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넘버스
“어이구…….”
온몸의 관절을 확인하려는 듯, 머리 어깨 무릎 발, 관절 전부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이강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던 박태중이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게 작전이었으니까 다행인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그 말에 이강우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예, 큰일 날 뻔했죠.”
‘침이 아까워서 저도 모르게 먹는 바람에 중독됐다면 날 아주 이상한 놈으로 취급하겠지?’
30여 분 전, 이강우와 채유리가 이우희와 박태중을 돕기 위해 합류했던 순간, 이강우가 제안을 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벽두꺼비를 잡자고.
계획은 간단했지만, 쉽진 않았다. 작은 실수, 사소한 문제와 변수만으로도 이강우가 죽을 수 있었고, 때문에 작전이 실행된 뒤 상황은 긴박하게 흘러갔다. 채유리 같은 경우는 날았다. 작전이 시작되고, 이강우가 미끼가 되어 벽두꺼비를 유인하는 순간, 그녀는 벽을 타지 않고 멀리 뛰기로 미노타우로스를 그냥 뛰어넘었다.
더불어 그녀는 빗살무늬전갈독에 의해 굳어 버린 이강우를 발견하는 순간, 그가 죽은 줄 알고 뺨을 아주 세게! 온 힘을 다해 여섯 번 후려쳤다. 터졌던 이강우의 입술이 더 터졌고, 덕분에 이강우는 안젤리나 졸리 부럽지 않은 입술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후 박태중이 채유리를 간신히 말리고, 이강우에게 해독 마법을 쓰면서 위험한 순간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이강우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긴장된 분위기가 해소됐다. 더불어 이우희의 몸에도 이상이 없으며, 그녀가 미약하게나마 의식을 차리면서 근심거리는 해소됐다.
‘대단한 녀석이야.’
어쨌거나 이번 일을 기점으로 박태중은 머릿속에 있는 이강우에 대한 평가를 다시금 수정해야 했다.
일단 이강우의 배포와 행동력에 박태중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점수를 줬다.
안중현과 함께 유적 사냥을 하는 이들은 전부 안중현의 충신이나 다름없다. 이유도 필요 없다. 안중현이 목숨을 걸고 미끼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마다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정도 각오도 없다면, 어떤 직업보다 사망률이 높은 유적 사냥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막말로 길드가 유적에 억지로 사람을 집어넣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목숨을 거는 것과 활약은 별개의 이야기다. 목숨을 건 각오를 품었어도 막상 실전에서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물며 상대는 6등급 몬스터, 벽과 땅을 제멋대로 오고 가는 특수하기 그지없는 능력에 환수 타입으로 총이나 수류탄 따위가 통하지도 않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이강우가 아무리 독이라는 노림수를 준비했어도, 그 노림수가 통하기도 전에 벽두꺼비에게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강우는 자기 역할을 해냈다. 거듭된 놈의 공격, 보통 사람은 그냥 정신을 잃어버렸어도 무방한 충격에도 정신을 잃지 않았고, 역할에 충실했다.
특히 긴급한 순간에도 이강우는 연기를 계속했다.
‘몬스터를 속일 연기력이라…….’
어떻게 보면 그게 대단한 일이다. 벽두꺼비는 용의주도하고, 조심성 많은 녀석이었다. 어설픈 연기였다면, 놈은 낌새를 느끼고 그냥 벽 속에 모습을 감춘 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수류탄 연기는 아카데미상 급이었어.’
그중 백미는 역시 수류탄 연기일 것이다. 이강우는 정말 궁지에 몰린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
‘확실히 사냥을 할 줄 알아.’
무조건 강한 게 정답은 아니다. 강하기만 하면, 때로는 몬스터가 그냥 도망쳐버리니까.
“그보다 해독 마법이 통해서 다행이군.”
물론 위험하긴 위험했다.
빗살무늬전갈.
솔직히 박태중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몬스터다. 그 몬스터의 독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그래도 6등급 몬스터를 단숨에 석상처럼 굳어버리게 만드는 독인데 독력(毒力)이 적을 리 없다. 해독 마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강우는 해독 마법을 받자마자 곧바로 호흡을 시작하고,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계속 움직이다 보니 이제는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수준까지 됐다.
“정말 운이 좋았어.”
박태중은 일단 해독이 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의미를 뒀다. 다른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 이강우가 해독 마법 덕도 못 보고, 독에 죽는 걸 바라진 않았으니까.
“네, 운이 좋았죠.”
‘운이 아니라 소화력이 좋은 거지만.’
이 순간 이강우는 옅게 웃으면서, 중독과 동시에 자신의 눈앞에 알림이 뜨는 순간을 떠올렸다.
‘불사황제가 새로운 능력을 준 건가?’
벽두꺼비의 침을 먹었을 때 아차 싶었다. 온몸이 굳으면서, 심지어 폐마저 굳으면서 호흡마저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됐을 때,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공포감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죽을 줄이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도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40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35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22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갑자기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연속해서 이강우의 눈앞을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죽는 와중에 환각을 본다고 생각했다.
‘독도 소화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그러나 환각이 아니었다.
독이 이강우의 위장에서 소화되면서, 순차적으로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뜬 것이다. 동시에 독이 소화되면서 중독 증상도 빠르게 완화되기 시작했다. 사실 박태중의 해독 마법이 통한 게 아니라 이강우가 자력으로 해독을 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능력을 얻었군.’
이게 원래 불사황제가 줬던 소화력 덕분인지, 아니면 새롭게 불사황제에게 받은 능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이강우는 굳이 자신이 독도 소화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독을 먹어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까.
