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불꽃꼬리
2020년 4월 29일.
디데이가 왔다.
어쩌면 현실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오늘. 그러나 이강우는 그런 사실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자신의 개인 소지 물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지고 갈 수 있는 짐은 많을 필요가 없었다. 어지간한 필요 물품들은 유적 사냥을 주도하는 마법사 측에서 준비하는 게 이 바닥의 기본적인 룰이었으니까. 총을 비롯한 무기들 역시 마법사 쪽이 준비한다. 식량을 비롯한 기타 장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중이떠중이들이 총꾼을 한답시고 나서는 것이다. 몸만 가면 되니까.
총꾼에게 필요한 건 지극히 사적인 물건 정도면 충분했다.
‘초콜릿은 전부 챙겼고.’
이강우는 보통 마트에 들려 초콜릿을 잔뜩 구매한 다음에 그대로 약속 장소로 가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에 필수품이 하나 더 추가됐다.
‘손거울도 챙겼고.’
언제든 불사황제가 준 권능을, 자신의 능력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도록 접이식 손거울을 추가했다.
‘간편하니 좋네.’
여기에 약간의 현금이 든 지갑이면 충분하다. 그야말로 단출하기 그지없는 준비물.
점검을 마친 이강우가 뉴욕양키스 로고가 박힌 모자를 썼다.
“내 팔자는 어떤 식으로든 유적에서 뒈질 팔자군.”
짧은 푸념과 함께 이강우가 집을 나섰다.
* * *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라는 표현으로 자주 불리는 그곳에는 심학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가소로울 정도로 낮은 산이었지만 평지로 가득한 파주 출판단지에서 오롯하게 솟아오른 심학산은 그 크기에 비해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심학산 북동쪽 부근, 창고와 농지가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그곳이 이강우의 목적지였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까지는 택시로, 이후 1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온 이강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창고를 바라봤다. 문이 열린 창고는 평범했다. 외형도 특별한 게 없었고, 박스가 성벽처럼 쌓인 창고 내부에서도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강우가 그 창고 안에 들어가려는 순간, 섬뜩한 살기가 이강우를 향했다.
이강우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곧바로 머리 위로 손을 들었다.
“사냥 참가자입니다. 이강우입니다.”
“들어 와.”
그제야 나오는 대답. 이강우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열려 있는 창고의 문 양쪽에 두 사내가 있었다. 총을 든 채로.
“저쪽으로 이동해라.”
그중 한 명이 이강우에게 길 안내를 해줬고, 그 안내대로 이강우는 높게 쌓여있는 상자들 사이에 교묘하게 난 틈을, 미로 같은 길을 따라서 이동했다. 그러자 상자로 둘러싸인 공간 내부에 숨겨진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탄약 확인해!”
“식량 다시 한번 체크해.”
“식수는? 식수는 어디 있어?”
분주하기 그지없는 광경.
그 중심에 있는 건 큼지막한 모래시계문이었다. 높이 4미터, 폭 3미터의 문은 자동차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 문틀은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듯 딱딱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줬고, 마치 뱀이 문틀을 휘감는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모래시계문은 양문으로 오른쪽 문은 붉은색을, 왼쪽 문은 하얀색을 품고 있었다. 검정, 빨강, 하양…… 이 세 가지 색의 조합은 묘하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줬다.
그런 문 주변으로 여러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개봉된 나무 상자 안을 가득 채운 탄약을 탄창 안에 열심히 채워 넣는 작업을 하는 두 사내였다. 더불어 그 두 사내 옆에서 짧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깔끔하게 정렬된 K2소총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 셋은 대화도 나눴다.
“K2보다는 차라리 M16이 난 것 같은데…….”
“한국군이 K2를 주력으로 쓰니까 어쩔 수 없잖아?”
“주한미군 애들 건 어떻게 빌릴 수 없나?”
그런 대화 주변으로 두 명의 사내들이 로봇 같은 슈트, 외골격 슈트를 입은 채 보기에도 묵직한 짐을 통째로 옮기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이강우가 옅게 실소를 지었다.
그런 이강우의 등을.
툭!
누군가 가볍게 쳤다.
이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최근 보름 동안 매일매일 질리도록 봤던 얼굴이 보였다.
“늦었군.”
천영수는 이강우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꽤 굳은 목소리로 따끔한 인사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차가 없어서…….”
이강우가 잽싸게 자기변호를 하자, 천 노인은 대답 대신 그를 한 번 째려봤다.
이강우가 꽉,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천 노인이 질타를 그만두고 명령을 내렸다.
“저기 내 장비가 있으니, 네가 점검하도록.”
“예.”
이강우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면서, 천 노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저들이 마법사들인가?’
분주하게 유적 사냥을 준비하는 이들과는 다르게 고고한 학처럼 한곳에 모여 이 광경을 연극 보듯 바라보는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 딱 봐도 느낌이 마법사였다. 유적 사냥 준비 과정을 보면 마법사를 찾아내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마법사다.
천 노인은 그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셋 중 한 명이 천 노인이 가까이 오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작년 이후로는 같이 일을 한 적이 없으니 넉 달 만에 만난 셈이군요.”
“그동안은 일은 없었나?”
“있었으면 여기에 있지도 못하겠지요.”
천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내는 키가 꽤 컸다. 190센티미터는 분명 넘는 신장이었다. 그렇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은 그야말로 멀대, 그 자체였다. 여기에 눈매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짧은 스포츠머리까지,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런 사내의 양옆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말없이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 둘은 누구인가?”
“신입입니다.”
그제야 둘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천 노인의 나이가 까마득하게 많았지만, 그 둘은 그 이상 예의를 갖추진 않았다. 천 노인과 대화를 하는 사내 역시 존댓말은 쓰지만 딱히 천 노인을 향해 진심 어린 예의를 갖추는 건 아니었다.
천 노인은 그런 그들의 행동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이번 사냥도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그야말로 무덤덤한 대화.
“그보다 제자 한 명 들이셨다는데, 쟤가 그 제자입니까?”
사내의 말에 천 노인은 고개를 돌려 이강우를 한 번 바라봤다. 자신이 가지고 온 가방, 그 안에 든 무기를 하나씩 꺼내며 날을 살피는 그 모습에 천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자라기보다는 그냥 내 스페어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딱히 뭔가 가르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서 말이야. 제자 같은 느낌은 안 드네. 만난 지도 보름밖에 안 됐고.”
그 말에 사내가 무덤덤한 반응을 지우고, 살짝 흥미가 돋는 듯한 눈빛을 품었다.
‘천영수, 이 노인네가 이 정도로 말하면 꽤 대단하다는 건데?’
사내는 천 노인이 칭찬에 얼마나 인색한 인간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왕지홍, 그 양반이 꽤 괜찮은 녀석을 구한 모양이군요.”
“자네도 도축 쪽에 관심이 있나?”
“유적 사냥을 나설 때 실력 좋은 칼잡이를 데리고 다녀서 나쁠 건 없지요. 지금 이 바닥에서는 칼잡이 구하는 게 마법사 구하는 것보다 더 힘든 판 아닙니까? 최근 뭐 이런저런 소식도 들리고…….”
