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즈믄나래
‘아!’
붉은 도포를 입은 사내. 그러나 사내라기보다는 괴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외모와 기세를 가진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꿈이구나.’
이강우는 그를 보는 순간,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꿈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눈앞의 괴물…… 불사황제를 바라보는 순간 심장을 가득 채운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이 펌프질을 할 때마다 온몸에, 손발 끝까지 공포가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공포심 앞에서 이강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다렸다. 이 공포로 가득 찬 시간이 끝나기를, 자신의 꿈이 끝나고, 자신이 깨어나기를. 숨죽인 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나 한없이 시간이 흘러도, 체감상으로 수십 일이 흐른 것 같음에도 꿈은 끝나지 않았다.
불사황제는 여전히 눈앞에 있었고, 심장을 가득 채운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 그 속에서 이강우는 결국 무너졌다. 숨을 뱉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소리 없이, 최대한 조용히 숨을 쉬려고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
‘헉!’
이강우의 세상이, 불사황제 야크센의 세상이 바뀌었다.
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넓은 평야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위를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이, 괴물들이 가득 채웠다.
끄아아아!
동시에 비명이 괴물과 괴물 사이의 틈을 채우기 시작했다. 괴물과 비명으로 틈 하나 없이 조립된 세상, 그 세상을 불사황제의 몸에서 뿜어진 검은 불길이 사정없이 파괴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검은 불꽃은 살아있는 벌레처럼 움직였다. 한 마리의 몬스터에 달라붙은 후 몬스터를 단숨에 먹어 치웠다. 먹어 치우자 검은 벌레의 몸집이 2배로 부풀었다. 벌레는 그렇게 몬스터들을 먹어 치우면서 삽시간에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어느 순간 대지가 검은 벌레의 세상으로 가득 찼다.
그 검은 벌레의 세상 위로.
푸드득!
날개 달린 괴물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이강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하늘 위에서 바람으로 만들어진 섬뜩한 외모의 개들이 날뛰면서 날개 달린 몬스터들을 난도질했다. 바람개에게 물어뜯긴 채 바닥으로 추락하는 몬스터들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닌 초라한 벌레처럼 보였다.
그 순간.
크오오오!
이강우의 등 뒤에서, 그 수준을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터졌다.
이강우는 너무나도 놀라서, 겁에 질려서, 몸이 굳어버려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의 심장은 두근두근, 흥분된 상태였다.
어마어마한 괴물이 등장했다. 이강우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놈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불사황제는 과연 무슨 마법으로 그 괴물을 무찌를까? 그에 따른 기대감이 이강우를 미치게 만들 정도였다.
그 순간 불사황제가 이강우를 향해 처벅처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강력한 힘이 만들어낸 절망적인 광경, 때문에 오히려 숭고하게까지 보이는 이 광경을 만든 주인이 이강우 앞에 섰다.
이윽고 거리가 지척이 되었을 때, 불사황제가 제 손가락으로 이강우의 이마를, 미간을 눌렀다.
푹!
그의 손가락이 이강우의 미간을, 두개골을 가뿐하게 뚫어냈고, 이강우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느낌…… 타인의 손가락이 자신의 뇌를 농락하는 느낌 앞에서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강우에게.
“탐욕에 충실하여 네 배를 채워라. 그리하면 이 모든 힘이 네 것이 될 것이다.”
불사황제가 말을 남겼다.
“네 힘으로 나의 숙원을 이룩할 것이다.”
* * *
“……이룩할 것이다.”
나지막한 잠꼬대와 함께 이강우가 눈을 떴다. 이강우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한 건 자신의 미간을 만지는 일이었다. 마치 이마에 강력한 꿀밤을 맞은 사람처럼 이강우는 제 이마를 쉴 새 없이 만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미간은 멀쩡했다. 찐득한 개기름이 잔뜩 있는 것만 빼면, 문제 될 건 없었다.
이강우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새끼, 그냥 말만 하면 되지, 꼭 그 지랄을 해야 해?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나?’
속으로 짧은 푸념을 내뱉은 이강우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베이스캠프 분위기는 잔잔했다. 이강우를 포함해서 총 네 명의 총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 명은 얼마 없는 커피를 홀짝이며.
“이번에 나가면 뭐 할 거냐?”
“일단 부모님께 선물이나 하나 하려고. 목돈 생겼으니까. 너는?”
“해외여행이나 다녀와야지.”
제법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안대를 착용한 채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라면 볼 수 없는 풍경. 언제 있을지 모르는 몬스터와의 전투,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긴장 상태를 유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긴장을 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이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그때로부터 나흘이 지났네.’
불꽃꼬리 사냥에 성공하는 순간 몬스터 사냥은 끝이 났다. 몬스터 사냥의 끝이 유적 사냥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몬스터 사냥이 끝났다는 건, 이제 마법 아티팩트를 찾는 작업이 시작됐다는 의미이니까.
물론 마법 아티팩트 발굴 작업도 쉽진 않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주어진 식량이 허락하는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마법 아티팩트를 발굴해야 한다. 의외로 마법 아티팩트 발굴 작업은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마법 아티팩트는 여러 곳에 숨겨져 있다. 땅이나 벽 뒤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단순한 보물찾기가 아니라, 유적을 해체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땅을 갈아엎고, 벽을 부수는 작업을 한다.
