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미로
유적을 가득 채운 미로는 압도적인 회색빛 벽으로 침입자에게 자신의 길을 강요했다. 그 누구도 감히 벽을 뚫는다는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그저 길만을 따르는 순종한 양이 되도록 했다.
그런 그 드높은 벽 위를 한 생물체가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벽을 타는 게 아니라 벽을 질주하는 생명체. 신비하기 그지없는 능력을 보여주는 그 괴물은 생김새도 신비했다. 닭의 몸뚱이에 타조의 다리를 붙인 듯한 외형. 탄력 넘치는 두 다리 끝에 달린 섬뜩한 굵기와 날카로움을 가진 발톱들.
빼액!
부리에서 튀어나오는 귀를 찢을 듯한 계명(鷄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비하기 그지없는 몬스터의 이름은 월치킨, 한국명은 울닭이다.
8등급 몬스터.
벽을 평지처럼, 최대 시속 80킬로미터까지 나오는 중력을 무시하는 이동능력,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각력과 함께 어우러지는 날카로운 발톱은 사람의 피륙 따위는 종잇장보다 가소롭게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상대하기도 까다롭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정말 잡을 수 없는 놈.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놈은 재수가 없었다.
“난 저렇게 멍청하게 달려오는 놈들이 좋더라.”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먹잇감을 발견하자마자 거침없이 벽을 밟고 달리기 시작한 울닭.
그런 녀석의 질주 앞에.
푸홧!
거친 소리와 함께 흙기둥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대지 속성의 2서클 마법 주먹기둥.
마법사 박태중이 만들어낸 그 기둥은 이미 최대속력으로 질주하는 울닭에게 있어 결코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쾅!
울닭의 몸뚱이가 흙기둥과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말이 흙기둥이지, 주먹기둥으로 만들어낸 흙기둥은 돌기둥에 버금가는 강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기둥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다 부딪쳤는데, 몸뚱이가 멀쩡할 리가 없다.
쿵쿵!
울닭은 마치 물수제비처럼, 땅바닥 위를 두 번 튕겨 올랐다.
투투, 투투!
그런 울닭을 향해 규칙적인 총성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표적을 향한 정확한 사격, 의미 없이 탄약을 소모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한 절제미마저 품고 있는 총성이었다.
안중현이 손을 들어 사격 정지 신호를 냈으나, 이미 그 전에 사격을 멈췄다.
빼애애!
정확히 열두 발, 주먹기둥에 부딪히고 탄환에 맞은 울닭은 죽지 않은 채 구슬픈 울음을 토해냈다.
제법 끈질긴 생명력.
하지만 열여덟 명의 무장한 사냥꾼 앞에서 두 다리를 놀릴 수 없게 된 이상 녀석의 앞날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녀석을 가장 잔혹하게 살해해 줄 사신이 이곳에 있었다.
이강우란 이름의 사신.
그 순간 보급품이 담긴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울닭을 바라보던 이강우의 엉덩이를.
툭툭!
누군가 가볍게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성희롱에 이강우가 고개를 돌렸고, 시선을 내렸다. 채유리가 보였다.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닭.”
정말 짧은 한 마디, 하지만 그 한 단어에 담긴 음색은 그녀가 품은 눈빛보다 더 초롱초롱했다.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닭이죠.”
말과 함께 이강우가 슬그머니 짊어지고 있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채유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이 가지고 있던 검을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때마침 이강우를 부르기 위해 이강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안중현의 시선과 이강우의 눈이 마주쳤다.
“처리하도록.”
유적 사냥 9일째, 안중현 파티가 열두 번째 몬스터 사냥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 * *
미로 타입의 유적을 공략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과감한 결단이다.
방어적으로 지역을 지키면서 덤비는 몬스터를 하나씩 제거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미로를 탐사하거나, 둘 중 무엇을 고르든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애매하게 이도 저도 아닌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것. 그 경우 손해가 크다.
안중현은 당연히 과감하게 결단했다. 그런 그의 선택은 방어적이 아닌 적극적이었다.
‘전력은 충분하다. 6등급 몬스터와 정면에서 붙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판단의 근거는 본인이 생각해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전력 그리고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방어적으로 나서는 건, 결국 수성을 통해 최대한 몬스터를 제거하고 안정적인 미로 탐사를 하겠다는 의도다.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익, 마법 아티팩트를 찾아낼 시간이 부족해진다. 이익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적 사냥을 하는 주제에 아무런 이익도 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 파티에게 투자를 하지 않는다. 이익은 곧 결과다. 결과를 내는 것도 리더의 조건 중 하나다.
이런 안중현의 의중에 따라 안중현 파티는 실시간 이동을 위한 세팅을 시작했다.
“바퀴! 바퀴 달아!”
“여기 잠깐 들어줘!”
“오케이, 하나둘셋, 하면 드는 거다.”
가장 먼저 보급품 상자에 바퀴를 달았다. 문을 넘어올 때는 보급품 상자를 직접 들고 이동해야 하지만, 유적 내에서는 끌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바퀴라는 훌륭한 문명의 도구를 아낌없이 이용해주면 된다.
또한 미로 타입의 유적은 대체로 길이 평평했다. 아스팔트 도로 정도는 아니더라도 바퀴 달린 것들이 지나가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정글처럼, 온갖 것들이 길 위를 채우는 바람에 바퀴를 쓸 수 없는 환경에 비하면 레이싱을 해도 될 법한 길이었다.
“누가 올라갈래?”
“내가 올라갈게. 총 좀 올려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큼지막한 보급품 상자 아래에 바퀴를 달고, 그 위에 기관총을 앞세운 총꾼들이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그럴싸한 이동식 포대가 마련됐다.
“스파디보다는 역시 이놈이 제격이지.”
수색 로봇으로는 RC카가 선정됐다. 어지간한 자동차만큼 멋진 성능을 보여주는 RC카는 미로를 신나게 달릴 준비를 마쳤다. RC카 조종을 맡게 된 총꾼 역시 세계 어디서도 즐길 수 없는 환상적인 코스를 누빌 수 있다는 사실에 눈빛을 빛냈다.
“지금부터 벌룬 띄우겠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화룡점정은 벌룬이었다. 무선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기능을 비롯해 다양한 기능을 통해 유적이란 미지의 세계에서 온라인 시스템을 부족하나마 쓸 수 있게 해주는 기적의 장치였다.
또한 지도 완성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어, 미로를 탐험하는 유적 사냥꾼들에게는 꿈의 아이템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중현이 준비한 히든카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만반의 준비.
그 준비를 통해 검증된 유적 사냥꾼들이 보여주는 몬스터 사냥은 정말 대단했다.
‘12초.’
안중현은 조금 전 울닭을 발견하고, 녀석을 잡기까지 걸린 시간을 가늠하고는 미소는 지었다.
‘8등급 몬스터를 잡는데 12초면 훌륭하지.’
미로 타입이라는 굉장히 까다로운 유적을 맞이했음에도 안중현 파티는 유적 입장 9일째에 접어드는 동안 완벽한 결과를 연속해서 만들었다.
잡은 몬스터 총 열두 마리. 7등급 2마리와 8등급 7마리와 9등급 3마리를 잡으면서 조금의 피해도 없었다. 7등급 몬스터를 제외하면, 교전 시간이 1분 이상이었던 적도 없었다. 가장 매력적인 건 9일째에 접어드는 지금, 식료품 소모가 제로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이번 기회에 유적 탐사 기간을 석 달 정도 할 수 있다면……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을 수 있겠지.’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강우 덕분이었다.
