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정글
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문틀, 그 문틀 안을 채운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문짝.
열다섯 명의 유적 사냥꾼이 마주 보고 있는 모래시계문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예술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래시계문의 문틀 위에 달린 모래시계가 드드드, 내뱉는 모래 떨어지는 소리는 퍽 으스스했고, 그 문을 바라보는 유적 사냥꾼들의 눈빛은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들어간다.”
이윽고 대장의 명령과 함께, 유적 사냥꾼들이 움직였다.
준비된 4대의 외골격 로봇 슈트를 입은 총꾼들이 특수하게 제작된 보급품 상자를 짊어졌고, 그 뒤로 언제라도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만전 태세를 갖춘 총꾼들이 묵직한 가방을 짊어진 채 대기 중이었다.
마법사들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안중현도, 이우희도 최대한 짊어질 수 있는 짐을 짊어졌다.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았던 채유리는 그 누구보다 부피가 큰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강우가 가져온,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초콜릿 관련 제품들, 그녀는 그 달콤한 것들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본인이 전부 짊어졌다.
그렇게 모두가 준비를 마친 채 모래시계문을 바라봤고, 가장 선두에 섰던 총꾼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을 바라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이강우는 이를 꽉 물었다.
‘다섯 파티나 먹어 치운 괴물이 입을 벌리는군.’
이강우, 그의 눈에 비친 모래시계문은 언제든 사람을 먹어 치우는 괴물의 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 *
모래시계문 너머로 출렁거리는 어둠, 그 어둠 안으로 한 명씩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강우의 차례는 다섯 번째였다. 이강우는 어둠으로 발을 내디뎠고, 어둠이 자신을 덮치듯, 어둠으로 세상이 가득 찼다. 이강우는 그 어둠 속을 묵묵히 걸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빛이 한 번 폭발했고, 세상이 어느 정도 밝게 빛났다. 어둠이 사라졌다.
‘여긴…….’
그 어둠 대신에 모습을 드러낸 건 녹음이 듬뿍 섞인 시야.
이강우가 고개를 들자, 울창한 수풀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빛이 보였다. 나무 그리고 흙, 빛을 비롯해 목젖을 감추려는 듯 지퍼를 바짝 올린 게 답답해질 만한 열기까지.
“정글이군.”
가장 마지막, 열다섯 번째 입장객이었던 안중현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중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비단 안중현만이 아니었다.
‘정글이라…….’
‘쉽지 않겠군. 예상은 했지만.’
이번 파티의 구성원들은 전부 베테랑들이다. 총꾼들도 안중현이 나름 심사숙고해서, 즈믄나래 소속 총꾼들 중에서도 안중현도 인정할 만한 베테랑 위주로 섭외했다. 그런 그들이 정글 타입 유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걸 모를 리 만무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다섯 파티나 먹어 치운 유적인데, 여기에 정글 타입. 조합상으로는 최악이군.’
이곳 유적은 이미 다섯 파티를 먹어 치웠다. 그것도 크루에 속한 어중이떠중이 파티가 아니라, 삼류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드가 주도한 유적 사냥이 실패했다. 삼류 길드 세 곳을 거치고, 이류 길드 두 곳마저 실패하면서 즈믄나래 몫으로 떨어진 유적이다. 즈믄나래 정도 되는 길드가 아니면 처치 곤란한 곳, 단순한 7등급 유적이 아니라 위험도가 굉장히 높은 7등급 유적이 된 것이다.
정글 그리고 변수와 위험도.
썩 좋은 조합은 아니다.
“베이스캠프부터 확보해야겠군.”
어쨌거나 당장 해야 하는 건 베이스캠프 확보였다. 저번에 불꽃꼬리를 잡기 위해 입장했던 개미굴 타입의 유적은 단순한 활동에는 제약이 많고, 몬스터와 전투에 돌입하면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지만,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게 매우 쉬웠다. 그냥 방 하나를 잡으면 그게 곧 베이스캠프였으니까.
그러나 정글 타입은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또한 베이스캠프를 마련한다고 해도 항시 병력을 상주시켜야 한다. 몬스터 잡으러 떠났다가 베이스캠프가 습격당해 보급품을 잃으면 그보다 난감한 일은 없을 테니까.
물론 베이스캠프를 찾는답시고 이대로 움직이는 건 바보짓이다.
“일단 보급품을 땅에 묻는다.”
일단 땅에 보급품을 묻은 후에 주변 탐색을 마치고 베이스캠프가 확보되면 그때 보급품을 운반하는 것.
애초에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제대로 된 유적 사냥 파티는 모든 보급품을 평범한 상자에 집어넣지 않는다. 일부는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배낭에 넣지만, 주요 보급품은 특수하게 제작된 상자에 넣는다. 땅을 파거나 물속에 넣어도 나름 장시간 버텨줄 수 있는 상자.
