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30화 (30/66)

30화. 신고식

2 대 8 가르마, 정말 단정하기 그지없는 헤어스타일. 그런 헤어스타일에 어울리지 않는 듬직한 체격에 딱 맞는 정장, 여기에 제법 굵은 뿔테 안경을 쓴 사내를 봤을 때, 이강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슈퍼맨 같네.’

다름 아니라 디시 코믹스에 나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중 한 명, 슈퍼맨이었다.

변신하기 전, 쫄쫄이 타이즈 위에 빨간 팬티를 뒤집어쓰기 전의 평범한 슈퍼맨 모습.

‘여러모로.’

더군다나 단순히 생김새만 그런 게 아니라, 슈퍼맨 같은 느낌…… 그런 위압감을 사내는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 마법청의 2인자, 마법부청장 안대욱.’

마법청.

한국 마법의 총람이다.

창설 과정은 갑작스럽고, 역사라고 해봐야 10년은커녕 채 5년도 되지 않은 집단이지만 마법청은 현재 대한민국이란 이름 아래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정부 기관 중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특히 은밀함과 비밀 유지 면에서는 최고다. 세간에 알려진 마법청에 대한 정보는 국정원보다 적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집단이란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집단의 2인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2인자답게 위엄이 어마어마하네.’

보통 인물은 아닐 수밖에 없다.

보통 인물이 마법청 같은 집단의 2인자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직접 보니 예상 이상이다. 가진 직함 이상의 아우라와 위엄을 안대욱은 가지고 있었다. 그 안대욱이 이강우의 앞에 여러 장의 서류를 늘어놓았다.

늘어진 것들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들이었다.

“이강우 씨, 서명하십시오.”

늘어진 것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계약서였다.

4등급 유적 사냥은 마법청 주관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이강우가 하선우와 협상이니 뭐니 지껄여도 결국 계약을 하는 대상은 하선우가 아니라 마법청이고, 그가 최후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 대상도 하선우가 아닌 마법청 직원일 수밖에 없다.

이강우는 늘어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어디 보자…….’

그리고는 계약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껌처럼 씹듯 읽었다.

‘특별한 건 없네.’

계약서 내용에 아주 특별한 내용,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나 조항 같은 건 없었다.

보수 지급, 유적에서 얻은 아이템에 대한 배분 이야기 등…….

‘계약 내용이 일방적인 것만 빼고.’

대신에 계약서 내용에 따르면,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을 통해 마법사가 얻을 수 있는 금전적인 메리트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일단 클로즈만 성공하면 100억 원 정도…… 추가 소득에 따라 200억 원 정도까지 받을 수 있는 건가?’

100억에서 200억.

적은 돈은 아니다.

아니, 엄청난 돈이다. 일반인은 물론 나름 이름난 연예인이나, 벤처 사업가도 이 정도 돈을 당장 손에 쥐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돈 때문에 4등급 유적에 들어가는 마법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빚이 있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4등급 유적에 들어가는 것과 한강에 투신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니까.

또한 이강우가 가늠하는 액수는 순수한 현금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돈도 아니었다.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액수는 50억 원에서 100억 원 사이였다. 대신에 세금 혜택, 마법 아티팩트와 마나스톤의 지분 등, 그러한 부수적인 요소들을 현금으로 환산했을 때 그 이상 나올 뿐.

더군다나 일방적이란 표현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계약서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할 수단이 없는 점,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이 계약은 협상을 통해 수정 가능한 계약이 아니다. 이강우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사인하거나 말거나.

‘괜히 여기서 튕겨 봤자 얻는 건 구박밖에 없겠고.’

상대는 정부다.

법적으로 모래시계문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이강우가 그 법을 고칠 수 있지 않은 이상, 이강우가 이 계약을 가지고 딜을 제안하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강우는 계약서 내용 전부를 읽은 뒤, 이렇다 할 반문 없이 도장만 찍었다.

꾹꾹, 도장을 일곱 번 정도 찍었다.

이강우는 그렇게 계약을 마친 후에 입을 열었다.

“질문 좀 해도 됩니까?”

안대욱은 서류를 힐끔 바라본 뒤 말했다.

“대답해 드릴 수 있다면 해드리겠습니다.”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할 경우 7등급 이하 유적은 제 임의로 얼마든지 클로즈가 가능한 거로 아는데, 맞습니까?”

클로저 라이센스란 말에 안대욱은 놀라지 않았다. 마법청 2인자인데, 당연히 올해 클로저 라이센스를 획득한 자들의 명단을 유엔으로부터 받지 못했을 리 없다.

개중에 이강우의 이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예, 맞습니다.”

“선진입 후통보, 무방합니까?”

“무방합니다. 하지만 되도록 클로저 라이센스를 쓸 때 우리 쪽에 연락 주시면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대화의 물꼬가 틀어졌다.

그 순간.

“그럼 6등급 이상 모래시계문은 어떻습니까? 제 임의로 6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을 클로즈 할 수 있습니까? 조건이 필요합니까?”

이강우가 잽싸게 기습 펀치를 날렸다.

그 말에 안대욱은 즉답 대신 안경을 한 번 고쳐 썼다. 안경을 고쳐 쓰며 무덤덤한 눈으로 이강우를 바라봤다. 무덤덤한 눈빛인데, 그 무게감이 상당했다. 보통 사람은 슬쩍 눈을 피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강우는 담담히 그 눈빛을 정면에서, 조금의 회피도 없이 받아냈다. 이제 이강우도 이런 자리에서 예전처럼 비굴하게,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갈 순 없지. 이런 자리가 쉽게 마련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강우는 오늘 여기서 최소한의 소득을 얻어갈 생각이었다.

목숨이 걸린 염가 계약을 했는데 솔직히 이 정도 질문과 태도는 애교 아닌가?

이강우가 자신의 기세에 조금도 밀리지 않은 탓인지 안대욱이 기세를 누그러뜨린 후 대답을 해줬다.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

이강우가 뚱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불만을 표시하며, 이 부분에서는 나름 협상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비공식적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곧장 안대욱이 말을 이어갔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적 클로즈의 실패 횟수가 3번이 넘어갈 경우,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의 남은 시간이 48시간 이하일 경우, 이 두 가지 경우에는 마법청장님의 승인 여부에 따라 가능합니다.”

