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포식
모래시계문을 여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다. 그 어둠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무저갱, 저 어둠 너머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상상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고는 한다.
하지만 모래시계문 너머로, 유적으로 들어간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모래시계문을 넘을 때마다, 지독한 어둠이 자신들을 감쌀 때마다, 공포감과 절망감보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때문에 유적 사냥꾼들은 모래시계문의 어둠이 방문객을 반겨준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경험자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표현이다. 모래시계문 너머의 어둠은 방문자를 거절하고자 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 포근하게, 마치 잘 왔다는 듯이, 당신의 유적 방문을 환영한다는 듯이, 앞으로 경험할 모든 것을 즐기라는 듯이, 어둠은 방문자를 포근하게, 편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그 포근함과 편안함을 즐기는 이는 없다. 유적 안에 뭐가 있는지 아는 이들은 그런 포근함을 즐길 기색도 없다. 자신이 마주하게 될 유적이 어떤 유적일지, 그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찬 머릿속은 다른 무언가를 감상할 여유 따윈 주지 않는다.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강우가 모래시계문의 어둠으로부터 포근함을 느낀 적은 그가 기억하기로는 딱 한 번에 불과했다. 그 한 번이란 다름 아니라 최초로 모래시계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이강우는 곧장 자신이 느끼는 느낌 하나하나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 느낌을 받았다.
‘섬뜩하군.’
거의 5년 만에 느끼는 이 포근함에 이강우는 추억에 젖기보다는 소름을 느꼈다.
‘파리지옥에 달라붙는 파리가 된 느낌이야.’
이윽고 어둠이 사라졌다. 사라진 어둠을 대신한 건 환한 빛이었다. 빛을 본 이강우는 자신의 주변 광경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정글!’
이번 유적은 정글 타입의 유적이었다.
‘오케이!’
이강우는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숨을 죽였지만, 기쁜 기색은 역력했다.
베스트였으니까.
‘첫 끗발이 나쁘지 않아.’
유적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 개중에서 대체로 미로 타입과 정글 타입의 유적을 난이도가 높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보급품의 운반 및 보관, 베이스 캠프 확보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미굴 타입의 유적은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유적 사냥꾼이라면 모두가 숙지하는 기본 상식.
하지만 지금 이강우에게는 통하지 않는 상식이었다.
이강우는 보급품의 운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가 가진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다. 당연히 보급품을 안전히 보관하고, 수시로 보급을 이룰 수 있는 베이스캠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그렇게 봤을 때 이강우에게 가장 유리한 유적은 정글 타입이다. 일단 정글 타입 유적에는 빛이 있다. 자가발전 손전등을 켜기 위해 힘들게 발전장치를 손으로 돌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먹을 게 있다. 미로 타입이나, 개미굴 타입은 식물이 없다.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다. 이끼도 찾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정글 타입은 정말 먹을 게 많다. 뭣하면 나무껍질이라도 먹을 수 있다. 그게 생존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
이강우는 자신의 지척에 있는 나무를,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소나무처럼 갑옷 같은 거친 껍질을 가지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강우의 눈빛이 빛났다.
‘백즙나무잖아?’
백즙나무.
8등급 이하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나무로, 나무에 상처를 내서 하얀색 수액을 얻을 수 있다. 수액은 마치 우유와 질감과 식감이 비슷하다. 하지만 맛은 우유처럼 부드럽지 않다. 굉장히 쓰다. 벌칙 게임할 때 써도 욕을 먹을 정도로 쓰다.
하지만 먹어도 탈이 없다. 그게 중요하다. 식수 대용으로 쓸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때문에 유적 사냥꾼들 사이에서 백즙나무는 목숨을 구해주는 구명나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안타깝게도 7등급 이상의 유적에서 백즙나무가 발견됐다는 기록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유적 사냥은 좀 더 쉬워졌을 것이다.
‘저기도 있네?’
그런 백즙나무가 제법 있었다. 이미 두 그루를 발견했다. 이강우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백즙나무 한 그루에서 채취할 수 있는 수액의 양이 500㎖ 정도.’
두 그루의 백즙나무면 적정량의 수분섭취는 가능하다. 특히 소변 정수기를 가져오지 못한 만큼, 백즙나무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쓴맛은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문제 삼으려면, 그냥 안 마시고 갈증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음미하며 말라 뒈지면 된다.
‘시작이 좋아.’
하지만 이강우는 그렇다고 해서 당장 수액을 얻기 위해 백즙나무에 달라붙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강우는 눈동자만 움직였고, 주변에 아무런 낌새가 없다는 걸 파악하는 순간 바닥에 앉았다.
바닥에 앉은 후 주변 흙을 손에 쥔 채 자기 머리 위에 뿌리고, 온몸에 흙을 묻히기 시작했다. 온몸이 삽시간에 흙투성이가 됐다. 이강우의 몸에서 흙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위장의 기본이다.
유적 사냥을 언급할 때 가장 필수품으로 꼽는 몇 가지가 있다. 소변을 식수로 바꿔주는 소변 정수기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하나 더, 탈취제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 탈취제 역시 필수품이다. 아니, 탈취제 정도가 아니라 탈취제 제작 키트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 키트를 이용해 냄새를 만들어낼 정도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입장인 이강우는 그런 걸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다. 탈취제 제작 키트는 부피가 상당하다.
결국 임시방편은 체향을 흙냄새로 감추는 것.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냄새를 감춘 후에 이강우는 숨을 돌렸다. 숨을 돌리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겁먹을 건 없어.’
이 유적에 인간은 오직 한 명, 이강우뿐이다.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철칙이 있다.
절대 혼자가 되지 말 것. 혼자가 된다는 건 사형집행일이 정해진 사형수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 그런 철칙을 평생 품었던 이강우는 지금 그 철칙을 살살 어루만졌다. 어루만지면서 녹였다. 그 철칙에 의해 생기는 공포감과 불안감도 같이 녹였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이강우가 머릿속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일단 이강우는 이번 유적 사냥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 보통 유적 사냥은 수익이 목적이다. 마나스톤, 몬스터 사체, 마법 아티팩트. 하지만 이강우는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하나 더.
‘마나 서클 개방도 잊지 말고.’
그 순간 이강우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어 주황색 포션을 꺼냈다. 주황색 포션을 단숨에 마셨다.
[2,500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마나 서클이 개발됐습니다.]
‘남은 건 다섯 개.’
이제 다섯 개의 포션이 남았다. 잊지 말아야 한다. 크로포드는 최대한 복용 시간을 지키라고 했다. 그래야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최소 나흘 동안 명심해야 한다.
이윽고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먹을 건 구해야지.’
* * *
이강우가 읽은 기예르모 레시피는 두 권이다. 그 두 권에는 기예르모가 만든 랭킹이 있다. 기예르모가 꼽은 가장 맛있는 몬스터 랭킹이다. 등급별로 3마리씩, 9등급부터 5등급까지 총 열다섯 마리.
개중에서 9등급 몬스터 중에 기예르모가 꼽은 랭킹 2위가 바로 붉은털돼지다.
