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클로저 라이센스
“너는 나를 대신해 블랙 스택 최고 그리고 최강의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크로포드의 결의 가득한 말을 떠올린 이강우는 크로포드의 방을 나오는 순간 스스로도 결의를 품었다.
‘그래, 이건 기회야.’
크로포드를 따를 것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기세로 그의 가르침을 흡수할 것이다.
‘알아서 최고로 만들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결국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가 차지하는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다. 이강우는 그 각오를 품은 채 숙소로 돌아와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강우는 그 각오를 조금도 퇴색시키지 않은 채 크로포드를 만나러 갔다. 그가 전날에 오라고 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집무실 문 앞에 섰을 때 이강우는 여전히 각오로 다져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강우의 각오는…….
“도착했습니다, 스승님.”
수면용 안대를 착용한 채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는 크로포드를 보는 순간 갈대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이강우는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의심도 했다.
‘날 시험하는 건가? 내 인내력과 각오를? 크로포드, 당신을 향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시험해 보고 싶은 거야?’
이 모든 게 연출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만약 이게 연출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이강우는 크로포드의 뒤통수를 전력으로 때리지 않고는 평생 억울해서 죽지 못할 것 같았기에, 이강우는 부디 이 모든 게 연출이기를 간절하게 소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출이 아니었다.
크로포드의 옆에서 대기 중인 통역사 겸 비서, 콜먼은 크로포드 대신 이강우에게 다가와 어수선하게 정리된 문서 뭉치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습입니다.”
작심일일…… 아니, 크로포드의 각오와 결의는 채 반나절을 넘지 못했다.
‘이런 또라이 새끼가…….’
이강우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강우가 마주해야 하는 당장의 적은 크로포드가 아니었다. 진짜 무시무시한 적은 따로 있었다. 문서를 대충 살핀 이강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콜먼에게 말했다.
“영어네요.”
“예, 영어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게 그러니까…….”
영어!
지독한 아찔함이 이강우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현기증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냐.’
결국 이강우는 화를 내는 것조차 포기했다. 여기서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오히려 이강우는 열의를 불태웠다.
“자습, 아주 잘 해놓겠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시죠.”
* * *
2021년 1월 2일, 토요일.
1월 1일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신년 연휴의 중간지점. 꿀맛휴가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이날, 안타깝게도 높으신 분의 부름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불쌍한 사람 둘이 있었다.
하선우와 채유리.
그 둘은 이 꿀맛 같은 연휴에 길드 마스터의 호출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즈믄나래 본부를 찾아와야 했다. 당연히 그 둘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채유리는 자신의 불만을 표정으로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하선우 역시 미간에 약간 주름이 잡힌 게 기분이 썩 좋지 못하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 둘의 모습에, 그들을 호출한 강희는 미안하다는 듯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중요한 연휴 중간에 이렇게 불러서 미안해. 하지만 중대한 사안이 있어 이렇게 부르게 됐으니 양해해달라고.”
강희의 말에 채유리가 표정을 바꿨다.
만약 그 중대한 사안이란 놈이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사안이 아니면, 자신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뒤집어엎겠다는 각오가 어린 표정이었다.
하선우는 그런 채유리의 기세에 후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채유리를 얌전한 고양이로 만든 이강우의 빈자리가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름 아니라 이강우 때문에 둘을 불렀어.”
그런 이강우의 이름이 강희의 입에서 나왔다.
이강우가 언급되자 채유리와 하선우는 자세를 고쳤다. 이제까지 풍기던 분위기도 바꿨다. 그 둘이 진지한 눈빛과 자세를 갖췄다. 강희는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둘 모두 이강우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모양이야. 길드 마스터 앞에서도 바꾸지 않던 자세를 이강우 이름을 듣는 순간 바꾸는 걸 보면.”
“강우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채유리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에 강희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하선우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니, 공주님이 왜 이렇게 얌전한 말투를 쓰는 거야?’
그 눈빛에 하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잘 꼬셨으니까요.’
