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14화 (14/66)

14화. 기예르모 레시피

즈믄나래 정직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다양하다. 개중에서도 즈믄나래 직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혜택이 바로 공식적인 업무로 해외 출장을 갈 경우, 항공사에 따라서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블랙 스택이 세계 유수의 항공사와 맺은 제휴 덕분이었다.

이강우 역시 그 혜택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즈믄나래 정직원이 되는 순간, 제발 자신에게 유럽이나 뉴욕같이 먼 곳으로 해외 출장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도했다.

그런 이강우에게 드디어 해외 출장 명령이 내려왔다. 목적지는 안타깝게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일본. 정확한 위치는 열대기후를 자랑하는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도착한 이강우는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들어오는 열대기후 특유의 열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까지 정글에서 한 달 넘게 그 개고생을 했는데, 또 이런 날씨에 끌려오다니…….’

말과 함께 이강우는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블랙 에이전트, 토마스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는 이강우의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블랙 에이전트라…… 아주 본인이 블랙 에이전트라고 온몸으로 어필을 하네.’

블랙 에이전트.

블랙 스택이 자기 소속 마법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좋게 말해서 관리고, 까놓고 말하면 감시집단이다.

마법사들이란 게 유혹을 많이 받는 직종이고, 사고를 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사고를 칠 수 있는 부류다. 또한 모든 집단이 다 그렇지만, 99퍼센트가 제 역할에 충실해도 1퍼센트가 사고를 일으키면, 그 집단은 언제든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마법사에 대한 감시 및 관리 집단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강우도 블랙 에이전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참 대단하신 양반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 대단하신 길드 소속 마법사들조차 두려워하시는 양반들이니까.

‘대체 왜 날?’

단지 그런 대단한 인간이, 마법사를 감시해야 하는 양반이 왜 이강우를 데리고 이곳 오키나와까지 왔는가, 그리고 왜 마법사가 아닌 총꾼에 불과한 자신을 실시간 감시 중인가? 그게 궁금할 뿐이다.

아니, 궁금한 정도가 아니라 속이 바짝 마르고 있다.

‘납치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블랙 에이전트 토마스는 이강우에게 전후 사정조차 설명해 주지 않았다. 블랙 에이전트가 같이 가줘야 할 곳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강우가 그 앞에서 저 바쁘거든요? 같은 질문을 차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어휴, 빌어먹을 내 인생.’

이강우는 속으로 한숨을 되새김질했다. 한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서러운 처지다.

그런 이강우에게 이제까지 묵묵부답이었던 토마스가 오랜만에 입을 열어줬다.

“이제부터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은 절대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 됩니다.”

심각한 말이 나왔다. 말만 심각한 게 아니라 분위기도 심각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 선글라스 너머의 서슬 퍼런 눈빛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강우가 즉답을 내뱉었다.

물론 간만에 생긴 이 대화 분위기를 그냥 보낼 순 없었다.

“그보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목적지라도 알 수 없습니까?”

심각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 이강우의 질문에 토마스 요원은 짧게 고민하고, 짧게 대답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입니다.”

듣는 순간 이강우는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젠장.’

이강우가 알아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장소. 이강우의 목적지는 그런 곳이었다.

* * *

세계 3대 길드는 세계정세를 주름잡는 3개의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 중국, EU. 세계 3대 길드는 각각 이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블랙 스택은 당연히 미국과 긴밀한 관계다.

더불어 세계열강들은 유적 연구에 국력을 총동원하는 중이었고,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수집한 유적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소의 필요성을 느끼며,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연구소를 세웠다.

당연히 미국과 긴밀한 관계인 블랙 스택 지부 소속 연구원들은 필요하면 언제든 오키나와 유적 연구소로 불려가고는 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연구원들 그리고 마법사들이다. 고작 총꾼에 불과한 이강우가 불려갈 이유는 없다. 그런 경우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이강우는 어떤 의미에서 VIP 대접을 받으며 오키나와 미군기지 유적 연구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그냥 심심해서 데려온 건 절대 아니군.’

블랙 에이전트가 이강우를 데려가는 이유가 그저 심심풀이 땅콩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심부름꾼을 위해서 군용 헬기를 마련해주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이강우의 머릿속은 당연히 더 복잡해졌다.

‘설마…… 날 해부하려고 부른 건 아니겠지?’

해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경우의 수이지만 이강우의 경우는 달랐다.

이유가 있으니까.

‘내 정체를 아는 건가?’

불사황제 야크센의 권능!

그 권능을 가지게 된 이강우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강우는 솔직히 그걸 이유 삼아 해부를 당해도 이유 자체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강우의 온몸에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런 이강우의 얼굴색을 밝게 만들어준 건,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적 사냥 끝나고 바로 왔다던데…….”

헬기가 착륙하자마자 한 사내가 이강우를 향해 걸어왔다. 하얀 가운 안에 반바지와 민소매 티를 입은 그는 다름 아니라 권재용이었다.

이강우가 살아생전 딱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사내. 그런데 지금은 친한 불알친구보다 반갑게 느껴졌다.

이강우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권재용 박사가 내민 악수를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까라면 까야죠.”

이강우가 진담 섞인 농담을 뱉었고, 권재용 박사는 그런 이강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따라오게.”

* * *

오키나와 미군기지 내에 위치한 유적 연구소는 지하에 있었다. 꽤 깊숙한 지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법 내려가야 하는 곳.

‘숨이 막히네.’

