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29화 (29/66)

29화. 팀 즈믄나래

그런 시대가 있다.

높은 산에 오르는 게 그 어느 것보다 위대한 도전이던 시대, 똑같은 정상이라도 쉬운 길이 아닌 그 누구도 발을 내딛지 않은 어려운 길을 통해 정복하는 게 더 우월한 도전이던 시대, 산을 타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게 숭고한 도전이던 시대.

모래시계문은 그 무렵의 등산가들의 눈에 비친 산과 비슷했다.

이미 충분히 누릴 걸 누리는 마법사들이, 이미 부와 명예를 쥔 마법사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은 채,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보다 높은 등급의 유적에 도전한다.

사람들은 그걸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숭고한 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걸고 보다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한 도전이라니, 이보다 숭고한 도전이 어디 있을까?

‘숭고한 도전은 개뿔.’

……라는 건 이강우와 정말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런 도전을 하는 건 좋은데, 왜 내가 거기 끼어야 하는 거지?’

퍼스트 클래스.

하늘 위의 호텔이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땅콩마저도 맛있어지는 그 자리에 앉은 이강우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4등급이라니, 5등급도 아니고 4등급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어도 이건 아니지.’

하선우는 말했다.

같이 팀을 만들어서 4등급 유적 사냥에, 한국 마법청이 주관하는 사냥에 참가하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4등급 몬스터라니, 그건 애초에 규정 외의 존재라고.’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4등급은 아니니까.

4등급 몬스터의 강함과 존재감은 기존 몬스터와 궤를 달리한다.

체급이 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사냥 방법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다.

당장 5등급 몬스터 중 하나인 멜트 드래곤만 보더라도 그렇다. 4등급 유적은 그런 멜트 드래곤이 서너 마리 등장하고, 끝판왕인 4등급 몬스터가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물론 메리트가 없는 건 아니다.

4등급 유적에서는 4등급 마나스톤을 얻을 수 있고, 6서클 마법 아티팩트도 구할 수 있다. 5서클 마법 아티팩트 역시 다수 확보할 수 있다.

마법의 시대에서 6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냉전시대 핵무기와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타이틀이 된다.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해서 클로즈에 성공했다?

‘초 하이 리스크, 초 하이 리턴. 인간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박이긴 하겠군.’

영웅이 되는 거다. 자서전만 내놓아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영웅이. 전 세계가 알아주는 마법사가 된다. BBC와 CNN 뉴스는 물론 알자지라 방송에도 얼굴이 나올 것이다.

‘돈, 인맥, 권력, 명예, 배경…… 내가 지금 필요로 하는 건 한 방에 얻을 수 있긴 하네.’

이강우가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한 번의 유적 사냥으로 이강우는 단숨에 톱클래스 마법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강우의 표정이 풀렸다. 메리트는 언제나 달콤한 법이니까.

‘아니, 그런데 그걸 꼭 그렇게 무리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얻을 필요가 있나?’

그러나 다시 이강우는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지금 이강우의 표정을 승무원이 실시간으로 봤다면 진지하게 혹시 탑승객 중 의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강우는 조울증 환자 그 이상, 세계적인 대배우도 하기 힘든 급격한 표정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최악은…… 내게 선택권이 없을 경우겠지.’

그리고 이내 이강우의 하나의 표정으로 굳혀졌다.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지.’

4등급 모래시계문 공략, 그 부분에 대한 리스크와 메리트는 분명하게 가늠할 수 있다.

문제는 선택권의 유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강우에게 선택권이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애초에 이번 일은 기획부터 이강우의 의사와 의중은 철저할 정도로 무시당했다.

‘하선우…… 대체 의도가 뭐지? 설마 날 죽이려는 자들이 보낸 자객인가?’

이번 일은 하선우, 그가 멋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이강우의 의사는 조금도 수용하지 않은 채 진행했다.

더불어 하선우는 허술한 사내가 아니다. 그는 이강우에게 쉽사리 선택권을 쥐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강우가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를 제대로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핵심이다.

이강우가 지금 고민해야 하는 건, 사실상 리스크와 메리트가 아니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가, 없는가!

‘……아무래도 여차하면 로드리게스 회장을 통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부탁해야겠어.’

이강우는 극단적인 선택지까지 염두에 두었다.

‘아니, 그냥 비행기를 여기서 돌릴까? 땅콩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비행기 돌려주려나? 그러고 보니 땅콩을 봉지째로 줬잖아? 아, 젠장 소식 듣자마자 비행기를 타는 게 아니었어. 시애틀에서 한 번 더 생각했었어야…… 경유도 아니고 직항이니, 이거 뭐 답이 없네.’

그러는 이강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비행기는 빠르게 한국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 * *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했다.

허름한 가방 하나가 짐의 전부인 이강우는 가방을 짊어진 채 비행기에서 내렸다.

공항을 걷는 이강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긴급한 상황, 복잡한 머릿속. 그런 상황에서 이강우가 가장 먼저 통화를 한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가족이었다.

-오빠,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문자만 툭툭 남기고, 그것도 내용은 아무것도 없고…….

오랜만에 듣는 여동생의 목소리에 이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내가 예전처럼 총꾼 백수가 아니잖아? 중요한 일을 하느라 바빴어.”

-퍽이나. 괜히 무리하지 말고 주제에 맞는 일을 해.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문자는 받았다. 엄마 수술 잘 됐다며?”

-응. 정말 잘 됐어. 난 마법 수술이란 게 이렇게 대단한지 처음 알았어! 정말 순식간에 수술이 끝났는데…….

“퇴원은?”

-6월. 지금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없어. 그런데 병원 쪽에서 혹시 징후가 안 좋을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해서. 내가 보기엔 지금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병원이 그렇게 말하면 따라야지. 병원비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그건 돈도 아니니까. 당장은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

대화를 하던 이강우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까지 고민만 하던 이강우가 처음으로 가슴 속에서 뿌듯함을, 진심 어린 기쁨을 느꼈다.

‘최소한의 효도는 했구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소리는 하기 싫다.

하지만 그래도 나름 큰 짐을 덜어내서 기분이 좋았다.

칙칙했던 가슴 속이 밝게 빛났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가진 않았다.

-그보다 오빠, 식은 언제 올릴 거야?

이상한 어둠이 몰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이.

“뭐? 식?”

-응, 오빠 나이도 있는데 마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 하다못해 조촐하게 간단한 약혼식이라도 해야지.

“뭔 소리야? 식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응?

남매가 동시에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대화는 거기에서 잠시 멈췄다.

그때.

‘아.’

이강우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미안, 자세한 통화는 나중에 하자. 지금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일단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하자. 아니면 문자나 톡으로 상황 설명을 해주거나.”

-알았어.

통화 종료와 함께 이강우는 자신이 발견한 누군가, 권재용 박사를 향해 다가갔다.

공항에 도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출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권재용 박사가 이강우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권재용 박사는 곧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이강우가 그 악수를 받아줬다.

