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26화 (26/66)

26화. 바츠무

‘꿈이군.’

이강우는 자신이 꿈을 꾼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이 꿈의 의미를 모를 리 없으니까.

‘또다시 왔구나.’

이강우의 짐작대로 이강우의 앞에는 불사황제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섬뜩한 위엄을 품은 채로.

그러나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양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이강우가 그 무언가에 시선을 집중했다.

‘저건…….’

불사황제의 오른손에는 송곳니가 돋아난 뱀의 머리가 있었다.

‘뱀? 뱀인간?’

그러나 단순한 뱀의 머리로 보이진 않았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짐승의 머리가 아니라, 사고를 하는 두뇌를 가진 지적 생명체의 머리, 그저 감일 뿐이지만 이강우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불사황제의 왼손에는 쭈글쭈글, 주름 가득한 주머니가 있었다. 성인 남자 주먹 크기의 그 가죽 주머니는 두근두근, 쉴 새 없이 고동을 토해내고 있었다. 심장이 분명했다. 세상천지에 저런 소리와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건 심장밖에 없으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 이름을 토해냈다.

‘바츠무.’

저 머리 그리고 저 심장의 주인.

평생 본 적도 없지만, 이강우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주인의 이름마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불사황제가 다가왔다. 이미 지척이나 다름없던 둘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깝게 됐다. 불사황제가 입을 열었고, 그의 치열 전부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둘 사이는 가까웠다.

그 가까운 거리에서 불사황제는 이강우를 향해 말했다.

“바츠무,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세상의 종말을 사주하는 간악한 족속들이다.”

바츠무란 것에 대한 설명.

그 설명이 이강우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그 혼란에 빠진 이강우의 입 안으로, 불사황제는 자신이 쥐고 있던 바츠무의 심장을 집어넣었다.

강제로.

억지로.

꾸역꾸역.

이강우의 입에 들어간 바츠무의 심장을 불사황제는 더 깊숙이 넣었다. 목 안으로 넣었다.

숨이 막혔고, 온몸이 바짝바짝 메마르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갈증이 육체와 정신은 물론 영혼마저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강우는 더 이상 고민 따위를 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통과 혼란에 빠졌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불사황제는 언제나 그렇듯 섬뜩한 미소를 걸친 채 말을 남겼다.

“바츠무가 가진 그 권능이 바츠무를 먹어 치울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 역시 그럴 것이다.”

* * *

디스커버리 공원 밖에 위치한 한적한 도로변. 그 도로변에 이강우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익!

큼지막한 컨테이너를 짊어진 트럭 한 대가 이강우 앞에 멈췄다. 트럭 안에는 이강우도 이미 두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얼굴이 있었다. 레게머리 흑인 사내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흑인 사내는 이강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강우가 손을 잡았다.

둘은 짧게 악수하며.

“반갑군, 일주일 동안 잘 지냈나?”

“예.”

짧게 대화했다.

정말 너무나도 짧은 대화. 그러나 이 짧은 대화에서 흑인 사내는 무언의 이질감을 느꼈다.

‘음…… 다른 사람인가?’

흑인 사내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본 사내를, 그것도 자기 담당이었던 수험생을 잊을 정도로 둔한 기억력을 가지진 않았다.

그런데 이강우는 그때와 느낌이 달랐다. 흑인 사내가 다시금 이강우를 주시했다.

이강우가 그런 흑인 사내를 보며 말했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없어.”

흑인 사내의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흑인 사내에게 이강우가 어떤 인간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마약을 했든, 가족사에 큰 문제가 있든, 그러한 요소들은 이강우가 치르게 될 시험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되는 거다. 흑인 사내는 이강우를 시험하러 온 게 아니라, 시험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온 거니까.

“짐을 좀 확인하겠네.”

흑인 사내가 본인의 역할에 충실해졌다.

이강우는 곧장 가방을 건넸다. 가방 안에 총이나 수류탄 같은 무기는 없었다. 여러 개의 작은 병이 있었지만, 그 병 안에 든 게 폭약으로 보이진 않았다. 혹여 폭약이라고 해도 의미 있는 양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이런 검사는 9등급 유적 사냥 때도 그랬지만 무의미했다. 이 시험을 통과해서 얻을 수 있는 건 7등급 모래시계문에 홀로 도전할 수 있는 도전 자격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지옥문을 들어가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진 않는다.

흑인 사내는 이강우의 짐을 대충 검사했고, 곧바로 이강우에게 가방을 돌려줬다.

“문제없군. 그럼 시험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지. 8등급 모래시계문에 입장하는 게 시험 주제고, 시험 과제는 다음과 같다. 모래시계문에 입장한 뒤 30일을 버틸 것, 8등급 마나스톤을 1개 이상 가지고 나올 것. 또한 이 문은 이미 앞서서…….”