* * *
‘저 놈은 마력이 별로 없네.’
이제는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는 울닭에게 다가가는 이강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6등급 유적이라고 해서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 하나쯤은 얻으리라 생각했는데, 소득은 이제까지 하나도 없군.’
속으로 짧은 푸념을 되새김질하며 울닭을 향해 칼을 들고 접근하던 이강우가 총꾼 한 명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총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강우의 뒤를 따라왔다. 이강우가 손가락으로 울닭의 머리를 가리켰고, 총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는 자동소총으로 사격 자세를 취한 후.
투투투투!
울닭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연달아 터진 총성과 함께 울닭의 미세한 발버둥이 사라졌다. 이강우는 그 상태에서 곧장 울닭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시간을 쟀다. 3분이 흐른 후에 이강우가 다시 총꾼을 바라봤고, 총꾼이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울닭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강우는 잽싸게 울닭에게 접근한 뒤 녀석의 목에 칼을 집어넣었다. 가죽은 질겼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이강우가 쥐고 있는 칼은 채유리가 소지했던 마력검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으니까.
푹푹!
마력검은 울닭의 가죽 정도는 쉽게 뚫었다. 이강우는 단숨에 울닭의 목을 잘라냈다.
콸콸!
잘려나간 목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강우는 가지고 온 통에 핏물을 받기 시작했다. 몬스터의 핏물은 독만 없으면 귀중한 수분 공급원이 되어 준다. 거대한 몸뚱이를 가진 몬스터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혈액의 양은 상당하다.
그렇게 방혈 작업을 마친 이강우는 쪼그려 앉은 채 울닭을 바라봤다.
‘이놈을 어떻게 잡을까?’
울닭의 덩치는 상당했다. 타조보다 2배는 큰 몸뚱이. 털을 뽑는 작업도 쉽지 않을 듯했다.
또한 일반적인 닭을 손질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놈이었다. 덩치만 해도 닭 수준이 아니다. 도축 방법은 닭이 아닌 소, 돼지를 잡는 식으로 접근해야 할 터.
그리고 고기를 부위별로 나눠야 한다. 그리고 요리 목적에 따라서 자르는 부위도 달라진다.
그때 채유리가 이강우 옆에 다가왔다.
“치킨.”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닭이니까 무조건 프라이드로 튀겨 먹고 싶은 모양이다. 이강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튀기는 게 한국인 입맛에는 제격이지.’
치킨.
나쁘진 않다.
하지만 이걸 통째로 튀기려면 꽤 많은 양의 튀김유가 필요하다. 또한 치킨도 처음 먹을 때 맛있지 계속 먹으면 별로다. 결정적으로 여기에는 맥주도, 콜라도 없다.
치킨이 나쁘진 않지만 치킨만 먹는 건 좀 그렇다.
이 순간 이강우가 손으로 울닭의 다리 부분을 가리켰다.
“왼쪽 다리는 살만 벗겨낸 다음에 순살 치킨으로 튀길 겁니다.”
“와!”
채유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른쪽 다리는 바짝 구워보죠. 전기 통닭처럼.”
“응!”
“왼쪽 날개는 핫윙으로, 맵게.”
“오!”
“오른쪽 날개는 갈릭 소스로.”
채유리는 이 대목에서 더 이상 감탄사를 내뱉지 않았다. 이강우를 향해 존경심 가득한 눈빛을 보낼 뿐.
비단 채유리만 그런 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모든 이들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프라이드, 바비큐, 핫윙…….’
‘보통 유적 사냥 한 번 하면 많을 때는 체중이 5, 6킬로그램도 빠지는데 이번 유적 사냥은 살이 도리어 찌겠군.’
유적에서 그날의 식사 메뉴를 기대한다는 건, 아마 그 어떤 유적 파티도 누리지 못하는 호사일 것이다.
때문에 모두가 이강우의 다음 메뉴를 기대했다. 닭다리, 닭날개 메뉴가 나왔으니 이제 닭가슴살 요리가 남았다.
이강우는 그런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듯, 닭가슴살 요리 메뉴도 말해줬다.
“가슴살은 스테이크로 요리할 겁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 나올 겁니다.”
* * *
“이거 맛이 정말 괜찮은데?”
“닭가슴살 스테이크라고 해서 퍽퍽할 줄 알았는데, 완전 소고기 등심 먹는 기분이군. 육즙이 대단해.”
“다리가 최고야. 전기통닭처럼 구우니까 껍질이…… 베이징덕 저리가라 수준이야.”
희생자 하나 없는 몬스터 사냥.
몬스터를 사냥할 때마다 이어지는 환상적인 만찬.
이런 호사 앞에서 유적 사냥꾼들의 머릿속에는 6등급 유적 사냥이 주는 부담감은 사라졌다.
물론 경각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식사는 조용히. 음식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과식하지 마라. 몸이 둔해지면 안 된다.”
안중현은 꾸준히 부하들을 지휘했다.
“식사 중지.”
조금은 과할 정도로, 여유를 가질 법한 상황임에도 안중현은 긴장의 끈을 유지했다.
그런 안중현의 지휘에 불만은 없었다. 식사 중지라는 말에 모든 이들이 먹던 걸 가지고 온 비닐에 넣은 후에 따로 아이스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식은 치킨, 핫윙, 스테이크의 맛이 좋을 리 없겠지만 유적에서 그게 중요치 않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딱 3분이었다.
안중현이 식사 중지 선언을 내뱉고 3분이 지났을 때, 모든 이들이 다시 미로 탐사 준비를 마쳤다.
이동이 시작됐고, 안중현의 지휘도 시작됐다.
“정지. 갈림길이다. 탐색.”
안중현은 행동 하나하나를 말로 지시했다.
쉴 새 없이 나오는 안중현의 지시에 부하들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앞서서 안중현은 자의적 판단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자신의 명령만을 따르라고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된다. 안중현의 말만 듣는 인형이 되면 된다. 자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는 인형.
부웅, 부웅!
안중현의 명령을 들은 총꾼이 RC카를 조종했다. 갈림길에 돌입한 RC는 T자 모양의 코너를 살폈다. RC카에 장착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영상을 확인한 다른 총꾼이 말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30초.”
안중현의 말에 총꾼 두 명이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의 타이머를 작동시켰다.
30초, 29초, 28초…… 줄어드는 시간이 0초가 됐을 때.
“클리어.”
총꾼의 말에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한다. 선발 앞으로.”
다시 이동 시작. 보급품 상자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총꾼 두 명이 보다 확실한 경로 확보를 위해 앞서서 이동했다. 이강우 역시 두 눈에 힘을 바짝 주며 주변을 경계했다. 손에 쥔 총의 총구를 언제든 원하는 방향에 겨눌 수 있도록 긴장했다.
그 순간 이강우의 눈에…… 아니, 모두의 눈에 이상한 낌새가 포착됐다.
‘아!’
탄식이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벽.
회색빛 벽에서 검은 것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 벽을 지나치던 총꾼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벽 안으로 잡아 당겼다. 총꾼은 그대로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단단하고, 굳건하기 그지없는 벽이 호수의 표면처럼 출렁거리며 총꾼의 팔을 단숨에 빨아들였다. 팔꿈치를 지나 어깨 바로 아래까지.
‘어어?’
