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위장&거래
이강우는 비위가 좋은 편이다. 어지간한 건 다 먹을 수 있었다. 군대 짬밥도 충분히 만족해서 먹었고, 유적 사냥을 하면서 군대 짬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도 먹어봤다. 심지어 예전에 아버지가 멋모르고 사 온 두리안을 가족 모두가 못 먹겠다고, 버리려고 했을 때, 비싼 과일이란 이유만으로 꾸역꾸역 처먹었다.
“으으…….”
그런 이강우도 고약한 맛을 가진 마령화 앞에서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강우가 안정을 되찾은 건 10여 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이강우는 부평초처럼 휘날리는 자신의 정신을 억지로 잡았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야. 정신 차려야지.’
손을 씻는다고 하고 무리에서 이탈했다. 10여 분 정도라면, 손을 씻기에는 과한 시간이었지만 산에 거름을 준다는 그럴싸한 구실은 먹힐 수준의 시간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이강우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이강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접이식 거울을 꺼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또렷하게 반짝이는 고리 하나의 존재를 확인했다.
‘1서클.’
1서클 마법사.
서클이 하나밖에 없지만, 마법사는 마법사다. 더불어 작금의 시대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가치는 대단하다. 이제부터 이강우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괜히 사업을 한답시고 무리하게 대출을 받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이강우는 이 사실에 마냥 기뻐하기보다는 의문을 품었다.
‘1만 2천 포인트…….’
이강우는 그동안 섭취한 포인트와 그 포인트에 따른 마나 서클의 활성화율을 계산했다. 더불어 마령화를 먹기 전까지 이강우의 마나 서클은 50퍼센트 정도가 개발된 상황이었다. 계산에 따르면 남은 50퍼센트를 채우기 위해서는 1만 2천 포인트가 아니라, 그 이상의 포인트가 필요했었다.
그렇다면?
‘마령화라고 했지?’
마령화.
이강우가 먹은 빌어먹을 맛을 가진 꽃, 그 꽃에는 마력만이 아니라, 마나 서클을 활성화해 주는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대목이다.
‘마나 서클을 활성화해 주는 아이템…… 소문은 있었지.’
마법사의 시대다. 또한 마법사들은 자신의 서클 개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나 서클 개수를 늘리는 건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것에 기대게 되고,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당연히 마법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적 안에서 그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유적에는 서클 개수를 늘려 주는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현상금도 걸려 있다. 마나 서클을 늘려 줄 수 있는 아이템을 사고 싶다는 이야기는 크루가 쓰는 온라인 거래 사이트에 자주 올라온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혹은 함정이지만, 그런 게 정말 있다면 억만금을 지불해서라도 사려는 사람은 넘쳐 난다.
그런데 만약 마령화가 정말로 서클 개수에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이라면?
‘내가 어마어마한 걸 먹은 건가?’
1만 2천이란 마력을 섭취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만약 정말로 마령화가 서클 개수에 영향을 주는 아이템이었다면, 그 가치는 마법 아티팩트 그 이상이다. 지금 이강우는 평생 번 돈보다 비싼 아이템을 처먹고 몸부림을 쳤을 수도 있다.
이강우의 얼굴이 굳었다.
근거 없는 생각, 망상일 뿐이지만 갑자기 배 속에 들어간 마령화가 매우 아깝게 느껴졌다.
‘……나도 미쳐 가는구나.’
이강우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 그대로다. 말도 안 되는 고민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물며 이강우가 해야 하는 고민은 이런 고민이 아니다.
‘하선우, 그 인간이군.’
하선우.
이제는 그에 대한 고민을 할 차례다.
* * *
이강우가 꽃등도마뱀의 도축을 마치는 순간, 마법청 직원이 마나스톤과 꽃등도마뱀의 등가죽을 가져갔다. 그 외 나머지 부산물들은 즈믄나래 소유가 됐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마법청 직원과 이우희가 나눴고, 그 무렵 하선우는 다른 이와 통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꽃등도마뱀은 굉장히 호전적인 놈입니다. 자기 주변에 방해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성질을 부리는 놈인데, 놈은 제 도발조차 무시한 채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무래도 북쪽 지역에 뭔가 있는 모양입니다.”