그래도 언제 어느 순간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는 몬스터 사냥에 비해서는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건 당연한 일.
물론 아주 소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불꽃꼬리를 잡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몬스터를 잡으면 마땅히 나와야 하는 마나스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불꽃꼬리의 경우에는 불꽃을 만드는 부분이 마나스톤이다. 쉽게 말하면 마나스톤이 라이터 몸통 역할이고, 그 마나스톤에서 불꽃이 계속 나오는 형태다. 때문에 불꽃꼬리를 잡을 경우 마나스톤만 남는다.
그런데 그 마나스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샅샅이 주변을 뒤져도 마나스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하루에 걸쳐 불꽃꼬리를 사라진 구역을 뒤졌지만, 놈이 도망칠 만한 비밀 공간이나 통로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이틀에 걸친 조사를 한 뒤에야 안중현은 불꽃꼬리 사냥 및 몬스터 사냥 종료 선언을 했다. 7등급 마나스톤이 아깝긴 했지만, 애초에 7등급 마나스톤보다 1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더 비싼 상황에서 7등급 마나스톤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강우는 꾀병을 부렸다. 죽는소리,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이틀 내내 베이스캠프에서 잠만 잤다. 그래도 나름 목숨을 건 활약을 한 덕분에 이강우를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또한 몬스터 도축이 본래 임무인 이강우가 더 이상 도축할 몬스터도 없었다.
그렇게 꾀병을 부리며 이틀을 보내고, 다시 추가적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이틀을 잠으로 보내다가 깨어난 게 지금이다.
이강우는 가볍게 몸을 푼 뒤에 슬그머니 제 뱃가죽을 쓰다듬듯 만졌다.
‘1억 원짜리 먹었네.’
꾀병을 부린 이유는 간단했다. 불꽃꼬리의 마나스톤을 먹은 게 다름 아니라 자신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먹는 순간 배 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 그리고 눈앞에 마력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뜨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후 마나스톤을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될 터. 그래서 꾀병을 부렸고, 효과는 좋았다. 이강우와 사라진 마나스톤이 연관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이강우는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미쳤지.’
지금 생각해도 분명 제정신으로 벌인 짓은 아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불꽃을 입 안에 넣는다? 입 안이 화상으로 엉망이 되는 건 그나마 운이 좋은 케이스다. 그걸 삼키기까지 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속이 탈 뻔했다. 불꽃꼬리 먹고 위장이 녹아서 사망하는 건, 아마 유적 사냥 역사에 길이 남을 우스꽝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점은…….
“쩝.”
‘맛은 진짜 끝내줬지.’
불꽃꼬리의 맛이었다.
뜨거움은 없었다. 먹는 순간 스스로도 당황했지만, 이후 입 안을 가득 채운 청량감에 더 놀랐다.
일단 입 안이 정말 시원해졌다. 차가운 걸 먹은 느낌이 아니라, 스케일링을 받은 느낌. 실제로 유적 생활 동안 제대로 된 양치질도 하지 못해 지저분한 입 안이 깨끗해졌다. 지금도 치아를 혓바닥으로 문지르면 뽀드득뽀드득 느낌이 날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의 뜨거움은 열기의 뜨거움이 아니라, 도수가 높은 술을 먹을 때의 화끈함과 비슷했다. 뜨겁다. 그러다 목구멍을 차고 올라오는 열기와 그 열기에 섞인 깊은 풍미는 과거 이강우가 먹어봤던 대만산 금문고량주를 먹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정도 도수가 제법 되는 술을 먹으면 속 쓰림 같은 증상이 생기기 마련인데 속 쓰림은커녕 속이 입 안처럼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에 이강우는 정말 인생에서 손꼽을 만한 쾌변을 보기도 했다. 속은 물론 장까지 깨끗해지는 느낌.
그야말로 약이었다.
이틀 동안 꾀병을 부렸지만, 실제로 그 이틀 동안 유적에 들어온 이후 가장 컨디션이 좋았다. 가장 컨디션이 좋은데 일부러 아픈 척, 당장 죽을 듯이 연기를 하는 게 고역이었을 정도.
물론 가장 큰 수확은 따로 있었다.
‘그보다 아무리 내가 마나스톤까지 같이 먹었다고 해도 한 번에 1만 포인트라니…….’
정확히는 9,324포인트.
작은 다람쥐로 변한 불꽃꼬리를 먹는 순간 1만 포인트에 가까운 마력을 섭취할 수 있었다. 7등급 몬스터 한 마리를 통째로 먹으면 섭취할 수 있는 마력 포인트가 1만 포인트라는 의미.
‘대충 계산해보면 7등급 마나스톤을 통해서는 약 5천 포인트 정도를 섭취할 수 있다는 건가?’
보통 몬스터의 마나스톤은 그 몬스터가 가진 포인트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니, 7등급 몬스터의 마나스톤은 5천 포인트 정도 나온다는 의미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이강우는 두 가지 궁금증을 풀었다.
