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8화 (8/66)

8화. 1서클

즈믄나래 본부 빌딩 지하 3층은 마치 창고형 대형마트를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뻥 뚫린 드넓은 공간은 선반이 가득했고, 그 선반 위는 온갖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강우에게 당장 그 광경을 즐길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계약서는 다 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이강우를 맞이하는 안중현. 그의 질문에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약서는 썼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강우는 적당한 수준의 아부를 잊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나름 긴장은 풀린 모양.

“감사할 일은 없네. 실력이 부족하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쫓겨날 테니까.”

그러나 안중현은 그 적당한 수준의 아부에 차갑기 그지없는 대답을 했다. 아부한 이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대답, 듣는 이의 기분이 퍽 나빠질 만한 대답.

“예, 압니다.”

하지만 그런 안중현의 대답에 이강우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거나, 당황한 기색 따위는 품지 않았다. 표정 연기가 아니었다. 이강우는 안중현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이 바닥에서 실력이 없으면, 본인을 위해서라도 빨리 접는 게 좋은 거죠.”

평범한 직장이라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일단 붙어있으면 월급이라도 나오지만 모래시계문 유적, 그 세계는 아니다. 쓸모없는 인간은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이강우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잘 아니까, 즈믄나래에 온 것이다. 단순히 좋은 복지혜택과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서 즈믄나래에 온 게 아니라 충분한 각오를 하고 왔다.

‘나도 그저 대충 머릿수만 채우는 들러리로 지내다 들러리답게 죽을 생각은 없어.’

즈믄나래는 발판이다. 즈믄나래의 권력과 능력에 빌붙어서 보다 많은 마력을 섭취하고, 보다 강한 마법사가 되어, 불사황제의 권능을 통해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아득한 힘을 손에 넣고, 비루한 삶을 바꿀 것이다.

그런 이강우의 대답에 안중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건 로봇 조종법을 배우는 것도, 폭약 따위를 다루는 전문적인 기술도 아니야. 당장 원하는 건 유적 사냥의 시간을 늘려주는 역할, 좀 더 크게 보면 유적에서 나를.”

이강우가 태블릿PC를 받아드는 순간, 그 대목에서 안중현은 손가락으로 툭툭, 제 머리를 친 후에 말을 이어갔다.

“이걸로 도와주는 역할.”

안중현이 왕지홍에게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 이강우를 데려온 건, 그가 가진 가치가 단순히 총꾼 그리고 도축자만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우희를 구출했을 때의 과정을 보면, 이강우는 유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천부적인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재능을 놔두고 단순히 총꾼 겸 도축자로 써먹는 건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지하 3층으로 불렀다.

“이곳에는 8등급 및 9등급 유적과 관련된 물품들이 있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나온 뿔이나 뼈부터 시작해서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식물과 광물들 사료들, 때문에 이곳은 창고가 아니라 박물관이지.”

이곳은 그저 당장 쓸모없는 것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다. 즈믄나래가 유적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보관하는 데이터베이스다.

백문불여일견.

“명령이다. 이곳에 있는 걸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도록.”

이곳에 있는 정보들을 최대한 빨리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이강우의 첫 번째 임무다.

이강우는 그런 안중현의 명령에 미소를 지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그 대답에 안중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우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1층에 위치한 사내 커피숍은 정말 모든 메뉴가 천 원입니까? 리필도 무한이고?”

참으로 진지한 질문이었다.

* * *

이강우에게 과제를 준 안중현은 엘리베이터를 탔고, 곧바로 10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렸고, 화려한 외모를 가진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중현 선배,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는 하선우. 안중현은 대답 대신 그를 보지도 않은 채 그저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하선우가 옅게 웃었다.

“여전히 묵묵하시네요. 그래도 나름 목숨 걸고 같이 5등급 유적에서 싸운 전우인데, 이제 좀 형 동생으로 지내는 게 어떻습니까? 동생한테 밥도 좀 사주시고.”

그 말에 안중현은 짧게 대답했다.

“나중에 식사 한번 하지.”

여전히 무덤덤한 반응

하지만 하선우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듯,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예, 같이 밥 한 끼 해야죠. 아, 그보다 조금 전에 신입 한 명을 봤는데요, 얼마나 긴장했는지 몸이 로봇이나 다름없더군요. 이름이 이강우였나?”

그 순간 이제까지 대화에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던 안중현이 빠른 반응을 보였다. 하선우와 시선을 피하던 그가 처음으로 하선우에게 시선을 던져줬다.

“이름을 알고 있군.”

현재 즈믄나래 본부 내에서 이강우란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일부러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데려왔으니까. 그런데 하선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아까 잠깐 본 얼굴이 어디서 본 거 같아서 찾아보니까, 왕 사장이 프로필을 보내줬었더군요. 천 노인도 칭찬할 만큼 실력 좋은 칼잡이가 들어왔는데 한번 써보지 않겠냐고.”

하선우의 설명에 안중현은 금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노였죠. 전 솔직히 칼잡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거든요. 사실 제 마법은 전투보다는 견제에 특화되어 있어서 도축 기술자보다는 저를 대신해서 주력으로 싸워줄 실력자가 더 필요하니까요. 결정적으로 칼잡이들은 전투 능력이나 생존 능력이 너무 떨어지잖아요? 유적 탐사 능력도 떨어지니 베이스캠프에만 놔둬야 하는데, 그럼 호위병력도 대기시켜야 하고…… 뭐, 이강우 씨는 좀 다른 것 같더군요. 그 사람이 이우희 구해준 사람 맞죠?”

하선우는 꽤 많은 걸 알고 있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타고난 친화력 덕분에 즈믄나래 길드에서 최고의 인맥을 자랑하는 마당발인 그는 어지간한 일을 다 알고 있을 수밖에. 이우희가 아마 직접 이강우에 대해 말해줬을 것이다. 그녀도 입이 무거운 편이긴 하지만, 하선우 앞에서는 그 입을 다물기에는 짬밥에서부터 크게 밀리니까.

“그래서 이제 관심이 생겼나?”

어쨌거나 하선우가 이렇게까지 이강우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단순히 안중현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아닐 터. 어느 정도 관심은 있다는 의미다.

“관심 생겼다고 날름 먹으면 배탈 날 게 뻔한데, 그 고생 감수하고 먹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 뒤로.

“이강우 씨가 마법사라면 배탈 날 거 각오하고 먹을 만하겠지만. 제가 마법사 욕심은 많잖아요?”

하선우가 사족이나 다름없는 말을 붙였다. 안중현은 그 사족에 쓴웃음과 함께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강우에게 관심 가질 일은 없겠군.”

그 대답 앞에서 하선우는 곧장 대답을 내뱉는 대신 잠시 뜸을 들인 후에.

땡!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하자마자 나지막하게 말했다.

“예, 그럴 일은 없겠죠. 아마도.”

* * *

블랙 스택이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국 정부의 지원 아래 즈믄나래 길드를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두 가지다.

하나는 즈믄나래 길드가 클로즈 한 모든 모래시계문을 한국 정부에 기부하겠다는 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블랙 스택과 함께 세계 3대 길드로 평가받던 두 길드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제대로 구축된 유적 관련 정보 시스템을 한국 정부와 공유하겠다는 내용의 제안이었다.

속칭 스택 레코드.

유적 관련 정보 시스템 중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정보 관리 시스템이었다.

이강우 역시 스택 레코드의 위엄을 알고 있었다. 평생 볼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강우가 그 스택 레코드를 보고 있었다.

‘자자한 명성이 아깝지 않을 정도군.’

스택 레코드에 있는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택 레코드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이 있었다. QR코드를 입력하면 그와 관련된 정보만 나왔다.

즉, 이강우가 스택 레코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즈믄나래 본부 빌딩 지하 3층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만 가능했다. 8등급에서 9등급 유적 관련 정보를,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만 얻을 수 있다는 의미.

이강우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강우는 절대 스택 레코드에 있는 정보 전부를 머릿속에 넣을 수 없을 테니까.

‘정말 자세하네.’

그 정도로 스택 레코드에 등록된 정보는 엄청났다.

몬스터만 해도 단순히 몬스터의 명칭, 등급만 있는 게 아니다. 태블릿PC를 통해서 그 몬스터의 해부도와 행동 패턴, 특이점, 몬스터와의 전투 장면, 마나스톤 채집 방법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을 단순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정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된 영상을 보여줬다.

심지어.

-칼니멧돼지는 유적에서 구할 수 있는 아주 맛있는 단백질이죠. 오늘은 이 녀석을 가지고 유적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다섯 가지 요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몬스터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몬스터에게서 얻은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법까지 있었다.