“왕 사장이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놈 같은데, 손에 넣는 게 쉽진 않을 거야.”
왕 사장.
그 말에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왕 사장 눈치 볼 깜냥은 아니잖습니까?”
천 노인은 그 말에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짧은 대화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대화를 몰래 듣던 이강우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모래시계문 너머에는 유적이 있고, 그 유적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단 유적 안으로는 어떤 물건이든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마련할 수만 있다면, 핵배낭 따위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도 문제없다. 문제는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 바로 이 부분이다.
전차를 운전해서 끌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차를 등이나 어깨에 짊어지면 전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건 가능하다. 물론 모래시계문의 크기가 전차보다 크다는 가정 그리고 전차를 들어 올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이야기다. 모래시계문보다 큰 물건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어쨌거나 들어가는 사람이 가지고 들어가면 된다, 이게 핵심이고 이 때문에 모래시계문이 등장하고 수혜를 받은 산업 중 하나가 바로 외골격 장비 산업이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외골격 슈트를 입고 수백 킬로그램이 넘는 물건을 든 채로 유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외골격 슈트의 도움을 받으면 십여 명의 인력으로도 톤 단위의 물건을 나눠서 운반하는 게 가능하다. 혹은 무게를 줄여주거나, 힘을 늘려주는 마법 아티팩트를 이용하거나. 그러나 마법 아티팩트가 1서클짜리도 1억 원이 가뿐하게 넘어가는 것에 비해 외골격 슈트는 대략 2천만 원 근처인 걸 고려하면 외골격 슈트 쪽이 가격 대비 효율이 더 낫다.
또한 유적에는 한 번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다. 보통은 10명 안팎의 인원만 입장이 가능하다.
더불어 유적에 한 명이라도 사람이 입장하는 순간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는 작동을 멈춘다. 유적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으면 다시 모래시계가 움직인다. 이 부분을 이용해서 모래시계문이 이용 가능한지 알 수 있고 동시에 사람 한 명을 희생해서 모래시계문의 수명을 늘리는 치트를 쓰기도 한다. 모래시계문에 사람을 강제로 넣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이번에 이강우가 참가한 7등급 유적 사냥 파티의 경우에는 이런 부분에서 준비를 꽤 잘한 케이스였다.
일단 물건 운반을 위해 준비한 외골격 슈트만 3대가 있었다. 그 3대의 도움으로 식량은 무리 없이 운반할 수 있었다. 굳이 더 많은 짐을 들고 가기 위해 총꾼들이 앞뒤로 가방을 채우고 양손에도 가방을 든 채 얼굴이 뻘겋게 변한 채 모래시계문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또한 이강우가 보기에 그들이 준비한 무기들도 꽤 좋았다. 총꾼들에게 지급된 주력 무기는 K2소총으로 상태가 꽤 좋았다. 총꾼들이 쓰는 총은 보통 길드를 통해서 나온 물건들이다. 한국 같은 경우는 정부에게 유적 사냥을 허가받은 길드에 한국군의 장비를 대여해준다.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가 유적 사냥 계획서를 쓰면, 정부가 검토 후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여기서 크루가 끼어드는 건, 한 차례 유적 사냥을 마친 후에 아직 무기 대여 시간이 남아있을 때, 몇몇 마법사들이 추가 이익을 위해서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채 크루 소속 총꾼을 모아 불법 유적 사냥을 나서거나 혹은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무기를 대여해 는 식으로 용돈을 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군이 최근 입고된 상태 좋은 총을 줄 리 만무하다. 보통은 충분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들이 주어진다. 우스갯소리지만 예비군 훈련에서 썼던 총을 지급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데 이번 파티가 지급받은 총들은 딱 봐도 보급된 지 얼마 안 된 새것들이었다.
‘이번 파티는 크루가 아니라 길드야. 그것도 일류.’
확실하다.
이번 파티는 마법사 한 명이 대충 크루 소속 총꾼들을 모아서 만든 파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제법 제대로 된 영향력과 배경을 가진 일류 길드다.
물론 이상한 건 없다. 일류 길드가 유적 사냥을 하는 건 합법적인 일이니까.
문제는 이 사이에 왕지홍이란 인간이 끼어 있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왕지홍의 배후에 번듯한 일류 길드가 있다?
이 순간 이강우는 머릿속에 몇 달 전 있었던 백광현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마나스톤 감별로 생활비나 벌려고 했는데, 잘못하면 진짜 코가 제대로 꿰이겠는데?’
묘한 불길함이 이강우의 가슴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 * *
유적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외골격 슈트를 입은 세 명이 수백 킬로그램에 다다르는 짐을 가뿐하게 든 뒤에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이 이강우의 차례였다.
열린 유적 문, 어둠으로 가득 찬 그 공간 안으로 이강우가 긴 한숨과 함께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어둠이 이강우를 덥석,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어둠 속 세계. 마치 어둠으로 된 안개가 가득 찬 듯,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속에서 이강우는 묵묵히 걸었다.
‘왔다.’
그러자 어느 순간 이질감이 사라졌다. 어둠은 계속 있었지만, 이강우는 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이강우는 발걸음을 멈춘 채 조용히 있었다.
잠자코 있었다.
1초, 2초…… 시간이 좀 더 흘렀다.
그러자.
“마지막 도착. 전부 무사한가?”
뒤쪽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고, 동시에 손전등에서 뿜어진 빛이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셋. 전부 있습니다.”
총꾼 열 명, 마법사 세 명, 총 열세 명이 무사히 모래시계문을 통과했다.
“운 좋게 룸에서 시작되는군. 이곳에서 베이스캠프를 마련한다. 탐색조는 탐색로봇 뿌려서 탐색 시작하고, 준비조는 가지고 온 물품을 정리한다. 자자, 유적 사냥 시작이다.”
그렇게 유적 사냥이 시작됐다.
* * *
마법이 가진 가치는 절대적이다. 인류가 가진 과학 기술로는 해석조차 불가능한 신비가 마법 속에 있었으니까.
때문에 마법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니었다. 이미 돈이 넘치는 자들은 마법으로 이룰 수 있는 불로불사, 영생, 영원한 젊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투자를 했다.
그 투자는 당연히 유적 사냥을 대상으로 한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장 혜택을 본 건 군수산업과 로봇 산업이었다.
군수산업의 발전이야 두말할 것 없다. 유적 사냥에는 기존에 이미 나온 무기들, 단순히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무기가 필요했고, 당연히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과정에서 돈이 들어오고,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
로봇 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한된 인원만을 허락하는 유적 사냥에서 사람의 머릿수를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은 어떤 의미에서 최첨단 무기보다 더 효과적이었으니까. 아니, 로봇 자체가 어떻게 보면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런 로봇 산업의 성장 속에서 제법 쏠쏠한 히트를 친 상품이 하나 있다.
“거미 움직이겠습니다.”
