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닉네임
마법 아티팩트는 법적으로 국가 소유다. 그런 마법 아티팩트를 사적으로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공간, 아티팩트 룸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국가를 대표하는 마법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리볼버 크로포드는 아티팩트 룸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장소도 블랙 스택 본부가 위치한 디스커버리 공원, 그곳에 블랙 스택이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몰래 만든 비밀지하벙커를 크로포드가 자신의 아티팩트 룸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정부가 만든 비밀지하벙커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데, 그것을 세계적인 보물을 넣어두는 창고로 쓰는 건 세상천지에 크로포드 하나뿐일 것이다.
이강우는 그런 크로포드의 아티팩트 룸이 있는 비밀지하벙커를 향해 걸었다.
산책을 하듯, 디스커버리 공원의 아름다운 광경을 즐기며 처벅처벅 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아주 카메라로 도배를 했네.’
가는 길목에는 감시 및 보안 장치가 가득했다. 감시 카메라는 노골적일 정도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총을 들고, 무장을 마친 경비 요원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대단하네.’
놀라운 건, 이강우가 분명 그들이 지키고 있는 대상 중 하나인 비밀지하벙커로 가고 있는데, 그 누구도 이강우를 제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든 감시 및 보안 시스템이 이강우를 디스커버리 공원에 날아온 갈매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이강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난 얄짤 없이 블랙 스택 사람이라, 이거군.’
크로포드는 당연히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미 블랙 스택의 높으신 분들에게 전후 사정을 말해줬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크로포드라고 해도 미국 정부 소유인 아티팩트를 이강우에게 멋대로 빌려줄 수는 없다. 만약 멋대로 빌려준다면 이강우는 정말 제대로 엿을 먹는 게 될 터.
더불어 블랙 스택 간부들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크로포드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강우가 크로포드를 대신해준다면, 블랙 스택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가 아니라 새로운 유전을 발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이러다가는 조만간 미국에 강제로 이민 되겠네. 미국 강제 이민이라…… 그런 경우가 있었나?’
어쩌면 조만간 미국 정부가 이강우를 강제로 자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블랙 스택은 미국에 적을 둔 단체고, 이강우는 순수 한국인이니까. 하다못해 이강우를 이중국적자로 만들어야 미 정부와 블랙 스택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안심이 될 터.
정말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도 그냥 이 상황을 넋 놓고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이강우의 머릿속에 우스운 상상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한미 간의 외교에 문제가 생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웃기긴 하겠네. 가문의 영광인가?’
우스운 상상.
물론 현실이 되면 우습게 넘어갈 만한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강우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이내 비밀지하벙커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바닥에 설치된 투박한 문을 열자 깔끔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고, 통로에 달린 사다리를 따라 5미터 정도 내려가자 널찍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통로 끝에 은행 금고의 문을 떠올리게 하는 큼지막하고 묵직한 문과 보안 장치가 있었다.
이강우는 문 앞에 다가간 후 콜먼이 준 카드를 문 옆에 설치된 보안 장치에 댔다.
삐익!
잠금 장치가 풀리며 문이 살짝 열렸다. 이강우가 그 묵직한 문을 전신의 힘을 다해 열었다.
열면서 이강우는 기대했다.
‘아티팩트 룸.’
이야기로만 듣던 거다. 그리고 총꾼 시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는 생각은 과연 거기 있는 마법 아티팩트를 팔면 얼마가 나올까? 그런 속물적인 상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티팩트 룸을 직접 보고, 만질 수도 있는 기회가 왔다.
이강우는 이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질 광경을 상상하며 기대했고, 아주 기대했기에.
“에휴, 그럼 그렇지.”
실망했다.
‘아티팩트 룸이 아니라, 휴게실이었구먼.’
문을 열자마자 이강우를 반긴 건 몸만 쏙 빠져나온, 마치 탈피를 한 곤충이 남긴 껍질 같은 침낭이었다. 그 침낭 주변으로 과자봉지와 과자 부스러기가 너부러져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마블 코믹스 만화책과 반쯤 차 있는 콜라 캔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아티팩트 룸?
‘진짜 게을러. 이런 건 좀 치우지.’
게으른 백수 방이다.
이강우가 코웃음을 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의 광경과 다르게 내부 광경은 깔끔했다.
지하 벙커는 100평 남짓한 공간으로, 위에서 보면 동그라미가 4등분 된 형태였고, 4개의 방이 있었다. 크로포드는 4개의 방을 각각 자료실, 창고, 부엌, 아티팩트 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창고에는 콜라와 과자가 박스 단위로 있었다. 이강우는 슬쩍 창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는 좀 먹을 줄 아네.’
크로포드에게 동질감을 느낄 줄 아는 요소를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는 부엌을 봤다. 부엌은 말이 부엌이지, 실험실 혹은 연구실에 가까웠다. 그릇보다 비커 같은 실험도구가 더 많았다.
‘오!’
그중에서 이강우의 이목을 끈 건 부엌에 마련된 선반 하나를 가득 채운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병들이었다. 병 안에는 형형색색의 가루들이 들어 있었다.
‘효소구나.’
