정말 빠른 속도였고, 그런 안중현의 움직임은 나머지 수색팀원들을 재촉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수색팀이 빠르게 수색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수색 시작하겠습니다.”
안중현은 곧바로 움직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몇몇 이들이 감탄했다.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에 가장 먼저 지금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 판단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안중현은 4서클 마법사란 타이틀 이상의 믿음직한 신뢰를 동료에게 줬다.
“안중현, 참 아까운 사람이야. 마나 서클을 하나만 더 개방했으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됐을 텐데.”
“지금도 능력은 충분하지. 마법을 쓰는 마법사보다 더 귀한 게 무리를 이끄는 리더니까. 굳이 안중현이 마법을 잘 쓸 필요는 없지. 사수는 총만 잘 쏘면 되는 거지, 총처럼 강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로부터 10분 후, 수색팀이 돌아왔다.
“베이스캠프로 적합한 지역을 확보하겠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 사냥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