20평 남짓한 공간, 천장 높이는 4미터 정도 되는 돔 형태의 방. 그 방 안에 베이스캠프가 마련되자마자 곧바로 유적 탐사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한 사내가 가지고 온 검은색 가방에서 로봇을 꺼냈다. 성인 남자 주먹보다 조금 큰 몸통에 여덟 개의 길쭉한 다리를 가진 로봇. 유적 사냥꾼들 사이에서 지금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거미 로봇, 스파디였다.
몸체에 달린 8개의 카메라는 적외선 기능도 있는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꽤 괜찮은 화질의 영상을 제공해줬으며, 거미의 다리를 이용해 움직이는 덕분에 이동 시 소음이 적었다. 또한 가벼운 무게, 다리를 접었을 경우 부피가 작아 운반 역시 매우 쉬우며, 5백만 원 안팎의 부담 없는 가격으로 유적 사냥꾼들 사이에서 소변 정수기와 함께 유적 사냥에 꼭 필요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됐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대로 허가를 받고 넉넉한 자금력을 가진 길드들 사이에서 히트를 쳤다는 거고, 이제는 유적 사냥 한 번에 돈 5백만 원 받기도 힘든 크루 소속 총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그 거미 로봇, 스파디를 당연하게 쓰는 이 파티를 보며, 이강우는 자신의 확신이 더 견고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 이제는 다른 게 궁금해졌다.
‘대체 어디 길드지?’
이강우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현재 활동하는 길드는 백여 곳 정도다. 그리고 이런 백여 곳 길드 중에 하위 50곳은 삼류 길드다. 길드라기보다는 그냥 크루를 하청업체로 두고 중간 유통사 같은 역할로 수입을 버는 무리들이다. 그 위에 있는 30곳도 덩치는 크지만, 딱히 하는 일이 삼류 길드와는 큰 차이가 없다.
남은 20곳 정도가 일류 길드라고 할 수 있다. 세간이 말하는 길드는 대부분 일류 길드다. 일반인들은 사실 삼류 길드의 이름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크루와의 차이점도 솔직히 없다.
일류 길드와 이삼류 길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국 정부가 그 길드에 유적 사냥을 직접 의뢰하느냐 안 하느냐, 바로 그것이다.
이강우가 봤을 때 지금 이 길드는 일류 길드였다. 이류, 삼류라고 하기에는 총꾼들의 행동에도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확실히 느껴지고, 단순히 총만 쏠 줄 알기보다는 각자의 특기가 확실했다. 스파디만 해도 그렇다. 스파디는 정말 좋은 탐색용 로봇이지만, 조종하는 게 쉽지 않다. RC카 좀 조종해봤다고 다룰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외에 외골격 로봇이나, 파주 출판단지에 마련해둔 비밀 아지트까지.
‘일류 길드들이 뒤가 구린 짓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쯤 되니까 궁금해지네.’
이 길드의 정체를 알게 되면 나중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괜히 그 사실을 떠벌릴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알고 대비라도 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렇다면 길드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강우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분주한 총꾼들과는 대조적으로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는 세 명의 마법사를 바라봤다.
‘4서클 마법사.’
4서클 한 명에 3서클 두 명.
왕지홍은 이번 7등급 유적 사냥에 세 명의 마법사가 참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중 한 명은 4서클이라고 했다. 3서클 마법사도 귀하지만, 4서클 마법사는 더 귀하다. 3서클 마법사가 고액 연봉을 받는 직원이라면, 4서클 마법사는 이사급, 쉽게 말해서 임원급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그런 4서클 마법사에 3서클 마법사 둘을 붙였다.
과한 조합이다. 7등급 유적이 아니라 6등급 유적도 한번 비벼볼 만한 전력이다.
이 역시 길드 소속 유적 사냥 파티가 가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크루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투자금을 줄이는 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하지만, 길드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다. 수익보다는 최소한의 피해를 추구한다.
어쨌거나 4서클 마법사 숫자는 국내에 별로 많지 않다.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길드나 정부가 4서클 마법사가 몇 명입니다, 같은 통계를 공표하는 건 아니니까. 단지 국회의원 숫자보다는 적다는 건 확실하다.
‘마법만 보면 좀 더 범위를 좁힐 수 있을 텐데…….’
이강우가 고민을 하며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 입 안에 넣었다.
그런 이강우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 * *
거미 로봇을 이용해 4시간 동안 유적을 탐사했을 때, 이번 유적에 대한 대략적인 특징을 알 수 있었다.
“유적 타입은 개미굴이군.”
일단 유적의 형태는 개미굴과 흡사했다. 지금 파티가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곳과 같은 방이 여러 개 있고, 그 방을 잇는 길이 존재했다.
“규모는…… 상당하고.”
또한 전체적인 규모는 거미 로봇만으로 탐사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매우 컸다. 보다 자세한 탐사를 위해서는 근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탐사를 하는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일단 유적 사냥 파티는 1차 탐색 결과만 정리했다.
“현재까지 발견한 방은 총 여덟 개. 개중에 네 곳에 9등급 몬스터가 자리를 잡고 있는 걸 확인했고.”
방은 여덟 개, 발견된 몬스터는 네 마리, 전부 9등급.
물론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몬스터도 있을 테고, 방에 숨어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몬스터도 있을 것이다. 최소 네 마리라고 규정하고, 이동 시에도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공략 방법은 쉽겠군.”
어쨌거나 개미굴 형태의 유적은 여러 타입의 유적들 중에서도 공략하기 쉬운 편이다.
“방따먹기로 간다.”
한 마리씩 차근차근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가장 핵심인 7등급 몬스터를 제거하면 된다.
속칭 방따먹기!
“좋아, 그럼 개시는 내가 하지.”
그렇게 유적 사냥이 시작됐다.
* * *
네 명의 사내가 야간 투시경을 쓴 채 어둠 속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총꾼 두 명이 앞뒤에 섰고, 그 가운데에 마법사 한 명 그리고 총꾼이자 도축자인 이강우가 서 있었다.
이강우는 야간 투시경 너머로 보이는 투박한 돌덩이를 다듬어서 만들어진 길을 바라보며 입꼬리 한쪽을 실룩거렸다.
‘젠장, 왜 나야?’
조합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단련된 베테랑 총꾼 세 명과 4서클 마법사 한 명. 솔직히 9등급 몬스터를 사냥하기에는 아까운 수준의 조합이다.
여기에 도축자가 포함되는 것 역시 이상한 건 없었다. 몬스터를 잡는 순간, 잽싸게 그 자리에서 도축에 앞서서 방혈 작업 등 간단한 작업을 하는 건 좋은 몬스터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였으니까.
그러나 그 도축자 역할에 이강우가 포함되는 건 사실 예정 범위 밖의 일이었다.
본래는 천 노인이 나서려고 했다. 실제로 4서클 마법사가 유적 탐사 결과를 정리한 후 자신이 개시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4서클 마법사가 그런 천 노인에게 말했다.
“어차피 9등급짜리 잡는 일인데, 뭐하러 천 노인이 나섭니까? 이럴 때 쓰라고 스페어를 준비해둔 건데.”
