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블랙 스택
이강우는 병원이 싫다. 태어날 때부터 주사 맞는 것도 싫었고, 치과는 혐오의 대상, 그 자체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입원을 하고, 이강우의 인생이 빌어먹을 인생이 되면서 병원은 이강우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어머니 병문안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던 과거 이강우의 처지는 이강우를 비참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 이강우가 정말 번듯하고 멋진 외제 차를 끌고 병원에 등장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드디어 왔구나.’
자동차 안에서 병원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뿐인데 여러 감정이 가슴을 뒤죽박죽 흔들었다. 그 복잡함 속에서 이강우가 곁눈질로 자신의 옆 좌석에 앉은 채유리를 슬쩍 봤다.
‘왔긴 왔는데 혹도 하나 왔네.’
이강우가 기억을 되돌렸다.
이강우가 길드 마스터와 계약을 한 이후 채유리는 이강우의 옆에 꼭 붙어 다녔다. 그런 와중에 이강우가 병원을 찾는다고 했을 때 채유리 역시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내가 보디가드가 될게.”
퍽이나!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말대답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채유리의 심기를 뒤틀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신경 써주는 채유리가 고맙기도 했다. 길드 마스터와의 대화에서도 들었다. 채유리가 자기 밥줄을 걸고 이강우를 변호해줬다는 사실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채유리에게 먹인 밥이 아깝지는 않다고 생각됐다.
단지 한 가지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엄마 앞에 여자 데리고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설마 괜히 문제 생기는 거 아니겠지?’
정말 소소한 고민이었다.
* * *
이강우는 오랜만에 보게 된 자신의 여동생, 이혜연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숨부터 나왔다.
일단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주변에서는 어릴 적부터 미인 소리 꽤 들었던 여동생, 물론 이강우 입장에서는 어릴 적부터 자기 말은 죽어라 안 듣고, 자기 상대로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던 계집아이가, 평생 그런 시끄러운 계집애로 보일 것만 같았던 여동생이 처음으로 불쌍한 여인으로 보였다.
비단 이강우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이혜연 역시 그동안 장남과 가장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 바쳐 돈을 벌어온 이강우가 안쓰럽고, 고마웠다.
“오빠,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이야? 예전에 봤을 때보다는 살이 찐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
“그러는 넌 그때보다 더 빠진 것 같다? 다이어트 하냐?”
“내가 미쳤어?”
“엄마는.”
“오빠 온다는 소식에 한 시간 전까지 뜬눈으로 기다리셨는데 피곤하신지 곯아떨어지셨어.”
“그냥 주무시게 놔두자. 개선장군 온 것도 아닌데, 곤히 잠드신 엄마를 깨울 필요는 없으니까.”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법 수술을 받겠다니? 그냥 말만 툭 던지고 가면 어떻게 해?”
“그건…….”
그때 이혜연의 눈에 이강우의 등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채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혜연이 그녀를 보고, 다시 이강우를 보며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저 여자는 혹시 숨겨둔 딸?
‘미친! 얘가 미쳤나?’
이강우가 기겁하며 채유리를 소개했다.
“이쪽은 채유리 씨. 내 직장 상사다.”
“상사?”
“나 즈믄나래 소속이야. 즈믄나래. 내 상사면 당연히…….”
“아!”
마법사.
이혜연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채유리에게 인사를 했다.
“이강우 여동생 이혜연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오빠, 잘 부탁합니다.”
이제까지 알아서 잘 해왔는데, 여동생에게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을 받게 된 이강우의 코에서는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네, 잘 부탁합니다.”
동시에 얌전히 대답하는 채유리의 모습에 이강우는 콧방귀에 이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별걸 다 보네.’
블랙 에이전트 앞에서도 기가 죽긴커녕,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협박까지 하는 채유리의 이런 모습이 이강우는 신기하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이강우가 채유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채유리 씨. 여동생하고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족 간의 이야기다 보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채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혜연이 곧바로 이강우의 말을 바꿨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게 말이 돼요? 손님인데? 일단 병실로 가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 둘은 병실 밖에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채유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우는 이혜연을 바라봤다. 단숨에 자기 말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게 만드는 여동생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
그 둘의 눈빛으로 짧게 그리고 격하게 대화를 나눴다.
‘야, 넌 어떻게 된 애가 내 말 하나하나를 그렇게 비틀어야겠어?’
‘뭐? 불만 있어? 내가 틀린 말 했어?’
전화로 이야기를 할 때와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할 때가 다른 걸 보니, 그 둘이 보통 남매 사이인 건 분명했다.
* * *
이강우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참한 미인이었다. 여기에 요리도 잘하고, 골칫덩이나 다름없는 이강우를 회초리 한 번 휘두르지 않고 키워주신 어머니는 이강우의 자랑 중 하나였다.
그런 어머니가 나이 먹고 초췌해진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봤을 때 이강우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안 보길 잘했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그동안 보지 못했다. 만약 이런 어머니 모습, 한 번이라도 봤으면 정신이 나갔을 것 같다. 결국 자포자기로 지랄을 하다가 유적에서 무모한 짓으로 뒈졌을 것 같다.