안중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꾼들이 움직였다. 외골격 로봇에 굴삭 장비를 장착했다. 또한 직접 삽을 드는 총꾼도 있었다. 땅을 파는 작업은 정말 금방 이루어졌다. 총꾼들의 땅을 파는 솜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군대 행보관들조차 기겁할 수준이었다.
땅파기 능력은 총꾼의 주요 능력 중 하나다. 어느 유적이든 땅을 파게 되는 경우는 무조건 생기니까. 하다못해 유적 사냥이 끝난 후에 보급품을 매장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땅을 파야 한다.
그렇게 총꾼들이 잔뜩 가져온 보급품을 묻을 수 있을 만큼, 깊게 그리고 넓게 땅을 파냈을 때.
“아.”
작은 탄식과 함께.
“……보급품 발견했습니다.”
작업이 잠시 멈췄다.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 * *
이번 7등급 모래시계문은 한 번에 최대 열다섯 명이 입장 가능한 유적이었다. 그런 유적 사냥을 시도한 다섯 개의 파티가 전멸했다. 모든 파티가 열다섯 명이란 제한 숫자를 채우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최소 오십 명이 넘는 유적 사냥꾼들이 목숨을 잃은 유적이다.
무덤.
그것도 단순한 무덤이 아닌 공동묘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앞선 파티가 묻어놓은 보급품은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비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안중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을 던졌다.
‘이번 유적 사냥은 나의 과욕으로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이번 유적 사냥은 안중현이 즈믄나래로부터 허가받을 수 있는 유적 사냥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사냥이었다. 다섯 번의 실패, 그 실패 속에서 죽은 마법사 숫자만 열 명이 넘어간다.
즈믄나래 길드가 허락을 해줬다는 건, 달리 말하면 모래시계문 클로즈에 성공할 확률이 70퍼센트는 넘어간다는 의미이지만, 실패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적 사냥은 성공률이 99퍼센트가 되어도 안심할 수가 없다.
때문에 안중현은 다시 한번, 이미 여러 번 심사숙고했던 이번 유적 사냥을 다시 한번 심사숙고했다.
본인을 청문회에 올리고, 본인이 본인을 질책하듯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미 과욕은 부릴 만큼 부렸다. 더 이상의 과욕은 파멸이 되겠지.’
여기서 안중현은 답을 내렸다.
‘묻은 보급품을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는 건, 예상치 못한 변수로 파티가 전멸했다는 의미. 마법 아티팩트와 7등급 몬스터 사냥보다 출문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이번 유적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건 7등급 몬스터도, 마법 아티팩트도 아닌, 출문 찾기.
안중현의 머릿속에서 방향을 수정했다.
* * *
보급품을 묻은 유적 사냥 파티는 곧바로 베이스캠프를 찾기 위한 탐색을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 덕분에 시야는 좁았다. 또한 거미 로봇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 정답은 드론이다. 드론을 이용하면 금방 이 유적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드론을 섣불리 썼다가는 오히려 몬스터들을 자극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드론을 사용해도, 주변에서 위협이 오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탐색은 그것을 위한 탐색이었다.
세 명의 마법사가 세 개의 팀을 구성했다. 한 팀은 보급품을 지켰고, 나머지 두 팀은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이강우 그리고 총꾼 두 명과 채유리는 수색대가 되어 움직였다. 조용히, 천천히, 무리하지 않은 채, 정글의 나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나무 뒤로 몸을 감추면서.
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낌새도 죽인 채 정글 안에서 움직이는 건 어렵기보다는 짜증 나는 일이었다.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건 당연했다.
넷이 나무를 등진 채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짧게 숨을 돌렸고, 이강우는 수통의 물을 조금 머금었다. 수통에 물을 머금으면서 정글의 우거진 숲, 그 틈으로 보이는 빛을 바라봤다.
‘저것도 마법인데…….’
이곳에는 빛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빛을 유적에서 처음 접하는 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의문을 가진다.
이곳은 밀폐된 공간일 텐데, 저 빛의 정체는 뭘까?
그 의문에 대한 탐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이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1서클 라이트 마법이다. 마법으로 유적에 빛을 만든 것이다.
초창기 라이트 마법이 처음 등장했을 때,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집의 전등 대신 라이트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설치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라이트 마법은 전기보다 곱절이나 비싼 마력을 연로로 삼았을뿐더러, 빛의 밝기 조절이 불가능했다. 지금 이강우가 보는 빛만 하더라도 그 밝기가 어마어마하다. 저런 라이트 마법을 거실에 전등 대신 설치했다가는 눈이 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쉽고, 적은 마력에도 작동하는 이 라이트 마법을 무기화시키는 연구가 대세다. 이 빛을 한곳에 집중하거나 혹은 순간적으로 강한 빛을 내뿜게 만들어서 섬광탄 같은 용도로 쓰거나. 그 외에 이 빛을 에너지원으로 바꾸는 경우의 효율에 대한 연구까지…… 참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과연 유적 전체를 밝게 비춰주는 마법 아티팩트에 필요한 마력은 어디서 나올까? 하는 연구 주제가 현재 마법과 유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핫이슈다.