“역시 내 안목은 대단하니까. 딱 보는 순간 촉이 왔지. 그래도 설마 이 정도로 자네가 어마어마한 사람일 줄은 몰랐네.”

“예, 정말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미리 자네에게 투자를 해서 다행이야. 지금 내가 투자 제안을 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테니.”

권재용 박사의 말에 이강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팔에는 수갑, 다리에는 족쇄, 목에는 목줄,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거열형을 당해서 사지가 뽑혀 나가겠어.’

권재용도 이강우의 주주 중 한 명이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기에 이강우는 굳이 괜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은 채, 곧장 본론부터 파고들었다.

솔직히 여기서 권재용 박사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건 둘째 치고 굳이 여기서 끈적끈적하게 포옹이라고 할 만큼 친하고 긴밀한 사이는 아니니까.

“사실 내가 볼일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선우 군이 자네 만난다기에 따라왔네.”

선우 군?

이강우는 살짝 굳으려는 표정을 간신히 참았다.

“하선우 씨 말입니까? 그럼 본인은…….”

“여기 인천공항에서 하선우가 고개 들이밀면 그다지 좋은 꼴을 보기가 힘들거든.”

공항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중 한 명이 등장했을 경우의 파급력은…… 이강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선우 씨를 따라오셨다면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다는 건데…….”

“클로저 라이센스 획득했다는 이야기 들었네. 대단해. 그거 정말 따기 힘든 건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나도 축하받을 일이고. 덕분에 앞으로 내 연구에 자네가 정말 꼭 필요한 존재가 됐어.”

권재용 박사 입장에서는 클로저 라이센스를 가진 이강우가 구세주처럼 보일 것이다. 유적에서 필요한 걸 정부나, 길드라는 통관 절차 없이 다이렉트로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밀수꾼을 자기 아래에 두게 됐으니까.

‘부려먹을 노예에게 채운 수갑이 멀쩡한지 확인하러 오셨구먼.’

여기서 이강우도 마냥 고개만 숙이지 않았다.

분명 이강우는 권재용 박사를 도와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 여기서 약속을 무작정 파기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게 좋은 일은 아니다.

결국 도와줘야 한다면, 그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싫은 내색을 보이면서 억지로 미소만 지을 필요는 없다.

주는 만큼 받아낼 생각을 하는 게 맞다.

“그보다 걸으면서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나도 이제 자네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서로 거래를 해야지. 한쪽이 한쪽에 빨대만 꽂으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지. 서로 꽂아야 오래 버티지.”

권재용 박사 역시 이강우를 마냥 빨아먹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둘은 곧바로 공항 밖으로, 주차장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맞춰 걸었다.

“예전에 말씀해주신 3대 프로젝트 말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강우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렸다. 더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 이제는 그 이야기를 잘라내기 위해 정보를 얻을 차례다.

“3대 프로젝트가 궁금한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 못해줄 건 없지.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 * *

모래시계문의 등장은 곧 마법의 등장이었다.

이 신비한 힘이 앞으로 세상의 패권을, 새로운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열쇠가 되리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레 기존의 권력과 질서를 쥔 자들은 이 힘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연구 과정에서 가장 많은 지원과 관심과 집중을 받는 3개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현자의 돌. 원래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마나스톤에 대한 연구라고 보면 되네.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마나스톤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부수적으로 마나스톤에서 추출 가능한 마력의 양을 늘리거나, 마나스톤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효율을 높이는 연구 등도 현자의 돌 프로젝트의 일부지. 참고로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결과를 내놓는 사람 중 한 명이 리볼버 크로포드야. 만났다고 들었는데…….”

현자의 돌 프로젝트.

마법을 쓰기 위한 마력, 그 마력을 무한하게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물론 마력만 많으면 장땡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무한한 건 없으니까.

궁극적인 목표가 무한한 것이고, 초점은 용량이었다.

보다 효율이 높은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과 비슷하다.

“예, 만나만 봤습니다. 짧게. 그럼 프리 프로젝트는 뭡니까?”

“마법 아티팩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쉽게 말해서 마법 아티팩트 도움 없이 마법을 쓰는 게 프로젝트의 목적이지.”

프리 프로젝트.

프리핸드, 아티팩트의 도움이 아니라 인간 본인이 필요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만 성공되면, 아티팩트를 구하기만 하면 된다. 구하면, 그 아티팩트를 분해, 해석한 뒤 똑같은 걸 대량으로 복제, 생산할 수 있으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나라면 그런 질문보다는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겠어.”

“가능한 모양이군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는 각 나라가 극비로 취급하고 있으니, 내 입으로 말해주긴 뭐하지만, 3년 후쯤에는 정말 재미난 세상이 될 거야. 정말 재미난 세상.”

“그럼 포탈 프로젝트는…….”

“모래시계문은 문이고, 유적은 방이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건 그 사이에 위치한 통로. 어둠으로 된 통로. 만약 이 통로를 임의로 조작할 수 있다면? 포탈 프로젝트는 그 의문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지.”

이 대목에서 이강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앞선 3대 프로젝트 중에 가장 가슴으로 다가오는 프로젝트였다. 이강우 본인이 몸으로 직접 겪어본 일이기도 하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 말에 권재용 박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난 아직도 20년 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진행 중인 날, 나는 일이 있어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지. 난 정말 그 경기 내용을 보고 싶었는데 도무지 볼 도리가 없더군. 차 안에서, 달리는 도로 위에서 월드컵 경기를 실시간으로 본다? 당시는 상상할 수도 없었지.”

권재용 박사는 말과 함께 자신이 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데 이제는 고화질 영화 한 편을 와이파이로 다운받는 데 5분 이상 걸리면 당연히 짜증을 내게 되더군. 그런 시대야.”

인류는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하고, 전진하고 있다.

……권재용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폭주의 시대지.”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권재용 박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울하고, 침울한 기색이 옅게 깔려 있었다.

이강우는 그런 권재용 박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포탈 프로젝트…… 아니, 그보다 리볼버가 현자의 돌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설마 내가 먹은 게…….’

이강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니까.

그런 와중에 권재용 박사가 손가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는 마이바흐 자동차 한 대가 외로이 서 있었다.

이강우는 그 차를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을 멈췄다.

‘하선우.’

당장은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기 위해 두뇌의 모든 힘을 발휘할 때니까.

* * *

하선우는 외모 자체에서 연예인다운 아우라가 흘러 나온다.

동시에 그는 외모와는 별개로 다른 위압감을 품고 있다.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지내는 사람도 하선우와의 대화에서는 쉽사리 긴장을 내려놓거나, 자세를 풀지 않는다. 두 가지의 아우라는 상대하는 이를 주눅이 들게 만드니까.

그런 하선우의 옆좌석에 앉은 이강우는 차 안을 가득 채운 하선우의 아우라에 조금도 밀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강우의 몸에도 무언의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연예인의 아우라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까지 이강우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기운이었다.