이대로 가다가는 몸통 전부가 들어갈 판!
“으아아아!”
다른 총꾼이 거친 기합과 함께 잽싸게 빨려 들어가는 동료의 반대쪽 팔을 들고 잡아 당겼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벌 수 있는 시간은 정말 몇 초…… 하나둘셋, 딱 이 정도 시간에 불과했다. 벽 안에서 총꾼의 팔을 잡아당기는 힘은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사내의 목숨을 구했다.
쉬익!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벽에 빨려 들어가던 사내의 팔이 잘려나갔다.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던 동료 때문에 팔이 잘린 사내와 동료는 바닥에 쿵! 넘어졌다. 잘린 팔은 벽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이의 정체는 채유리.
헤이스트 마법 그리고 마력검, 채유리는 두 가지를 이용해 총꾼 한 명을 구했다.
“모두 벽에서 떨어져!”
그 광경을 본 안중현이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삽시간에 섬뜩한 긴장감이 좌중에 깔렸다.
유적 입장 9일째, 6등급 몬스터와 첫 조우를 했다.
* * *
아무것도 없는 벽, 이제까지 지겨울 만큼 봤던 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총꾼의 팔을 잡고, 당겼다.
갑작스러운 상황, 예고는커녕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나름 대처를 했지만 결국 총꾼 한 명이 왼팔을 잘리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유적 밖에서도 살 수 있다, 그 말을 쉬이 뱉을 수 없는 수준의 부상.
하물며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할 수 없는 유적 내에서 그런 상처를 입었다는 건,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잔혹하게 확률로 말한다면, 팔을 잃은 총꾼이 유적 사냥이 끝날 때까지, 살아서 출문을 나설 확률은 25퍼센트 이하다.
‘젠장.’
안중현은 이렇게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근심과 걱정, 격양, 분노, 당혹감이란 단어를 스스로 마음속으로 내뱉은 젠장, 그 두 글자와 함께 뭉갰고, 버렸다.
지금 이 상황, 부하의 부상은 안중현의 탓이다.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벽으로 위장? 아니면 벽 속을 움직이는 특수 능력?’
안중현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적의 특징을 가늠하는 것이다.
RC카를 통해 영상으로 봤을 때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다 할 낌새도 없었다. 특별한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벽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은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동시에.
‘벽으로 잡아당겼어.’
총꾼의 팔이 벽으로 쑥, 들어갔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이후 벽은 다시 본래의 단단함을, 견고함을 유지했다.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현상.
하지만 이곳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법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해 가능한 세상이다.
‘벽살이 원숭이, 벽두꺼비, 귀신벌레…….’
안중현의 머릿속으로 몬스터 정보를 떠올렸다. 이날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스택 레코드의 6등급 유적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을 때, 그 정보 전부를 외웠다. 넣을 곳이 없으면 가족의 이름을 지워서라도 몬스터 이름을 넣었다.
‘환수 타입.’
어쨌거나 이런 특수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놈들은 거의 대부분, 백 중 구십구는 환수 타입이다. 물리적인 공격, 총탄이나 포탄을 이용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통한다고 하더라도 벽으로 숨을 수 있다면 의미가 없다. 벽을 부술 수 없는 이상.
완벽한 기습과 완벽한 방어, 두 가지가 가능한 놈들.
‘여기서 싸울 이유가 없어.’
때문에 여기서 놈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움직이는 건,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선택이다.
안중현의 사고는 거기까지였다.
“후퇴한다!”
안중현이 명령을 외쳤다.
“모두 한곳에 모여라!”
그때 팔이 잘린 총꾼이 부축을 받으며 보급품 상자 근처로 접근하자, 보급품 상자 위에서 기관총을 앞세우고 있던 사내가 잽싸게 자리를 만들었다. 응급조치가 시작됐다. 지혈제를 뿌리고, 쇼크사를 막기 위해 진통제를 투약했다. 상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말을 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까 먹은 치킨 기억나?”
대화 주제는 울닭으로 만든 요리였다.
음식을 주제로 대화를 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 조금 전 있었던 경험이고, 특별했던 경험이고, 인상적인 경험이었으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한 사람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는 대화였다.
“……그래.”
“뭐가 제일 맛있었어? 말해봐. 치킨? 아니면 핫윙?”
“……모르겠군.”
“그럼 한 번씩 더 먹어 봐야겠군.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일단 그것부터 확실히 하자고.”
“……그래.”
짧게 대답을 하는 총꾼, 의외로 총꾼은 힘은 빠졌을지언정 눈빛에서 총기를 잃진 않았다. 팔이 깔끔하게 잘린 덕분이었다. 채유리의 단칼은 공허함을 남길 뿐, 통증을 남기진 않았다.
그나마 천만다행.
그러나 이 순간 안중현의 후퇴 명령을 들은 채유리가 움직이지 않은 채 안중현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서슬 퍼런 그녀의 눈빛은 안중현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잡아 죽이자.’
명령만 내리면 자신이 알아서 잡아 죽이겠다고. 채유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사냥의 의지를 보내고 있었다. 넘치는 투쟁심과 들끓는 적의를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안중현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울닭 요리를 먹을 때마다 감탄사와 함께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던 모습이 환상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이군.’
채유리는 오직 하나의 단점만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납득하지 않으면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 반대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녀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사냥꾼이다.
안중현은 만족했다. 채유리가 놈에게, 이곳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놈에게 적의를 품었다. 놈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안중현 입장에서는 최고의 배우를 캐스팅한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물러난다.”
여기서 채유리를 앞세운 무리한 전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적을 가늠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싸우는 건 안중현의 신조 어디에도 없다. 결정적으로 안중현은 몇 달 전 있었던 정글 속 전투를 반성하고 있다. 그때 안중현은 기생망고거북의 농간에 넘어갔다. 놈의 농간과 수작에 넘어가, 채유리를 목각귀신이란 위험한 암살자에게 드러냈다.
물론 지금 전력은 분명 훌륭하다. 분노한 채유리가 얼마나 멋진 전투를 보일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놈을 쫓으면, 어쩌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게임 끝이다. 6등급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놈을 잡으면 이제 남은 건 미로 탐험밖에 없다.
하지만 강한 힘이 있으니까 더더욱 무리할 이유가 없다.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건, 기회가 마련되면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리해서 전투를 50 대 50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모두 B11 포인트로 이동한다.”
안중현이 재차 명령을 내렸고, 채유리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모로 인상적인 광경.
그러나 이 순간 가장 인상적인 결과를 내놓은 건…….
‘벽두꺼비.’
채유리도, 안중현도 아닌.
‘기예르모 레시피에 따르면…… 녀석의 섬수는 최고의 마력 회복제지.’
이강우였다.
* * *
B11 지역은 ㄷ자 모양의 지역이었다. 미로에서 막다른 길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잘만 이용하면 베이스캠프는 아니더라도 안전한 휴식을 꾀할 수 있는 장소였다.
때문에 안중현 파티는 이동하면서 이런 지역을 곳곳에 표시해두고, 이곳을 중심으로 미로의 길을 가늠하고 있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등장한 적은 벽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굉장히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녀석을 막아주는 벽이 될 리는 없다. 그래서 나름 임시 조치를 취했다.
“벽에 줄을 그어라.”
페인트를 이용해 벽 위에 선을 그었다. 그냥 벽을 보면 모르지만, 이 선을 그으면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육안으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중현이 내놓은 임시방편은 아니었다. 스택 레코드, 거기에 나온 공략법 중 하나였다.