물론…….
‘저거 먹을 수 있나?’
이강우가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할 리 없다.
이강우는 그저 저것도 먹을 수 있을지, 먹을 수 있다면 과연 몇 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나도 미쳐 가는구나.’
어쨌거나 정상은 아니다.
그만큼 이강우는 조금 조급했다.
‘3서클 마법사가 되어야 해.’
지금 이강우는 이미 쓸모 있는 마법을 꽤 얻었다. 이제 더 이상 많은 마법을 얻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가진 것들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이강우는 어떻게든 마나 서클의 개수를 늘리고 싶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이용당하는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응?’
그 순간 이강우가 생각을 멈췄다. 숨도 멈췄다. 이강우가 손을 들어 주변에 신호를 줬다. 하지만 이강우가 신호를 주지 않아도, 다른 세 명 역시 낌새를 느낀 듯 숨을 죽였다. 바닥에 앉아 있던 그들이 자세를 좀 더 낮췄다. 그러면서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뛸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부스럭부스럭!
그 무렵 숨을 멈추자, 어렴풋이 들렸던 소리가 보다 선명하게 고막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몬스터.’
조심스럽게 낌새를 살피던 이강우가 슬쩍, 몬스터의 정체를 확인했다.
등장한 몬스터는 늑대였다. 몸집이 꽤 컸지만, 외형은 늑대와 비슷했다. 눈에 띄는 건 코에 달린 뿔이었다. 코뿔소를 떠올리게 만든 두꺼운 뿔. 여기에 네 개의 다리가 날렵한 늑대 다리가 아니라 코끼리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굵직하고 튼튼해 보였다.
‘코뿔늑대군.’
9등급 몬스터 코뿔늑대다.
두꺼운 다리 때문에 늑대처럼 날렵하기보다는 우직한 놈이지만 대신에 두꺼운 발에서 나오는 힘과 두껍고 단단한 뿔을 앞세운 몸통박치기는 언제나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반대로 가죽이 두껍지 않다. 총으로 잡을 수 있는 놈, 그래서 사냥 난이도가 높지 않다.
‘비싼 놈이 나왔군.’
더불어 코에 딸린 저 묵직한 뿔은 비싸다. 꽤 좋은 약재이며, 해독제다. 어지간한 독은 코뿔늑대의 코뿔을 갈아서 가루처럼 해서 먹는 것만으로도 해독 가능하다.
마나스톤보다 저 코에 달린 뿔이 더 비싼 놈. 그래서 총꾼들이 사랑하는 놈이다. 잡으면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가늠했다.
‘잡아, 말아?’
잡으려고 하면 못 잡을 건 없다. 더군다나 이곳은 정글이다. 사방에 무성한 나무들은 코뿔늑대가 활약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사냥꾼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문제는 교전에 따른 소란.
코뿔늑대를 잡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잡아야 한다. 총이 통한다고 해도, 녀석을 죽이려면 탄창 하나는 전부 비울 만큼, 방아쇠를 당겨야 할 것이다. 총성도 클 테고, 녀석의 비명도 쩌렁쩌렁 숲을 울릴 터.
이강우는 슬그머니 채유리를 바라봤다. 채유리는 이강우에게 입 모양으로 말해줬다.
‘잡아주지.’
잡아, 그것도 아니고 잡아주지.
이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채유리가 움직였다.
* * *
마법사에게 마나 서클이 많아진다는 건, 단순히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나 서클은 일종의 정수기 필터 같은 존재다.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여, 쓸 수 있게 정제를 한다. 마나 서클이 많으면 건 단 한 번에 정제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늘어나지만, 동시에 정수를 반복하며 마나 서클의 질과 농도를 응축할 수 있다.
5서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나 서클이란 이름을 가진 여과기 5개를 거친 마력이 필요하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다. 4서클 마법사도 5서클 마법을 쓸 수 있다. 단지 무리를 하고 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뿐.
하지만 5서클 마법사가 5서클 마법을 쓰려고 하면, 다른 걸 할 여유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선택지가 갈린다.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쓸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마법을 써서 다양성을 확보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강력한 마법 한 방보다는 복수의 마법을 쓰는 게 트렌드가 됐다.
전 세계에 열 명조차 안 되는 7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며, 세계 3대 길드 중 한 곳인 칠성문의 대마도사, 챠이 수가 그 트렌드를 만들었다. 중국 공영 방송 CCTV를 통해 그녀의 전투와 활약상이 방송된 것도 계기였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가 추구하는 방식이 저렴하고 효율적이라는 점이었다.