“정말로 6등급 유적에서 얻어낸 모든 걸 제가 가질 수 있습니까? 마법 아티팩트까지?”

“국외반출만 하지 않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국외반출, 안대욱은 그 단어를 강조했다. 6등급 유적에서 뭘 얻든 집에 장식해둘 게 아니라면 한국 정부에 염가로 판매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강조한 셈이다.

이강우는 그 대답에 만족했다.

‘내가 굽고, 지지고, 볶아도 해외로 가지고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이거지?’

남들에게는 의미 없지만, 이강우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안에서 뭘 먹어도 상관없다?’

마법 아티팩트를 제외한 모든 걸 이강우는 먹어 치울 수 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뭘 해도 마법 아티팩트는 남는다.

“또 다른 질문인데, 만약 클로저 라이센스를 이용해 얻은 마법 아티팩트를 한국 정부와 거래하는 게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정확히는 우리와만 거래가 가능합니다.”

말은 담담했지만 안대욱의 눈빛은 살벌했다.

마치 이강우, 네놈이 다른 나라에 마법 아티팩트를 푸는 순간 검찰과 국세청을 동원해서 없는 먼지도 만들어서 털어내 주겠다! 하는 눈빛.

하지만 이강우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해외에 팔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 거래, 물물거래도 됩니까?”

“교환은 안 됩니다.”

여기서 안대욱은 이강우의 의중을 파악했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합니다. 더 물어보실 게 있으십니까?”

이강우는 고개를 저었고, 안대욱은 이강우가 도장을 찍은 계약서를 정리해 서류 가방에 넣었다.

안대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석상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안대욱이 선 채로, 앉은 이강우를 내려다보며, 위압감 넘치는 상황에서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신고식만 남았군요.”

“예?”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 * *

이강우가 고급스러운 세단을 타고 도착한 곳은 전주에 위치한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한옥이었다. 집이라기보다는 궁궐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거대한 한옥은 깨끗하기도 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됐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개중에서도 백미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다. 대문 앞에서 멈춘 차, 그 차에서 내린 이강우는 대문을 바라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모래시계문에 들어가는 느낌이군.’

큼지막하고, 위압감 넘치는 문짝은 모래시계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런 느낌이 우연한 것 혹은 이강우만 느끼는 느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이 문의 주인이 의도한 바일 것이다.

‘김지홍.’

이 집의 주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마나 서클이 많은 마법사 중 한 명, 6서클 마법사 비수 김지홍이니까.

‘소문만 무성한 자.’

비수 김지홍.

알려진 정보는 없다. 나이가 몇 살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외모를 통해 그가 30대 중후반 정도의 사내다, 그런 소문만 돌 뿐이다.

소속된 길드는 없다. 본래는 즈믄나래 길드 출신이었지만, 즈믄나래에 길드에서 활동한 경력은 1년 남짓, 이후 길드를 탈퇴하고 마법청이 주관하는 유적 사냥에만 참가하는 중이다.

굳이 말하면 마법청 직속 마법사, 공무원 같은 느낌이랄까?

‘칼을 쓰는 타입이라고 했지?’

비수 김지홍의 특징은 그의 전투 스타일이다.

굳이 비교하면 이강우와 비슷하다.

멀리서 마법을 쓰기보다는 가까이 접근해서 몬스터와 싸우는 타입. 절삭 마법과 버프 마법을 이용해 몬스터를 도륙한다. 이강우와의 차이점이라면 이강우는 도축을 하지만, 비수 김지홍은 도륙을 한다.

사실 이렇게 보면 비수라는 별명이 이해되지 않는다. 도살자 같은 별명이 더 어울린다.

하지만 막상 김지홍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그의 별명이 비수인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아득한 수준의 덩치를 가진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칼을 앞세운 채 싸우는 김지홍은 비수처럼 보이니까.

비수처럼, 작지만 치명적이다.

‘가름칼의 주인이겠지.’

당연히 현재 문 관리센터 비밀 창고에서 보관 중인 6서클 마법 아티팩트, 가름칼 직도는 김지홍의 몫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프로필이다. 이강우에게 딱히 의미가 있지도 않은 프로필들.

하지만.

‘신고식이라니.’

그 김지홍에게 신고식을 치러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 순간, 앞서 언급한 김지홍에 대한 프로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되어 이강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강우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제대로 마음먹고 하려니까 오히려 방해가 끼어드는군. 산 넘어 산…… 참, 빌어먹을 산들이야.’

푸념은 뱉었지만, 사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과정이었다.

이강우는 분명 경력이 부족하다. 그런 그가 국가적인 유적 사냥에 참가하는데, 모두가 하선우처럼 그런 이강우를 원할 리 없고, 반길 리 없다.

물론 이강우가 마법청과 계약을 한 이상, 이강우의 유적 사냥 참가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강우는 그들에게, 앞으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동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자리는 가져야 한다. 그게 목숨 건 이들이 목숨 건 무대에 올라서기 전에 치러야 할 예의이자 기본이다.

때문에 이강우는 더 이상 군말 따윈 품지 않았다. 속으로도 품지 않았다.

이강우가 각오만 다지며 문을 넘었다.

* * *

김지홍은 두꺼비와 비슷한 느낌의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큰 얼굴, 툭 튀어나온 눈, 어느 정도 있는 살집…… 만약 피부마저 우툴두툴했다면 이강우의 머릿속에는 벽두꺼비가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눈빛은 두꺼비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호랑이 눈빛을 가진 김지홍이 이강우를 잡아먹을 기세로 바라봤다.

‘이 바닥에서는 눈싸움이 기본이라니까.’

방석에 앉은 채 김지홍의 시선을 마주 보게 된 이강우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의 눈싸움이 시작됐다. 그 눈싸움은 이강우가 김지홍의 방에 들어온 지 무려 10분이나 흐른 뒤였다.

좀이 쑤셔 항복하겠습니다, 말이 이강우의 목 끝까지 차오를 무렵 김지홍이 말을 꺼냈다.

“하선우가 거듭 부탁을 했기에 자네의 이번 사냥 참가를 반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찬성한 것도 아니라네.”

툭 던진 말.

이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피할 수 없으면 현명하게 지나가는 수밖에. 그런 이강우의 질문에 김지홍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설득시키게.”

설득시켜라.