크로포드의 대발견 중 하나인 마나스톤 분해 효소들이다. 크로포드는 그 효소들을 정리해서 부엌에 놔뒀다. 그때 이강우가 가지고 온 가방에서 슬그머니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잘 됐어.’
꺼낸 가죽 주머니에는 9등급 마나스톤 10개가 들어 있었다. 이강우가 유적에서 얻어온 것. 이강우가 굽든, 삶든, 찌든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이강우만의 마나스톤이었다.
그러나 효소가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겼다.
‘진짜 무슨 맛일까?’
사실 마력 섭취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분석 마법으로 봤을 때 이 마나스톤 전부를 먹어도 섭취할 수 있는 마력 포인트는 3천 포인트에 미치지 못했다. 적은 포인트는 아니지만, 최근 만 단위의 포인트를 섭취했던 이강우에게는 메인 디시라기보다는 에피타이저 수준이었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맛이었다.
이강우가 마나스톤의 맛을 질문했을 때 크로포드는 기예르모 같은 새끼! 라는 비난만 뱉을 뿐, 어떤 맛인지는 결코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론 불꽃꼬리의 경우에는 맛있었다. 그걸 염두에 두면 생각보다 맛이 괜찮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이 좀 더 생기는 건 그래서였다.
‘여기선 메인 디시부터 즐겨야지.’
주변 감상은 여기서 끝, 이제는 이곳에 온 본론을 실행할 때.
이강우가 아티팩트 룸으로 향했다.
* * *
아티팩트 룸에는 대형마트 냉장 식품 코너에서 볼 법한 냉장고 비슷한 것들이 가득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투명하게 만든 문, 그 문 안으로 반지, 목걸이, 팔찌부터 시작해서 장갑, 도검, 광석 등 여러 타입의 아티팩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티팩트 룸에 마련된 100인치 크기, 거대한 터치스크린이었다.
아티팩트 룸에 보관된 모든 마법 아티팩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강우는 터치스크린 앞에 섰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에 익숙한 현대인답게 금방 터치스크린 내의 프로그램을 쉽게 다뤘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인터페이스는 단순하고, 직관적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현재 여기에 보관 중인 마법 아티팩트는 155개군.’
리볼버의 아티팩트 룸에 등록된 아티팩트는 총 155개.
현재 보관 중인 아티팩트는 148개였다. 7개의 아티팩트는 리볼버가 가지고 나간 모양이다.
‘3서클 45개, 4서클 19개, 5서클 5개, 6서클 1개…… 헉!’
그리고 등록된 아티팩트 중에는 6서클 마법 아티팩트도 있었다.
‘6서클?’
이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마 여기에 6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보관한다고? 진짜?’
6서클 마법 아티팩트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리볼버가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6서클 마법을 개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티팩트 룸에 보관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3등급 유적 사냥 자체가 거론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6서클 마법은 구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마법이니까.
물론 그런 사정은 솔직히 이강우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강우에게 의미가 있는 건 6서클 마법 아티팩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강우가 눈빛을 빛냈다.
‘마법 시전 영상도 있군.’
이강우가 지체 없이 6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 화질은 엄청났다. 영상에 나오는 크로포드의 귀찮음이 극에 다다른 표정은 물론 그런 크로포드의 모공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상의 시작은 크로포드가 카메라를 향해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그냥 대충 영화감독 섭외해서 CG로 만들면 안 돼? 뭐? 영화감독 몸값하고 CG 만드는 비용이 비싸다고? 그럼 난 저렴한가? 내 몸값이 CG만도 못하다, 이건가? 이게 무슨 최고 대우야?
프롤로그부터 쉴 새 없이 불만을 토로하던 크로포드. 하지만 크로포드의 표정은 드넓은 황무지, 강력한 현대병기의 위력을 가늠하던 훈련장을 보는 순간 바뀌었다.
진지하게.
동시에 영상이 여러 개로 분할됐다.
하나는 크로포드를 찍었고, 다른 하나는 크로포드의 마법 표적이 될 전차, 에이브람스 전차를 찍었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광경을 제3자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 위에서 찍었다.
이윽고 영상 속에 있는 크로포드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목걸이, 치렁치렁한 목걸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
눈에 보일 정도, 분석 마법을 쓰지 않아도, 일반인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실체화된 푸르스름한 기운이 크로포드가 손에 쥔 목걸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다.
심지어 크로포드의 두 눈에서도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대체 얼마만큼의 마력을 만들어내야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걸까?
짧은 의문이 이강우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동안.
꽈악!
영상 속 크로포드는 이를 꽉 물었다. 그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떨림에 감염된 듯, 크로포드의 주변 흙 알갱이들도 떨기 시작했다. 고작 마력을 뽑아내는데 주변의 대기가, 물체가 움직이는 수준.
가공할 만한 광경.
하지만 정말 가공할 만한 광경은 크로포드의 손이 향한 방향, 에이브람스 전차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맙소사.’
창이었다.
10미터 길이에 두께는 성인 여성의 다리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 노르스름한 색, 반투명한 느낌의 창.
하나가 아닌 일곱 개의 창이 에이브람스 전차를 포위하듯 등장했다.
‘단숨에 공간을 포위한다? 도망칠 수가 없겠네.’