4서클 이상의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는 값도 값이지만 수량이 너무 적었다. 하물며 5서클 이상의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는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트렌드는 시간이 좀 더 흐르면서, 같은 속성의 다양한 마법이 아닌 다양한 속성을 가진 다양한 마법을 쓸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양한 속성 마법을 무리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사들에 대한 평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이유였다.
채유리, 그녀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우, 특혜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이유.
그녀는 모든 속성, 모든 종류의 마법을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대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여인이다.
* * *
채유리가 자신이 착용한 팔찌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3서클 마법 헤이스트가 그녀의 몸을 바람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짧게 호흡을 들이마신 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코뿔늑대를 향해 달려갔다.
3서클 헤이스트 마법에 걸린 그녀는 바람처럼 빨랐다. 마치 화살이 날아가듯, 코뿔늑대를 향해 단숨에 날아갔다. 코뿔늑대가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 모든 신경을 그 방향으로 집중시켰다. 눈을, 코를, 귀를 채유리를 향해 오롯하게 집중시켰다.
그때 채유리가 코뿔늑대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팟!
공기가 내뱉는 짧은 비명과 함께 코뿔늑대의 눈앞에서 사라진 채유리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코뿔늑대의 몸뚱이 위였다. 빠른 질주 그리고 도약, 화살처럼 날렵한 포물선을 그린 그녀가 단숨에 코뿔늑대의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30센티미터 남짓한 길이를 가진 날카로운 칼을 등에 꽂으면서.
푹!
칼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코뿔늑대의 가죽을 뚫고, 지방을 가르고, 근육을 자른 후에 장기마저 찔렀다.
2서클 마법, 마력검이 걸린 마법 아티팩트의 위력이었다.
칼이 꽂히는 순간 코뿔늑대의 눈동자에 피어오른 건 의구심이었다.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모양, 그 정도로 채유리의 공격은 갑작스러웠고,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칼이 꽂히는 순간, 채유리의 몸에서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3서클 마법 라이트닝 실드.
자신의 주변에 전력으로 만들어진 막을 만들어내는 방어마법이다. 채유리는 그 마법으로 만들어진 전력을 자신의 마력검을 통해 코뿔늑대의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전격…… 파직파직, 성난 연어처럼 미친 듯이 날뛰는 놈을 제 마음대로 다루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의 마력 그리고 사용하고자 하는 마법 컨트롤이 경지에 다다라야 가능한 일.
그렇게 코뿔늑대의 몸 안으로 들어간 전력은 코뿔늑대를 마비시키고, 녀석의 내장에 적당한 타격을 줬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코뿔늑대를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죽이기에 딱 알맞은 위력. 마치 요리사가 완벽한 스테이크를 굽기 위한 최적의 불 온도를 유지하는 것과 흡사했다.
그야말로 요리다. 채유리는 코뿔늑대를 요리했다.
꾸오오…….
이런 채유리의 솜씨 앞에서 코뿔늑대는 제대로 된 울음조차, 비명조차 내뱉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 두꺼운 다리로 지탱하던 몸뚱이가 가련하게 느껴질 지경.
반면 쓰러진 코뿔늑대의 몸뚱이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채유리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내뱉게 만들었다.
‘대단하군.’
이강우는 물론 다른 총꾼 두 명,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꿀꺽, 침을 삼켰다.
단순히 강한 게 아니다. 다양한 마법을 마구잡이로 쓴 것도 아니다. 넘치는 화력을 주체 못 해서 남발하는 과소비를 한 것도 아니다.
적재적소, 그 어느 때보다 은밀하고 고요한 사냥이 필요한 상황에서 채유리는 완벽한 사냥을 선보였다. 코뿔늑대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채유리는 그런 자신의 전투가 별거 아니라는 듯, 코뿔늑대의 등에 꽂힌 검을 뽑아내며 녀석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라이트닝 실드 마법을 쓰면서 생긴 정전기 때문에 쭈삣쭈삣, 고슴도치처럼 사납게 곤두선 자신의 탐스러운 금발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담담하며 말했다.
“이거 먹을 수 있어요?”
그녀에게 조금 전 전투는 전투조차 아닌 모양이다.
이강우는 그녀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공주님으로 모실만하군.’
왜 즈믄나래라는 일류 길드가 채유리라는 다루기 힘든 괴짜 여인 앞에서 자세를 낮추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 * *
“드론 움직입니다.”
30여 분에 걸친 주변 지역 탐색, 코뿔늑대 한 마리를 사냥하는 소소한 성과를 올린 탐색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드론 한 대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우웅, 우웅!