카리스마, 그것과 비슷한 위압감을 이제는 이강우도 품게 된 것이다.

앞좌석, 운전기사 옆에 앉은 권재용은 자신의 등 뒤에서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낀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강우가 어마어마한 대어가 됐군. 하선우도 나름 기 싸움을 시도해봤는데 먹히긴커녕 오히려 이강우가 압도하는군.’

권재용 박사는 이 상황이 마냥 즐거웠다.

정확히는 자신이 고른 이강우가 기대 이상으로 거대한 용이 되어 등장했다는 사실을, 그런 용의 등에 올라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강우도 나름 작심을 했군. 하선우의 제안 수용 여부를 떠나서 이번 상황을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어.’

그런 권재용 박사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강우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하선우의 제안 수용 여부를 말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제안을 수용할 마음이 들어도 이 자리에서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강우에게 지금 이 자리는 하선우의 독단에 경고를 하고, 하선우에게 달라진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는 자리일 뿐이다.

‘내가 하선우에게 밀릴 이유는, 그의 밑에 들어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는 이제 하나도 없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이강우의 머릿속으로 하선우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즈믄나래에 처음 출근했을 때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하선우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랐다. 심장이 두근두근 소리가 아니라, 덜컥덜컥 소리를 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4서클 마법사, 클로저 라이센스 보유자, 즈믄나래 넘버스 멤버, 로드리게스 회장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 리볼버 크로포드의 후계자.

‘난 불사황제의 선택을 받은 자다.’

그리고 불사황제가 고른 자!

이 요소들, 이제는 이강우를 설명해주는 이러한 것들 중에 바람잡이 하선우에게 밀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누가 이기나.’

그렇게 어마어마한 타이틀과 각오로 무장한 이강우를 향해.

“미국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하선우가 먼저 말을 던졌다. 이강우는 하선우를 보지 않은 채, 정면만을 바라본 채, 마치 이 최고급 세단 마이바흐가 하선우의 차가 아닌 자신의 차인 것처럼 자세를 잡은 채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클로저 라이센스 획득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고 가는 무덤덤한 이야기.

하선우는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제 제안,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나름 직구에 가까운 말, 괜한 견제구로 힘을 빼고 싶진 않다는 의미다.

“고려만 하고 있습니다.”

이강우는 즉답 대신 애매한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나 직구를 피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직구에 제대로 응수했다. 온몸으로, 하선우 네놈의 그 제안 때문에 기분이 아주 빌어먹을 수준이야! 라는 감정을 표출했다.

노골적일 정도의 감정 표출. 여기 슬쩍 나오는 흥! 콧바람 소리까지.

하선우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갑작스레 일을 처리한 것에 대해서 사죄드리겠습니다. 사안이 시급한지라 미리 손을 써둬야 했습니다.”

하선우가 짧게 사과를 했다.

“괜한 수고가 되겠군요.”

이강우는 당연히 무덤덤한 대답만 뱉었다.

이런 대화 속에서 가장 들뜬 건 앞 좌석에 타고 있는 권재용 박사였다. 그는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껌을 꺼내 입에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팝콘이라도 먹고 싶을 지경. 그 정도로 권재용 박사는 둘의 대화가 흥미진진했다.

그런 관객을 앞에 두고, 하선우와 이강우의 대화는 계속됐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 이강우 씨에게도 손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그 제안에 손해만 있었으면 아마 제가 이 차에 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4등급 유적 사냥으로 무엇을 얻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선우가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목숨을 걸었는데 뭐든 얻을 수 있겠죠.”

이강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잘것없던 시절에도 마법사를 상대했던 나다. 혓바닥만큼은 누구보다 길다고.’

쉽사리 자신이 잡은 분위기를 하선우에게 건네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대답이었다.

“트렌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선우의 입에서 의외의 단어가 나왔다.

‘트렌드?’

예상치 못했던 단어. 이강우의 흥미가 돋을 수밖에 없었다. 이강우가 대답을 멈췄다.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하선우가 그것을 허락이라 생각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모래시계문 안으로 들어가서 몬스터를 사냥해서 마나스톤을 얻고, 유적을 탐사해서 마법 아티팩트를 얻는다. 이런 시스템이 과연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이 인간, 무슨 제안을 하려고?’

아무래도 하선우가 이강우의 예상을 벗어나는 시나리오를 준비해온 모양이다.

때문에 여기서 이강우는 연기를 했다. 담담한 척, 무심한 척, 관심 없는 척, 그런 연기를.

지금은 호기심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이런 시스템이 당장 사라지든 말든, 제게 중요한 건 왜 당신이 내 의사도 없이 멋대로 내 목숨을 걸고 장난을 쳤는가, 그 부분입니다.”

강하게.

이번에는 이강우가 직구를 던졌다.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당신이 가진 능력, 그건 지금 이 시점에서 다른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4등급 유적을 클로즈 하는 건 당신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4등급 유적을 정복하는 건, 4등급 유적을 발판 삼아 그 위로 오르는 건 이강우 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직구를 하선우는 그대로 그냥 막았다. 몸으로 막았다. 너무 당당하게 막아서 이강우가 놀랄 정도.

‘이런 인간이었나?’

하선우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건 아니다. 이강우가 아는 정보라고 해봤자 결국 표면적인 정보, 대중에 알려진 정보에 불과하니까.

하선우와 이야기를 섞어본 경험 역시 많지 않다. 술 한 번, 그마저도 맥주 좀 마신 게 전부다. 그런 이강우가 하선우의 진면목을 안다고 말하는 건 궤변이고, 오판이다.

그래도 이강우가 본 하선우는 이런 느낌의 사내가 아니었다. 구렁이를 속에 품은 아주 잘생긴 여우, 그는 그런 느낌의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구렁이가 아니다. 곰이다. 생김새와 다르게 우직하게, 무언가가 막히면 돌아가기보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곰.

“이강우 씨, 나와 함께 시대를 잡읍시다. 조만간 정말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때문에 하선우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이강우는 콧방귀를 뀌는 대신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잠시 동안 잊어버렸다.

그런 이강우의 고민 사이로.

“만약 내 제안을 받아주신다면, 이번에는 이강우 씨에게 내 처지를 맡기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나를 부하로 쓰셔도 좋습니다. 아마 전 유용한 부하가 될 겁니다.”

하선우가 준비했던 선물을, 자신의 무례에 대한 대가를 공개했다.

* * *

이강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강우를 놀라게 한 건 두 명의 여인이었다.

한 명은 오랜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예전 모습에서 주름살 몇 개를 더 얹은 모습이지만, 이제까지 이강우가 기억하던 건강한 모습 그대로 계시는 어머니였다.

“엄마!”

이강우는 어머니의 번듯한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신분이나 처지, 주변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엄마를 찾은 미아처럼 어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깊은 포옹, 그 속에서 이강우는 솔직히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그러지 않았다. 이 벅찬 것을 그저 감정이란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고생했다, 강우가 고생했구나.”

