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4화 (4/66)

4화. 몬스터 도축자

왕지홍, 그의 밑에서 마나스톤 감별사로 일을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이걸로 이번 달 병원비랑 생활비는 입금했고…….’

그 석 달 동안 이강우에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 달 전 정말 돈이 너무 급해서 은퇴를 번복하고, 총꾼이 되어 무작정 의뢰를 받은 후에, 유적 사냥에서 불사황제 야크센의 권능을 얻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 과정 전부가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난 석 달간 이강우의 삶은 평온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2015년 모래시계문이 세상에 등장한 이후 어떤 식으로든 몬스터와 목숨을 건 투쟁을 치러야만 했던 이강우의 삶에서 가장 평온했던 석 달이었다. 은퇴 후 보낸 1년이란 세월 역시 사업을 한답시고 나서면서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솔직히 이런 삶이 이강우가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강우는 억 소리 나는 돈을 십억 소리 나는 돈으로 바꾸고 싶었고, 사업에서 성공해서 그야말로 인생역전, 화려한 삶을 꿈꿨었다.

그때의 꿈에 비하면 지금 삶은 솔직히 구질구질하다. 한 달에 만질 수 있는 돈은 3백만 원 안팎.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이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내일 일이 끊겨도 이상할 건 없다. 혹은 불법 마나스톤 거래라는 죄목으로 수갑을 찰 수도 있다.

또한 수입도 불규칙하다. 매일 마나스톤 감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요청이 있을 때만 한다. 여기에 매달 나가는 여동생과 어머니의 병원비, 생활비 때문에 적금 하나 들기 힘들다.

심지어 지금 이강우는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을 쓸 수가 없었다. 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 처지가 됐고, 총꾼으로 일하면서 반쯤 지명수배자나 다름없는 꼴이다.

구질구질한 삶.

하지만 이강우는 이 구질구질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삶이 계속되리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유?

‘내 인생 팔자에 이런 평온함이 오래 갈 리 만무하지.’

이강우가 미래에 어떤 차를 끌고 다닐지는 그도 모르지만, 이강우는 자신의 팔자가 어떤 팔자인지는 안다. 사업을 하면 무조건 망할 팔자, 사업이 아니더라도 평생 조용히, 평온하게 살 수는 없는 팔자.

더군다나 이강우는 불사황제 야크센과 조우한 기억을, 그의 섬뜩한 기세와 그가 품은 눈빛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 불사황제의 의지와 힘이 이강우의 몸속에, 영혼 속에 있다. 만약 이강우가 계속해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불사황제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때는 불사황제의 권능이 이강우의 목을 조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가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이강우를 미치광이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분명하다.

최근 석 달간의 평온함은 폭풍전야의 고요함일 뿐이다. 조만간 아주 큰일이 터질 것이다.

‘큰일이 터지는 건 아무래도 좋은데, 내게 이득이 되는 큰일이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왕지홍.

‘이 바닥에 양반은 없는 법이지.’

드디어 큰일이 왔다.

* * *

“총꾼 시절에 몬스터 해체를 해 본 적이 있나?”

왕지홍, 그는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다짜고짜 이강우에게 몬스터 해체 경험을 물었다.

‘드디어 왔구나.’

여기서 이강우는 촉을 느꼈다. 왕지홍의 의중이 무엇인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왕지홍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많이 해봤습니다. 유적 사냥에서 몬스터를 잡고, 마나스톤 채집은 거의 제 몫이었죠. 횟수로 따지면…… 제가 유적 사냥을 백 번 넘게 했고, 보통 유적 한 곳에서 적게는 대여섯 마리, 많게는 스무 마리도 넘게 몬스터가 나오니까 대충 횟수로 따지면 천 번은 넘었겠군요. 아마 제가 지금 얻게 된 마나스톤 감별능력도 그 덕분인 것 같습니다. 몬스터 해체도 많이 해보고, 마나스톤도 많이 만져 봤죠.”

대답을 하면서도 이강우는 왕지홍의 의중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서 몬스터 해체라니…… 의중이 너무 뻔하잖아?’

왜 왕지홍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다짜고짜 몬스터 해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 의중을 파악하는 건, 눈치가 조금 있다면 그리고 왕지홍의 주력 사업이 뭔지 안다면 금방 알 수 있다.