‘그래, 이제 끝내야지.’
하지만 이제 이 광경도 오래 볼 필요가 없다. 이강우가 이혜연을 병실 밖으로 불렀고, 채유리는 조용히 간병인 자리에 앉은 채 이강우가 주머니에 넣어둔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밖으로 나온 이강우가 이혜연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나 마법사 됐다.”
“뭐?”
“마법사.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 심지어 특별대우를 받을 정도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혜연은 이강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강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하룻밤을 지새워도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시간이 있어도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순 없다.
필요한 건 핵심.
“어쨌거나 기회가 왔어. 파잔에서 수술을 해주기로 했어. 날짜는 2월 말이나 3월 초. 조만간 파잔 직원이 어머니의 몸 상태를 체크하러 올 거야. 놀라지 말고, 그 사람 오면 나한테 연락해 줘.”
“마법 수술이라니…….”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치료를 받으면 혼자서 병원 정도는 오고 가실 수 있으실 거야. 그렇게 되면 너도 굳이 어머니 간병 때문에 얽매일 필요 없고.”
이혜연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기뻐서 그리고 억울해서. 이강우가 가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건 것처럼, 이혜연도 자신의 전부를 가족을 위해서 희생했다. 그런데 이제 밑도 끝도 없던 그 고생이 끝이 나려고 한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렇지, 그런 돈이 어디서 나와?”
물론 현실도 피할 수는 없다.
이강우가 하는 말은 듣긴 좋지만, 돈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액수가 필요하다.
“진짜 내가 억 소리 나오는 부자가 됐어.”
“억 소리라니, 대체 어느 정도인데?”
“당장 널 데리고 백화점 가서 네가 사달라고 하는 건 다 살 수 있을 정도.”
“내가 명품관에 가서 전부 사 달라고 하면 사줄 수 있어?”
이혜연의 말에 이강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내가 말한 건 냉장고 같은 거, 그런 거 말하는 거야. 명품관을 쓸어버릴 돈이 있으면 집을 사야지!”
“장난이야.”
“장난치고 눈빛은 진지하던데?”
“그럴 리가. 그보다 더 할 이야기 있어?”
이강우는 어깨를 으쓱했고, 둘은 다시금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채유리가 반색하며 그 둘을 반겼고, 이혜연이 이강우에게 짧게 말했다.
“엄마 깨면 꼭 다시 데려와. 엄마가 제일 걱정하는 게 오빠 장가가는 거니까.”
“내가 그런 소리 나올까 봐 데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야.”
그 말에 이혜연이 조소를 머금었다.
남매, 오라버니에게 여동생이 먹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효과 좋은 비웃음이었다.
* * *
이강우는 어머니가 깨어나는 걸 보지 못한 채 병원을 나와야 했다. 아쉬운 감정은 없었다. 어차피 조만간, 날이 좀 더 지나면 어머니와 함께 맛집도 가보고, 여행도 갈 수 있을 테니까. 억지로 어머니를 단잠에서 깨우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이강우에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일이 끝나면 통화 가능하겠나?
안중현이 보낸 문자였고, 병원 밖으로 채유리와 함께 나온 이강우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예, 대장님.”
-아직 대장님이라고 불러주니 고마울 따름이군.
“당연히 대장님이라고 불러야죠.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면 제가 계신 곳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도 있고, 간단한 이야기도 있으니, 통화로 간단한 이야기부터 마치지. 일단 이번 유적 클로즈 보상금을 자네 통장에 입금했네. 액수는 5억 원 안팎일세. 4서클 아티팩트를 2개나 발견한 덕분에 클로즈 액수가 크게 뛰었지.
5억 원.
대단한 액수다. 어디 가서 번듯한 전셋집 정도는 단숨에 얻을 수 있는 액수.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금전 감각이 마비되는 느낌이군요.”
-동시에 자네는 오늘부로 내 밑에 사람이 아니네. 나를 대장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네.
“그럼 안 선배, 그렇게 부르면 됩니까?”
이강우는 통화를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안중현을 안 선배로 부른다는 건, 이강우가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가 됐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테니까.
-여전히 유쾌하군. 간단한 소식은 여기까지. 조금 중요한 소식을 가볍게 정리해서 말하면……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마 내년 1월 무렵에 미국을 방문하게 될 걸세.
“미국이요?”
-블랙 스택 지부 소속 마법사가 됐으니, 블랙 스택 본부는 한 번 가야지. 표면상은 출장이고, 여행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어쨌거나 비용은 전부 길드가 부담하니까.
드디어 이강우가 기다리고 고대하던 비행기 좌석 등급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기회가 왔다.
하지만 이강우는 기뻐할 수 없었다. 만약 그게 단순히 즐겁기만 한 일이었다면 안중현이 이렇게 통화로 말해줬을 리 없다.
“문제가 있습니까?”