분명한 건, 이 능력이 가지는 가치는 굉장히 크다는 점이다. 독을 섭취할 수 있다면, 이강우가 마력을 섭취할 수 있는 폭이 대폭 늘어난다. 또한 남들이 먹지 못하는 걸 이강우 혼자만 먹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독이 가진 마력의 양이 상당했다.
‘고작 그만큼 소화했는데 150포인트 가까운 마력을 섭취했어.’
정말 소량의 독이었다. ㎖ 단위가 아니라, 한두 방울이라고 해도 표현해야 할 정도로 소량.
그런데도 섭취한 마력 포인트는 150포인트 가까웠다. 만약 김재범이 준 빗살무늬전갈독 전부를 먹었다면? 최소 1천 포인트가 넘는 포인트를 섭취했을 터.
‘몬스터 고기, 마나스톤에 이제 독까지…… 나중에는 아티팩트도 씹어 먹겠군.’
그렇게 이강우의 메뉴표에 새로운 메뉴가 추가됐다.
* * *
벽두꺼비를 끝장낸 건 채유리였다. 그녀는 벽에 박힌 채 이강우를 물고 있는 벽두꺼비의 두 눈 사이, 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마력검을 거침없이 꽂아 넣었다. 이미 녀석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던 채유리다. 검을 내찌르는 데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죽은 녀석을 꺼내는 작업이 고역이었다. 녀석이 죽는 순간 녀석이 가진 특수한 능력도 사라졌고, 녀석은 이제까지 녀석의 사냥한 사냥감이 그랬던 것처럼 본인이 벽 속에 갇혀버렸다. 그런 녀석을 꺼내기 위해 벽을 부수고, 땅을 파냈다.
세심한 작업이었다. 6등급 몬스터의 가치는 적지 않을뿐더러, 벽두꺼비의 침은 정말 비쌌으니까. 화석을 발굴하듯, 심혈을 기울인 작업을 했다.
그 벽두꺼비가 지금 이강우 앞에 있었다.
‘6등급 몬스터치고는 솔직히 볼품없네.’
벽두꺼비는 마치 체중이 300킬로그램이 넘어가는 초고도비만 환자처럼 보였다. 거대하다기보다는 비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은 괜찮나?”
더불어 이강우 옆에는 안중현이 있었다.
이강우가 벽두꺼비를 도축하는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어디 가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일뿐더러, 어쩌면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일지도 몰랐으니까.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럼 냉정한 소리이겠지만, 업무 이야기를 해야겠군. 도축을 할 자신이 있나?”
“해야죠. 이대로 놔두면 그냥 썩을 텐데.”
“실수 한 번이면 돌이킬 수 없는 손해일세.”
이강우는 깊게 미소를 지었다.
‘멜트 드래곤보단 낫지.’
이보다 더한 놈도 아무런 정보 없이 잘라 봤던 이강우다. 또한 중요한 건 마나스톤과 벽두꺼비의 침이 모여 있는 침샘이다. 그 외의 부분은 갈기갈기 찢어발겨져도 이강우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 녀석이 내장이 그렇게 맛있다지?’
여기에 추가로 녀석의 내장까지.
그것들만 뽑으면 된다. 가슴 속에 있는 마나스톤을 꺼내고, 머리 부분에 있는 침샘을 꺼내고, 배 속의 내장을 꺼내면 나머지 부위는 구워 먹든 튀겨 먹든 아무래도 좋다.
이강우가 칼을 들었다.
“마력검 아티팩트가 유용하군.”
“나중에 마법사가 되면 이런 것부터 하나 구해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말과 함께 이강우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은 일단 벽두꺼비의 네 다리를 거대한 정(丁)을 이용해 고정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사지를 X자 모양으로 크게 뻗게 만든 후에, 이강우는 가슴부터 배를 일자 형태로 단숨에 갈랐다.
츠읏!
이강우의 솜씨는 훌륭했다. 아무리 마력검 마법의 도움이라고 해도, 벽두꺼비의 질긴 가죽을 베어내는 솜씨는 예기(銳氣)만으로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정확히 결을, 틈을 노려야 한다. 약한 부위를 노려야 한다.
하지만 그 부분을 이강우가 알고 있을 리 만무. 본능으로, 감으로 그 부위를 찾아낸 것이다.
안중현이 감탄했다.
‘이 재능을 전투로만 바꾸면, 이강우는 어마어마한 괴물이 되겠지.’
한편 두껍고 질긴 가죽이 잘리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기하게도 벽두꺼비의 배 속에는 검은 액체가, 크림과 비슷한 부드러운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흠.”
개구리를 해부했을 때 흔히 보는 장기의 모습을 예상했던 안중현은 이 괴상한 광경에 짧게 놀랐다.
반면 이강우는 담담하게,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벽두꺼비의 갈라진 배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색 마나스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색 좋네요.”
이강우는 마나스톤을 안중현에게 건네줬고, 안중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가지고 온 가방을 꺼내 그 안에 마나스톤을 넣었다. 탁탁, 가방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는 침샘을 뽑아내면 되는데…….”
이강우가 처벅처벅, 벽두꺼비의 머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대장님.”
“음.”
“우리 횡령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횡령, 두 글자. 매우 민감하기 그지없는 단어의 등장에 안중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무슨 말이지?”
“미노타우로스 뿔은 아주 대단한 보약입니다. 박지욱 씨 몸보신 좀 시킬 겸, 미노타우로스 뿔 두어 개 정도만 몰래 빼돌립시다.”
‘개당 마력 2천 포인트짜리 보약이지.’