통화를 하는 하선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무렵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던 이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선우가 표정을 바꿨다.
“……예,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로 올리겠습니다.”
하선우가 급하게 통화를 정리했고, 곧장 미소를 지으며 이강우의 이름을 불렀다. 이강우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이강우는 물론 마법청 직원과 이야기를 하던 이우희도 반응했다.
세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마법사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이강우 씨, 당신에게는 마법사가 될 재능이 있습니다.”
하선우가 돌직구를 던졌다. 그냥 돌직구도 아니고, 타자의 몸으로 향하는 돌직구였다.
당연히 이강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 백미는 눈빛 연기였다. 막 태어난 새끼사슴이 처음으로 다른 동물을 봤을 때의 눈빛이었다. 순진무구한 그 순수한 눈빛은 언제나 상큼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하선우의 입가를 꿈틀거리게 만들었고, 이우희의 눈썹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안 좋은 의미로 굉장히 위력적인 눈망울. 이강우 본인이 거울로 자신의 눈빛을 봤다면,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찔렀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니까…….”
그 와중에도 하선우는 마음을 추스르고 말을 이어갔다.
“말 그대로입니다. 헤이스트 마법은 사용자는 물론, 마법의 효과를 받는 대상에게도 어느 정도 마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
이강우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선우는 그런 이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합니다. 언젠가 날 잡아서 마법사 테스트를 받아 보시죠.”
이강우가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선우는 그런 이강우에게서 시선을 치우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말과 함께 하선우의 시선이 이우희에게 꽂혔다.
* * *
모든 게 정리됐다.
산에서 내려온 이후 준비된 차를 타고, 모두가 각자 집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하선우는 이우희와 같은 차를 탔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마저도 지겨워졌을 때.
“어떻게 안 거야?”
이우희가 하선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가?”
“마법사란 걸 어떻게 알았어? 테스트를 해본 것도 아닌데?”
마나 서클의 유무를 테스트하는 방법은 아티팩트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대표적이다. 마나 서클이 있다면, 마법 아티팩트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완벽한 방법은 아니다. 결정적으로 마나 서클이 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고, 마력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이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헤이스트 마법 같은 버프 마법을 이용한다. 마법은 마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그런 마력을 한 곳에 붙잡을 수 있는 건 마력밖에 없다.
하지만 하선우는 두 가지 방법을 쓰기도 전에 이강우가 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다. 반대로 이우희가 봤을 때 이강우는 자신이 마법사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눈치를 챘단 말인가?
“그냥 보는 순간 알았지.”
“그게 언제인데?”
“이강우 씨가 입사한 첫날.”
“어떻게?”
“그냥 보고 알았지.”
이우희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봤는데 마법사인 걸 알아차렸다? 마법사에게 기본적으로 그런 재주는 없다. 상대가 마법사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는 재주는 다른 종류의 재주다. 만약 마법사에게 기본적으로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이강우와 유적에서 2개월 가까이 지낸 이우희가 하선우보다 먼저 이강우의 마법사 자질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더불어 이우희가 알기로는 하선우에게 그런 재주는 없다. 하선우와 알고 지낸 지가 적지 않을뿐더러, 둘은 친하다.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둘이 편하게 말을 놓는 이유다.
“그래서? 왜 갑자기 그런 사실을 여기서 말해준 거야? 진즉에 말할 수도 있었잖아?”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 너 혼자만 작전에 투입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단지 그것뿐?”
하선우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이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하선우가 주제를 바꿨다.
“그보다 그가 마법사라면 중현 선배가 꽤 섭섭하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도축기술을 가진 실력 좋은 총꾼과 도축기술을 가진 마법사, 둘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그제야 이우희가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지.”
마법사는 굉장히 귀중한 전력이다. 때문에 한곳에 마법사를 몰아넣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길드가 주도하는 유적 사냥에서 다른 것보다 가장 먼저 고려된다.