하나는 마나스톤도 섭취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7등급 마나스톤의 마력은 대략 5천 포인트 정도 된다는 것. 이제까지 7등급 마나스톤을 분석 마법으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궁금증이 해결됐다.
더불어 이 두 가지 정보를 토대로 이강우는 대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7등급 마나스톤 하나면 브론즈북 하나. 정리하면 브론즈북 하나가 최소 5천만 원 정도 하는 셈인가?’
돈으로 마나스톤을 구매한 후에 마력을 섭취하는 방법은 이미 염두에 두었다. 문제는 역시 단가. 그런데 지금 그 단가가 대략적으로 산출됐다. 단가가 산출됐으니, 이제 전체적인 계산을 할 때.
‘일단 1서클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고.’
어쨌거나 최우선 목표는 마법보다는 1서클을 활성화하는 일이다. 1서클만 확보하면, 1서클 마법사만 되면 얼마든지 안정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실 이강우가 꿈꾸던 삶은 안락한 삶이다. 1서클 마법사가 되어 공무원이 된 후 안정적인 수입으로 번듯하게 사는 것, 더 이상 돈 걱정도 할 필요 없이 꾸준히 돈을 모아서 번듯한 집도 사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여동생 대학도 보내주고, 해외여행도 두어 번 가보고…….
그런 삶을 위해서는 1서클 마법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상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젠장.’
조금 전 이강우의 꿈이, 불사황제가 보여준 그 섬뜩하고 절망적인 풍경이, 불사황제가 보여준 힘이!
‘아주 날 가지고 노는군.’
이강우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강우, 그는 절대 편하게 살 수 있는 팔자가 아니었다.
* * *
총꾼 한 명이 땅에 묻혀 있는 황금 반지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분무기의 액체를 뿌렸다. 마나스톤을 정제해 뽑아낸 마력, 그 마력의 희석액이 황금 반지에 닿는 순간 반지가 아주 미세하지만 빛을 뿜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총꾼이 소리쳤다.
“아티팩트 발견했습니다!”
근처에서 삽질을 하던 안중현이 곧바로 삽질을 멈추고 총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황금 반지를 꺼냈다. 황금 반지를 손에 쥔 안중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거…….’
그 순간 안중현이 총꾼들에게 눈치를 줬다. 총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룸 밖으로 나갔고, 안중현이 반지를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착용했다. 마나 서클의 마력을 반지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쉬익!
안중현의 머리 위에서 등장한 반투명한 낫 한 자루가 거칠게 회전을 하며, 안중현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낫은 허물어진 벽에 깊고, 날카로운 흔적을 만들어냈다.
“윈드밀인가?”
윈드밀.
3서클 마법으로 바람 속성 3서클 마법 중에서도 위력과 효용성이 높아 인기가 많은 놈이다. 돈으로 따지면 못 해도 15억 원은 받을 수 있는 놈. 하지만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놈이다.
‘이것 하나로 본전이군.’
때문에 이 윈드밀 마법이 걸린 반지 하나만으로도 이번 유적 사냥은 이득이었다.
더군다나 반지 형태다. 마법 아티팩트는 여러 형태를 가지지만, 개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건 반지 형태다. 착용이나 소지가 매우 쉬우니까.
‘지금까지 발견된 마법 아티팩트는 총 다섯 개. 여기에 확보한 마나스톤의 개수를 합치면…… 투자금 대비 두 배 이상은 뽑았군.’
계산을 마친 안중현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거의 막판에 발견했어.’
불꽃꼬리를 사냥하고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식량도 거의 떨어지는 상황, 그야말로 끝물에 대어를 낚았다.
‘이강우, 녀석 덕분이군.’
만약 이강우가 없었다면 거두지 못했을 소득이다.
이강우가 이우희를 구했다. 더 나아가 그가 도축한 몬스터 고기 덕분에 유적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최소한 20일 정도를 더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이강우가 아니더라도 다른 도축 기술자인 천영수가 있었으니, 몬스터 도축이 이강우의 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유적 사냥에서의 효용성은 이강우가 낫다.’
이강우의 가치는 마법사 한 명 이상이라는 점이다.
특히 총꾼으로 그가 보여준 능력은 예상 이상이었다. 총꾼에게 전투 능력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과연 마법사를 얼마나 잘 보조하느냐, 그 점이다.
여러모로 탐나는 놈이다.
여건만 되면, 안중현은 이강우를 자기 소속으로 두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예전부터 들었다.
문제는 오직 하나.
‘왕지홍이 쉽게 녀석을 내 손에 쥐여줄 리 없어. 녀석도 몬스터 도축 기술자가 급하니까.’
왕지홍이다.
왕지홍에게 몬스터 도축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마법사가 아닌 그는 몬스터 도축 사업을 통해 자기 영역을 구축했다. 더 나아가 도축 기술자를 양성해 마법사에게 소개해주는 브로커 역할도 하고 있고, 그 과정을 통해 권력을 쥐었다.
이번에 왕지홍이 이강우를 안중현의 유적 사냥 파티에 넣은 것도 그 때문이다.
밑밥을 던진 거다. 이강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이적료를 지불하라는 의미.