실제로 미노타우로스 뿔은 약재로 분류된다. 어지간한 보약보다 효과가 좋다. 몸이 약해서, 체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질병은 미노타우로스 뿔만 먹어도 즉각 효과가 나온다.
여기에 하나 더, 미노타우로스는 대부분의 마력이 머리에 몰려 있다. 마나스톤도 머리에 있고, 뿔의 효과는 앞서 말한 대로 보약 그 자체나 다름없으며 머리 고기에도 마력이 넘친다. 1킬로그램에 최소 100포인트의 마력이 있다. 그 거대한 머리 크기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마력 덩어리다.
“뿔이라…….”
당연히 미노타우로스 뿔은 보관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냥해서 얻으면 길드나 정부에 줘야 한다.
그걸 날름 먹는다? 이강우 말대로 횡령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뿔은 어떻게 먹지?”
“미노타우로스 머리 고기를 우려서 만든 육수에 쌀 좀 넣고, 죽을 만들면서 뿔을 가루로 만들어 넣으면 됩니다.”
“음…….”
“마무리로 미노타우로스 머리 고기를 잘게 썰어서 넣으면 없던 힘도 생길 겁니다. 어차피 몰래 가지고 나가는 것도 아니고, 배 속에 넣는 거잖습니까? 명분도 충분하고. 팔을 잃고 체력이 약해진 총꾼 목숨보다 몬스터 뿔이 더 귀하겠습니까?”
이곳은 유적이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의 길드, 정부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좋아. 그렇게 하지.”
안중현이 곧바로 허가를 내렸다. 이런 부분에서는 나름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는 사내였으니까.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도 뿔 하나만 먹겠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이강우의 말에 안중현이 멍한 표정을 짓자, 이강우가 푸념을 뱉듯 말했다.
“저도 고생 좀 했는데 몸보신 좀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안중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 * *
부글부글부글!
이강우는 쉴 새 없이 올라오는 기름을 작업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땀을 흘리는 이강우 옆에는 채유리가 있었다. 그녀는 이강우 옆에서 혼잣말을 뱉었다.
“비프가스.”
하지만 결코 혼잣말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안심이든, 등심이든 전부 근육 덩어리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스테이크.”
“총알 수백…… 아니, 천 발 가까이 맞은 녀석입니다. 총알 빼내고 나면 남는 것도 없어요.”
“차돌박이.”
“밖에 나가면 맛있는 집에서 사 드릴게요. 아니, 그냥 냅다 일본 가서 와규 먹죠? 이번 유적 사냥 끝나면 클로즈 메리트만 최소 1억 원 이상 나올 테니까요.”
“폭립.”
“걔는 돼지로 만들…….”
거듭된 채유리의 소고기 요리 타령.
아무래도 채유리는 이강우가 손도 대지 않은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몸뚱이가 아까운 모양이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등장하는 순간 한동안 맛있는 소고기를 잔뜩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꿈이 날아간 셈이니까.
이강우는 나름 설득을 했지만 채유리는 뾰로통한 표정이란 강력한 무기마저 앞세웠다.
결국 이강우는 항복했다. 이강우는 그녀를 제어하기 위해 몰래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원래는 디저트로 드리려고 했는데…….”
열심히 미노타우로스 머리 고기를 삶으며 나오는 기름을 제거하던 이강우가 잽싸게 근처에 가져다 놓은 급속 냉동 키트, 권재용이 연구재료를 보관하라고 준 아이스박스 크기의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플라스틱 통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은 시커먼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뚜껑을 연 이강우가 그 안에 든 걸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찍었다. 크림 비슷한 것이 새끼손가락에 묻어나왔다.
이강우가 그걸 채유리 눈앞에 가져가자, 채유리가 곧바로 이강우의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채유리의 눈빛이 커졌다.
채유리가 이강우를 만난 이후 보인 눈동자 중에 가장 컸다. 그 눈빛에 이강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인간이라면 뻑 갈 수밖에 없어.’
검은 크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벽두꺼비의 내장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너무 불길해서 입도 대지 않았을 모양새였지만, 기예르모 레시피를 통해 벽두꺼비의 내장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이강우는 싹싹 긁어모았다.
긁어모으면서 맛도 봤다. 환상도 봤다.
‘이건 최고의 크림이야.’
일단 부드러웠다. 보통의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동시에 녹았다. 입에 넣는 순간 크림은 녹으면서, 본연의 풍미로 입 안을 화사하게 가득 찼다.
그에 비해 기름기 같은 건 없었다. 크림은 입에 넣으면 녹지만, 녹으면서 생긴 기름기는 그대로 남고는 한다. 형태가 무너질 뿐, 진짜로 입에서 녹는 건 아니다.
결정적으로 먹은 후의 느낌, 보통의 크림은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해지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매스꺼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벽두꺼비 내장은 오히려 산뜻했다. 좀 과장하면 소화제로 대신 써도 될 법한 청량감마저 줬다.
일반적인 크림이 가지는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제거한 요리.
그야말로 환상이다.
하물며 그냥 먹어도 이 정도인데, 제대로 요리를 한다면?
“일단 초콜릿을 녹인 후에 이것과 섞은 후 얼릴 겁니다. 아이스크림 비슷하게.”
“끝내줄 거야.”
“그다음에는 이걸 이용해서 크림스튜와 크림스파게티를 만들 겁니다. 장담하는데, 이건 크림 요리의 풍미와 맛은 극대화하면서 해장국보다 먹기 편할 겁니다.”
“응.”
“그러니까 참으세요.”
“응?”
“아직 먹을 때가 아니니까 참으세요.”
그 말에 이제껏 황홀한 표정을 지었던 채유리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이강우를 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채유리는 결국.
“응…….”