-결국 통화로 이야기를 다 하게 되는군. 그래도 계속 말해주자면…… 즈믄나래는 다양한 이익집단의 경쟁과 협력과 암투 속에서 탄생한 연꽃 같은 존재다. 꽃은 화려하지만 그 아래에는 밑도 끝도 없는 진흙 늪이 있지. 무엇보다 자네를 두고 마스터가 움직인 이상, 블랙 스택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네를 한번 찔러볼 거야. 대체 왜 즈믄나래의 마스터가 사고 친 마법사 한 명을 영입하기 위해 블랙 에이전트를 움직였을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니, 집중 조사가 이루어질 수도 있네.
이강우가 입을 다물었다.
-결정적으로 이제 자네는 코가 꿰였어. 사방에서 창칼이 날아와 자네의 몸뚱이를 찔러도, 자네는 도망칠 수 없어.
안중현의 말이 맞다.
앞으로 장밋빛 미래만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강희, 그의 의중조차 모르는 상황 아닌가?
더군다나 마법사가 된 이상, 만약 정말 이강우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평가를 받는 만큼 어려운 유적 사냥 또는 몬스터 사냥에 포함될 것이다. 대우를 받는 만큼 일을 하게 되고, 리스크도 커질 터.
좋아할 때가 아니다.
-마지막 조언을 해주면, 하선우와 친하게 지내게. 내 입장에서는…… 괜한 소리는 필요 없겠지. 자네에게 접근하는 이들 중에 하선우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걸세. 그리고 채유리, 그녀는 무조건 잡게.
채유리가 언급되자, 이강우가 고개를 슬쩍 돌려 채유리를 바라봤다. 막대사탕을 입에 쏙 넣은 채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그녀를 보는 이강우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눈치가 있다면, 그녀가 자네에게 정도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터. 그럼 연애를 해서라도 잡게. 채유리만큼 즈믄나래 그리고 블랙 스택에서 독자적인 무언가를 가진 이는 많지 않으니까. 그녀를 잡으면, 그녀는 자네의 우산이 되어줄 걸세.
“예,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봤을 때 자네는 다른 건 다 잘해도 연애에는 재주가 없으니, 이 조언은 별 쓸모가 없겠지.
“아니, 제가 연애 못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보면 알지.
“절대 아닙니다. 언제 한번 날 잡으시면, 제 화려한 대서사시나 다름없는 연애 스토리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자네는 거짓말을 참 잘하지. 좋은 의미로 말이야. 그럼 다음 기회에 보지. 본래는 만나서 할 이야기를 통화로 전부 해버렸으니, 당분간 만날 기회는 없을 터.
“언제든 만나면 되지요. 같은 회사 직원인데.”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날 도와준 것 고맙네.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화가 끝이 났다.
이강우는 꺼진 스마트폰 액정을 짧게 바라보고는 스마트폰으로 이마를 툭툭 쳤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시나리오도 바뀌어야지.’
가벼운 분위기, 장난은 여기까지다.
‘뭐든 간에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무조건 내년 3월이 되기 전에 3서클을 확보한다.’
이제는 다시 포식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 * *
2020년 12월 28일 월요일.
새해를 얼마 남기지 않은 오늘, 이강우는 평소처럼 즈믄나래 본부 빌딩에 출근했다.
하지만 옷차림은 평소와는 달랐다. 처음 즈믄나래 본부 빌딩을 방문했을 때처럼 이강우가 가장 아끼는 명품 정장을 입고 있었고, 헤어스타일도 그냥 대충 남성 전문 이발소가 아니라 조금 값 좀 나오는 미용실에서 자른 티가 물씬 풍길 정도로 단정한 투블럭 스타일이었다. 여기에 몸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도 났다. 평소 향수는 무슨, 스킨로션이면 호사지! 라는 것을 인생 모토로 살아온 이강우답지 않은 냄새였다.
다른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강우가 즈믄나래 본부 빌딩에 들어가자, 언제나 그를 반갑게 맞이했던 안내데스크 직원이 살짝 놀란 눈으로 이강우를 바라봤다. 경호원들 역시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더 긴장된 표정으로 이강우를 바라봤다.
반면 이강우는 긴장 하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지하만 들어갔던 이강우가 8층 버튼을 눌렀다. 즈믄나래 본부 빌딩에서 7층 이상은 마법사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8층을 눌렀다? 이강우의 변화를 알려주는 방점이다.
‘마법사.’
총꾼 이강우가 마법사가 되어 돌아왔다.
크루, 그것도 하이에나 크루 소속 총꾼이 한국 제일의 길드 중 한 곳이라 평가받는 즈믄나래 길드의 마법사가 됐다.
격세지감.
‘드디어 나도 마법사다.’
솔직히 이강우는 여전히 자신이 마법사가 됐다는 걸 제대로 체감할 수 없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마법사 이강우 씨 사인해주세요! 같은 걸 듣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들은 이강우가 마법사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강우가 나서서 저 즈믄나래 마법사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소개를 할 수도 없는 노릇. 결정적으로 이 사실을 주변에 알려줄 만한 친구도 없었다.
결국 이곳, 즈믄나래 본부 빌딩이 이강우가 마법사임을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인 셈.
‘그보다 8층에 뭐가 있으려나?’