또한 감시가 매우 철저했다. CCTV는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설치되어 있었고, 조금 과장해서 5미터마다 총을 든 군인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강우는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제 역할이 대체 뭡니까? 토마스 요원도 말해주지 않아서…….”

“별거 아니네. 몬스터를 해부해야 하는데 자네 도움이 필요해서 내가 조수 자격으로 자네를 불렀네.”

“도축 말고 해부 말입니까?”

“도축하고 다를 건 없지. 아니, 사실 몬스터를 놓고 보면 해부 기술이 발달해서 도축 기술이 됐지.”

이강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권재용 박사가 이강우에게 바랄 수 있는 게 몬스터를 써는 것밖에 없긴 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쓴다고 해도,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쓰는 경우도 있나?’

하지만 반대로 이 어마어마한 곳에 고작 몬스터 해부를 위해 이강우를 불렀다? 이강우는 솔직히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장소에서 고작 8, 9등급짜리 몬스터를 해부할 리는 절대 없다.

‘그보다 해부라니…… 7등급? 설마 6등급?’

어마어마한 놈을 해부하게 될 것이다.

물론 하라면 못 할 건 없다.

하지만 만약 해부 작업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수억 원짜리 도자기를 청소하다 깨는 게 오히려 양반처럼 느껴질 것이다. 6등급 이상 몬스터의 몸값은……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이니까.

‘설마. 내가 직접 하진 않겠지.’

달리 생각하면 그런 어마어마한 놈을 해부하는 작업을 경력도 없는 이강우에게 시킬 리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강우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설마 진짜 제가 칼 들고 해부하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단지 자네의 의견이 필요하네. 지금 몬스터를 어렵게 운반해놓고 보름 내내 몬스터 해부 방법을 논의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거든.”

보름 동안 해부 방법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그때 이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꽉 막혀있던 벽면이 유리창으로 바뀌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큼지막한 공간이 보였고, 그 큼지막한 공간 안을 다시 채우고 있는 두꺼운 유리 벽 안에 괴물이 있었다. 이강우는 그 몬스터를 보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역시 볼 때마다 멋진 놈이야.”

권재용 박사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감상을 하듯 그 몬스터를 바라봤다.

“저, 저거…… 멜트 드래곤 아닙니까?”

이강우의 말에 권재용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 아는군.”

“모르는 게 이상한 거죠. 최근 가장 소란스러웠던 녀석인데…….”

멜트 드래곤.

검은 비늘을 가진 몸길이 25미터의 드래곤이다.

특징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육체를 액체 상태로 바꿔 어디로든 숨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이름이 멜트 드래곤이다. 자신의 육체를 녹일 수 있다는 의미. 환수 타입이기에 물리적인 공격도 쉽사리 먹히지 않는 놈이다.

더불어 몬스터 등급은 5등급!

‘이렇게 5등급 몬스터를 보게 될 줄이야!’

사실 이강우가 만날 일이 없는 놈이다. 5등급 몬스터를 이강우가 만난다면, 그날이 이강우의 기일이 될 테니까.

그런데도 이강우가 녀석을 알고 있는 건, 3개월 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놈이 등장한 덕분이었다.

원래도 심각한 무법지대였던 모가디슈를 멜트 드래곤은 일주일 만에 깔끔하게 정리했다.

놈은 정말 어마어마한 참사를 만들었고, 당연히 놈을 잡기 위해 국제적인 공조 아래 팀이 구성됐다. 유엔의 지휘 아래에 이존, 칠성문, 블랙 스택이 파견한 최고의 정예들이 팀을 만들고, 작전을 시작했다.

더불어 작전 이름은 블랙 드래곤 다운.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을 패러디한 이름으로, 멜트 드래곤을 추락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약 9일 동안의 추격전을 펼친 결과 사냥에 성공했고, 주요 과정은 뉴스를 통해 방송됐다.

그렇게 잡힌 놈이 지금 눈앞에 있다.

‘아.’

사실 이 상황에서 이강우는 놀라기보다는 경외감을 느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동시에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강우, 정신 차려! 이건 기회야!’

이 순간 이강우는 스스로를 향해 소리쳤다.

‘분석!’

이강우는 곧바로 분석 마법을 사용했다. 5등급 몬스터가 가진 마력 포인트의 양을, 섭취할 수 있는 마력 포인트를 가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윽고 이강우의 눈이 유리창 너머, 멜트 드래곤 사체 위 숫자를 확인했다.

‘헉.’

순간 이강우는 제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소리를 정말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맙소사…….’

그 정도로 대단했다.

‘10만 포인트라니? 저거 하나만 먹어도 3서클까지 당장 개방할 수 있겠는데?’

10만 마력 포인트.

5등급 몬스터가 가진 가치였다.

* * *

모래시계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인류는 몬스터와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해 파악하는 게 중요했고, 당연히 몬스터에 대한 연구는 모든 국가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몬스터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7등급 이상 되는 몬스터를 현실에서 연구하는 건 제약이 많았다.

다른 것보다 연구재료를 구하는 게 힘들었다. 7등급 몬스터를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 모래시계문의 모래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건,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5등급 몬스터 정도 되면 모래시계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게 정답이지, 5등급 몬스터가 문을 뚫고 나오도록 모래시계문을 방치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랬다간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다.

그런 만큼 5등급 몬스터의 사체를 구하면, 정말 사골을 우려낸다는 각오로 연구를 해야 한다. 허투루, 그냥 아니면 말고…… 그런 식으로 연구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해체 방법부터가 고민의 시작점이다. 해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정말 큰일이니까.