이후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RC카 그리고 벌룬, 두 개에 달린 카메라의 영상을 반복해서 봤다. 영상을 0.1초 단위로 쪼갰다. 그 덕분에 굉장한 걸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 이거 보시면 무언가 길쭉한 게, 뱀으로 보이는 게 튀어나와 팔을 휘감습니다.”
벽에서 튀어나온 건 뱀 혹은 채찍처럼 길쭉하고, 신축성을 가진 것이었다. 또한 표적을 그냥 잡지 않고 휘어 감았다. 짐승의 팔이나 다리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혀.”
파충류의 혓바닥.
“벽두꺼비군.”
안중현은 주먹을 쥐었다.
‘벽두꺼비…… 기생망고거북 다음에 벽두꺼비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벽두꺼비.
6등급 몬스터로 벽은 물론 땅을 강처럼 헤엄치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녀석의 사냥방법은 간단하다. 땅 혹은 벽과 같은 공간으로 사냥감을 끌어당긴다. 벽과 땅이 사냥감을 구속해주고, 그럼 당연히 사냥감은 알아서 지쳐 죽는다.
벽두꺼비가 활약하는 장소에서는 마치 고약한 예술가의 작품처럼, 땅이나 벽에 신체 일부가 박힌 몬스터들이 구슬픈 음색을 토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잡는 방법은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뿐. 그러나 굉장히 겁이 많고, 용의주도한 놈이라 몸 전체를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당연히 잡기 힘들다.
잡기 힘든데, 가치는 상당하다.
6등급 몬스터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마나스톤은 물론, 그 몬스터 자체가 가지는 가치도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다. 개중에서도 벽두꺼비의 가치는 6등급 몬스터 전체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이유는 하나.
‘녀석의 섬수…… 최고의 마나 포션이지.’
벽두꺼비의 섬수, 침은 마력을 급속도로 회복시켜 주는 놀라운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비슷한 게 기생망고지만, 기생망고는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 전까지는 벽두꺼비의 섬수가 마나 포션으로 주목받았다. 기생망고가 등장하면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벽두꺼비 섬수는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
일단 회복 정도가 다르다. 기생망고는 대단하지만, 회복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 기생망고 한 알로는 솔직히 1서클 마법사의 마력 전부도 회복할 수 없다. 하지만 벽두꺼비 섬수는 100㎖의 양이면 4서클 마법사의 마력 전부가 단숨에 회복된다. 딜레이 상태에 빠진 마법사가 곧장 전투에 다시 참가할 수 있다.
심지어 마력 쇼크를 바로 치료해줄 수 있는 효능도 있다. 사실 회복제보다는 구급약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기생망고와는 전혀 다르다. 아주 귀한 놈이다.
“벽두꺼비가 뭡니까?”
이런 벽두꺼비에 대한 정보는 소수만 알고 있다. 일단 6등급 몬스터인 만큼 어지간한 이들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이 없다. 4서클 마법사인 안중현도 스택 레코드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놈의 이름과 섬수가 가지는 효능만 알고 있었다. 녀석이 어떻게 생긴 건지, 그마저도 최근에 알게 됐다.
그런 정보를 이우희나 박태중이 알고 있을 리 없다. 알고 있으면 오히려 역으로 의심해야 하는 상황.
안중현은 짧게 고민했다.
그들에게 귀한 정보를 말해준다?
‘잘됐군.’
오히려 안중현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알려줄 수 없는 이 귀한 정보를 자신의 부하들에게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까.
안중현이 곧바로 총꾼과 마법사를 모았다.
* * *
-벽두꺼비를 잡았다. 귀한 놈이다. 녀석을 잡기 위해서 무려 보름 동안 함정을 팠다. 어렵게 잡은 만큼 맛있게 먹을 거다.
-녀석의 섬수는 최고의 마력 회복제다. 그런데 나 같으면 안 먹는다. 최악의 맛이다. 이걸 먹으면 시름시름 죽는 사람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을 거다. 그래서 회복제인 모양이다.
-벽두꺼비의 내장은 크림이다. 신기하다. 먹으니, 크림의 부드러운 맛과 깊은 단맛이 섞여 있다. 최고다. 오늘은 놈의 내장으로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먹을 거다. 아, 스파게티가 없지. 그냥 크림 수프나 해 먹어야겠다.
‘크림이라…….’
이강우는 기예르모 레시피에 있는 벽두꺼비 관련 내용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툭툭.
그런 이강우의 잡념을 깬 건 안중현이었다. 이강우의 어깨를 두 번 가볍게 친 안중현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 있나?”
안중현은 벽두꺼비에 대한 정보를 풀었다. 섬수의 가치는 풀지 않았지만, 녀석이 가진 특징 대부분을 총꾼과 마법사들에게 알려줬다. 이후 안중현은 좋은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안하라고 했다.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막상 실효성을 느낄 수 있을 만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기대를 했다. 이강우는 이런 경우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곤 했으니까.
“저라고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 정도로 특이한 능력을 가진 환수 타입을 상대하는 거…… 아주 처음이라고 할 순 없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강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슴팍에 있는 건 독이었다. 김재범이 이강우를 통해 안중현에게 건네주려던 독. 이후 이강우는 그 사실을 말해줬고, 안중현은 이강우에게 독을 보관하라고 했다.
이강우가 그런 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것.
‘독을 놈에게 먹이면 일이 참 쉽게 풀릴 텐데 말입니다.’
‘녀석에 독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독이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의미.
안중현과 이강우가 재차 눈빛을 나눴다. 이강우가 그 상황에서 짧게 말했다.
“방법을 최대한 연구해보겠습니다.”
“그전에 괜찮은 환자식을 만들어주게. 무슨 재료를 써도 좋으니.”
이강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중현이 이강우의 어깨를 꾹 눌렀다.
“요리라는 것이 이토록 값진 것인지, 이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군.”
* * *
벽두꺼비와의 짧은 교전 이후 안중현은 부하들에게 휴식을 줬다.
“앞으로 8시간 동안 휴식이다. 2개 조로 나눠서 휴식과 식사를 번갈아 가면서 한다.”
꿀맛 같은 휴식과 함께 가지고 온 식료품으로 식사를 했다. 이강우가 만들어준 요리도 나쁘진 않았지만, 피로한 상황에서는 재료의 맛을 살린 요리보다는 맵고, 짜고, 단 음식이 좋았다. 단숨에 혈당을 올려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때문에 이강우는 오직 한 명을 위한 요리만을 만들었다.
휴식을 마친 이들의 꼴은 참 가관이었다.
제대로 씻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청결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으니 모두가 거지꼴을 하는 건 당연했고, 주어진 수면 시간은 적다고 볼 순 없지만, 그 시간 동안 깊게 잠드는 건 불가능했으니 눈빛에 총기가 깃들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 사실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었다. 평소에도 없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없었다.
“박지욱, 괜찮나?”
“괜찮습니다.”
“필요한 건?”
“특별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팔이 잘린 동료, 괜찮다고 말하지만 출혈이 적지 않아 얼굴이 하얗게 변한 동료를 앞에 두고 잠 좀 못 잤다고 불만을 품는다는 건, 동료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으니까.