짧은 대화가 눈빛으로 오고 갔고, 강희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채유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을 정리해 설명해줬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강우를 블랙 스택에 빼앗길지도 몰라.”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질문은 채유리가 아닌 하선우의 입에서 나왔다. 질문을 하는 하선우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냥 단순한 출장 아니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는 이강우를 자기 손에 넣기 위해 안중현의 뒤통수마저 쳤다. 안중현은 그런 하선우에게 딱히 보복이나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지만, 하선우 입장에서는 그래도 나름 자기 길을 묵묵히 걸으며 최선을 다했던 안중현에게 비수를 꽂은 게 탐탁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짓까지 했는데 이강우를 놓친다? 하물며 블랙 스택에 빼앗기다니?
하선우의 상식으로는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내 실수야. 이강우의 재능을 가늠하기 위해서 그를 리볼버에게 보냈어.”
리볼버!
그 이름이 언급되자, 하선우는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랑 이강우가 무슨 관계인데?’
리볼버를 모르는 건 아니다. 세상 마법사들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선우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하선우의 머릿속에 있는 리볼버 크로포드는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 딱 그 정도였다. 그런 그 때문에 이강우를 블랙 스택에 빼앗긴다고 하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일단 여기서 들은 건 외부로 퍼뜨리지 말고.”
“그 정도로 입이 가벼웠으면 절 이 자리에 부르실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하선우가 곧장 대답했다. 하선우는 누가 보더라도 빨리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다.
반면 채유리는 뭔가를 알겠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크로포드는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
“블랙 스택에서의 대우 말입니까? 그는 분명 블랙 스택에서 최고 대우를 받고 있고, 그가 받는 대우는 전 세계 모든 마법사들 중에서도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그게 아니야. 그는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 정확히는 귀찮아하지. 세상만사가 귀찮고, 자기 관심 있는 것조차도 귀찮아서 때려치우는 부류거든. 그런 그는 지금 억지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정말 비관하고 있어.”
“예?”
하선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강희가 설명을 이어갔다.
“실제로 그의 업무량은 상당하지. 미국 정부 그리고 블랙 스택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에 거의 쉴 새 없이 유적 사냥 및 몬스터 사냥에 투입되니까. 때문에 크로포드는 평생 숙원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마법사를 키우는 거야.”
그 순간.
“그 사람 나한테도 그랬어. 제발 좀 진지하게 훈련을 해서,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라고.”
채유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 역시 크로포드와 만난 경험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즈믄나래에 들어오는데 크로포드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차기 대마도사로 평가받았던 그녀를 크로포드는 자신을 대신해 줄 아주 좋은 재목으로 봤으니까.
물론 크로포드의 관심은 길지 않았다. 채유리의 행보와 성정을 확인한 그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선우는 대충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강우, 그에게 리볼버에 버금가는 재능이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래서 리볼버가 이강우를 키워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블랙 스택이 그걸 돕고?”
“크로포드 말에 따르면,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7서클 마법사를 뛰어넘는 재능!
그럼 8서클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선우는 너무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맙소사.’
강희는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크로포드가 관심을 가질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이강우의 재능이 가늠되면 그때는 크로포드와 얼마든지 교섭을 할 수 있다고 여겼지. 크로포드 입장에서는 자신을 대신해줄 마법사라면 어느 소속이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우리 쪽에서 잘 케어해준다고 하면, 거절할 위인도 아니고. 그와 그 정도 친분도 있고. 하지만 크로포드는 이강우를 자기 제자로 받아들이고 직접 키울 속셈인 모양이야. 그 증거로 이강우에 대한 실시간 정보를 지금 나조차 접근할 수 없어.”
즈믄나래 소속인 이강우에 대한 정보를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가 접근할 수 없다는 건 블랙 스택이 작업을 나섰다는 의미.
그쪽도 작심을 했다는 거다.
더군다나 강희가 염려하는 부분은 하나 더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강우가 가진 재능이 마법사의 재능, 그것 하나뿐이라는 게 아니라는 점이지. 오히려 그가 가진 마법사 재능은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까지 크게 기대는 안 했잖아?”
이강우의 가치는 훨씬 더 거대하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는 블랙 스택 지부 소속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강우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어.”