‘요리법까지 스택 레코드에 넣을 걸 보면, 블랙 스택이나 즈믄나래 길드는 꽤 오래전부터 몬스터 고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의미이군.’

어쨌거나 하루 이틀 벼락치기로 외워서 될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강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선반을 가득 채운 유적 관련 물품들을 보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 대가리 수준이면 한 달은 넘게 걸리겠는데?’

안중현이 말한 대로, 여기 있는 것들을 전부 머릿속에 넣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할 거다. 이강우에게 이건 천금 같은 기회다. 유적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자세히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건 중요치 않다.

단지…….

‘일단 알짜배기부터 빼먹어보자고.’

이 많은 지식 중에서 당장 이강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골라 먹는 센스 정도는 발휘해줄 생각이다.

“분석.”

이강우가 원하는 건, 자신의 마력 섭취 포인트를 올리게 해줄 지식이다. 마력을 품은 놈을 찾는 게 우선이다.

분석 마법을 쓰자 이강우의 시야에 숫자들이 새싹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뭐, 예상대로 짜네.’

대부분의 것들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유적에서 나온 만큼, 전부 어느 정도의 마력은 품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숫자는 미약했다. 대부분의 것들이 한 자릿수였고, 본래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력이 전부 소진되어 0으로 변한 것들도 있었다.

‘응?’

그런 한 자릿수 숲속에서 두 자릿수 마력이 한 곳에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오케이, 하나 발견.’

이강우가 잽싸게 그곳으로 향했고, 이강우를 반긴 건 화분 안을 채우고 있는 꽃이었다. 파란색 잎사귀에 하얀색 꽃봉오리 여러 개가 모여 있는 모양새, 그리고 꽃봉오리의 모습은 호롱꽃을 떠올리게 만드는 방울 모양이었고,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 크기보다 조금 더 컸다.

‘이거 유적호롱꽃이잖아?’

이강우는 꽃의 정체를 파악하고, 곧바로 태블릿PC를 통해 꽃의 정보를 태블릿PC에 출력시켰다.

[유적호롱꽃]

-유적에서 발견되는 꽃. 유적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자라나며, 생명력이 매우 강하다. 빛과 물이 없는 곳에서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힘이 있다. 꽃봉오리는 설탕처럼 진한 단맛을 품고 있으나, 약간의 독성을 품고 있어 그냥 먹을 경우에는 배탈이 날 수 있다. 독성을 없애는 방법으로 끓는 물에 넣어 30분 이상 끓이면 되나, 그럴 경우 단맛이 빠져나간다.

이강우도 자주 봤던 놈이었다. 유적 타입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놈이었고, 독성이 있지만 먹으면 꽤 진한 단맛이 있어서 식량이 전부 떨어진 유적 사냥꾼들이 저도 모르게 먹고 배탈이 난다고 해 아귀꽃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붙어있었다. 유적 사냥 중에 유적호롱꽃을 먹는 건, 그 유적 사냥 파티는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기분 좋은 놈은 아니다. 또한 단맛이 난다는 것도 솔직히 의미가 없다. 설탕하고 비슷한 단맛이라면 그냥 설탕을 먹는 게 정답 아닌가? 설탕이 없으면 초콜릿을 먹으면 되고.

그런데 그 유적호롱꽃이 마력을 품고 있었다.

그것도 꽃봉오리 하나에 맺힌 마력이 10포인트 정도 됐고, 그런 꽃봉오리가 대여섯 개가 뭉쳐 있었다.

‘이거 하나가 50포인트?’

이강우가 제 눈을 의심할 정도.

‘뭐야 이거?’

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분석 마법은 눈앞의 꽃봉오리를 먹는 게 몬스터 고기를 먹는 것보다 낫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그래, 유적에서 몬스터만 처먹으란 보장은 없지. 마력이 있으면 돌이라도 씹어야지.’

이강우, 그가 조금씩 포식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 * *

이강우의 하루는 새벽 6시, 인천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방에서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됐다.

“흐아암.”

침대 그리고 텔레비전이 전부인 초라한 방에서 긴 하품과 함께 일어난 이강우는 10분 더 잠을 잘 여유도 없이, 곧바로 자그마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깨끗하게 몸단장을 했다.

이후 대형 아웃렛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여름용 캐주얼 정장을 입고, 인천 주안역에서 서울 삼성역까지 전철 속에서 사람 냄새를 진절머리 날 정도로, 1시간 30분 정도 맡은 후에 즈믄나래 본부 빌딩 지하 3층, 정말 가물에 콩 나듯 사람을 볼 수 있는 그곳에서 태블릿PC를 부여잡고, 안 되는 머리에 유적 관련 정보를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끄응…….”

‘진짜 난 공부해서 성공할 팔자는 아니야. 내 머리는 돌머리가 맞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이강우가 즈믄나래 입사 이후 20여 일 동안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한 일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이강우가 참 힘겹게 산다고, 이강우의 친구라면 그에게 술 한 잔 사주겠다고 하겠지만, 사실 이강우는 이런 나날들에 그 누구보다 높은 만족감을 품고 있었다.

‘아, 벌써 점심시간이네. 오늘은 뭘 먹을까?’

실제로 지금 이강우가 경험하는 나날들은 이강우의 인생에서 어쩌면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멋진 나날들이었다.

일단 번듯한 직장을 얻었다. 월급도 월급이지만 즈믄나래 직원임을 알리는 사원증을 목에 차고 근처 식당에 가면, 주변에서 보는 눈이 달랐다. 이제 당당하게 자기 직업을 말할 수도 있었다. 과거 총꾼 시절, 사업이 망한 이후, 왕지홍 밑에서 짧게나마 마나스톤 감별사란 불법적인 일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환골탈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매일 3시간씩 사람 사이에서 깔려 죽을 듯한 출퇴근을 경험하고 있지만, 실제로 깔려 죽는 일은 없다. 비유일 뿐이다. 적어도 사람 없이 한적한 유적에서 발 뻗고 지내는 것보단 훨씬 안전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어휴.”

‘점심이 아니라 저걸 먹어야 하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마력을 섭취하지 못한다는 점.

이강우는 밥 달라고 슬슬 짜증을 부리기 시작하는 배를 가볍게 부여잡은 채, 고개를 돌려 선반 위에 올려진 유적호롱꽃을 바라봤다. 물을 주지 않아도, 햇볕을 쬐지 않아도, 그냥 대충 흙에만 묻어주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적호롱꽃을 바라보던 이강우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이것만 먹어도 100포인트…… 최근 마력을 못 먹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배가 더 고픈 것 같단 말이야.’

입맛을 다시던 이강우가 고개를 좀 더 돌렸다. 그러자 CCTV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너무 자주 봐서 반가운 마음마저 들 정도다. 이강우가 그런 CCTV를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 있는 것 중에 몇 개만 빼 먹어도…….’

지금 이곳, 즈믄나래 본부 빌딩 지하 3층에 있는 것들 중에 마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들, 알짜배기 몇 개만 먹어도 최소 5천 포인트 이상의 마력을 섭취할 수 있다. 9등급 마나스톤 10개 이상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쓸모없는 물건들이 아니라, 스택 레코드에 있는 정보와 관련된 사료들이다. 당연히 여기 있는 물건은 허가 없이 외부 반출이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런 물건을 그냥 먹는다?

만약 이강우가 유적호롱꽃을 먹는다면, 먹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정신이상자란 이유로, 미친놈 취급을 받으며 해고가 될 것이다.

‘참자. 어떻게 온 즈믄나래인데, 최소한 내가 백 노인에게 지불한 액수만큼은 뽑아야지.’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CCTV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이런 사소한 부분만 제외하면, 이강우에게 최근 나날들은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동시에 이강우는 슬슬 행복감만큼의 불안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보다 내 인생에 이런 행복이 계속될 리는 절대 없는데…….’

알고 있으니까.

모래시계문이 등장한 이후 이강우는 5년 넘게 빌어먹을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그의 인생이 갑자기 바뀔 리 만무하지 않은가?

‘조만간 일 하나 터지겠지. 아주 빌어먹을 일이.’

그런 이강우의 감은 정확했다.

* * *

투투투투투!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허공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가는 헬기 안에 이강우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 이강우를 향해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사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사내의 정체는 하선우.

그가 쓰고 있는 이어폰에 달린 마이크를 통해 소음을 뚫고 이강우에게 말을 전달했다.