몸크기는 멧돼지보다 조금 큰 정도. 몸길이는 약 2미터, 체중은 350킬로그램에서 400킬로그램 사이다. 특이점은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큼지막한 코. 그리고 순간적으로 최대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돌진력이다.
이런 붉은털돼지의 몸통박치기는 근거리에서 맞아도 최소 골절이다. 교통사고 정도의 피해를 입는다. 하물며 돌덩이보다 단단한 코에 찍히면 아프다는 소리조차 안 나온다. 죽거나 기절한 인간은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법 아닌가?
그 붉은털돼지가 지금 이강우의 시야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포복 자세를 취한 이강우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듯, 붉은털돼지는 제 코로 땅을 파며 무언가를 계속해서 먹었다.
이강우는 그런 붉은털돼지를 보며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나도 미치긴 미친 모양이야. 이 중요한 순간에 침이 고이다니.’
붉은털돼지는 몇 번 봤다. 하지만 먹어본 적은 없다. 이강우가 도축을 배우고 몬스터를 먹기 시작한 이후로는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와중에 기예르모 레시피를 통해서 붉은털돼지를 접하면서, 이강우는 정말 궁금했다.
대체 무슨 맛일까?
‘이강우 정신 차려. 지금 저 녀석 맛을 상상할 때가 아니야.’
여기서 이강우는 스스로를 질책한 후에 현실적인 판단을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일단 이강우에게는 당장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당장 잡을 것인가, 나중에 잡을 것인가?
‘9등급 유적.’
여기서 이강우는 이곳이 9등급 유적이란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중요한 기준점이다.
9등급 유적이라면, 당연히 이곳에는 9등급 몬스터만 있다. 즉, 8등급 이상 유적에서는 먹잇감이 될 수 있는 붉은털돼지이지만, 지금 이 유적 안에서 녀석은 최상위 포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기준점이라는 것이다.
최상위 포식자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 먹이사슬의 고리 중 하나는 행동 패턴이 전혀 다르다.
일단 최상위 포식자는 주변을 잘 경계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협할 게 없으니, 경계심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긴장도 푼다. 동시에 쉬는 시간이 잦아진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최상위 포식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먹을 때 건드리면 개도 주인을 무는 법이지. 여기서 놈을 건드리면 개싸움이다.’
지금 당장 녀석을 노릴 이유는 없다.
이강우가 슬그머니, 천천히 뒤로 몸을 뺐다.
* * *
붉은털돼지가 제 코를 앞세워 나무 기둥을 두드렸다.
쿵쿵!
녀석의 무시무시한 공격에 나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몸을 떨며, 자신이 가진 잎과 가지를 털었다. 이윽고 잎과 가지가 바닥에 나름 수북이 쌓이자, 붉은털돼지는 그 위에 제 육중한 몸을 올려놓았다. 훌륭한 잠자리를 만든 녀석이 몸을 뒤척이며 두 눈을 감았다.
푸릉푸릉, 녀석의 입에서 나름 만족감 가득한 울음이 나왔다.
그런데.
툭!
그 순간 녀석의 만족감을 무언가가 자극했다. 녀석의 몸 위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녀석이 두 눈을 번쩍 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이 곧장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것의 정체를.
나뭇가지였다.
녀석은 콧김을 거세게 토해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툭!
그러자 곧바로 무언가가 날아와 녀석의 몸을 쳤다.
녀석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눈을 뜬 채 제 몸에 닿은 게 나뭇가지란 걸 파악하자마자 가볍게 몸을 털어 나뭇가지를 제 몸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쉬익!
날카로운 소리가 붉은털돼지의 감각에 잡혔다. 붉은털돼지가 두 눈을 떴다. 무언가가 붉은털돼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붉은털돼지가 자리에서 곧장 일어났다.
녀석은 반응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반 박자 늦은 반응이었다. 앞선 두 번의 자극을 통해 녀석이 반응에 대한 긴장감을 늦춘 게 이유였다.
결국 녀석의 늦은 반응은, 녀석을 습격하는 습격자에게 천금 같은 기회를 줬다.
붉은털돼지가 제대로 대응을 하기도 전에, 습격자는 붉은털돼지의 오른쪽 앞다리를, 사람으로 따지면 겨드랑이 부근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부분을 곧게 뻗은 날카로운 쇳덩이, 칼로 찔렀다.
푹!
칼은 두꺼운 붉은털돼지의 가죽과 더 두꺼운 지방 그리고 근육을 뚫고 들어갔다.
더 나아가 힘줄마저 닿았다.
꾸우!
붉은털돼지가 기겁을 했다. 기겁하면서 녀석의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앞다리의 힘줄이 잘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이다. 심지어 칼은 그대로 꽂힌 채였다. 붉은털돼지가 쓰러지자, 칼은 더 깊숙하게 들어갔고 붉은털돼지가 더 우렁찬 괴성을 내질렀다.
꾸우, 꾸우!
녀석이 몸부림을 쳤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녀석의 몸에 박힌 칼이 거듭해서 녀석에게 통증이란 신호를 보냈다.
그사이 습격자는 기척을, 존재감을 감췄다. 붉은털돼지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제대로 경계했지만, 붉은털돼지는 습격자를 찾을 수 없었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세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 차려! 스스로에 대한 충고를 한 모양.
고개를 흔든 붉은털돼지가 슬금슬금 뒤로 이동했다. 나무 가까이 접근했다. 꼬리가 나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나무를 등짐으로써 후방의 경계를 배제하고, 전방의 경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툭!
붉은털돼지의 몸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뭇가지? 당연히 아니었다. 떨어진 건 습격자.
습격자 이강우였다.
이강우는 그냥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는 이강우의 손에는 묘하게 생긴 칼이 잡혀 있었다. 칼은 낚싯바늘처럼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푹!
이강우는 그 칼을 단숨에 붉은털돼지의 몸뚱이에, 등 부근에 집어넣었다. 마법 아티팩트는 아니다. 그냥 특수하게 제작된 칼이다. 그런데도 쉽게 붉은털돼지의 가죽과 지방을 뚫을 수 있었던 건, 이강우가 가진 마력검 마법 덕분이었다.
꾸우우!
이런 이강우의 공격 앞에 붉은털돼지가 몸을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녀석의 들썩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로데오는 사양이다.’
이강우는 여기서 소도 아닌 돼지를 상대로 로데오 게임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까.
이강우가 붉은털돼지의 등 부근에 집어넣은 칼을 조작했다. 몇 번 칼을 움직이자, 마치 인형 뽑기 크레인 기계가 인형을 잡듯이 갈고리 모양의 칼에 붉은털돼지의 등뼈가 걸렸다.
가죽, 지방, 살덩이와는 전혀 다른 촉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오케이.’
이강우가 전력을 다해 칼을 잡아당겼다.
뚝!
기괴한 소리가 났다. 살덩이가 잘리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단단한 것이 끊어지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쿵!