그때 크로포드가 반대편 손,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콰과광!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일곱 개의 창이 전차를 관통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전차가 종잇장보다 더 가소롭게 느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곱 개의 창이 전차에 열네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로포드가 움켜쥐었던 왼손을 펴는 순간.
콰르릉!
굉음과 함께 창이 폭발했다. 전차 한 대가 단숨에 분해된 고철 덩어리가 됐다. 고철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우!
크로포드가 그 광경을 보며 개운함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촬영 끝! 추가 촬영 없음! 난 가서 잔다.
그는 개운했지만, 영상을 본 이강우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6서클 마법, 세븐 피어싱의 위력인가? 어마어마하군.’
군인 출신인 이강우가 전차의 강함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런 전차가 한순간에 폐기물이 됐다.
소름이 끼치는 위력.
그런데도 이강우가 다른 감정이 아닌 쓴웃음을 머금은 건.
‘그래도 불사황제가 보여준 그 마법에 비할 바는 못 되는군.’
불사황제, 그가 꿈속에서 보여준 마법은 이것보다 더 무지막지하고, 강하기 때문이었다.
6서클 마법이 이 정도의 위력인데, 이것보다 더 강한 마법이라면 대체 몇 서클 마법이란 말인가?
‘어마어마한 세계에 들어왔군.’
이 순간 이강우의 심장이 다시 한번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됐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을 다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루한 운명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번듯한 집, 번듯한 자가용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참으로 가소로웠던 생각이다. 마법이 가진 힘, 그건 고작 일신의 안위를 운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힘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계기가 왔다.
기쁘다.
동시에…….
‘대체 왜 이런 마법이 세상에 등장한 걸까?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 정말로?’
이강우의 마음속에 마법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 *
이강우는 아티팩트 룸에서 하루 종일 있었다. 눈이 터질 때까지 마법 아티팩트 영상을 봤다. 155개의 마법 영상을 보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영상을 보면서, 이강우의 고민도 깊어졌다.
‘뭘 골라야 하지?’
이강우는 여기에 마법을 관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티팩트를 빌리기 위해서 왔다.
물론 한 번 고른 후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번 선택이 평생의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일주일 후에 이강우가 8등급 유적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강우는 그 유적에서 자신에게 가장 쓸모 있는 마법 아티팩트를 골라야 했다.
‘장점을 극대화할까 아니면 올라운드 스타일로 갈까?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까?’
여기서 이강우의 장점에 묻힌 소소한 단점이 드러났다.
대마도사의 자질을 가진 이강우는 뭐든 할 수 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다른 마법사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걸 이강우는 그냥 타고났다.
하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너무 잘해서 곤란인 상황이 온 셈이다.
‘미치겠군. 이런 거로 고민하는 날이 오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이강우 본인도 몰랐다.
‘4서클 마법부터 고르자고.’
일단 이강우는 당장 좁힐 수 있는 선택지부터 좁혔다.
이강우는 4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하나 고를 생각이었다. 3서클 마법사인 이강우가 4서클 마법을 고르는 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길드 차원에서는 절대 대여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름 마음대로 골라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4서클 마법 아티팩트 전부를 가지고 나가서 필요할 때마다 쓰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크로포드가 아니라 블랙 에이전트와 담소를 나누게 될 것이다.
단 하나.
그 정도만이 가능할 터.
더불어 이강우는 버닝 마나를 이용해 4서클 마법을 조건부로 사용할 수 있는 처지.
‘무난하게 화염계? 아니면 그냥 방어 마법으로 안전을 꾀할까? 버프 마법으로 더 날렵하게 썰어버려? 그냥 이번 기회에 전격계 마법으로 도배를 해? 독 계열도 나쁘진 않지…….’
리볼버의 아티팩트 룸에는 이강우가 고를 수 있는 4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종류별로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고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강우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꼬르륵!
이강우의 배가 소리를 냈다. 거의 하루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악을, 시위를 한 것이다. 이강우가 제 배를 어루만지며 배를 달랬다.
거기서 이강우가 결정을 내렸다.
‘얼려 죽이면 냉동 보관 걱정은 없는 건가? 음…….’
이 세상에서 이강우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었다.
* * *
영상 속의 크로포드는 반쯤 풀린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에 위에 있는 파란색 반지를 카메라 가까이 한 번 보여준 후 입을 열었다.
-4서클 마법 프로즌바이트(Frozenbite).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동상의 강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이지. 아주 심각한 동상을 상대에게 입히는 마법이야.
이내 크로포드가 반지를 착용하고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구슬이 만들어졌다. 눈송이처럼 포근한 느낌이 드는 구슬이었다.
-이걸 눈싸움하듯 표적에 맞추면, 맞은 부위가 심각한 동상 상태에 걸리는 거야.
4서클 마법 프로즌바이트는 얼음 속성 마법 중에서 꽤 인기가 높은 마법이었다.
그 이유는 프로즌바이트가 얼음 속성 마법이 가진 장점에 굉장히 충실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살상력을 기대하고 얼음 속성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순수한 살상력은 화염계나 전격계 마법이 최고다. 혹은 다수를 처리할 때 필요한 살상력이나 효율성은 독 계열의 마법을 따라올 게 없다.
때문에 얼음 속성의 마법은 살상력보다는 마법에 적중됐을 경우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효과가 더 중요하다.