1서클 마법사도 분명한 마법사다. 이강우가 만약 마법사로 인정을 받는다면, 안중현이 이강우를 총꾼 부리듯 데리고 다니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아니, 마법사가 되면 이강우의 지위가 달라진다. 이강우가 안중현과의 합류를 거부할 자격은 얼마든지 있다.
이우희는 이강우에 대한 안중현의 기대를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이우희 본인도 이강우를 높게 평가했다. 같이 파티를 맺어서 나쁠 건 전혀 없다.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다. 이우희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고.
때문에 안중현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강우가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하는 심정일 터.
“뭐, 실력 좋은 사람이 FA로 나오면 나야 좋지만.”
“이강우 씨에게 관심이 있어?”
“난 재능 있는 사람을 마다할 생각은 없거든.”
“중현 선배 사람을 빼앗으면 뒷감당이 쉽지 않을 텐데?”
“그게 문제지. 그래서 FA라고 말한 거야. 자연스럽게 시장에 나오면 사는 거지, 굳이 남의 손에 있는 걸 빼앗을 생각은 없어.”
이우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우희는 알고 있다. 하선우가 저렇게 말했다는 건, 이강우에게 정말 제대로 관심이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괜히 문제가 터지진 않겠지?’
안중현, 하선우. 그 둘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이우희 입장에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 리 만무.
이우희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하선우는 옅게 웃었다.
‘당장 손에 쥐기는 좀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하선우는 당장 이강우를 자기 손에 쥘 생각이 없었다.
탐이 난다.
그러나 하선우의 눈에 비친 이강우는 탐이 난다고 손에 쥘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유?
이우희 생각대로 하선우는 상대방이 마나 서클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재주는 없다. 상대방이 수준 높은 마법사에다가 일부러 자신의 마력을 방출시키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도 하선우가 이강우의 비밀을 알게 된 건, 마력 때문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 하선우가 가지고 있는 감각이, 본능이 경고등을 울렸다.
‘이강우는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야.’
하선우, 그는 자신의 본능이 육식동물보다는 초식동물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그의 본능이 경고등을 켰다는 것.
‘어마어마한 인간이지.’
이강우가, 겉으로 보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그가 실은 무시무시한 맹수라는 의미다.
결정적으로 하선우의 감각은 잘 맞았다. 이제까지 강력한 몬스터 앞에서, 하선우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을 마련한 것이다.
‘중현 선배라면, 이강우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서 검증해 줄 터.’
안중현, 그는 능력도 좋고, 사람도 잘 다루고, 사람을 잘 키울 줄도 안다.
그런 그라면 이강우가 가진 능력을 잘 키워줄 것이다. 이강우가 손에 쥐어도 되는 칼인지 아니면 손을 내밀면 가차 없이 그 손을 물어뜯는 길들일 수 없는 맹수인지, 안중현이 가늠해 줄 것이다. 하선우가 이강우를 고르는 건 그때 가서도 무방하다.
더불어 지금 하선우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게 아니다.
‘왕지홍, 그 인간이 대체 이강우란 인간을 어떻게 손에 쥐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군.’
이 순간 하선우의 머릿속에는 왕지홍의 폰 번호, 11개의 숫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역시 사람은 이름 있는 회사에 취직해야 한다니까.”
이강우는 자신이 오늘 하루를 보내게 될 호텔 방, 그리고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보며 감탄 어린 혼잣말을 내뱉었다.
꽃등도마뱀 사냥을 마친 이후, 즈믄나래는 이강우를 위해서 즈믄나래 본부 빌딩 근처에 위치한 파크 하얏트 호텔 객실 하나를 잡아줬다. 하루 동안 고생한 이강우를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하루 숙박비 40만 원.’
더불어 이강우가 하룻밤을 보내게 될 호텔 숙박비는 40만 원. 여기에 즈믄나래는 이강우가 룸서비스를 얼마든지 이용해도 괜찮다는 말까지 해줬다.
‘그래, 이게 호사지.’
이강우의 인생사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호사를 누릴 기회가 이렇게 왔다.