이강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채유리 조련술의 랭크가 오르는 순간이었다.
* * *
대한민국에 등장한 7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 대부분이 보관되어 있는 모래사장은 평상시에는 매우 조용하다. 지상의 경우에는 문을 배송하기 위한 포장 작업 등으로 소란스럽지만 지하 1층에는 적막감만 짙게 깔려 있다.
그런 적막감이 어마어마한 소란으로 바꿀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다.
“클로즈! 클로즈다!”
클로즈.
그 말이 적막했던 모래사장 지하 1층을 깨웠다. 단순히 깨우는 정도가 아니라 흔들어 깨웠다.
“어느 문이지?”
“검은 대리석…… 즈믄나래 길드 소속 안중현 외 17명입니다.”
“입장 시간은?”
“10월 1일 오전 7시 20분입니다.”
“생각보다 처참하겠군.”
10월 1일 7시 20분.
지금으로부터 2개월하고도 20일 전이다. 단순한 계산으로는 80일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
유적에서는 오래 버티는 게 미덕이다. 오래 버틸수록 보다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6등급 모래시계문의 클로즈 시간은 30일에서 40일 사이가 적당하다. 그사이에 클로즈를 마친 파티가 수확도 좋고, 피해도 적었다.
반면 60일 이상, 두 달 이상이 지나가면 클로즈에 성공하더라도 엉망이 된 파티가 나오고는 했다. 동시에 클로즈 실패 확률도 급속도로 올라간다. 애초에 주어진 보급품에 한계가 있으니까. 그 이상 버틴다는 건 보급품 외의 도움을 받은 셈인데 유적 어디에서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60일이 지난 시점부터 모두가 모래시계문 위의 모래시계만 바라봤다. 문은 관심도 없었다. 모래시계가 다시 작동하는 순간, 클로즈 실패를 알리는 보고를 하는 게 남은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문이 열렸다.
열리는 순간 직원 중 몇 명은 반사적으로 의무반을 불렀다. 이렇게까지 오래 유적에서 버티다 출문을 발견한 이들의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상처도 입은 빈사상태일 터. 긴급한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의무반 역시 보고를 받고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전부 허사였다.
“즈믄나래 소속 안중현 외 17명, 사망자 없이 클로즈에 성공했다. 부상자 네 명이 있다. 두 명은 경상이고, 남은 두 명은 중상. 생명에 위협이 있는 정도는 아니니,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한 조치를 부탁한다.”
안중현 외 17인, 그들 중에 긴급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리고 곧바로 샤워를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샤워실이었다.
* * *
“엄청나군.”
모래사장 관리자 중 한 명인 하정훈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아이템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2서클 아티팩트 3개, 3서클 아티팩트 2개, 4서클 아티팩트 2개. 9등급 마나스톤 11개, 8등급 마나스톤 12개, 7등급 마나스톤 7개, 6등급 마나스톤 1개. 여기에 벽두꺼비의 섬수 650㎖.”
말을 하던 하정훈은 내두르던 혀를 입에 집어넣은 채 실소를 머금었다.
“어지간한 대기업 계열사 매출이 여기 있군.”
하정훈은 말을 하면서 4서클 아티팩트에 시선을 맞췄다. 하나는 반지 형태의 아티팩트였고 다른 하나는 보자기 크기의 천이었다.
솔직히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역시 중요한 건 마법 아티팩트였으니까.
‘즈믄나래가 새로운 무기를 얻었군.’
4서클 아티팩트의 가치는 대단하다.
더불어 이 아티팩트는 한국 정부 소유지만, 즈믄나래 길드가 발견했으니 우선 사용권이 그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최근에는 마법사는 있지만 마법 아티팩트가 부족해서 마법사가 제 수준에 맞지 않는 마법 아티팩트를 쓰는 경우가 다반사인 걸 염두에 두면, 즈믄나래는 정말 큰 소득을 얻었다. 솔직히 6등급 유적을 사냥하면서 4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하나도 못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에 마나스톤과 벽두꺼비의 섬수까지.
‘그보다 80일이라니.’
어마어마한 소득.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되는 활동기간까지.
‘불놀이꾼 실력이야 인정하지만, 최초의 6등급 유적 사냥에서 이 정도 결과를 만들다니, 대단하네. 대단한데…….’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유적 사냥을 주도한 안중현의 평가는 급상승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실력을 가진 즈믄나래 소속 베테랑이었다면, 이제부터는 6등급 유적 사냥을 무리 없이 치르기 위해서 한 번쯤 만나봐야 할 사람으로 대우를 받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유적 사냥 과정이 공개될 경우, 그게 매뉴얼이 될 수도 있다.
전문가 이상의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하정훈은 의문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는데…….
‘나오자마자 마법사 전부 블랙 에이전트에게 끌려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대체 왜 블랙 스택의 그 무시무시한 블랙 에이전트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역전의 용사들을 데리고 갔을까?
* * *
문 관리센터에는 별것이 다 있다. 은행도 있고, 마트도 있고, 필요하면 변호사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심문을 위한 심문실도 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그 심문실 중 한 곳을 두 사내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 명은 안중현이었고, 그런 그를 마주 보고 있는 검은 정장의 사내는 블랙 에이전트, 심재창이었다.
일찍이 둘은 몇 번 보면서 안면이 있었지만, 그 사실이 그 둘 사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에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애초에 블랙 스택 휘하 마법사와 블랙 에이전트가 이런 제약 가득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안 좋은 일이었으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강우에 대한 정보를 은폐한 사실, 인정하십니까?”
실제로도 안 좋은 일 때문에 이 자리가 마련됐다.