더 나아가 왕지홍은 이후 이강우를 다른 마법사의 유적 사냥 파티에도 포함시킬 것이다. 파는 입장에서 여러 구매자와 접촉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더불어 왕지홍은 돈이 급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만석루 운영만으로도 매년 억이 넘는 돈을 번다. 그가 원하는 이적료는 돈이 아니다.
돈 외적인 것.
“흠.”
안중현이 손에 끼고 있던 황금 반지를 빼며 고민을 시작했다.
* * *
유적 입장 54일째.
“오늘로 유적 사냥을 종료한다.”
기름기로 번뜩이는 덥수룩한 머리칼을 뒤로 바짝 넘긴 안중현은 몸에서 썩 달갑지 않은 악취를 풍기며 좌중에 모인 이들에게 유적 사냥 종료 선언을 했다.
유적 탐색, 몬스터 사냥, 마법 아티팩트 발굴, 이 모든 과정의 종료를 알리는 선언이었다.
환호성은 없었다. 기쁜 마음보다는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심정, 오히려 힘이 빠졌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이대로 이미 발견한 출문을 통해 유적 밖으로, 세상으로 나가서 푹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안중현은 마무리를 허술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피로로 가득 찬 부하들을 보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식량이다.”
안중현이 말과 함께 전투식량을 꺼냈다. 그게 마지막 남은 식량이었다. 가지고 온 식수와 식량은 물론 이강우와 천영수가 도축해놓았던 몬스터 고기 역시 전부 떨어졌다.
더군다나 남은 전투식량은 4인분에 불과했다. 현재 유적에 남아있는 인원은 몬스터 사냥 종료 이후 죽은 총꾼 둘의 시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간 총꾼 한 명을 제외해서 열 명이었다. 절반씩 먹어도 두 명은 입맛만 다셔야 하는 양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으로 전투식량을 꺼낸 건 아니었다.
“땅을 파도록.”
이 전투식량은 의식을 위한 제물이니까.
푹푹!
안중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삽을 들고 있던 총꾼 두 명이 잽싸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숙련된 솜씨로 순식간에 사람도 들어갈 만한 공간을 파냈다. 안중현은 들고 있던 전투식량을 그 구멍 안에 넣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총꾼 두 명이 애써 파낸 흙으로 다시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모두가 말없이 지켜봤다. 이강우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평소라면 주머니를 어수선하게 만들었을 초콜릿이 손에 잡혔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았다. 전부 먹은 건 아니었다. 근처에 따로 땅에 묻어두었다.
‘이제야 끝났군.’
의식이다.
이런 식으로 유적에 식량을 남겨둔다면, 훗날 누군가 이 식량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을 품고 유적 사냥 마지막에 행하는 의식.
물론 유적 사냥을 하는 이들이 유적의 특성을, 모래시계문의 특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출문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유적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유적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 된다. 유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멸을 해도, 몬스터가 우글거려도 모래시계문은 출구 역할만 할 뿐, 더 이상 입구 역할은 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유적 사냥꾼들이라면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어중이떠중이, 돈 삼사백 만에 고용된 총꾼들도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다. 당연히 이렇게 식량을 묻어두고 간다고 해서, 다른 유적에서 그 식량이 등장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의식인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기대가 되고, 그 기대가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유적 사냥에 대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어주는 것이다.
“자, 그럼 출문을 통해 나간다.”
그렇게 유적 사냥이 종료됐다.
* * *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택시를 타고 10평 남짓한 원룸에 도착했을 때, 이강우를 반긴 건 두 달 가까이 빈집으로 남아있으면서 쌓인 먼지와 적막감이었다. 전등 불빛조차 초라한 상황 속에서 이강우는 덩그러니 홀로 놓인 매트리스 위에 편의점에서 사 온 것들을 던졌다. 과자, 초콜릿, 맥주, 소주, 삼각김밥, 샌드위치 따위들…… 유적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들을 전부, 편의점에 있는 모든 것들을 쓸어 오듯 사 왔다.
그러나 이강우는 곧장 배를 채우기보다는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향한 후에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을 바라봤다. 이강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마나 서클을 바라봤다. 유적 사냥을 떠나기 전과 다르게 고리 하나의 절반이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강우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으로 몇 시간 전 안중현과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제안이 왔다.’
낌새는 일찍부터 느꼈다. 안중현이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부하로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러나 안중현은 유적 사냥이 끝난 이후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유적 사냥을 마치고, 이강우가 준비된 콜라를 귀신에 홀린 것처럼 입에 넣다 목구멍을 벅차오르는 탄산에 표정을 찌푸릴 무렵에 안중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이강우에게 제안을 했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정식으로 자신의 조직에 들어와서 부하가 되라고.
물론 즈믄나래라는 자신의 소속을 밝히진 않았지만, 안중현은 이강우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강우 입장에서 기다리던 제안이었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하면 기다리긴 했지만 그리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다.
‘아주 사람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는군.’
생각이 있냐, 의중이 있냐, 마음이 있냐? 그런 식이 아니라 안중현은 그냥 섭섭지 않게 대우해줄 테니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강우의 의사는 아무래도 좋다는 거다.