대표적인 효과는 동상이다. 동상은 출혈만큼이나 심각한 부상이다. 더불어 동상은 출혈과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단 통증이 출혈보다 적다. 출혈 같은 경우는 치명적인 상처를 동반하지만, 동상은 서서히 이루어지니까. 상처를 입은 적이 상처의 존재를 모른 채 더 큰 상처를 입는 상황은 꽤 자주 볼 수 있다.
동시에 동상은 대체로 대부분의 몬스터에게 효과적으로 먹힌다. 몬스터의 가죽, 비늘의 방어력은 일반적인 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하지만 방어력과 방한 능력은 별개다. 방어력이 뛰어난 몬스터에게 물리적인 상처를 주긴 힘들어도, 동상을 일으키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동상으로 생긴 방어력 및 운동능력의 저하로 느려지고 약해진 몬스터는 총꾼도 처치할 수 있다. 디버프 마법과 현대무기의 궁합은 매우 훌륭하다.
프로즌바이트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프로즌바이트는 굉장히 좋은 마법이지. 4서클 마법치고 마력 소모는 굉장히 적고, 사용법도 간단하고. 약간의 센스와 재주가 있으면 형태 변화도 가능하니까.
정말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
이강우가 프로즌바이트를 선택한 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정말 좋은 거 많네.’
사실 그 외에도 좋은 마법은 다수 있었다.
화염계 4서클 마법인 끈적이불꽃, 독 계열 4서클 마법인 배드 애플, 전격계 4서클 마법인 볼트 마인, 전부 각 속성 4서클 마법 중에서 선호도가 베스트 5에는 들 정도로 인기가 넘치는 마법들이다. 그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게 너무 아까울 정도.
그러나 이강우는 선택 후에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바꾸면 된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다음 마법이었다.
‘4서클 마법을 확보했으니, 이제는 방어 마법을 구해야지.’
사실 지금 이강우에게 가장 급한 건 방어 마법이다.
버프 마법, 공격 마법, 방어 마법.
어지간한 마법사들, 특히 5서클 이상 되는 마법사들은 이 세 가지 종류의 마법을 1개 이상 보유한다.
방어 마법은 정말 중요하다. 게임으로 따지면 목숨 개수와 같다. 하물며 이강우처럼 필요에 따라 몬스터에 달라붙는 전투, 근접전을 치러야 하는 마법사들은 더더욱 방어 마법이 중요하다.
‘타입은…….’
이런 방어 마법도 세 가지 타입이 있다.
가장 선호도가 높은 건 배리어 타입이다. 마법사들 중에 근접해서 싸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전방위 방어가 가능하고, 마법 사용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 배리어 타입은 베스트다.
두 번째는 실드 타입. 방어막이 아니라, 한 방향에서 오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타입이다.
세 번째는 강화 타입이다. 마법의 힘을 빌려 육체 또는 착용한 장비의 방어능력을 향상하는 타입으로, 버프 타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방어막이 가장 유용하지만, 마력 소모가 너무 커. 실드 계열은 내 전투스타일하고 궁합이 안 맞고. 남은 건 강화 계열뿐이군…….’
결과적으로 이강우는 2서클 마법인 스킨 아머를 구했다. 이 역시 유용한 마법이다. 적은 마력을 소모하고, 마력 대비 효과가 우수하며, 결정적으로 아무리 재능 없는 마법사도 그냥 아티팩트에 마력만 주입하면 마법이 발동될 만큼 사용이 쉬운 마법이다.
긴박한 순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강우는 여기서 마법 세팅을 끝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음 시험까지 시간은 제법 남아있다.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 놀고먹기에는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공부에만 집중하면 정말 하루가 1년처럼 느껴지는 법.
여기에 이 비밀지하벙커에는 먹을 것도 충분했다. 과자와 음료가 박스째로 쌓여 있다. 삼시 세끼를 초콜릿만으로도 채울 수 있는 이강우에게는 만찬이나 다름없는 환경이다.
‘여기 등록된 155개 마법 전부를 확인해야지.’
이강우가 작심을 했다.
그리고 그 작심이 이강우에게 놀라운 기회를 만들어줬다.
* * *
크로포드의 아티팩트 룸에는 총 155개의 마법 아티팩트가 보관되어 있다. 이 중 6개를 크로포드가 가지고 나갔다. 당연히 149개의 마법 아티팩트가 남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잘못 센 거 아니지?’
아티팩트 룸에는 총 150개의 아티팩트가 있었다. 등록되지 않은 하나가 있다는 의미.
이강우는 자세한 조사 끝에 그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돌?’
냉장고 같은 보관함, 그 안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조약돌 비슷한 게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 아티팩트라고 생각했는데, 이강우가 눈알이 빠지도록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돌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이강우가 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기에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꿀꺽!
이강우가 침을 삼켰다.
‘군침이 도네…….’
이강우의 군침을 이끌어내는 건 제법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군침이 난다는 건…….
‘분석!’
지체 없이 분석 마법을 쓴 이강우, 그 순간 이강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일십백천만…… 맙소사.’
[253,322].
‘25만 포인트?’
아득하다.
이제까지 이강우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많은 양……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포인트였다. 멜트 드래곤의 용옥만 하더라도 5만 5천 포인트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25만 포인트?