심재창의 질문에 안중현은 짧게 대답했다.
“인정합니다.”
“그가 마법사란 사실을 언제부터 알게 됐습니까? 그를 즈믄나래에 추천한 게 안중현 씨인데,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알게 된 건 이강우가 즈믄나래에 입사한 이후입니다.”
“왜 즈믄나래에 통보하지 않은 채 사실을 감췄습니까?”
“이강우의 실력이 필요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십시오.”
안중현은 곧장 대답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심재창이 그런 안중현의 손가락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안중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심재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묵비권을 행사하실 생각이 있으시거나, 변호사를 선임하실 생각이시라면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가셔도 됩니다.”
심재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이 삑! 전자음을 뱉으며 열렸다.
안중현은 그 문을 곁눈질로 바라본 후 심재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중현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로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이강우의 정체를 들켰다.’
딱 20분 전까지만 해도 안중현은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적 사냥은 완벽했다. 6등급, 어려운 미로 타입 유적을 맞이해서 초반에 부하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후 6등급 몬스터를 제거하고 큰 부상을 입은 총꾼은 건강을 되찾았다. 평생 팔 없이 지내야 하는 팔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구한 게 어디인가? 이우희 역시 갈비에 살짝 금이 가긴 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자 완치에 가깝게 회복됐다.
이후 사고와 부상자가 생기긴 했지만 상정 범위 내의 일이었다.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안중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번 유적 사냥을 평생의 기념으로 남길 생각이었다.
딱 하나, 마음에 걸렸던 건 미로 탐색 과정에서 출문 발견이 늦어진 것이었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몬스터를 먹으면서 두 달을 버텼고, 보급품은 거의 그대로 남았다. 앞으로 두 달은 더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적 입장 77일째 출문을 발견했고, 거기서 주변 마무리 작업을 마친 이후 모두가 함께 출문 밖으로 나왔다. 부상자만 내보내고 추가적인 탐색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안중현은 이미 충분한 탐색을 마친 상황에서 모두가 함께 나가는 게 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여유가 넘쳐야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나오는 순간, 블랙 에이전트가 마법사들 전부를 데려갔다. 개중에는 이강우도 있었다.
그때 직감했다.
이강우가 마법사란 걸 들켰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언젠가는 들킬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번 유적 사냥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알려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안중현 본인이 먼저 이실직고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즈믄나래 그리고 블랙 스택은 안중현이 무언가 조치를 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파악하고 움직였다.
누군가 비밀을 유출했다는 의미.
‘설마 하선우가?’
안타깝게도 당장 의심이 가는 건 하선우밖에 없었다. 이강우의 정체를 아는 이들 대부분은 유적 안에 있었으니까. 이강우의 비밀을 간직한 채 유적 밖에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선우밖에 없었다.
안중현은 하선우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속이 썼다. 그래도 나름 믿는 인물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이야?
‘흠.’
그리고 안중현은 다시 한번 하선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녀석은…….’
하선우.
세상은 그를 잘생기고 패션 감각 뛰어난 5서클 마법사라고 생각하지만 안중현이 봤을 때 그는 자신과 비슷한 타입이다. 야심이 있고, 도전자의 정신이 있다. 그가 연예계 활동을 하는 건 취미나 개인적인 만족이 아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하선우도 의외로 약점이 많은 타입이니까. 인지도와 대중의 인기는 그 약점을 가려주는 최고의 도구 중 하나다.
그리고 그게 안중현이 하선우와 평소에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이유였다.
도전자에게 다른 도전자는 때때로 협력자가 되면서, 때때로 경쟁자가 되니까.
‘녀석은 경쟁자지.’
하선우는 언제든 안중현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야비한 인간은 아니야.’
하지만 분명한 건, 녀석은 다른 경쟁자를 제거해서 자신의 순위를 높이는 데에 관심이 있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쟁자와 경쟁은 한다. 수단과 방법, 쓸 수 있는 건 전부 쓴다. 그러나 순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닿으려고 하는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선우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다.
분명하다.
하선우가 일을 벌였으면, 안중현의 파멸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리진 않았을 터.
‘내 뒤통수를 친 놈이지만, 그래도 여기서 놈을 믿고 뭔가를 해야 하다니. 아이러니하군.’
안중현이 머릿속을 정리했다.
‘여기선 괜한 거짓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 필요는 없다. 다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안중현의 물음에 심재창이 말했다.
“이강우의 실력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정확한 이유를 말하십시오.”
“그 이유는…….”
* * *
이강우는 조명 하나만 애처롭게 자리 잡은 채, 시커먼 어둠이 빛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 안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의자는 굉장히 불편했고, 이강우는 그냥 서서 기다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덕분에 더 불편했다. 심기도 불편하고, 몸도 불편하고…….
‘대체 왜?’
하지만 가장 불편한 건 머릿속이었다.
이번 유적 사냥은 이강우에게 여러모로 대단한 일이었다. 20여 분 전만 해도 이강우는 출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입가에 지을 수 있는 가장 큼지막한 미소를 걸어두었다.
그 정도로 이번 유적 사냥은 최고였다. 일단 이강우는 두 가지 수입을 얻었다. 일단 2만 포인트를 훌쩍 넘기는 마력을 섭취할 수 있었다.
굵직한 것들, 벽두꺼비의 침이나 마나스톤은 먹을 수 없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또한 독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꾸준히 독을 먹었다. 한 번에 먹으면 중독 증상에 걸리니까 야금야금 독을 먹으면서 섭취한 마력 포인트가 상당했다. 덕분에 3서클도 20퍼센트 정도 개발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하나 더, 마법을 대놓고 쓰면서 마법의 사용법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선생도 많았다. 안중현, 박태중 그리고 이우희와 채유리. 그들은 이강우에게 자신들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제공했고, 이강우는 그들의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했다. 대마도사의 자질을 가진 채유리마저 ‘이강우는 너무 빨리 배워서 얄미워!’라는 투정을 부릴 정도였다.