그 말에 당연히 천 노인 대신 이강우가 조합에 꼈다.
이강우에게 4서클 마법사의 정체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 그가 사용하는 마법을 알 수 있는 계기와 그가 속한 길드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이강우는 이런 식으로 그 기회를 얻고 싶진 않았다.
‘젠장, 이 인간이 날 아나? 왜 갑자기 날 물고 늘어지지?’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은 이강우에게 안 좋은 상황이다.
일단 몬스터 사냥은 어떤 식으로든 위험을 동반한다. 4서클 마법사의 존재가 이강우의 명줄을 보장해주는 것 역시 아니다. 1서클, 2서클 마법사보다야 낫겠지만 어쨌거나 4서클 마법사가 중요시하는 건 자기 목숨이지 이강우의 목숨이 아니다.
마법사가 총꾼을 살려주는 건 그게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해서일 뿐, 그들이 총꾼을 구해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강우가 총꾼으로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 사실을 언제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감 잃지 말고.’
여하튼 이강우가 이 순간 긴장을 풀고, 여유를 가질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스윽!
앞서가던 총꾼 한 명이 행동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야간 투시경으로 보이는 초록색 시야, 그 너머에서 묘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상대의 정체를 확신하기에는 아직 힘든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이강우는 확신했다.
‘9등급짜리야. 도마뱀인가?’
몬스터가 등장했다.
본래 목적지인 방으로 가기 전, 길목을 배회하던 놈이 어떤 촉을 느낀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눈앞에 등장했다.
분명 계획과는 다르다. 본래 계획은 앞으로 300미터 정도를 더 이동한 후에 나오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몬스터 놈을 처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도중에 몬스터와 조우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
이대로 싸우거나 혹은 뒤로 빼거나.
전력으로는 9등급 몬스터 정도는 가뿐하게 압도할 수 있다. 그 몬스터가 환수형 타입이 아니라면, 세 명의 총꾼이 능숙한 솜씨만으로도 잡을 수 있는 게 9등급 몬스터니까. 여기에 4서클 마법사까지 있으니, 문제 될 건 없다.
문제는 총성에 다른 몬스터들이 반응하고, 앞다투어 덤벼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일단 후퇴를 하고, 곧바로 다른 병력과 합류 후에 싸우는 게 안전할 수도 있다.
결국 결정은 우두머리의 몫이다.
“흥.”
마법사의 코에서 콧방귀가 나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강우는 직감했다.
‘싸우겠다, 이거군. 하긴, 이 정도 4시간 동안 유적 안에서 수다만 떨었는데 몸이 근질근질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9등급 몬스터를 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고.’
스윽.
이강우가 쥐고 있는 소총의 조정간을 움직였다.
‘응?’
그때 마법사가 이강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이강우라고 했나? 그쪽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실력이 좋으면 좋은 대우를 해주지.”
이강우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말.
‘뭐야?’
그러나 마법사는 자세한 설명 없이, 몬스터가 있는 방향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딱!
이윽고 마법사가 왼손의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사의 왼손 손목에 차여진 팔찌가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더니.
파앙!
20미터 전방에서 강렬한 불똥이 튀었다.
그 불똥의 등장 덕분에 모든 이들이 20미터 전방에 있는 몸길이 2미터의 도마뱀을, 뱀이 아닌 갑옷 같은 비늘을 두르고 있는 몬스터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9등급 몬스터 갑옷비늘도마뱀의 등장이었다.
* * *
갑옷비늘도마뱀은 자신의 앞에서 불똥이 튀기며, 그 불똥이 자신의 단단한 갑옷비늘을 뚫고 몸에 화끈한 열기를 주자 일단 뒷걸음질 쳤다.
츠르, 츠르!
그리고는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낌새가 느껴진 방향을, 정면을 바라봤다.
츠츠츠!
이윽고 갑옷비늘도마뱀이 정면을 향해 빠르게 네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을 때.
딱!
꽤 선명한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퍼엉!
갑옷비늘도마뱀의 머리 바로 앞에서 이번에도 불똥이 튀겼다. 불똥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등장하는 순간 폭발하며, 자신의 잔해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마치 수류탄처럼!
그 파편이 갑옷비늘도마뱀의 눈가에 닿는 순간, 갑옷비늘도마뱀은 생각 이상으로 강렬한 화끈거림 앞에 다시금 뒤로 걸음을 물렸다. 두 번의 폭발에 놀란 듯 갑옷비늘도마뱀은 거리만 유지했다.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낌새를 살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법사가 거리를 좁혔다.
츠츠츠!
그제야 갑옷비늘도마뱀은 다시금 적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네 다리를 잽싸게 놀리기 시작했고.
딱!
이번에도 조금 전과 똑같이.
퍼엉!
두 개의 소리가 규칙적으로 터지며, 갑옷비늘도마뱀의 주변에 불똥을 만들어냈다.
세 번이나 반복된 똑같은 광경.
이 과정에서 갑옷비늘도마뱀은 세 가지를 알게 됐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면 불똥이 터진다.
불똥은 일정 거리에서만 터진다.
불똥은 아프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조합한 갑옷비늘도마뱀은 눈앞에 등장한 것들을 피해야 하는 적이 아닌, 먹어치울 수 있을 만한 먹잇감으로 규정했다. 갑옷비늘도마뱀의 기색이 달라졌다.
츠홧!
녀석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기세를 뿜으며, 전력으로 눈앞의 적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고, 갑옷비늘도마뱀이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불똥은 참을 만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참고 돌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불똥은 등장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실수인가? 아니면 실패? 혹은 행운?
어쨌거나 갑옷비늘도마뱀은 이 순간 승기를, 자신을 세 번 괴롭힌 놈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예상한 듯 즐거운 기색을 품기 시작하며 더 빨리 발을 놀렸다.
그런 갑옷비늘도마뱀을 바라보던 마법사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결국 짐승은 뭘 해도 짐승이지.”
미소와 함께 말을 뱉는 마법사의 오른손, 그 오른손의 가운뎃손가락에 착용한 반지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퍼엉!
굉음과 함께 기분 좋게 돌진하던 갑옷비늘도마뱀의 몸뚱이 아래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3서클 마법 불지뢰.
단숨에 창처럼 갑옷비늘도마뱀의 배를 뚫고 솟아오른 불기둥의 모습을 본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불놀이꾼 안중현…… 왕지홍 뒤에 있는 배후가 즈믄나래 길드였군.’
* * *
즈믄나래 길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 중 한 곳이며, 동시에 한국 정부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은 길드이기도 했다.
몬스터와의 전쟁이 잦아들고, 전 세계적으로 길드라는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한국 정부 역시 한국 내 길드 설립을 앞두고 많은 의논을 했다. 그리고 길드 설립 허가에 앞서서 한국 정부는 길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한 가지 시도를 했다.
비공개 입찰을 진행했다.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테니, 한국 정부에 전폭적인 협조를 해줄 길드를 모집한 것이다.