약간의 소음을 내며 우거진 나무를 뚫고 올라간 드론은 360도 카메라를 이용해 정글의 풍경을, 이곳 유적의 풍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 영상은 실시간으로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벽이었다. 정말 넓은 정글, 하지만 그 정글의 끝에는 분명한 벽이 있었다. 식물원 혹은 동물원처럼, 정해진 공간 안에 정글을 꾸며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광경을 볼 때면 마치 개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영상을 보던 안중현이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유적 사냥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유적은 그저 단순히 신비, 기적이란 짧은 단어로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거대한 세계, 가늠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면 신비나 기적이라는 느낌보다는 경외감만 가슴 속을 가득 채운다.
‘개미는 개미인데, 사육당하는 개미 꼴이지.’
특히 이강우는 더 심하다.
그는 이제까지 유적 사냥에 나선 무수히 많은 자들, 그들 중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기적을 경험하는 중이니까.
‘불사황제 야크센.’
안중현의 말이 이강우의 뇌리에 각인된 불사황제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불사황제가 누구인지, 유적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는 없다. 그래서 굳이 고민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게 행운 가득한 기적인지 아니면 절망 가득한 운명인지.
“일단 벽 근처로 이동하는 게 좋겠군.”
어쨌거나 이번 유적의 크기와 현재 파티가 있는 위치는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또한 주변에는 정글밖에 없다. 특별히 베이스캠프로 삼을 만한 지역이나, 엄폐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벽 쪽으로 이동하는 게 그나마 유리할 터. 벽 가까운 쪽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몬스터를 하나씩 처리하면서 출문을 찾아 나가면 된다.
그때.
“무언가 접근합니다.”
드론의 카메라가 움직이는 물체를 잡았다.
드론을 조종하던 총꾼이 카메라를 조작했다. 그리고 움직이는 물체를 확대했다.
카메라에 잡힌 물체의 정체는 몬스터, 박쥐와 비슷한 형태의 날개 네 장을 가진 뱀 두 마리였다.
여러모로 독특한 생김새였기에, 녀석의 정체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박쥐뱀이군.”
박쥐뱀.
박쥐의 날개에 뱀의 몸을 가진 몬스터로, 몸길이는 2미터에서 5미터 사이다.
특징은 암수가 함께 움직이며 사냥감을 사냥한다는 점과 암수가 서로 다른 종류의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독니로 독을 대상에 주입하는 건 물론 독을 물총처럼 발사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흠.”
준비 없이 상대하기에는 까다로운 놈이다. 날아다닐 수 있고, 날개가 아니더라도 땅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굉장히 날렵하고 빠르다. 하지만 준비만 확실하다면 잡기 어려운 놈이 아니다.
안중현의 고민이 시작됐다.
‘잡아야 하나?’
놈들은 드론을 발견하고 드론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드론을 띄우기 전에 주변을 탐색하고 정리했다.
오히려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갑자기 조우했을 경우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 박쥐뱀이 먼저 정체를 드러내고, 알아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 심지어 놈들은 드론을 노리고 있으니 적당한 장소로 유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잡으려면 지금이 분명 기회.
물론 베이스캠프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변수가 있는지 확실한 체크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박쥐뱀을 잡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리스크를 분명 감수해야 한다.
이미 앞서서 안중현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출문을 발견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자고.
‘1차 탐색 결과 채유리가 잡은 코뿔늑대를 제외하면 몬스터는 없었다. 이 주변에 위험 요소는 없다고 해도 될 터.’
안중현이 답을 내렸다.
“사냥을 시작한다. 박쥐뱀을 지상으로 유인해라.”
* * *
안중현이 박쥐뱀 사냥 명령을 내리는 순간, 곧바로 모든 이들이 사냥을 준비했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저 움직이면 될 뿐이다.
걱정하는 이들도 없었다. 박쥐뱀은 갑자기 조우할 경우 혹은 녀석을 따라 다니면서 잡아야 하는 경우 골치 아픈 놈이지만, 지금처럼 드론을 이용해 원하는 무대로 유인할 수 있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환수 타입이 아니다. 총이든, 수류탄이든, 폭약이든 뭐든 통한다.
독에 대한 대처도 충분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쓸 수 있도록 2서클 해독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준비해두었다. 너무 많은 독에 중독되고, 해독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이상 독살(毒殺)당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렇기에 전투를 준비하는 총꾼들은 위기감보다는 사명감을, 전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이강우는 조금 달랐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강우는 지금 전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꺼림칙함이 이강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물론 이강우도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박쥐뱀은 잡을 수 있을 때 잡는 게 낫다. 지금처럼 박쥐뱀이 알아서 함정으로 와주는 경우는 쉽게 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채유리의 전투를 보면서, 그녀가 가진 실력이면 6등급 몬스터도 문제없으리란 확신마저 강했다. 채유리는 이강우가 총꾼이 된 이후 유적에서 같이 사냥한 마법사들 중에 최고였다. 채유리에게 박쥐뱀 두 마리는 좋은 보양식 혹은 뱀가죽 지갑에 불과할 터.