“길게 돌려 말하지 않겠네. 조만간 유적을 하나 사냥할 건데…… 거기에 총꾼으로 합류한 다음 잡은 몬스터를 좀 썰어 주게.”

몬스터 도축 사업!

“……몬스터를 썰라는 게 저보고 마법사들처럼 몬스터를 썰라는 건 아닐 테고.”

왕지홍은 이강우가 도축업자로 유적 사냥에 참가해주기를 원했다.

“몬스터 도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순간 이강우는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일단 긴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저번에 말했던 대로 유적에 들어가는 건…….”

“선수금 4천만 원.”

큼지막한 액수가 나왔다.

“아티팩트와 마나스톤에 대한 지분을 포기하는 대가로 클로즈 보너스는 3만 달러 지급일세. 돈은 클로즈를 완료하는 순간 현장에서 달러로 즉시 지급.”

“예?”

여기서 이강우는 자신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4천만 원? 클로즈 보너스가 3만 달러?’

놀란 이유는 단순히 왕지홍이 제안한 액수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큰 액수지만, 정말 노련한 총꾼이라면 그 액수에 눈이 돌아가서는 안 된다.

“지금 설마 7등급짜리 유적을 말하는 겁니까? 저보고 7등급 유적 사냥 참가?”

그만한 돈을 총꾼에게 준다는 건, 달리 말하면 위험성과 수익성이 굉장히 높은 등급의 유적이란 의미다. 총꾼에게 7천만 원 정도 준다는 건, 유적 등급이 최소 7등급이란 의미다. 8등급 유적은 총꾼 리더를 맡아도 2천만 원을 받기가 힘든 게 현실이니까.

반대로 그만한 돈을 지불할 가치가 7등급 유적에는 충분히 있다.

7등급 유적은 마법사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요, 기업들이나 길드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이니까. 물론 총꾼들에게는 공동묘지 같은 곳이지만.

‘여기서 7등급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일단 7등급 유적이 가지는 가장 큰 가치는 3서클 마법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8등급이나 9등급 유적에서 3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전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례를 수집해서 통계를 만드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8등급과 9등급 유적에서 3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또한 7등급 몬스터에서 나오는 마나스톤이 있어야 3서클 마법 아티팩트에 쓸 수 있는 마력을 정제할 수 있다. 몬스터 등급에 따라 마나스톤이 가지는 마력의 질과 양이 달라지며, 3서클 마법 아티팩트가 요구하는 마력의 질은 7등급 이상의 마나스톤에서 구할 수 있다. 9등급이나 8등급 마나스톤을 특수한 기술로 정제해서 마력의 질을 높이면 3서클 마법에 쓸 수 있지만, 이강우가 알기로는 그렇게 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마나스톤 값보다 기술이나 기타 비용이 더 든다.

그리고 3서클 마법부터가 진짜 마법이다. 특히 치료 마법 중에 실질적인 효용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법들이 대부분 3서클 마법이다. 공격 마법 역시 3서클 마법의 위력은 1~2서클 마법과 궤를 달리한다. 1~2서클 마법 중에 공격 마법으로 서열을 정하는 건 어느 총이 더 세다, 더 좋다, 수준의 이야기다. 하지만 3서클 마법부터는 곡사포냐, 박격포냐…… 뭐 이런 수준의 이야기가 된다.

물론 여기까지는 유적 사냥을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마법 산업 관련 기업들, 길드들, 마법사들 이야기이고 총꾼들에게는 툭 맞으면 비명횡사하는 세계다. 몬스터들의 강함, 특수성이 차원이 다르다. 총꾼들의 몸값이 갑자기 확 오르는 건 사망위로금을 선지급해준 덕분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유적 사냥 파티에는 4서클 마법사 한 명과 3서클 마법사 두 명이 포함되어 있네. 또한 자네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총꾼 아홉 명 그리고 충분한 화력지원까지. 적어도 소총으로 무장된 파티와는 차원이 다를 걸세.”

물론 7등급 이상의 유적은 가치가 있는 만큼 위험하고, 위험한 만큼 준비도 철저하게 한다. 파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의 수준도 달라지고, 총꾼들의 무장 상태도 달라진다.