하선우와 채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이강우를 꼭 잡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공은 블랙 스택에 넘어갔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강우를 잡으려면 방법을 바꿔야지.”
방법을 바꾼다?
“크로포드의 성격을 생각하면 필시 이강우에게 클로저 라이센스를 발급받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하선우, 채유리. 너희 둘은 이강우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이강우의 부하로 들어가는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선우의 표정이 굳었고, 채유리의 표정이 밝게 풀렸다.
* * *
“자습 끝났습니다.”
이강우가 블랙 스택 본부에 도착한 지 닷새째에 접어드는 날, 이강우는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 뭉치를 크로포드 앞에 내려놓았다. 문서를 내려놓은 이강우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최근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흔적이었다.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 크로포드는 정리된 문서를 보며 곧바로 콜먼을 바라봤다.
이강우가 불길함을 느꼈고, 콜먼은 그런 이강우에게 이번에는 잘 정돈된 5페이지짜리 문서를 건네줬다.
“이건 또 뭡니까?”
“클로저 라이센스 응시 요건입니다.”
클로저 라이센스?
이강우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크로포드를 바라봤고, 크로포드는 짧게 강조했다.
“무조건 따야 해. 무조건.”
‘아니, 그러니까 이게 뭔데?’
이강우는 클로저 라이센스라는 단어를 난생처음 들어봤다.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게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강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콜먼이 설명을 해줬다.
“언제든 임의로 모래시계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이강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강우가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맙소사.’
이후 콜먼은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클로저 라이센스.
말 그대로 클로저란 자격을 증명해주는 자격증이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자격증으로,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이 응시를 할 수 있고, 응시할 수 있는 자들 중에서도 합격자는 극히 제한된 이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더불어 이 자격증은 길드가 발급하는 자격증이 아니었다. 유엔이 발급하는 자격증으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유엔상임이사국에 소속된 5개국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얻기 힘든 만큼 자격증을 따면 얻을 수 있는 권한은 굉장하다. 유엔 가입국에 있는 7등급 이하 모래시계문은 마음대로 사냥할 수 있다. 일방적인 통보만 하면 된다.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또한 유적에서 습득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파격 중의 파격, 특혜 중의 특혜다. 마법 아티팩트든 뭐든 전부 본인 소유다.
‘말도 안 돼. 이런 걸 누가 허락해 줘? 완전 약탈이잖아?’
마법 아티팩트 및 마나스톤을 비롯해 유적에서 습득 가능한 물품들은 국가 전력의 한 축이다. 그런데 그걸 타국 사람이 자격증 하나 내밀고 멋대로 가져간다?
이강우가 생각한 약탈이란 표현이 과한 표현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제약도 있었다.
일단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다. 유적 사냥에 필요한 모든 건 스스로가 구해야 한다.
두 번째,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보한 모래시계문은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확히는, 정부가 확보한 모래시계문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즉, 모래시계문을 직접 확보해야만 입장이 가능해지는 셈. 이런 점을 보면 마음대로 유적 사냥을 할 수 있다기보다는 조건부로 가능한 셈.
그러나 그런 걸 고려하더라도, 이건 명백하게 권력을 이용한 약탈이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들 모래시계문을 합법적으로 털어먹으려고 만든 자격증이네.’
한국 정도 되는 국가라면 나름 모래시계문을 빠르게 확보하고 관리할 수 있지만 당장 필리핀이나 베트남 같은 나라로 가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거긴 모래시계문 자체가 관리되지 않아, 유엔 평화유지군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 러시아군이 대기하면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터가 되었다.
어쨌거나 이강우보고 이 자격증을 따내라고 한다. 이강우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프리패스를 쉽게 줄 리는 없을 테고.’
딱 봐도 촉이 온다.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다. 개고생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건 도전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자격증 습득 조건이 뭡니까?”
쉽진 않을 거다.
하지만 구미가 당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적에서 있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이강우의 성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도가 붙을 테니까.
“몇 가지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합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세 가지 요소입니다.”
세 가지 요소.
“혼자서 유적을 클로즈 할 것, 마법 아티팩트만 가지고 들어가서 유적에서 한 달 이상 생존할 것, 입장한 유적의 최고 등급 몬스터를 해치울 것.”