쉴 새 없이, 흑인 특유의 리듬 가득한 음색으로, 랩을 하듯 터져 나오는 흑인 사내의 말에 이강우가 눈빛을 보냈고, 그 눈빛을 읽은 흑인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

짧은 사과와 함께 흑인 사내가 짧은 단어를 뱉었다.

“30일 생존, 8등급 마나스톤 필요.”

이강우가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인 사내가 하지 못한 말을 마저 했다.

“실패한 문. 세 번.”

이강우 입장에서는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설명이었다.

* * *

컨테이너 문이 열리자, 이강우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지내야 할 모래시계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듯한 양문형 모래시계문은 그 모양이 정확하게 정사각형이었다. 크기는 가로, 세로 약 2미터 정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강우의 관심사는 문의 형태가 아니라, 문 위에 달린 모래시계였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반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모래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세 번 실패를 했다고?’

흑인 사내는 이 문이 순결한 문이 아닌 세 개의 파티가 클로즈에 실패한 문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강우가 모를 리 없다. 난이도가 올랐다. 또한 공포심도 더 강해졌다.

‘의외로 시험 과제가 괜찮군.’

시험을 보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이강우는 이 시험을 기획한 이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 시험 기획한 인간을 한번 보고 싶네.’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은 클로저에게 필요한 덕목을 요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시험 주제를 통해 응시자는 클로저의 궁극적인 목표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클로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문이든 닫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클로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건 당연히 최초의 문이 아니라 이미 다수가 클로즈에 실패한 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유적 사냥이 실패한 문을 고른 건 그걸 알려주기 위함이다.

‘예상은 했다.’

때문에 이강우는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지만, 이런 시험 과제가 나오리란 것 정도는 상정 범위에 두었다.

놀랄 건 없다.

오히려 이 순간 이강우를 괴롭히는 건, 시험 따위가 아니었다. 몇 시간 전 꿨던 꿈이었다.

이강우는 문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바츠무.’

불사황제 야크센, 그가 꿈속에서 바츠무에 대한 정보를 줬다. 그리고 그가 말해준 것들은 이강우를 소름 돋게 했다.

‘대체 바츠무의 정체가 뭐지?’

공포의 근원지는 무지와 미지였다. 불사황제의 권능을 이어받았을 때 그 의도가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 주어지는 힘에 만족했다. 그만큼 그가 주는 힘은 달콤했다. 굳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지만 바츠무의 권능을, 다른 무언가의 권능이 이강우의 몸에 들어오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단지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불사황제가 말한 바츠무는 적일 것이다. 불사황제의 적이며, 이제는 이강우의 적이기도 하다.

‘첩첩산중.’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 인생, 이미 자신을 중심으로 만든 정치적 알력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이제는 아직 정체도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무시무시한 놈들마저 상대할 걱정을 해야 한다.

‘빌어먹을 인생이야.’

좋은 거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뿐, 이강우는 여전히 시궁창에서 언제나 사그라질지 모르는 연탄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인생.

그러니까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왔는데 뒤를 돌아보면, 할 수 있는 건 자포자기밖에 없을 테니까.

이강우가 손을 뻗어 모래시계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때 박준영하고 같이 죽었어야 하는 운명,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이윽고 이강우가 문을 열었다.

시험이 시작됐다.

* * *

채유리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그런 채유리의 시선에 미소로만 화답했다.

이윽고 채유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이강우랑 다닐 수 있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설마 날 속이려고…….”

“공주님을 설마 속이겠습니까? 혹여 속은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제가 시킨다고 하지도 않으시겠지만.”

채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선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됐군. 다행이야.’

그때 채유리가 자리를 훌쩍 떠나기 전에 하선우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하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채유리라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날 텐데, 왜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차 좀 빌려줘.”

“예?”

예상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하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갈 곳이 있어. 기름은 넣어 줄게. 얌전히 몰게.”

그 말에 하선우는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면허가 있었어?’

하선우는 어떤 의미에서 즈믄나래 길드 소속 마법사 중 채유리를 가장 오래 알고 지냈다. 알고 지낸 시간만 따지면 이강우보다 훨씬 더 길다. 그런데 그는 채유리가 직접 운전을 한다는 사실을, 면허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어디 가실 예정이십니까?”

“병원.”

갈수록 가관이다. 차를 빌려달라는데, 목적지가 병원이란다.

“……몸이 아프십니까?”

채유리는 여전히 공주님이다. 그녀가 가진 재능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성장 중이다.

세간에서는 그녀가 올해 상반기에, 6월이 지나기 전에 6서클에 도달하리란 말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지금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 그녀가 아프다면? 하선우 입장에서는 퍽 곤란한 일이 생길 터.

“아니야, 만날 사람이 있어.”

다행히도 곤란한 일은 없었다.

“병문안이군요.”

“응.”

하선우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B라는 글자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진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차 키를 꺼내 채유리에게 건네줬다.

“기름은 넣을 필요 없습니다. 무사히만 가져오시면 됩니다.”

“기름 꽉 채워 줄게.”

채유리의 그 대답에 하선우는 실소가 나왔다.