그리고 이번 멜트 드래곤 연구는 장애물이 하나 더 있었다. 멜트 드래곤의 소유권을 여러 집단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집단이 연구원들을 파견했다.

경쟁 세력의 연구원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문제가 없을 수가 없고, 그 문제는 해체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부터 터졌다.

“일단 드릴로 몸을 뚫어서…….”

“그러다가 멜트 드래곤의 비늘이 전부 깨져버리면 어떻게 할 겁니까? 불로 녹입시다.”

“불로 녹이다니, 안에 있는 부속물이 전부 익어 버리면 그때 가서 그쪽이 책임질 수 있소?”

“그럼 염산 같은 걸 이용해서…….”

“그러나 변색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겁니까?”

멜트 드래곤의 특성도 문제를 키우는 계기가 됐다.

대개 비늘을 가진 몬스터는 제아무리 비늘이 단단해도 갑옷처럼 이음새 부분이 존재했고, 그 이음새 부분을 기점으로 차근차근 해체를 하고는 했다. 그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멜트 드래곤의 몸에는 그런 이음새가 없었다. 검은 막으로 온몸을 코팅한 것처럼 이음새가 어디에도 없었고, 일반적인 해체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물론 방법이야 많았다.

지금 연구원들이 주장하는 방법들은 전부 유효한 방법이다. 드릴로 뚫거나, 고열로 녹이거나, 염산 따위로 녹이거나…… 쉽진 않겠지만, 못할 건 없다. 7등급 몬스터라면 그냥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연구 대상은 5등급 몬스터이며, 구하기 힘든 드래곤 타입의 몬스터다. 해체 과정에서 연구 자료에 상정 범위 밖의 손상이 생긴다면, 그 방법을 제시한 쪽이 독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여기 모인 연구원들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모였다. 상대방의 틈이 보이면 가차 없이 물어뜯을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비단 연구만을 구실로 삼아 상대를 물어뜯는 것도 아니었다.

“권 박사,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안 하는데 의견이 정말 없는 겁니까? 의견이 없는데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연구 외적으로도 틈이 보이면 물어뜯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실 분위기는 거의 프로레슬링 분위기였다.

물어뜯기 좋은 타깃이 나온 것이다.

“그보다 권 박사가 데리고 온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권재용 박사가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을 조수랍시고 데리고 왔다. 그것도 유적 연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내를. 연구원들의 눈에 이강우는 갈비처럼 보였을 것이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정말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갈비.

대충 상황을 파악한 이강우는 드디어 자신을 향해 승냥이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전생에 큰 죄를 지었네. 내가 잘못했네. 내 전생이 아주 큰 잘못을 했어.’

솔직히 지금 이강우도 권재용 박사에게 묻고 싶었다.

이미 이런 전문가들이 모인 곳에서 대체 자신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실제로 이 회의 주제를 알고, 회의에 참석하기 직전까지 이강우는 권재용 박사에게 연거푸 말했다. 제가 정말 여기에 참석해도 됩니까? 자격이 됩니까?

그런 이강우의 말에 권재용 박사는 본인 생각만 조리 있게 말하면 된다고 했다.

‘조리 있게 말하기는 개뿔, 난 이 사람들 대화도 간신히 조금만 알아듣는다고!’

심지어 여기 모인 이들 전부가 영어로 대화를 한다. 이강우는 그런 그들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보시오.”

이젠 더 이상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강우의 표정이 굳었고, 이강우가 권재용 박사를 바라봤다. 권재용 박사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어떻게 해야 멜트 드래곤을 문제없이, 최소한의 손상으로 조사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이강우는 마음속 눈을 질끈 감았다.

이쯤 되면 뭐든 뱉어야 한다. 어차피 이강우가 무슨 말을 뱉든 그게 실제로 써 먹힐 일은 없다. 그냥 대충 생각나는 말을 뱉고 비웃음만 넉넉히 사면된다.

이강우가 권재용 박사를 향해 말했다.

“보통 경우라면, 그냥 드릴로 뚫고 들어가겠습니다만…….”

드릴이란 말에 콧방귀가 터졌다.

“……원형 보존이 가장 중요하다면 입을 통해서 내부에서 작업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입도 안 열립니까?”

그러나 이강우의 말이 끝났을 때 한국어를 이해하는 두 명의 연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권재용 박사가 옅게 웃으며, 통역사가 되어 이강우의 말을 통역해줬다.

그러자 주변의 표정이 전부 달라졌다.

“그, 그러면 되겠군.”

“입안으로…… 그래, 그러면 문제없지. 멜트 드래곤 입 크기라면 사람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으니…….”

아무래도 이강우가 눈 질끈 감고 친 공이 홈런이 된 모양이다.

* * *

이강우가 그냥 자포자기 심정으로 낸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굳이 어렵게 비늘을 뚫을 생각하지 말고, 입을 통해 내부에서부터 조사를 하자고 합의가 됐다. 보름 동안 연구원들을 괴롭혔던 논쟁에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됐다.

“입을 벌린 후에 안으로 소형 로봇을 집어넣으면 되겠군.”

“위장부터 확인합시다.”

“위장보다는 역시 드래곤 하트를 파악해야지. 식도를 우선적으로 조사합시다.”

“그러지 말고 일단 장기부터 전부를 꺼냅시다. 일단 장기부터 꺼내서 잘게 나눈 후에 각국 연구소로 보내면 연구가 더 빨리 진행될 거 아니오?”

“아니, 지금 간신히 구한, 그것도 거의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잡은 멜트 드래곤의 장기를 난도질하겠다는 말이오? 미쳤소?”