“이강우 씨, 크게 긴장할 거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문 역할입니다. 또한 이강우 씨의 역할은 몬스터를 도축하는 일입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선우의 말에 이강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는 의미일까?

‘긴장할 게 없긴, 수틀리면 뒈지는 건데.’

물론 납득했을 리 없다.

‘빌어먹을 일이 터질 줄은 알았는데, 하필이면 몬스터 출몰 사건에 코가 꿰일 줄이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강우는 맛난 점심을 마치고, 후식으로 초콜릿이 진하게 들어간 셰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공부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마법청의 몬스터 사냥을 돕기 위해 자문단을 보내야 하는데, 이강우가 그 자문단에 포함된 것이다. 현재 즈믄나래 본부 빌딩에 몬스터 도축 기술을 가진 도축자는 많지 않았고, 그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 이강우가 꼽힌 것이다.

‘즈믄나래 소속이면 피할 순 없는 일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상황을 예상은 했다.

본래 현실에 등장한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길드의 역할이 아니다. 모래시계문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고 몬스터가 출몰하는 순간, 그 몬스터는 국가의 안보와 치안을 위협하는 존재고,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처리해야 하는 존재였다.

물론 길드는 정부에 설립 허가를 받아야 하는 집단이고, 그 설립 허가를 받을 때 한국 정부가 몬스터 동원에 전력을 요청할 경우 그 요청에 응해야 한다는 내용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긴 하지만, 반대로 정부 입장에서 몬스터가 등장할 때마다 일일이 길드를 시켜서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국민들에게 불안감만 심어주는 일이다.

실제로 출몰하는 몬스터 사냥은 마법 관련 정부 기구인 마법청(魔法廳)과 국방부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마법청이 처음 신설될 당시, 몬스터 사냥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비롯한 노하우를 전수한 곳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몬스터 사냥 실력을 검증받은 블랙 스택이었다.

스택 레코드를 한국 정부와 공유하고, 필요에 따라 마법청의 몬스터 사냥에 무조건적인 자문을 해주는 것이 즈믄나래의 설립을 위해 블랙 스택이 한국 정부에 제안한 조건 중 하나였다. 블랙 스택이 이 정도 제안을 해준 덕분에 다른 세계 3대 길드 중 두 곳인 칠성문과 이존이 한국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이강우도 당연히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근심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즈믄나래의 자문을 요청한다는 건 일이 보이는 것에 비해 조금 꼬였다는 거겠지.’

이강우는 직업군인 출신이다. 여기에 모래시계문 등장 초창기에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몬스터와의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런 이강우가 한국 군대의 성격을 모를 리 없다.

자존심을 위해 고집불통이 되어버린 집단이다. 자기들끼리만 뭔가 하려고 하지, 외부인이 자기들이 하는 행사에 끼어드는 건 용납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그런 선택지 자체를 머릿속에 두지 않는다.

물론 몬스터 사냥은 마법청과 국방부가 협조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이런 국방부의 성향이 몬스터 사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만무하다.

또한 블랙 스택이 가진 노하우 대부분은 이미 마법청에 전수가 됐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몬스터 사냥 능력이 아시아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우수하다. 중국, 일본 다음이다. 몬스터 사냥에는 마법사의 비중이 굉장히 높고, 마법사의 숫자가 인구수에 비례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즈믄나래에 자문을 요청했다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다.

‘전투 도중에 마법사 서너 명이 당했나?’

이강우는 일단 마법사가 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는 귀중한 인력이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가 몬스터와 교전 도중에 부상을 입는다? 문제가 커진다. 더군다나 마법청 소속 마법사들은 공무원이나 다름없어 몸을 사리는 편이다. 유적 사냥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현실에서의 몬스터 사냥을 택한 것이 그 증거다. 때문에 마법사가 당했다는 소식이 나오는 순간, 마법청 소속 마법사들은 행동이 굼떠진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피해가 더 커지면, 그건 곧 이번 사냥을 지휘하는 지휘관의 무능으로 이어질 터.

마법청도 그렇지만, 군인에게 있어서는 무능함보다 최악의 꼬리표는 없다. 차라리 무능한 놈이 될 바에는 그냥 자존심 좀 굽히고 부르면 와주는 즈믄나래에 자문을 요청하는 게 나을 터.

그런 이강우의 예상은 정확했다.

* * *

강원도 정선군에 위치한 옥갑산. 짙고 청명한 녹음을 품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옥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음이 무성해지는 여름에는 풍경이 참 멋진 곳이었다.

그런 옥갑산에 삼엄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었다.

삼엄한 분위기의 원인은 다름 아니라 옥갑산을 포위하고 있는 무장 군인들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채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눈빛에 장난기나 여유 같은 기색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츠, 큼지막한 포신을 달고 있는 전차들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는 묵직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섬뜩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 분위기 속에서 거친 굉음과 함께 헬기 한 대가 착륙했다.

즈믄나래에서 파견한 자문단이 도착한 것이다.

헬기가 착륙하자마자 가장 먼저 내린 건 하선우였다. 그가 헬기에서 내리자,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

‘어?’

‘하선우잖아?’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마법사 중 인지도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있는 외모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치 여자 아이돌 가수가 위문공연을 했을 때처럼 격렬한 반응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긴장감 가득하던 군인들이 그 긴장감 속에 호기심을 품은 채 곁눈질로 하선우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바로 옆 사람과 중얼거리듯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자, 갑시다.”

하선우는 그런 시선들 속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채 자신과 같이 온 동료들을 지휘하듯 데리고 움직였다. 하선우가 향한 것은 천막을 이용해 임시로 만든 지휘본부였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최소 40대 후반이 넘는 사내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들어온 이들을 마중했다. 이강우의 눈빛이 빠르게 그들의 계급장을 살폈다. 대나무꽃이 잔뜩 있고, 그 사이로 듬성듬성 별이 보였다. 더불어 대나무꽃은 기본 두 개였다.

‘어휴.’

군대의 높으신 양반들이 가득한 장소, 한때 직업군인이었던 이강우에게는 화생방 훈련 때보다 더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이강우가 저도 모르게 숨을 콱 멈췄다.

반면 하선우는 이 닳고 닳은 높으신 양반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채, 오히려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상황은 대충 보고받았습니다. 다치신 마법사분들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인사도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모습. 이강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일이다.

“사망자는 없소. 하지만 한 명이 마력 쇼크를 일으키면서 정신을 잃은 채 국군병원으로 이송됐소.”

“사망자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나마 다행?

그 말에 몇몇 이들이 심기 뒤틀린 표정을 지었지만, 하선우는 그 표정에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 그럼 시간도 없으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제 말만 했다.

그 순간 이미 분위기는 하선우의 것이 됐다.

하선우는 이런저런 질문이나 인사치레가 나오기도 전에 곧장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는 현재 문제가 터진 옥갑산 북쪽 구역을 선을 그리듯, 손가락으로 그었다.

“여기가 데드라인, 맞습니까?”

하선우 뒤에서 슬쩍, 지도를 본 이강우가 아!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옥갑산 위로 올라가면 용평리조트가 나오는구나. 저 정도 거리면…… 10킬로미터 안에 들어가네.’

왜 즈믄나래에 자문을 요청했는지 바로 이해가 됐다. 마법사의 피해도 피해지만, 여기서 만약 몬스터가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할 경우 문제가 꽤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옥갑산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대한민국 리조트 중에서 크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용평리조트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대형 리조트, 사람이 많이 있는 대형 체육 시설이다. 그런 대형 체육 시설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7등급 이상의 몬스터가 등장한다면, 당연히 상황의 심각성이 한 단계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데드라인이다.

몬스터 처리도 처리지만, 당장 몬스터가 더 이상 북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게 우선이었다.

“방법이 있소?”

어쨌거나 하선우가 자신만만하게 나오니 높으신 양반들도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등장한 몬스터의 정체는 꽃등도마뱀. 꽃등도마뱀의 경우에는 후각이 민감한데, 특수한 향을 쫓아 움직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녀석은 거의 직선거리로 용평리조트 방향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녀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7등급 몬스터 꽃등도마뱀.

몸길이 8미터에서 10미터, 단단한 등가죽 위에 여러 꽃을 키우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애교 넘치는 이름과는 다르게 굉장히 호전적이고, 강한 놈이다. 괜히 7등급 몬스터가 아니다. 무엇보다 주변 환경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 한 번 놓치면, 다시 잡기 쉽지 않은 놈이다.

“그래서 꽃등도마뱀 전용으로 나온 가스를 살포했소. 하지만 그런데도 녀석은 가스를 무시하고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는 흔적을 남기고 있소.”