그 말에 이강우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설득이라니? 뭘?’

여기서 당장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건가? 아니면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을? 도축 기술을 보여 달라는 의미일까?

‘아.’

그런 이강우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강우는 왜 하선우가 자신을 이번 유적 사냥 파티에 넣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선우는 이강우가 정말 어마어마한 전투 능력을, 사냥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원했던 게 아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하나지.’

도축 능력 그리고 요리 실력!

몬스터를 얼마든지 마음껏, 누구든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

그 능력이 이강우를 이 자리에 오게 했다. 김지홍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도 그것뿐이다.

이강우가 고개를 숙였다.

“최고의 것들로 납득시켜 드리겠습니다. 나흘 후에 다시 이곳에 찾아오겠습니다.”

김지홍은 그제야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기대하고 있지.”

비릿한 조소였다.

* * *

이강우에게는 드림카가 많다. 그리고 이제는 그 드림카 중 원하는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그냥 전부 살 수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이강우는 여전히 즈믄나래 법인 차를 자가용처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제아무리 드림카가 많다고 해도 세금 걱정, 유류비 걱정, 유지비 걱정 없는 법인 차가 최고구나.’

차를 살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세금 걱정, 유류비 걱정도 없는 고급스러운 차를 놔두고 다른 차를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말이 법인차량이지 이제는 사실상 이강우의 자가용이었다. 자동차 곳곳에 구겨진 초콜릿 포장지들이 그 증거였다.

그렇게 운전대를 잡은 채 즈믄나래 본부로 향하는 이강우의 머릿속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은 거하게 했는데…….’

비수 김지홍을 납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요리를 택했다. 그것도 그냥 요리가 아니라 몬스터로 만든 요리!

물론 이강우에게는 몬스터로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정말 많았다. 그냥 즉석에서 이런이런 요리를 원해요, 그럼 만들어줄 수 있다. 이제 10분 만에 육포도 만들 수 있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저 먹을 만한 요리만으로는 안 돼.’

하지만 상대는 비수 김지홍이다.

그냥 적당한 요리만 만들어주는 건, 이강우에게 손해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김지홍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그래, 이건 기회지. 위기가 아니라 기회. 대한민국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

당연히 그에 걸맞은 요리가 필요했다. 그저 단순히 몬스터가 가진 풍미와 맛을 적당히 살리는 요리가 아니라, 그 몬스터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뭘 만들지?’

요리사에게 있어서는 가장 어려운 고민이다. 맛있는 요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최고의 요리를 만들라고 하면 요리사들 모두는 머리를 쥐어뜯고 고민을 한다.

애초에 맛이란 게 한계가 없다. 기준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맛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맛이 되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이강우는 김지홍의 입맛을 모른다. 그렇다는 건, 단순히 개인이 좋아하는 맛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만한 최고의 요리를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다.

‘괜히 허세를 부렸나?’

갑작스레 차오르는 후회. 그러나 후회는 짧았다. 이강우는 약해지려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니, 좋은 기회고, 좋은 구실이야. 김지홍을 설득한다는 걸 빌미로 얼마든지 요리를 만들 수 있잖아?’

위기는 기회로.

이강우는 자신의 인생 신조를 되새김질하며 머릿속으로 기회를 위한 시나리오를 그렸다.

‘일단 유적 연구소로 가서…….’

가장 중요한 건 재료 확보다.

몬스터 사체를, 그것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상태, 도축 가능한 상태의 사체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 그다지 많지 않다. 이강우가 아는 곳은 즈믄나래 세종 유적 연구소밖에 없다.

거기서 몬스터를 얻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나스톤도 아니고 고깃덩이니까. 여기에 길드 마스터란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이강우다. 배경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문제는 맛을 봐 줄 사람인데…….’

그런데 이번에는 도와줄 사람이 하나 더 필요하다. 이강우의 요리를 거듭해서 맛을 보고 품평을 해줄 사람. 평가를 받기 위해 만드는 요리니까. 본인 스스로가 맛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연히 맛을 볼 줄 알고,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당장은 많이 먹어 줄 사람만 떠오르는군.’

이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 * *

이강우는 유적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권재용 박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네줬다.

“진짜 메로나 사 왔네?”

이강우가 사 온 선물은 메로나 아이스크림이었다.

권재용 박사는 실소를 머금었다. 예전에 장난삼아 4등급 유적 사냥에 성공하고 클로즈를 마치면 올 때 메로나를 사 오라고 말했는데 정말 사 올 줄이야?

“사 오라고 하셔서 미리 사 왔습니다. 설마 메로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좋아하고, 사다 줘서 고맙긴 한데, 이건 좀…….”

문제는 양이었다.

이강우는 메로나가 40개가 담긴 상자를 하나도 아니고 2박스나 가지고 왔다.

“이걸 어떻게 나 혼자 다 먹어? 난 생각보다 입이 짧은 편이라고.”

“그건 걱정은 마십시오.”

말과 함께 이강우는 자신의 옆에서 메로나 박스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채유리를 곁눈질했다. 권재용 박사가 이강우의 곁눈질의 의미를 파악하고 옅게 웃었다.

“둘 사이가 아주 좋아.”

“괜한 소문을 퍼뜨리는 거라면 사양입니다.”

“사이가 좋은 건 사실이지. 그리고 사이가 좋아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이강우는 반박할 말이 없이 입만 다물었다. 권재용 박사도 이 부분을 굳이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그는 연애 박사가 아니니까.

“일단 자네가 말한 대로 주문은 해뒀네. 연구소장이 조금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긴 했는데 길드 마스터가 직통으로 말해주니 큰 소란은 없었네. 그럼 당장 요리를 시작할 건가?”

“예,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그때 권재용 박사는 이강우로부터 시선을 돌려 채유리를 바라봤다.

“채유리 양.”

“네.”

채유리가 곧장 권재용 박사의 물음에 반응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달라는 표정으로.

권재용 박사는 그런 채유리에게 아이스크림 대신 질문을 던졌다.

“여기 왜 오신 겁니까?”

“네? 그야 강우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배부르게 먹게 해주겠다고 해서요.”

그 말에 권재용 박사는 이강우를 보며 말했다.

“먹여주겠다, 여기에다가 내가 평생이라는 말만 붙이면 누가 봐도 프러포즈로군.”