“그러면 그쪽은 멜트 드래곤 장기를 포르말린에 넣어서 박물관에 전시라도 할 생각이오?”

“다들 지금 마나스톤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는데, 마나스톤부터 채취하는 게 우선 아니오?”

이강우는 다시금 소란스러워진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세계 3대 길드를 대표하는 고급인력은 싸울 때 이렇게 싸우는군. 아주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됐어.’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논쟁은 반나절 동안 진행된 후에야 간신히 합의를 이뤘다.

합의가 났을 때 이강우는 거의 탈진한 상황이었다.

‘배고파 뒤지겠네.’

공항에 도착한 이후 제대로 뭔가를 먹지 않았다. 거의 온종일 밥을 먹지 못한 격이다. 그런 와중에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소란 속에 반나절 동안 있었으니…… 육체와 정신, 둘 모두가 이미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졌다.

권재용 박사는 그런 이강우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지. 배고플 텐데.”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이강우가 식당으로 향하는 권재용 박사의 발걸음을 잽싸게 뒤쫓았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그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보다 멜트 드래곤 시체가 정말 깨끗하던데, 대체 어떻게 해야지 저런 식으로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멜트 드래곤을 안락사라도 시킨 겁니까?”

“보기 힘든 놈이 운 좋게 모래시계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당연히 최대한 온전하게 잡도록 계획을 세웠지. 저놈을 잡으려고 7서클 마법사 한 명에 6서클 마법사 세 명, 5서클 마법사 일곱 명이 투입됐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전력이다.

“대단한 전력이네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겁니까? 그 정도 마법사들이 모여서 마법을 쓰면 시체조차 남지 않을 텐데요?”

5등급 몬스터는 무시무시한 존재지만, 그런 5등급 몬스터가 가소롭게 느껴질 정도의 전력.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을 썼으면 멜트 드래곤은 시체조차 남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이강우가 본 멜트 드래곤은 정말 깨끗했다. 이강우가 본 몬스터 시체 중에 그것보다 깨끗한 놈은 본 적이 없을 정도.

“탈진이네.”

“예?”

“놈을 일정 지역에 가둔 후에 말려 죽였지. 그게 아니면 솔직히 놈을 잡기 위해 9일이나 쓸 필요는 없잖은가? 놈을 그냥 잡아 죽이는 거라면, 7서클 마법사 한 명만 나서도 충분할 텐데.”

그 말에 이강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5등급 몬스터를 탈진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5년 전만 하더라도 5등급 몬스터 하나 등장하면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는데…….’

마법사들의 수준이, 인류의 수준이 놀라울 만큼 성장했다는 증거. 이강우는 작금의 시대가 새삼스러웠다.

“정말 힘들게 잡았군요.”

“힘들게 잡은 탓에 저렇게 소모적인 논쟁만 하게 되는 거지. 사실 연구라는 게 시도의 반복이고, 실패의 연속 아닌가? 그런데 구한 놈이 워낙 귀한 놈이라…… 시도는 제한되고, 실패는 허락되지 않지. 더군다나 저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야 하지. 그러니 거듭 의심을 하는 거네. 상대방의 의견은 물론 자신의 의견조차도. 막말로 자신의 의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는데, 조금 전 논쟁에서는 반박이 나오면 일단 물러서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그 인간들이 죄다 영어로 대화해서 솔직히 그런 거 모릅니다…… 라는 말을 이강우는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지. 안정적이고, 방어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일단 뭐든 생각나는 걸 내뱉을 수 있는 사람.”

“헛소리가 필요한 겁니까?”

“헛소리라니…… 자네는 내가 인정하는 천재일세.”

천재?

그 말에 이강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살아생전 여러 소리를 들었지만, 천재라는 소리는 부모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강우의 표정을 본 권재용 박사가 옅게 웃었다.

“천재와 범재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재능이겠죠.”

이강우는 곧장 대답했다. 고민할 수준의 질문도 아니었다. 백이면 백, 모두 이강우랑 똑같은 대답을 할 테니까.

“재능의 차이 그리고 감의 차이지.”

권재용 박사는 그런 이강우의 대답에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했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발견은 재능보다는 감으로 찾는 경우가 더 많았지. 아무리 땅을 파는 재주가 좋아도 파면 물이 나올 곳을 파야지, 맨땅을 파면 소용이 없으니까.”

“그렇죠.”

“자네에게는 그런 감이 있어. 여기쯤을 파면 물이 나올 것 같은데, 해서 하면 정말 물이 나오는 감.”

“제가요?”

“자네는 몬스터를 보면, 처음 보는 놈이라도 대충 견적이 나오지 않나? 도축할 때도 그렇고.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막연한 감이지만, 감을 따르면 의외로 결과가 좋지.”

그 말에 이강우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개중에서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불꽃꼬리를 먹었을 때였다. 그때를 생각하니, 권재용 박사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때 행동은 절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최고였다.

“감이 아니라 운 아닙니까?”

“운이 반복되면 감이네. 그리고 자네는 지금 운이 따르고 있는 상황이고.”

운이라는 말에 이강우는 몇 달 전 들뜬 마음으로 구매한 로또 복권을 떠올렸다.

‘운이 좋긴 개뿔. 본전도 못 찾았는데.’

당연히 꽝이었다. 5등조차 당첨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강우는 지금 억지로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끌려왔다.

운이 따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이강우의 표정을 읽은 권재용 박사가 말을 이어갔다.

“최근 유적 사냥에서 기생망고거북을 사냥했지?”