한편으로는 지금 이강우가 도착하게 될 즈믄나래 본부 빌딩 8층이 어떤 곳인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마법사만을 위한 공간. 그것도 즈믄나래 마법사만을 위한 공간. 이야기만 들어도 대단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강우 역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8층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상상했었다.
한쪽에서는 바가 있어서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얼마든지 공짜로 마실 수 있고, 다른 한쪽에는 스크린 골프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최고급 안마의자가 그냥 평범한 의자처럼 너부러진 광경. 여기에 돈 넣을 필요도 없이 버튼만 누르면 되는 초콜릿 과자 가득한 자판기까지.
물론 현실은 다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냥 평범한 회사 사무실 풍경이라고 한다. 굳이 좀 더 자세한 비유를 하면, 금융계열 회사 사무실 느낌이 난다고 한다.
‘설마 정말 평범하겠어?’
하지만 이강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들을 위한 공간인데, 평범할 리가 없다. 분명 특별한 게 있을 것이다.
띵!
그때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이강우가 숨을 고르고, 정장의 옷맵시를 고쳤다.
‘이강우, 촌놈처럼 굴지 마. 이제 넌 즈믄나래 마법사, 그것도 넘버스 멤버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이강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응?”
그야말로 평범한 공간이었다.
* * *
즈믄나래 본부 빌딩 8층은 넓은 공간을 수백 개의 반투명한 유리를 이용해 수십 개로 나눈 듯한 모양새였다. 쉽게 말해서 유리벽을 이용해 여러 개의 사무실을 만들어두었고, 각 사무실에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개중 몇몇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낮잠을 자거나, PC를 이용해 별 의미 없는 인터넷 기사를 살피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일이라는 것.
“아, 보고서 쓰기 싫어. 클로즈 하면 됐지, 왜 이걸 일일이 보고서를 써야 하는 거야?”
마법사의 임무는? 몬스터 사냥 그리고 유적 사냥이다.
그리고 이 사냥이란 건, 그저 하고 끝이 아니다. 마법사는 유적 사냥에서 가장 많은 메리트를 챙긴다. 그런 만큼 유적 사냥 과정 전체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유적 사냥은 전후로 몇 가지 꼭 처리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일단 유적 사냥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사냥 계획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이런이런 마법사와 총꾼을 모았고, 이 정도 전력이면 이 정도 유적은 충분히 클로즈 할 수 있으니 사냥 허가를 내려주십시오! 하는 계획서다. 길드는 마법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이 계획서가 부실하면 당연히 유적 사냥은 불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마법사는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유적 사냥 횟수를 채우기 위해 수준 낮은 등급의 유적 사냥을 배정받는다.
그리고 유적 사냥을 마친 후에는 보고서도 써야 한다. 유적 사냥 과정에서 얻은 내용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저 사실만 보고하면 의미가 없다.
현재 유적은 여전히 미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런 유적을 직접 경험한 마법사의 경험은 그 무엇보다 가치가 넘친다. 그렇기에 유적 사냥을 마친 마법사는 보고서를 쓸 때 주관적인 의견도 써야 한다. 때로는 논문에 가까운 보고서를 쓰는 이들도 있다. 이걸 즈믄나래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안중현이었고, 그렇기에 안중현이 베테랑 대우와 함께 4서클 마법사이면서도 5서클 마법사들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에게는 그냥 짜증 나는 일이다.
“옆방에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미치겠다고 하지 마. 듣는 사람도 미칠 것 같으니까.”
“내가 입장 3일째에 몬스터와 싸웠던가, 4일째에 싸웠던가, 98시간이니까 24로 나누면…….”
“몬스터 사냥 순서를 적은 수첩이 분명 여기 있었는데. 내 수첩 본 사람? 본 사람 없어?”
“그걸 왜 우리한테 찾아?”
더군다나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넘게 치러지는 유적 사냥 과정을 정리하는 건, 어릴 적 방학 숙제를 개학 일주일을 남기고 몰아서 하는 느낌하고 비슷하다.
하려면 하겠는데, 그냥 짜증이 난다. 미칠 것 같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런 소란 속에서 이강우는 멍하니, 자신에게 배정된 사무실 안의 의자에 앉은 채 하염없는 시간만 보냈다. 자신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다른 현실 앞에서 정말 제대로 당황한 모양이다.
‘뭔가 굉장히 잘못된 것 같아.’
그렇게 이강우가 멍하니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에 적응조차 못 한 채 시간을 보낼 무렵.
따르릉!
이강우의 사무실에 설치된 전화기가 울렸고, 이강우가 깜짝 놀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이강우입니다. 무엇을 주문…….”
무의식중에 받은 전화 때문에 헛소리가 나왔다.
‘미치겠네.’
이강우가 간신히 그 헛소리를 참고 재차 말했다.
“마법사 이강우입니다.”
-아이템 지원팀입니다. 이강우 씨 마법 아티팩트 지급 관련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 말에 이강우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거지.’
이제야 마법사가 된 게 실감이 됐다.
* * *
마법사 집단, 길드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많다. 자금력, 마법사 숫자, 배경, 인맥…… 하지만 만약 개중에서 가장 확실한 잣대를 정하라면 기준은 하나밖에 없다.