어머니의 격려, 그 말에 이강우는 정신을 차렸다.

“고생은요. 장남이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정신을 차린 후에야 옆에서 통째로 껍질을 벗긴 배를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듯, 양손에 쥔 채 먹는 채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금발의 푸른 눈빛, 공주님다운 여린 체격을 가진 그녀는 정말 다람쥐처럼 보였다.

물론 이강우에게는 다람쥐가 아니라, 사악한 요정, 그렘린처럼 보였지만.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한편 채유리도 눈치는 있는지 모자의 감동적인 상봉 앞에서 괜한 잡음은 만들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웠다.

그런 그녀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이혜연이 상황을 설명해준 다음이었다.

“유리 언니? 자주 엄마 병문안 왔어.”

“왜?”

병문안이라니? 채유리가 왜 자신의 어머니 병문안을 온단 말인가?

이강우는 정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등장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선우로부터 4등급 유적 사냥을 하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면 이혜연은 오히려 이강우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사귀는 거 아니야?”

“사귀어? 누가?”

“오빠랑 유리 언니.”

맙소사!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아니, 오랜만에…… 거의 처음으로 엄마 병문안 오는데 여자를 데려왔고, 그 여자가 오빠 없는 동안 간간이 병문안 와서 엄마랑 말 상대 해주는데 그럼 이게 애인 사이가 아니라고?”

이강우는 얼이 빠졌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그렸다. 모래시계문이 사실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만든 침략 무기다! 그런 상상도 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공상과학보다 더 허황된 것들을 상상했었는데…… 채유리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 그럼 식이란 게…….”

이제야 한국에 도착했을 때 여동생이 꺼낸 식이란 단어의 의미가 짐작됐다.

“결혼식은 힘들더라도 약혼식 정도는 올려야지. 엄마도 유리 언니가 마음에 드는 눈치야. 조신하고, 무엇보다 예쁘잖아? 솔직히 오빠 얼굴하고 비교하면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지만.”

“내 얼굴이 어때서?”

“정말 사귀는 사이 아니야?”

말을 돌리는 여동생의 모습에 이강우는 자존심이란 놈이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존심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지금은 오해를 푸는 게 먼저니까.

“아니야.”

이강우가 단언하듯 뱉었다. 그 말에 이혜연은 놀란 표정보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이제라도 사귀어.”

“뭔 소리야?”

“아깝잖아! 오빠한테는 너무 아까운데, 유리 언니가 오빠한테 호감 있을 때 잡아야지!”

씁!

이강우는 더 이상 여동생과 대화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여동생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거 말고도 할 말은 많았으니까. 애초에 이런 대화를 나누려고 하선우와의 대화를 끝내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됐고, 지금 아파트 매물 하나 찾고 있어.”

“아파트? 갑자기 아파트는 왜…….”

“번듯한 곳에 가야지. 어머니 퇴원하시면 이제 집이 곧 병실이나 다름없는데. 좀 더 큰 곳으로. 내가 봤을 때는 60평 정도면 딱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예전 말고 요즘에 지은 곳으로. 요즘은 아파트 잘 짓더라. 기왕 가는 거 새집으로 가야지.”

“3명이 사는데 60평이라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네 명의로 자동차도 한 대 뽑아줄게.”

거듭된 이강우의 제안에 이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람이란 게 호의가 계속되면 오히려 의심이 드는 법이다.

“피,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자가용이야? 나 그동안 면허 따고 운전 안 한 지 오래돼서 운전도 못해!”

집에 차까지!

이혜연은 이강우의 이 넘치는 호의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거절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좋아하라고 사주는 게 아니라, 어머니 운전기사 노릇 하라고 사주는 거야. 이제까지처럼 택시 타고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내가 어머니 곁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나 정말 운전 못하는데…….”

“걱정 마. 뻥 뚫린 8차선 도로에서도 빌빌 가도 뒤에서 절대 빵빵 소리 울리지 못하는 차로 뽑아 줄 테니까.”

말을 하던 이강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삶을 원했었는데…….’

지금 이강우는 정말 돈이 넘친다. 로드리게스 회장이란 스폰서의 힘도 힘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이강우의 지위와 신분이면 억이 넘는 돈 정도는 그냥 아는 사람을 통해 빌릴 수 있다.

당장 작심하면, 매매가가 20억 원이 넘는 아파트에 여동생에게 억이 넘는 차를 사줄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야말로 원했던 삶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면 이런 식으로, 돈 때문에 구박받는 삶이 아니라 돈으로 부족한 모든 것을 대신 채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졸부 소리 들어도 좋으니 돈을 물 쓰듯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네.’

하지만 막상 이런 삶을 살게 되니, 뿌듯한 마음보다는 공허한 마음이 더 짙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더 이상 돈이 필요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돈 때문에 이 바닥에 들어왔는데…… 돈이 부질없이 느껴질 줄이야.

“오빠?”

잠시 사색에 잠긴 이강우를 이혜연이 깨웠다.

이강우가 정신을 차렸다.

“어쨌거나 채유리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니까 다시는 꺼내지 마. 엄마 앞에서도 괜히 이상한 오해 생기는 말은 꺼내지 말고. 그리고 조만간 집 계약하면 명의는…….”

“오빠 명의로 해야지. 또 무슨 소리 하려고?”

“아니, 엄마 명의로 해. 일단 변호사 통해서 확인해봐야겠지만, 어머니 명의로 하고.”

“왜?”

“그야…….”

내가 유적에서 죽으면 명의 이전 문제가 골치 아파질 테니까.

……라는 말.

이강우는 정말 그 말만큼은 내뱉을 수 없었다.

“효도해야지. 효도.”

그저 다른 말만 뱉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이강우는 깨달았다.

‘하선우의 제안에 내가 끌리고 있군.’

이강우는 지금 정리를 하고 있다. 언제 죽어도, 문제가 없도록, 살기 위한 방법보다는 죽은 후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끌리는 거다.

말도 안 되는 하선우의 제안, 4등급 유적 사냥이라는 시나리오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을 내뱉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저울질을 했다.

‘하선우, 놈이 내 부하가 되면 어떻게 골수까지 뽑아 먹을 수 있을까…….’

이 순간 이강우의 마음은 사실상 결정을 내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 *

“4등급 유적을 클로즈 하는 건 당신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4등급 유적을 정복하는 건, 4등급 유적을 발판 삼아 그 위로 오르는 건 이강우 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강우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건, 하선우가 자신의 무례에 대한 대가로 이강우 밑에 얼마든지 들어가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마친 이후 이강우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이강우를 고민하게 만든 건 그 말이었다.

‘클로즈는 어렵지 않다, 이건가?’