‘4등급 몬스터 마나스톤인가?’
4등급 몬스터의 마나스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수치다.
‘그런데 색이 왜 파란색이지?’
하지만 이강우가 알기로 마나스톤은 보다 많은 마력을 품을수록 하얗게 된다고 들었다. 푸른색의 마나스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강우가 직접 본 적이 없으니 확신을 가질 순 없지만…… 그래도 이강우가 보기에 마나스톤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강우가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돌멩이를 만졌다. 그러자 돌멩이에 파문이 생겼다.
‘수은 같군.’
느낌이 수은과 비슷했다.
그러나 비슷한 것일 뿐, 돌멩이는 계속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젤리처럼.
‘……대체 뭐지?’
적어도 이강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이강우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럼 다른 생각을 하는 수밖에.
‘25만 포인트라…… 이거 먹으면 과연 4서클이 몇 퍼센트까지 개발될까?’
딴생각, 주관적인 생각을 시작한 이강우의 눈에 욕심이 깃들었다.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긴 하다. 25만 포인트면 마나 서클 개발도 개발이지만, 강력한 마법을 습득할 수 있다.
물론 그 욕심에 넘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내 깜냥으로 먹을 순 없지.’
보통 물건이 아닐 테니까. 크로포드가 마법 아티팩트와 같이 보관한다는 건, 이게 가지는 가치가 마법 아티팩트에 버금간다는 의미다. 아니, 25만 포인트의 마력 덩어리라면 어지간한 마법 아티팩트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할 터.
이걸 이강우가 날름 먹는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다 보니, 머릿속으로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건 자유 아닌가?
‘잠깐, 골드북 구매 가능한 10만 포인트까지 얼마나 남았지?’
전부는 먹기 힘들더라도 일부를 먹을 수 있다면? 일부를 먹고 10만 포인트를 모아서 골드북을 구매한다면? 실버북에서 나온 마법은 충분히 비싼 포인트를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 골드북도 다르진 않을 터.
더군다나 이강우가 강해지는 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크로포드, 그가 원하는 일 아닌가? 이강우가 좀 강해지려고 냠냠, 먹겠다는데 크로포드라면 허락해 주지 않을까?
심지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조만간 마주칠 일도 없는데…….’
크로포드는 휴가가 끝나자마자 4등급 유적 사냥에 나서고, 이강우는 8등급 유적 사냥에 나선다. 일반적인 유적 사냥이 아니다. 4등급 유적은 7서클 마법사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위험한 세계다. 이강우의 경우에는 혼자 유적을 사냥해야 한다.
그 둘이 사냥 도중에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정말 섬뜩한 소리지만, 둘 중 하나가 죽는다면 이강우가 이걸 먹는다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은 하나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날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이강우가 입맛을 다셨다.
‘일단…… 일단 상황을 보자. 당장 먹든, 시험을 치르기 전에 먹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 * *
이강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정장을 곱게 입은 채 머리 위에 마나 서클 3개가 반짝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젠장, 시험 하루 앞두고 이게 뭐야?’
8등급 유적 입장 시험 하루 전.
이강우는 최대한 컨디션 조절과 8등급 유적에 대한 정보 수집 및 공부,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최고의 전야(前夜)를 보낼 생각이었다. 더불어 초콜릿도 마음껏, 질리도록, 당분간 초콜릿 생각은 절대 나지 않도록 실컷 먹을 준비도 해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약속이 잡혔다.
콜먼, 그가 다짜고짜 이강우를 부르더니, 이강우에게 정장을 주며 말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하니, 제대로 차려입도록.”
그가 말한 중요한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블랙 스택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드리게스였다.
블랙 스택 창립 이전부터 유명한 사람이었다. 세계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석유화학기업의 창립자를 조부로 둔 그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에 이어서 어마어마한 부를 상속받았고, 동시에 상속자가 되기 전부터 여러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행동이란 좋은 것보단 안 좋은 것들이었다.
연예인과의 열애설, 개중에는 불륜 사건도 하나 있었다. 유부녀를 건든 것이다. 이 외에 술 먹고 추태를 부리거나, 돈을 물 쓰듯 쓰는 걸 SNS에 광고하듯 올리면서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거나, 취한 채 사고를 치거나, 음주운전 사건 등…… 그런 그가 블랙 스택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드디어 가산을 탕진하기 위한 베팅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블랙 스택은 대박을 쳤다. 블랙 스택은 단순히 돈을 버는 기업이 아니라 전 세계, 정·재계 인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권력 집단이 됐다.
로드리게스 회장 역시 포브스가 영향력 있는 사람 순위 같은 걸 발표할 때 언제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 됐다.
그런 그를 만나러 가는 자리.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
이강우는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았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다.
‘내 목에 어떤 식으로 목줄을 채우려나?’
의도가 뻔했으니까.
이강우를 제대로 잡기 위해, 블랙 스택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로드리게스 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당연히 이번 만남을 통해서 이강우의 목에 제대로 된 목줄이, 이강우 혼자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목줄이 채워질 것이다.
목줄을 거부한다? 이강우가 사지육신 멀쩡하게 사는 걸 포기하면 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상 이강우의 선택지는 정해졌다. 주는 목줄을 아주 예쁘게 목에 찰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일을 기껍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후우.”