‘맙소사.’

이번 채유리의 반응은 하선우가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놀랍기 그지없었으니까.

‘정말 많이 바뀌었군. 예전이라면 저런 말은커녕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차를 빌리는 일조차 없었을 텐데?’

채유리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정말 제멋대로인 공주님이었다면, 이제는 사랑에 빠진 공주님이 됐다.

‘다행이야. 덕분에 가장 어려우리라 생각했던 포섭을 마칠 수 있었으니.’

하선우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채유리가 호감을 가진 게 이강우라서. 덕분에 이강우를 명분으로 삼으면 채유리는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걸로 채유리는 잡았고.’

동시에 이강우를 이용해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몇 명 더 있다. 이제는 그들을 움직일 차례. 채유리가 나가자마자, 하선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에 저장된 다음 대화 상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하선우는 초록색 전화기 모양을 누르려던 것을 잠시 멈췄다. 그 상태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쓴웃음이었다.

‘이강우, 그 녀석을 움직이려고 정말 나도 별짓을 다 하는군.’

하선우는 언제나 갑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이 무언가를 해주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타인을 위해 이곳저곳 아쉬운 소리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다른 이란 다름 아닌 이강우.

‘내가 남을 위해 이렇게 고개를 숙였던 적이 있었나?’

기괴한 감정이 갑자기 하선우의 가슴 속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하선우는 이강우를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착각을 받았다.

‘설마.’

생각해보면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자연적인 변수가 아닌 인위적인 변수로 일어났다.

우연이 아닌 의도.

지금 이 모든 게 어떤 이의 의도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

‘아니야. 괜한 생각이겠지.’

거기서 하선우는 생각을 멈췄다. 지금 그런 고민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하선우는 곧바로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착신음, 그 착신음이 끝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하선우의 통화 상대는 다름 아니라…….

“안 선배님, 잘 지내셨습니까?”

안중현이었다.

-네가 먼저 연락을 할 줄이야.

안중현의 사람이었던 이강우를 하선우가 멋대로, 뒤통수를 치면서까지 데려가는 순간 그 둘 사이에는 무언의 벽이 생겼다. 당연히 그동안 그 둘은 연락도 하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선우가 안중현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특이한 건 안중현이 이런 하선우를 내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전화를 받았고, 받는 순간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안중현은 점잖게 행동했다.

-이렇게 갑자기 통보나 조짐도 없이 연락을 한다는 건, 꽤 급하면서도 중요한 일이고, 내게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의미일 터.

알고 있으니까.

하선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때문에 왜 그가 전화를 걸었는지, 안중현은 잘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원하는 바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제가 진행 중인 계획에 사람 한 명을 포섭해야 하는데, 그냥 포섭할 수가 없습니다. 안 선배께서 그 사람과 저 사이의 다리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안중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좋은 인상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자네가 나를 다리로 써야 할 정도라면…… 자네하고 굉장히 사이가 나쁜 누군가를 포섭하고 싶다는 의미일 텐데, 내 기억에는 자네하고 그만큼 앙숙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그 한 명.

하선우가 쓴웃음을 머금었고, 안중현이 그 한 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독술사 김재범, 그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뭘 준비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순간 화상 통화도 아닌 그냥 음성통화였지만, 하선우는 안중현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유지하는 게 바로 안중현이란 사내고, 안중현이 가진 가치 중 하나다.

-생각할 시간을 주게. 두 개의 기차가 서로 마주 보고 폭주를 하는데, 그 사이에 대뜸 들어가서 완충재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안중현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좋은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뚝!

통화가 끝나자마자 하선우는 정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한숨과 함께.

‘기존의 규칙을 무너뜨리려면 파격이 필요한 법이지.’

푸념이 흘러나왔다.

“젠장.”

진심 어린 푸념이었다.

* * *

‘어?’

새카만 어둠을 지나, 새로운 어둠이 이강우를 반겼을 때.

‘이거?’

이강우는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 축축한 흙내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그었다.

‘설마?’

말과 함께 이강우가 곧장 자세를 낮춘 후,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흙이 느껴졌다. 이후 손을 더듬으며 주변을 가늠했다. 그 촉진만으로 이강우는 이곳이 땅속에 만들어진 동굴이란 사실을.

‘개미굴!’

개미굴 타입의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가늠할 수 있었다.

‘운이 따르는군.’

동시에 이강우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긍정적인 의미의 소름이었다. 복권 당첨보다는 기대도 안 했던 주식이 갑자기 연일 상한가를 칠 때의 느낌.

물론 단순히 개미굴 타입의 유적이라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개미굴 타입에 유적 사냥꾼들이 선호하는 타입의 유적인 건 맞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는 아니다.

‘앞선 파티가 몇몇 굴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겠지?’