하선우는 자신 있게, 4등급 유적 클로즈 정도는 정말 당연하고, 가소로운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본인 목숨도 걸려 있으니…… 아니, 본인 목숨만이 아니야.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한국 정부가 다수의 마법사가 포함되는 4등급 유적 사냥을 허락해줄 리가 없어.’

생각해보면 하선우 역시 본인 목숨이 안 아까울 리 만무하다.

또한 정말로 죽을 위험이 높은 일이었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이강우가 이 시나리오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것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하선우에게는 최소한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이 이강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리스크가 적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있다는 의미!

‘리스크가 줄어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4등급 유적 사냥의 메리트는 확실하다. 리스크만 줄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당연히 달라진다.

때문에 이강우는 기다렸다. 하선우는 어떤 식으로든 이강우를 설득하기 위해 알아서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제시할 테니까.

어차피 아쉬운 건 하선우다.

그리고 하선우 역시 이강우를 설득할 수 있는 패를 가지고 괜히 뜸을 들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2021년 5월 5일.

-제주 문 관리센터로 오십시오.

하선우는 이강우를 제주도로 불렀다.

* * *

“문 관리센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강우를 안내하는 하선우는 묵직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 먼저 말을 툭 던졌다.

이강우는 그런 하선우의 질문에 자신의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지하에 4등급 모래시계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보여줬거든요.”

퉁명스러운 대답.

아직 하선우, 당신의 행동을 납득하지 못했다,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런 기분이 노골적으로 담긴 대답이었다.

‘그냥 엿 같아서 때려치자는 말이 입에서 나오게 해주지.’

이강우, 그는 여기서 하선우를 마지막으로 찔러 보기로 했다.

결국 오늘 혹은 근시일 내에 이강우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선우의 시나리오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시나리오를 거절하거나.

때문에 이강우는 하선우의 제안을 들어보고 동시에 그의 진심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하선우를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하선우가 이강우란 인간이 질려서, 제 입으로 더러워서 너하고 안 해! 그런 소리가 나올 때까지, 최대한 까칠하게 나설 생각이었다.

물론 화풀이이기도 하다. 이강우는 결과적으로 하선우의 행동에 대해서 제대로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어머님 소식 잘 들었습니다. 쾌차하셨다는데, 축하드립니다.”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제는 사람 뒷조사도 합니까?”

“채유리 씨가 제 차를 타고 병원을 간다기에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번부터 느끼는 건데, 죄송한 건 다 아는 거 같은데, 그런 걸 알면 하지 말아야지 왜 하는 겁니까?”

“사정이 급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군요. 그보다 채유리 씨가 병문안도 가고, 보통 사이는 아닌 모양입니다. 채유리 씨와 혹시…….”

“내가 지금 그 오해 때문에 미치는 중입니다. 채유리의 진면목을 알 리가 없는 여동생하고 어머니가 꼭 잡으라고 안달을 하는데…… 이런 오해가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아십니까?”

“저런…….”

“그러는 그쪽은 부모님한테 결혼하라는 재촉 같은 거 안 받습니까?”

“저희 집안은 가풍이 자유로워서 상관없습니다.”

“좋으시겠습니다. 남의 자유는 멋대로 다루면서 본인은 날개를 달고 다니시네요.”

“하하.”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누구는 원래 계획 전부 말아먹고, 계획에도 없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면 하지 맙시다.”

이쯤 되면 그냥 까칠한 수준이 아니라, 지랄을 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이강우가 진심에 연기력을 섞으니, 말을 뱉을 때마다 나오는 표정과 기세가 정말 듣는 이의 심기를 비트는 정도를 넘어서 뭉개버리는 수준이었다.

하선우가 흘리던 실없는 미소도 슬슬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가 입을 연 건 몇 분 더 걸은 후였다.

“문 관리센터의 존재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처음 질문과 비슷한 질문이 나왔다. 질문을 던진 하선우의 표정은 조금 애절했다. 제발 이번에는 이강우가 불만이 아니라, 이 질문을 받아줬으면…… 하는 심정.

이번에는 이강우도 질문을 받아줬다.

“그야 문에서 나오는 걸 관리하기 위해서죠. 외부 유출을 막으려는 거 아닙니까?”

후우, 하선우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뒤 말을 이어갔다.

“외부 유출을 막는다. 그럼 6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에서 얻은 모든 게 이곳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의미이겠군요.”

“그렇겠죠.”

“문 관리센터 등장 이후 이곳에서 6등급 모래시계문이 과연 몇 개나 클로즈 됐을까요? 이곳에 쌓인 마나스톤의 양과 마법 아티팩트 등 유적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은 양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이강우는 계산을 해봤다.

‘문 관리센터가 세워진 게…….’

문 관리센터가 세워진 건 2017년.

‘4년 좀 넘지?’

지금이 2021년 5월이니, 대략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문 관리센터는 운영이 된 셈.

“꽤 많겠군요.”

그동안 6등급 이상의 유적을 클로즈 한 횟수가 수백 번은 가뿐하게 넘을 테니, 그 과정에서 수집한 마나스톤의 양은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일 것이다.

“꽤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한테 보여줄 게 산더미처럼 쌓인 마나스톤입니까?”

이강우는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듯 말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산더미처럼 쌓인 마나스톤을 분석 마법으로 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긴 하네.’

어마어마한 숫자의 향연.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모래시계문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등장합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나라가 산유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곳에는 마력이란 에너지자원이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쌓여 있는 셈입니다.”

“마법 무기는 여한 없이 쓸 수 있겠군요.”

마나스톤의 가치는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마법 아티팩트를 쓸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원이라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사실상 마법사에게 마나스톤은 가치가 별로 없다. 이강우처럼 마나스톤을 먹어 치우는 능력을 가진 마법사는 없을 테니까.

‘아.’

그 순간 이강우는 자신이 조금 전 했던 생각을 부정했다.

이 세상에 마나스톤을 먹는 사람이 이강우가 유일하다? 아니다.

‘마나스톤을 먹을 수 있지…… 누구나, 조건만 맞으면.’

리볼버 크로포드!

그는 마나스톤을 먹는 방법을, 마나스톤을 먹어서 마나 서클을 자극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물론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마나스톤은 마법사에게도 유효하다.

이강우는 그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하선우는 드디어 이강우를 설득할 수 있는 회심의 패를 기세등등하게 꺼냈다.

“마법 무기…… 좋죠. 마법사가 아닌 이들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니까요. 하지만 현실에서 마법 무기가 사용되는 경우를 얼마나 봤습니까? 군대가 몬스터를 처리할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마법 무기가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마법 무기가 아니라, 마법 수술을 할 때 마나스톤이 쓰이는 경우 보셨습니까?”

이강우는 괜히 아는 척,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본 적이 없군요.”

“각 국가가 마나스톤 확보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건 단순히 마법 무기를 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이유를 위해서 모으는 겁니까?”

이강우가 장단을 맞춰주자.

“이제 제가 말씀드린 트렌드를 보여드리죠.”