그래서 석 달 전에 박준영이 계방산에 등장한 모래시계문을 두고 7등급이 아니라서 아쉽다고 했을 때, 이강우가 속으로 그를 시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씹은 것이다. 고작 그 정도 실력과 병력, 조합과 무장 상태로 7등급 유적을 사냥하는 건 자살행위니까.

사실 그런 점 때문에 의외로 7등급 유적 사냥에서 총꾼의 사망률은 8등급 유적이나 9등급 유적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은 건 아니었다. 낮은 건 아니지만, 지급되는 돈의 액수를 감안하면 무시할 정도는 된다.

‘오히려 돈 때문에 오합지졸, 급하게 모인 8등급, 9등급 유적 사냥 파티보다는 그래도 나름 실력자들이 모인 7등급 유적 사냥 파티가 낫긴 하지. 문제는 내가 낄만한 일이 아닌데, 대체 왕지홍이 날 어떻게 꽂아 넣을 수 있는 거지?’

그래서 놀랐다.

이강우가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 그는 제법 총꾼으로는 이름이 났지만, 하이에나 크루 소속인 그를 7등급 유적 사냥에 참가시켜주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보안상의 이유도 있고, 이미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무리에 굴러온 돌이 들어오는 게 모양새도 그렇고, 그런 요소들을 감수할 만큼 이강우의 합류가 이익이 되는 건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총꾼 한 명의 합류가 전력에 미치는 영향은 높지 않다. 총꾼은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이고, 주력은 마법사다.

그런데 자신을 집어넣는다?

‘왕지홍, 이 양반 배후에 크루나 길드가 있다는 의미인데?’

왕지홍의 권력이나 영향력, 배경이 이강우의 생각보다 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

어쨌거나 이강우가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짧게 한숨을 내쉬기 시작하자 상황을 지레짐작한 왕지홍이 설득을 위해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자네는 어디까지나 보조일세. 우리 쪽에서 칼잡이를 보내지만, 알다시피 유적에서는 누가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닌가? 그 칼잡이가 당할 경우, 그를 대신해 몬스터를 썰어 줄 실력자가 필요하네.”

왕지홍의 말에 이강우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스페어가 필요하다, 이거군요.”

“스페어인 만큼 실력보다는 일단 생존 능력이 중요하네. 자네의 경력이 가장 큰 가산점이 됐지.”

“1년 공백기가 있는 저를 그저 경력만 보고 뽑으셨을 리는 없고…….”

“두 번째는 신용일세. 아무래도 도축기술이란 게 외부에 유출하면 손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기술인만큼, 신용도 없는 자에게 알려줄 수는 없지.”

신용!

그 두 단어에 대한민국 금융권이 인정한 신용불량자,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신용이 좋다는 이야기는 태어나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자네만큼 신용이 높은 사람은 없지 않나?”

그 말에 이강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기운이 이강우의 얼굴을 뒤덮었다.

모를 리 없으니까.

왕지홍이 지금 신용을 운운하면서 내뱉은 이유의 의미를, 의중을, 속뜻을 모를 리 없으니까.

“자네는 죽으면 죽었지, 가족을 두고 도망치는 사내는 아니니까. 이 바닥에선 자네보다 신용이 높은 사람은 단언컨대 없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정말로 원치 않는다면 안 해도 좋네. 자네는 유력한 후보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정말 노련한 총꾼이라면 이번 일이 마냥 위험하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건 나보다 더 잘 알 터. 선수금과 클로즈 보너스 외에 자네가 도축해온 고기에도 수수료를 지불하겠네. 만약 자네가 정상적으로 유적 사냥과 임무를 마친다면 1~2천만은 충분히 더 받을 수 있겠지. 그럼 대략 1억 정도 되는 돈을 유적 사냥 한 번으로 벌게 되는 걸세. 지금 마나스톤 감별사로 3년 가까이 일을 해야 하는 돈을 한 달 만에 벌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진 않지.”

왕지홍이 말을 마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짜장면 두 그릇.

왕지홍이 한턱 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정말 조촐하기 그지없는 대접이었다. 이강우가 조금은 실망한 기색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이윽고 이강우가 짜장면을 반쯤 먹었을 때.

“제가 뭐부터 배우면 되는 겁니까?”