몸을 들썩이며, 제 몸에 달라붙은 습격자를 내쫓으려던 붉은털돼지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척추에 손상이 왔는데, 뒷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갈 리 없다. 여기에 오른쪽 앞다리는 힘줄 손상.
제아무리 자신의 거대한 몸뚱이로 어마어마한 속도를 낼 수 있는 다릿심을 가진 붉은털돼지라고 해도 다리 하나로 제 몸뚱이를 지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리를 잃은 붉은털돼지는 그냥 돼지였다.
꾸우우, 꾸우우…….
그 사실을 가장 먼저 파악한 건 붉은털돼지 자신이었다. 녀석의 입에서 죽음을 앞둔 짐승이 내뱉는 구슬픈 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서서 내뱉은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듣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호소력 짙은 소리였다. 동물보호운동가가 들었으면 당장 이강우에게 계란이라도 던졌을 정도로, 동물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하지만 이강우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양심의 가책? 당연히 없다.
미안한 심정? 가져본 적도 없다.
‘드디어 널 맛보는구나.’
당연한 일이었다.
호랑이가 자신이 사냥한 꽃사슴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늑대가 입에 문 토끼의 구슬픈 울음에 토끼를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입에 문 어린 물소의 애원하는 듯한 울음에 오히려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이강우는 작금의 상황에 기뻐했다.
이강우, 그는 클로저에게 필요한 가장 확실한 요소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 * *
자신의 집에 도착한 하선우는 곧장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올해는 새해 시작부터 아주 기가 막히는군.’
2021년.
하선우에게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하선우는 준비해둔 노림수로 승부를 걸 생각이었다. 이미 밑밥도 던져놓은 상황이었고, 남은 건 입질 그리고 입질이 오는 순간 벌이게 될 승부였다.
그런데 그런 하선우의 노림수가 산산조각이 났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일이 꼬였어.’
일단 가장 놀란 건 클로저 라이센스가 실존한다는 사실이었다.
들어는 봤다. 그 자격증만 있으면 마음대로 유적 사냥이 가능하고, 유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같아서 그냥 도시 전설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그 클로저 라이센스의 존재를 강희는 마치 당연히 존재한다는 듯이 말했다. 심지어 그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을 위해 취득 시험에 이강우가 응시했다고 한다. 화룡점정은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에 응시한 이유다.
‘낭중지추…… 이쯤 되면 주머니 속 송곳 정도가 아니라, 폭탄이었던 셈이군.’
리볼버가 이강우를 자신의 수제자이자 대체자로, 자신을 대신해 블랙 스택을 대표할 최강의 마법사로 키우기 위해서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에 응시시켰다고 한다.
정말 일이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들 정도.
‘아예 제대로 꼬이니까 오히려 굵직한 밧줄이 만들어지는 느낌까지 들 정도야.’
그래서 오히려 하선우는 상황을 좀 더 명쾌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단 리볼버 크로포드가 작정하고 움직인 이상, 그가 만든 판을 하선우가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하선우가 굳이 이 판을 뒤집을 필요 역시 없다.
하선우가 리더가 되는 것만 포기하면, 오히려 상황은 더 나아질 수 있다.
‘이강우가 내 리더가 된다…….’
만약 이강우가 클로저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리볼버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정말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슈퍼 루키, 초신성(超新星) 이상의 존재가 된다면?
더 나아가 블랙 스택의 전폭적인 지원마저 받아낼 수 있다면?
그런 이강우를 모시고 유적 사냥에 참가했을 때의 메리트가 이강우를 데리고 하선우가 유적 사냥을 주도했을 때보다 많을 것이다.
특히 클로저 라이센스가 정말 사실이라면, 메리트를 운운하면서 비교를 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그게 핵심이다.
‘클로저 라이센스.’
지금 하선우가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건, 전후 사정도 사정이지만 클로저 라이센스에 대한 정보다. 클로저 라이센스에 대한 확실한 지식도 없는데 저울질을 하는 건, 무게 추의 무게가 얼마인지도 모른 채 저울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선우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권재용,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대부분의 몬스터 고기가 그렇지만, 피를 빼는 방혈 작업을 비롯해 도축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맛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언제나 그렇듯 신속한 작업이 생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강우의 도축은 완벽, 그 자체였다. 붉은털돼지 도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강우는 마치 장난감을 분해하듯 붉은털돼지를 분해했다. 거대한 붉은털돼지를 원하는 대로 해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아무리 이강우가 신기에 다다른 도축 기술과 마력검 마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비이상적인 수준의 작업 속도다.
‘빨리. 디테일한 건 필요 없어.’
그게 가능했던 건 이강우가 디테일을 버리고, 우악스러울 정도로 과감한 도축을 진행한 탓이었다.
사실 도축은 섬세한 작업이다. 돼지 같은 경우는 보통 도축을 하면 25개 부위가 나온다. 그렇게 많은 부위를 정확히 구분하면서 도축을 하려면 섬세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강우의 작업에는 그 섬세함이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한 게 아니라, 이강우가 과감하게 디테일한 도축을 포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다 못 먹어.’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못 먹을 게 훨씬 더 많았으니까.
붉은털돼지의 몸무게는 400킬로그램 전후다. 이중 실제로 먹을 수 있는 고기의 비중, 정육율을 50퍼센트라고 하면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은 200킬로그램이 나온다.
이강우가 매일 10근, 6킬로그램씩 먹어도 30일 하고도 4일을 더 먹어야 한다.
절대 그렇게 못 먹는다.
더군다나 지금 이강우는 붉은털돼지 고기를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훈제는 불가능하고.’
일단 장기 보존을 위한 훈제는 시도할 필요도 없다. 장기 보존 목적을 위해서 훈제를 하려면 저온에서 계속 고기를 훈연에 노출하는 냉훈법을 써야 하는데, 이게 2주에서 5주 정도 걸린다. 유적에 입장하고 훈제를 시작하면, 유적 사냥이 끝난 후에 즐길 수 있다. 지금 이강우 처지에는 불가능하다.
‘냉동은 어림도 없고.’
냉동은 가장 간단하지만 동시에 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방법이다. 당연히 배제.
‘드라이에이징은…… 사실 이럴 때나 해볼 법한 방법인데, 불가능하지.’
보존 방법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드라이에이징도 나름 방법이 될 수는 있다. 드라이에이징 과정, 즉 숙성 과정을 곧 보존 기간으로 계산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드라이에이징도 쉽지 않다. 낮은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습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역시 관련 장치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육포도…… 쯧.’
남은 방법은 육포로 만드는 것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육포로 만들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금 이강우는 핏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기를 물에 담그는 작업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이니까. 그나마 백즙나무를 발견한 덕분에 식수 걱정이 없을 뿐, 물이 있으면 아껴야 한다.
때문에 실상 이강우가 쓸 수 있는 방법은 예전 사냥꾼들이 잡은 고기를 그냥 그늘에 말려 숙성을 하는 단순한 숙성법이 유일했다. 숙성 기간을 보존 기간이라고 치면, 길게는 4일 동안 먹을 수 있다. 그 후에는 숙성이 아니라 그냥 썩은 고기다.