세 개의 파티가 클로즈에 실패한 유적이다. 그건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는 의미이지만, 동시에 세 개의 파티가 유적 사냥을 위해 가지고 들어온 보급품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개미굴 타입의 유적이라면, 유적 사냥 파티가 아주 초짜에 멍청이가 아닌 이상, 굴 하나를 베이스캠프로 잡았을 터. 즉, 보급품이 한곳에 모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앞선 유적 사냥 파티가 보급품을 까먹으면서 시간만 보내다가 먹을 걸 탕진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실제로 유적 사냥 파티 중에는 몬스터에 의해 죽는 경우만큼 굶어 죽는 경우도 많다.

‘먹을 게 아니라도 좋지.’

하지만 식료품을 제외하더라도 무기를 비롯해 유적 사냥에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터.

‘그래, 이래서 실패한 문을 줬군.’

여기서 이강우는 이번 시험을 기획한 기획자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을 기획한 이가 클로즈에 실패한 문을 주면, 이런 식으로 내부에서 보급이 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즉, 보급품을 현명하게 확보해서 사용하는 것도 시험 과목 중 하나다.

‘확실히 마법사들은 무기는 다뤄도, 그 외적인 재주는 대부분 총꾼에게 위임하니까.’

사실 마법사들은 로봇 조종이나, 전투 외적인 능력들…… 탐색이나 진지 확보 같은 건 잘 못한다. 힘들고, 어렵고, 전문성을 요구하는 그런 일들은 그냥 총꾼에게 맡겨 버리면 되니까. 그런 기술을 연마할 시간에 넘치는 부를 자랑하는 게 낫다는 게 대부분의 마법사들의 머릿속 심리다.

하지만 클로저라면 혼자서 그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유레카! 이런 소리를 외치면서 보급품이 있을 베이스캠프를 찾기 위해 방방 뛰는 건 미련한 짓이다.

언제나 그렇듯, 시험에는 함정이 숨어있는 법.

‘보급품이 있다고 난이도가 내려가는 건 아니지.’

분명하게 명심해야 하는 건, 세 개의 파티를 먹어 치운 괴물들이 이곳에 있다는 점이다.

보급품이 있다고 그 괴물들이 약해지는 건 아니다. 단지 좀 더 안정적인 유적 탐색 및 사냥 준비가 가능할 뿐.

특히 개미굴 타입의 유적에서 파티가 전멸하는 경우는 베이스캠프가 습격당했을 경우가 많았다. 모여 있다가 한 번에 당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지(死地).

그곳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다.

즉!

‘천천히.’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애초에 보급품 같은 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보급품은 보너스란 마음가짐으로.

‘차근차근 움직이자고.’

그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강우가 자세를 낮췄고, 숨을 죽였다. 동시에 바닥에 있는 흙을 쥐어 머리 위에 뿌렸다. 주술적인 의식이 아니었다. 이강우는 이 개미굴에서 가장 당연한 냄새를, 개미굴의 흙냄새를 몸에 뿌렸다.

‘30일 동안 한번 지내보자고.’

* * *

스으, 스으!

뱀 한 마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동굴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뱀은 보통 뱀과는 달랐다. 약 3미터 남짓한 몸길이에 주변 색을 흡수하듯, 보호색 기능을 가진 가죽을 가진 것으로 보통 뱀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보통 뱀과 가장 큰 차이점은 바닥이 아닌 천장을 기어 다닌다는 점이었다.

천장, 보통은 달라붙기도 힘든 그곳을 땅바닥처럼 기어 다니는 뱀의 모습은 기괴하고, 섬뜩했다. 이런 신비한 능력을 가진 뱀의 이름은 천장뱀, 9등급 몬스터다.

천장을 타고 움직이던 천장뱀이 어느 순간 멈췄다. 무언가에 홀린 듯, 녀석은 자신이 가는 길과 연결된 무수히 많은 굴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토굴을 향해 움직였다.

토굴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서 녀석이 멈췄다. 멈춘 상태로 혓바닥을 내밀었다. 츄츄, 뱀 특유의 혓바닥 놀리는 소리가 적막했던 토굴 안을 채웠다. 마치 노크 소리 같았다.

그때……!

츄!

천장뱀이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긴급한 반응을 보였다. 녀석이 몸을 돌렸다. 토굴 안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하는 건 물론 곧장 이곳을 떠나 먼 곳으로 도망칠 속셈이었다.

그런 녀석의 긴급한 움직임에 토굴 안에서, 입구 근처에서 숨을 죽인 채 사냥감이 토굴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리던 이강우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강우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라이트닝 다트를 던졌다. 타깃 설정이 끝난 라이트닝 다트는 천장뱀을 추적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단숨에.

파직!

천장뱀의 눈을 파고 들어갔다.

츠츠!

천장뱀이 묘한 소리를 토해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3서클 마법 공격이다. 9등급 몬스터에게는 짜릿한 수준을 넘어 섬뜩한 위력이다. 당연히 천장뱀이 바닥에 떨어졌다.

뒤집힌 채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몸을 드릴처럼 회전하며 자신의 몸뚱이를 바로 했다.