이강우는 정장 셔츠가 벌써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 갑갑함에 이강우가 거울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강우,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총꾼일 때도 어차피 인간 대접 못 받았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잖아?’
* * *
알버트 로드리게스는 로드리게스란 성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는 건강하기 그지없는 옅은 구릿빛 피부의 소유자였다. 또한 2021년을 기점으로 이제 50세, 반백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그의 외관상 나이는…… 아부를 곁들이면 30대 중반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젊은 외모였다. 체격은 더더욱 젊었다. 190센티미터 신장을 가진 그는 미식축구 선수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건장했다.
때문에 그의 외모에서, 전 세계 10대 대부호, 세계 석유산업을 움직이는 권력자, 블랙 스택의 창립자라는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까지가 이강우가 로드리게스 회장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자네가 강우인가?”
“예, 이강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알버트 로드리게스, 친한 사람들은 날 R로드라고 부르고 있지.”
이후 로드리게스 회장에 대한 이강우의 감상은 그가 굉장히 적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마어마하군. 편집증 수준이야.’
로드리게스 회장이 데리고 온 보디가드 인원이 누가 보더라도 과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우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직원보다 많아 보이는 로드리게스 회장의 보디가드 숫자에 혀를 내둘렀다.
‘저 사람은 마법사, 저 사람은…… 블랙 에이전트군.’
개중에는 마법사도 있었고, 블랙 에이전트도 있었다. 보디가드 면면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셈.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기가 개인적인 이유로 로드리게스 회장이 만든 레스토랑이었지?’
지금 있는 이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은 로드리게스 회장이 만든 식당으로, 만든 이유가 특별하다.
표면상으로는 시애틀에 자신을 만나러 오는 귀인을 대접할 만한 장소가 없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도는 소문에 따르면 손님이 오든 말든 밖에서 식사를 할 땐 이곳에서만 한다고 한다. 다른 곳은 믿을 수 없다는 의미.
여기에 통역사 대신 당연하다는 듯이 마법사를 동원해 통역 마법으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건…… 아마도 단순히 통역만을 위해서 마법사를 대동한 건 아닐 것이다. 통역을 명분 삼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마법사를 데리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거지?’
세계를 대표하는 권력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가 무엇이 두려워 이런 만반의 준비를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그런 그의 준비 덕분에 이강우는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이강우의 심기가 편할 리 만무했으니까.
‘숨이 막히는군.’
이강우는 레스토랑에 들어오기 전 넥타이를 살짝 풀어 놓은 자신의 선택에 박수를 보냈다.
그렇다고 이강우는 마냥 기죽은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태연하게, 담담하게.’
대범하게 행동할 수 없다면, 대범한 척 연기를 하면 된다.
이강우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고, 효과는 좋았다. 로드리게스 회장과 악수마저 마친 이강우는 실수 없이, 흐트러짐 없이 착석했다.
곧장 이야기가 시작됐다.
“리볼버가 자네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예.”
“리볼버가 이제까지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마법사를 키우고 싶다는 말은 쉴 새 없이 했지. 실제로 몇몇 마법사들을 데려다가 자기 후계자라고 공언하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하지만 개중에서 자기보다 낫다는 설명을 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지. 크로포드는 게으르지만, 보는 눈은 확실하지. 아닌 건 아닌 거고, 맞는 건 맞는 거지. 그런 그가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면 그건 사실인 거지.”
로드리게스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강우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8서클 재능. 나는 정말 자네의 재능이 탐이 나네.”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이강우는 피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네.”
드디어 시작이다.
이강우는 여기서 괜히 모르는 척, 그런 연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할 이유가 없다.
“짐작하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럼 대화가 쉽겠군. 서로 각자 원하는 걸 말하자고. 내가 원하는 건 나에 대한 직접적인 충성일세.”
충성.
애매한 표현이다.
“어느 정도의 충성을 원하십니까?”
“좀 과격한 예를 들자면, 내가 특정인을 죽이라고 말하면, 죽여 줄 수 있을 정도의 충성.”
어마어마한 수준의 충성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에게 충성을 하는 데 목숨을 걸라는 거다.
“……조금 위험한 이야기 같습니다.”
“이 정도 이야기가 아니라면 자네와 굳이 개인적인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겠지. 블랙 스택을 통해서 명령을 내리면 되는 거니까.”
“여기서 제가 충성을 바친다고 말하면 잠재적 살인자가 되는 셈인데, 그러면 충성을 바치는 것치고는 리스크가 크군요.”
“모든 일은 리스크를 동반하네.”
“그만큼 메리트도 크겠고요.”
메리트란 표현에 로드리게스 회장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강우도 옅게 웃었다.
‘똑같은 목줄을 차도 가난한 집 개는 개밥을 먹고, 부잣집 개는 사료를 먹고, 대부호 집 개는 스테이크를 먹는 법이지.’
목줄을 차게 될 걸 각오했다. 작정했다. 거부할 생각도 없다. 단지 여기에 좀 더, 목줄에 보석 몇 개 정도, 목줄 자체도 금으로 만들어준다면 목걸이 차듯 기꺼운 마음에 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원하는 게 있나?”