물론 마법청과 국방부도 꽃등도마뱀을 잡기 위한 방법을 써먹었다. 블랙 스택으로부터 받은 노하우를, 사냥법을 썼고, 방산업체에서 몬스터 전용으로 나온 무기도 썼다.

“어디 제품입니까?”

“델빗 사 제품인데…….”

“이스라엘 방산업체들이 몬스터 관련 화학제품 쪽은 꽤 우수한데, 델빗 사 제품이 안 먹히면, 다른 제품도 안 먹힐 겁니다.”

델빗.

이스라엘에 속한 방산업체다. 몬스터 관련 무기를 만드는 업체로,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다.

‘델빗 제품이 안 먹혀? 큰일 났네.’

델빗 사 제품은 믿을 만하다. 그런데도 통하지 않았다는 건, 이번에 등장한 꽃등도마뱀이 별종이거나 혹은 더 강한 무언가가 북쪽에서 녀석을 유혹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역으로 갑시다.”

이 순간 하선우는 금방 답을 내놓았다.

“최루탄 준비해주세요.”

“최루탄?”

“녀석을 유혹할 수 없다면, 화를 돋워야죠. 매뉴얼에 있지 않습니까? 몬스터를 유인하는 방법에는 유혹과 도발, 두 가지가 있다고.”

말과 함께 하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도발이야말로 제 장기죠.”

여러 마법사들 중에서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그가 비번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직접 전선에서 움직이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누구보다 긴장한 건 다름 아닌.

‘직접 전선에 나간다고? 설마 날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날 데려간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강우였다.

* * *

여름에 산을 오르는 건 괜찮은 경험이다. 녹음에 차갑게 식은 흙 위를 걸으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은 불쾌하기보다는 상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조끼를 비롯해서 완전한 무장을 한 채, 그리고 어깨가 아파 올 정도로 묵직한 무게를 담은 가방을 짊어진 채, 오르라고 만든 등산로가 아닌 그냥 적당히 길처럼 보이는 곳을 타고 오르는 건 상쾌함과는 거리가 백만 광년쯤 된다.

‘빌어먹을.’

그게 지금 이강우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였다.

‘난 분명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을 거야. 그게 아니면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빌어먹을 리가 없겠지.’

사실 이강우는 자신이 산을 오를 이유는 정말 단 하나도,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혹여 옥갑산을 오르더라도, 그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 그러니까 꽃등도마뱀을 잡으면 그때 놈을 도축하기 위해서일 터. 실제로 이강우는 이번 자문단에 총꾼이 아닌 도축 기술자로 포함됐다. 전투에 참가할 의무나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강우는 본인뿐만이 아니라, 자문단이 직접 현장에 나서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자문단 아닌가? 자문만 해주면 된다. 이 몬스터는 이러이러한 특성이 있으니, 이런이런 방법을 써라. 좀 더 과하게 참견하면 병력은 이쪽으로, 마법사는 이쪽으로…… 이 정도만 하면 된다. 굳이 자문단 소속 마법사가 두 팔 걷어붙이고, 두 다리로 산을 탈 이유는 없다.

또한 즈믄나래의 자문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 자문단을 파견한다고 해서 받는 돈은 없다. 심지어 교통비도 지급해주지 않는다. 혹여 꽃등도마뱀을 잡는다고 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한국의 경우에는 모래시계문과 관련되어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한국 정부의 소유이니까.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꽃등도마뱀을 잡아서 나오는 가치 있는 것들, 가죽이나 마나스톤은 한국 정부 소유다. 굳이 벌 수 있는 건 고깃값 정도가 전부.

물론 대승적인 차원에서, 한국 국민의 안전과 평화라는 정말 숭고한 명분으로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순 있겠지만, 장담컨대 이번 자문단을 멤버를 뽑고 자문단을 이끄는 하선우는 그런 숭고한 무언가를 품을 정도로 대단한 애국심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런데 하선우가 갑자기 본인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했고, 이강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앞서 말했듯이 자문단인 그가 전장에 나설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하물며 하선우는 대단한 5서클 마법사님 아니신가? 하선우가 나서겠다는데, 이강우가 최후방에서 대위가 타준 커피나 마시면서 몬스터가 잡힐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강우 씨, 짐이 좀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와주세요.”

하선우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이강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뒤집은 후에 비어버린 속을 비굴함과 아부로 가득 채웠다.

하선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긋 웃으며 가방을 짊어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아무렴요. 혹시 저를 그냥 빼고 가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여기 혼자 남으면 오히려 마음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러나 이강우는 누가 보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게 30여 분 전의 이야기.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됐는데 좋게 생각하자.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큰일은 없겠지. 멤버가 이 정도인데, 큰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되지.’

이강우는 자신과 함께 이동하는 네 명의 멤버를 바라보며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달랬다.

분명 몬스터 경보가 떨어진 산을 타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보통 몬스터가 등장할 경우 한 마리만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진 모래시계문은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토해내니까.

하지만 그래도 유적보다는 안전했다. 유적은 여러모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지만, 현실은 아니다. 첨단 장비의 도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또한 지금 멤버들은 분명 실력자였다.

일단 하선우가 있다. 5서클 마법사인 그는 매우 강력한 마법사다. 여기에 그는 엄청난 베테랑이다. 즈믄나래 초창기 멤버로, 즈믄나래 타이틀을 달고 먹은 짬밥은 안중현보다 많다.

여기에 그를 돕기 위해 선별된 마법사는 다름 아니라 이우희다. 이강우가 직접 호흡도 맞춰봤던 사람이다. 분명 이강우가 이우희를 구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마나 서클만 3개를 가진 허접한 마법사라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불꽃꼬리 사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스 웨폰으로 작은 얼음폭탄을 만들어 새총으로 날리는 건 정말 훌륭했다. 위력적이고, 참신하며,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실력은 괜찮다.

남은 두 명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하선우 밑에 소속된 총꾼들이고, 그들을 보는 순간 이강우에게 느낌이 왔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르게, 정말 마법사를 도와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잡아본 백전노장의 느낌이. 실력도 실력이지만, 경력 역시 이강우와 비교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적지 않은 숫자의 군인들과 마법청 소속 마법사들 역시 주변 지역에서 움직이고 있다. 필요하다면 그들과 합류도 가능하다. 아니, 그들이 몬스터를 잡아주는 화살 역할이다. 하선우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사냥감을 도발해서 대령시키는 것, 거기까지다.

죽을 위험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낮다.

사실 몬스터가 꽃등도마뱀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전력이 투입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꽃등도마뱀…… 확실히 신출귀몰하네.’

꽃등도마뱀은 덩치는 크지만, 위장능력이 대단하다. 눈이 안 좋은 사람은 근처에 있어도 놈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또한 눈만 속이는 게 아니라 체온도 속인다.

몬스터의 위치를 파악할 때 가장 쓸모 있는 건 열 감지 카메라다. 몬스터들은 워낙 덩치가 크니까, 숲속이나 땅속에 숨어도 열 감지 카메라를 이용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찾을 수만 있으면 그 이후는 어렵지 않다. 현실에서 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골치가 아플 정도니까.

그런데 꽃등도마뱀은 체온마저 속인다. 열 감지 카메라가 소용이 없다. 남은 건 이강우가 가진 마법 중 하나인 분석 마법 같은 마법을 이용하는 건데, 심지어 녀석은 분석 마법까지 속인다. 마력을 감추는 재주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문제다.

사실 주요 시설, 대형 시설, 도심지 반경 10킬로미터에 몬스터가 등장하면 경계 상태가 올라가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그 범위 내에 등장해도 금방 처리 가능하다.

하지만 꽃등도마뱀이 가진 능력은 여러모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다. 오죽하면 군수업체들이 꽃등도마뱀을 유인하기 위한 특수한 가스를 만들었을까? 꽃등도마뱀은 전 세계적으로 처리하기 짜증 나는 몬스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법청과 국방부가 자문을 요청한 것이고, 이쯤 되자 이강우는 오히려 궁금증을 품었다.

‘이런 꽃등도마뱀을 도발한다고? 도발도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선우는 그 국방부 높으신 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나서서 꽃등도마뱀을 도발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럼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즈믄나래 팀, 그곳부터는 경계지역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소형 이어폰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다.

경계지역.

꽃등도마뱀이 7분 전에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이 주변 내에 꽃등도마뱀이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꽃등도마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 순간 하선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데려온 총꾼 두 명이 조끼에 걸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어?’

그 광경을 본 이강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고.

퍼엉!