당시 한국에 지부 설립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 중이던 세계 삼대 길드, 블랙 스택(Black Stack)과 칠성문(七星門) 그리고 이존(E-Zone)이 동시에 한국 정부에 제안서를 냈고, 블랙 스택이 선정됐다.
그 블랙 스택이 한국 정부의 지원 아래 만든 길드가 바로 즈믄나래다.
더불어 안중현은 본래 다른 길드 소속이었으나, 2년 전 즈믄나래 길드가 스카우트한 마법사였다.
덕분이었다.
즈믄나래 길드 소속 마법사들 중에서 그나마 이강우가 알고 있는 이름은 안중현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마법사가 이번 유적 사냥에 참가했다면 마법을 봐도 정체를 몰랐을 것이다.
‘생각보다 거물이 왔네.’
어쨌거나 안중현은 이강우도 조금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4서클 마법사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인물이지.’
마법사들 세계에서도 수준 차이가 있다. 4서클 마법사라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다. 특히 유적 사냥에 있어서는 실력 차이가 더 확실하게 차이가 난다. 전투란 다양한 변수와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안중현은 유적 사냥만 놓고 봤을 때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4서클 마법사들 중에 충분히 두 손에 꼽힐 만한 실력자였다. 특히 그가 유명세를 치르게 된 건, 한국에서 최초로 진행됐던 5등급 유적 사냥 멤버로 참가했던 경력 때문이었다.
‘내가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는 많이 말랐네.’
어쨌거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왕지홍 배후에는 즈믄나래 길드가 있다. 그리고 즈믄나래 길드는 세계 삼대 길드 중 한 곳인 블랙 스택의 한국 지부다.
‘어휴 시발.’
정리하면 이강우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배후가 자리 잡고 있다.
‘이거 내가 발을 빼고 싶다고 해서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이강우는 금방 자신의 처지를, 견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즈믄나래 길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안중현처럼 얼굴이 이미 털릴 만큼 털릴 인물을 중심으로 유적 사냥을 하는데 이강우 같은 외부 사람을 그냥 집어넣는다?
이강우가 괜한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는 의미다.
코가 제대로 꿰인 셈.
‘어쩐지 액수가 다르더라.’
생각해보면 몬스터 도축, 그를 통한 마력 섭취, 1억 원에 다다르는 적지 않은 보상금에 눈이 멀었다.
‘내 빌어먹을 인생이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그렇게 이강우가 복잡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끙끙거리는 순간.
툭!
안중현이 이강우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 순간 이강우는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을 버렸다. 표정도 바꿨다. 야간 투시경을 쓴 채로 안중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작업할까요, 아니면 베이스캠프로 운반한 다음에 작업할까요?”
그의 역할은 총꾼이 아닌 도축자다. 지금은 그 역할에 충실할 때다. 유적에서는 쓸모없는 인간이 가장 먼저 죽는 법이니까.
“장단점은?”
“여기서 작업을 하게 되면 흔적이 여기에 남고, 베이스캠프에서 작업을 하면 거기에 흔적이 남습니다.”
흔적.
중요한 요소다. 몬스터의 피 냄새, 피륙이 썩는 냄새는 다른 몬스터를 부르니까.
물론 이 요소는 써먹기에 따라 다르다. 몬스터 시체를 미끼로 쓰는 건 유적 사냥을 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숙지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안중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 만무하다.
“괜히 피 냄새 풍기면서 돌아갈 필요는 없지.”
여기서 작업하란 의미다.
말과 함께 안중현은 제 목덜미 근처에 달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댄 후에 말했다.
“총꾼 두 명, 마법사 한 명 이곳으로 추가 파견. 우희, 네가 이끌고 이곳으로 와라.”
-예.
그러자 모두가 착용한 이어폰에서 여린 음색의 대답이 들렸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이강우는 메고 있던 총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 가방에서 도축을 위한 장비를 꺼냈다. 야간 투시경은 벗었다. 야간 투시경을 쓴 채로 작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불 켜겠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 초라한 불빛 아래 이강우의 도축이 시작됐다.
* * *
갑옷비늘도마뱀의 외형은 코모도 도마뱀과 흡사하다. 대신에 가죽은 악어와 비슷하다.
갑옷비늘도마뱀의 특징은 당연히 갑옷처럼 단단한 비늘이다. 이 비늘을 자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하다.
‘이음새가…….’
갑옷비늘도마뱀의 갑옷 같은 가죽은 실제 갑옷처럼 이음새 같은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을 잘라내는 게 기본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칼로 그 이음새를 잘라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송곳이다.
푹푹!
이강우는 가슴이 뻥 뚫린 갑옷비늘도마뱀을 뒤집은 후에 녀석의 네 다리 안쪽 부분을 송곳으로 찔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어느 정도 피가 빠져나왔을 때 이강우는 모든 방혈 작업이 끝나기 전,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음새 부분을 송곳으로 찌른 후 다시 그 안에 칼을 집어넣는 식으로, 가죽과 살점 사이를 움직이는 이강우의 칼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거칠고 질긴 짐승의 몸뚱이가 아니라 두부를 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한 세 명의 추가 전력이 도착했을 때, 이강우는 갑옷비늘도마뱀의 가죽을 깔끔하게 벗겨낼 수 있었다. 벗겨낸 가죽에는 불지뢰의 흔적이 역력한 만큼 제값을 받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2, 3백만은 받을 수 있다. 갑옷비늘도마뱀의 가죽은 제법 수요가 많으니까.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군.’
그 광경을 보던 안중현은 속으로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방혈 그리고 박피.
몬스터 도축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작업을 10분 안에 끝내는 이강우의 솜씨는 분명 신기(神技)였다.
“천 노인에 비해서 꿀릴 게 없군.”
안중현이 이강우를 짧게 칭찬했다. 그 순간 이강우가 안중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나스톤 빼내겠습니다.”
그 말에 잠자코 도축 과정을 보기만 했던 안중현이 쓰고 있던 야간 투시경을 벗고, 이강우 가까이 접근했다.
마나스톤을 몬스터의 몸에서 빼내는 작업은 마법사의 주관 하에 이루어진다. 총꾼이 마나스톤을 바꿔치기하는 등 수작을 부릴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총꾼 입장에서도 괜한 의심을 받는 것보다 확실하게 확인을 해주는 게 편하다.
이윽고 이강우가 갑옷비늘도마뱀의 배, 꼬리 쪽에 가까운 아랫배를 갈랐다. 일단 내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강우가 내장을 제거한 후 곧바로 배 속으로 손을 넣어 검은 돌멩이 하나를 꺼냈다. 안중현이 검은 돌멩이를 받자마자 준비해둔 수건으로 돌멩이에 묻은 핏덩이와 살점, 체액 따위를 닦은 후에 초라하게 주변을 비추는 작은 손전등 가까이 돌멩이를 가져갔다.
“마블링이 살아있군.”
확인 완료.
안중현이 마나스톤을 준비해온 비단 주머니 안에 넣었다.
“작업은 끝났나?”