‘안심, 등심, 앞다리, 뒷다리, 삼겹살.’
때문에 이강우는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붉은털돼지 고기를 다섯 부위로 나눴다.
‘하루에 한 부위씩 해치워야지.’
하루에 한 부위, 붉은털돼지 고기를 다 먹었을 쯤에는 무지개 포션의 효과로 3서클을 개방할 수 있을 터.
‘마지막 날을 위해 삼겹살을 아껴줘야지.’
때문에 가장 기대하는 삼결살은 숙성 기간을 거쳐 가장 마지막 날 먹을 생각이었다.
반대로 첫날인 오늘 공략 대상은.
‘그럼 앞다리부터 먹어보자고.’
* * *
기예르모 레시피 내용에 따르면, 기예르모는 붉은털돼지 고기에 정말 높은 점수를 줬다.
높은 점수를 준 이유는 세 가지였다.
-붉은털돼지 고기는 맛있다. 그냥 맛있다. 최고의 돼지고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맛이 무난하다. 식감을 비롯해 맛 자체가 돼지고기와 매우 흡사하다. 정확히는 아주 맛있는 돼지고기다.
사실 몬스터 고기는 단순히 맛있다기보다는 이색적인 맛이 많다. 이색적이란 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의미다. 꽃등도마뱀 고기가 대표적이다. 열을 가할수록 단맛이 강해지는 꽃등도마뱀 고기는 단맛에 환장하는 채유리나 이강우 같은 인간에게는 최고의 재료지만,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미가 아니라 쓰레기다.
그런 의미에서 붉은털돼지 고기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추천해 줄 수 있을 만큼 무난하게 맛있었다.
-붉은털돼지는 언제나 맛있다. 구워 먹어도 맛있고, 삶아 먹어도 맛있다. 참 맛있다.
두 번째 이유는 고기 자체가 양념이나 특별한 조리 과정 없이, 그냥 평범하게 굽기만 해도 맛이 좋다.
괴식가 기예르모는 맨몸으로 유적에 입장한다. 그는 그 흔한 향신료조차 거의 챙기지 않고, 유적에서 자급자족을 꾀한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조리법이 필요한 고기는 맛이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붉은털돼지 고기는 그냥 굽기만 해도 맛있다.
어쨌거나 기예르모가 그렇게 극찬한 붉은털돼지 고기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클래식하게.’
이강우는 일단 앞다릿살을 그냥 불에 구웠다. 통구이 바비큐를 하듯 불에 구운 후에 칼로 익은 표면을 잘라내 곧장 먹었다. 뜨끈뜨끈한 살점이 입 안에 들어왔다.
“후우, 후우!”
그 뜨거운 살점의 열을 식히기 위해 입 안에 바람을 넣었고, 고기가 씹을 만큼 식었을 때 이강우는 매우 엄격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냠냠, 잘 씹었다.
그리고 꿀꺽, 삼켰다.
‘맛있다.’
그 순간 이강우의 표정이 풀어졌다. 대법관 같은 표정이 어린아이의 표정이 됐다.
‘그냥 맛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맛은 아니었다. 돼지고기의 맛, 그대로였다.
그런데 굉장히 맛있었다.
‘뭐, 이렇게 맛있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딱히 양념을 한 것도, 제대로 된 숙성 기간을 거친 것도, 특별한 조리법을 쓴 것도 아닌데 고기의 맛이 대단했다.
이강우가 먹은 앞다릿살의 경우에는 앞다릿살인 만큼 지방은 적었지만, 그런데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만한 적당한 수준의 기름기가 있었다. 열을 가하며 녹은 적당한 수준의 기름기는 느끼하기보다는 감미로웠고, 육질의 식감도 적당했다.
‘식감은 퍼펙트!’
솔직히 이강우는 꽤 질긴 식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붉은털돼지는 엄청난 다릿심을 가진 놈이다. 그런 다릿심을 가진 놈의 다리 살이라면 육질이 질길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스테이크처럼 사르르 녹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질긴 식감은 씹는 맛을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육즙은 최고였다. 마치 스펀지에서 물을 짜내듯, 육즙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씹는 맛과 육즙, 두 가지의 하모니는 최강이었다.
‘끝내주네. 진짜 최고야.’
기예르모가 톱 3으로 꼽을 만하다.
고기 자체의 맛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무난한 주제에 맛 자체는 매우 뛰어나다.
“아…….”
그래서 탄식이 나왔다.
‘이건…… 요리해서 먹어야 하는데!’
정말 끝내주는 재료다. 그냥 먹어도 이 정도인데, 여러 양념과 재료를 이용해 조리를 하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당장 이 앞다릿살을 이용해 족발을 만든다면? 아니면 맵게 볶는 건 어떨까? 김치찌개에 뭉텅 썰어 넣어 푹 끓인다면? 장조림으로 해 먹어도 굉장한 맛이 나올 것이다. 수육도 빼놓을 수 없다. 수육으로 푹 삶은 후에 김치 한 점을 얹고, 박쥐뱀의 피를 한 잔 섞으면…….
“크으.”
상상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젠장.’
그래서 이강우는 절망감을 맛봤다. 정말 시도해볼 수 있는 요리가 수백 가지가 넘는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요리가 없다. 최고의 재료를 앞에 두고 그냥 맛만 봐야 한다.
그마저도 시한부 고기 인생!
이 맛조차 오래 즐길 수 없다. 나흘 혹은 닷새 후면 남은 고기도 버려야 한다.
‘말도 안 돼. 이걸 그냥 버려야 한다니……!’
이 순간 이강우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무래도 냉동마법, 건조 마법, 바람 마법을 어떻게든 구해야겠어.’
음식 보존을 위해 마법을 배울 결심을!
* * *
이강우는 적지 않은 양의 앞다릿살을 기어코 전부 먹어 치웠다.
[155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섭취한 마력 자체는 많지 않았다. 배가 터지게 먹었지만, 섭취한 마력은 2백 포인트를 넘기지 못했다. 애초에 9등급 몬스터인데 많은 마력 섭취를 기대하는 게 도둑놈 심보일 터.
그래도 이강우는 충분히 만족했다.
“꺼억…….”
‘진짜 잘 먹었다.’
인생 최고의 돼지고기를 맛봤다.
‘이제 배를 채웠으니, 움직여야지.’
하지만 이강우에게 고기로 가득 찬 배를 두드리며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이강우는 곧바로 먹고 남은 부산물들을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덮었고, 곧바로 백즙나무의 즙과 흙을 섞어 만든 진흙을 온몸에 발랐다. 그 쓴 백즙나무 즙을 입에 넣고, 가글을 하듯 헹구기 시작했다.
‘크으…… 써!’
입 안을 감미롭게 채우던 고기 맛이 백즙나무의 쓴맛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마땅한 탈취제가 없는 상황에서 고기 냄새 풀풀 풍기면서 다닐 수 없으니까.