이강우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 * *

‘새로운 요리.’

이강우는 주어진 몬스터 고기를 비롯해 유적에서 채취 가능한 채소와 과일 등을 이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단순히 요리 하나가 아니라, 코스 요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맛 배치가 중요해. 몬스터 고기는 풍미와 식감 자체가 기존의 요리재료와는 차원이 달라. 상상력이 필요해. 기존의 요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드는 상상력.’

여기서 이강우는 그저 머리로만 골골대지 않았다. 요리는 머리로 만드는 게 아니니까. 성공이든, 실패든 손으로 만들고, 혀로 맛을 봐야 한다.

그렇게 이강우의 도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들은 채유리의 입에 들어갔다.

“꽃등도마뱀 고기를 이용해 만든 고기쌈입니다. 어떻습니까?”

“달달하고 아삭아삭해서 맛있어.”

“칼니멧돼지의 뒷다릿살을 연탄불에 구워봤습니다. 어떻겠습니까?”

“고기라서 맛있어!”

“해독을 마친 박쥐뱀의 피를 베이스로 칵테일을 만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톡 쏘는 게 맛있어!”

채유리는 과연 이강우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식성을 보여줬다.

정말 대단했다. 이강우는 그저 요리의 전중후, 맛만 보는 수준이고 채유리는 요리를 전부 먹어 치웠는데 오히려 이강우가 슬슬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놀라운 위장.

단지.

“이번 요리는…… 아니, 맛있게 드십시오.”

“응!”

채유리는 뭐든 다 맛있다고 했다. 이강우가 만들어준 요리를 전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런 채유리의 모습에 이강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내 실수지. 내가 잘못한 거지.’

채유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그냥 이강우가 배부르게, 마음껏 배를 채워 준다고 해서 왔을 뿐이다. 그녀를 요리연구 파트너로 고른 이강우가 잘못한 거다.

아니, 채유리가 대단한 미식가답게 맛을 제대로 품평해줬다고 해도 큰 도움은 안 됐을 것이다.

‘요리는 괜찮아.’

사실 생각보다 나오는 요리들이 괜찮았다. 애초에 요리에 최고는 없다. 맛있는 요리만 있을 뿐. 오히려 채유리가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주지 않으니, 그녀를 데려온 건 베스트 초이스라고 해도 될 정도.

‘이걸로 뻑 가게 만들 자신은 있어.’

그 정도로 이강우는 맛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단지.

‘근데 이걸로 뻑 가게 만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닐 것 같단 말이야.’

이강우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단순히 맛이 전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강우의 고민을 풀어준 건, 권재용 박사였다. 그는 이강우가 사 왔던 메로나 아이스크림 2개와 함께 검은색 밀폐 용기 하나를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지금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네.”

이강우는 밀폐 용기를 살짝 열어본 후에 반색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권재용 박사가 건네준 건 다름 아니라 벽두꺼비 내장 크림이었다.

예전에 이강우가 안중현과 함께 유적 사냥에서 가지고 온 그게 맞다. 유적 사냥 정산 이후 마법청이 즈믄나래 길드의 기여를 인정해 벽두꺼비 내장 크림의 일부를 즈믄나래 길드에 줬다. 당연히 그건 곧장 즈믄나래 유적 연구소로 향했고, 연구소에서 짬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권재용 박사가 냉큼 연구 자료로 보관 중이었다.

그중 일부가 다시 이강우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보다 요리는 잘 되는 것 같나?”

“솔직히 말하면 정말 잘 됐습니다. 정리가 되면, 제대로 한번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리군. 사실 나도 좀 맛이라도 보려고 왔는데…….”

스윽.

채유리 주변에 쌓인 깨끗한 접시를 보며 권재용 박사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만들어 드릴까요? 즉석에서 한두 가지 정도는 만들어 드릴 수 있는데.”

“아니, 됐네.”

말과 함께 권재용 박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이강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자네 지금 그냥 맛있기만 한 요리를 만드는 건가?”

이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너무 당연한 말이었으니까. 요리는 사실 맛있으면 된다. 물론 환자식같이 영양을 염두에 두고 만드는 요리도 있지만, 이강우는 지금 그런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니다.

“예, 그렇습니다.”

“음…… 비수 김지홍이라면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기대하고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예?”

“하선우가 자네를 마법청 그리고 이번 4등급 유적 사냥 참가가 확실시되는 마법사들에게 세일즈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겠지?”

“앙숙인 김재범하고 손을 잡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고 들었습니다.”

“하선우가 그동안 나름 이미지 관리와 주변 평판 관리를 잘한 덕분이었지, 만약 김재범이 하선우의 처지였다면 자네는 절대 이번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을 거야.”

“사실 끼워달라고 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 꽁한 마음, 하선우를 상대로 풀게. 하선우를 자기 밑 사람으로 두려는 마법사들이 전 세계에 넘쳐나거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마법청이 하선우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그 제안이 통과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마법사들의 반대가 없었기 때문이네. 특히 두 명의 마법사들, 비수와 명궁은 찬성표를 보냈지. 만약 둘 중 한 명이 확실하게 반대를 표했다면, 자네의 합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걸세.”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하선우는 그 둘을 설득했지. 그 둘에게 찾아가 이강우를 데리고 가면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설명했겠지. 자, 그럼 과연 하선우는 자네의 무엇을 세일즈 포인트로 잡았을 것 같나?”

“그야…….”

이강우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도축 그리고 요리 아닙니까?”

“그게 정말 세일즈 포인트가 될 것 같나?”

그제야 이강우는 고민을 했다.

분명 이강우의 도축 그리고 요리 실력은 훌륭하다. 몬스터를 상대로 보여주는 그 솜씨는 단순히 국내 수준을 넘어, 전 세계 단위로 놓고 평가해도 될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그게 이강우만의 전유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도축은 기술만 있으면 가능하다. 요리 역시 레시피가 있으면 충분해.’

이강우만큼 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구색을 갖추는 정도로 하는 건 다른 마법사들이 한두 달 정도 바짝 교육만 받아도 가능하다.

‘이건 세일즈 포인트가 아니야.’

다른 게 있다.

그럼 이강우가 가진 것 중에 다른 마법사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게 뭐가 있을까?

전투 능력? 본 적도 없으니 언급 불가. 심지어 당시 이강우는 3서클 마법사였다.