그런데 가슴을 두드리는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이강우는 짧게 숨을 골랐다.
‘다섯 파티나 먹어 치운 유적이지.’
이 순간 이강우가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를,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유적은 이미 다섯 파티가 실패했다. 수십 명의 실력자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더군다나 묻은 보급품이 멀쩡하다는 건, 어쩌면 베이스캠프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이번 유적은 그저 강한 몬스터가 있어서 어려운 유적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속임수가, 변수가 존재하는 유적이다. 때문에 지금은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최대한 안전을 추구할 때다.
이강우가 안중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장님, 이번 전투 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 * *
비막(飛膜)이 달린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등장한 두 마리의 박쥐뱀이 수려한 궤적을 그리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땅 위에 올라선 녀석들은 곧바로 날개를 접었다. 마치 우산이 접히듯 큼지막했던 날개는 얄팍하게 변했고, 박쥐뱀은 영락없는 뱀의 모습을 갖췄다.
몸길이 4미터의 짙은 청록색 피부를 가진 뱀.
분명 큰 뱀이지만, 흉측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에 비하면 가소로운 외형이었다. 파충류 애호가라면 사랑스러움마저 느낄 정도. 날개를 접은 박쥐뱀 어디에서도 8등급 몬스터의 무시무시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겉모습만 보고 박쥐뱀을 얕본다면, 그 대가는 참혹할 것이다.
박쥐뱀은 굉장히 호전적인 놈이다. 특히 먹잇감 앞에서는 암수 구분도 무의미해진다. 언제나 암수가 같이 움직이지만, 먹을 것 앞에서는 서로를 향해 그 지독한 독액을 토해낼 정도로 섬뜩한 관계가 된다.
식성도 무시무시하다. 뭐든 먹는다. 제 몸보다 큰 것도 거침없이 먹는다. 박쥐뱀의 몸이 가진 신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고 싶다면, 박쥐뱀 앞에 코끼리를 데려다 놓으면 될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땅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을 가장 먼저 반긴 건 다름 아니라 핏기가 제대로 제거된 선홍빛 살코기였다.
사람의 눈에는 그냥 핏기 가신 고깃덩이. 그러나 몬스터 눈에는 절대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요깃거리다. 초콜릿 중독자 앞에 아몬드가 듬뿍 들어간 초콜릿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물며 이제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날아오면서 배가 출출해졌을 박쥐뱀이라면 당장에 꿀꺽, 삼키는 게 당연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츄우, 츄우!
그 선홍빛 고깃덩이를 앞에 두고도 두 마리의 박쥐뱀은 혓바닥을 날름거릴 뿐 식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식탐을 드러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녀석들이 날름거리는 혓바닥에서는 독과 침이 섞인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녀석들은 필시 허기를 느끼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참고 있는 것이다.
몬스터와 참을성.
하물며 호전적이고, 식성 좋기 그지없는 박쥐뱀과 먹을 것 앞에서의 참을성, 이 조합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조합이다.
그러다가 암놈이 슬그머니 고깃덩이 근처로 다가가고자 했다.
촤앗!
그 모습을 본 수놈이 암놈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입, 그 입 안으로 보이는 네 개의 독니에서 튀어나온 독액이 암놈의 몸 위에 떨어졌다.
독액에 맞은 암놈이 반격을 하듯, 본인도 크게 입을 벌렸다. 성인 한 명도 꿀꺽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입이었다.
그 둘은 보다 크게 입을 벌리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윽고 그 둘이 코앞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외면한 채 몸을 돌렸다. 녀석들의 몸에 달린 네 개의 날개, 이제까지 접혀있던 날개가 활짝 펴졌고, 펄럭펄럭! 박쥐뱀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모니터를 통해 박쥐뱀의 행동 양식을 숨죽인 채 실시간으로 감시하던 이들은 박쥐뱀이 도처에 깔린 코뿔늑대의 살코기를 외면한 채 날아가는 순간 죽이고 있던 숨통을 열었다. 곳곳에서 후우, 푸후 숨통 트이는 소리가 나왔다.
안중현은 증기기관처럼 숨을 내뱉는 무리들 속에서 이강우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이강우, 자네 말대로 정말 이상하군. 아주 이상해.”
안중현의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내가 틀렸으면 했는데…… 이럴 때는 꼭 백발백중이네. 그렇게 잘 맞으면 로또 번호를 맞추라고. 이런 걸 맞추지 말고…….’
그런 이강우의 쓴웃음을 바라보던 안중현은 이 순간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강우가 내게 브레이크를 걸어줬군.’