순식간에 평범한 노숙자에서 거지 왕초로 변신을 마친 이강우가 고개를 들어 나무 사이, 그늘에 걸어둔 고기를 바라봤다.
앞으로 나흘 동안 먹을 식량은 확보했다. 이제부터는 그 식량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이강우가 냄새를 없애려고 노력해도 분명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을 쫓아 다른 몬스터들이 파리 꼬이듯 꼬일 것이다. 그들과의 전투에 휘말리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한 마리 잡자마자 또 한 마리 등장하고, 다시 한 마리 더 등장하고…….
결정적으로 이강우가 모든 몬스터를 단숨에 해치운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면 30일 동안 유적에서 버티는 게 힘들어진다. 지금 이강우에게 몬스터 고기를 보름 이상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까.
30일 동안 버티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몬스터를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이 생각보다 어렵겠어.’
이 시험…… 쉽지 않을 것이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유적에서 살아남는 능력이 필요하다. 좀 과장하면, 유적 안의 모든 요소들을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뛰어난 전투 능력과 생존능력, 둘 모두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클로저 라이센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시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강대국이 약소국의 모래시계문을 약탈하려고 만든 제도가 아닌 것 같아.’
처음에는 클로저 라이센스가 강대국들이 타국의 모래시계문을 약탈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이런 제도를 만들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모양이다.
클로저 라이센스가 탄생한 배경에는 다른 의도와 목적이 분명 있다.
때문에 이강우는 궁금했다.
‘대체 누가 클로저 라이센스를 만들었을까? 필시 이걸 제안한 사람이 있을 텐데?’
* * *
하선우는 세종시 유적 연구소에 위치한 권재용 박사의 연구실을 찾았다.
“선우 군, 오랜만이야.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급하게 날 찾아왔나? 그것도 이 추운 겨울날?”
권재용 박사의 몰골은 후줄근했다. 입에서 나는 누린내에 얼굴을 가득 채운 개기름까지. 아무래도 며칠 동안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구의 나날들을 보낸 모양이다.
연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권재용 박사에게 출근일과 휴식일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권재용 박사는 모든 일정을 자유롭게 짤 수 있다. 마음 내키는 날이 출근일이고, 내키지 않으면 휴식일이다. 마법사이자 연구가인 크로포드가 봤다면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워할 만한 특권이다.
그런 권재용 박사를 보자마자 하선우는 단도직입, 망설임 없이 질문을 던졌다.
“클로저 라이센스라고 아십니까?”
그 질문에 권재용 박사는 즉답했다.
“당연히 알지.”
심지어.
“마스터가 클로저 라이센스에 대한 제안서를 기획할 때 내가 조력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하선우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을 마치 인터넷 가십거리 이야기하듯, 툭 내뱉었다.
하선우는 정말 놀랐다.
“예?”
평소 남들 앞에선, 얼굴 위로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하선우가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일 정도로 얼굴 위로 표현했을 정도였다. 권재용 박사는 그런 하선우의 표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고 있었어? 클로저 라이센스라는 단어가 아주 없는 단어도 아니잖아? 5서클 마법사 정도라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텐데?”
“관련된 소문이 너무 허황된 것뿐이라서, 도시 전설 같은 낭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매년 자격증을 발급받는 사람이 많아 봐야 열 명을 넘지 않으니까. 어디 보자, 그 자격증 시험이 처음 시작된 게 2018년이었으니까 자격증 소유자는 서른 명쯤 되는 건가?”
서른 명.
전 세계 무수히 많은 마법사 중 서른 명만 가진 자격증이라면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왜 그런 자격증이 생긴 겁니까?”
하선우가 거듭 질문했다. 권재용 박사는 그 질문에 자신의 오른손을 활짝 폈다.
편 상태로.
“어디 보자 이유가 몇 개 정도 되려나…….”
하나둘셋…… 숫자를 세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일단 이유가 다섯 개는 넘었다. 주먹을 쥐었던 권재용 박사가 다시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했으니까.
엄지와 검지를 폈을 때 권재용 박사는 계산을 멈췄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설명을 했다.
“일단 추천장을 쓸 수 있는 곳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뿐인데, 그들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 유적을 멋대로 사냥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지.”
이유 하나.
“두 번째는 강대국들은 포스트 괴식가를 키우고 싶었어. 기예르모 레시피가 공개된 게 2017년 무렵이었으니까. 2015년은 혼란의 시대였고, 2016년에는 과도기였지. 그리고 2017년에는 안정기. 사람이란 게 일단 안정에 접어들면 딴생각을 하게 되잖아? 더군다나 기예르모 레시피가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커. 정말로.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그냥 미친놈이지만 유적 연구가들에게는 뉴턴 같은 존재지.”
이유 둘.
“세 번째는 헌터가 아니라 클로저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야. 마법사의 몸값과 마법 아티팩트는 솔직히 상식 이상의 값이 매겨져 있잖아? 솔직히 마법 아티팩트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 값이 F-22랩터 가격인 건 좀 그렇지 않아? 어쨌거나 이쯤 되자, 다수의 마법사와 마법 아티팩트를 보유한 정부와 길드 입장에서는 수익의 극대화보다는 손해의 최소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됐지. 그래서 유적 사냥이 아니라, 오로지 문을 닫을 수 있는 클로저의 존재가 필요하게 됐지.”
이유 셋.
“네 번째는…….”
여기서 하선우는 손을 저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의 제스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클로저의 필요성은 뭐든 붙이면 이유가 될 정도로, 존재할 가치가 충분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데 이 클로저 라이센스를 마스터가 제안했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 순간 권재용 박사가 짧게 뭔가를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새로운 이유가 추가된 모양.
“그러고 보니 제안서에는 넣지 않았지만, 사적으로 이야기할 때 마스터가 다른 이유를 언급하긴 했지.”
하선우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 이유 말해줄 수 있습니까?”
“이건 좀 말해주기 뭐한데. 솔직히 마법사들이 들어서 기분 좋은 이유는 아니거든. 그래도 듣고 싶어?”
하선우는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궁금하다.
하지만 권재용 박사가 이렇게 말하는 비밀이면, 보통 비밀이 아니라는 의미다. 듣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아직은 아니야.’
정확한 상황과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대가를 지불하고 뭔가를 사려는 건 충동구매다. 충동구매는 언제나 위험하다. 때문에 하선우는 다른 질문을 했다.
“클로저 라이센스의 권한이 어느 정도까지 됩니까? 듣기로는 어떤 유적이든 멋대로 들어가서 마음대로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데, 6등급 이상의 유적도 가능합니까?”
그 말에 권재용 박사를 역으로 물었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런 관심을 가지는 거야? 주변에 클로저 라이센스를 획득한 사람이라도 생겼어?”
“이강우가 응시를 했습니다.”
이강우.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권재용 박사가 안색을 바꿨다.
“이거, 좀 더 긴 대화가 필요하겠는데? 커피랑 코코아, 둘 중 뭐 먹을래?”
“커피로 하겠습니다.”