“잘 아시네요.”

“기생망고거북은 지금 존재하는 7등급 몬스터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넘치는 놈이네. 놈은 유적 사냥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놈이니까. 덕분에 금방 소식이 오더군. 이우희가 기생망고를 가지고 직접 연구소를 찾아왔지. 어쨌거나 기생망고거북은 굉장한 희귀종이라서, 운이 없으면 만날 수 없는 놈이네. 장담하는데 놈을 봤으니 로또를 한 장 사보게.”

이강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로또는 둘째 치고 솔직히 권재용 박사의 그 말이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기생망고거북은 까다로운 놈이었다. 솔직히 안중현 파티가 아니었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다섯 개의 파티가 전멸했다. 그런 놈을 만나는 게 운이 좋다?

‘연구원이니까…… 연구원이니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지.’

유적 사냥꾼들처럼 직접 유적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니라, 이미 죽거나 제압된 몬스터를 제멋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룰 수 있는 연구원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원들에게 몬스터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가소로운 존재다.

어쨌거나 대화가 그 무렵에 도달하니, 이강우는 권재용 박사의 심중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이 인간, 내가 필요해서 부른 게 아니라 나랑 거래를 하려고 날 불렀군.’

사업을 하려다가 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무작정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하라! 이강우가 비싼 돈을 내고 배운 진리다.

“그렇기에 자네에게 투자를 하고 싶네.”

기어코 권재용 박사가 의중을 드러냈다.

“투자 말입니까?”

“자네는 내가 봤을 때 재능도 있고, 운도 있고, 감도 있네. 내 기준에서는 천재지. 동시에 자네의 가치를 아무도 모르는 상황. 저평가된 가치주라는 의미일세.”

저평가.

이강우의 마음에 썩 드는 단어는 아니었다.

“저평가라는 건 저렴하게 절 써먹고 싶으시다는 건데…….”

“사실 내가 돈이 없거든. 예전이라면 연구지원금을 삥땅이라도 쳐서 돈을 마련하겠는데, 요즘은 워낙 감사가 심해서…… 자네 몸값이 올라간 다음에는 자네를 써먹을 수가 없네. 사실 연구원 월급도 박봉이야.”

그 말에 이강우가 옅게 웃었다.

“돈이 전부는 아닌 법이지요.”

안중현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소리다.

“그렇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정보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정보만큼은 많네. 스택 레코드는 물론, 그 외에도…… 이래저래 인맥을 통해 모은 정보가 상당하지.”

정보!

그 말에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에서 정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말을 안중현이 들었다면 앞서서 표현한 것처럼 코웃음을 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이강우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쳤을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정보가 있나?”

여기서 이강우는 한번 찔러봤다.

“몬스터 도축이 이제 제 업인지라 잡은 몬스터가 먹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 그걸 좀 알고 싶군요. 복어인 줄 모르고 냉큼 먹었다가 탈 나서 죽긴 좀 그렇잖습니까? 여차하면 요리법 같은 것도 있으면 더 좋고.”

말 그대로 그냥 찔러본 거다.

솔직히 이강우는 권재용 박사가 어떤 종류의 정보를 쥐고 있는지 모른다. 특정 정보를 지목해서 요구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찔러보면 어떻게든 반응이 나올 터.

그런데 권재용 박사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기예르모 레시피 같은 걸 원하는 모양이군. 역시 자네는 운이 좋아. 내게 기예르모 레시피가 있을 때 이런 제안을 하다니.”

* * *

괴식가 기예르모.

6서클의 마법사인 그는 기존의 유적 사냥 시스템을 부정하던 별종이었다.

남들이 총꾼을 비롯해서 파티를 구성해 유적 사냥을 할 때 그는 언제나 혼자서 모래시계문을 넘어갔다.

일반 파티가 최대한 많은 보급품을 챙기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때 그는 반대로 그 어떤 보급품도 가지지 않은 채 유적 사냥을 했다.

당연히 식량조차 없는 그는 유적 너머에서 자급자족을 했고, 그 과정을 전부 일기로 썼다.

그런 그의 일기 내용은 대부분 그날 먹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어떤 몬스터를 잡았는데, 첫날은 구워 먹고, 둘째 날은 삶아 먹고, 셋째 날은 날로 먹고, 넷째 날에는 배탈이 나서 풀을 뜯어 먹고, 다섯째 날에는 배탈이 심해져서 아무것도 못 먹고…… 때문에 그가 쓴 일기는 일기가 아닌 기예르모 레시피란 명칭이 붙었다.

보통 마법사가 그런 걸 썼으면 그냥 나사 빠진 미친놈의 정신 나간 짓 정도로 치부됐겠지만, 기예르모는 6서클 마법사였다. 그가 먹은 것들 중에는 심지어 5등급 몬스터도 있었다. 차후 기예르모 레시피의 중요성을 알게 된 길드 및 국가들은 기예르모 레시피를 구하고자 했지만, 그는 모든 거래를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열여섯 소녀의 일기도 아니고, 나이 서른이 넘은 아저씨가 쓴 일기를 읽고 싶다고?”

그는 자신의 일기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고, 결정적으로 기예르모는 자신이 쓴 일기 중 몇 개를 분실했다. 정확히는 도둑맞았다. 도둑맞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일기를 자기 집 금고에 보관했는데, 도둑 입장에서는 못 가져갈 물건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가져가 달라고 애원하는 거랑 마찬가지 아닌가?

총 3권의 일기를 도둑맞았고, 그 일기를 복사한 사본이 세상에 풀렸다.