이런 대우를 받았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물론 안중현 얼굴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좋게 평가해줘서 고맙다고, 허리까지 숙였다. 거기서 굳이 자아실현과 자존감을 느끼기 위해 뭔가 괜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안중현의 제안 속에 숨겨진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뭐, 그 정도로 강하게 나온다는 건 날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다는 의미이겠지.’
이 바닥, 유적 사냥이라는 세계에서 마법사가 총꾼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명하복의 세계다. 괜히 총꾼을 가지고 고기방패같이 추레하고, 섬뜩하고, 조롱과 악의 가득한 표현을 쓰는 게 아니다. 총꾼과 마법사 사이에는 압도적인 계급이 존재한다. 마법사에게 총꾼은 단가만 맞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편의점 라면 같은 존재다.
막말로 보통 상황이라면 안중현이 이강우가 필요하다는데, 이강우의 의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다. 왕지홍에게 말하면 된다. 이강우, 놈 내 직속으로 넣으라고. 어쨌거나 이강우는 왕지홍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건, 안중현이 당장 자기 마음대로 이강우를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란 의미다.
‘내 몸값이 제법 된다, 이거지?’
전체적인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는 모른다. 왕지홍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리가 없다. 즈믄나래 길드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당연히 모른다.
분명한 건, 단순히 금전적인 이익만 놓고 저울질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한 번의 선택이 미래를 바꾼다.
‘현명하게.’
당장 눈앞에 나올 돈만 좇다가는 저번처럼 박준영 같은 큼지막한 엿을 먹는 경험을 재차 할 것이다. 또한 돈을 좇는다고 해도 그 액수가 인생을 바꿀 만큼 클 리도 없다.
“현명하게 하자고.”
결정적으로 이강우가 마법사만 될 수 있다면, 돈벌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게 핵심이다.
잡은 고기를 탐낼 게 아니라, 고기 잡는 배를 만들어서 대박을 칠 생각을 할 차례다.
‘마력을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확보하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
이강우가 붙어야 하는 건 돈을 잘 주는 고용주가 아니라, 자신을 데리고 안정적으로 유적 사냥을 해줄 수 있는 마법사다.
사실 그러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안중현은 인지도도 있고, 경력도 충분하고, 실력도 확실해.’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안중현보다 좋은 카드가 나오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이강우가 숨을 고르며 자신의 머리를 뒤로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마나 서클을 바라봤다.
‘그래, 일단 이거 하나라도 제대로 켜야지.’
* * *
“잘 부탁합니다.”
이강우가 안중현에게 전화를 걸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안중현은 꽤 기분 좋은 음색으로.
-조만간 연락을 주지.
짧게 대답을 해줬다.
그렇게 안중현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지홍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동안 수고했네. 같이 일해서 즐거웠네.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하게.
안중현과 왕지홍 사이에서 거래가 깔끔하게 끝난 모양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이강우와 왕지홍이 거래를 마칠 때다.
-클로즈 보너스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금으로 준비해두었네. 배달이 필요한가?
둘 사이에 남은 거래는 하나다.
이번 유적 사냥 참가에 따른 클로즈 보너스. 이미 선수금은 받아서 여동생에게 건네줬다. 클로즈 보너스만 받으면 왕지홍이나 이강우나 서로 주고받을 건 없다.
“아뇨, 백 노인 가게에 놔두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알겠네.
왕지홍은 사족 따윈 달지 않은 채 이강우와의 관계를 그 순간 정리했다. 그래도 나름 몇 달간 얼굴 보면서 지낸 왕지홍이 이렇게 담담하게 관계를 정리하자, 이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바닥 인맥이 다 이 모양이지 뭐. 쓰면 망설임 없이 뱉고, 단물 빠지면 뱉고, 재수 없으면 발에 밟히고.’
어쨌거나 왕지홍은 깔끔하게 이강우를 놓아줬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오랜만에 백 노인 만나러 가네.’
이강우와 세상 사이의 관계를 정리할 때다.
* * *
허름한 구멍가게의 문을 연 뒤에 이강우가 머리만 그 문틈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이강우가 고개를 돌려 계산대 앞에 선 노인, 백광현을 바라봤다. 백광현이 이강우를 보는 순간 쓴웃음을 머금었다.
“돈은 저기 뒤에, 갈색 가방 안에 있다.”
그제야 이강우가 문을 활짝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가방이 아닌 백광현 앞에 섰다.
“부탁이 있는데, 됩니까? 즈믄나래 길드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정보 어느 정도까지 줄 수 있어요?”
“네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 이상은 네가 얼마를 줘도 알려줄 수 없다.”
“생각보다 즈믄나래 길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모양입니다?”
“블랙 스택이 만든 지부가 영향력이 없을 리가 없지.”
“그럼 다른 부탁 좀 합시다. 내 뒤 좀 정리해줄 수 있습니까?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
말과 함께 이강우가 지척에 있던 선반에 놓인 초코바를 박스째로 들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백 노인이 이강우를 죽일 기세로 노려봤다. 이강우는 그런 백 노인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품에서 지폐를 꺼냈다. 5만 원짜리 지폐 뭉텅이를, 보기에도 두둑해 보이는 양을 꺼냈다. 초코바가 아니라, 골드바를 사도 될 법한 액수로 보였다.