클로저 라이센스? 의미 없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다.

그럼 남은 건…….

“혹시 제가 리볼버의 제자라는 부분…….”

권재용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은 리볼버를 정말 강력한 마법사, 7서클의 마법사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는 가진 진짜 능력은 이거지.”

툭툭, 권재용 박사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두드렸다.

“더군다나 그가 권위자로 있는 분야는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마법사들이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분야고.”

“그렇죠.”

마나 서클 개발!

실제로 리볼버의 연구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특히 마나스톤을 효소를 통해 분해해서 인간이 섭취하고, 그를 통해 마나 서클에 꾸준한 자극을 줘 마나 서클의 성장을 촉진해주는 방법은…….

‘나도 알고 있지.’

지금 대한민국에서 아마도 이강우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제야 이강우는 김지홍이 원하는 요리가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맛있는 요리가 아니야.’

이강우는 실소를 지었다.

의도가 뻔했다.

‘그래, 유적 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정부 소유. 하지만 유적 내에서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먼저 가진 놈이 임자니까.’

유적에서 몬스터를 잡아서 마나스톤을 가지고 나왔다. 그 마나스톤을 임의로 마법사가 사용한다? 안 될 건 없다. 유적 안에서 마법 아티팩트, 마나스톤을 마법사가 임의로 사용했다고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막말로 처벌조항이 있다고 해도 유적 내에 감시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 도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유적 밖으로 가지고 나올 경우 한국 정부의 소유가 되는 거다.

즉, 유적 내에서 마법사들은 습득한 모든 걸 재량껏 사용할 수 있다.

비수 김지홍은 이강우가 그 재량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마나 서클 개발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주기를 원한다.

리볼버 크로포드의 수제자란 게 언급됐을 때, 그 부분을 하선우도 나름 충분히 어필했을 것이다.

이강우가 답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이강우의 감사 인사에 권재용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리볼버 연구실에서 현자의 돌 같은 거 샘플로 구해다 주면 정말 더 좋고. 그렇게 해주면 평생 메로나를 사주지.”

약간의 진심이 섞인 농담을 끝으로 권재용 박사가 자리를 비웠다.

그 후 이강우는 곧바로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을 찾았다.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 당시 얻은 마나스톤, 그 마나스톤을 효소를 통해 정제를 마친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꺼냈다. 리볼버의 연구소에서 챙기고 나온 효소들도 꺼냈다.

그 순간.

‘가만.’

이강우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효소는 마나스톤이 가진 마력을 마법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소화를 해주는 거지?’

그 번뜩임.

‘하지만 몬스터의 사체에도, 고기에도 마력은 있잖아? 마나스톤만큼은 아니지만…… 그럼 만약 이 효소를 몬스터의 사체에 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해도 마나 서클에 자극을 줄 수 있나?’

리볼버 크로포드, 그의 안목은 여러모로 정확했던 모양이다.

정말 자신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재목을 골랐으니까.

* * *

이강우가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실험 대상은 당연히 이강우였다. 본인 몸으로 실험했다.

그리고 효과를 봤다.

‘마나 서클의 느낌이 다르다. 마나 서클이 자극을 받는 게 느껴져.’

하지만 이강우는 그 효과가 불사황제의 능력 덕분에 생기는 효과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실험이 성과를 냈기에 나오는 결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강우는 결국 채유리에게 실험을 했다.

물론 그냥 숨긴 채 실험을 하진 않았다. 적어도 채유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실험 쥐로 써먹을 생각은 없었다.

“이 요리를 먹으면 마나 서클에 자극이 갈 겁니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장대한 설명을 했고, 그 설명에 채유리는 멀뚱멀뚱 설명만 들었다.

그리고는 이강우가 먹으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했을 때.

“나는 강우가 만들어준 건 전부 먹을 수 있어.”

채유리가 다부진 각오로 말했다.

그리고 채유리는 곧바로 요리를 먹었다. 이강우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초조한 눈빛으로 그녀의 식사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녀가 단숨에 요리를 해치우는 순간, 그녀의 얼굴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심지어.

“우웁!”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려고 했다.

그 광경을 본 이강우가 기겁하면서 채유리에게 다가갔다. 채유리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채유리를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우웁!”

채유리는 재차 헛구역질을 했고, 이강우는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문제라도 있나? 내가 먹었을 땐…… 젠장!’

이강우의 긴장.

그때 권재용 박사가 막 들어왔다. 메로나 2개를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심각한 분위기에 급하게 채유리와 이강우, 둘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우웁!”

그때 채유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했다. 채유리의 식성과 소화력을 직접 본 권재용 박사는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금방 직감할 수 있었다.

권재용 박사가 이강우를 봤다. 이강우도 권재용 박사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짓을 한 건가?

모르겠습니다.

병원? 병원으로 가야 할 문제인가?

그게…….

짧은 순간 이런저런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때 채유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생겼나 봐.”

그 대답에 권재용 박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산부인과를 예약해 줘야겠군.”

이강우를 짐승 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30평은 될 법한 널찍한 공간, 보통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공간을 그저 하나의 방으로 쓰는 사내, 비수란 별명을 가진 김지홍은 그 넓은 공간에 외로운 섬처럼 바닥에 앉아있었다. 더불어 그의 앞에는 작은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식탁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강우가 방석을 깔고 앉아있었다.

넓은 공간에 두 명의 사내가 있다. 그것도 겸상이 아닌 묘한 거리감을 둔 채로.

여기에 둘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김지홍의 눈빛은 서슬 퍼렇기 그지없었다. 뿜어지는 기세도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별명이 왜 비수인지, 비수처럼 날아오는 그의 기세를 직접 체험한다면 모두가 이해할 것이다.

이강우는 그런 김지홍의 비수 같은 기세 앞에서 조금의 주눅이 드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앉아있었다.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아오는 비수를 당당하게 막아내는 방패.

그런 그 둘의 기 싸움을 막은 건,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한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김지홍의 식탁 위에 요리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았다. 김지홍은 이강우를 한 번 쳐다본 뒤, 곧바로 젓가락을 들고 요리를 살폈다. 접시 위에 마련된 요리는 단출했다. 얇게 썬 고기를 바짝 익힌 뒤, 그것으로 여러 채소들을 감싼 한입 크기의 고기쌈 두 개. 그게 전부였다.