채유리마저 괜한 칭얼거림을 내뱉지 않았다. 평소에 탐스럽던 금발은 포마드를 바른 것처럼 기름이 잔뜩 꼈고, 때문에 대충 머리끈으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녀는 이강우에게 뭔가가 먹고 싶다는 투덜거림을 단 한 번도 뱉지 않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채유리는 칭얼거려도 될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팔이 잘린 총꾼…… 박지욱은 죽은 목숨, 부담스럽다는 투정조차 뱉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박지욱을 챙겨줄 순 없었다.
“이동한다.”
8시간.
정확히 8시간이었다. 안중현은 그 시간에서 1분짜리 추가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미로 탐사에 나섰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쿠쿠쿠!
굉음과 함께 땅이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안중현이 신호를 보냈다. 파티가 이동을 멈췄다.
쿵!
이윽고 짧은 굉음과 함께 소란이 사라졌다. 안중현이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총꾼 한 명을 확인했다. 태블릿 PC를 꺼낸 총꾼은 태블릿 PC를 조작했다. 여러 개의 영상이, 미로 곳곳에 설치해둔 카메라 영상이 벌룬의 무선 통신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태블릿 PC에 출력됐다.
이윽고.
“몬스터입니다!”
총꾼이 소리쳤다.
조금 전 벽이 이동하면서, 벽 너머에 있던 몬스터들이 새롭게 생긴 길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 몇 놈이 안중현의 파티를 발견하고 접근 중이었다. 그나마 미리 설치해둔 카메라와 원격 조종 및 감시가 가능한 시스템 덕분에 일찍 파악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
“몬스터 타입은?”
“소…… 미노타우르스입니다!”
몬스터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의 상황이다.
몬스터 정체도 파악했다. 안중현은 숫자마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쿵쿵쿵!
굳이 입 아프게 숫자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약 100미터, 이제까지 안중현 파티가 지나온 길의 모퉁이에서 소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근육질의 괴물이 등장했으니까.
“두 마리군.”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가.
7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의 등장이었다.
* * *
7등급 몬스터 미노타우르스.
작은 건 3미터, 큰 건 5미터의 신장을 가지고 있다. 특이점은 그런 신장이 짧다고 생각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몸뚱이였다.
또한 털로 덮인 하체와는 다르게 털이 없이 그저 가죽만 있는 상체는 근육의 꿈틀거림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미노타우르스를 발견하는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박태중이었다.
퍼버벅!
그가 마법을 담은 주먹으로 대지를 두드렸다. 주먹기둥 마법을 쓰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가 주먹으로 대지를 두드리자, 미노타우르스의 앞으로 주먹기둥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후죽순,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주먹기둥은 미노타우르스의 무릎 높이까지 자라났다.
그렇게 등장한 주먹기둥의 숫자가 상당했다. 주먹기둥 마법이 2서클 마법 중에 마력을 적게 소모하는 마법이라지만, 박태중이 만들어낸 광경은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다.
“후우!”
무리다.
이 정도까지 주먹기둥 마법을 썼다면, 더 이상 추가적인 마법사용은 불가능하다. 쓰다가는 마력 쇼크에 빠질 것이다. 박태중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마법을 난사한 건, 그가 마법을 쓰며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뿐이기 때문이다. 박태중의 마법은 대부분 보조 마법이다. 그 자체로 표적에 치명적인 대미지를 주기보다는 대상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아군을 도와준다.
즉, 강력한 공격 마법이 없다. 그게 대지 속성 마법의 단점이고, 대지 속성 마법을 주력으로 하는 마법사가 적은 이유다.
결정적으로 미노타우르스는 환수 타입의 몬스터가 아닌, 그냥 평범한 야수 타입의 몬스터다. 굳이 마법을 써서 대미지를 줄 필요가 없다.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무기를 쓰면 된다.
총이라는 이름의 무기 말이다.
때문에 이우희는 애초에 마법을 쓸 생각조차 없는 듯, 총을 들고 수류탄을 체크했다.
그런 이우희의 뒤에는 이강우가 있었다. 이강우는 오른손에 쥔 치렁치렁한 목걸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마력을 머금은 목걸이가 은은한 빛을 품기 시작했고, 그 빛이 이강우의 어깨를 타고 이강우의 반대편 손, 왼손으로 이동했다.
이강우는 레몬을 짜듯 자신의 왼손에 모인 빛을 이우희의 머리 위에서 꽉 짜냈다. 그러자 빛을 뿜는 액체 한 방울이 이우희의 정수리 위에 톡! 하고 떨어졌다.
이우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음!”
이강우가 외치는 순간 박태중이 이강우에게 다가왔고, 이우희는 고글을 쓴 뒤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강우가 이우희에게 걸어준 마법은 헤이스트 마법이었다. 몸을 가볍게, 깃털처럼 만들어주는 헤이스트 마법은 이우희를 중력을 무시하는 몬스터, 울닭처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줬다. 달리던 이우희는 속도가 붙자 평탄한 땅이 아닌 반듯하게 솟아오른 벽을 밟았다.
파밧!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우희가 벽을 타기 시작했다. 미로의 길에 틈 하나 주지 않겠다는 듯 일렬로 줄을 맞춘 채 돌진하던 두 마리의 미노타우르스는 벽을 타고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이우희를 멍하니 바라봤다.
음머?
녀석들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그러는 사이 박태중이 만들어낸 주먹기둥이 미노타우르스의 돌진을 막았다. 거침없던 미노타우르스의 몸뚱이가 멈췄다. 한 놈은 넘어졌다.
쿵!
놈이 자빠지자 땅이 가볍게 울렸다.
“됐습니다.”
“좋아!”
그리고 박태중마저 헤이스트 마법이 걸리자, 고글을 쓰고 무장을 한 채 이우희가 지나간 루트를 똑같이 밟고 지나갔다. 그 둘이 순식간에 미노타우르스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 둘이 미노타우르스의 후방으로 이동하는 순간 안중현이 소리쳤다.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이우희와 박태중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목표는 미노타우르스의 무릎 뒤쪽, 오금.
투투, 투투!
규칙적인 총성에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크게 움찔하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르스에 대한 연구는 끝이 났다.
녀석들의 근육은 녀석들이 뿜어대는 어마어마한 힘의 근원이자, 어지간한 몬스터의 가죽이나 껍질보다 우수한 갑옷이었다. 특히 허벅지와 가슴근육이 있는 전면과 등 근육이 가득 찬 등은 자동소총으로 제대로 된 상처를 내지 못한다. 사람으로 따지면 그냥 바늘로 아주 조금, 살짝 찌른 수준이다.
대신에 근육이 없는 부위는 약하다. 하물며 무릎 뒤쪽은 총상 앞에 그냥 아프다고 넘어갈 수 있는 부위도 아니다.
그 사실을 이우희와 박태중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주력으로 사냥했던 유적이 7등급 유적이다. 7등급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빠삭하다. 경력도 충분하다.
투투, 투투!
거듭된 박태중과 이우희의 사격은 기어코 미노타우르스에게 짜증을, 경각심을 줬다. 가슴이나 등짝이라면 생채기 정도에 불과했을 공격이 오금에 연달아 꽂히니,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
음머!
두 놈이 괴상망측한 울음과 함께 고개를, 몸을 돌렸다. 이우희와 박태중을 바라봤다.
‘왔군.’
그 순간 안중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놈들의 대가리는 뻔하지.’
이거다.
이우희와 박태중의 역할은 미노타우르스의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일이다.
놈들이 등을 돌리면?
“이우희, 박태중 피해!”