“제가 최근 동안 나름 먹을 거 안 먹고, 쓸 거 안 쓰면서 번 돈입니다. 여기에 왕지홍에게 받은 클로즈 보너스를 합치면 5천만 조금 넘을 겁니다. 여러모로 전 재산이죠.”
“왕지홍에게 선수금으로 받은 돈이 5천 정도 될 텐데?”
“그건 여동생하고 어머니한테 드렸습니다. 그쪽으로 들어간 돈은 내 돈 아닙니다.”
백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중현 밑에 들어갈 겁니다. 안중현이 즈믄나래 길드 소속이니, 당연히 즈믄나래 길드 소속 총꾼, 정직원이 될 겁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제 뒤가 좀 많이 구리잖아요?”
“어느 정도를 원하지?”
“제 이름으로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을 정도…….”
“말장난할 여유는 있는 모양이군.”
“뭐, 그건 힘들겠죠. 그냥 제 명의로 휴대폰이나 은행 계좌만 쓸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백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일주일. 은행 계좌 및 휴대폰은 이쪽에서 마련해주겠다.”
말과 함께 백 노인이 계산대 위에 올라온 돈다발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이강우는 속 쓰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젠장, 다시 빈털터리 신세로군.’
지금 이 돈이 이강우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특히 지금 꺼낸 돈은 원룸 보증금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거처가 생기기 전까지는 여관방 생활을 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돈을 털어 넣은 이유는 오직 하나.
각오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온몸에 가득 배어있는 악취를 그냥 놔둘 수 없다. 악취 전부를 제거할 순 없더라도, 냄새를 지우는 탈취제 정도는 뿌려야 한다.
‘으으.’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강우는 쓰린 속을 잡은 채 계산대 위에 자신이 올려놓은 초코바 박스를 집었다.
그 모습을 본 백 노인이 눈매를 다시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건 왜?”
“아, 진짜! 5천만 원 넘게 주는데 이 정도는 뽀찌로 합시다!”
말과 함께 이강우가 초코바를 품은 채 도망치듯 가게 문을 나섰다.
* * *
-이번 역은 삼성, 삼성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과 함께 지하철을 가득 채운 사람들 그리고 역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우수수, 파도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 파도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심기가 편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서도 유독 심기가 편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뒤틀린 것처럼 표정을 짓는 사내가 있었다.
‘젠장, 이게 얼마짜리인데!’
심기 뒤틀린 표정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강우.
“악!”
‘이 구두가 얼마짜린데, 이걸 밟아?’
더불어 지금 이강우의 모습은 평소처럼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범죄자처럼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깔끔하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제대로 면도를 한 덕분에 뽀송뽀송한 얼굴. 더군다나 입고 있는 옷은 전부 명품이었다. 50만 원짜리 프라다 구두에 2백만 원이 넘어가는 아르마니 정장, 30만 원짜리 에르메스 넥타이까지.
‘젠장, 몇 번 입지도 못한 건데…….’
예전에 사업한답시고, 사람 만날 때는 당연히 기죽으면 안 된다고 큰마음 먹고 구매했던 명품들이었다. 물론 사업이 망하면서, 이후에는 아까워서 입지 못해 옷장에 보물처럼 보관했다. 그런 옷이 지하철 안에서 가차 없는 대우를 받으니, 심기가 뒤틀릴 수밖에.
더군다나 지하철 밖으로 나오자마자 온몸을 덮치는 열기는 짜증을 곱절로 만들었다.
‘여름은 여름이네.’
6월 말에 접어든 날씨가 시원할 리 만무.
이강우는 왼손으로는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겨 가슴 속 열기를 토해낼 숨통을 만들었고, 오른손으로는 그 귀하신 명품 정장 주머니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ABC초콜릿을 꺼냈다. 하나가 아닌 세 개를 꺼낸 후에 비닐 포장지를 이와 입술로 귀신같이 벗기며 순식간에 초콜릿 세 개를 까먹었다. 그 모습이 호두를 까먹는 다람쥐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초콜릿의 효과는 굉장했다. 이강우는 기분이 풀린 듯, 찌푸린 표정을 풀었다.
대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해봐야지.’
* * *
모래시계문이 등장하고, 몬스터가 등장하고, 마법사가 등장했을 때 세상은 당연히 몬스터를 가장 두려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몬스터가 인류문명과 존립을 위협하는 재앙이 아닌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재난 정도로 치부되기 시작했을 때, 마법사가 몬스터를 대신해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마법은 무시무시하다. 단순히 위력을 떠나서, 마법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대상의 정신을 조작 또는 지배하는 정신계 마법과 멀리 있는 것을 마력을 이용해 움직이게 하는 염력계 마법,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끝내주는 마법까지…… 영화에서 나오면 재미있는 소재겠지만, 현실에서는 범죄에 쓰일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마법사 도움 없이 모래시계문을 닫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그 외에 재생, 치료 마법은 인류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바꿀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법사를 괴상망측한 돌연변이 취급하며 박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오히려 마법사들은 범인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문제가 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마법사란 존재는 사회에서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폭탄이었고, 가장 큰 문제는 그 폭탄을 터뜨릴 뇌관은 마법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그 뇌관에 폭탄이 안전하다고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게 바로 즈믄나래 길드가 탄생한 이유였다.