“그래, 여기 동전. 밖에 자판기 있어. 난 코코아.”
그 말에 하선우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동전을 받았다.
* * *
이강우의 꼴은 정말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옷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또한 온몸, 심지어 사타구니 같은 은밀한 곳까지 이강우가 만든 특제 진흙…… 백즙나무와 흙, 나무껍질, 나뭇잎을 섞어 만든 특제 진흙이 흠뻑 묻어 있었다.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원시인보다 더 더럽고, 추레했다.
하지만 이 추레함 덕분에 이강우는 자신의 체향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었고, 붉은털돼지와의 전투 이후 4일 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와 교전을 치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총꾼으로 개고생한 보람을 느끼네.’
만약 이강우가 순수한 마법사 출신의 유적 사냥꾼이었다면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총꾼이니까,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 덕분이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총꾼 경력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이강우는 몬스터와의 교전을 피하면서, 무지개 포션을 순차적으로 복용했고, 시간이 될 때마다 붉은털돼지고기도 먹었다. 첫날 앞다리, 둘째 날, 뒷다리, 셋째 날 안심을 먹었다.
그리고 4일째에 접어드는 오늘, 이강우는 아껴둔 삼겹살을, 숙성을 거치면서 더 맛있어진 삼겹살을 나름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구한 유적 나물들과 이끼와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무지개 포션의 마지막 포션인 보라색 포션을 곁들여서.
‘여기까지 왔다.’
무지개 포션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매일매일, 매 시간마다 꾸준히 마나 서클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빨리 마나 서클이 개방되는 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신비하면서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현재 3서클은 88퍼센트까지 개발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남은 건 12퍼센트뿐. 이 12퍼센트만 채우면 온전한 3서클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4서클 개발을 시작할 수 있는 밑바닥을 다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거 한 잔으로.’
당연히 이강우는 기대감을 품은 채, 마지막 보라색 포션을 단숨에 들이켰다.
‘묘한 맛이네.’
묘한 맛, 굳이 표현하자면 보라색 맛이라고 할 법한 맛이 입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헉!’
이강우의 가슴 속에 지진이 일어났다. 가슴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마나 서클이…….’
두근거림의 근원지는 마나 서클이었다. 마나 서클이 심장처럼, 그것도 전력질주를 시작한 단거리 선수의 심장처럼 폭발하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힘은 강렬했다.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린 채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폭발하는 힘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위험했다.
만약 이 상태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황에 몬스터와 조우한다면? 좋은 일은 없을 터.
‘오냐.’
그러나 이강우는 공포와 겁에 질리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와라, 마다하지 않겠다. 전부 먹어 치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때.
“아!”
이강우의 눈앞에 환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누운 채 몸을 웅크린 이강우의 시야에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불사황제.’
야크센.
그는 바닥에 웅크린 채 쓰러진 이강우를 내려다보며, 섬뜩하기 그지없는 이빨을, 짐승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빨을 있는 힘껏 드러내는 미소를 지으며, 그 미소 사이로 짐승마저 겁에 질리게 만드는 음색을 뱉었다.
“그래, 그거다. 전부 먹어 치워라. 놈들이 만들어낸 이 모든 만찬을 먹어 치워라. 그리하면 내가 가진 것이 마땅히 네 것이 될 것이다.”
그 음색 앞에서 이강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강우]
-마력: 3서클 완성, 4서클 개발 중(1퍼센트)
-보유 마법: 6개
-마법 슬롯: 4개
-섭취 마력: 55,322포인트.
이강우가 정신을 차린 건, 보라색 포션을 마시고 약 2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강우는 제 컨디션을 되찾자마자 손거울을 꺼냈다. 이강우는 손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상태에 만족했다.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강우, 이제 일희일비하지 말자.’
기쁨 가득한 미소를, 정말 순수하다 못해 얼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미소는 짓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쁨보다는 이제부터 이강우가 마주해야 하는 사실이 이강우의 기쁨을 지웠다.
‘이제까지는 연습이었고, 이제부터는 경쟁이잖아? 경쟁자들 앞에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반응하지 마. 이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이제까지 이강우는 그냥 루키에 불과했지만, 이제부터 이강우는 정말 단시간 내에 세 번째 마나 서클을 개방한 마법사로, 일선에서 활약하는 마법사들이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됐다.
이강우 본인이 선택한 일이다. 피라미드처럼 쌓인 마법사들의 머리를 짓밟고 정상에 서겠다고 본인이 선택했다. 이강우는 스스로의 안위를, 소소한 가치만을 추구하며 알콩달콩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외면하고 숨 막히는 경쟁을 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경쟁을 가지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경쟁에서 이기는 법, 경쟁에서 지지 않는 법이다.
‘좋아, 그럼 세팅을 해보자고.’
이강우가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을 다루듯, 작은 손거울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강우가 [마법] 항목에 들어갔다.
보이는 4개의 슬롯. 그 슬롯을 채우기 시작했다.
‘1번 슬롯은 분석.’
일단 가장 유용한 마법인 분석 마법은 그대로 놔뒀다.
‘2번 슬롯에는 역시 마력검이지.’
2번 슬롯에도 원래 있던 마력검 마법을 그대로 놔뒀다.
‘3번에는…… 드디어 이걸 넣는구나.’
대신에 3번 슬롯은 교체했다. 해독 마법을 빼고, 3서클 마법인 라이트닝 다트 마법을 넣었다.
‘4번 슬롯은 버닝 마나.’
마지막 슬롯, 새롭게 개방된 슬롯에는 버닝 마나를 집어넣었다.
이 모든 마법 슬롯 세팅은 다름 아니라 몬스터와의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강우, 그는 유적에 입장하기 전부터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법 전투 능력을 조금이라도 키워야 해.’
실전 경험이다.
유적 사냥 경험은 많다. 그러나 마법을 이용해 유적에서 몬스터를 사냥한 경험은 매우 드물다.
그 실전 경험을 부족하나마 이번 기회에 채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4일 동안 버틴 것이다.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투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동시에 4일 동안 허송세월만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수백, 수천 번이 넘는 전투를 그려봤다. 자신이 가진 마법으로 어떻게 전투를 해야 할지, 이미 머릿속에 넘쳐나는 스택 레코드의 몬스터 정보를 기반으로 아득해질 정도로 많은 가상전투를 펼쳤다.
이제 그 실전을 통해 가상전투의 부족한 부분을 고칠 차례.
이강우가 주둥이 부근에 묻은 진흙을 손으로 훔쳤다. 이강우의 입술과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황제가 선택한 이강우의 재능, 그 거대한 폭탄과 연결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 * *
악어개.
꼬리를 제외하면 약 150센티미터의 몸길이를 가진 9등급 몬스터로, 몸뚱이는 개와 흡사하며 머리는 악어를 닮았다. 악어의 머리에 비늘이 아닌 털가죽이 덮인 모습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흉측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실제로 봐도 흉측한 놈이다.
이런 악어개는 나름 악명이 자자하다.