그사이, 천장뱀이 자신의 몸을 뒤집는 사이, 천장을 기어 다니던 천장뱀이 이제는 바닥을 기어 다닐 준비를 마친 사이.

휘릭!

이강우가 천장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숨에 천장뱀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으면서 천장뱀의 두개골 사이로.

푹!

마력검을 꽂았다. 마력검은 천장뱀의 두개골을 부수고 깊게 들어갔다.

하지만 천장뱀은 그것만으로 죽지 않았다. 녀석은 이강우가 자기 머리 근처에 검을 꽂는 순간 빠르게 몸을 놀렸다. 녀석의 꼬리와 몸통이 이강우를 묶을 기세로, 밧줄처럼 움직였다.

아무리 이강우가 치명적인 공격을 먹였다고 해도 천장뱀은 당장 죽지 않는다. 몬스터가 가진 생명력은 끈질긴 수준을 넘어서 혐오감이 들 정도다.

때문에 이 순간 천장뱀에게 휘감기면 몹쓸 꼴을 당한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강력한 힘을 가진 천장뱀에게 휘감기면, 30초…… 아니, 10초만으로도 뼈가 아스러질 수 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강우는 지체 없이, 천장뱀의 두개골에 마력검을 꽂아 넣는 순간 천장뱀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천장뱀의 몸에 달라붙어 로데오를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강우가 떨어져 나오자 천장뱀은 하려던 행동을 멈추고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쏘아댔다.

천장뱀의 눈빛은 두개골에 칼이 꽂힌 것치고는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했다.

섬뜩한 눈빛…… 회광반조다. 죽기 직전 발악이다. 얼마 안 남은 자신의 생명력을 눈빛으로 불태우는 셈이다.

그렇기에 위험했다. 죽기 직전인 몬스터에게 덤벼드는 건 위험하고 무의미한 짓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몬스터에게 달라붙는 사람은 없다. 확인사살, 총 같은 무기가 있으면 모를까.

이강우는 그런 천장뱀을 앞에 두고 자리를 피하진 않았다. 녀석이 자신을 향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돌진할 수도 있지만, 절대 녀석이 밖으로 나가는 걸 허용치 않을 각오로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가면 귀찮아져.’

죽으려면 여기서 죽어야 한다. 괜히 밖으로 나가면 소란만 커진다. 지금도 이미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란이 더 커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이강우의 눈빛 역시 활활 불타올랐다. 타오르는 이강우의 눈빛은 죽어가는 천장뱀의 눈빛보다 더 강렬했다. 오죽하면 천장뱀이 저도 모르게 기 싸움에서 밀릴 정도.

파르르!

짧게 몸을 떤 천장뱀의 눈에서 빛이 빠르게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눈빛 자체가 사라졌다.

죽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녀석에게 접근하기 전, 전격침 마법을 이용해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은 없었다. 그럼 이제 접근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이강우는 오히려 토굴 밖으로 나와 길목에 섰다. 길목에 선 채로 주변의 낌새를 살폈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이강우의 귀에 들리는 건,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전부였다.

‘후우!’

주변에 몬스터는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한 후에야 이강우는 천장뱀 앞에 섰다. 천장뱀의 머리통에 박힌 검을 한 번 더 깊숙이 박았다.

푸욱!

섬뜩한 소리가 났고, 거기서도 만족하지 못했는데 이강우는 칼로 천장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확실하게 끝장을 냈다. 그제야 이강우가 다음을 생각했다.

‘어떻게 처리하지?’

천장뱀.

솔직히 맛이 있는 놈은 아니다. 고기는 질기고, 딱히 별미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냥 먹을 게 없으면 먹어야 하는 놈. 또한 가진 마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박쥐뱀의 피처럼 피에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생존이 중요한 이강우에게는 귀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당연히 도축을 해야 한다. 해야 하는데…….

‘피 냄새가 문제란 말이야.’

사실 지금 이강우의 주변 환경은 도축에 그렇게 유리한 환경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정글 타입 유적에는 많은 냄새가 있다. 흙내음, 나무 냄새, 풀 냄새 등 정말 많은 냄새가 있고, 덕분에 피 냄새를 숨기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개미굴 타입 유적은 아니다. 탈취제가 없으면 냄새가 남는다. 특히 도축을 하면 필연적으로 방혈 작업, 피를 빼는 작업이 필요한데 탈취제 없이 이 작업을 하면 피 냄새가 진동한다.

몬스터에게 피 냄새는 인간에게 파이 굽는 냄새와 비슷하다. 군침을 돌게 만든다.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얼리는 거다.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도 냉동 보관하면 냄새를 줄일 수 있듯이, 냄새도 얼리면 줄어든다. 또한 보존 기간도 나름 늘어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로즌바이트 마법은 4서클 마법. 9등급 몬스터의 냄새를 죽이기 위해 버닝 마나의 페널티를 각오하면서까지 쓰기에는 조금 그렇다.