“크게 토막 낸 후에 포장하고, 탈취제를 뿌릴 겁니다.”
안중현이 다시금 야간 투시경을 썼다.
“정리한다.”
안중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꾼들이 다시금 경계 자세를 취했고, 이강우가 큼지막한 갑옷비늘도마뱀의 몸뚱이를 토막 냈다. 필요 없는 머리와 내장, 그 외 부위는 버렸고, 나머지는 가지고 온 비닐로 감싼 후에 그 비닐 위로 탈취제를 뿌렸다.
이후 이강우가 나머지 사람들의 몸과 주변에도 탈취제를 뿌렸고, 총꾼 중 한 명이 준비해온 카메라를 천장에 달았다. 360도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갑옷비늘도마뱀의 잔해물에 이끌려오는 몬스터의 정체를 알려줄 것이다.
이윽고 어둠을 밝혀주던 초라한 전등의 빛이 꺼졌다.
처벅처벅!
자그마한 발소리가 어둠을 두드렸다.
* * *
이강우가 도축을 마친 갑옷비늘도마뱀의 고깃덩이를 바라보며 천영수는 인정했다.
‘나보다 낫군.’
보통 도축은 경험이 곧 기술을 완성해준다. 기술이 뛰어나도 경험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 개념이 몬스터 도축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몬스터 도축은 소, 돼지, 닭과 같은 제한된 종을 도축하는 것과 다르게 다양한 종을 도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쌓고 싶어도 쌓기가 힘들다. 결국 타고난 무언가, 그리고 그 무언가를 발휘해줄 적당한 수준의 기술이 핵심이다.
이강우는 그 두 가지 전부를 가지고 있었다.
‘총꾼으로 3년…… 그래도 이 정도면 타고난 정도가 아니지.’
대단한 놈이다.
천 노인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천 노인은 이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강우는 천 노인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축 다음으로 중요한 건?”
이 말이 나왔다는 건, 도축으로 흠잡을 건 없다는 의미다.
“숙성 및 보존이죠.”
이강우가 곧장 대답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처리할 거지?”
“숙성하기에는 좀 그렇고, 9등급짜리를 보존할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식량도 아낄 겸 식사로 처리하죠. 이 정도 양이면 여기 인원 전부가 이틀 동안은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먹는다?
그 말에 장비를 정비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총꾼들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마법사 두 명의 눈빛도 흔들렸다. 안중현의 눈빛만이 흔들리지 않은 채 호기심으로 빛났다.
이윽고 천 노인이 안중현에게 시선을 줬고, 안중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자는 의미.
“요리는 네가 할 테냐?”
그 말에 이강우가 씨익, 웃었다.
“계산서는 유적 클로즈 하고 청구하겠습니다.”
* * *
이강우는 잽싸게 요리를 준비했다. 사실 준비할 건 많지 않았다. 유적에서 해먹을 수 있는 요리,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는 불을 이용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이미 가공된 육수를 끓인 후에 곧바로 먹을 수 있는 샤브샤브와 싱싱한 갑옷비늘도마뱀으로만 즐길 수 있는 도마뱀 육회가 메뉴로 선정됐다.
요리 준비 과정은 금방 진행됐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이들 눈빛에는 어수선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몬스터를 먹나요?”
“식량도 있는데 굳이 몬스터를 먹어야 합니까?”
총꾼이야 까라면 까는 처지이니 무어라 불만을 표출하진 않았지만, 마법사 둘은 달랐다. 그 둘은 안중현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생각보다 먹을 만하지.”
“아무리 그래도 식량이 없는 것도 아닌데, 몬스터를 먹다니 그건 좀…….”
“먹는다.”
안중현의 단호한 대답에 마법사 둘 역시 입을 다물었다. 유적 사냥에서 우두머리인 그의 말은 곧 진리. 그가 먹으라면 마법사들도 먹어야 한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식사합시다.”
* * *
은은한 불빛이 흘러내리는 베이스캠프, 그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갑옷비늘도마뱀의 살빛은 옅은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그 색이 생각 이상으로 예뻤다.
‘보기에는 괜찮네.’
‘내가 예전에 본 몬스터 고기랑은 색이 다른데?’
신속 정확하게 도축이 됐기에 가능한 색이었다. 그냥 무식하게 몬스터를 잡은 후에 피도 빼지 않고, 가죽도 벗기지 않은 채 대충 살점을 잘라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준비한 부위는 세 가지 부위입니다. 가슴살, 등살 그리고 꼬릿살입니다. 생으로 드실 경우에는 간장이나 참기름에 찍어 드시고, 샤브샤브로 드실 경우에는 살짝 담가 드시면 됩니다. 꼬릿살은 조금 질기기 때문에 얇게 썰었습니다.”
설명을 해주던 이강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젠장, 내가 지금 이런 짓을 할 때가 아닌데…….’
불놀이꾼 안중현, 즈믄나래 길드, 블랙 스택, 왕지홍…… 정말 골치 아픈 난제를 맞이한 상황에서 표정을 감춘 채, 심정을 감춘 채 오늘의 요리를 설명해야 하는 심정은 최악이었다.
더 우스운 건 이 순간 이강우, 본인이 그 누구보다 배가 고프다는 점이었다.
유적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강우의 몸속에 있는 식탐이 이강우 스스로도 놀랄 만큼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사황제 야크센 때문인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라고, 눈앞에 있는 모든 걸 먹어 치우고 스스로를 살찌우라고, 불사황제가 하는 말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갑옷비늘도마뱀은…….
“어?”
“응?”
생각 이상으로 맛이 괜찮았다.
“맛있잖아?”
“……놀라울 정도로 맛있는데? 샤브샤브인데, 느낌이 KFC치킨 안의 속살 같아. 감칠맛에 기름기에…… 그런데 퍼석퍼석한 느낌은 전혀 없어.”
“사르르 녹는 이 느낌…… 묘한데 끝내주는군.”
맛은 닭고기와 흡사, 그러나 그냥 닭고기의 맛이 아니라 기름에 튀긴 닭고기에서 느낄 수 있는 단맛과 감칠맛이 가득한 맛이었다. 심지어 식감이 놀라웠다. 닭고기처럼 살결을 이빨로 분쇄하는 느낌이 아니라 굉장히 부드럽고 연한 생선회를 먹는 듯했다. 입에 넣고, 살짝 씹는 순간 입 안에 맛과 풍미가 가득 찰 정도.
생으로 먹으면 식감을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고, 육수에 찍어 넣으면 육수의 풍미가 입 안에서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과 식감에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키우는 순간, 이강우도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이 순간 이강우는 가슴살과 등살은 무시한 채 꼬릿살만 집중 공략했다.
‘얘는 꼬리에 마력이 집중되어 있어.’
분석 마법으로 봤다. 어느 부위에 마력이 모여 있는지.
요리를 자처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보다 마력이 많은 부위를 따로 꿍쳐두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마력을 섭취하기 위해서 나섰다.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가 알아서 자기 몫을 챙겨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법 아닌가?
‘인건비는 벌어야지.’