악명이 자자한 첫 번째 이유는 강함 때문이다. 녀석의 무는 힘은 쇠파이프에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사람 몸뚱이는 껌 씹듯 씹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건 주둥이가 아니다. 녀석의 무서운 능력은 발톱에서 나온다. 낚싯바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녀석의 발톱은,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표적의 몸에 달라붙는 게 목적이다. 만약 녀석의 발톱에 걸리면, 그때부터는 평생 뇌리에 남을 악몽을 꿀 각오는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악어개는 9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고, 잡기 어려운 편에 속한다.
악명이 높은 두 번째 이유는 놈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쓸모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몬스터를 잡으면 마나스톤 외에도 나름 부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때로는 부수입이 마나스톤보다 더 짭짤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악어개는 정말 쓸모가 없다. 녀석의 고기는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예르모의 표현을 빌리면, 먹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때려죽이고 싶어지는 맛! 이다.
그렇다고 녀석의 고기나, 피, 뼈, 가죽에 정력이 좋아지거나 머리가 자라나는 효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나스톤을 뺀 나머지는 쓸 곳이 없다. 차라리 녀석의 가죽이 악어가죽이었으면 비싸게 팔렸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어가죽은 비싸게 사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은 개가죽이었고, 개가죽은 줘도 안 쓰는 법이다.
‘네놈이 마지막이다.’
그런 녀석이 이강우의 유적 사냥 마지막 상대가 됐다.
유적 입장 725시간째. 30일하고도 5시간을 채웠다.
그 시간 동안 아홉 마리의 몬스터를 잡았고, 1서클 마법 아티팩트 2개를 구했다.
출문도 발견했다.
사실 이런 요소들을 봤을 때 이강우가 악어개를 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맛도 없어 먹을 수도 없는 놈, 마나스톤을 빼면 돈이 되는 것 하나 없는 놈, 그런 주제에 9등급 몬스터 중에는 잡기 힘든 놈으로 분류되는 놈, 어디에도 놈을 잡아야 할 이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이강우는 놈의 앞에 섰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9등급 몬스터 중에 강한 편에 속하지만…….’
하나는 녀석이 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놈은 수능 문제로 따지면 마지막에 위치한 응용문제 같은 놈이다. 놈을 잡을 수 있다면, 이강우는 어지간한 9등급 몬스터는 전부 잡을 수 있다.
물론 잡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게 있다.
과연 이강우는 놈을 잡을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충분한가? 놈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이강우가 놈의 앞에 서게 된 두 번째 이유였다.
‘도무지 놈에게 당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30일 동안 아홉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이강우는 자신이 유적에서 치렀던 사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냥을 했다.
몬스터 사냥을 여러 각도로 바라봤다. 한 마리를 잡기 전에 수백 번 넘게 시뮬레이션을 그렸다. 예전에는 그냥 몬스터를 보면 이미 검증된 사냥법만을 염두에 두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사냥법을 염두에 두고, 사냥에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강우는 자신의 또 다른 재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이미지는 신뢰할 수 있어.’
떠올린 이미지를 이강우는 거의 완벽하게 실전에 적용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마치 머릿속으로 떠올린 그림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이강우가 악어개를 상대로 머릿속으로 펼친 무수히 많은 상상 전투 속에서 이강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경우는 단 한 번에 불과했다. 때문에 지금 이강우는 조금의 긴장감도 품지 않았다. 이강우의 몸에서는 적당한 수준의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 여유로운 모습이 악어개의 눈에는 굉장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짧은 탐색전을 마친 악어개가 인내를 버리고 먼저 움직였다.
크앙!
악어개는 괴상한 울음을 토해내며.
타닷, 타닷!
네 개의 다리를 이용해 말처럼 달렸다.
나무뿌리, 돌멩이 등이 흙더미 위에 박히고, 나무 기둥들이 장애물처럼 자리를 잡은 그 정글 속은 녀석에게 아무런 제약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에게는 이 모든 게 홈그라운드였고, 녀석은 정말 놀라운 수준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이강우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거리가 약 5미터 남짓 좁혀졌을 때 녀석은 입을 활짝! 최대한 크게 벌렸다. 녀석의 온몸이 벌린 입에 가려질 정도였다. 더불어 녀석의 입을 채우고 있는 이빨은 섬뜩했다. 톱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녀석의 입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강우의 시선은 악어개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다리를 향했다. 다리를 보면서, 벌려진 입에 가려진 몸의 움직임을 가늠했다.
‘하나둘.’
이강우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셋!’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이강우가 악어개를 향해 돌진했다. 자세를 낮춘 채 돌진하는 이강우의 오른손에는 마력검 마법 아티팩트인 평범한 단검이 역수 형태로 잡혀 있었다.
둘이 거리를 좁혔다.
이 순간 이강우의 동선은 악어개의 왼편을 스쳐 지나가듯 형성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눈치챈 악어개는 이강우와의 거리가 거의 지척이 되는 순간 앞다리를 들었다. 이강우의 몸에 낚싯바늘 같은 제 발톱을 걸치려는 속셈이었다.
쉬익!
하지만 이강우는 당연하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녀석의 발을 피했다.
가뿐하게 피하면서.
푹!
악어개의 늑골, 하프의 현처럼 줄지어 늘어선 그 늑골 사이의 틈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찌르기는 담백했다.
하지만 육안으로 가늠하기 힘든 뼈 사이를 긴박한 순간에 확실하게 찌르는 솜씨는 담백함을 넘어 완벽했다.
뼈가 아닌 피륙만을 뚫는데, 거칠 게 있을 리 만무.
단검은 손잡이를 제외한 전부가 박혔다. 만약 악어개의 몸 크기가 지금보다 좀 더 작았다면 내장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터.
물론 지금도 충분히 심각한 상처다. 칼에 찔린 악어개의 몸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서로가 교차했다.
이강우는 뒤로 돌아보지 않은 채 곧장 정글 속 나무 사이로 몸을 던졌다.
크헝!
반면 악어개는 바닥에 넘어지고, 바닥을 몇 바퀴 구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악어개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주둥이를 하염없이 벌릴 만한 상태가 아님을 모를 리 없다. 당연히 악어개는 주변을 경계했다. 이강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때!
이강우가 갑자기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더지게임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휙!
튀어나오면서 손에 쥐고 있던 반짝이는 무언가를 던졌다. 이강우의 손끝을 떠난 반짝이는 악어개의 콧등에 꽂혔다.
파직!
꽂히자마자 스파크가 튀겼다.
악어개가 갑작스레 자신의 콧잔등을 짜릿하게 만드는 통증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를 흔드는 악어개의 눈동자에 잠시 동안 독기가 사라졌으나, 좀 더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더 서슬 퍼런 살기가 맺혔다.
1서클 마법 전격침, 이강우가 던진 전격침이 악어개의 성질을 제대로 돋웠다.
이 순간.
휙!
이강우는 재차 모습을 드러내며, 다시 한번 악어개를 향해 전격침을 던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전격침은 악어개의 몸에 박혔다.
크헝!