김지홍은 개중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었고, 한입에 먹고, 한 번에 씹었다.

아삭!

김지홍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음.’

고기에 쌓인 채소의 아삭함은 예상했다. 하지만 얇게 썬 고기 자체도 아삭했다.

‘차갑군.’

얼린 거다. 한 번 바짝 구운 고기를 그 상태에서 얼렸기에 살얼음을 씹는 식감이 나왔다.

사실 정말 말도 안 되는 조리법이다. 구운 고기를 얼린다? 감히 맛이 있을 수가 없다. 고기를 구우면 기름이 나오는데, 그 기름을 얼리면? 굳어버린 기름이다. 그게 맛있을 리 없다.

그런데 이 요리는 아니었다. 굳은 기름의 거북한 느끼함은 어디에도 없었고, 대신에 풍미 넘치는 단맛이 제법 쌉싸름한 채소의 맛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냈다. 쓴 채소에 단맛이 강조된 드레싱을 뿌려 씹는 느낌. 재미난 건 씹을수록 단맛이 좀 더 강하고 쓴맛이 줄었다. 씹을수록 맛이 났다.

“꽃등도마뱀의 안심을 얇게 썬 뒤 한 번 굽고, 얼렸습니다. 안에 넣은 채소는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잡초라고 보시면 됩니다.”

잡초.

그래서 쌉싸름함이 보통 채소보다 강했군…… 김지홍은 그리 나오려는 말을 남은 고기쌈을 마저 먹으며, 함께 삼켰다.

맛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김지홍은 요리를 먹고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가슴 언저리를, 가슴 속을 예의주시했다.

잠잠했다.

김지홍이 눈을 떴다.

“다음.”

이후 나온 요리는 박쥐뱀의 피를 이용해 만든 쓴 칵테일이었다. 약간의 독기를 남긴 덕분에 톡 쏘는 맛이 더 강해졌다. 덕분에 그 톡 쏘는 쓴맛이, 꽃등도마뱀의 단맛을 확실하게 누그러뜨렸다.

그 상태에서, 쓴맛이 입안에 남은 상황에서 나온 건 벽두꺼비의 내장 크림 스파게티였다.

벽두꺼비의 내장 크림, 이 세상에서 가장 풍미 넘치는 크림의 맛은 박쥐뱀 피 칵테일의 쓴맛과 아직 미량으로 남아있는 꽃등도마뱀의 단맛을 포근하게 안아주듯 감쌌다. 감싼 채 속으로 들어갔다. 쓴맛과 단맛에 자극받은 미각이 푹신한 침대에 누운 듯 안정을 되찾았다.

그다음 나온 건 메인 디시, 칼니멧돼지 안심 스테이크였다. 크림 스파게티를 먹은 후에 스테이크?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조합. 느끼함 뒤에 느끼함의 조합이었지만, 벽두꺼비의 내장 크림은 보통 크림과 비교를 거부한다. 먹고 나면 산뜻함마저 느낄 수 있는 크림이다. 어지간한 전채 요리보다 낫다.

그런 벽두꺼비 크림 스파게티 덕분에 진정된 미각에게 야성적이면서도 감칠맛 넘치는 칼니멧돼지 스테이크는 비수였다. 그 맛은 먹는 이의 만족감을 비수처럼 날아와 찔렀다.

더군다나 그냥 스테이크가 아니었다. 칼꼬리전갈독을 해독한 뒤 희석한 용액에 재운 고기였다. 고기의 육질은 유지한 채 부드럽게 씹히는 스테이크는 독특한 풍미가 아닌, 고기 자체의 왕도의 맛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 요리 후에 나온 마지막 디저트는 기생망고 셔벗이었다. 기생망고, 본래는 반출 불가 품목이지만, 이강우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란 배경 그리고 김지홍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삼아 기생망고 두 개를 얻었다. 개중 하나를 씨앗을 완벽하게 제거한 뒤 셔벗으로 만들었다.

특별한 맛은 없었다. 기생망고가 가진 본연의 맛, 과일 특유의 단맛과 과일 특유의 미약한 풋내가 셔벗이란 식감과 어우러지면서 예상 가능하지만, 모두가 만족할 법한 맛을 냈다. 복잡했던 입 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맛이었다.

기승전결.

코스 요리를 즐긴 김지홍이 디저트용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군.”

맛있다는 말이 나왔다. 요리를 대접한 입장에서는 가장 원하던 말이 나온 셈.

그러나 김지홍의 눈빛은 그가 내뱉은 말과 다르게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그 날카로움이 섬뜩할 정도였다.

맛은 있다. 하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김지홍은 그 감정을 눈빛에 담아 이강우에게 보냈고, 이강우는 그 눈빛을 싱글벙글, 여유 가득한 눈빛으로 막아냈다.

때릴 때 순순히 맞아주면 끝날 일을 막으면 일이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경우가 그랬다.

김지홍의 기세가 삼엄해졌다.

“그런데 이게 전부인가?”

기어코 말로 자신의 의중을,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그런 김지홍의 태도에 이강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요리는 그게 전부입니다.”

“맛은 기대를 뛰어넘지만, 그뿐이군.”

“요리가 맛이 있으면 됐지, 그 이상이 필요합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강우의 반발에 김지홍이 이강우에 대한 부정적인 선택지를 고르려는 순간, 이강우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김지홍이 하던 생각을 멈추고 병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실 여기서 밀당을 한 번 하고, 이후 드라마틱한 연출을 기획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같이 서로의 등 뒤에 서로의 목숨을 걸어 줄 사이에 괜히 더 이야기는 추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됐습니다.”

말과 함께 이강우가 직접 병을 김지홍의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앉았다.

겸상이다.

이제까지 이강우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구경을 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식탁을 공유하는 처지가 됐다.

“이게 크로포드가 만든 마나 서클 자극 비약입니다. 김 대인께 소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자극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김 대인이란 호칭, 괜찮으십니까?”

김지홍은 대답 대신 병의 마개를 열고 단숨에 들이켰다. 김지홍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잠시 시간이 지났고, 김지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볼버의 후계자가 맞군.”

효과를 느낀 모양이다.