이강우 본인도 마법을 쓰고, 마력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빠르게 능력을 쌓을 수 있었다.
9등급 몬스터를 이강우 혼자서, 마력검 아티팩트 하나만으로 산 채로 도축하는 건 그 모든 일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런 요리가 있다. 산 채로 생선의 회를 떴는데 생선이 살아 움직이는 경우. 이강우가 비슷한 일을 했다. 몬스터를 산 채로 도축했다. 산 채로 몬스터의 몸에 있는 주요 혈관을 베어내 알아서 피가 빠지게 만들고, 기력이 빠진 놈의 가죽을 벗겨냈다.
그로테스크하지만, 동시에 무시무시하고 대단한 광경이었다. 이강우의 도축 기술이 전투 기술로 변했을 때의 무시무시함을 모두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이강우 본인이 가장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때 이강우는 확신했다.
‘이제 내가 포식자고 너희가 먹잇감이다.’
먹이사슬이 역전됐다고.
이제 자신이 포식자라고.
그런 상황에서 유적 밖으로 나왔을 때, 예전에도 봤던 그 무시무시한 블랙 에이전트가 갑자기 이강우에게 오더니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모든 마법사들을 데리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총꾼은 그대로 놔두고 마법사만 데리고 갔다.
이강우가 촉을 느꼈다.
‘들켰어!’
블랙 에이전트가 이강우를 마법사 취급했다는 걸 이강우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지 않은가?
‘젠장, 마법사인 걸 숨기고 총꾼으로 일한 게 그렇게 큰 죄인가? 무료 봉사 아니야?’
마법사인 걸 들키는 경우, 상상은 해봤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해 본적 없다.
이강우가 한 상상은…… 마법사인 걸 밝힐 경우 자신에게 제안될 계약서에 과연 동그라미가 몇 개까지 찍힐까? 같은 상상. 혹은 첫 자가용은 벤츠로 할까, 포르셰로 할까? 해외여행으로 유럽을 갈까, 북미를 갈까? 그런 종류의 상황이지, 범죄자처럼 이런 곳에 잡혀 와서 심문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는 건 돈 주고 상상하라고 해도 할 생각이 없었다.
‘젠장, 설마 징역살이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때.
삑!
전자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강우가 긴장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봤다.
한 사내가 있었다.
젊은 사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얇고 동그란 테를 가진 안경을 쓰고 있었다. 마른 체형이었고, 얼굴도 핼쑥했다. 머리는 짧았고, 단정하게 다듬은 턱수염과 콧수염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그 사내는 이강우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양해를 구하느라 늦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곧바로 대답을 하는 이강우는 대답을 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꽝스러웠다.
‘진짜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
이강우는 저 문이 열리는 순간 40대 중후반의 세월의 풍파를 겪은 험악한 외모의 사내가 등장하며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이강우 앞 책상 위로 세게 던지는 상황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등장한 건 호리호리하기 그지없는 30대 초반의 사내, 심지어 말투도 유순하다.
여러모로 상상 밖의 일.
하지만 정말 놀라운 일은.
“자, 그럼 이야기를 나눕시다. 아, 제 소개부터 하죠. 현재 블랙 스택 한국지부 즈믄나래 길드의 마스터 직위를 담당하고 있는 강희라고 합니다. 외자입니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블랙 스택의 한국지부라고 할 수 있는 즈믄나래 길드는 다른 길드들과는 여러모로 탄생 배경이 달랐다. 단순한 길드라기보다는 국가기관에 가까웠다.
때문에 즈믄나래 설립이 확정되었을 때 사람들의 관심자는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가 누가 되느냐? 그것이었다. 관계자들은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 자리를 놓고 한국 정부와 블랙 스택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딜이 오고 가리라 예상했고, 꽤 큰 진통이 생기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의 주인은 금방 정해졌다.
강희.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기 힘든 이름을 가진 그는 알려진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정보는 그가 모래시계문 등장 이후 블랙 스택 창립에 관여했으며, 모래시계문 등장과 함께 전 세계가 치르게 될 몬스터와의 전쟁 속에서 한국 정부가 몬스터를 토벌하고 사회적 안정을 되찾는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것, 그 정도뿐이었다.
이강우 역시 그런 그의 이름만 들어봤다. 사실 이름도 우연히 들었을 뿐이다. 단지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기 힘든 이름이라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뿐. 이름을 기억한다고 이강우의 인생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강우 입장에서는 평생 만날 일조차 없는 사람 아닌가?
‘내 인생 진짜 다이나믹하네. 말년에 자서전 쓸 걱정은 없겠어.’
그런데 그가 눈앞에 있었다. 심지어 이강우의 인생에 영향을 줄 준비를 마친 채로.
어쨌거나 이강우는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한 건 눈앞의 인간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정부기관의 심문실 안에서 즈믄나래의 길드 마스터라고 자칭하는 인간을 상대로 거짓부렁을 지껄이거나, 묵비권 혹은 변호사 부르라고 하면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거겠지.’
배 째라고 덤빌 때가 아니다.
이강우는 곧바로 자세를 낮췄다. 머릿속도 확실하게 정리했다.
‘거짓말 할 필요도 없고, 주절주절 지껄일 필요도 없어. 질문에 대답만 정확히 하면 돼.’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술술 진행됐다. 이강우가 협조적으로 나오는데 대화가 길어질 이유가 없었다. 대화가 시작되고 5분 정도가 흘렀을 때 강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협조해주신 덕분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많지 않군요.”