총꾼 두 명이 꺼낸 것들, 특수하게 제작된 최루탄을 터뜨리는 순간 이강우는 기겁했다.

‘미친 새끼들! 뭐 하는 거야?’

바로 코앞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이강우가 기겁하는 건 당연했다. 나름 전직 직업군인인 그가 최루가스의 맛을 모를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응?’

그런데 그 순간 이강우의 눈앞에서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뭐지?’

최루가스가 퍼지지 않은 채, 하선우의 앞에서 구름처럼 둥둥 떠 있었다.

하선우, 그가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 * *

마법은 정말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다루기 어려운 속성이 있고, 상대적으로 쉬운 속성이 있다. 불과 얼음 속성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편에 속한다. 여러모로 직관적이니까. 반면 바람 속성은 다루기 어려운 편에 속한다. 그 존재를 정확하게 느끼고 인지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하선우는 그런 바람 속성 마법의 스페셜리스트다. 타고난 재능과 계속된 훈련 그리고 실전을 통해 쌓은 경험으로, 그는 바람 속성 마법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선우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아주 독특한 방향으로 개발했다.

“마음 같아서는 효과적인 독을 잔뜩 넣고 싶지만, 산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으니 독한 놈들은 제외하고 블렌딩을 해야겠군. 위험하지 않은 것들 좀 꺼내주세요.”

자신이 마법으로 만들어낸 바람 마법에, 최루가스는 물론 마비나, 신경이상 혹은 목숨을 위협하는 독을 섞었다. 여러 종류의 독과 가스를 블렌딩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독으로 된 바람을 만드는 것, 그게 그가 찾은 방법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렇게 만든 독으로 된 바람을 자유자재로 조작한다. 난전 속에서도 정확히 타깃에만 영향을 준다. 그래서 견제의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이다. 난전 속에서도 표적을 짜증 나는 정도가 아니라 미쳐 버리게 만드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대상에게 치명적인 대미지를 주기도 한다. 최루가스는 애교로 만들 정도로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독가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물며 그런 독가스를 대상의 상처 부위, 호흡기관에 직접적으로 주입한다면?

섬뜩한 수준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최루가스 베이스에 마비독을 좀 섞고, 환각도 좀 보게 해주고, 녀석이 좋아하는 달달한 향도 좀 첨가하면 좋겠지. 델빗 애들 제품도 좀 섞자고요.”

여러 종류의 가스를 섞는 블렌딩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신기했다. 마치 허공에 여러 색깔의 구름을 붓는 느낌. 구름이 점차 커졌고, 나중에는 그 크기를 가까이에서는 육안으로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정말 구름 크기가 됐다. 그렇게 커졌음에도 하선우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자신이 만든 특제 가스를 조금도 누출시키지 않았다.

이윽고 블렌딩 작업이 끝났을 때.

“자, 그럼 어디 한번 도발 좀 해봅시다.”

하선우가 자신이 만든 가스를 넓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 * *

하선우가 만든 가스는 그가 쓰는 바람 마법에 따라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가스는 하선우를 비롯해 남은 네 명에게는 조금의 영향도 주지 않았다. 피부에 닿지도 않았다. 마치 가스가 네 명을 무서워서 피하는 것 같았다.

‘대단한 집중력과 컨트롤이군.’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강우가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정밀한 컨트롤을 하는 건 훈련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하선우는 세심해야 할 부분은 세심하게,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과감하게 나갔다.

가스를 크게 크게 퍼뜨렸다. 굳이 구석구석까지 가스가 닿을 수 있도록 괜한 신경을 쓰진 않았다. 애초에 표적은 몸길이가 최대 10미터까지 되는 거대한 도마뱀 아닌가? 그런 도마뱀이 나무와 나무 사이, 돌과 돌 사이에 숨어있을 리 없다.

가스는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졌고, 그 가스는 모습을 감춘 채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던 꽃등도마뱀을 자극했다.

“예압.”

자신의 가스에 꽃등도마뱀이 닿는 걸 하선우가 포착했다.

하선우가 눈빛을 보냈고, 그 눈빛을 받은 모든 이들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하선우의 도발은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꽃등도마뱀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꽃등도마뱀이 움직이는 순간, 모든 이들이 움직였다.

꽃등도마뱀을 잡기 위해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이들이 앞다투어 움직인 것이다.

도발이 시작된 이후 몇 분이 더 흘렀을 때 교전이 시작됐다.

“찾았다!”

“빌어먹을 새끼, 드디어 찾았네!”

꽃등도마뱀을 발견한 군인들은 이제까지 고생에 대한 화풀이를 위해 총구의 방아쇠를 꾹 눌렀다.

투투투!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토해낸 소총의 탄환은 꽃등도마뱀의 가죽을 뚫진 못했다.

반면 다행인 점은 지금 이곳에 모인 화력 중에 소총의 화력은 애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녀석이 포인트로 이동한다. 모두 준비하라.

전차까지 대기 중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기관총, 유탄발사기같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무기들이 준비되지 않았을 리 만무. 꽃등도마뱀이 정해진 포인트에 도착하면, 이미 대기 중인 큼지막한 총들이 소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탄환을 토해낼 것이다.

여기에 마법사도 있는 상황!

계속해서 꽃등도마뱀을 견제하기 위해 꽃등도마뱀과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하선우, 그런 하선우의 근처에 딱 붙어있는 이강우는 숲을 가득 채우는 격렬한 총성에 혀를 내둘렀다.

‘도축 같은 소리 하네, 도축할 찌꺼기라도 남으면 다행이겠네.’

이 정도 화력을 퍼붓는데, 도축할 고기가 남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애초에 내가 여기 온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네.’

솔직히 이렇게 되면 이강우가 여기에 온 보람이 없어진다. 도축을 하러 왔는데, 치즈보다 더 심하게 구멍이 뚫린 몬스터 사체를 도축해서 뭘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상황을 돌려보면, 하선우가 이강우를 도축자로 자문단에 포함한 건 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인간도 나한테 관심이 있나?’

이강우는 즈믄나래 소속이며 동시에 안중현 팀 소속이다. 즈믄나래 소속 마법사라고 해도 유적 사냥에 이강우를 안중현의 허락 없이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를 위해 나서야 하는 자문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자문단을 구성하는 데 이강우가 포함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자문단 같은 구실이 아니라면 하선우가 이강우를 사적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부릴 수 있는 일은 없다.

물론 달리 생각하면, 하선우처럼 아쉬운 것 하나 없는 인간이 입사 경력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이강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웃긴 노릇이라면 웃긴 노릇이다. 그냥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이강우를 포함한 것인데, 이강우가 괜한 착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착각이겠지.’

어쨌거나 꽃등도마뱀의 도발에 성공하고, 녀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집중사격이 시작된 이상 사냥은 끝이다. 이제 남은 건 상황이 정리되면 마법청 및 국방부 관계자랑 인사 좀 하고, 헬기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추가 수당 받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냥 내가 예민했던 거야. 당장 짐꾼으로 부릴 만한 인간이 필요했고, 내가 운 나쁘게 걸렸을 뿐이야.’

후우, 이강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까지 고민과 근심과 걱정이 괜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런…….”

하선우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순간 하선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자, 꽃등도마뱀의 주변을 맴돌며 녀석의 신경을 극한까지 긁어내던 가스가 사라졌다. 동시에 하선우가 이우희를 향해 말했다.

“도발이 갑자기 안 먹혀.”

“응?”

도발이 안 먹힌다?

그 말에 이우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은 곧바로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선우가 말을 이어갔다.

“이제부터 녀석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할 거야.”

유인 방법은 두 가지다.

유혹 혹은 도발.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전부 안 먹힌다면, 녀석은 다시 본래 목적대로, 북쪽을 향해 움직일 터.

그러다가 도중에 녀석의 존재를 다시 놓치면? 더 이상 도발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사건이 커질 것이다.

그러니까.

“녀석이 이목에서 사라지기 전에, 지금 위치를 파악한 상태에서 확실하게 제거해야 돼.”

그 전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놈을 제거해야 한다.

* * *

‘씨발.’

하선우가 이우희에게 꽃등도마뱀을 자신들이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강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짧고 굵게 씹었다. 그렇게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면서, 지금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고민과 걱정, 근심도 같이 삼켜 버렸다.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불만은 통용되지 않는다. 하선우가 내린 결정에 이강우가 왈가왈부할 자격이나 권한 따위는 없고, 그럼 전투는 피할 수 없다. 이강우가 할 수 있는 건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준비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강우의 목숨을 대신해 주진 않으니까.