보급품 상자 위에 설치된 K6 중기관총이 큼지막한 불꽃을 토해낼 것이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조준도 끝났다. 단지 이우희와 박태중이 이제부터 시작될 무차별적인 사격에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줬다. 헤이스트 마법이 걸린 그들은 잽싸게 미노타우르스가 등장했던 길모퉁이로 피했다.
미노타우르스는 당연히 이우희와 박태중을 쫓으려 움직였다.
“사격 개시!”
그 장면을 본 안중현이 번쩍 든 손을 내리쳤다.
투투투투!
일반 소총의 탄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굵기와 위력을 가진 탄환이 동시에 세 방향에서 두 마리의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도 미노타우르스의 전면이 아닌 후면, 상체가 아닌 하체를 노리고 날아가는 탄환은 미노타우르스에게 고통 이상의 결과물을 남겨줬다.
우어어!
소의 울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괴음(怪音)이 미노타우르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워머신!
안중현이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 구해온 녀석의 손에도 K6 중기관총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역할은 앞선 총꾼들처럼 무차별적인 난사가 아니었다.
정밀한 조준.
단 한 방에 확실한 결과물을 얻는 게 녀석의 역할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건 워머신에 탑재된 무수히 많은 기능이었다. 조종사는 그저 게임을 하듯, 원하는 대상의 피격 범위를 설정만 하면 된다. 설정만 하면 워머신이 자동으로.
투!
총알을 토해냈고.
푹!
완벽한 저격 능력을 보여줄 테니까.
우오오!
한 발의 총성이 터지는 순간 미노타우르스 한 마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넘어졌다. 탄환이 미노타우르스의 무릎을 확실하게 뚫은 증거였다. 무릎을 꿇은 미노타우르스는 재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푸홧!
안중현, 그가 만들어낸 불지뢰가 무릎 꿇은 미노타우르스의 아래에서 솟아오르며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크게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워머신이 다른 녀석을 타깃으로 삼았다. 박태중이 만들어놓은 주먹기둥이 조준을 방해했지만 워머신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냥 포인트만 설정하면, 워머신이 알아서 맞춰주니까.
끼이, 끼이!
옅은 기계음이 흘렀다.
그사이에도.
투투투!
다른 총꾼들이 소나기처럼 무시무시한 탄환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 빗발치는 소나기 속에.
퉁!
워머신이 발사한 탄환이, 비수가 섞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숨은 비수는 정확하게 미노타우르스의 오금에 꽂혔다. 오금을 피격당한 미노타우르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용케 버텼다.
투투!
그 모습에 워머신은 무덤덤하게 총성 두 발을 토해냈고, 발사된 탄환은 맞은 곳을 재차 뚫고 들어갔다.
푹, 한 발.
푹, 두 발.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듯, 세 개의 탄환은 한곳에 꽂히며 미노타우르스의 무릎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쿵!
버티던 미노타우르스도 마저 쓰러졌다. 그제야 빗발치던 총성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굉음으로 가득 찼던 미로가 진정되기 시작됐다. 그 진정 속에서…….
-몬스터다!
박태중,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 *
중기관총의 사격이 시작되는 순간, 이우희와 박태중은 길모퉁이로 피했다. 어설프게 미노타우르스를 향해 지원사격을 한답시고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오히려 아군의 총알에 맞아 죽을지도 몰랐으니까.
피신한 그들은 총성이 잦아들길 기다렸고, 혹시 모를 안중현의 명령을 기다렸다.
문제가 생긴 건 미노타우르스 두 마리가 쓰러졌을 때였다. 쓰러지는 걸 보는 순간 그 둘의 긴장이 풀렸다. 이우희도, 박태중도 동시에 안도의 한숨 비슷한 걸 내뱉었다.
그리고 그들이 숨을 내뱉는 순간, 정체를 감추고 있던 녀석이 이우희를 공격했다.
공격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찰나의 순간, 채찍 같은 것이 날아와 이우희의 몸을 후려쳤다.
“끄앗!”
비명을 지르고 날아가는 이우희.
박태중이 낌새를 느꼈을 때 자신의 지척 거리에 있었던 이우희는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박태중이 급하게 소리쳤다.
“몬스터다!”
그 외침은 곧바로 마이크를 통해, 안중현의 이어폰으로 전달됐다.
박태중의 외침을 듣는 순간 안중현의 머릿속이 빠르게 사고를 진행시켰다.
구해야 하나? 박태중, 이우희. 유적 사냥에서 무조건 필요한 전력이다. 그 둘을 구하기 위해서 병력을 파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럼 누구를? 총꾼을 보냈다간 대처가 늦는다. 무엇보다 총꾼은 지금 미노타우르스 무리를 넘어갈 수 없다. 미노타우르스는 쓰러졌지만 죽지 않았다. 놈들의 몸뚱이 근처를 지나간다는 건, 마지막 발악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괴물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밖에 안 된다.
답은 하나, 헤이스트 마법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마법사를 보내야 한다.
“채유리, 이강우!”
안중현이 답을 내놓는 순간, 채유리가 이강우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이미 본인에게 헤이스트 마법을 걸어놓았던 채유리가 이강우에게도 마저 헤이스트 마법을 걸어줬다.
안중현이 이미 준비를 마친 그 둘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은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 안중현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 이강우와 채유리는 경주를 하듯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 채유리가 훨씬 빨랐다. 그녀가 앞장섰고, 이강우가 채유리의 발자국을 따랐다.
그 둘은 곧게 달렸고, 속도가 붙자 그 속도를 이용해 벽을 탔다. 쓰러진 미노타우르스를 무시하듯 스쳐 지나갔고, 단숨에 이우희와 박태중이 몸을 피했던 길모퉁이를 향해 이동했다.
그런 그 둘의 눈에 들어온 건, 쓰러진 이우희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접근한 박태중, 둘뿐이었다.
그들을 습격한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벽두꺼비, 놈이 등장했다.
* * *
“이우희! 야!”
쓰러진 이우희는 정신을 잃은 듯, 거듭된 박태중의 부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호흡은 진행되고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 이 긴급한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는 일까지는 없었다.
‘젠장.’
박태중은 거듭 이우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뭐지?’
무언가가 이우희를 공격했다. 그런데 그 무언가의 정체를 박태중은 모르고 있었다.
‘설마 벽두꺼비? 놈이?’
달리 말하면, 그 무언가가 재차 박태중을 공격한다면 박태중도 당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
-채유리, 이강우!
그때 안중현의 목소리가 들렸고, 박태중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둘이 온다면 당연히 그 둘과 최대한 합류하는 게 최선이다. 박태중은 조심스럽게 이우희를 업었다. 업은 채로 길모퉁이를 향해 이동했고 채유리와 이강우는 금방 박태중 앞에 등장했다. 그 둘 역시 긴급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한 광경을 보며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강우와 채유리도 금방 눈치를 챘다.
“벽두꺼비.”
놈이 왔다.
6등급의 몬스터, 신묘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능력을 가진 놈이 이우희를 공격한 것이다. 그 후 놈은 다시 벽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혹은 땅바닥 속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채유리와 이강우가 눈빛을 교환했다. 긴장감이 등골을 적시지 않는다면 거짓말. 언제 어디서, 벽은 물론 땅, 심지어 머리 위 천장에서 벽두꺼비가 공격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은 놈보다는 이우희의 안전이 우선이다. 이강우가 채유리에게 말했다.