이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다른 대체재가 번뜩였다.

‘혹시?’

이강우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바츠무의 손을 쓰면?’

바츠무.

뱀의 얼굴에 송곳니를 가진 괴물.

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가 가진 권능이 뭔지 모른다. 그가 가진 권능을 마법으로 만든 ‘바츠무의 손’ 마법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 마법을 써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설명은 머릿속에 각인했다.

‘흡수.’

대상을 흡수한다고 했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피? 마력? 써본 적이 없다.

‘젠장, 이건 진짜 쓰기 싫은데.’

거부감 때문이었다.

바츠무의 정체는 모르지만, 그들이 그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는 건 안다.

또한 그들은 불사황제의 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류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존재다.

그런 자의 손을, 그런 자의 힘을 이강우가 자신의 몸을 통해 쓴다는 건…….

거북하다.

이강우는 분명 불사황제의 힘을 쓰고 있고, 괴물이나 다름없는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거북함으로부터 쉽사리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최후까지 선택을 미루었다.

하지만 그 최후는 아쉽게도 지금이었다. 이강우는 이제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 흡수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능한 바가 무엇인지 상상을 했다.

그리고 이내 실천에 옮겼다.

이강우가 주머니에서 손거울과 작은 플래시를 꺼냈다. 플래시를 입에 물고, 거울을 비췄다.

그 상태로 [마법] 항목 4번 슬롯에 위치한 버닝 마나를 제거하고, 바츠무의 손을 장착했다.

‘해보자고.’

이강우가 숨을 고른 후.

‘마법 사용.’

곧바로 바츠무의 손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곧바로 이강우의 마력이 움직였다. 세 개의 마나 서클을 채우고 있던 마력이 이강우의 오른손에 몰리기 시작했다.

‘음…….’

그 느낌이 괴상했다. 단순히 몰리는 게 아니라 피가 쏠리는 느낌, 마력이 쏠리는 느낌이었다. 잘못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길함을 유발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 상태에서, 바츠무의 손이 발동한 상황에서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냄새를 흡수해. 피 냄새만을, 천장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피 냄새를 흡수해.’

명령을 내리는 순간, 이강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통해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손바닥을 자극하는 어떠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이강우의 후각을 자극하던 천장뱀의 피 냄새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강우는 이 순간 거부감을 잊고 감탄했다.

‘아……!’

진공청소기로 쭉! 먼지를 빨아들인 느낌이다. 냄새가 정말 단숨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바츠무의 손이 가진 능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강우가 마법을 중단하자, 오른손에 몰렸던 마력이 곧바로 마나 서클로 되돌아갔다.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고, 이강우의 마나 서클에 마력이 가득 찼다.

마력 소모가 없었다.

바츠무의 손, 훌륭했다.

효과도 대단한데, 마력 소모도 없다. 공짜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셈이다.

이 놀라운 효용은 이강우가 느끼던 거북함조차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여기서 이강우는 다시 한번 바츠무의 손을 사용했다. 이번에도 냄새를 흡수했고, 이후 작심을 한 듯.

‘피.’

천장뱀의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강우가 천장뱀의 상처에 손을 가져가자, 상처를 통해 나오던 피가 바츠무의 손에 닿으며 증발하듯 흡수되기 시작했다. 흡수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천장뱀의 몸이 가진 부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수분.’

더 나아가 이강우는 천장뱀이 가진 모든 수분을 흡수하고자 했다. 바츠무의 손은 수분마저 흡수했다.

천장뱀의 몸뚱이가 사막의 미라 꼴이 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강우는 천장뱀의 목덜미 부근에 있는 마나스톤을 채취한 후에 바츠무의 손을 발동시킨 오른손 위에 마나스톤을 올려놓았다.

‘흡수.’

바츠무의 손은 마나스톤의 마력마저 흡수했다.

[9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했습니다.]

[11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했습니다.]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도 떴다.

이윽고 검은빛을 품고 있던 마나스톤이 연탄재처럼 무너졌다. 이강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네.’

이건 단순한 보조 마법 수준이 아니다.

긴박한 전투 도중에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격 마법이었다.

이제까지 이강우가 가진 모든 마법을 합쳐도, 바츠무의 손이 가진 힘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다.

‘엄청나.’

이강우가 눈빛을 빛냈다.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힘에 대해 거북함을 느낀 게 몇 분 전인데, 이 힘에 취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추잡했다.

아니, 추잡하다기보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힘에 취해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 그 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강우가 이를 물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그는 바츠무의 손을 그 어떤 마법보다 자주, 많이 쓰게 되리란 사실을. 그를 통해 그는 더더욱 괴상망측한 괴물이 되어 가리란 사실을.

‘젠장.’

그리고 그 사실에 이강우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속으로 젠장, 같은 말을 곱씹는 게 전부라는 사실을.