비단 이강우만 그런 건 아니었다. 하선우가 시키기도 전에, 그가 데려온 총꾼들이 가지고 온 배낭을 바닥에 놓고, 전투를 위한 준비를, 무장을 시작했다.

이강우 역시 그들과 호흡을 맞췄다. 가방을 메는 대신 총대를 멨다.

“탄창하고 수류탄 좀 주십시오.”

부족한 무장은 다른 총꾼에게 받아냈다.

“여기 있네.”

그 둘은 달라진 이강우의 눈빛을 보는 순간 군말 없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이강우는 능숙한 솜씨로 몸 곳곳에 무기를 채웠다.

과한 무장은 필요 없었다.

‘탄창, 수류탄…… 어차피 내가 화력으로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니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어차피 이강우가 직접 정면에서 꽃등도마뱀을 상대하는 일은 없다. 이강우의 역할은 혹시 모를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마법사를 돕는 것, 혹은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꽃등도마뱀의 시선을, 주의를 끄는 일, 그게 전부다.

때문에 최소한의 무장, 꽃등도마뱀의 신경을 긁을 수 있을 정도, 시선을 끌 수 있는 정도, 몇 초 정도를 벌 수 있을 정도의 무장이면 충분했다.

‘후우.’

무장을 마친 이강우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꽃등도마뱀하고 싸우는 날이 기어코 오는구나.’

꽃등도마뱀.

은신의 귀재다. 열 감지기에도 걸리지 않고, 거대한 주제에 소리 없이 움직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택 레코드에 따르면…… 몸에서 뿜어지는 마력 때문에 GPS 추적기를 붙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특수한 향이나 발광 페인트를 붙여도 녀석이 가진 은신 능력이 발동할 때는 효과가 사라진다고 하지?’

하선우가 보여준 스택 레코드에 기록된 꽃등도마뱀의 은신 능력은 훨씬 더 대단했다. 열 감지기만이 아니라, 녀석은 특수 제작된 향이나 발광 페인트, GPS 추적기도 완벽한 건 아니지만 무용지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일반 짐승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

그러나 마법이 존재하는 모래시계문 너머의 세계, 유적에서 온 놈인데 뭐든 가져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니까 몬스터 아닌가?

어쨌거나 꽃등도마뱀은 총꾼들에게 악몽 그 자체다. 언제나 제 몸으로, 제 목숨으로 유적에 숨어있는 위기를 감지해야 하는 총꾼들에게 있어 꽃등도마뱀은 재도전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진짜 위험한 놈을 만났어.’

이강우는 총꾼으로 지내면서 꽃등도마뱀을 만난 적이 없다. 이강우는 그 사실을 이제까지 행운으로 여겼다. 물론 애초에 하이에나 크루 소속이었던 이강우가 7등급 이상의 유적을 사냥해본 경험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게 이유지만, 만약 이강우가 유적에서 꽃등도마뱀을 만났다면, 녀석의 등에 피어난 여러 종류의 꽃들은 이강우의 조화(弔花)가 됐을 것이다.

오늘도 다를 건 없다. 중간에 얼빠진 짓을 한다면, 오늘이 기일이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언제나 그렇듯, 마법사가 아닌 총꾼에게 몬스터는 언제든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포식자다.

‘제정신 차려야지.’

아직까지는 몬스터가 포식자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 * *

우거진 나무, 곳곳에 자리를 잡은 큼지막한 돌덩이, 경사진 비탈길. 여러모로 험난하기 그지없는 그 산을 8미터 몸길이의 거대 도마뱀이 제멋대로 가로지르는 모습은 공포를 넘어 장관이었다.

신기한 건 그 도마뱀이 나무에 닿을 때마다, 돌 위를 지나갈 때마다, 땅에 닿을 때마다 제 몸의 색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고장이 나서 기능이 절반 밖에 나오지 않는 투명망토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헉헉…….”

그런 도마뱀의 뒤를 쫓는 무장 군인들의 입에서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숨소리가 나왔다.

‘미치겠군.’

모래시계문의 등장 이후,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특수부대가 조직됐고, 개중에는 산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특수부대도 있었다. 지금 거대 도마뱀을 쫓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매일매일, 정말 미쳐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무장을 한 채 산을 타는 훈련을 하며, 이제는 산에서 마라톤을 해도 될 법한 체력을 가지게 된 이들임에도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꽃등도마뱀을 찾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녀석이 산을 타는 모습은 마치 조약돌 사이를 물줄기가 비집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알파, 왼쪽으로 틀어 이동하라.

그나마 이제까지 꽃등도마뱀을 놓치지 않고 추적이 가능했던 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30여 대의 드론을 비롯한 여러 감시 장치와 지휘부의 도움 덕분이었다. 어지간한 추적 장치들은 통하지 않는 놈이니까.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이를 콱 물었다.

개중에서 몇몇은 어렴풋이 보였다 사라졌다는 반복하는 꽃등도마뱀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투투투!

방아쇠를 당겼다.

“쏴! 위치를 계속 파악해!”

거친 총성이 숲을 울렸다. 쉴 새 없이 울렸다.

“저기군.”

하선우 팀은 그 총성을 쫓아 움직였다.

하선우는 움직이면서 자신이 착용한 귀걸이와 팔찌, 목걸이 따위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하선우가 멋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연히 그런 이유로 액세서리를 바꾸는 건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대체 몇 개를 가지고 다니는 거야?’

상황에 맞게, 견제가 아니라 사냥을 위한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강우 입장에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다.

‘저게 3서클짜리라면…… 주머니에 타워팰리스를 넣고 다니는 셈이네.’

마법 아티팩트를 많이, 다양한 종류를 가지고 다녀서 나쁠 건 없다. 다양한 마법을 쓰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어쨌거나 마법 아티팩트는 마력만 주입하면 작동하니까.

그러나 여러 종류의 마법 아티팩트를 가진 마법사는 찾기 힘들다. 일단 가격이 비싸다. 동시에 3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는 물량이 많지 않다. 여기에 각 정부는 자국 내의 마법 아티팩트를 관리한다. 3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를 가졌다면 일정 기간마다 신고를 해야 한다. 돈이 있다고 제멋대로 거래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런 마법 아티팩트를 여벌로 가지고 있는 하선우의 존재감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강우가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하선우를 바라봤다. 그 순간 하선우가 정지 신호를 냈고, 모두가 제자리에 멈췄다.

하선우는 곧장 이강우를 바라봤다.

‘헉.’

이강우가 또르르,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왠지 머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강우에게 하선우가 질문을 던졌다.

“마법 걸려 보신 적 있습니까?”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이강우가 아닌 이우희였다.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지고, 얼굴이 조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표현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양이다.

반면 이강우는 고개만 갸웃했다. 하선우는 그런 이강우를 보며 말했다.

“이강우 씨, 오늘 마법에 한번 걸려 봅시다.”

말과 함께 하선우가 오른쪽 팔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꽃등도마뱀의 이동 경로는 북쪽으로 곧습니다. 그러니 녀석을 앞질러서 녀석의 행동을 물리적으로 막을 겁니다. 녀석이 잡히는 순간 제가 확실하게 일격을 날리겠습니다.”

그 말에 이강우가 곧장 질문했다.

“녀석을 어떻게 앞지릅니까?”

당연한 질문.

그 말에 하선우는 자신이 만지작거리던 팔찌를 흔들며 대답했다.

“헤이스트 마법을 쓰겠습니다.”

* * *

헤이스트 마법.

버프 마법 중에 유명도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이다.

사실 헤이스트 마법은 특정 마법 하나를 가리키는 마법이 아니었다. 대상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면 헤이스트 마법으로 분류된다. 동시에 자동차처럼 마법 등급도 가지각색이다. 서클이 올라갈수록 당연히 효과가 달라진다. 1서클짜리 헤이스트 마법이 경차라면, 5서클짜리 헤이스트 마법은 F1 레이싱카 수준이다.

이런 헤이스트 마법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타입은 육체 스펙 자체를 강화해주는 타입이다. 육체 스펙이 강해지니 당연히 이동속도도 빨라진다. 두 번째 타입은 몸을 가볍게 해주는 타입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헤이스트 마법의 개념에 가깝다. 반대로 전자 타입의 마법이 가격은 더 높다.

어쨌거나 헤이스트 마법은 생각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육체 능력을 강화해주니까. 때로는 공격 마법보다 비싸다. 당연히 보통 마법사라면 살상력이 떨어지는 헤이스트 마법보단 공격 마법을 택하며, 혹여 헤이스트 마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법을 총꾼을 위해 써주는 마법사는 없다.