Alone, Alive, Boss.
이강우의 고생길을 알리는 세 단어의 등장.
“그래서 자격시험은 언제부터입니까?”
이강우의 질문에 크로포드가 짧게 하품을 내뱉으며 말했다.
투모로우라고.
* * *
클로저 라이센스.
아마 이 자격증의 존재를 아는 마법사보다 모르는 마법사가 비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은밀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유엔이 인정하는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은 1년에 한 번, 매년 1월 초에 이루어진다. 시험 기간은 약 반년으로, 응시자는 반년 동안 다섯 단계의 시험을 치른다.
첫 번째 단계는 추천장이고, 두 번째부터 네 번째 단계는 9등급, 8등급, 7등급 유적에서 실전을 치르고, 마지막 다섯 번째 시험은 면접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막힌다. 추천장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국가원수의 친필 사인이 꼭 들어가야 한다. 그 어마어마한 강대국의 최고 우두머리에게 사인을 받는 게 쉬운 일일 리 만무하다.
하물며 이강우의 경우에는 한국인 아닌가? 한국은 당연히 유엔 상임이사국이 아니니, 한국 국적인 이강우는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의 국가 원수에게 추천장을 받아야 하는 셈인데, 그 가능성은 당장 이강우가 미국 슈퍼 로또를 구매했는데 아깝게 숫자가 1개만 빗나갈 가능성과 비슷하다.
하지만 크로포드는 이 문제를 정말 단숨에, 딱 10초 만에 해결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대통령의 사인을 받은 무기명 추천장을 준비해뒀지.”
미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간 무기명 추천장.
무시무시한 추천장이다. 미 대통령이 자기의 친필 사인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터. 그런데도 이런 추천장을 써줬다는 건 크로포드가 그만큼 대단한 거물이란 의미다.
“넌 여기 네 이름만 쓰면 돼.”
크로포드의 말에 이강우는 곧장 사인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사인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니까.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해.’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의 두 번째 단계인 유적 사냥은 바로 내일부터 시작이다.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하다못해 낚시꾼들도 이런 식으로 뚝딱 낚시를 떠나는 경우는 없다. 하물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유적 사냥을 이렇게 인스턴트 라면 해 먹듯 한다?
할 순 있다. 그러나 목숨을 보장할 순 없다.
‘다음이 아닌 지금 이걸 꼭 해야 하는 이유.’
더군다나 이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은 매년 1월 초에 진행된다. 올해가 아니면 내년도 있다. 그럼 보통은 내년에 보는 게 정답 아닌가?
결국 이강우가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제가 당장 내일 9등급 유적에 가방 하나 짊어지고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그것도 고작 2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제가.”
그 질문에 크로포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급하니까.”
크로포드에게는 당연하고, 이강우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지금 크로포드가 급하니까 이강우가 더 많은 리스크를 짊어지고 유적 사냥을 해야 한다?
‘에라이…….’
이쯤 되면 이강우가 판을 뒤집어도 이상할 게 없다. 보통은 여기서 파투를 내야 한다. 그게 아니면 호구, 병신, 머저리다.
그러나 크로포드는 정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급해. 난 며칠 후에 휴가를 떠나. 30개월 만에 얻는 이 휴가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쓸 수는 없어.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않는 이상 절대 휴가를 깨고 나설 생각도 없고. 그리고 이 휴가가 끝나면 4등급 유적 사냥에 들어가지. 4등급 유적 사냥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내부적으로만 진행되지. 기간은 3개월 남짓. 그리고 4등급 유적 사냥을 마치면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는 데 한 달은 훌쩍 지나겠지.”
통역 마법 덕분에 이강우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크로포드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이번이 아니면, 당분간 내가 널 어떻게 봐줄 수가 없어. 그런 의미에서 클로저 라이센스 테스트는 좋은 훈련 코스가 될 거야. 지금 네 수준에서 주변 눈치 안 보고 유적에서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가능할 것 같아?”
틀린 말은 아니다.
이강우는 지금 유적 사냥을 혼자서 진행하는 게 불가능하다. 능력이 있어도 즈믄나래 길드는 그에게 유적 사냥을 허락해줄 리 없다.