길드에 속한 마법사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 아티팩트를 얼마만큼 대여해줄 수 있는가?
핵심이다.
마법 아티팩트의 사적인 거래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에서 보다 다양한 종류의, 보다 많은, 보다 높은 서클의 마법 아티팩트를 가진 길드가 최고 길드다.
즈믄나래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중 한 곳인 이유도 결국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마법 아티팩트에 대한 우선 사용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법 아티팩트를 마법사가 고르는 과정 역시 굉장히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12월 말, 겨울 날씨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딱 적당한 온도를 가진 방 안에서 원하는 종류의 원두로 내린 커피 혹은 실력 좋은 소믈리에가 선정한 와인을 마시면서, 태블릿 PC를 이용해 원하는 속성, 원하는 타입, 원하는 서클, 원하는 마법을 고를 수 있었다.
태블릿PC 위를 손가락으로 휙휙 만지던 이강우는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4개.’
즈믄나래는 이강우에게 2서클 이하 마법 아티팩트를 최대 4개까지 소지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또한 매물이 있다면, 언제든 아티팩트를 교체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고민하지 않았다.
‘일단 마력검과 해독 마법부터.’
이강우가 사용하는 마법 중 가장 빈도가 높은 건 마력검 마법이다. 도축 대상 몬스터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결국 기본 장비만으로는 도축이 불가능해진다. 마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해독 마법은 필수다. 이강우가 독을 소화할 수 있는 재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위장으로 먹었을 때 일이고 다른 부위가 독에 노출됐을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몬스터를 만지면서 도축해야 하는 이강우 입장에서 해독 마법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여기에 요리도 만들어줘야 하니, 더더욱 필요하다.
물론 이 두 가지 마법은 이강우의 마법 목록에 있다. 이강우는 마법 아티팩트 도움 없이도 두 가지 마법은 쓸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법 아티팩트 없이 이강우가 두 가지 마법을 쓴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강우에게 붙은 넘버스 멤버의 숫자, 9번은 9번 샘플이란 표현으로 쓰이게 될지도 모른다. 연구실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현재 이강우가 마법 슬롯에 넣을 수 있는 3개. 슬롯에 있는 마법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고려하면, 중복되더라도 두 개의 마법 아티팩트를 확보해서 나쁠 건 없다.
‘다른 하나는 헤이스트.’
세 번째는 버프 마법인 헤이스트를 골랐다. 이번 유적에서 헤이스트 마법을 써본 결과 여러모로 궁합이 좋았다. 도망칠 때도, 몬스터와 싸울 때도. 무엇보다 이강우가 소지하지 않은 마법이다.
이 세 가지는 무조건 가져가야 한다.
‘남은 건 하나.’
결국 남은 여유분은 1개.
하지만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공격 마법을 하나 골라야 한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너무 재능이 넘치니까 고민도 넘치는군.’
가장 큰 고민의 이유는 이강우가 가진 재능이다.
대마도사의 자질.
이강우는 무슨 마법이든 좋다. 화염계든, 전격계든, 땅불바람물마음, 뭐든 쓸 수 있다.
여기에 마법 타입도 가리지 않는다. 좌표 타입, 타겟팅 타입, 메이킹 타입…… 주면 쓴다.
‘2서클로 가면 한 방은 있는데 반복은 힘들고. 1서클로 가면 결국 견제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결국 이강우는 코코아 한 잔을 전부 해치운 후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새로운 음료를 주문했다.
“여기서 가장 비싼 게 뭡니까?”
“예?”
“공짜로 먹는데 비싼 것 좀 먹어보려고요.”
“……아무래도 와인이 비싸겠죠.”
“그럼 비싼 와인 하나 주세요.”
참으로 속물적인 주문을 마친 후 이강우는 좋아하지도 않는 와인을 홀짝이며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고민 끝에 이강우가 고른 건 번개침이라는 1서클 마법이었다. 장침 형태의 번개를 만든 후에 대상에게 맞춰서 피해를 주는 마법으로 대상에 따라서는 감전 효과에 따른 마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견제기로는 제법 가치가 높지만, 전격계 마법이다 보니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마법.
이 마법을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이걸로 라이트닝 다트도 긴급한 순간에 쓸 수 있겠어.’
번개침 마법의 성향은 이강우가 현재 가진 가장 강력한 마법, 라이트닝 다트와 흡사했다.
이강우의 경우에 버닝 마나를 쓰면 보유한 3서클 마법인 라이트닝 다트를 쓸 수 있다. 그럼 그 마법을 쓸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두는 게 더 나을 터.
그렇게 이강우의 마법 아티팩트 주문이 끝났다.
그리고 그 주문이 끝나자마자 이강우가 받은 건 마법 아티팩트가 아닌.
“응?”
5시간 후 시애틀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이었다.
* * *
스텝 리자드.
9등급 몬스터로 150센티미터에서 180센티미터 사이의 신장을 가진 놈은 거대한 도마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이점은 스텝, 두 다리로 걷는다는 것과 두 손에 달린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독특한 신체 내부 구조 때문에 상처가 나도 피는 잘 나지 않아 의외로 잡기 까다롭다는 부분이었다.