이강우가 왕지홍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왕지홍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기술을 배워야지.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지하로 안내해주겠네. 그곳에 작업실이 있으니까. 장담하지. 배워서 나쁠 건 절대 없을 걸세.”

* * *

식사를 마친 후 왕지홍이 이강우를 데리고 향한 곳은 만석루 건물 지하 1층이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간 지하 1층은 조리 도구들 따위가 대충 정리되어 있는, 그야말로 창고였다.

그 순간 이강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석 시작.’

[분석 마법이 시작됩니다. 지속 시간은 5분입니다.]

이강우의 눈에 생긴 묘한 일렁거림, 이강우가 분석 마법을 썼다는 증거였다.

‘오호.’

분석 마법을 쓰자 이강우가 보는 세상이 달라졌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창고, 하지만 입구가 있는 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서는 벽 틈으로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밀의 방 같은 게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세 곳이나 될 줄이야?’

벽 틈에서 흘러나오는 건 다름 아니라 마력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벽으로 보이는 곳의 틈으로 마력이 흘러나온다는 건 그 벽 너머에 특별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안에 마력을 품은 것들이 있다는 의미다. 마나스톤일수도 있고, 마법 아티팩트일 수도 있다. 혹은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다. 몬스터 고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인천마법시장에서 최근 가장 돈벌이가 좋다는 왕지홍의 거점이다. 마법과 관련된 게 없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소가 세 곳이나 될 줄이야?

‘시침 뚝.’

그러나 이강우는 그 이상 호기심을 품진 않았다. 궁금하긴 하지만, 이 이상 괜한 호기심을 품었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거나, 너무 많이 알면 명줄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적당히 아는 게 도움이 되는 거지.

그런 이강우의 모습에서 의심할 구석을 찾지 못한 왕지홍은 이강우를 자신이 선 벽 앞으로 불렀다.

“이리 오게.”

이윽고 왕지홍이 벽에 숨겨진 스위치를 누르자, 벽이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건 또 다른 문이었다. 철로 된 문 앞에는 하얀 가운과 장화 그리고 장갑 같은 위생용품을 비롯해서 위생 관련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왕지홍이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장화를 신었다. 이강우도 따라서 했다. 위생용품 착용을 마친 후에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칙칙, 소리와 함께 소독약이 뿌려졌고, 소독약이 찰랑거리는 길을 장화를 신은 채로 밟고 지나갔다.

“위생이 철저하시군요.”

“먹는장사 하는 사람들은 위생관리에 철저해야 하는 법일세.”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을 왕지홍이 여는 순간, 이강우는 살짝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왕지홍이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감이 좋군.”

이강우가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몬스터 같은 게 느껴지면 일단 뒤로 빼는 체질이라서 말입니다.”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 평생 그렇게 살았다. 몬스터와 언제나 일정 거리 이상을 벌리고자 했다. 그렇게 하도록 훈련을 받았고, 적지 않은 유적 사냥 동안 살아남기 위해 그런 능력을 어떻게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득해야 했다.

“총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걱정 말게. 이곳에서 살아있는 놈은 취급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는 살아있는 놈을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강우는 그 질문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에 이강우는 왕지홍을 따라 전진했다.

‘이제 마냥 뒷걸음질 칠 수는 없지.’

눈앞에 보이는 숫자, 마력 포인트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30평 남짓한 공간은 밝은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지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깨끗한 공간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었고, 그 테이블 위에는 털이 깨끗하게 벗겨진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그 멧돼지 앞에는 위생장비를 착용한 노인이 있었다.

“천 노인, 제가 말한 그 사내입니다. 지금 마나스톤 감별사로 일하고 있는 이강우란 녀석입니다. 이강우, 이쪽은 내 휘하 기술사 천영수 씨일세.”

천영수.

앞치마에 장화, 장갑 그리고 마스크와 위생모까지 착용한 그는 외형적인 모습은 절대 노인이라 불릴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일단 보이는 몸집과 덩치가 마치 보디빌더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 너머로 보이는 근육은 터질 듯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드러내고 있는 눈과 눈가의 주름이 나이를 짐작게 해줬다.

더불어 그 눈빛은 굉장히 살벌했다.

‘마주치면 욕본다.’

이강우는 천 노인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눈빛을 외면했다.