물론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제 수준으로 9등급 유적에 혼자 들어가는 건…….”
유적에서 마음껏 뭔가를 하는 것도 생존할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클로저 라이센스 취득 시험을 위해서 유적에 들어갈 때는 마법 아티팩트를 제외한 그 어떤 무기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평범한 크기의 가방 안에 넣을 수 있을 만큼의 보급품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결국 마법으로만 생존해야 한다는 건데, 이강우가 봤을 때 최소한 3서클 정도는 되어야 견적이 나온다.
그 사실을 크로포드가 모를 리 없다. 유적 사냥에 있어서는 이강우보다 크로포드가 훨씬 더 대단한 경력자이자, 실력자이니까.
크로포드가 이강우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온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병이 일곱 개 들어 있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의 포션들이었다.
“유적에 입장하기 전에 빨간 포션을 먹고, 유적에 입장한 뒤 24시간이 지나면 주황 포션을 먹어. 그다음에는 12시간 주기로 나머지 포션들을 순서대로 먹어.”
“……이게 뭡니까?”
“무지개 포션.”
“아니, 그러니까 이게…….”
이 대목에서 크로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지금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정말 피곤하거든? 그냥 먹으라고 하면 먹어 주면 안 될까? 그냥 군말 없이 여기 사인하고, 이거 처먹고, 내일 아침에 유적 들어가 주면 참 좋겠는데.”
이강우는 슬쩍 크로포드를 바라봤다. 확실히 크로포드는 오늘 하루 내내 할 말보다 더 많은 말을 단시간에 내뱉은 탓인지 얼굴에 피곤하고, 귀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숨 걸고 하는 일인데 허투루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무지개 포션의 효과가 어떻게 됩니까?”
“복용자의 마나 서클을 계속해서 자극해주지. 복용자의 역량에 따라 다르지만, 개방되지 않은 마나 서클을 빠르게 개방해 줄 거야.”
“대단하군요.”
“엘릭서랑 이걸 같이 먹는 인간은 나 빼고 네가 처음이야. 야, 그보다 진짜 여기 그냥 사인해주고 오늘 대화는 여기서 마쳐주면 안 되겠냐? 나 진짜 피곤하거든?”
크로포드는 거의 울먹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그런 크로포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냉철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9등급 유적에서 나 혼자, 무기 없이 들어가는 건 분명 위험해.’
무기, 특히 총기가 유적 사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환수 타입 같은 몬스터가 아니라면 총을 쏘는 게 더 효과적으로 효율적이다.
하지만 지금 이강우 실력이라면 9등급 유적에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강우가 3서클 마법사가 된다면? 전세 역전이다. 박준영 같은 쓰레기가 아닌 이상 3서클 마법사가 9등급 유적에서 능력 부족으로 죽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무지개 포션이라…….’
핵심은 무지개 포션의 효과.
크로포드의 설명에 따르면 무지개 포션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84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빨간 포션을 먹고 84시간 후에 보라색 포션을 먹게 되니까.
약 4일 정도 버티면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 효과로 3서클 개방에 성공한다면? 지금 이강우가 3서클을 개방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만 포인트가 넘는 마력을 섭취해야 한다.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1년 후에나 가능할 이야기. 그 시간을 고작 4일로 줄일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리스크를 감수할 이유는 충분하지.’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생각도 바꿔야 한다. 피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해야 할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볼 때다.
‘좀 더.’
다다익선.
어차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면 메리트가 커져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리스크는 변하지 않으니까.
이강우가 펜을 들었다.
크로포드가 반색했고 이강우가 펜으로 무기명 추천장에 이름을 쓸 준비를 했다.
그 상태로.
“만약 제가 여기에 사인을 하면, 뭘 주실 겁니까?”
크로포드에게 메리트를 요구했다.
크로포드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으아…… 탄식을 뱉었다.
“엘릭서 먹여 줘, 무지개 포션 줘, 남들은 응시하고 싶어도 못 하는 클로저 응시 기회까지 줬는데, 더 달라고?”
“어차피 스승님도 아무런 대가 없이 제게 투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럴 때만 스승이지.”