“제가 박태중을 도울 테니까 경계 좀 부탁합니다.”
채유리는 대답 대신 마력검 마법이 걸린 단검을 꺼낸 후 단검을 쥔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몬스터가 등장하면 단숨에 먹기 좋게 썰어버리겠다는 각오를 보여줬다.
이강우는 이우희를 업고 있는 박태중에게 접근했다. 일단 이강우가 이우희의 상태를 눈으로 보며 질문을 건넸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맞고 날아갔어.”
“호흡은?”
“다행히 붙어있고.”
“외상은 어떻습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없어. 출혈도, 동공 반응도 이상한 건 없어. 뼈가 부러진 곳은……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갈비뼈 쪽에 이상이 생겼을 것 같아.”
“갈비…… 골치 아프군요.”
말과 함께 이강우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에 감춰진 그건 초콜릿이었다. 이강우가 그 초콜릿을 박태중에게 건넸다. 박태중이 이건 뭐지? 하는 눈빛을 봤다.
“이럴 땐 단 게 최고입니다.”
놀랐을 때, 긴장했을 때, 당황했을 때, 그럴 때 초콜릿 같은 단 음식은 좋은 약이 된다. 이강우가 초콜릿을 사랑하는 이유다. 긴급한 순간, 초콜릿 하나는 냉철한 판단을 가능케 해주니까.
‘마법을 쓰는 것도 그렇고, 이럴 때 초콜릿을 꺼내는 것도 그렇고 정말 보기와는 다르게 여러모로 보통 놈이 아니군.’
박태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우가 그의 입에 초콜릿을 넣어줬다. 박태중이 초콜릿을 씹으며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맛이 묘한 모양이다.
“초콜릿치고 좀 쓰군.”
“유적에서 발견한 적색 이끼를 말린 후 가루를 내어 넣었습니다.”
“적색 이끼?”
“약재로 쓰이는 놈입니다. 정신을 맑게 해주죠. 워낙 쓴 놈이라서 초콜릿에 섞었는데 초콜릿보다 더 쓴 모양이군요. 하지만 슬슬 향이 올라올 겁니다.”
“시원하게 올라오긴 하네. 코도 뻥 뚫리는 느낌이군.”
그 짧은 대화로 박태중은 불필요한 긴장감을 버릴 수 있었다. 지금 상황에 필요한 만큼의 긴장감만을 몸에 둘렀다.
‘진짜 대단한 놈이야.’
그 상황에서 박태중은 이강우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을 느꼈다.
이강우가 특별하다고 느낀 건 그와 불꽃꼬리 사냥을 했을 때부터였다. 도축 실력이 대단했다. 몬스터를 그렇게 잘 써는 인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다음 놀란 건 요리 실력이었다. 참 요리를 잘했다. 솔직히 유적 사냥에서 다음 식사를, 메뉴를 기다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총꾼으로도 능력이 출중했다. 나중에 이우희에게 그때 상황을 들었을 때 감탄했다. 어떻게 그런 판단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이번 유적 사냥을 시작한 이후, 유적에 들어온 이후 안중현으로부터 이강우가 마법사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무려 2서클 마법사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박태중은 솔직히 직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안중현은 이강우를 유적에 들어온 이후 마법사로 공개했다. 모두가 놀랐다. 총꾼인 줄 알았던 사람이 마법사라니? 물론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떻게든 즈믄나래 본부에도 알려질 것이다. 이제까지처럼 안중현이 이강우를 총꾼으로 데리고 다니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강우가 재평가를 받을 테고, 동시에 즈믄나래는 이강우를 어울리는 곳에 넣을 것이다.
적어도 안중현의 파티 일원으로 남기진 않을 것이다. 이강우는 마법사 능력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다수 갖추고 있으니까. 박태중도 이 바닥 생리를 모르지 않는다. 이강우는 필시 즈믄나래의 주력 파티에 들어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중현도 나름 승부수를 건 셈이다. 이강우가 6등급 유적에서 괜히 마법사인 걸 감추기 위해 실력마저 감추다가 봉변을 당할 바에는 모든 패를 꺼내서 6등급 유적을 완벽하게 클로즈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를 더 이상 쥘 수 없다는 걸 각오하고, 어차피 마지막이 된다면 그의 모든 걸 써먹을 작정을 했다.
그 선택은 현명했다.
“단 게 들어가니 머리가 돌아가네.”
이강우 덕을 많은 이들이 보고 있다. 알게 모르게. 그가 없다고 유적 사냥에 실패했을 리 없지만, 이강우 덕분에 피해가 최소화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강우의 활약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박태중이 이우희를 등에 업은 채로 이동했고 채유리와 이강우가 그런 박태중을 앞뒤에 자리를 잡은 채 그 둘을 호위하며 움직였다. 그들은 그 상태로 천천히 미로의 길모퉁이를 돌았다. 처참한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거듭된 사격 속에 치즈가 되어버린 미노타우로스들은 질긴 생명력 때문에 죽지 못한 채 여전히 거친 콧김과 서슬 퍼런 눈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진짜 질긴 놈들이야.”
박태중이 혀를 내둘렀다. 아직 미노타우로스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저들 사이를 지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위협이 있는 장소에서 네 명만이 덩그러니 미노타우로스가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결정적으로 만약 지금 상황에서 총꾼들과 안중현이 있는 쪽에 환수 타입의 몬스터가 등장하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진다. 미노타우로스를 삽시간에 곤죽으로 만든 이 화력도 환수 타입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합류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이우희의 상태 역시 지금보다 확실하게 체크해야 했다.
“도중에 떨어지면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죽음이겠군. 다 잡은 몬스터 위를 널뛰기하다가 죽는 격이니.”
“내가 먼저 뛸게.”
일단 가장 먼저 뛰는 건 채유리였다. 그녀가 루트를 그려주면, 그 루트를 이우희를 업고 있는 박태중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건 이강우였다.
때문에 가장 표정이 안 좋은 건 이강우였다. 이강우는 이우희가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여전히 불안한지 그 자리에서 탄창도 한 번 빼서 확인하고 다시 총에 넣었다.
그러는 사이 채유리가 뛰었다. 질주, 도약 그리고 벽을 두어 번 밟고 뛰는 것으로 미노타우로스를 가뿐하게 스쳐 지나간 그녀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미노타우로스의 눈동자가 그런 채유리를 쫓았다. 미노타우로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주변을 놀잇감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이 인간들을 정말 진심으로 씹어 죽이고 싶을 터.
이윽고 박태중이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질주했다. 박태중의 질주는 채유리만큼 날렵하진 않았지만, 무리는 없었다. 멀쩡한 미노타우로스의 틈도 비집고 지나갔던 그다. 이미 자리에 넘어진 채 목숨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미노타우로스를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박태중이 곧바로 미노타우로스 너머에 착지했고 그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료 장비를 앞세운 총꾼들이 이우희에게 달라붙었다.
남은 건 이강우 하나.
이강우는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른 후에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팡팡, 이강우가 제자리에서 두 번 가볍게 도약하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강우가 질주를 위한 준비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이강우가 달리는 순간.
퍼억!
이강우의 정면에서, 달려가던 이강우의 앞으로 날렵한 무언가가 채찍처럼 날아와 이강우를 밀어냈다. 앞으로 질주하려던 이강우의 몸뚱이는 오히려 뒤로 10여 미터 날아갔다. 이강우는 바닥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채 굴렀다. 구른 덕분에 그나마 충격이 줄었다.