그렇다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내용이 퍼지는 일은 없었다. 일기를 도둑맞은 기예르모가 그 일기 내용을 퍼뜨리는 놈은 유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일 거라고 엄포를 놓은 탓이었다. 6서클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자기 손에 들어온 정보를 만인에게 공개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지금 내 수중에 기예르모 레시피 1권과 3권이 있지.”

그런 기예르모 레시피 사본 중 일부를 권재용 박사가 가지고 있었다. 연구목적으로, 아는 이에게 잠시 빌린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순간 이강우는 몸이 달아올랐다.

‘보고 싶다.’

6서클의 괴식가가 쓴 일기. 분명 이강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물론 정보의 방대함에 있어서는 스택 레코드보다 작을 것이다. 하지만 이강우는 스택 레코드 정보를 이미 손에 넣었다. 안중현과 거래를 했으니, 이제 스택 레코드에 저장된 7등급 이하 유적 관련 정보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이강우는 심중을 드러냈다.

“그거 볼 수 있습니까?”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걸 본다는 게 나중에 괴식가의 귀에 들어가면 인생이 고달파질 텐데? 기예르모 레시피의 또 다른 별명이 데스노트라네. 실제로 죽은 이도 있고.”

보면 죽는다?

섬뜩한 경고다. 물론 이런 의문도 들었다.

‘보면 죽는다고? 그럼 데스노트가 아니라 링의 사다코 아닌가?’

정말 머릿속을 스쳐 갈 뿐인 짧은 의문이었고, 고민 역시 짧았다.

하지만 이강우는 짧게 고민했다.

“보고 입 꽉 다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기예르모란 인간이 있는지도 몰랐던 이강우다.

그렇다는 건 그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마법사란 의미.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얼굴 한번 못 볼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두려워해서 이번 기회를 놓치는 건 아쉬웠다.

무엇보다 이강우가 괜히 술에 취해서 떠벌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일 아닌가?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이건 잡아야 해.’

그리고 권재용 박사가 그렇게 칭찬한 이강우의 감이 이 거래를 꼭 성사시키라고 말하고 있었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쓰여 있네.”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에게 엄청나게 큰 장벽이 등장했다. 이강우의 감이 재차 말했다. 그건 좀 그렇지 않나……?

“……번역본은 없습니까?”

스페인어라니? 이강우가 아는 스페인 관련 용어라고는 카시야스, 데 헤아, 피케, 라모스 같은 게 전부다. 스페인어 인사말이 뭔지도 모른다.

“번역본을 만든 인간은 얄짤 없이 기예르모의 표적이 될 텐데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그래도 필요하다면 보여줄 수는 있네. 하지만 번역기를 쓰더라도, 글씨가 개발새발이어서 스페인어 기본은 공부해야 할 걸세. 문자를 알아야 번역기에 타자를 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필요하다면 보여주지. 그게 자네가 원하는 조건이라면. 나로서는 어차피 빌린 물건으로 퉁치면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저한테 그런 거 보여주시면 나중에 기예르모한테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이미 볼만큼 봤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리고 그런 게 무서웠으면 빌리지도 않았겠지.”

이강우는 짧은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스페인어 한번 공부해보죠.”

그렇게 이강우와 권재용 박사가 거래를 했다.

* * *

“……역시 공부는 내 인생에 안 맞아.”

이강우는 앞으로 권재용 박사의 정보원이 되어주는 조건으로 기예르모 레시피 1권과 3권의 사본을 받았고, 받자마자 이강우는 기예르모 레시피 번역을 위해 스페인어 기초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기초공부를 하면서 이강우가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입학 무렵부터 공부를 포기하고 다른 살길을 찾은 자신의 기특함이 전부였다.

번역 시도는 대실패였다.

‘미치겠네.’

사실 스페인어 공부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이강우가 원어민 수준의 스페인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역기를 쓰기 위해 필요한 기초 수준만 습득하면 충분한 상황이었다.

이강우가 권재용 박사에게 번역을 부탁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권재용 박사는 절대 공짜로 번역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지 않을 텐데, 충분히 자신이 공부 좀 하고, 노력을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처리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스페인어가 아니었다.

“이 인간은 글자가 왜 이래?”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괴식가 기예르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악필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

좀 과장하면, 번지점프대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메모지에 펜으로 글자를 써도 기예르모가 쓴 글자보다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심지어 기예르모는 펜으로만 글을 쓰지도 않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몬스터의 피 같은 거로 급하게 일기를 쓴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번역이 아니라 암호 해독 수준이다. 스페인어 기초공부 좀 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두 번째 문제는 분량이었다.

‘진짜 많이도 썼네.’

말이 일기지, 기예르모 레시피는 분량이 엄청났다.

솔직히 이강우는 일기라는 설명에 50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노트를 떠올렸다. 그런데 기예르모 레시피는 1권 분량이 2백 페이지가 넘어갔다.

‘이게 무슨 일기야? 그냥 메모지.’

세 번째 문제는 일기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일기와 다르게 날짜 구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기예르모 레시피 대부분은 유적 내에서 작성됐다. 일일이 시계를 확인하면서 모래시계문 유적 밖의 날짜와 시간을 계산해서 쓰기보다는, 그냥 몇 장의 페이지에 유적 하나의 일을 전부 몰아서 썼을 것이다. 날짜를 일일이 챙길 정도로 기예르모는 깐깐한 성격 역시 아니었다.