때문에 이강우는 당연히 헤이스트 마법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그 경험을 맛볼 기회가 생겼다.

하선우가 이강우에게 헤이스트 마법을 걸어주는 순간 이강우는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마치 중력이 약해진 느낌. 어색한 느낌은 조금 있었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어떻습니까?”

하선우의 물음에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사실 몸이 가벼워졌다고 순수한 속도 자체가 빨라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지면, 어색함 때문에 더 느려질 수도 있다. 만약 100미터 경주를 하는 거라면, 헤이스트 마법이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100미터 경주가 아니라, 산을 타는 거다. 여기서는 몸이 가벼워지는 게 유리하다.

“할 수 있습니다.”

금방 헤이스트 마법으로 줄어든 몸의 무게감에 적응한 이강우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선우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반면 이우희는 꽤 긴장된 눈빛으로 이강우를 바라봤다. 긴장 속에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곧바로 그녀는 하선우를 바라봤다. 하선우가 이우희에게 짧게 눈치를 줬다.

무언의 대화.

그 무언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하선우는 이우희에게는 반지 하나를, 이강우에게는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 한 상자를 줬다. 손잡이가 달린 상자였다.

“뭔지 아시죠?”

“마법 무기군요.”

“사용법은 땅에 대고, 여기 그림이 그려진 부분을 마법이 적용될 부위에 향하게 한 채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됩니다.”

마법무기.

마나스톤을 정제해 만든 마력을 필요한 순간 마법 아티팩트에 주입해서 마법을 발동시키는 무기. 마력이 없는 일반인들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사용법은 소화기를 다루는 수준이다. 어려울 건 없다. 이강우도 몇 번 써봤다. 물론 한 번 쓸 때 비용이 적지 않다. 마나스톤이 비싼 건 다 이런 마법무기 때문이니까.

“녀석을 앞질러서 이동하고, 제가 신호를 주면 이강우 씨가 먼저 마법을 작동합니다. 그럼 땅이 무너질 겁니다. 그 후에 이우희, 네가 늪지옥을 쓰면 되고.”

땅을 뭉개는 디그 마법과 땅을 늪으로 바꾸는 늪지옥 마법.

두 가지 마법을 이용해 꽃등도마뱀의 재빠른 움직임을 멈추는 게 하선우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꽃등도마뱀을 멈춘다면.

“그때 내가 마무리하겠습니다.”

하선우가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 * *

‘와우!’

이강우는 한 번 도약으로 3~4미터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자신의 상태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진짜 끝내주네?’

헤이스트 마법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가벼운 도약에도 몸이 붕 떴다. 가파른 비탈길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산을 타는 게 마치 평지를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재미마저 있었다.

반면 이우희는 그런 이강우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여전히 의심이 남은 눈빛을 품은 채로.

그렇게 그 둘은 헤이스트 마법의 도움과 지휘부가 실시간으로 짜준 루트를 통해 꽃등도마뱀을 금방 앞지를 수 있었다.

그렇게 꽃등도마뱀을 앞질렀을 때.

-대기.

지령이 나오는 순간 그 둘은 멈췄다.

이강우와 이우희가 서로 몸을 댄 채 숨을 죽였다. 이강우는 자세를 낮추면서, 가지고 온 마법무기를 세팅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강우는 몰래.

‘분석.’

분석 마법을 썼다.

세상이 바뀌었고, 그런 이강우의 시야 속에 거대한 마력 하나가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숫자도 사라졌다 생기기를 반복했다.

‘어디 보자…….’

이강우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멀찌감치 떨어진 그 숫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끄응.’

숫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했고, 결정적으로 숫자가 여러 개였다. 꽃등도마뱀의 몸에도 숫자가 있었고, 녀석의 등에 난 꽃에도 숫자가 있었다. 녀석의 등에 난 꽃이 수십 송이가 넘어가니, 수십 개의 숫자가 겹쳐 있는 모양새. 제대로 숫자를 구별하는 건 지금 이강우의 눈으로는 불가능했다.

‘젠장.’

그때.

“당신 마법사예요?”

이우희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강우가 휙! 고개를 돌려 이우희를 바라봤다.

크게 놀란 눈으로.

“예?”

“마법사가 아니면 헤이스트 마법이 먹힐 리가 없잖아요?”

“예?”

그 순간.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질문을…….’

이강우의 머릿속에 경고등 하나가 반짝였다.

그러나 그 둘이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카운트다운. 9, 8…….

꽃등도마뱀은 정말 빠른 속도로, 이강우와 이우희가 있는 방향 쪽으로 움직였다.

그 둘은 숨을 죽인 채 정면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 덕분에 그 둘은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꽃등도마뱀, 그 거대한 덩치를 가진 놈이 정말 아무런 낌새도 없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과정을, 심지어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데 시야에서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미치겠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경고등이 울렸지만, 이강우는 그 경고등을 애써 무시했다.

눈앞에 집중했다.

-제로!

그리고 지령이 떨어지는 순간, 이강우는 마법 무기를, 디그 마법이 걸린 무기에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손잡이가 쑥 빠졌다.

그 순간.

쿠쿠쿠!

땅이 울기 시작했다. 산사태가 일어나기라도 하려는 듯.

그때 이우희가 하선우에게 받은 마법 아티팩트에 마력을 주입했다.

흐물흐물!

떨리던 땅이 끈적끈적한 늪으로 변했다. 이 모든 변화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났고.

첨벙!

꽃등도마뱀은 마치 호수에 빠진 것처럼, 늪 위에 빠졌다.

키이이이!

이제까지 거듭된 총알 세례, 폭탄 세례에도 이렇다 할 울음을 토해내지 않았던 꽃등도마뱀의 입에서 처음으로 울음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심으로 당황한 모양.

그리고 그 순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선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

하선우가 제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를 곧게 폈다. 손으로 총 모양의 제스처를 취했고, 검지 끝으로 멀리 떨어진 꽃등도마뱀에게 총구를 겨누듯 겨누었다. 그런 하선우 옆에서 저격용 스코프를 들고 있는 총꾼 한 명이 스코프를 통해 꽃등도마뱀을 바라보며, 하선우의 팔을 움직여 조준을 도와줬다.

이윽고 조준이 끝났을 때.

딸깍!

깔끔한 소리와 함께, 하선우의 손끝에서 바람줄기가 발사됐다.

* * *

하선우의 손끝을 떠난 바람줄기는 바람을 뚫는 것도 가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을 타고 단숨에 꽃등도마뱀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꽃등도마뱀의 머리통을 관통했다.

그 광경을 지금 이 옥갑산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던 이강우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제까지 위력이 센 마법은 제법 봤다. 그러나 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은 처음이었다.

‘아니, 견제의 대가라면서…….’

이런 위력을 가진 마법을 쓸 수 있는데, 견제의 스페셜리스트라니…… 이 정도 위력도 고작 견제밖에 안 된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정말 몬스터와 정면승부를 하는 마법사들은 어떤 괴물이란 말인가?

동시에 군대가 나서도 쉽게 잡지 못하던 몬스터를 단숨에 해치우는 하선우의 실력에 소름은 곱절이 됐다.

‘이런 마법사를 외부 단체에 둬야 하다니…… 뭐, 이게 현실이지.’

사실 정부도 마음 같아서는 길드 같은 건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냥 마법사들 전부를 강제로 마법청이나 국방부 소속으로 만들고, 전투에 투입하고 싶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만무하다. 정말로 정부가 억지로 마법사를 잡아두고 몬스터 전투에 투입했다가는 마법사들이 제멋대로 국외로 나갈 것이다. 그게 길드가 탄생한 이유 중 하나다. 마법사를 정부가 강제로 손에 쥐고, 강제로 움직이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반대로 말하면 어떻게 보면 군대만큼 강한 전력이 그저 법이라는 목줄만 채워진 채 세상에 풀어진 모양새다.

‘이제 몬스터보다 마법사가 위험한 시대가 왔네.’

이강우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씁쓸한 미소는 이강우의 눈앞에서 좀 더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숫자 앞에서.

‘어?’

다섯 자리의 숫자 앞에서.

‘어!’

눈 녹듯 사라졌다.

이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여러 숫자들 사이에서 유난히 뚜렷하게 보이는 숫자.

[12,032/12,500]

‘1만 2천 포인트?’

이 순간 이강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저거, 어떻게든 먹어야 돼!’

* * *

꽃등도마뱀이 잡히는 순간 주변에 있던 군인들과 마법사들이 꽃등도마뱀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크네.”

“대체 이걸 어떤 마법으로 잡은 거지? 수류탄에도 몸에 생채기만 생기던 놈이…….”