악어개가 경련을 일으켰다.
전격침의 위력은 악어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 있는 통증 역시 아니었다. 굳이 예를 들면, 과거 뽑기 기계에 100원을 넣고 뽑으면 나오는 속칭 딱딱이에 당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지랄 맞은 통증이다.
그냥 이성이 마비되고, 머리가 돌아버리게 되는 통증.
악어개라고 다를 건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악어개는 더 이상 주변 경계 따윈 하지 않았다. 이강우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이강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강우는 다시 한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악어개에게 던졌다.
악어개는 그걸 무시했다. 오히려 이강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을 이강우의 존재에 집중했다.
그 순간…….
파지직!
이강우가 던진 것이 적당한 포물선이 아닌, 날갯짓을 하는 벌처럼 움직이며 마력검이 박힌 부위를 찌르고 들어갔다.
놀라운 움직임.
그러나 위력은 더 놀라웠다. 앞선 전격침의 통증이 짜증이 나는 통증이라면, 이번 것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통증이었다. 심지어 공격을 당한 부위의 가죽이 새카맣게 탔다.
악어개의 눈동자에 잠시 동안 초점이 사라졌다.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갔다는 증거.
이게 라이트닝 다트의 위력이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전격침 두 방으로 이강우는 악어개의 방심을 유도했다. 그러니 악어개가 체감하는 대미지는 위력의 곱절, 그 이상일 터.
이윽고 악어개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악어개는 자리에 멈췄다. 멈추고는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강우가 자신이 적대할 수 있는 적대자가 아닌, 자신을 언제든 먹어 치울 수 있는 포식자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도망치는 악어개를 보면서 이강우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렇게 천재일 줄이야.’
자찬이 깃든 미소였다.
* * *
이강우가 출문을 넘어 어둠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를 반긴 건 시커먼 어둠이었다.
어둠 넘어 어둠.
하지만 이강우는 이내 자신이 컨테이너에 모래시계문과 같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는 긴장을 풀었다. 처음 들어온 그대로. 놀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순간 우습게도 이강우는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후유증이었다.
빛만 넘치던 세계에 있다가 어둠이 가득한 세계로 돌아오니, 그동안 맛이 갔던 생체리듬이 빠르게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이강우의 몸이 제대로 된 숙면을 요구했다.
이강우는 그 요구를 들어줬다.
이강우는 곧장 바닥에 등을 대고 잤다. 쿨쿨, 콧김을 시원하게 내뱉으며 잤다.
그런 이강우를 발견한 컨테이너의 주인, 레게머리의 흑인 마이클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유적에서 나오자마자 숙면. 크로포드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제자를 두었군.’
흑인은 곧장 이강우를 깨웠다. 숙면을 깨우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시험 통과 축하한다. 일주일 후 다음 시험 과제가 통보될 것이다.”
이강우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보다 한 달 전보다 살이 더 찐 것 같은데, 유적에서 꽤 포식을 한 모양이군.”
이강우는 그 말에도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순간 흑인 사내는 직감했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했지?’
이강우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단편적인 해석만 할 뿐.
그런 이강우를 위해 흑인 사내는 담백한 단어만으로 질문을 만들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나?”
그 말에 이강우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다.
“크랩팟!”
* * *
이강우는 시애틀행이 정해졌을 때 나름 멋진 계획을 세웠다. 수산물로 유명한 시애틀에서 제대로 미식 여행을 다닐 생각이었고, 스타벅스 1호점에서 커피도 마시고 셀카도 찍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후 벌어진 일들은 이강우의 계획을 송두리째 박살 냈고, 이강우는 계획에도 없는 유적에서 30일을 버텨야 했다. 배를 곯는 일은 조금도 없었지만, 최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착한 시애틀에서 유명한 음식점인 크랩팟. 이강우는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알래스칸이란 이름을 가진 메뉴를 3인분 주문했다. 이후 이강우의 식탁 위에 요리가 나왔다. 킹크랩을 비롯해 각종 해산물과 옥수수, 감자가 이강우의 식탁 위에 너부러졌다. 접시는 없었다. 너부러진 것 중 먹고 싶은 걸 골라서, 상황에 따라서 주어진 망치로 껍질 따위를 부수고 알맹이를 버터 소스에 찍어 먹으면 될 뿐.
‘괜찮네.’
그렇게 이강우의 식사가 중간쯤에 도달했을 때 한 사내가 이강우의 앞에 앉았다.
짧게 자른 금발 머리칼에 금테 안경을 쓴 각진 턱의 사내, 크로포드의 비서 겸 통역사 콜먼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크로포드는 현재 휴가 중이네.”
“설마 그거 말해주려고 오신 겁니까? 내가 그의 휴가 소식을 잊어버렸을까 봐?”
“크로포드가 휴가를 떠나기 전 자네에게 자신의 룸을 공개해 주라고 말을 전해줬네.”
“룸?”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크로포드가 머물던 방이었다.
멋진 방이다.
거길 준다는 걸까?
이강우의 표정이 구겨지자, 콜먼은 이강우가 무언가를 오해한다는 걸 짐작하고 곧장 추가 설명을 해줬다.
“아티팩트 룸.”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이강우는 표정을 바꿨다.
“스승님의 은혜에 제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도 먹을 수 있는 게 남아있다는 사실에 이강우는 만족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 * *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하선우는 스마트폰을 꼭 쥔 채 말없이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드디어…….’
조금 전 통화 상대는 마법청 관계자였다. 더불어 마법청은 하선우가 원하던 소식을 통보해줬다.
‘드디어 4등급 유적 사냥에 나서는구나.’
현재 문 관리센터에 보관 중인 4등급 모래시계문. 폐기냐, 사냥이냐, 두 가지를 놓고 거듭된 토론 끝에 폐기가 아닌 사냥을 하기로 마법청이 최종결정을 내렸다.
이제부터 파티 모집을 위해 신청자를 받고, 검증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하선우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당연히 신청만 하면 파티의 일원이 될 수 있을 터.
원하던 일이다.
그러나 하선우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디데이는 6월 6일.’
6월 6일.
나쁘지 않은 시기다. 의미도 있다. 현충일, 적어도 불길한 날은 절대 아니다. 혹시 아는가? 호국영령이 유적 사냥을 도와줄지?
하지만 하선우는 이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다.
‘이 시간 내에 이강우를 데려와서 파티의 멤버로 넣을 수 있을까?’
하선우, 그의 목적은 이번 4등급 유적 사냥을 통해서 자신이 만든 팀이 대한민국 최고의 유적 사냥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멤버는 어느 정도 구성되어 있었고, 이강우는 그런 멤버 구성에 양념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이강우를, 양념을 제외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강우의 실패를 재촉할 수도 없고…….’
권재용 박사의 말에 따르면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은 5월 말에서 6월 초에 끝난다.
잘만 하면 이강우가 4등급 모래시계문 입장 날짜에 맞춰서 입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4등급 유적 사냥 파티에 참가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작업이 필요하겠어.’
하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바쁜 2월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