심지어 즈믄나래 길드의 배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즈믄나래 길드는 고생한 이강우에게 원한다면 휴가를 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냥 휴가도 아니고 무려 유급 휴가를 말이다. 물론 이강우는 그 유급 휴가를 누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출근하지 말고 쉬라고 해서 쉬면, 평생 쉬는 법이지.’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밑바닥에서 사회생활은 제법 해본 이강우다. 유급 휴가 준다고 냉큼 받으면 나중에 30년짜리 무급 휴가를 받게 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막말로 정말로 제대로 된 휴가를 줄 생각이었다면, 즈믄나래 본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호텔 방을 잡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집에 가서 푹 쉬고 내일 출근하지 말라고 해줬겠지.
무엇보다 이강우는 지금 머릿속을 비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후우.”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운 이강우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법사란 걸 하선우에게 들켰다. 아니, 들켰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강우도 모르던 마법사 재능을, 하선우가 눈치를 챈 상황이다.
‘그때 연기는 잘 먹혔단 말이야.’
그리고 이강우 역시 상황이 그런 식으로 연출되도록 혼신을 담은 연기를 했다. 그때 자신이 보인 연기력을 떠올리는 이강우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역시 연기자를 했었어야 하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조차 하게 될 정도로, 이강우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강우가 마법사란 사실이 알려져도, 즈믄나래는 이강우가 자신들을 속이려고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가 자기 능력을 속이고 총꾼으로 계약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바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총꾼과 마법사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마법사로 인정받는 게 정답은 아니다.
이강우가 3서클 이상이라면 마법사로 활동하는 게 맞지만, 이강우는 1서클이다. 1서클 마법사가 주도할 수 있는 유적 사냥은 9등급 유적 정도. 그마저도 쉽진 않다. 보다 많은 마력을 섭취하려면 보다 높은 등급의 유적을 사냥해야 한다. 물론 이건 배부른 고민이다.
어쨌거나 이강우 입장에서는 일단 주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일단 이강우가 마법사가 되면, 초조해질 사람이 한 명 있으니까. 그 사람과 일단 이야기를 하는 게 우선이다.
까똑!
그 순간 이강우의 스마트폰이 애교스러운 소리를 토해냈다. 이강우가 스마트폰의 액정을 봤다.
‘이 바닥에 양반은 없군.’
* * *
밤 10시.
이강우는 안락한 호텔 방을 뒤로한 채, 호텔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강우가 머무는 호텔은 로비가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호텔 로비에서 보이는 바깥 야경은 아름다웠다. 어둠을 무수히 많은 불빛들이 수놓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불빛들은 하루 일정을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내뿜는 불빛이었다. 그 광경을 값비싼 호텔 라운지에서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보는 건, 묘한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강우는 그런 감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강우의 시선은 창문 너머 야경 대신 호텔 로비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만 꽂혀 있었다. 그런 이강우의 눈앞에 시원한 반팔 골프웨어를 입은 사내가 확 들어왔다.
이강우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이강우가 넙죽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하자, 사내가 이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강우가 그 손을 잽싸게 잡았다.
가벼운 악수.
“힘들 텐데, 괜히 불렀는지 모르겠군.”
그 악수와 함께 이강우의 행동에 대답을 해주는 이는 다름 아니라 안중현.
“힘들 게 뭐 있겠습니까? 제가 몬스터를 잡은 것도 아닌데.”
둘이 서로 잡은 손을 놓았다.
“앉아서 이야기하지.”
“예.”
그 둘은 곧장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중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된 것,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아직 실감이 되지도 않습니다. 무슨 마법이라도 써 봐야 실감이 될 것 같습니다.”
“주변에는 알렸나?”
“아뇨, 특별히 주변에 알리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가족에게도 말하진 않았습니다.”
“즈믄나래에는?”
“곧장 여기, 호텔을 잡아 준 덕분에 여기서 편하게 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따로 말한 곳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네. 자네가 마법사란 걸 길드에 숨겨줄 수 있는가?”
마법사란 걸 숨겨라?