하선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마나스톤이 처음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국가와 기업, 단체들은 비슷한 연구를 했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도 마나스톤의 마력을 이용해 마법 아티팩트를 쓸 수 있는 연구!

이 연구는 나름 빠르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마나스톤에서 마력을 추출하는 추출 방법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추출 과정에서 낭비되는 마력의 양이 줄어들었고, 마법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하는 기술 역시 나날이 발전해서, 이 과정에서 생기는 마력 소모 역시 줄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마법 무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들이 매년…… 아니, 매달 새로이 세상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의외로 금방 한계에 봉착했다.

일단 마나스톤이 가진 마력의 양은 정해져 있었고, 아무리 마력 추출 기술이 발전해도 없는 마력을 마나스톤으로 뽑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동시에 마법사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마나스톤과 마법 아티팩트의 가격은 떨어지질 않았다. 마법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그들이 마나스톤을 대체하는 만큼 마나스톤의 값이 떨어져야 하는데 요지부동이었다.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시장 논리가 마나스톤과 마법 아티팩트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 아티팩트에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측정됐다. 거래가 되지 않으니, 호가만 높아진 것이다. 마법 아티팩트들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 붙은 이유였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마나스톤을 마법 무기에 쓰는데 연구를 하기보다는 다른 연구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연구가 마나스톤에서 추출한 마력을 마법 무기가 아닌, 마법사에게 채워 주는 연구였다.

일명 포션 프로젝트!

처음에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지만, 벽두꺼비의 섬수가 발견되면서 포션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됐다. 이후 기생망고의 발견은 포션 프로젝트의 진행 속도를 가속시켰다.

종국에 포션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최근에 한국 정부는, 마법청은 포션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한 것이다.

4등급 모래시계문을 확보한 이후 마법청이 사냥을 택한 이유도 포션 제조 기술력을 확보한 덕분이었다. 포션이 없었다면 마법청은 모래시계문을 폐기했을 것이다.

“이 포션 하나면…….”

하선우는 이강우에게 50㎖ 용량 정도 되는 작은 병, 우유처럼 하얀 액체가 든 병을 흔들며 말했다.

“3서클 마법사의 마력이 3초 안에 가득 찹니다. 쉽게 말해서 3서클 마법사가 3서클 마법을 사용한 직후, 이걸 먹으면 마나 서클의 마력이 전부 차오르면서, 3서클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3서클 마법사가 3서클 마법을 3초 단위로 쓸 수 있는 셈이지요. 안중현 선배가 불지뢰 마법을 3초마다, 30초 안에 총 10번을 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3서클만 있는 게 아닙니다. 5서클용까지 있습니다.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이강우는 인정했다.

‘포션의 도움이라면…… 유적 사냥 난이도는 대폭 줄어든다.’

마법사의 단점은 연달아 마법을 쓰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때문에 마법사들은 자기가 가진 마나 서클보다 한두 단계 낮은 마법을 주력기로 쓴다. 자신의 마나 서클과 똑같은 수준의 마법을 쓰면 전투력 공백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포션은 그 공백기를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다. 자연스럽게 마법사 한 명이 가지는 화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포션의 도움을 받으면 당장 불놀이꾼 안중현도 4등급 유적 사냥에서 보조 역할이 아니라, 주력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채유리 같은 타입에게 포션을 먹여주면,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5등급 유적 사냥보다 4등급 유적 사냥이 더 쉬운 게 현재 트렌드입니다. 4등급 유적 사냥은 각국이 오랜 세월 제작한 포션을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들은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봤다. 하선우가 손에 쥔 것과 똑같은 크기의 병이 10평 남짓한 공간 내부, 그 내부에 마련된 선반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러나 이강우는 이게 전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포션의 효과는 무시무시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는 게 4등급 유적이다. 사실상 목숨을 장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포션이 아니다.

방어적인 것.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이강우의 질문에 하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제부터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전력을 다해 만든 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걸 본다면, 적어도 제가 이강우 씨의 목숨을 장난으로 가지고 논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 * *

이강우는 문 관리센터에 마련된 숙소에서, 자신이 오늘 보고 경험한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난 대한민국 정부가 정말 무능할 줄 알았는데…… 와우.’

국가가 가진 힘을 무시했던 적은 없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군 복무를 하면서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비리와 비효율적이고 부조리한 사건, 사고들을 체험하면서 이 나라 꼴이 참 말이 아니구나! 같은 생각을 적잖게 했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을 바꿨다.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모래시계문을 상대하기 위해, 더 나아가 모래시계문을 정복하기 위해 마련해둔 것들, 준비해둔 것들은 이강우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포션도 놀라웠지만, 아이기스 슈트는…….’

일단 포션에서 정말 놀랐다. 하선우는 이런 포션 제조기술을 가진 게 전 세계에서 8개밖에 없다고 했고 한국은 다섯 번째라고 했다. 그 말에 더더욱 놀랐다.

그 후에 하선우는 이강우에게 아이기스 슈트를 보여줬다.

5등급 몬스터인 은뱀의 가죽을 정말 어마어마한 기술력을 이용해 특수하게 가공한 아이기스 슈트는 그야말로 영화 속 혹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슈트였다.

기본적인 방어력이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총탄에는 뚫리지도 않을뿐더러, 외부에서의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심지어 아이기스 슈트는 착용자의 마나 서클 능력에 어울리는 강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부착할 수 있었다. 5서클 마법사를 위해서 3서클 혹은 4서클 강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세팅해준다. 그렇게 강화 마법을 통해 강화된 아이기스 슈트의 방어력은 하선우의 말을 빌리면…….

‘길거리에 달리는 자동차와 충돌해도 그 자리에서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 있는 수준이라고 했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열다섯 벌.’

그리고 현재 한국 정부는 아이기스 슈트를 열다섯 벌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선우는 4등급 유적 사냥을 위해 최소 스물다섯 명이 넘는 인원이 선별되겠지만, 1차 진입 인원은 최대 열다섯 명이 될 거라고 말했다. 아이기스 슈트의 숫자에 맞추기 위해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볼버의 아티팩트 룸은 애들 장난이었지.’

어마어마한 양의 마법 아티팩트!

얼마나 많은지 마법 아티팩트를 서클별로 나누는 것도 모자라, 타입별로 나눴다.

반지만 따로 모아둔 방, 목걸이만 따로 모아둔 방, 도검 형태의 아티팩트만 따로 보관하는 방!

그런 방이 총 열아홉 개였다.

심지어 2서클 이하 마법 아티팩트는 취급도 안 한단다. 전부 3서클 이상 마법 아티팩트였다.

개중 백미는…….

‘6서클 마법, 가름칼.’

6서클 마법 아티팩트였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보유한 6서클 마법 아티팩트는 총 3개, 이강우는 그중 하나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6서클 마법 가름칼, 모든 것을 갈라버리는 그 놀라운 마법이 담긴 1미터 남짓한 길이의 직도(直道)를 보는 순간 이강우는 소름이 돋았다.