박쥐뱀을 잡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나서기 직전 이강우가 갑자기 안중현에게 말했다.
이번 사냥, 미심쩍은데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는 없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1분 1초가 중요한 상황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움직인다는 건, 박쥐뱀 사냥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그래야 하는 근거 역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다섯 파티가 전멸한 유적인데,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짧은 한마디가 이강우가 고민을 하자는 근거이자 이유였다.
보통 유적 사냥에서 총꾼이 리더인 마법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강우의 말을 듣는 순간, 안중현은 정말 한 번 더 생각해 봤다.
이강우가 그런 말을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번 유적 사냥 파티에 참가한 이들 중 누구든 그런 말을 했다면, 안중현은 그 말을 듣고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단지 이번 유적 사냥 파티에 참가한 이들 대부분이 안중현을 너무 잘 믿었다. 자신이 느끼는 불길함과 안중현의 판단,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고르는 자들. 이강우처럼 자신의 불길함을 고백하는 자들은 없었다.
어쨌거나 이강우 때문에 한번 제대로 노려 보면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박쥐뱀을 놓치게 됐다.
동시에 이강우 덕분에 이번 유적에 존재하는 변수를 알게 됐다.
“박쥐뱀이 탐스러운 고깃덩이를 눈앞에 두고 맛조차 보지 않은 채 몸을 돌린다…….”
박쥐뱀의 식탐과 호전성을 안중현이 모를 리 없다. 그 식탐과 호전성은 타고난 본능이다. 그런데 박쥐뱀은 그 본능을 억눌렀다. 자신의 본능을 외면하기까지 했다.
박쥐뱀이 굉장히 깨달음을 얻어서 인내가 경지에 다다른 걸까?
당연히 그런 건 아니다.
“기생, 매혹, 복종.”
이우희가 툭, 말을 던졌다.
그녀의 말에 안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 중 하나겠죠?”
박쥐뱀은 타의에 의해 본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유적에서 이런 경우는 크게 셋 중 하나다.
기생 몬스터에 당했을 경우, 특수한 페로몬이나 능력을 가진 몬스터에게 매혹당했을 경우,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능을 가진 몬스터에게 복종을 했을 경우.
“기생 타입은 아니겠지. 기생 몬스터들은 대개 숙주가 보다 많은 양분을 섭취하도록 강요하니까.”
일단 기생 몬스터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가장 낮다. 보통 기생 몬스터의 숙주가 된 몬스터는 본능을 억누르기보다는 제어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쥐뱀의 행동은 확실히 기생 몬스터에게 당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남은 건?
매혹과 복종.
둘 모두 껄끄럽다.
몬스터의 매혹 능력은 인간에게도 유효하다. 그런 몬스터와는 전투 자체가 쉽지 않다.
복종이면 더더욱 까다롭다. 어지간한 몬스터들이 알아서 부하를 자처할 만큼 정말 강력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 소식을 실전에서 매운맛을 보기 전에 파악한 건 희소식이다.
“대충 가늠은 되는군.”
더불어 이 두 가지 타입의 능력을, 특수 능력을 가진 몬스터는 전황(戰況) 자체를 바꾼다.
“몬스터를 미끼로 썼겠지.”
낚시를 떠올리면 된다.
물고기는 눈앞의 지렁이가 사냥감이라고 생각하고 쫓는데, 그게 미끼였을 때의 결과. 딱 그 꼴이다. 사냥에 집중할수록 낚이기도 쉽다.
여기에 하나 더.
“놈은 우리 존재를 파악했을 겁니다.”
“아마도 코뿔늑대를 잡는 순간, 녀석은 우리 존재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겠죠.”
그놈은 유적사냥꾼의 등장을 인지하고 있다.
코뿔늑대를 잡는 순간, 이미 새로운 유적 사냥꾼이 자신의 영역에 등장했다는 걸 알았을 터.
그래서 박쥐뱀을 보낸 거다. 대체 무엇이 코뿔늑대를 해치웠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몬스터를 부리는 재주에 영리한 머리까지…… 힘들겠군요.”
모래시계문을 넘기 전에 각오는 했지만, 그래도 보다 확실한 현실을 직시한 상황에서 마음이 편할 리 만무.
“힘들어도 해야지.”
하지만 피할 곳은 없다.
“죽기 싫으면.”
앓는 소리를 내뱉는다고 몬스터가 봐주는 일은 절대 없으니까.
* * *
적이 몬스터를 수족처럼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파악된 이상, 베이스캠프 확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언제 어느 순간 다수의 몬스터가 동시에 공격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상태로 전면전을 벌이는 건 상상만으로도 손해가 막심했다.
더 나아가 찬밥 더운밥을 깐깐하게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세운다.”