이강우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 * *

즈믄나래 길드 내에서 안중현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권력에 아부하거나 빌붙는 성정도 아니고, 실전에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한 안중현을 싫어하는 사람은 제법 된다.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자들도 안중현의 능력은 인정한다.

실력 좋은 마법사는 인기가 많을뿐더러, 실력 좋은 마법사와 굳이 안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없다.

그게 이유였다.

“안 선배, 정말 안 선배 얼굴 봐서 저 새끼 얼굴을 봐 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부탁 했으면 어림도 없어요.”

김재범 본인이 그렇게 싫어하는 하선우와 만난 이유.

하선우는 김재범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조롱기 가득한 미소만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조롱기 가득한 미소에 김재범은 살짝 눈살을 한 번 찌푸린 뒤.

“지금 나보고 네 얼굴에 주먹을 날려도 괜찮다, 이런 시그널을 보내는 게 맞지?”

섬뜩한 소리를 뱉었다.

하선우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뚜둑, 김재범이 가볍게 손을 풀었다. 그는 한다면 하는 사내다. 하물며 상대가 하선우라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지.”

그런 분위기를 바꾼 건 안중현이었다. 그는 화학 작용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언제 붙어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둘을 바라보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안중현은 이런 폭탄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하선우의 부탁이라고 해도 사양이다.

심지어 최근 하선우에게 안 좋은 경험까지 당한 상황 아닌가? 해주고 싶어도 해주기 싫어지는 게 지금의 심정. 그런데도 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이번 제안이…… 하선우가 진행하는 계획이 안중현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주제는 팀 즈믄나래다.”

팀 즈믄나래.

그 말에 김재범은 하선우를 바라봤다.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본인이 조롱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연예인처럼 굴더니, 속은 아주 사냥에 미친 사냥꾼이었군.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찾은 것 같아. 기특해.”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을 앞두고 현재 열다섯 명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일단 제 정보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오차가 있겠지만, 5퍼센트 내의 오차, 결과적으로 1명에서 2명 정도 많을 순 있습니다.”

하선우는 김재범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 말을 이어갔다.

“서른 명 정도를 예상했던 정부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곤란해진 상황입니다. 만약 4월이 넘어간 후에도 원하는 숫자가 모이지 않으면 모래시계문을 폐기해야 할 테니까요. 토론회를 거치면서 사냥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 그 결정을 다시 번복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죠.”

진지한 하선우의 말에 김재범도 성깔을 죽였다.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사심을 담기에는 너무 무겁고, 중요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4등급 모래시계문을 사냥하고 싶긴 한데, 평상시에는 일면식도 없고 심지어 사이도 안 좋은 인간하고 같이 들어가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잖아?”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4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 사냥은 정부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 3대 길드를 제외한 길드 중에 4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을 독자적으로 클로즈 할 수 있는 길드는 없다. 즈믄나래도 마찬가지다. 블랙 스택 본부가 움직인다면 모를까, 나름 한국 최고의 길드라고 평가받는 즈믄나래도 독자적으로 4등급 모래시계문 사냥이 불가능하다.

결국 정부 주도 하에, 마법청에 소속된 5서클 이상 마법을 한곳에 모아서 유적 사냥을 나서야 하는데 이 역시 그렇게 좋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겉으로 보면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길드를 대표하는 실력자들이 모이는데, 파티 구성원 면면만 보면 감탄이 나온다.

그러나 구색이 좋다고 실속이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각 길드를 대표하는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서로가 경쟁자다.

경쟁자와 호흡을 맞춘다?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어지간하면 그 불상사란 리스크를 감수하겠지만 4등급 유적에서 불상사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5서클 이상 마법사의 죽음…… 그 리스크는 국가적 리스크다.

굉장히 제한적이고, 보수적으로 계산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열다섯 명이 신청서를 낸 게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즈믄나래가 보다 파격적인 카드를 내민다면, 우리 정부는 받아들일 겁니다.”

이 상황.

하선우는 이런 상황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다.

팀 즈믄나래란 이름도 여기서 떠올렸다.

“채유리, 김재범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이 팀 즈믄나래란 이름으로 정부와 거래를 할 겁니다.”

현재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 중에 신청서를 낸 건 하선우뿐이다. 채유리는 그런 유적 사냥에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김재범은 하선우가 신청서를 냈다는 소식에 냈던 신청서를 도리어 취소했다. 그리고 최근 하선우도 신청서를 취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채유리와 김재범 그리고 하선우가 한 팀이 되어 신청서를 동시에 제출한다면?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 이건 교섭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거래를 받아줄까?”

“당신하고 내가 손을 잡고, 여기에 공주님이 포함되는데, 궁금해서라도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최소한 협상 테이블은 마련될 겁니다.”

“하긴.”

이 조합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단순히 5서클 마법사 세 명의 조합이 아니다.

일단 채유리, 그녀의 전투 능력은 예전부터 6서클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그녀가 2021년에 6서클에 도달하리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5서클 무렵부터 이미 6서클에 버금가는 전투 능력을 보인 그녀가 6서클이 됐을 경우의 전투 능력은…… 가늠하기 힘들다.