그런 게 있다. 눈빛만 마주쳐도 아주 상대를 잡아먹을 듯이 나오는 성격 괴팍한 자들이. 천 노인은 분명 그런 부류였다.

“흥.”

천영수는 잽싸게 제 눈빛을 피하는 이강우의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쓰고 있는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제야 노인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잽싸게 내 눈빛을 피하고 꼬리를 내리는 걸 보니, 확실히 명줄은 챙길 줄 아는 타입이군.”

“유적 사냥까지 보름 남았습니다. 그동안 가르치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겠습니까?”

“그거야 저놈 능력에 따라 다르지.”

천 노인이 곧바로 이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됐군. 이제 막 한 마리 썰려고 했는데, 대충 견적은 낼 수 있겠군.”

말과 함께 천 노인이 다시 마스크로 입을 가린 후에, 곧바로 발골용 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몬스터 앞에 서더니 이강우를 향해 질문을 했다.

“이 녀석 이름이 뭐지?”

무심한 듯 시크한 그 질문에 이강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9등급 몬스터인 칼니멧돼지입니다.”

가죽이 전부 벗겨지긴 했지만 큼지막한 머리에 달린 칼처럼 생긴 송곳니를 보는 순간 이강우는 단숨에 몬스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9급 몬스터 칼니멧돼지. 칼처럼 생긴 송곳니를 가진 멧돼지로 덩치는 일반 멧돼지와 비슷하지만 멧돼지보다 더 포악하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앞세운 놈의 돌진공격에 당하면, 그 후 결과가 끔찍하다. 한 번에 내장파열 등으로 죽으면 다행이다. 녀석의 송곳니에 한 번 꽂히면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렇게 꽂힌 상태에서 녀석의 거듭된 박치기를 당하면……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기 힘들 정도다.

“도축해 본 적 있나?”

“도축해 본 적은 없습니다. 애초에 칼니멧돼지는 머리만 챙기면 되는 놈이니까요.”

그래도 칼니멧돼지는 제법 돈이 되는 놈이었다. 녀석이 가진 칼 모양의 송곳니는 개당 1백만 원에 거래가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니까. 9등급 몬스터의 몸에서 나오는 마나스톤 가격이 3백만 원 정도이니, 부수입이 꽤 짭짤한 편이다.

더불어 녀석은 마나스톤을 몸이 아닌 머리에 가지고 있었다. 머리만 자르면 나머지 부위는 썩어 문드러져도 상관없다.

“해체해본 경험은 없다, 이거군. 그럼 이 녀석을 도축하려면 뭐부터 해야 할 것 같나?”

그 질문에 이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장 놈을 잡은 이후 순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천 노인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잡았다면…… 일단 피부터 빼야겠죠.”

“……가슴부터 가른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기본적인 지식은 있는 모양이군.”

도축 과정은 일단 도축 대상을 기절시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기절을 시킨 후에 출혈을 일으켜서 과다출혈로 죽게 만들고, 이후 박피 혹은 탕박 작업을 통해 털이 있는 피부를 벗기거나 혹은 털을 태운다. 그 후에 머리를 제거하고, 내장을 제거하고, 반으로 가르는 작업을 한다. 여기부터는 정육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작업이 시작된다. 뼈와 살을 분리하고, 살과 지방을 제거하는 정형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도축 작업을 이강우가 알 리 없다. 단지 이강우는 몬스터에서 마나스톤을 얻기 위해 몬스터를 해체해보면서 피를 뺀 놈과 피를 빼지 않은 놈의 차이를 알고 있을 뿐이다. 피를 빼지 않으면 작업을 할 때마다 피가 샘물처럼 고이기 때문에 작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초보 총꾼들은 마나스톤 하나 얻는 데 서너 시간을 쓰다가 탈진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네 말대로 피를 빼는 게 먼저다. 그 후에 보다 원활한 작업을 위해서는 박피 작업을 하는 게 낫겠지만 유적 안에서 박피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는 없다. 때문에 유적에서는 네 가지 과정을 거친다. 일단 방혈 작업. 그다음은…….”

스윽스윽!

천 노인의 손이 이미 피가 빠진 칼니멧돼지의 목 주변을 가볍게 움직였다.

뚝뚝!