이강우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노타우로스 너머에 있는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이강우를 바라봤다.
“도망쳐!”
누군가 소리쳤고, 이강우는 이를 콱 물었다.
무언가가 이강우를 공격했다. 정체는 확실치 않지만 심증은 확실하다. 벽두꺼비, 놈이겠지.
당연히 이강우가 벽두꺼비와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도주가 답.
가장 좋은 도주 경로는 미노타우로스 너머, 본진과 합류하는 거지만 지금 그걸 방해받았다.
결국 이강우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그 반대 방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강우는 이를 꽉 물었다. 그런 이강우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대 맞으면서, 구르면서 입술이 터진 모양이다. 그것도 굉장히 심하게. 출혈은 이강우의 가슴팍을 적실 정도였다.
이 순간 이강우가 길모퉁이를 돌았다. 이우희와 박태중이 몸을 숨기고 있었던 그곳으로 달려갔다.
차선이 아닌 차악이다.
지금 본진에서 멀어지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지금 이강우의 과제는 당장 목숨을 보전하는 일이다. 채유리와 박태중, 안중현이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일 테니까, 그들이 오기 전까지 사는 게 우선이다.
이강우는 길모퉁이를 돌기 직전, 곧바로 주머니에서 수류탄 하나를 꺼냈다. 잽싸게 핀을 뽑고 던졌다. 이강우가 더 전력으로 뛰었다. 헤이스트 마법 덕분에 이강우는 날렵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콰앙!
수류탄이 터지며 강렬한 소리를 토해냈다. 이강우의 발걸음이 그 폭음과 함께 멈췄다.
이강우가 수류탄을 다시 꺼냈다. 이강우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수류탄을 높게 들었다. 마치 접근하는 어둠을 뿌리치기 위해 횃불을 높이 든 것처럼, 무언의 경고였다.
조금 전 수류탄의 위력을 봤다면, 자신을 건드리는 순간 자폭도 마다치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
이강우는 그 상태에서 긴장된 기색을 보였다. 이강우는 몸을 수차례 돌리며 주변을 계속 경계했다.
그런 이강우의 머리 위, 천장에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단단한 벽이 물처럼, 액체처럼 변했다. 그 사이로 벽과 똑같은 회색빛의 피부, 우툴두툴한 피부를 가진 거대한 두꺼비가 머리를 내밀었다. 머리 양쪽 끝에 달린 두 개의 눈을 한 번 껌뻑 움직인 두꺼비가 다시 벽 안으로 잠수를 했다. 파문이 일렁거리던 벽이 잠잠해졌다. 평상시의 벽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강우가 소리쳤다.
“지원 언제 옵니까?”
다급한 외침.
곧바로 대답이 왔고, 미노타우로스 너머에 있던 박태중과 채유리가 다시금 미노타우로스를 넘을 준비를 했다.
명령도 나왔다.
-이강우, 우리가 보이는 위치로 다시 돌아와라.
이강우는 그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에 수류탄을 든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돌아간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팟!
그때 이강우의 오른쪽 측면에서 다시 한번 무언가가 대포알처럼 날아왔다. 벽두꺼비의 혓바닥이었다. 대포처럼 발사된 그 혓바닥은 이강우를 옆으로 밀었다. 곧게 전진하던 이강우의 몸뚱이가 왼쪽 벽을 향해 날아갔다.
“컥!”
이강우가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 상황에서 이강우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후 이강우가 간신히 벽을 등지고 섰다. 이 와중에도 이강우는 손에서 수류탄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수류탄을 앞세운 채 소리쳤다.
“빌어먹을 새끼, 혼자서는 안 죽는다!”
그때.
스멀스멀!
이강우가 등지고 있는 벽에 파문이 생겼다. 단단한 벽은 늪이 되었고, 그 늪 속에서 벽두꺼비가 거대한 입을 벌린 채 등장했다. 벽두꺼비는 거대한 입으로 단숨에 이강우의 왼쪽 팔을 통째로 덮쳤다.
이제 남은 건 이대로 이강우를 벽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이강우를 질식사, 압사시키는 것뿐.
그런데 벽두꺼비는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김재범, 당신 말이 맞았어.’
* * *
벽두꺼비에 대한 정보는 충분했다. 기예르모 레시피를 통한 정보 그리고 안중현으로부터 들은 정보.
두 가지 정보를 조합하고, 직접 놈을 상대하면서 녀석의 특성을 알게 됐다.
녀석은 겁이 많다. 때문에 적이 다수가 뭉쳐있으면 절대 접근하지 않는다. 동시에 녀석은 적이 가시가 있다는 걸 알면 섣불리 먹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적의 가시가, 독기가 빠질 때까지 안전한 벽 속에서, 땅속에서 혓바닥을 이용한 공격을 한다.
또한 녀석은 집착이 있다. 만약 집착이 없었다면, 안중현 파티를 한 번 공격한 후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후에 재차 이우희를 공격했을 리 없다. 녀석은 안중현 파티를 맴돌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회가 오자 가차 없이 나섰다.
추가적으로 녀석이 안중현 파티를 맴도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허기가 졌으리란 사실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이강우는 답을 내렸다.
놈은 미끼를 물 준비가 끝난 사냥감이다!
지금만큼 녀석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는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강우는 자신이 미끼가 되겠다고 말했다. 간략한 작전도 설명했다. 자신이 미끼가 되고, 몸에 빗살무늬전갈독을 발라 놈이 알아서 중독되도록 만들겠다고.
이 작전을 박태중에게 말했을 때, 무전을 통해 안중현에게 말했을 때, 그 둘의 대답은 NO였다. 성공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작전에 이강우라는 중요한 전력을 미끼로 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강우는 오히려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중에 저나 박태중 씨가 이우희처럼 된 후에는 늦습니다. 무엇보다 녀석은 이번에도 사냥에 실패하면 더 심사숙고해서 다음을 기약할 겁니다. 그때는 무조건 피해자가 생깁니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다수의 리스크를 감수하는 게 정답입니까?”
이강우도 바보는 아니다. 자기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중에 리스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현명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유적 사냥은 언제나 그랬다. 할 수 있을 때 끝내야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당장 잃을 손해만을 두려워서 행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마지막에 더 큰 손해를 본다.
이런 이강우의 말에 안중현은 반문할 수 없었고, 리더인 그가 반문하지 못하는 순간 이강우의 작전은 통과였다.
그리고 이강우의 작전은 통했다.
이강우는 자신의 몸을 무는 순간, 빗살무늬전갈독에 중독되어 마비가 된 벽두꺼비를, 자신의 어깨를 문 채로 굳어버린 벽두꺼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벽두꺼비의 침이 이강우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강우가 살짝 놀라며, 오른손으로 그 침을 닦았다.
“아깝게!”
그 순간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그 침을 입에 살짝 넣었다. 놀라운 효능을 가진 벽두꺼비 침이 어떤 효과를 보일지, 얼마만큼의 마력 포인트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으니까.
그때 곧바로 알림이 떴다.
[250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그저 손에 묻은 침을 먹었을 뿐인데, 250포인트의 마력이라니!
‘와우!’
이강우가 기겁했다.
기겁하면서.
‘아차……!’
이강우의 몸이 굳었다. 지금 벽두꺼비가 왜 이강우, 본인을 문 채로 침을 질질 흘리는지, 잠시 잊은 이강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