여기에 독술사 김재범과 바람잡이 하선우의 조합은 이 바닥에서는 꿈의 조합이라고 불린다.

김재범이 만들어낸 강력한 독을 하선우는 가장 완벽하게 다룰 수 있으니까. 김재범의 독을 쥔 하선우는 몬스터의 시선을 끄는 바람잡이가 아니다. 어떤 몬스터든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암살자다.

더군다나 실력을 떠나서 김재범과 하선우가 손을 잡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핫이슈다. 여기에 채유리까지 포함된다면, 그 세 명이 싸우는 광경이 궁금해서라도 관심도 없던 마법사들이 신청서를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섭을 해서 얻어내는 건?”

핵심은 그다음.

교섭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는 건, 교섭을 하고 싶다는 의미.

“두 명을 추가할 겁니다.”

하선우는 그 교섭 자리에서 하나가 아닌 둘을 유적 사냥에 추가할 생각이었다.

“이강우 그리고 안 선배.”

이름을 들은 김재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재범은 냉정하게 말했다.

“안 선배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4서클인 안 선배가 4등급 유적 사냥에 들어가는 건 한국 정부에서 받아줄 리가 없어. 미안하지만 4서클과 5서클은 계단 하나 차이가 아니라고.”

안중현은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안 선배의 지휘 능력은 대단하지. 안 선배가 내 리더라면 난 불만 없어. 오히려 어중간한 6서클 마법사가 나보다 마나 서클 하나 더 있답시고 내 머리 위에 있는 게 불만이지.”

“고맙군.”

안중현이 옅게 웃었다. 엎드려 절 받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은 좋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안 선배가 리더가 된다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어? 다른 이들 생각이 우리하고 같을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안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선우의 제안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잘만하면 5등급 유적 사냥을 넘어 4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가 봐도 높지 않았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0퍼센트이지만, 하선우를 따라 움직이면 가능성이 1퍼센트는 되니까, 그래서 참가했을 뿐.

“3+2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선우가 김재범의 머릿속 계산을 바꿨다.

“4+1입니다.”

“응?”

“안 선배가 플러스 원입니다.”

그 말이 김재범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그 후에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막으로.

“날 놀리는 거야?”

화를 냈다.

화가 날 법했다.

“이강우, 그 녀석이 지금 우리들하고…… 5서클 마법사하고 대등한 평가를 받는다고?”

김재범은 이강우를 봤었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하선우 사람만 아니었으면 밑에 두고 싶을 정도는 됐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김재범의 기준에서 이강우는 부하로 둘 법한 상대지, 자신과 동일 선상에 놓일 법한 상대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안중현보다 이름값이나, 경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하선우가 하는 말은 김재범을 놀리거나, 속이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등한 평가는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김재범에게 하선우에 담담히,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리볼버 크로포드가 본인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하며 자신의 수제자로 받은 사람에 대한 평가라면 우리보다 높을 테니까요.”

그 순간 김재범의 표정이 다시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반면 하선우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이강우, 6월 무렵에 그의 이름값은 어쩌면 우리보다 높을지도 모릅니다.”

재차 이강우의 가치를 강조했다.

* * *

30일하고도 3시간.

이강우가 모래시계문을 열고 등장했을 때, 그를 반긴 건 컨테이너 속 어둠이 아닌 은은한 조명이었다.

그 조명 아래 네 명의 사람들이 모래시계문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잡담도 나누고, 가져온 과자도 까먹고, 살짝 눈을 붙인 채 잠도 자고 있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그들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개중에서 하얀 가운을 걸친 레게 머리의 흑인 사내는 문 너머에서 등장하는 이강우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멀쩡하군.’

너무나도 멀쩡한 수준,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 이렇다 할 흠집이 없는 이강우의 모습.

홀로 8등급 유적 사냥에 나선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3서클 마법사. 아무리 크로포드의 제자라고 해도 고작 3서클 마법사가 혼자서 8등급 유적 사냥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리볼버답군.’

감탄을 내뱉는 흑인 사내를 향해 이강우가 다가왔다. 이강우는 주변을 둘러본 후, 흑인 사내를 바라봤다.

“수고했네. 시험은 통과야. 무사해서 다행이군.”

“여긴 어디입니까?”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일종의 문 관리센터라고 할 수 있겠지. 미 정부 소유의.”

“그렇습니까?”

말과 함께 이강우가 가방을 열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흑인 사내는 놀라지 않았다. 이번 시험의 과제 중 하나가 8등급 마나스톤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8등급 몬스터를 잡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강우는 그 증거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자.”

이강우가 가방에서 꺼낸 건 마나스톤이 아니었다.

그가 꺼낸 건…….

“유적 선물입니다. 알비노 리자드의 안심으로 만든 겁니다. 맛이 재미있을 겁니다.”

8등급 몬스터, 알비노 리자드로 만든 육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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