뼈가 끊기는 소리가 나더니.

쿵!

순식간에 칼니멧돼지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강우는 이 부분에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저거 자르는데 10분은 낑낑거리는데…….’

칼니멧돼지는 목만 자르면 일단 해체는 거의 다 끝나는 놈이기에 작업하는 게 쉬운 편이다. 머리에 송곳니와 마나스톤이 있으니까. 몸뚱이는 그냥 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10분은 필요하다. 몬스터의 가죽은 일단 일반 짐승 가죽보다 훨씬 질기다. 여기에 녀석들의 근육과 지방 역시 보통 동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술과 요령을 모르면, 잘 드는 칼을 줘도 가죽조차 제대로 못 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칼니멧돼지의 목뼈는 꽤 두껍고, 구조가 복잡해서 뼈와 뼈 사이에 제대로 칼을 넣어 끊는 작업도 쉽진 않다.

이강우도 10분 정도는 줘야 머리를 잘라낼 수 있다. 그런데 천 노인은 그 작업을 분이 아닌 초 단위 만에 끝내버렸다.

그렇게 칼니멧돼지의 목이 떨어지자, 이강우의 눈에 보이는 숫자가 두 개로 늘어났다.

[575/850]이었던 숫자가 [363/380]이라는 숫자와 [212/470]라는 숫자로 나뉘었다.

머리 쪽이 [363/380]이었다. 마나스톤이 있는 부위이기에 마력 수치가 그렇게 나온 듯싶었다.

달리 말하면…….

‘9등급 몬스터 한 마리가 가진 마력이 850포인트. 개중에서 마나스톤을 제외해도 최소 절반이 남는다, 이건가?’

몬스터는 마나스톤 외에도 몸 자체에 적지 않은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는 의미. 마나스톤은 유적 사냥을 같이하는 파티원들에게 배분하더라도 고기만으로도 충분히 마력 포인트를 섭취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거 한 마리 다 처먹으면 1천 포인트.’

물론 이 거대한 칼니멧돼지를 혼자서 다 처먹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다.

‘핵심은 포인트가 높은 알짜배기를 어떻게 빼먹느냐, 그거군.’

마나스톤처럼 마나가 유독 밀집된 부위가 있을 것이다. 그걸 골라서 먹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그걸 골라 먹기 위해서는…….

“목을 자르고, 다음은 가슴을 열어서 내장을 제거한다. 이게 두 번째 단계다. 세 번째 단계는 부분 적출. 유적 안에서 보존 및 운반할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다. 참치로 따지면 대뱃살만, 소로 따지면 꽃등심만 얻고 나머지는 버리는 거지. 적출을 마친 이후에는 마지막 네 번째 단계인 보존으로 넘어간다.”

이 기술이 필요하다.

그 무시무시하고 질긴 몬스터의 몸뚱이를 두부 썰듯 가뿐하게 썰어버리는 천 노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어떻게든 이 기술을 얻어야 해.’

이강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천 노인이 움직였다. 단숨에 칼니멧돼지의 가슴마저 손쉽게 열어버린 천 노인은 그 모습을 이강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이강우를 바라봤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이강우는 천 노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힘껏 부라리며 천 노인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꿀꺽!

그 무시무시한 기세의 천 노인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녀석…….’

이 순간 천 노인의 본능이 말해줬다. 지금 이강우가 가지고 있는 눈빛이 무슨 눈빛인지.

‘보통 놈이 아니군.’

그건 모든 것을 자신이 먹어 치워야 하는 먹잇감으로 바라보는 최상위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 * *

왕지홍은 이강우가 천영수의 스페어가 되기를 원했고, 이강우는 천영수의 도축 기술을 얻기를 원했다. 그리고 천영수는 이강우의 재능을 인정했다. 셋의 이익이 부합되는 순간 모든 일은 신속하게 처리됐다.

이강우는 매일 만석루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만석루 지하에 위치한 도축장에서 천 노인의 도축을 돕는 한편, 천 노인으로부터 몬스터 도축 기술 및 몬스터에 대한 지식을 공부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셋 모두가 놀랐다.

일단 천 노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자신의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는 이강우의 재능과 능력에 놀랐다. 처음에는 보름이란 기간이 빠듯할 듯했지만 오히려 일주일째가 됐을 때 이강우는 어지간한 기초는 전부 습득하는 놀라운 소화력을 보여줬다.