이 순간 이강우가 낌새를 살폈다.
‘슬슬…….’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강우의 말에 강희가 얼마든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강우는 분명 즈믄나래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유적 사냥이 끝나자마자 블랙 에이전트라는 험악한 인간들에게 끌려온 후 길드 마스터에게 취조를 당할 만한 거짓말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강우는 도무지 이다음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강희는 그런 이강우의 물음에,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강우를 보며 쓰고 있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쓴 후 말을 이어갔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이강우 씨를 벌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상식적으로 총꾼이 마법사로 위장한 것도 아니고, 마법사가 총꾼으로 위장했을 뿐이고, 이강우 씨가 즈믄나래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길드 마스터가 나서서 벌을 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이강우가 동감한다는 듯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법인카드를 너무 남용하시는 건 좀 그렇지만.”
그 대목에선 이강우가 입을 콱 다물었다. 채유리를 모시느라…… 라는 말을 뱉기에는 이강우도 나름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써먹은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처벌은 없으리란 말에 이강우는 긴장이 풀린 듯, 입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괜히 쫄았네.’
그런 이강우에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해서 블랙 에이전트를 동원한 건 아닙니다. 그들은 블랙 스택의 사람들이거든요.”
강희가 긴장의 끈을 다시금 바짝 쪼이게 만들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아무리 강희, 그가 즈믄나래 길드 마스터라고 해도 블랙 스택 직속인 블랙 에이전트를 개인적인 서프라이즈 파티에 동원할 수는 없다. 블랙 에이전트는 그리 허술한 조직이 아니다.
“이강우 씨와 가장 오래 활동한 네 명의 마법사들로부터 이강우 씨에 대한 정보를 캐낼 겁니다. 그렇게 나온 정보를 종합한 후 이강우 씨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에 따라 새로운 계약을 할 겁니다.”
이강우는 당황했다.
‘평가?’
물론 평가는 중요하다.
‘무슨 평가를 블랙 에이전트를 동원하면서 해?’
하지만 이강우가 그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서, 심지어 다른 마법사들을 압박해서 정보를 얻어내면서까지 평가를 할 만한 가치 있는 인간은 절대 아니다. 적어도 즈믄나래 입장에서는 그래야 한다. 즈믄나래가 이강우가 가진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설마.’
이강우는 스스로 한 생각을 스스로 부정했다.
이강우가 가진 불사황제의 권능은 오로지 이강우만이 알고 있다. 가족에게도, 잠결에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이다.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하지만 대체 왜 날 평가하는데 이런 쇼를?’
그런 이강우를 보고 강희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럼 잠시 후에 뵙지요. 식사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주문하시죠.”
자리를 비웠다.
* * *
“이강우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가 가진 실력이 탐나서 내가 부정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이강우 씨가 마법을 쓰는 건 이번 유적 사냥에서 처음 알았지만, 내가 이제까지 본 마법사 중에 가장 기여도가 높다고 해야 할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냥부터 몬스터 도축에 요리까지. 전천후 마법사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는데 벌을 주고 쫓아내기보다는 상을 주고 잡아두는 게 길드에 이득일 겁니다.”
“저는 전후 사정이 어떤지 몰라요. 이강우 씨가 마법사란 사실은 부정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는 길드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길드의 이익에 큰 기여를 했어요.”
“이강우는 좋은 사람이야. 다른 건 모르지만, 만약 이강우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나도 길드를 나가겠어. 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야.”
네 명의 마법사들이 이강우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꺼냈고, 그 이야기들은 정리되어 길드 마스터 강희에게 보고됐다.
보고서를 읽던 강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옅게 웃었다.
‘하선우 말대로 아주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군.’
강희는 하선우가 말해주기 전까지 이강우란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경력도 나쁘진 않고.’
생각보다 대단한 보물이 즈믄나래 길드 안에 있었다.
‘밑바닥부터 지내서 그런지 근성이나, 협조 능력에 사람 비위를 맞추는 재주도 있고.’
이강우의 장점은 정말 많았다.
‘도축 기술은 천 노인보다 낫다고 할 정도. 요리 실력도 일품이라니, 천 노인도 가지지 못한 재주군. 여기에 권 박사가 관심을 가질 정도면 권 박사 기준으로 보면 뭔가 있다는 거겠지. 권 박사가 이런 쪽에서는 정말 안목이 좋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강우를 멜트 드래곤 연구에 데려갔지? 재미있군.’
일단 도축 기술. 굉장하다. 여기에 부수적인 요리 기술이 합쳐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
‘마법사 자질은…… 이제부터 검증해야겠지만, 기대를 배반할 것 같진 않군.’
그다음은 역시 마법사 자질. 마법사는 귀하다. 하물며 마법 외적인 재주를 가진 마법사는 더더욱 귀하다. 결정적으로 이강우가 가진 다양한 기술이 마법과 어우러지면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성격.’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그의 성격이었다.
이강우는 모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선 희생도 하고, 속마음이 어떻건 간에 상대하는 사람 비위를 맞출 줄도 안다. 어찌 보면 비굴하고 줏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죽일 줄 알고, 가식으로 행동할 줄도 알고, 속으로만 상대를 씹는 방법도 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 특히 재능 있는 마법사들이 가지지 못한 재주다.
‘그동안 성격 더러운 마법사 녀석들만 상대하다가 이런 타입을 상대하니 나름 신선하군.’