그런 스텝 리자드를 앞에 두고 한 마법사가 간을 보고 있었다.
미로.
벽으로 가로막힌 공간 속에서 대치 중인 마법사와 스텝 리자드. 그런 마법사의 뒤로는 총을 든 총꾼과 여러 마법사가 있었지만, 그들은 경계만 할 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은 천장 가까이 떠 있는 벌룬에 설치된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사가 움직였다.
인간을 초월하는 몸놀림을 보이며, 빠른 속도로 벽을 타고, 스텝 리자드의 뒤로 이동한 마법사는 곧바로 스텝 리자드의 등을 향해 돌진했다. 낌새를 느낀 스텝 리자드가 꼬리를 채찍처럼 크게 돌리며 제 몸도 돌렸고, 마법사는 자세를 낮추며 꼬리를 잽싸게 피했다.
꼬리를 피하면서, 몸을 돌리는 스텝 리자드의 왼쪽 옆구리, 겨드랑이 아래에 쥐고 있는 단검을 꽂았다.
푹!
단검은 정확히 살점만을 파고들며 깊숙하게 들어갔고, 마법사가 잽싸게 검을 뽑아내자 콸콸!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깊숙한 곳에 숨겨진 스텝 리자드의 혈관을 제대로 찔렀다는 증거였다.
이 갑작스러운 출혈에 스텝 리자드가 꺼어, 꺼어! 괴성을 토해냈다. 그때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탁!
소리와 함께 번쩍! 불똥 하나가 스텝 리자드의 눈앞에서 터졌다. 불똥은 스텝 리자드의 시야를 잠시 동안 하얗게 만들었고, 스텝 리자드가 두 손을 제 눈 근처로 가져갔다.
그때 마법사가 호흡을 멈추고 스텝 리자드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며 스텝 리자드의 명치 부근에 단검을 찔렀다. 푹, 단검은 성인 남자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들어갔다. 깊었지만, 스텝 리자드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은 깊이의 상처였다.
그런데 거기서 사내가 단검으로 그림을 그리듯, 움직였다. 단검은 명치에서 아래로 곧게 내려왔고, 옆구리 쪽을 향해 구불구불, 적당한 사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단순한 칼질이 아니었다. 도축이었다. 고깃덩이를 잘라내듯, 뼈를 요리조리 피하며 살덩이만을 정확하게 잘라냈다.
결과는 섬뜩했다. 스텝 리자드의 가슴살이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출혈은 적었다. 덕분에 더더욱 섬뜩한 광경이 연출됐고, 그 섬뜩한 광경 사이로.
푹!
사내가 재차 단검을 꽂아 넣었다.
끅!
스텝 리자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으며 숨이 넘어갔다. 그 상태로 앞으로 쓰러졌다.
깔끔한 솜씨.
하지만 마법사는 스텝 리자드가 넘어지는 순간 오히려 더 강렬한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는 더 빠르고 정확한 솜씨로 스텝 리자드의 오른쪽 옆구리와 목덜미 부근 그리고 아킬레스건 부근에 칼집을 냈다. 콸콸, 핏물이 쉴 새 없이 뿜어졌고, 사내는 그사이 스텝 리자드의 꼬리를 잘라냈다. 살점을 잘라내고, 뼈와 뼈 사이에 제대로 칼을 집어넣으며 단숨에 싹둑 잘라냈다.
곧바로 꼬리부터 등줄기를 타고, 목 뒤까지 칼로 선을 그은 후에 단검을 역수로 잡아, 잘라낸 선 사이로 집어넣어 가죽과 살점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가죽을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음.”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강희, 그는 여기서 동영상을 정지했다. 영상을 정지한 후, 곧바로 이메일에 첨부하여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영상을 보낸 강희가 옅게 웃었다.
‘블랙 스택에서 이강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군.’
* * *
시애틀 직항 비행편, 약 11시간 동안 신세를 지게 될 자신의 비행기 좌석을 보는 순간 이강우는 첫 자가용을 구매한 젊은 청년이 지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거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이강우는 의자를 뒤로 젖힐 때마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을 자랑하는 좌석에 앉으며 두 눈을 감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모셔야 할 사람도 없고, 착 달라붙던 채유리도 없다. 돈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집에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확인할 이유도 없다.
그야말로 휴가를 위해 모든 것이 완료된 상황.
하지만.
‘블랙 스택이라…….’
좌석에 앉는 순간 이강우는 휴가를 기대하는 표정이 아닌 우중충한 표정을 지었다.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가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블랙 스택 본부를 방문하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다. 블랙 스택 본부는 유적과 관련된 정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다. 더불어 미국은 블랙 스택의 주요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온갖 조치를 해놓은 만큼, 그 정보를 조금이라도 경험하려면 직접 블랙 스택 본부를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아무래도 지부에 소속된 이들은 블랙 스택에 대한 소속감이 옅을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블랙 스택 본부 방문은 조금이나마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강우의 시애틀행은 너무 갑작스럽게 잡혔다. 단순히 블랙 스택 관광을 위한 출장은 아닐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날 써먹으려고 한다는 거겠지.’