“역시 즈믄나래답네. 마법사 실력이 달라.”

오늘 하루를 식겁하게 만들었던 몬스터를 잡았다. 긴장이 풀리지 않을 리가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리가 없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 속에서 이강우는 가지고 온 도축용 장비들을 스윽, 스윽!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릴렉스.’

겉으로 보기엔 담담한 모습, 도축을 앞둔 도축업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강우는 지금 터질 듯한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괜히 긴장하지 마. 저 꽃이 그렇게 가치가 있다는 걸 티 내지 마. 무조건 담담하게. 저건 쓰레기라고 생각해.’

어마어마한 것을 발견했다.

보물이다.

돈으로 따질 순 있겠지만, 적어도 이강우가 지불할 수 없는 액수의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앞에 두고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일 터.

“자, 그럼 마나스톤을 채취하겠습니다.”

이강우가 나서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강우의 행동을 주목했다. 꽃등도마뱀을 해체하는 작업은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작업일 테니까.

여기서 이강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꽃등도마뱀의 피부터 뺐다. 마음 같아서는 등에 올라 그 대단한 마력을 가진 꽃을 몰래 챙기고 싶었지만, 그러면 의심을 받는다.

토혈 작업은 쉽지 않았다. 꽃등도마뱀의 가죽은 매우 질겼다. 실제로 가죽을 자르기 위해 칼이 아니라 톱을 썼다. 그마저도 자르는 도중에 톱날의 이빨이 나갈 정도였다.

보던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저러니 총알이 안 막히지.”

“저걸 총으로 잡으려면 중기관총 정도는 가져와야 한다니까.”

토혈 작업을 하는 데에만 10여 분이 걸릴 정도. 심지어 덩치가 너무 큰 탓에 피를 보다 쉽게 빼기 위해 몸을 거꾸로 들어 올리는 작업은 할 수도 없었다.

‘좋은 고기를 얻긴 힘들겠어.’

아마 오늘 도축을 해도, 그 고기를 요리해서 먹으려면 적지 않은 수고가 들 것이다. 피 냄새를 제거하는 게 재료 손질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니까.

여기서 이강우는 자연스럽게.

“피가 빠지는 동안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제거하고.”

꽃등도마뱀의 등으로 올라갔다. 마치 꽃밭 같은 그곳에서 이강우는 이삭 줍는 아낙네들처럼, 꽃을 잘라냈다. 꽃등도마뱀의 등이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수십 송이의 꽃을 제거한 이강우.

그때 누군가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군인 한 명이 말했다. 그 말에 이강우는 태어난 이후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연기를 했다.

“아닙니다. 이런 일 하려고 여기 왔는데요. 구경만 하셔도 됩니다.”

‘미쳤냐? 이게 어떤 놈인데 네놈 손에 맡겨?’

절대.

꽃을 치우는 일만큼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이강우는 곧바로 꽃을 치웠다. 꽃을 치우면서 자신이 눈여겨봤던, 뇌리에 각인했던 그 꽃송이를 슬그머니 가슴 안으로 집어넣었다. 타짜 뺨치는 솜씨.

‘미치겠군.’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의 심박 수는 태어난 이후…… 마치 불사황제를 처음 봤을 때에 버금갈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두근두근, 그 소리에 이강우의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오케이.’

성공이다.

이강우는 자신의 품 안에 쏙 들어온 꽃송이의 존재감을 느끼며 숨을 돌렸다.

이 순간부터 이강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참고 있던 큼지막한 것을 보고 난 이후의 표정.

‘자, 그럼 잡아보자고.’

이제까지 억지로 담담한 연기를 했다면, 지금 이 순간 이강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꾼이 되어 도축을 시작했다.

도축 작업은 꽤 시간이 걸렸다. 이강우는 일단 마나스톤이 있는 부위부터 해체를 했다. 마나스톤을 꺼낸 후에는 하선우에게 건네줬다. 그 작업 이후에도 추가 작업은 한 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그 광경을 계속 봤다.

“대단하네.”

“저 큰놈을 저렇게 쉽게 자르다니. 보통 기술자가 아닌 모양이야.”

거대한 몬스터, 질긴 가죽을 가진 놈을 어쨌거나 잘라내는 이강우의 솜씨는 예술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하선우가 이강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강우는 지친 표정으로 힘겨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보다 손 좀 씻고 오겠습니다.”

말을 하는 이강우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힘이 들어서 떨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흥분감에 떨리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아마 이강우 본인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 *

두근두근, 두근두근.

‘미치겠네.’

손을 씻기 위해 적당한 위치로, 정확히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던 이강우의 두 손은 쉴 새 없이 떨리고, 가슴은 이미 미쳐 버렸다.

그리고 미칠 만했다.

‘1만 포인트…….’

최악의 하루가 되리라 생각했던 오늘, 이강우는 최고의 하루를 만들 기회를 손에 넣었다.

‘그래, 내 인생에도 꽃이 필 날이 와야지.’

물론 이강우 앞에 몇 가지 장애물이 남아있긴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이강우는 품에서 자신이 몰래 챙긴 꽃을 보는 순간 그 장애물들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웠다.

“후우.”

꽃송이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숨이 나왔다.

꽃송이의 생김새는 튤립과 비슷했다. 그런데 색깔이 신기했다. 검은색과 하얀색 물감을 대충 섞은 것과 비슷했다. 이대로 팔아도 괜찮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정도. 꽃잎의 질감은 감자 칩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먹으면 바삭! 하고 입에서 부서질 것 같은 느낌.

여러모로 신기한 모양이었다. 지구상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꽃.

유적에서 나오는 꽃이 맞다.

‘이런 건 본 적 없는데.’

제법 공부 좀 한 이강우의 기억 속에 이 꽃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어쨌거나 보통 놈은 아니다.

‘1만 2천 포인트.’

이 꽃이 품고 있는 마력은 7등급 몬스터가 품고 있는 마력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꽃이 마력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유적호롱꽃을 통해 눈으로 확인도 했다.

‘대체 무슨 꽃이지?’

단지 가진 마력의 양이 너무 크다. 그게 사실 이강우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어지간하면 그냥 먹는다. 당장 유적호롱꽃의 꽃밭이 눈에 펼쳐져 있다면, 이강우는 전부 먹어 치웠을 것이다. 다음 날 독 때문에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하지만 1만 2천 포인트라는 마력을 가진 꽃은 감히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독이 있을까?’

혹은 독을 품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솔직히 보통 사람은 돈을 주고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을 것이다. 이강우도 분석 마법으로 이 꽃이 가진 마력의 양을 몰랐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젠장.’

혹여 먹으려고 해도 정밀한 검사를 해 본 뒤에 먹겠지.

문제는 이강우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걸 즈믄나래로 가지고 가서 검사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이건 몰래 빼돌린 놈이다. 혹여 즈믄나래가 이 꽃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냥 가져간다면? 죽 쒀서 개를 준 꼴이다.

이 꽃은 여기서 이강우가 자기 깜냥으로 판단을 내리고, 처리해야 한다.

‘그래, 어차피 다른 사람 도움은 못 받아.’

그리고 이강우가 가진 지식과 능력으로 이 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내 머리로 고민해 봤자 답은 안 나와.’

지금 이 순간 고민은 그냥 시간 낭비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선택이다.

동전을 던지듯.

‘불꽃꼬리도 처먹고 무사했는데, 꽃송이 하나 먹는다고…… 그래, 죽진 않겠지. 불사황제, 네놈도 내가 설마 꽃 같은 걸 처먹고 죽는 걸 원치 않겠지? 안 그래?’

먹는다, 먹지 않는다,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될 뿐이다.

그리고 이강우가 꽃송이를 입 안에 넣었다.

바삭!

예상대로, 질감대로, 꽃송이는 이강우가 씹는 순간, 입 안에서 과자처럼 부서졌다.

꽃이 가진 강렬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강우의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강우의 눈앞에.

[12,032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마령화(魔靈花)를 섭취하셨습니다. 마나 서클의 빛이 밝아집니다.]

[1서클 개방에 성공하셨습니다.]

[새로운 마법 슬롯이 추가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만 2천 포인트 섭취!

1서클 개방!

새로운 마법 슬롯!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광경, 그 광경 앞에서 이강우가 보인 반응은…….

“우웩…… 콜록, 콜록! 으악, 무슨 맛이…… 이거 썩은 건가? 진짜 씨발…… 퉷퉷! 우웩!”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 맛본 가장 최악의 맛 앞에서 몸서리를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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