이강우는 그런 김지홍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김지홍이 그런 이강우에게 말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출을 그렸다면, 이유가 있을 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전체적인 맥락은 아시리라 생각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사실 이번 4등급 유적 사냥, 참가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전 안전하게 4등급 유적 사냥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배경이 있습니다. 좀 더 매국적인 발언을 하자면, 제가 미국으로 국적을 바꾸면, 적어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흥.”

김지홍이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가소롭지도 않다는 모습. 그러나 이강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가 이번 유적 사냥에 참가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선우 씨가 정말 사정을 해서. 본래는 짜증을 내야 하는 제가 오히려 그를 응원하고 싶어질 정도로 부탁을 해서. 두 번째 이유는 이번 기회가 제게 인맥을 만들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맥.

세상 대부분의 나라가 인맥을 중요시하지만, 개중에서도 대한민국은 인맥이 더더욱 중요하다. 좋은 건 아니다. 인맥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갈 리는 없다. 하지만 그게 현실인 것 역시 부정할 순 없다.

“리볼버의 후계자란 자리도 좋지만, 이용만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제게는 유사시에 제 편을 들어줄 높으신 분들이 필요합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꾸준히 마나 서클 자극 비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드리는 만큼 받아낼 겁니다. 적어도 더 이상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에 김지홍은 이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지금 날 상대로 거래를 요청하는 거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윗사람을 상대로 예고도 없이,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감히 자신의 앞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이강우를, 제 마음대로 혀를 놀리는 이강우를 단숨에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섬뜩한 기세.

하지만 이강우는 그 기세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밀릴 이유가 없었다.

‘불사황제에 비하면 당신의 기세는 가소로울 뿐이지.’

이강우는 오히려 그 기세 앞에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흘렀을 때.

“하하.”

김지홍이 짧게 웃었다.

“하선우가 한 설명하고 다르게, 상당한 녀석이 왔군.”

김지홍이 기세를 풀었다. 기세로 이강우를 누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파악한 셈이다.

“오냐, 그렇게 나오면 나 역시 어려울 게 없지. 이 비약, 유적 내에서 제조가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이 비약에 대한 대가는?”

“향후 마법청과 저 사이에서 어떠한 거래 혹은 사건이 있을 때 제 반대편에 서진 말아주십시오.”

예상외의 거래 조건이었다.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반대에만 서지 마라?

“중립이 되어 달라, 이건가?”

“예.”

“왜 하필 중립이지?”

“조만간 제 팀이 김 대인의 위치를 대신할 겁니다.”

“오호.”

6서클의 마법사를 대신한다?

오만방자한 소리지만, 김지홍은 오히려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 김 대인께서 중립만 지키시면, 마법청과의 거래는 무조건 제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김 대인의 위치 정도라면, 사실 다른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담합을 하자, 이거군.”

“담합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언제까지 마법청에 끌려다닐 수만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국가 단위의 도움 없이 5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을 닫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런데 마법청과 적대관계가 되겠다? 더군다나 자네는 즈믄나래 소속인데?”

“최고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법입니다.”

“한국 최고가 되겠다는 말이군. 내 앞에서 자신 있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정도 웅심도 없는 놈이 4서클 마법사인 주제에 4등급 모래시계문에 덤벼들겠습니까?”

김지홍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꺼비 같은 자신의 얼굴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리볼버가 아니었으면 내 제자로 삼았을 텐데, 아쉽군.”

“걱정 마십시오. 제 지분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조만간 상장을 할 테니까요. 그때 지분을 구매하시면 됩니다.”

“좋아, 더 자세한 이야기는 유적 안에서 하지. 그곳이라면 정말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이강우, 그가 신고식을 완벽하게 마쳤다.

* * *

이강우는 궁궐 같은 김지홍의 집을 나오는 순간 부르르, 짧게 몸을 떨었다.

‘이강우, 이 자식! 너는 너무 멋진 놈이야!’

전율이 돋았다.

이강우, 그의 본래 계획은 그냥 김지홍을 납득만 시키는 것이었다. 신고식이니, 딱 그 정도면 된다. 난 이러이러한 인간이다, 하는 수준…… 유적 사냥에 도움이 될 충분한 실력자란 것만 인정받으면 된다.

하지만 채유리에게 생기는 순간, 그녀에게 여섯 번째 마나 서클이 생기는 순간 이강우는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제부터 난 6서클 마법사를 만든 마법사야.’

사실 그건 운 그리고 우연이었다.

채유리는 이미 6서클에 근접해 있었다. 기준치만 보면 6서클을 넘은 상황. 적당한 자극, 이제 딱 한 방울의 물방울이 물을 넘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본인이 그걸 느끼고 알아서 6서클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유리는 달랐다. 특유의 게으름, 마나 서클 개발에 대한 무신경함이 그녀를 그 상태로 남겨두었다. 유적 사냥이 아니면 마법을 쓰는 일도 없고, 훈련은 당연히 안 하고, 매일매일 이강우가 주는 밥만 먹는 걸 낙으로 삼는 그녀 아닌가? 그런 그녀를 이강우는 그저 살짝 자극만 했을 뿐이고, 6서클에 도달하게 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강우가 먹여 준 것 때문에 그녀는 6서클에 도달한 건 분명한 사실.

그럼 되는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강우는 5서클 마법사를 6서클 마법사로 단숨에 만든 경력을 가지게 됐다.

이 사실이 가지는 가치?

절대적이다.

‘슬슬 소문도 날 테고.’

장담컨대 이 사실은 곧바로 5서클 이상 마법사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퍼질 테고, 그들 사이에서 이강우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릴 것이다. 여기에 리볼버 크로포드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이강우의 이 경력에 충분한 신빙성을 부여할 것이다.

위치가 달라졌다.

그럼 당연히 행동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나중을 기약하고, 어영부영 그냥 안정적인 저울질만 하는 건 병신이지.’

이미 호랑이 등 위에 탄 상황. 그런데 피부에 생채기가 나는 걸 우려해서 보다 나은 메리트를 포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 멍청한 짓이다.

‘크게.’

큰 그림을 그리는 거다.

‘일단 한국 최고.’

실제로 이미 그림은 커졌다.

팀 즈믄나래.

하선우의 수작 그리고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의 계산으로 이강우의 의중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 탄생한 팀이다. 어떻게 보면 이강우에게는 짐이라고 할 수 있는 팀이다.