“많습니다. 저 욕심이 많거든요. 돈도 가지고 싶고, 권력도 가지고 싶고, 명예도 가지고 싶습니다.”
“돈이라…… 어느 정도의 돈을 원하는가?”
“마음 내킬 때 전세기를 타고 이동한 뒤, 지중해에 정박한 큼지막한 요트에서 일광욕을 하는 수준이라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그거 생각보다 별로인데…… 어쨌거나 그게 목적이라면 돈을 좀 많이 벌어야겠군.”
“제가 6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굳이 그럴 돈을 벌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공유라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요.”
“현명한 방법이지.”
로드리게스 회장이 계속 추임새를 넣었다. 그 추임새 속에서 이강우는 그의 낌새를 느꼈다. 더 이상 이리저리 말을 돌려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최단 시간 내에 블랙 스택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강우가 본론을 말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원하는 건?”
“지금 제가 뭘 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시험을 치르는 중이지.”
클로저 라이센스, 그 표현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세상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시험이니까.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파티를 만들 겁니다. 그 파티에 대한 전폭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클로저 라이센스를 가지고 파티를 만들고 활동하는데 전폭적인 협조를 요청한다?
속이 뻔한 소리다.
“사냥에서 얻은 수확물을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먹어 치우고 싶다, 이 말인가?”
“예.”
길드나 정부에 마나스톤과 마법 아티팩트를, 수수료 같은 건 물지 않고 전부 먹어 치우겠다는 의미.
“욕심이 많군.”
“제가 좀 욕심이 많습니다. 식사도 과식을 넘어 폭식을 즐기는 편이죠.”
“그렇게 폭식을 하다 보면 탈이 날 수도 있는데?”
“소화하지 못하면 죽는 거고, 소화하면 소화한 게 제 뼈와 살과 마력이 되겠지요.”
로드리게스 회장은 지그시, 이강우를 바라봤다. 이강우는 그런 로드리게스 회장의 시선에 방긋, 미소로 화답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음, 예상과는 다른 녀석이군.’
그는 여러모로 놀랐다.
이강우의 전력을 봤을 때 그는 영웅보다는 소시민에 가까웠다.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웅적인 무언가를 이제까지 보여줬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마법사 재능이 늘그막에 꽃을 피운 케이스, 마법사란 지위를 가진 소시민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아니다.
맹수, 그것도 먹이사슬 끄트머리에서 보이는 모든 걸 족족 먹어 치우려고 덤벼드는 포식자.
‘대단해.’
로드리게스 회장은 많은 마법사를 봤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솔직히 가진 마나 서클의 개수를 제외하면 대단할 게 없는 놈들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면 졸부 같은 자들이었다. 갑자기 생긴 힘에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을 넘어 과한 추태를 부리는 경우.
하지만 개중에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이런 힘이 생기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듯이 받아들이는 부류가 있었다.
맹수로 태어났으나, 그동안 힘을 얻지 못해 사람처럼 살았던 부류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보기에 이강우는 그런 부류였다.
‘리볼버와는 다르군.’
더불어 이강우는 또 다른 맹수인 리볼버 크로포드와는 조금 다른 성격의 맹수였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하고, 그마저도 귀찮아하는 리볼버와는 전혀 다른 성정.
쉽게 말해서 먹을 생각이 없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일단 먹잇감이 있으면 목덜미를 물어 뜯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이다. 혹은 언제나 배가 고픈 부류.
‘그래, 이래야지.’
로드리게스 회장이 기다리던 성정이었다.
욕심이 없는 인간은 어떤 수를 써도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인간은…… 다룰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자네 닉네임은 포식자가 좋겠어.”
“예?”
“블랙 스택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 닉네임이 필요한 법이니까. 포식자……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닉네임이 될 것 같군.”
이강우가 그 별명에 무어라 태클을 걸려는 순간, 로드리게스 회장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색 카드였다.
“이제부터 자네는 모든 걸 이 카드로 구매해야 하네. 자네는 어디서든 자네의 흔적을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남겨야 해.”
목줄.
“한도는 무제한.”
아니, 목걸이다.
아주 훌륭한 목걸이.
“분명히 말하지만, 이걸 받는 순간 자네는 내 개가 되는 거야. 조금 격한 표현이지만, 내 사냥개가 되는 걸세.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내가 지목하는 상대가 있으면 물어뜯어야 해. 그럴 수 있나?”
“여기 와서 제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언젠가 제가 물어뜯길 것 아닙니까?”
로드리게스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이강우에게 검은 카드를 건네줬고, 이강우가 카드를 받았다.
카드를 받는 순간 이강우는 카드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로드리게스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행동, 무슨 의미일까?
로드리게스 회장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고, 이강우는 그런 로드리게스 회장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거래가 제대로 끝난 것 같지 않아서 이걸 받기는 좀 그렇습니다.”
“음?”
거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강우의 그 말에 로드리게스 회장의 입꼬리 한쪽이 내려갔다. 그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나오는 신호였다.
이강우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다. 하지만 이강우는 분명 로드리게스 회장의 낌새를, 심기가 조금씩 뒤틀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강우는 분명하게 말했다.
‘이 자리, 나한테 유리하다.’