분명한 건 무슨 일을 벌이든 이강우가 좋아서, 순수한 호의에서 나올 리는 없다는 것이다.
유적, 마법사 그리고 길드.
철저하게 계산적인 관계다.
그러니까 그들 입장에서, 길드 입장에서 이강우를 바라보는 거다.
‘나는…….’
이강우.
몬스터 도축 기술 및 요리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술을 전투에 응용할 줄 아는 2서클 마법사. 대마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성장 가능성 농후.
자화자찬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다.
이강우는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는 종목이다. 하지만 아쉬운 감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내가 여기서 좀 더 나아졌으면 더 쓸모가 있겠지.’
2서클은 역시 애매하다. 기왕이면 3서클 마법사가 되는 게 더 좋을 터. 2서클과 3서클은 확실히 차이가 크다. 이강우가 2서클이라고 해도 당장 유적에 투입 못 할 건 아니다. 필요하다면 6등급 유적, 무리하면 5등급 유적에도 집어넣을 수 있다.
하지만 3서클 마법사라면.
‘4등급인가?’
4등급 유적 사냥에 포함할 수 있다.
대단한 일이다.
동시에.
‘그러고 보니 그 문은…….’
즈믄나래, 아니 한국 정부는 4등급 모래시계문 하나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마.’
이 순간 묘한 불안감을 느낀 듯,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 * *
11시간의 비행은 이강우에게 괴로움보다 즐거움을 줬다. 좌석이 편하니, 모든 게 편했다. 서비스도 최고였다. 기내식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이강우는 자신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없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느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땅콩을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해외다.’
그렇게 장시간의 비행 끝에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이강우는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와우.’
입국심사가 없었다.
이강우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미 따로 빼놓은 짐과 함께 일반인들과는 다른 루트를 통해 이동했다. 여권 한 번 꺼낼 필요 없이, 그냥 이강우는 자신을 마중 나온 블랙 스택 직원만 따라다니자, 모든 것이 프리패스였다.
심지어 준비된 차 역시 예상외의 차종이었다. 이강우는 그저 적당한 등급의 세단 정도가 준비되리라 생각했는데 준비된 차는 SUV로, 딱 봐도 단순한 SUV가 아니라 방탄 기능을 탑재한 놈이었다.
‘와우.’
공항부터 차까지. 단순히 좋은 대우가 아니라, 당신을 어떻게든 위기로부터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런 느낌.
‘완전 공주님 대우군.’
이런 대우 앞에서는 무어라 질문조차 던질 수 없었다.
그리고 차는 곧바로 조금의 주저함도, 거리 낭비도 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 * *
블랙 스택 본부가 위치한 곳은 시애틀 내에 위치한 디스커버리 공원이었다.
과거 디스커버리 공원은 시애틀 시민들 모두가 알고, 여유가 된다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공원이었지만, 2020년에 접어든 디스커버리 공원은 오직 허가받은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는 제한 구역이 됐다. 이제는 오로지 블랙 스택을 위한 구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블랙 스택이 디스커버리 공원에 자리를 잡은 건, 디스커버리 공원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4등급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디스커버리 공원을 폐쇄한 다음 모래시계문 연구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고, 그 연구 과정에 블랙 스택의 설립 멤버들이 참가했다. 이후 블랙 스택이 등장하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디스커버리 공원 전체를 블랙 스택이 쓰게 된 것이다.
덕분에 블랙 스택 본부는 풍경이 아름다운 길드 본부로도 유명했다. 본부에서 나오면 눈앞에 펼쳐지는 게 거대한 공원이고, 그 공원을 좀 더 걷다 보면 바다와 이어진 퓨젯사운드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강우는 블랙 스택 본부의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자마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이 아닌 지하로 들어가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휴가는 개뿔.’
예상대로 휴가는 없다.
휴가 대신 이강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즈믄나래 소속 2서클 마법사 이강우 씨, 맞습니까?”
“예.”
“따라오시죠.”
이강우가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 * *
평범한 회의실 같은 공간이었다. 책걸상이 있고, 단상이 있는 평범한 회의실. 그곳에 앉은 이강우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이강우 앞에는 한 사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벽안 그리고 금발. 거뭇거뭇, 턱에는 수염이 가득했고 반곱슬의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사내의 눈매는 나무늘보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사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니,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기세는 담담했다. 그냥 길 가다 봤으면 짜증 가득한 사내, 그 정도로 치부됐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눈앞의 사내를 알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과 정체, 나이도 알고 있었다.
비단 이강우뿐만이 아니라, 이 바닥…… 모래시계문과 얽혀 있는 인간이라면 대부분이 그 사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맙소사, 여기서 리볼버를 만나게 될 줄이야.’
리볼버.
당연히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본명은 루이스 크로포드. 블랙 스택 소속 마법사로 세계에 열 명조차 되지 않는 7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다.