또한 일기에는 일기 내용만 있는 게 아니라, 낙서도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 그림을 그린다거나, 이모티콘을 쓴다거나, 메모를 한다거나…… 심지어 그냥 의미 없이 휘갈긴 글도 있는데 이강우 입장에서는 그게 의미 없는 글인지, 아니면 너무 악필이라서 구분이 안 가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강우는 포기했다.

‘이걸 내 깜냥으로 번역하려면 한 권에 1년은 걸릴 거야.’

일주일 정도 각 잡고, 스페인어 기초를 공부하고, 번역기를 돌리면 일기 2권 정도는 번역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강우는 결국 권재용 박사를 찾아갔다. 권재용 박사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번역비용은 빚으로 걸어두겠네.”

이강우는 왠지 자신이 미끼 상품에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권재용 박사는 딱 하루 만에 기예르모 레시피 1권과 3권의 번역본을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이강우, 본인은 1년을 붙잡고 있어도 못할 일을 하루아침에 하다니?

“번역이 그렇게 쉬운 겁니까?”

놀람 가득한 이강우의 질문에 권재용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예전에 읽어봤는데 번역할 필요도 없지. 읽었던 내용을 그냥 정리해서 쓰면 되니까. 더군다나 키보드로 쓰면 될 일인데, 하루나 걸린 게 이상한 거지.”

권재용 박사가 왜 박사인지, 이제 좀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내 뇌랑은 차원이 다른 뇌를 가지고 있네.’

어쨌거나 권재용 박사 덕분에 이강우는 기예르모 레시피를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이강우는 인생 처음으로 독서에 빠졌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다. 심지어 곧바로 세 번을 읽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책이란 눈을 나쁘게 해주는 수면 보조도구 정도로 치부했던 이강우는 온종일 기예르모 레시피만 반복해서 읽었다.

기예르모 레시피의 내용이 이강우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딱 내가 원하던 거다.’

일단 이강우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건 기예르모가 7등급 유적을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꽃을 하나 먹었던 내용이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튤립과 비슷한 모양의 꽃을 먹었다. 썩은 맛이다. 토할 것 같다. 그런데 먹고 나면 기분이 이상하다. 느낌이 예전에 제이드 플라워를 먹었을 때와 흡사하다. 빌어먹을 꽃. 썩은 꽃. 나중에 마이클에게 몰래 먹여야겠다.

‘이거 마령화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내용이지만, 이강우는 달랐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절묘하게 섞인 튤립과 비슷한 형태의 꽃. 이강우가 꽃등도마뱀의 등에서 발견한 1만 포인트짜리 꽃, 마나 서클 활성률마저 올려주는 신비의 꽃, 마령화가 분명했으니까. 이미 한 번 마령화의 쓴맛을 경험한 이강우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꽃이 더 있다고? 마령화랑 비슷한 꽃이?’

심지어 그는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꽃이, 제이드 플라워란 꽃이 있다고 했다.

‘제이드 플라워, 옥으로 된 꽃을 말하는 건가?’

이강우는 모르는 꽃이다.

사실 유적 사냥꾼들 중에서 몬스터에 대해선 알아도, 유적에서 자라나는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자 하면 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 머리라는 게 권재용 박사처럼 입력하면 자동으로 저장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몬스터 관련 정보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게 현실이다.

어쨌거나 이강우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설마 제이드 플라워란 것도 마령화처럼 마나 서클를 활성화해 주는 효과가 있는 건가?’

만약 제이드 플라워가 마령화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면?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기예르모도 어디까지나 느낌이 비슷하다고 했을 뿐이다. 그 느낌이란 건, 그냥 식감이나 맛이 비슷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이강우가 제이드 플라워처럼 생긴 것을 유적에서 보게 된다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분석을 해보려고, 하다못해 먹어 보겠지.

모르면 그냥 지나쳤을 보물을 얻을 수도 있는 계기가 생겼다.

또한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레시피란 이름이 붙은 것처럼, 유적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요리법도 기록되어 있었다.

개중에 이강우의 관심을 확 끈 건 칼꼬리전갈의 독에 대한 내용이었다.

-칼꼬리전갈의 독이 달짝지근한 향을 내는 게 먹고 싶어서 해독 마법을 써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꿀 같다. 간식으로 먹고 있다. 최고다. 나중에는 고기에 발라 먹어 볼 생각이다.

-칼꼬리전갈독을 고기에 발랐다. 고기가 솜사탕이 됐다. 맛있는데 내가 원하는 고기가 아니다. 그래서 도무지 먹을 수 없었던 돌돼지 고기에 칼꼬리전갈독을 발라봤다. 돌덩이 같던 돌돼지 안심이 씹기 좋은 고기가 됐다. 돌돼지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돌돼지 최고.

-보드카 나무를 잔뜩 마셨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래서 칼꼬리전갈독을 물에 타고, 목각귀신 숯가루를 넣어서 먹었다. 끝내준다.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숙취제를 발견했다. 나는 이제 부자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카 나무 한 그루를 더 먹어야겠다.

칼꼬리전갈.

이강우는 모르는 몬스터다. 그렇다는 건 7등급 이상의 몬스터라는 의미.

그런 칼꼬리전갈독은 기예르모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요리재료 중 하나였다. 식당에서 미원을 넣듯, 기예르모는 정말 다양한 요리에 칼꼬리전갈독을 썼고, 덕분에 칼꼬리전갈독을 이용한 요리법이 다수 적혀 있었다.

‘이런 걸 원했어.’

이게 이강우가 원했던 종류의 지식이었다.