확신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무언가를 더 얻어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만약 회장님이 누군가에 대한 암살 명령을 내릴 경우, 그 명령을 두말할 것 없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충성, 그 정도의 충성을 원한다고 하셨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만약 제가 회장님의 명령을 수행하면, 저는 무엇을 얻게 됩니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충성심을 증명할 경우, 제게 보상으로 무엇을 더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로드리게스 회장의 내려갔던 입꼬리가 반대로 올라갔다.
“자네,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군.”
식사는 짧은 대화가 더 이어진 후 시작됐다.
* * *
“수고했어.”
짧은 인사와 함께 강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는 자신의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쓰다듬으며, 그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리볼버가 이강우를 자기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보면 전화위복이었군. 이강우의 진가를 알아내는 데 더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진가를 더 이상 확인할 필요도 없어. 확신이 생겼어.’
강희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포식자. 이강우, 녀석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 붙었군.”
섬뜩하기 그지없는 미소, 인간답지 않은 미소였다.
* * *
로드리게스 회장과의 식사가 끝나고, 이강우는 곧바로 지하 벙커로 돌아왔다. 지하 벙커로 돌아온 이강우는 입고 있던 정장을 벗으며 숨을 골랐다.
그렇게 정장 상의를 벗은 이강우는 정장 안 주머니에 넣어둔 검은 카드를 꺼냈다. 검은 카드를 바라보자, 이제까지 머릿속 한구석에 꽉꽉 눌러두고 있었던 조금 전의 기억들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내가 잘한 거 맞나?’
질렀다.
이강우는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감한 베팅을 했다. 배짱과 협박, 그 절묘한 사이를 오고 갔다.
그렇게 한 베팅의 결과는…….
‘조건은 나쁘지 않아.’
썩 괜찮았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개인적인 협조 외에 블랙 스택 및 자신의 인맥을 통한 협조를 약속했다.
결정적으로 이강우를 위한 아티팩트 룸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이강우가 5서클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파격 조건이었다.
여러모로 소득은 컸다.
‘예상과는 분명 달랐지.’
하지만 그렇게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자신에게 목줄을 채우려고 하는 건 예상했지만, 그는 블랙 스택 명찰이 박힌 목줄이 아니라, 로드리게스 회장이란 명찰이 박힌 목줄을 이강우에게 채우려고 했다. 예상외의 일이었다.
‘블랙 스택이 로드리게스 회장 개인의 사유물도 아니고,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증거겠지.’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랙 스택에 대한 로드리게스 회장의 장악력이 세간에 알려진 만큼 대단치 않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블랙 스택은 물론 자신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바칠 마법사를 원하고 있다는 게 명백한 이유다.
사실 그래서 이강우가 과감하게 배짱을 부렸다. 로드리게스 회장은 어떻게든 좀 더 강한 패를 쥐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럼 자연스럽게 이강우의 몸값이 오르게 될 테니까.
‘아니, 그 인간은 무슨 사람을 죽이는 걸 예시로 들고 지랄이야?’
그렇다고 해도 충성의 조건으로 암살을 운운한 건 정말 섬뜩했다. 그때 소름이 돋으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더군다나 이강우는 그게 과장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로드리게스는 누군가의 암살을, 마법을 이용한 살인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젠장, 배짱은 부렸다만…… 주제에도 없는 히트맨이 되게 생겼네.’
“어휴.”
이강우가 재차 한숨을 내뱉었다.
이 모든 상황, 마음에 든다면 거짓말일 터. 결국 본질은 이강우의 목에 로드리게스 회장이 갑의 위치에서 목줄을 채운 거다. 거부할 수 없는 목줄이라면, 차라리 언제나 잡아먹힐 각오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잡아먹히기 전에 발악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이 목줄은 로드리게스 회장과의 거리이기도 하다. 로드리게스 회장이 이 목줄을 쥐고 있는 이상, 이강우 역시 언제든 역으로 로드리게스를 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셈.
‘이제 평범한 인생은 끝이군.’
평범한 인생.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이미 이강우는…… 아니, 세상은 모래시계문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평범함은 벗어 던졌다. 모래시계문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오고, 그걸 돈이 되고,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마법사를 앞세워서 사냥을 하는 세상이 무슨 평범한 세상인가?
심지어 이강우는 만났다. 불사황제 야크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물의 후계자가 됐다. 모래시계문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을,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됐다. 그런 그가 평범한 인생을 운운하는 건 개소리다.
그래 그거다.
이미 이강우의 인생은 예전부터 평범한 인생의 기준에서 벗어났다. 그런 그가 평범한 생각, 이치에 부합되는 생각, 평범한 도덕과 가치에 얽매일 이유는 없다.
이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아티팩트 룸을 바라봤다. 그런 이강우의 눈에는 약간의 불안감과 강렬한 탐욕 그리고 그 근간을 알 수 없는 괴물의 기운이 혼재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겁에 질릴 필요는 없지.’
이강우가 움직였다.
* * *
[10만 포인트로 골드북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섭취 마력 포인트가 감소합니다.]
[골드북이 개방됩니다.]
[‘바츠무의 손’ 마법을 획득하셨습니다.]
[바츠무의 손]
-1서클 마법.
-바츠무의 손은 닿은 대상을 흡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