이 점에서는 이강우도 놀랐다.

‘아니, 내게 이런 재주가?’

나름 3년 동안 총꾼으로 유적 사냥을 하면서, 좀 더 수입을 얻기 위해 유적 내에서 몬스터 해체라는 부업을 했던 경험이 큰 영향을 줬겠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이강우의 기술 습득력은 이강우 본인이 봐도 괴상할 정도로 빨랐다.

‘설마 이것도 불사황제 야크센의 권능을 받은 덕분인가? 내 몸에 뭔가 변화가 생긴 건가?’

자기 자신을 모를 이강우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보여주는 습득력과 소화력은 그가 본래 가진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몬스터를 해체할 때, 천 노인이 뭔가를 가르쳐주기도 전에 몬스터의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자르면 더 쉽게 자를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촉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 마치 포식자가 사냥감을 잡는 순간, 먹잇감의 어디를 물어뜯어야 편하게 포식을 즐길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이강우의 성장 속도에 왕지홍도 놀랐다. 왕지홍은 백광현으로부터 이강우를 소개받았을 때, 그의 이력을 알게 됐을 때 왕지홍은 마나스톤 감별사보다는 도축업자로 그를 영입하고 싶었다. 누가 보더라도 적격자 중의 적격자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빠른 성장을 보일 줄이야? 진흙 속에서 진주가 나오면 횡재하는 느낌이 들지만, 금덩이가 발견되면 횡재보다는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법이다.

‘이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하나?’

왕지홍이 이강우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무렵, 그런 왕지홍에게 천 노인이 기다렸던 통보를 했다.

“이강우, 그 녀석을 내 보조로 데려가겠소.”

천 노인이 이강우를 인정하는 순간, 왕지홍은 미소를 지었다.

‘깐깐한 천 노인이 답을 내렸으니, 끝이군.’

그리고는 곧바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 * *

흐으응, 이강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원룸에 마련된 작고 조잡한 부엌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건 육회였다. 도축장에서 도축을 하고 남은 부위를 가지고 온 뒤 육회를 만들기 위해 썰고, 가볍게 참기름을 뿌리고 만석루에서 몰래 가져온 배를 잘게 썰어 육회 위에 올려놓았다.

요리가 끝나는 순간 이강우는 맛보기라고 하기에는 꽤 많은 양의 요리를 덥석, 입 안에 넣었다.

[11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곧바로 눈앞에 뜬 알림에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맛도 좋고, 마력도 좋고, 아주 그냥 죽여주네.’

그러나 이강우가 만든 육회의 비주얼은 그렇게까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육회라기보다는 대충 보면 짜장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보통 육회라면 탐스러운 선홍빛 육질과 그 주변을 감싼 매끈한 참기름의 기름기, 그 사이에서 포인트를 주는 하얀 배의 색감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강우가 만든 육회는 윤기가 돌긴 했지만, 고기 자체가 시커멓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썩어도 아주 심하게 썩은 고기라고 생각할 정도. 그걸 맛있다고 먹는 이강우가 미친놈으로 보일 정도.

‘흑혈우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고기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9등급 몬스터 흑혈우(黑血牛)였다.

버팔로와 비슷한 생김새를 한 흑혈우는 온몸의 털과 가지고 있는 뿔의 색이 검다.

특이사항은 눈이 없어서 시력이 없고, 청각과 후각도 썩 좋지 못하다는 것. 오감이 발달하지 못했다. 대신에 무지막지한 힘과 어떤 것이든 낌새를 느끼는 순간 앞뒤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부딪치고 보는 호전성은 여러모로 까다로웠다.

별명은 총꾼 킬러!

총성이란 낌새를 낼 수밖에 없는 총꾼 입장에서는 9등급 몬스터 중 꽤 골치 아픈 상대였다.

좌우로 도망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라면 투우사처럼 흑혈우의 뒤도 돌아보지 않는 돌진을 피할 여지라도 있겠지만, 좁은 통로 같은 곳에서 흑혈우를 만나면, 그냥 놈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할 정도다. 괜히 멋모르고 방아쇠라도 당겼다가는…….