이강우가 꼬릿살을 입 안에 넣었다. 적당한 쫄깃함 속에 감춰진 감칠맛과 준비한 해물 육수가 어우러지면서 입 안에서 감칠맛이 가득한 농후한 엑기스로 변했다.
삼키는 것조차 조금은 아쉽게 느껴질 정도.
꿀꺽!
이윽고 꼬릿살을 삼키는 순간.
[8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마력 포인트 섭취를 알리는 알림이 떴다. 동시에 이강우의 머릿속에 숫자가 떠올랐다.
‘이제 남은 포인트는 98포인트.’
현재까지 섭취한 섭취 마력 포인트는 4902포인트.
5천 포인트, 새로운 마법을 얻을 수 있는 기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결국 힘이 진리지. 내가 잘 나가는 마법사만 돼봐…… 진짜 내가 20억짜리 아파트에서 10억짜리 차 끌고 다닌다. 오냐, 한번 해보자고. 즈믄나래, 네놈들도 내가 필요하니까 써먹으려는 거고, 그렇다면 나도 네놈들을 써먹을 테니까.’
* * *
유적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에게 유적에서의 첫 식사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만약 유적 첫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유적 사냥은 시작이 굉장히 좋은 셈이다. 제대로 식사를 할 만한 장소를 마련했다는 의미니까.
운이 없으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도 전에 몬스터에게 살해당하거나 몬스터를 피해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데에만 하루가 넘는 시간을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최악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도 전에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고, 그 과정에서 가지고 온 보급품을 잃는 경우. 그렇게 되면 당장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남은 보급품으로 버틸 수 있을지 처절한 계산을 해야 한다. 굶어 죽는 경우도 분명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현이 이끄는 이번 7등급 유적 사냥 파티의 첫 식사는 백 점 만점에 95점 정도는 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진짜 괜찮았지? 몬스터 고기가 이런 맛일 줄은 몰랐는데.”
“여기에 맥주 한 잔 곁들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5점이 깎인 이유는 역시나 술의 부재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미식의 완성은 술인 법이다.
물론 유적 사냥에 술을 가져오는 경우는 없다. 과거 중세시대처럼, 배를 타고 항해를 하는 이들이 물이 썩는 것을 염두에 두고 술을 준비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안전하게, 특색 있는 요리를, 제법 제대로 된 요리로 즐길 수 있는 경험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현재 감시 중인 범위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으면 탐색 범위를 넓힌다.”
만족스러운 식사에 대한 여운은 느낄 시간은 길지 않았고, 안중현의 지휘 아래 파티는 다시금 분주하게 유적 사냥을 위한 작업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처음처럼 거미 로봇 스파디를 이용해서 느리지만, 꾸준히 유적을 탐색했다. 그 후에 가져온 카메라를 중요한 포인트에 설치하면서, 탐색 범위를 꾸준히 넓혔다.
또한 지도를 만든 후에 확실한 안전이 확보되면, 그때 몬스터를 하나씩 제거했다.
사실 지금 안중현이 이끄는 파티는 9등급 몬스터에게 있어서는 재앙이라도 해도 될 만큼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력 좋은 4서클 마법사 한 명에 3서클 마법사 두 명, 여기에 충분한 무장을 마친 노련한 총꾼 열 명까지!
까놓고 말해서 그냥 무식하게 몬스터가 보이는 족족, 처리해도 문제 될 게 없다.
9등급 몬스터 대여섯 마리는 동시에 등장해도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리하지 않았고,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이 구역은 탐색을 마치긴 했는데, 중간에 정체 모를 구멍이 한 개 있었습니다.”
“몬스터의 흔적인가?”
“그냥 구멍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보다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스파디를 보내긴 힘듭니다. 직접 가서 확인할까요?”
“아니, 그냥 그 구역은 제외하도록. 똥인지 된장인지 나서서 구분할 필요는 없으니까.”
“발견된 긴부리원숭이는 어떻게 할까요? 배회 중인데, 괜한 문제가 생기기 전에 잡을까요?”
“환수 타입 몬스터를 굳이 무리해서 사냥을 하러 다닐 필요는 없지. 놈이 한곳에 정착하거나 혹은 세이프 지역에 들어오면 그때 잡는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돌다리를 두들기고 걷는 게 아니라, 그냥 돌다리 위에 시멘트를 부어서 다리를 새로 하나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솔직히 조금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 성질 급한 인간이었다면 언성을 한 번 높일 법할 정도.
하지만 지금 안중현의 지휘에 불만을 가지는 인간은 총꾼과 마법사를 포함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강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강우는 그 누구보다 안중현의 지휘와 파티의 행보에 만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진짜 제대로 된 유적 사냥이지.’
이강우가 경험한 백 번이 넘는 유적 사냥 속에서 지금만큼 마음에 드는 유적 사냥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강우는 이번 유적 사냥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일류는 다르네.’
이게 정답이다.
박준영같이 유적 사냥의 기본조차 모르는 놈들이나 시간에 쫓기는 거다. 진짜 제대로 된 유적 사냥 파티 그리고 유적 사냥꾼은 시간에 쫓기는 게 아니라 시간을 투자한다.
애초에 사냥이란 사냥감을 보자마자 무작정 달려드는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용의주도, 주도면밀.
사냥감을 발견하는 순간, 사냥감의 특징과 움직임, 도주 경로, 주변 상황을 가늠하고 그에 맞춰서 사냥감이 방심하거나 틈을 보일 때 습격을 하거나 혹은 미끼를 이용해 사냥감을 유인하거나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사냥이다.
‘역시 즈믄나래답군. 블랙 스택이 만든 지부답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일류야.’
언제나 그렇지만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디테일에서 나오는 법.
이번 유적 사냥 파티는 그 디테일이 곳곳에 존재했다. 마치 시계 속 부품들이 서로 정밀하게 맞물려 움직이듯, 무리를 이끄는 안중현과 남은 마법사 둘은 물론 총꾼들 역시 모두가 전문가답게 행동했다.
어중이떠중이들, 그저 돈에 눈이 멀어 급하게 마련된 총꾼들과 당장 마나스톤과 마법 아티팩트에만 눈이 멀어 무리한 주문을 하는 유적 사냥 파티와는 수준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때문에 이강우는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돌렸다.
‘그래, 좋게 생각하면 이건 기회야.’
처음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에 괜히 휘말리는 게 아닌가, 왜 이런 거대세력들의 은밀한 불법행위에 코가 꿰인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어떻게 해도 그들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사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특히 유적 사냥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면서 이강우는 생각을 바꿨다.
‘내가 즈믄나래 길드로 들어가서 손해 볼 건 없지. 아무렴.’
생각해보면 즈믄나래 길드가 어중이떠중이 길드도 아니고, 과거 이강우가 몸을 담았던 하이에나 크루인 핏불 크루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엘리트 집단이다.
코가 꿰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곳이다. 마법사들조차 들어가고 싶어 하는 길드 중 한 곳이다.
그런 곳에 코가 꿰인다?