그런데 이제는 짐이 아니라 왕좌가 됐다.

바람잡이 하선우가 있고, 6서클 마법사가 된 채유리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조금만 더 멤버를 추가하면?

현재 한국 소속 두 명의 6서클 마법사가 개인적인 활동을 하는 걸 염두에 두면,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팀이 된다. 이 팀이라면 마법청과도 굳이 손해 보는 계약을, 일방적인 계약을 할 필요가 없다. 저번처럼 계약서에 군말 없이 도장을 찍는 게 아니라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보다 단단하게 밑바닥을 다지는 거다.

경쟁자가 될 다른 6서클 마법사 두 명을 포섭하면, 이강우는 더더욱 견고한 지위를 가질 테니까.

그 후에는?

‘한국 내에서 몸값이 올라가면, 블랙 스택과 로드리게스 회장도 추가로 내게 투자를 할 수밖에 없지.’

최고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절대적인 지론이다.

당연히 이강우는 더 많은 걸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부 먹어치워 주마.’

그리고 이강우는 그 모든 걸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 * *

모래시계문의 등장은 인류 역사를 바꿀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이후 인류가 모래시계문을 문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 역시 여러모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고작 1년 만에 모래시계문을 사회의 일부로 만든 그 과정을 기적의 1년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래시계문을 안정적으로, 가치 있는 대상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건 그만한 힘과 정치적인 기반을 마련한 국가들의 이야기일 뿐, 그렇지 못한 국가들에 모래시계문은 악몽이었다.

그 악몽 때문에 가장 큰 몸살을 앓고 있는 곳은 바로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모래시계문을 관리할 힘은커녕, 모래시계문 등장 이전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가득했다. 모래시계문의 등장은 그들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동시에 모래시계문은 빌미가 되었다. 겉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세계열강들이 아프리카를 합법적으로, 대가라는 빌미 하에, 관리와 보호라는 명분하에 마음껏 아프리카의 자원을 착취할 수 있는 빌미.

대부분의 사람들, 유럽, 미국, 아시아 사람들은 모른다. 아프리카 주민들이 느끼는 절망감과 불만감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그저 그들은 대략적인 상황만 듣고 동정심을 표하며, 자국 병력과 자국 예산이 그들 보호에 쓰인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낄 뿐이다.

반면 아프리카 주민들이 느끼는 작금의 시대에 대한 불만감과 박탈감, 절망감과 모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연히 자신들을 착취하는 세계열강들, 작금의 시대에 불만감을 표출하기 위해 그들은 집단을 만들었다. 세계가 반군,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집단은 그렇게 탄생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일반적인 무기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 마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모래시계문 너머에 그들의 힘이 되어줄 마법 아티팩트, 마나스톤이 잔뜩 있었으니까. 비단 이런 생각을 한 건 아프리카 국가 내의 테러리스트 조직만이 아니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 세계 전역에 손을 뻗은 마피아들, 야쿠자와 삼합회 같은 세력들…… 그들에게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은 몰래 유적 사냥을 이룩할 수 있는 모래시계문 농장이었다.

아프리카 케냐에 속한 머티 역시 그런 농장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문명의 혜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땅, 그저 황무지만이 펼쳐진 그 지역. 위성으로 봐도 그저 허허벌판에 듬성듬성 초라한 초목만이 자라나는 그 땅 아래에는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약 1천 평 정도 되는 비밀공간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반군 그리고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판매하는 모래시계문을 관리하는 모래시계문 농장이었다.

쉴 새 없이 문이 오고 가고, 모래시계문이 다한 문은, 구석에서 파괴되는 작업을 거치는 그곳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했다. 그런 어수선함 덕분에 비범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등장했을 때 그 누구도 사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른 체격이다. 여기에 덥수룩한 수염은 얼굴 전부를 덮고 있었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 상할 만큼 상한 머리칼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끈으로 질끈 묶은 사내. 그 자체만으로도 비범하기 그지없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더기 위로 반지, 귀걸이, 목걸이를 치렁치렁하게 달고 있는 모습은 비범함을 넘어 괴상함을 연출했다.

그때 누군가 그 사내를 발견했다. 목청 높여 모래시계문 농장의 직원들, 물론 직원이라기보다는 노예에 가까운 그들을 부리던 사내는 다급하게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능숙한 영어 솜씨로 말을 꺼냈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5등급 모래시계문을 준비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구했습니다.”

흑인 사내 말에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지그시, 자신의 수염 사이로 유일하게 드러난 눈빛으로 흑인 사내를 노려봤다.

흑인 사내가 움찔하며 재차 대답했다.

“저번처럼 거짓이 아닙니다. 강도 판정 결과 최소 5등급입니다. 4등급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적어도 6등급은 아닙니다. 제 명예를 걸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때.

“걱정 마십시오.”

대답이 나왔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사내가 아닌, 그 사내의 등 뒤에서.

대답과 함께 등장한 사내는 정말 작은 체격의 사내였다. 더불어 황색 피부에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를 한 동양인이었다. 눈도 웃고 있고, 입도 웃고 있어, 가면 같은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판단은 우리가 할 겁니다.”

그 가면 같은 얼굴의 사내의 말에 흑인 사대는 대답 대신 기겁을 했다.

“이, 이 무슨!”

이 비밀스러운 농장에 예고되지 않은 손님이 등장했다는 사실, 기겁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허락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나름 철저한 보안을 구축하고 있으니까.

그런 흑인 사내의 반응에 동양인 사내는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비밀은 지켜질 겁니다. 뭐, 안 지켜지면 어쩔 수 없지만, 그쪽이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죠.”

반쯤 협박 섞인 말.

흑인 사내는 그 동양인 사내를 무시한 채 덥수룩한 수염 사내를 봤다.

“기예르모!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건…….”

그때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사람 머리라도 들어있을 법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흑인 사내에게 건네줬다. 흑인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다수의 마나스톤과 황금, 유적에서만 채굴 가능한 보석과 마법 아티팩트로 보이는 장신구들.

오오!

흑인 사내의 눈동자가 빛으로, 탐욕으로 물들었다.

흑인 사내가 표정을 바꾸고는 곧바로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얀 문! 하얀 문 운반 준비해! 빨리빨리 해!”

세상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세상을 바꿀 조짐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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