하선우는 그 외에도 6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에 추가 지급된다고 말했다.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이번 유적 사냥에 6서클 마법사가 두 명 정도 참가한다는 표현.

더불어 현재 한국 마법청에 등록된 6서클 마법사는 두 명이다.

비수(匕首) 김지홍 그리고 명궁(名弓) 고재응.

아주아주 대단하신 분들로, 얼굴조차 보기 힘든 실력자들이다. 모든 행보가 대통령 수준의 보안으로 처리된다고 한다.

아니, 대통령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공식적인 자리에 쉴 새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공식적인 자리에 참가하는 건 본인이 원해도 마법청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

어쨌거나 그 둘 전부가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한다면…….

‘그야말로 드림팀이군.’

한국이란 국가가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파티를 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솔직히 이쯤 되면, 이강우의 이름값이 밀릴 지경이다. 이강우의 배경도 어마어마하지만, 지금 이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하는 멤버 중 쟁쟁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이 정도 수준이면, 사실 뚜렷한 경력이, 기껏해야 6등급 유적 사냥 경력이 전부인 이강우는 본인이 원해도 이 멤버에 포함될 수가 없다.

‘하선우가 어마어마한 로비를 했겠어.’

그런데 이강우가 이 멤버에 포함될 기회를 얻었다. 이강우 본인만 원한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하선우가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였을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고생했을 것이다. 하선우도 대단한 마법사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움직일 권력자는 아니니까.

물론 하선우가 고생한 건 이강우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선택권은 내 몫.’

이제 결정을 내릴 때다.

‘아무리 봐도 이 정도 스케일이면, 리스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줄어든다.’

가장 우려했던 리스크는 생각보다 적다. 물론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정말 안전을 꾀하기 위해 거절을 할까?

‘내 목숨은 이미 내 것이 아니지.’

안타깝게도 이게 아니더라도 이강우에게는 어느 순간이든 위기가 찾아온다.

이강우에게는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적이 있다. 좀 더 들어가면 불사황제도 이강우의 적이 될 수 있다.

‘메리트는 확실.’

어쨌거나 리스크가 줄어드는 만큼 메리트는 커졌다. 저울이 4등급 유적 사냥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되게 웃기네.’

이 순간 이강우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을 떠올렸다.

모래시계문 등장 이후의 나날들, 그 나날들 속에서 이강우는 언제나 자기 목숨을 칩 삼아서 베팅을 했고, 그런 베팅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냈다.

그런 세계다.

결국 유적 사냥에 참가하는 사냥꾼들의 베팅 칩은 그 무엇도 아닌 본인 목숨이다.

물론 목숨은 귀하다. 지금 이강우의 목숨은 정말 귀하다.

그러니까 베팅을 하면 더더욱 많은 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익.’

이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어차피 어디든 목숨을 베팅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배당을 받을 수 있는지 그걸 고민해야지.’

이강우가 결정을 내렸다.

‘남은 건 내 목숨 지분을 가진 나머지 주주들 의견이군.’

물론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 * *

로드리게스 회장은 말했다.

-4등급 유적 사냥? 절호의 기회가 왔군. 어차피 4등급 유적 사냥이라면 즈믄나래가 아니라, 한국 정부…… 그래, 마법청이었나? 마법청 아래에서 진행되는 사냥일 테니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터. 마법 관련된 기술과 역량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 강국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리스크가 적을 거야. 굳이 말하면 왕의 사냥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이강우의 유적 사냥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호기가 왔으니 잡으라고 했다. 4등급 유적 사냥에 성공한 마법사와 그렇지 않은 마법사의 차이는 절대적이라는 조언도 해줬다.

권재용 박사는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유적에서 얻은 건 전부 국가 귀속이니 몰래 훔쳐 올 순 없지만 실험은 해줄 수 있겠지. 4등급 유적 사냥을 마친 자네와의 이야기가 벌써 기대되는군. 일이 끝나고 내가 있는 유적 연구소에 올 때 메로나나 사 오게. 요즘 이게 끌려.

리볼버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신 콜먼이 리볼버의 말을 전달해줬다.

-크로포드는 하루빨리 당신이 자기 자신을 대신해주기를 원합니다. 도전하십시오. 도전을 강요받기 전에.

도전을 강요받기 전에……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마지막 대화 상대인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강희, 그는 이강우에게 즉답 대신 그와 만남을 요청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리볼버의 수제자, 정말 멋진 타이틀을 얻으셨더군요. 여기에 클로저 라이센스까지. 이번 클로저 라이센스를 얻은 이들 면면이 엄청난데, 개중 한 명이 당신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희의 말에 이강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절대로 즈믄나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제가 먼저 나서서 해달라고 한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제가 원해서 미국으로 간 게 아니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크로포드와는 이강우 씨보다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그의 성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그가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만 추구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가 하는 일에 숟가락만 얻을 생각입니다.”

“숟가락이라면…….”

“이강우 씨, 당신 주변에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를 붙이는 거지요. 크로포드는 그게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받아들일 겁니다. 블랙 스택은 그걸 막을 명분이 없고요. 애초에 우리 즈믄나래는 블랙 스택의 지부이니까요. 경쟁은 해도, 선의일 뿐이죠. 일단은요.”

여기서 이강우가 무언가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

“설마 그 마법사가 하선우인 겁니까?”

“하선우 씨가 생각보다 정말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필요하다면 고개도 숙이는 사람이지만, 그가 이번에 고개를 숙인 횟수가 그가 마법사가 된 이후 숙인 횟수를 합친 것보다 많을 겁니다.”

이강우는 여기서 하선우에 대한 정말 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내 밑으로…… 이래서 거기서 그 패를 금방 꺼낸 거군. 하긴, 내 인품에 반해서 내 밑에 들어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하선우는 이미 길드 마스터와의 대화를 통해 이강우 밑으로 들어가기로 약속되어 있다.

물론 하선우 역시 선택권은 있었다. 거절하려면 할 수 있었다. 단지 거절을 하면 이강우와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해졌기에, 길드 마스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크게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궁금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지금 당장은 무명이나 다름없는 내 밑에 들어오면서까지 이렇게 나한테 목을 매는 이유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강우에 대한 하선우의 집착은 상식을 벗어났다. 물론 애초에 상식적으로 본다면 4등급 유적 사냥에 이미 부귀영화를 누리는 양반들이 목숨 걸고 참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도 하선우는 좀 과하다.

“하선우 씨는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적어도 제가 생명의 은인이거나 그러진 않을 텐데. 설마 날 좋아하는 건 아닐 테고.”