이강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그 표정이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 이강우의 표정 변화를 본 안중현은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고민되겠지. 마법사가 됐는데, 그 사실을 숨기라고 하는 제안은…… 하물며 총꾼 출신 아닌가? 마법사에 대한 애증이 그 어떤 이들보다 강할 수밖에.’
안중현은 이강우의 표정만으로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한편으로는 자기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이강우를 보며 안심하기도 했다.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사람은 여러모로 상대하기 쉬운 편이니까.
‘자, 표정 연기는 이 정도면 되겠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중현의 예상과 다르게 이강우의 그 표정은 연기였다.
‘이런 제안이 나올 줄 알았지.’
이강우는 안중현이 이런 제안을 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안중현은 이강우가 필요해서 데려왔다. 그런데 그가 마법사가 된다? 마법사와 총꾼은 다르다. 총꾼은 마법사가 까라면 까야 하지만, 마법사는 마법사가 까라면 왜요? 라고 반문할 수 있다.
또한 길드의 유적 사냥 파티 구성에서, 총꾼은 누구를 고르든 파티의 리더 마음이지만 마법사는 아니다. 길드가 제지를 할 수도 있고, 선택된 마법사 본인이 거부할 수도 있다.
안중현은 이강우를 제대로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이강우란 패를 손에서 놓아줄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 안중현 입장에서는 이강우가 차라리 마법사인 걸 숨겨주는 게 낫다.
마법사가 아닌 척 위장을 하는 거다.
물론.
“그러니까 제가 마법사라는 걸 숨기라는 말씀이신데…… 그게 솔직히 말해서…….”
맨입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일단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자네가 마법사가 되면 더 이상 내가 자네를 내 밑에 마음대로 두는 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네. 금액적인 부분을 떠나서 내 사람을 내가 마음대로 못 한다는 게 내 입장에서는 가장 짜증 나는 일이지.”
마법사와 총꾼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고 이강우가 마법사란 걸 숨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선택으로 포기해야 하는 대가를 안중현이 채워줘야 한다.
이 자리는 그런 자리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상호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거래를 위한 자리.
“무엇보다 난 자네가 필요하네. 난 도축기술자들을 높게 평가하네. 지금은 아는 사람만 도축기술자를 유적 사냥에 포함하지만, 반년 후…… 내년에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겠지.”
도축기술자를 확실하게 손에 쥐고 싶다. 안중현이 이강우가 필요한 이유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하지만 이강우는 고작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도축자를 파티에 넣는 건 좋지만, 그게 무조건 이강우가 될 필요는 없다. 안중현이 원하는 그림은 좀 더 클 것이다. 그저 도축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진행할 어떤 계획에 이강우란 도축자가 필요하다.
그 사실을 이강우는 지금 이 순간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정도까지, 안중현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이강우와 거래를 하려고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상황을 정리하자면, 자네가 만약 3서클 이상의 마나 서클을 가진 마법사라면 마음대로 행동하게. 내게 3서클 마법사를 사적으로 고용할 만한 여력은 없으니까.”
어쨌거나 안중혁은 보다 확실한 거래를 위해, 이강우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강우가 3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면, 안중현이 혼자 손에 쥘 수 있는 패가 아니다. 뭐든지 그렇지만, 무리해서 혼자 먹으려고 하면 기어코 탈이 나는 법이다.
“반면 자네가 2서클 마법사라면, 고민을 하게 될 걸세. 내 제안도 나쁘진 않지만, 2서클 마법사의 대우도 나쁘진 않을 테니. 하지만 만약 1서클 마법사라면 내 제안이 마냥 나쁘진 않을 걸세.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하자면, 즈믄나래 길드는 1서클 마법사와 계약하지 않네.”
반면 2서클 이하 마법사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마법사는 마법사, 2서클 이하 마법사도 충분히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는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즈믄나래 길드는 보통 길드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일류 길드다. 대한민국 마법사들이 모두가 선망하는 길드 중 한 곳이다. 마법사가 많으면 나쁠 건 없지만, 즈믄나래 정도 되는 길드가 굳이 마법사 머릿수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때문에 이강우가 1서클 마법사라고 해서 즈믄나래가 파격적인 무언가를 해줄 가능성은 없다. 적당한 수준, 상식적인 수준의 대우만 해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즈믄나래 길드는 아쉬울 게 없다는 식으로 평균 이하의 대우를 해줄 수도 있다.