물론 그들이 이강우를 그저 한 번 쓰고 버릴 소모품으로 쓸 생각이라면 코가 꿰이는 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이강우가 봤을 때 자신이 이번 사냥에 참가한 건, 자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확실하다.
‘내가 가진 가치는 적어도 그냥 총꾼보다는 높아.’
이강우는 그들에게 어필할 요소가 확실히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강우가 노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모래시계문 방조로 몬스터를 도축하고, 불법거래를 하는 왕지홍보다는…… 그래도 얼굴 내걸고 마법사로 활동하는 안중현을 뒷배경으로 두는 게 내게는 유리하겠지.’
안중현을 후광으로 두는 것.
왕지홍보다는 안중현이 낫다.
‘그럼 어떻게 해야 어필을 할 수 있을까…….’
이 바닥에서 약자는 스스로 제 몫을 챙겨야 하는 법. 결단을 내린 이강우는 빠르게 그에 맞는 시나리오를 그렸다.
* * *
안중현은 능숙한 솜씨로 긴부리원숭이의 시체를 해체하는 이강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
유적 입장 5일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이강우가 보여준 솜씨는 여러모로 훌륭했다.
도축 실력은 일단 합격점이다. 막말로 현재 안중현이 알고 있는 몬스터 도축 기술을 가진 기술자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천영수와 비교해서도 부족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도축 실력이 이강우가 가진 전부가 아니었다.
“긴부리원숭이는 환수 타입이라서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도축은 할 수 있지만, 긴부리원숭이를 먹는 게 인체에 무해한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냥 마나스톤만 채굴한 후에 남은 시체는 미끼로 쓰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이강우는 긴부리원숭이의 몸을 토막 냈다.
그 후에 토막 낸 것들을 길에 놓았다. 그냥 놓은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았다. 또한 긴부리원숭이의 피를 토막과 토막 사이에 선을 긋듯 뿌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작업이 끝난 후에는.
“카메라 위치는 여기가 좋을 겁니다.”
카메라를 설치하기에 가장 알맞은 위치까지 찾아서 알려줬다.
그 모습을 본 안중현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딱히 태클을 걸 곳이 없군.’
유적에서 몬스터의 사체를 미끼 삼아 다른 몬스터를 유인하거나 혹은 몬스터의 존재와 행동 범위를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사실은 어지간한 초짜들도 안다.
하지만 초짜들은 그냥 시체를 한곳에 두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만다. 멍청한 짓이다. 몬스터는 짐승과 다르다. 어떤 몬스터는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감출 수 있고, 어떤 몬스터는 먼 거리에서 몬스터를 끌어당겨서 먹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지금 이들이 있는 유적처럼, 불빛 한 점 찾기 힘들어서 야간 투시경을 써야만 움직일 수 있는 장소에서는 아무리 특수하게 제작된 카메라라고 해도 아주 훌륭한 화질과 정보를 얻기는 힘들다.
때문에 미끼를 토막 내서 일정한 거리를, 미끼를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도록 연출을 해야 한다.
보통은 모른다. 몬스터를 그저 무시무시하고, 힘센 짐승쯤으로 생각하니까. 몬스터를 몬스터라고 받아들이는 이들만이 몬스터의 특성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강우는 당연히 후자였다. 모든 행동이 힘센 짐승이 아닌 몬스터를 초점에 두고 이루어졌다.
‘전직 총꾼 경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 경력이 더 긴 모양이군.’
뛰어난 도축 실력과 충분한 총꾼 경력. 여기에 추가로 마나스톤 감별사 능력까지!
‘왕지홍에게 주긴 아깝군.’
안중현은 이강우가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왕지홍 밑에 두기에 아까웠다. 왕지홍은 정체를 감춘 채 즈믄나래 길드가 대놓고 하기 힘든 불법행위를 대신 해주는 역할이다. 그의 밑에 있으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재수 없으면 그렇게 치른 곤욕이 기일이 된다.
결정적으로 안중현에게는 실력 좋은 도축자가 필요했다. 마법사들의 전력이 점차 평준화되는 와중에서 유적 사냥을 통해 보다 많은 이익과 보다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플러스알파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도축자의 존재감은…… 아직은 모르지만, 유적 사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일류 길드 사이에서는 앞으로의 유적 사냥 판도를 바꿀 요소로 주목받고 있었다.
‘천 노인은 내가 멋대로 다루기에는 거물이지만…… 이강우란 녀석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분명하다.
즈믄나래 길드에 소속된 다른 마법사들도 이강우의 가치를 안다면, 분명 찌를 것이다.
그리고 왕지홍 밑에 있으면, 다른 마법사들도 이강우의 가치를 알게 될 터.
그 전에 빼야 한다.
‘무슨 제안을 하는 게 좋을까…….’
안중현이 슬슬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시작했다.
그런 안중현의 시선을, 뒤통수로 느껴지는 시선을 모를 리 없는 이강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한번 좀 찔러 봐라. 대충 조건만 맞으면 냉큼 넘어갈 테니까.’
이강우의 생존비결 중 하나가 바로 마법사의 비위를 맞추는 능력 아니었던가? 유적 사냥을 하는 마법사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그 누구보다, 마법사보다 잘 안다. 그 점을 노리고 자신을 어필했다.
효과는 확실할 것이고, 이강우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 순간.
-속보. 몬스터 발견. 7등급으로 추측 중.
이강우가 속으로 지은 미소를 삽시간에 울상으로 바꾸는 소식이 전달됐다.
* * *
모니터 위로 보이는 건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불꽃 하나였다. 마치 귀신의 혼령처럼 보였다.
그런 불꽃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무언가가, 어둠과 비슷한 무언가가 같이 움직였지만 그 실체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냥 아지랑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실체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 움직일 때마다 미끼로 뿌려 놓은 몬스터의 토막 난 시체가 사라졌다.
덕분에 오히려 더 쉽게 몬스터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불꽃꼬리군.”
불꽃꼬리.
7등급 몬스터로 환수 타입의 몬스터다. 환수 타입이란 건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마법으로만 타격을 줄 수 있다.
불꽃꼬리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유자재로 몸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곰이 될 수도 있고, 뱀이 될 수도 있고, 온갖 짐승이 섞인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불꽃꼬리란 명칭답게 꼬리에 불이 붙는데, 그 불을 꺼야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불꽃꼬리의 불을 끄기 전에는 놈의 몸뚱이에 아무리 마법으로 타격을 줘도 소용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이놈이라니…….”
안중현의 마법 속성은 그의 별명인 불놀이꾼답게 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로 불을 끌 순 없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데려온 두 명의 마법사는 안중현과 전혀 다른 속성의 마법을 쓴다.
하지만 그래도 4서클 마법사가 처리하는 게 베스트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선보다 나은 차선은 없다.
안중현이 짧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안중현은 그 쓴웃음을 곧바로 지웠다.
“이 유적의 주인은 불꽃꼬리로 규정한다. 그에 맞는 작전 계획을 이제부터 짜겠다.”
안중현이 지휘자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불꽃꼬리 사냥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