이 밖에도 기예르모 레시피에는 네 개의 눈을 가진 7등급 몬스터, 사목웅(四目熊)의 웅담은 구워 먹으면 쓰지만, 얼려 먹으면 달콤하다는 정보, 온몸이 길쭉한 칼처럼 생긴 7등급 몬스터 칼뱀은 먹을 것 하나 없지만, 녀석의 눈알은 박하사탕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입 안을 상쾌하게 해주는 구취 제거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 여하튼 보는 입장에서는 효용성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내용이 잔뜩 있었다.

이강우가 연거푸 기예르모 레시피를 읽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강우는 기예르모 레시피를 읽으면서, 7등급 유적은 물론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6등급 유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세상이 이걸 탐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보물이다. 특히 포식자가 되어야 하는 이강우에게 기예르모 레시피는 최고의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냥 읽어봤자 언젠가는 분명 잊어버릴 거야. 적자. 내용을 정리해서, 필요한 것들만 뽑아서 언제든 볼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어야 해.’

온종일 기예르모 레시피를 읽은 이강우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기예르모 레시피를 제대로 분석하고자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소 공부하지 않던 놈들이 마음잡고 공부를 하려면 방해꾼이 등장하는 법.

“이강우, 네가 멜트 드래곤의 용옥 적출 적합자로 선출됐다.”

이강우, 드디어 그에게 일거리가 떨어졌다.

* * *

멜트 드래곤의 1차 조사가 끝났다.

이강우가 내놓은 방법대로 멜트 드래곤의 입을 통해 소형 로봇을 투입했고, 식도를 통해 멜트 드래곤의 장기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 조사 과정에서 용옥을 발견했다.

용옥(龍玉).

사실 그냥 마나스톤이다. 멜트 드래곤의 마나스톤은 위장에 있고, 멜트 드래곤의 등급이 5등급이니, 5등급 마나스톤이다.

하지만 일반 중형차는 그냥 중형차지만, 페라리는 페라리라고 불리는 것처럼, 5등급 몬스터쯤 되니까 그럴싸한 명칭이 붙은 것이다.

용옥을 발견하자 당연히 용옥을 채취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고, 일단 용옥을 채취하자고 합의를 했다.

문제는 용옥 채취를 기계로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또한 멜트 드래곤의 위장은 1평 남짓한 크기로 성인 남자 한 명 정도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즉, 누군가 혼자 들어가서 용옥을 채취해야 하는 상황.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권재용이 이강우를 추천했다. 반대의견이 없진 않았지만, 찬성 의견도 제법 있었다.

일단 반대쪽은 이강우의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했지만, 이강우가 명안을 내놓은 점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건 권재용 박사의 강력한 주장이었다. 그의 실력이 즈믄나래 최고라는 그의 강력한 주장에 이강우가 적합자로 선출됐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5등급 몬스터의 위장에 들어가는 경험을 이번이 아니면 언제 하겠어?’

이강우는 당연히 마다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기회가 온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5등급 몬스터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아예 속으로 들어가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아마 권재용 박사 역시 이강우가 그런 경험을 쌓아서 훗날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강력한 추천을 했을 것이다.

물론 용옥 채취 작업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일단 이강우는 완벽한 무장을 했다. 지독할 정도의 소독 과정을 거친 후에 전염병 환자를 상대하는 것처럼 방균복을 입었다. 여기에 산소 주입기도 달았는데, NASA에서 우주인이 우주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제품이라고 했다.

이번 일의 스케일이 새삼스러웠다. 준비할 게 너무 많으니, 오히려 없던 근심 걱정이 생길 지경.

하지만 이런 새삼스러움은 멜트 드래곤의 앞에, 입을 크게 벌린 멜트 드래곤의 앞에 섰을 때 눈 녹듯 사라졌다.

종유석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멜트 드래곤의 섬뜩한 이빨, 그 너머로 보이는 시커먼 어둠을 바라보던 이강우는 이를 꽉 물었다.

유리창을 너머로 봤을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의 존재감이 이강우의 다리를 꽁꽁 얼게 만들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건 시체다. 갑자기 멜트 드래곤이 살아나서 넝쿨째 굴러온 이강우를 감사히 먹을 일은 없다. 그 외에 숨이 막혀 죽거나,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이강우는 쉽사리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움직여라.’

공포다.

이강우는 이제까지 몬스터와 싸워 왔다. 몬스터는 그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 몬스터의 입안으로 들어간다? 몬스터와 싸우면서 쌓아온 본능이 그 사실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

하물며 눈앞의 괴물은 5등급 몬스터다. 이강우는 5등급 몬스터에 대해 안 좋은 경험이 다수 있다. 그가 현역군인일 당시, 그는 5등급 몬스터가 등장한 전쟁터에 몇 번 참가했고 그곳에서 정말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벌레처럼 죽는 광경을 여과 없이 봤다. 다른 건 몰라도 5등급 몬스터의 존재는 이강우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그 공포감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다. 그랬으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도 없었을 터.

‘움직여.’

이 순간 이강우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강우, 넌 이제 총꾼이 아니잖아? 겁먹을 것 없어. 그때랑 지금의 너는 달라.’

겁에 질린 스스로에게 재차 말했다. 여기서 겁에 질려 걸음을 멈춘다면, 간신히 얻은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움직여야 한다.

‘이강우, 넌 불사황제 야크센이 선택한 자다. 그의 힘을 오롯하게 이어받을 자야!’

그 순간 이강우의 발이 움직였다.

‘그래, 이강우. 이제 넌 눈앞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조차 먹어 치울 포식자다.’

멜트 드래곤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이강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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