“참고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제안은 이 정도일세.”
안중현이 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딱 적당한 수준이군.’
추가 수당과 유적 사냥 과정에서 얻는 아이템들에 대한 지분 보장. 공수표라기보다는 안중현이 이강우에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제안이었다.
‘내가 즈믄나래를 나갈 이유는 없지.’
어쨌거나 이강우는 즈믄나래를 떠날 생각이 없다. 스텍 레코드를 비롯해서, 즈믄나래는 다른 길드가 가지지 못한 많은 능력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유적 사냥이 목적이라면, 보다 많은 마력 섭취가 목적이라면 즈믄나래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에 있는 게 최선이다.
여기에 하나 더, 안중현 밑에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안중현은 실력도, 경력도 확실하니까.
딱 하나, 걸리는 건 안중현의 의도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럴 제안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저 말고도 실력 좋은 도축자는 얼마든지 있잖습니까?”
안중현이 하고자 하는 것. 그걸 알아야 한다. 분명 안중현은 큼지막한 계획을 세워뒀을 것이다.
더불어 유적 사냥을 업으로 하는 마법사가 세우는 큼지막한 계획은 당연히 위험한 일이기도 할 터.
이득이니 뭐니 운운해도 목숨보다 비싼 건 없다.
“코엑스에 있는 5등급 모래시계문을 본 적 있나?”
“예, 봤습니다.”
“나도 그 모래시계문을 닫는 데에 참가했지. 그때 5등급 모래시계문을 탐사하면서 느낀 건, 만약 탐사과정에서 시간이 15일 정도만…… 아니, 일주일 정도만 더 있었어도 정말 어마어마한 대박을 하나 볼 수 있었다는 걸세. 천 노인이 본격적으로 몬스터 도축자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지. 왕지홍은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고. 어쨌거나 그게 대충 2년 전 일이고, 나름 이제 실전에 투입할 만한 도축자들이 생겨났지. 당연히 조만간 5등급 유적 러시가 시작될 터. 난 그 시대를 주도하고 싶네.”
안중현이 승부수를 던졌다.
이강우를 잡기 위해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가 당장 5서클 마법사가 될 수 없는 이상, 내가 그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다른 게 필요하네. 그게 뭘 것 같나?”
시간.
유적에서의 활동 시간.
안중현은 시간이란 요소를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늘릴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강우에게서 그 가능성을 봤다.
이강우는 단순히 실력 좋은 도축자가 아니다. 그는 혼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뛰어난 생존 능력도 가진 도축자다.
심지어 이제 마법사 재능마저 있다. 1서클만이라도 좋다. 이강우가 마법 아티팩트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유적 내에서 생존 능력은 그 어떤 일반인과도 비교를 거부한다.
이보다 적격자는 없다.
“평생 내 밑에서 일하라는 소리는 안 하겠네. 짧으면 반년, 길어 봐야 1년일세. 그 안에 상황이 판가름이 날 테니까. 그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룩하지 못한다면, 포기해야지.”
짧으면 반년.
그동안 마법사란 걸 숨겨주면, 나름 구미가 당길 만한 대가를 지불해주겠다고 한다.
이강우가 말없이 안중현을 바라봤다. 안중현은 그런 이강우에게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마법 아티팩트를, 불지뢰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건네줬다.
“고민은 자네가 가진 마나 서클이 몇 개인지 확인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 자리를 이동하지.”
그 순간 이강우가 안중현이 건네준 마법 아티팩트를 다시 그에게 돌려줬다.
돌려주면서.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반년 동안 마법사인 것을 숨기고, 따르겠습니다.”
이강우가 확답을 내놓았다.
안중현의 표정이 살짝 환해졌고, 그 표정을 본 이강우는 꾹 다문 입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과 함께 이강우는 속으로 빵긋,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완전히 넘어오겠군. 역시 난 연기자를 했었어야 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