크로포드는 고민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곧바로 추가 메리트를 제안했다.
“기예르모 레시피 5권과 8권의 사본을 주지.”
기예르모 레시피!
예상외로 매력적인 게 등장했다. 하지만 이강우는 당장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기예르모 레시피는 유출하면 기예르모가 유출자를 찾아서 반 죽인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그 말에 크로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라고 해. 싸워서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지 뭐.”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인 크로포드가 기예르모를 두려워할 리가 만무.
이강우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스윽, 스윽!
곧바로 추천장 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 * *
“인간적으로 하루 전날에 신청서는 내지 맙시다.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큼지막한 컨테이너를 짊어진 트럭을 타고 등장한 레게 머리의 흑인은 크로포드를 바라보며 구슬픈 음색으로 말했다. 크로포드는 대답이나 위로 대신 하품만 내뱉었다.
나도 너만큼 피곤해, 크로포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흑인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흑인의 눈에 컨테이너의 문 앞을 얼쩡거리는 이강우가 들어왔다. 평범한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짊어진 이강우의 모습에 흑인이 눈빛을 빛냈다. 흑인이 이강우에게 말했다.
“당신이 응시자입니까?”
“예.”
이강우가 대답하자마자 흑인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이강우는 군말 없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건네줬다. 흑인 사내는 곧바로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안을 살핀 후에 곧바로 이강우에게 돌려줬다.
이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이게 끝?’
소지품 검사가 있으리란 건 당연히 예상했다. 꽤 철두철미하게 진행되리라고 생각했다. 가방은 물론 이강우는 몸수색 역시 충분히 예상하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가방 지퍼를 열고 그 안을 대충 훑고 끝나다니?
이강우의 표정에 흑인 사내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시험을 통과하면 다음에는 8등급 유적에서 시험을 치르게 될 텐데, 지금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통과할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고생하는 건 본인인데.”
그 말.
‘뭐라는 거야?’
이강우가 이해했을 리 만무.
때문에 이강우는 그저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만 지었다. 그런 이강우의 표정을 본 흑인이 등을 돌렸다. 설명은 대충 끝났으니, 이제 실전에 들어갈 차례. 곧바로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모래시계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험 통과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유적은 혼자 들어갈 것, 30일 이상 버틸 것, 무사히 귀환할 것.”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이 시작됐다.
* * *
이강우가 가방 하나만을 짊어진 채 유적으로 들어가는 순간, 크로포드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꽤 쌓인 부재중 전화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은 짧았고, 상대방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리볼버.
“희, 너무 전화를 많이 거는 거 아니야?”
-모든 대화 루트를 차단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수밖에 없었어.
통화 상대는 강희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안.”
크로포드는 짧게 사과했다. 강희는 그 사과를 듣는 순간 긴 한숨을 소리 내어 뱉었다.
-차라리 사과를 듣지 않았으면 했는데.
“내 처지 알잖아. 나 정말 급해. 아니, 애초에 희가 공주를 제대로 키웠으면 내가 이럴 일도 없겠지.”
-내 잘못이다?
“아니, 그저 짧은 푸념일 뿐이야.”
-그보다 지금 이강우는?
“지금 막 유적에 들어갔어.”
-기어코 클로저 라이센스 시험을 치르게 만들었군. 하지만 이강우 성격이면 리스크를 고려해서, 시험 응시를 쉽사리 받아들일 리가 없었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거지?
“줄 거 다 줬지.”
이 순간 강희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날카롭고 섬뜩한 비수 같은 목소리로.
-굳이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 해도 무방한 일을 억지로 했다는 건…… 너를 대신해 이강우를 그라운드 제로에 집어넣을 생각인가? 그게 아니면 아무리 너라도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없을 테니까.
크로포드의 목소리도 바뀌었다.
“글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억지로 감정을 죽인 목소리. 무덤덤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크로포드, 경고하는데 이강우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그런 크로포드에게 강희가 경고했다.
“명심하지.”
말과 함께 크로포드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통화를 마친 크로포드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희,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비밀이 많아.’
“그게 내가 널 안 믿는 근거지.”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