대부분의 길드 설립 목적은 정부의 허가를 받고 모래시계문을 닫는 것, 유적 사냥이 목적이지만 즈믄나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마법사가 열심히 일을 한다는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다.
‘대단하네.’
이강우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 놀람 그리고 씁쓸함이 섞인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코엑스 내에 입점한 모든 상가 입구는 물론, 코엑스 내의 모든 통로에는 클로즈에 성공한 모래시계문들이, 독특한 디자인과 모래시계를 달고 있는 문들이 평범한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냥 쉬라고 만든 의자, 탁자마저도 모래시계문을 가공해 만든 것들이었다.
개중에서도 백미는 삼성동 코엑스 내에 위치한 거대한 크기의 문이었다.
‘이게 그놈이구나.’
높이 5미터, 폭 5미터. 정사각형 모양, 마치 벼락 맞은 나무를 떠올리게 만드는 질감과 금색과 은색 그리고 붉은색이 절묘하게 섞인 문.
2018년 9월 3일, 대한민국 최초로 클로즈에 성공한 5등급 모래시계문이다.
클로즈에 성공한 모래시계문은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등급이 올라갈수록 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른다. 7등급 이상의 모래시계문은 돈 많은 수집가들은 물론 그 특수한 재질을 연구하기 위해 기업이 큰돈을 들여 구매하려고 한다.
하물며 5등급 모래시계문의 가치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5등급 모래시계문을 클로즈 할만한 마법사 전력을 갖춘 곳은 많지 않을뿐더러, 그들 중에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5등급 모래시계문 너머의 유적 사냥에 나서는 이들은 더 적으니까.
그런 대단한 놈이 금고도 아니고, 모든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 장식되어 있다.
증거다.
즈믄나래 길드가, 마법사가 나라를 위해 유적 사냥을 하고, 모래시계문을 닫는다는 증거.
더불어 코엑스에 설치된 모래시계문은 어마어마한 관광 효과도 가지고 오고 있었다. 특히 5등급 모래시계문은 에펠탑과 같이, 이걸 보기 위해서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나라 살림에도 쏠쏠한 기여를 해주는 셈이다.
“흠.”
그런 모래시계문을 이강우는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순간 이강우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 표정 그대로, 모래시계문을 등진 채.
찰칵!
셀카를 찍었다.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강우는 연거푸, 셀카를 찍은 후에야 행동을 멈췄다.
그야말로 서울 구경 처음 온 촌놈.
어쨌거나 이강우는 5등급 모래시계문 그리고 코엑스에 굴러다니는 모래시계문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이게 즈믄나래의 영향력이군.’
나라를 위해 유적을 사냥하는 집단.
이제까지 액수만 맞으면 제 목숨을 팔았던 하이에나 크루 출신인 이강우는 머릿속에 두지도 않았던 길드.
그런 대단한 곳이 몇 분 후에 이강우의 직장이 되는 거다.
이강우는 넥타이를 제대로 고쳤고, 정장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머리도 가볍게 정리했다.
‘퇴역 이후 5년 만에 제대로 된 직장을 얻는군.’
* * *
즈믄나래 길드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즈믄나래 빌딩은 강남구 테헤란로, 그 어마어마한 높이와 크기를 가진 빌딩 숲 사이에 존재했다. 투박한 회색빛 빌딩과는 다르게 마치 예술품처럼 새하얀 모습을 가진 10층짜리 빌딩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런 즈믄나래 빌딩 1층, 굳건한 회전문 너머로 보이는 입구 광경은 굉장히 삼엄했다.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강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안내데스크에서 통화 중인 여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직원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강우에게 5층으로 올라가세요, 라는 말을 했을 때, 이강우는 이번에는 로봇이 되었다. 로봇이 되어 엘리베이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미치겠네.’
이강우 스스로도 정말 미칠 지경.
얼마나 긴장했으면 한숨조차 내뱉지 못할 정도였다.
‘빨리 와라.’
이강우 입장에서는 그저 빨리 엘리베이터 안에서 속을 가득 채운 한숨이라도 토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발을 들여놓는 순간.
‘후우.’
그래도 나름 여유 있는 척을 하기 위해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허세를 부리는 순간, 문이 닫히려는 순간, 슬슬 숨을 토해내려는 순간.
툭!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검붉은색의 절묘한 조화를 자랑하는 스포츠화, 조던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다시 열렸다.
“아,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
왜소한 체격, 그러나 체격과는 다르게 작은 얼굴, 잘생긴 외모라기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수려한 미모에 수북한 머리칼을 뒤로 바짝 넘긴 채 동그란 알을 품은 작은 선글라스를 콧잔등 위에 살짝 걸치듯 쓰고 있는 모습이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덕분이었다.
‘헉?’