안중현은 적당한 장소를 고른 뒤 잽싸게 베이스캠프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실력 좋은 총꾼과 외골격 로봇의 도움으로 그럴싸한 목책을 두른 베이스캠프가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베이스캠프가 완성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소란이 일어났다.
땅에 묻어놓은 보급품을 베이스캠프로 옮기는 과정에서 갑자기 땅이 꺼진 것이다.
“빌어먹을 땅굴쥐새끼!”
“정글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새끼가 있었군.”
원흉은 다름 아니라 땅 아래 큼지막한 굴을 파낸 9등급 몬스터, 땅굴쥐였다.
1미터의 거대한 몸을 가진 땅굴쥐는 작심하면 하루에 1킬로미터가 넘는 땅굴도 팔 수 있을 정도로 땅굴을 파는 데에는 굉장한 능력을 가진 몬스터였다. 그런 녀석이 안중현 파티가 세운 베이스캠프 주변의 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애교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5미터 땅 아래에 무수히 많은 땅굴이 생긴다면? 땅이 갑자기 꺼지는 싱크홀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싱크홀은 지뢰나 다름없다. 그 지뢰에 당해서 발목만 삐끗해도 당분간 전투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 없다.
때문에 베테랑 총꾼들이나, 마법사들은 땅굴쥐 이야기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좋은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땅굴쥐의 등장으로 안중현 파티의 활동 범위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땅이 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늘을 나는 드론과 땅을 기어 다니는 거미 로봇으로 탐색할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가 있었다. 드론은 정글 위만 찍을 수 있었고, 거미 로봇은 정글에서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으니까.
탐색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작전 수행, 몬스터 사냥, 과감한 시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안중현은 물론 모두가 어렴풋하게 느꼈다.
‘생각보다 유적 사냥이 꼬인다.’
아직 사망자도 없고, 보급품도 넉넉하고, 유적에 입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작은 부분에서 조금씩 삐걱거리는 잡음이 끼기 시작했다는 걸.
그나마 이강우의 돌발행동을 안중현이 받아들이면서, 대략적인 상황이라도 파악해서 다행이다. 그마저도 못했다면, 그저 박쥐뱀을 잡았다는 사실에 기뻐만 했다면 사소한 잡음이 끼는 수준으로 일이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와중에 희소식 하나가 들렸다.
콰앙!
“어?”
“드디어 땅굴쥐, 그 새끼가 지뢰를 밟았나 보네?”
땅굴쥐, 놈을 잡는 데 성공했다.
* * *
마치 드릴을 연상시키는 괴상한 손을 가진 큼지막한 쥐의 몸뚱이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뢰가 터지면서 생긴 폭발력은 단순히 화상을 입히는 수준을 넘겨, 땅굴쥐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절단면은 칼로 깔끔하게 자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고, 흉측했다. 비위 약한 사람이라면 그냥 이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할 정도. 하물며 그 절단된 상처 부위에서 핏물이 나오고, 열에 그을리고, 절단된 장기와 뼈, 살점마저 본다면 비위 좋은 사람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다.
그런 끔찍한 시체를 자세히 해부해야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맛, 그 자체다.
이강우가 지금 죽을 맛을 보고 있었다.
‘젠장, 몬스터 도축에 요리에 이제는 해부까지. 나도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몬스터를 써는 게 이강우의 역할이긴 하다. 하지만 설마 조사를 위한 해부, 의학적 해부마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의학적 해부와 도축을 위한 해체는 다르다. 도축은 필요한 부위를 딱딱 잘라내는 거고, 해부는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뒤지는 거다.
물론 이강우는 공부를 했다. 8등급 이하 몬스터에 대한 지식 대부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개중에는 9등급 몬스터인 땅굴쥐의 해부도에 대한 것도 존재했다.
그 사실을 안중현도 알고 있었기에, 안중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강우에게 땅굴쥐 해부를 명령했다. 안중현, 그가 이강우를 한 달 넘게 즈믄나래 빌딩 지하 3층에 박아두고 공부만 시킨 게 빛을 보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해부를 통해, 몬스터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몬스터에 대한 단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위장에 이상한 게 있습니다.”
땅굴쥐의 위장을 해부한 결과, 그 안에는 씨앗 여러 개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장기, 그것도 먹을 것이 들어가는 위장에 뿌리를 내리는 씨앗? 씨앗이 아니라 그냥 기생충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이강우는 뿌리를 내린 씨앗을 잘라냈다. 씨앗은 엄지손톱 크기로 정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특이점은 다이아몬드 혹은 수정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씨앗이 아니라 보석이다.
그 특이함 덕분에 안중현은 그 씨앗의 정체를, 씨앗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기생망고거북…… 놈이 이곳 주인이었군.”
7등급 몬스터, 기생망고거북.
다섯 개의 유적 사냥 파티를 전멸로 몰아넣은 놈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