별명이 리볼버인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까지 그가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하나의 몬스터를 상대로 7번 이상의 마법을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6번의 마법이면 어떤 몬스터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리볼버다. 여섯 발의 탄환을 품을 수 있는 리볼버는 루이스 크로포드의 강함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별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여러모로 어마어마한 자다. 유적을 사냥하는 마법사들 중에 정점에 있는 자다. 미국 대통령도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해서 일정을 잡아야 할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런 그가 눈앞에 있었다.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보고서를 손에 쥐고 있었고, 보고서를 읽으면서 수시로 이강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강우의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탐탁지 않은 부하직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크로포드가 쥐고 있던 보고서를 자신의 옆에 대기 중인 통역관에게 넘겼다.
“즈믄나래에서 골치 아픈 놈을 보냈군. 그러니까 저 녀석을 1년 후에 3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할 수 있도록 키워달라고?”
술술 흘러나오는 영어에 이강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자기 깜냥으로 영어를 해석하기 위해서 최대한 집중을 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집중을 해도 이강우는 크로포드가 한 말의 반의반도 해석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통역관이 곧바로 크로포드의 말을 통역해 줬다. 통역을 들은 이강우는 기겁했다.
‘1년 후에 3등급 유적? 뭐지?’
기겁하는 이강우를 앞에 두고 크로포드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보다 내가 분명 이제까지 마법사 애들 상대로 강의도 하고, 후진 육성을 위해 여러모로 많은 기여를 하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맨투맨으로 새내기 마법사를 가르치라고? 내가?”
통역관이 곧바로 그 말을 이강우에게 통역해줬다. 그 광경을 본 크로포드가 통역관을 보며 말했다.
“아니, 그냥 혼잣말에 푸념인데 그런 것까지 굳이 일일이 통역을 해줘야겠어?”
통역관은 그 말도 통역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꽉 다물었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통역관의 반응을 본 크로포드는 손을 내저었다. 짜증 가득한 손놀림이었다.
“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휴가를 보름 앞두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희. 그의 부탁이니까 들어줘야지.”
크로포드가 통역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전부 통역하라는 제스처.
“내 이름은 크로포드. 루이스 크로포드다. 설마 날 모르진 않겠지? 그러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다. 일단 내가 받은 부탁은 네 녀석을 1년 후에 3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도록 만들라는 거다.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통역을 들은 이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지금 고작해야 2서클에 불과한 녀석이 1년 후에 3등급 유적이라니…… 기본적으로 3등급 유적 사냥은 모두 마법사로만 구성되고, 그 마법사들마저도 아무리 못해도 4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가능한데 말이야. 달리 말하면 그쪽을 1년 안에 4서클 이상의 마나 서클을 가진 마법사로 만들라는 말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강우는 통역을 듣자마자 다시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저었다. 좌우로 저으면서 생각했다.
‘젠장, 대체 길드 마스터는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일단 길드 마스터 강희가 리볼버에게 사적인 부탁을 할 정도로 친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안면이야 있을 것이다. 강희는 블랙 스택 창립 멤버 중 한 명이고, 리볼버 역시 블랙 스택이 세워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랙 스택에 이름을 올린 거의 초창기 멤버였으니까.
그런데 이강우가 지금 그 절친한 둘 사이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썩 원치 않는 신세였다.
‘난 채유리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7서클 마법사랑 같이 지내라니…….’
내용 자체는 구미가 당긴다. 1년 안에 4서클 마법사로 만들어주겠다? 가능만 하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일뿐더러, 7서클 마법사랑 같이 행동하면, 4서클 마법사가 되기 전에 이강우의 위장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채유리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상대다. 상대가 기침만 해도 이강우는 자리에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강우는 1년 후에 3등급 유적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5등급 유적도 들어가기 싫다. 언젠가는 들어가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해진 다음 이야기지, 지금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다. 하물며 3등급 유적을 들어가라고?
이강우가 알기로 현재 전 세계에서 3등급 유적 클로즈에 성공한 곳은 딱 한 곳, 칠성문뿐이다. 하지만 칠성문의 3등급 유적 클로즈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곳은 없었다. 칠성문이 세간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고, 그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쨌거나 3등급 유적은 4서클은커녕, 5서클 마법사들도 감히 입장을 시도할 수 없는 세계다. 커트라인이 4서클이라고 하지만, 아주 특별한 능력, 마법 능력 외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이야기다.
분명한 건 이강우는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3등급 유적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그 심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강우가 활활 타오르는 속의 불길을 어떻게든 내뱉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 이강우의 모습을 본 크로포드는 이강우보고 들으라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 한숨 사이로 상황을 정리했다.
“휴가까지 보름. 휴가가 끝나면 4등급 유적 사냥. 그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의미이군. 차라리 휴가를 일찍 갔으면 이런 귀찮은 일도 겪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참 재수도 없지.”
말과 함께 크로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강우를 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일단 검사부터 하자고. 가장 좋은 건…… 독에 대한 내성부터 테스트하는 게 좋겠지. 그래, 그게 좋겠군.”
곧바로 통역관이 통역을 해줬고, 통역을 듣는 순간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이강우의 블랙 스택에서의 첫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