강희는 그런 이강우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개인적인 이유라서 제가 말씀드리는 게 좀 그렇지만, 여기서 설명을 제대로 안 해드리면 하선우 씨에 대한 이강우 씨의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일단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어디 가서 제가 말했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

이강우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선우 씨의 마법사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하고 그를 즈믄나래를 대표하는 얼굴로 키운 건 바로 접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하선우 씨는 자존감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계셨죠. 그는 그다지 머리가 좋지도 않고, 예체능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업수완이 좋지도 않았으니까요.”

‘아!’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강우는 짧게 탄식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하선우가 이리도 이번 4등급 유적에 모습을 거는 이유를, 전력을 다하는 이유를,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놓은 것을 소모하면서까지 집착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강우의 표정을 본 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선우 씨는 마법사가 된 덕분에 지금의 모든 것을 이룩했습니다. 부와 명예, 인기까지. 그렇기 때문에 하선우 씨는 자신에게서 마법사의 재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모델 활동까지 하는 사람이잖습니까? 모델로 버는 수입이 마법사로 버는 수입보다 많다고 들었는데.”

“그마저도 마법사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죠. 분위기는 사람이 아니라, 직함이 만드는 법이니까요. 저만해도 그냥 길거리에 지나가면 그 누구도 절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로 자리에 참석하면 모두가 절 어려워하죠. 그런 겁니다. 사람이란 동물은.”

사람이란 동물은……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문제는 하선우 씨는 지금 자기 자리를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5서클 마법사가 말입니까?”

“마법사는 꾸준히 늘어나는 중입니다. 예전에는 마법사의 재능이 5만 명 중 1명꼴로 등장했지만, 지금 그 수치는 더 훨씬 더 내려갔고, 앞으로도 내려갈 겁니다. 새로운 마법사는 계속 발굴되고, 기존 마법사는 죽지 않고 살아남을 테니까요. 당연히 이강우 씨 같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성장하지 못한 채 자기 자리만 지켜도 퇴보가 되는 세계. 실제로 하선우 씨는 더 이상 마나 서클 개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재능이란 건 참으로 매몰찬 놈이라서, 재능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죠. 때문에 하선우 씨는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4등급 유적 사냥…….”

“4등급 유적 사냥 자체는 사실 족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굳이 말하면 경력. 이강우 씨도 문 관리센터에 숨겨진 것들을 봐서 알겠지만, 모래시계문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이 준비한 것들은 생각 이상으로 놀랍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최악의 상황에서 모래시계문을 우주로 날려 보낼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또한 마법 외적으로 강력한 무기들도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마법이 강하다고 해도, 현대 병기에 비할 바는 못 되는 법이지요.”

강희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길게 해서 그런지 입이 마른 모양. 침묵으로 여운을 만든 뒤, 그사이 침으로 입을 적신 뒤, 그 후에 말을 이어갔다.

“보다 높은 등급의 모래시계문을 닫는 걸 흔히 산을 오르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그리고 산을 정복하는 건, 산에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루트도 무엇보다 중요하죠. 똑같이 정상에 올라도 루트에 따라 그 정복자에 대한 대우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하선우 씨는 단순한 유적 사냥, 모래시계문의 클로즈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길이 남을 4등급 유적 사냥을 이룩하고 싶어 합니다.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듯 말입니다. 사실 지금 하선우 씨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그는 크로포드나 권 박사처럼 연구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석학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3등급 유적에서 무언가를 남기기엔 재능이 부족하죠.”

“대단한 꿈이군요.”

“슬픈 사실은 그 꿈마저 이강우 씨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꿈이라는 겁니다. 하선우 씨는 나름 절박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걸 결국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처지가 됐으니까요. 이강우 씨를 더 이상 자기 멋대로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전이라면 이강우 씨를 도구로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죠.”

이강우는 강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선우가 불쌍하다? 그런 마음은 없다. 하선우를 동정하기에는 그보다 못한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다. 동정이란 단어는 이런 상황을, 하선우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또한 그런 하선우를 위해 이강우가 희생할 이유는 없다. 이강우는 선인이 아니다. 하선우가 그를 필요로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하선우를 상대로 공짜 장사를 할 생각이 없다.

‘그래, 결국 내 힘이 필요한 거지. 본질은 그거야. 그럼 사람을 쓰려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강희가 이번에는 역으로 질문을 했다.

“사실 저는 이제 이강우 씨의 의중이 궁금합니다. 이강우 씨는 지금 대단한 위치에 있습니다. 아마 1년 후에, 내년 초에는 지금 저를 상대로 협박을 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배경과 힘과 경력을 앞세워서, 넘버스 계약을 무효로 만들기 위한 협박.”

이강우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즈믄나래가 제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피해를 주면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하하, 이강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즈믄나래가 이강우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강우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든든한 배경도 뒀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건 없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강우 씨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정말 리볼버를 대신해서, 블랙 스택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되는 게 당신의 목표입니까?”

이강우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내 목표는…….’

목표.

많이 있었다. 어머니를 건강하게 만들고, 최고급 아파트에서 비싼 차를 타며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사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하나다.

‘강해져야지.’

자신을 노리는 적이 있고,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힘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결국 거품처럼 무너질 터.

물론 강해지는 게 궁극의 목적은 아니다. 이강우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 자신의 목표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걸 떠올리는 순간 실소를 머금었다.

‘참 나도 병신같이 사는구나.’

짧은 푸념과 함께 조금 전 떠올린 걸 가슴에 넣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겼다. 지금은 그것을 세상에 공개할 때가 아니니까.

이 자리라면 더더욱!

이강우는 이 자리를 이익을 만들기 위해서 왔다.

“제가 원하는 건 비루했던 나날들을 단숨에 무너뜨릴 절대적인 힘입니다. 리볼버가 저를 후계자로 선정했을 때, 보다 확실하게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신하는 건 물론 그를 뛰어넘을 겁니다. 세계 최고의 마법사가 될 겁니다.”

이강우의 말에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이다운 꿈이군요.”

“만약 즈믄나래가 제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강우 씨가 팀 즈믄나래에 들어온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강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강희는 미소를 지었다.

“하선우 씨가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듣게 됐군요. 오늘 대화로 가장 기뻐할 건 그가 될 겁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 *

이강우가 자신의 사무실을 떠나는 순간 강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후 안경을 벗으며, 눈두덩이를 마사지했다. 마사지를 마친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름 순했던 눈빛이 독을 짙게 품은 뱀처럼,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강우가 그릇이군. 이미 완성도가 높아. 벌써 그 힘이 그릇 밖으로 넘칠 정도야. 최근 발전 속도를 보면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면서 그가 손을 썼군.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 성장이 가능할 리 없지. 그도 급한 모양이군. 급하다는 건…….’

그렇게 시작된 고민.

그 고민이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강희가 다시금 안경을 썼다. 그의 눈빛이 순하게 바뀌었다.

‘괴식가와 포식자가 마주치는 건 막는 게 좋겠군. 손아귀에 있는 괴물이 손 밖에 있는 변종하고 만나서 좋을 건 없을 테니.’

그가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블랙 스택과 연결되는 핫라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