이강우는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사내의 정체를 단숨에 눈치챌 수 있었다.
‘바람잡이 하선우잖아!’
바람잡이 하선우.
바람 속성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5서클 마법사로, 견제의 스페셜리스트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견제 능력만 놓고 봤을 때는 6서클 마법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발생하는 틈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전투를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실력자다.
여기에 보는 것처럼 체격은 왜소하지만,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 같은 외모와 패션 그리고 젊은 나이 덕에 인기도 상당했다. 세계적인 명품 업체의 광고 모델로 버는 수입이 마법사로 버는 수입에 버금갈 정도라고 하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런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심지어…….
“처음 보시는 분 같은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먼저 말까지 걸었다.
이강우는 극도로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계약하러 왔습니다.”
“아, 계약. 마법사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럼 총꾼?”
“예.”
“그냥 총꾼이시면 여기까지 와서 계약할 일은 드문데, 뭔가 다른 기술 있으신가 봐요? 혹시 칼 좀 쓰시나?”
휙휙, 말을 하며 하선우는 자신의 왼손 손바닥을 도마처럼 펼치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써는 듯한 제스처를 곁들였다.
“아, 네.”
“역시나. 누구랑 일하세요? 제호 형? 신영이?”
“안중현 씨 밑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강우는 뭔가에 홀린 듯 술술 대답했다. 평소라면 한 번쯤 고민하고 내뱉었을 대답, 그 정도로 긴장했다는 의미다.
“와우! 중현 선배가 뽑았을 정도라면 실력이 어마어마하신 모양이네. 중현 선배가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지랄 맞은데. 혹시 저번에 그 유적 사냥에 참가하셨나요? 불꽃꼬리?”
“예.”
“그럼 우희가 말한 그 사람이시겠네요.”
놀라운 수준의 친화력이다.
물론 이강우 입장에서는 그냥 빨리 5층에 도착해서 문이나 열렸으면 하는 심정.
이윽고 5층에 도착했을 때.
“파이팅입니다. 파이팅.”
하선우가 이강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응원과 조언을 해줬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연봉 협상에서 강짜 부리면 나중에 제대로 보복하는 쫌생이들이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사인하는 게 좋습니다. 나중에 같이 한번 유적 사냥해 봐요.”
* * *
10평 남짓한 사무실 안에 두 사내가 서류 뭉치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년 연봉은 5,940만 원입니다. 물론 기본급이고, 유적 사냥을 할 때마다 역할 및 유적 등급에 따라 추가 보수가 지급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크루에서 활동할 때보다는 액수가 적습니다. 기본급을 드리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말에 이강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더불어 길드가 다 그렇지만 정부 지원금을 받는 단체라서 탈세니, 뭐 이런 건 못 해요. 일단 받는 돈의 30퍼센트는 세금으로 빠져나가실 거 각오하세요.”
이 대목에서는 이강우의 얼굴이 굳었다.
사내는 그런 이강우의 표정에 재차 말했다.
“크루가 괜히 등장한 게 아니죠. 그나마 개인이야 1, 2천만 원 정도 세금으로 내겠지만 길드 차원으로 보면 세금으로 내는 돈은…… 하물며 수십억씩 버는 마법사들은 미치는 노릇이죠. 더군다나 즈믄나래 길드는 여러모로 타의 모범이 되는지라, 탈세하다 걸리면 즉각 해고입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세금이 골치 아프면 우리 회계팀이랑 상의를 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길드는 범죄 쪽에는 민감합니다. 원아웃 제도에요.”
이강우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물어봤다.
“그런데 즈믄나래는 직원에게 학자금이나 병원비 지원해준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조건이 까다롭긴 한데…… 혹시 필요하십니까?”
“아뇨. 혹시나 해서…….”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강우 씨가 지금 당장 애를 낳아도 학자금 지원을 받는 건…… 중학교 정도까지가 한계일 겁니다. 대학 학자금 지원을 받을 때까지 이 짓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 애 낳아도 대학은 20년 후에나 갈 텐데.”
“그렇죠.”
“자, 그럼 더 이상 물어보실 게 없으시다면 여기, 여기, 여기 가지고 온 도장 찍어 주세요.”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준비해온 도장을 인주에 찍은 후 꼭 찍었다.
‘이 도장을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이야.’
이강우가 꺼낸 도장은 옥으로 만들어진 것이 꽤 고급스러웠다. 실제로도 제법 값이 나가는 놈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을 했을 때, 아는 지인이 이제는 대충 도장가게에서 파는 3천 원짜리 도장이 아니라 번듯한 도장이 필요하다면서 괜찮은 도장을 선물해 줬다.
하지만 이후 사업이 정말 뭔가 해볼 반등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아주 스무스하게 망하면서 평생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이강우가 도장을 찍은 문서를 직원은 잽싸게 회수한 후 정리했다. 그러면서 짧게 말을 던졌다.
“안중현 씨가 계약 끝나면 지하 3층으로 오라고, 이강우 씨에게 말을 남겼습니다. 아, 그리고 즈믄나래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합니다. 내년 연봉협상 때 웃으면서, 직접 얼굴 마주 보고 계약합시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마지막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