마법사는 작금의 시대에 귀족이나 다름없다. 대부분 마법사들은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오만한 정도면 그러려니, 하고 웃으며 넘어가겠는데, 진짜 본인이 귀족인 줄 알고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는 놈들이 적지 않다.
그런 마법사들을 한데 모아서 파티를 짜면, 시너지 효과보다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둘이 싸우면 나머지는 팝콘이나 까먹으면서 그걸 구경한다.
나름 실력 좋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검증을 마친 마법사만 받는 즈믄나래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즈믄나래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하선우와 김재범만 해도 그렇다. 둘은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조합인데, 그 둘이 유적 사냥을 하는 경우는 없다. 결과가 뻔하니까.
때문에 이강우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하선우 말대로 이강우 같은 녀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파티에 넣을 수 있는 윤활유지.’
이강우의 성격과 능력은 조직이 움직이는 데 정말 귀중한 윤활유 역할이 될 것이다.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이 많다는 것도 마음에 드는군. 특히 가족사랑…… 참 좋은 사람이군.’
여기에 약점도 있었다.
때문에 강희는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미끼가 되겠어. 아주 훌륭한 미끼. 등불을 밝혀주는 기름과도 같은 미끼. 이 세상이 종말로 가는 걸 이끌어줄 미끼.’
아주 비열하면서도 비린내 가득한 미소였다.
* * *
강희가 다시금 이강우가 있는 심문실에 들어갔을 때, 이강우는 식사 중이었다.
식사 메뉴는 크림스파게티. 심문실에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요리였다.
“식사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다 먹었습니다.”
실제로 이강우도 이 자리에서 먹기 거북한 메뉴였는지, 절반도 먹지 못한 채 그릇을 치웠다.
“요리가 입에 안 맞으시나 봅니다.”
강희의 말에 이강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벽두꺼비 내장 크림으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은 후에 이거 먹으니 그냥 버터를 통째로 입 안에 들이붓는 것 같네.’
유적에서 이강우가 만든 벽두꺼비 내장 크림스파게티는 정말 역작이었다. 이강우가 만든 유적 요리 중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향수 때문에 크림스파게티를 주문했는데…….
‘그냥 자장면이나 주문할걸.’
짧은 후회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럼 아까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강희가 이강우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으며 조금 전 끝났던 대화를 이어갔다.
“일단 이강우 씨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더군요. 안 좋은 이야기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채유리 씨의 경우에는 이강우 씨에게 불이익을 주면 길드를 나가겠다는 협박마저 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도 이강우 씨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강우는 어색하게 웃었고, 강희는 이강우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냈다.
“설마 채유리 씨와…….”
“아닙니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이강우의 부정에 강희는 옅게 웃었다. 내가 보기엔 그런 사이 같은데? 하는 눈빛.
물론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어쨌거나 종합 평가가 끝나고, 평가 기준에 맞는 계약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강희는 곧바로 계약서를 꺼냈다. 이강우는 계약서를 받고, 곧바로 첫 장을 술술 읽었다.
그런 이강우의 눈에 독특한 단어가 보였다.
“넘버스?”
강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즈믄나래에서 특별관리대상으로 선정된 마법사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숫자를 부여받는 겁니다. 참고로 하선우 씨가 2번을 받았고, 채유리 씨가 7번을 받았습니다. 이강우 씨가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면, 9번이 될 겁니다. 한 자릿수 마지막 멤버가 되는 셈이죠.”
그 말에 이강우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계약서를 넘겼고, 보다 확실한 세부 내용을, 계약 조건을 확인하는 순간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다.
‘맙소사.’
그 표정은 마치…… 삼류 길거리 가수가 메이저 음반사로부터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가수에게나 할 법한 제안을 받았을 했을 때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너무 대단해서 의심부터 들고, 경각심부터 드는 제안. 오히려 감히 수락할 수 없을 정도의 제안.
결국 이강우는 계약서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 읽는 도중에 고민에 빠졌다.
‘말도 안 돼. 이거 설마 함정인가?’
계약서 내용은 더 읽을 필요가 없다. 이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이 계약서에 이강우가 사인을 하는 순간 그는 평생 만질 수도 없을 만큼의 돈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계약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문제는 결정.
‘주제를 알라.’
어느 철학자의 명언을 따를 것인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엑셀 한 번 밟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영화에 나온 어느 타짜의 대사를 따를 것인가?
고민 중에 이강우가 입을 열었다.
“계약서 내용 중간에 파잔과의 제휴를 통해 우선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특별관리대상입니다. 목숨이 위험하다면, 당연히 마땅한 치료를 해야죠.”
“여기에 가족도 포함됩니까?”
“계약서 조건에 따르면 안 됩니다. 계약서는 어디까지나 계약하는 당사자에게만 유효합니다.”
그때 강희가 말을 멈추고, 가지고 온 펜으로 서류 봉투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넘버스 멤버가 되신다면, 그 자격으로 파잔의 관계자와 개인적인 대화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강희가 쓴 숫자는 폰 번호였다.
이강우의 시선이 그 번호에 꽂혔고, 강희가 마지막 통보를 했다.
“마지막으로 설명을 해드리면, 이강우 씨가 즈믄나래와 맺은 총꾼 계약은 변호사 도움을 받아 언제든 약간의 대가만 치르면 무를 수 있는 계약입니다만, 이 계약은 장담컨대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단체와 집단의 도움을 받아도 무를 수 없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 대통령 임기 중에는 말입니다.”
그 순간 이강우가 자신의 앞에 놓인 펜을, 고급스럽기 그지없는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이윽고 이강우가 펜을 움직이자.
스윽, 스윽!
종이 위를 긁는 묘한 소리가 적막감을 자욱하게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