그 순간을 떠올리던 이강우가 슬그머니 자신의 접시 위에 담긴 흑혈우의 엉덩이 부근, 소로 따지면 홍두깨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만든 육회를 바라봤다.

‘그때 진짜 죽을 뻔했지.’

이제까지 흑혈우에 대한 기억은 썩 좋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 맛이라면…… 한 번 목숨 걸고 잡아 볼만은 하지.’

흑혈우의 맛은 과거 녀석과의 안 좋은 기억을 곱씹을 만한 추억으로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고기 특유의 풍미와 감칠맛은 보통 소고기보다 곱절이나 될 정도로 강렬했다. 그렇다고 마냥 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강렬함! 특히 씹는 순간 이빨을 살짝 튕겨낼 정도로 질긴 살점을 기어코 이빨로 짓이겼을 때 마치 날치알이나 연어알이 터지듯 육질이 터지면서 그 안에 있던 감칠맛이 폭발하듯 터지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은…… 그냥 고기가 아니었다. 겉모양과 조리법만 육회지 식감과 맛은 일반적인 육회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했다.

흑혈우의 특징은 하나 더 있었다.

[21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18포인트의 마력을 섭취하셨습니다.]

흑혈우의 경우에는 마나스톤을 제외한 신체 부위 중에 뒷다리 부분, 엉덩이 부분에 마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강우는 흑혈우 육회를 씹어 삼킬 때마다 올라가는 알림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아. 몬스터의 몸 중에서도 보다 강력한 힘을 쓰는 쪽에 마력이 집중되어 있다.’

이강우는 천 노인 밑에서 몬스터 도축 기술을 배우고, 분석 마법을 통해 몬스터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하면서 예전이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9등급 몬스터를 기준으로 몬스터 한 마리가 가진 마력의 양은 편차가 크긴 하지만, 대개 700포인트에서 1천 포인트 사이였다. 이 중에서 마나스톤이 차지하는 비중이 35퍼센트에서 50퍼센트 사이로, 마나스톤을 제외해도 몬스터의 사체에는 그 마나스톤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마력이 남아있었다.

또한 마나스톤을 제외한 마력 역시 마나스톤만큼은 아니지만 신체 부위 중에 특정 부위에 유독 많이 모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특정한 부위는 무작위가 아니라 그 몬스터가 발휘하는 능력의 근원지점에 있었다.

흑혈우의 경우에는 다리에서 나오는 저돌적인 돌진능력이 압도적인 몬스터였고, 자연스럽게 몸통보다는 다리 쪽에 마력이 더 집중되어 있었다.

‘좋은 정보를 얻었어.’

마나스톤은 이강우가 유적 사냥을 주도하지 않는 이상, 어찌할 수 없다. 그걸 먹는다고 나섰다가는 몹쓸 꼴만 당할 것이다.

하지만 마나스톤을 빼더라도 몬스터 사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마력의 양은 상당했으며, 몬스터 전부를 먹을 필요도 없이 특정 부위를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마력 섭취가 가능했다.

이 정보는 앞으로 이강우가 마력을 섭취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정보가 되어줄 터.

“꺼억.”

식사를 마친 이강우가 접시를 대충 싱크대 안에 넣고, 곧바로 뒤에 보이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강우는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마나 서클을 바라봤다.

“19퍼센트.”

최근 도축장에서 야금야금 마력이 있는 몬스터 고기를 먹은 덕분에 섭취한 마력의 양이 꽤 됐다.

또한 마력을 섭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나 서클의 활성화율도 올라갔다.

‘아직 멀었네.’

물론 아직 1서클을 획득하기까지는 멀었다.

그러나 무조건 1서클이 있어야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이강우가 사용하는 분석 마법만 하더라도 1서클이 없음에도 사용 가능하다.

또한 기뻐할 소식은 하나 더 있다.

이강우가 자신의 능력치 항목을 거울 위에 띄웠다.

[이강우]

-마력: 1서클 개발 중(19퍼센트)

-보유 마법: 1개

-마법 슬롯: 1개

-섭취 마력: 3,922포인트.

‘이제 천 남았다.’

그동안 모은 포인트 양이 꽤 됐다. 여기서 1천 포인트만 더 모으면 브론즈북을 구매할 수 있다.

새로운 마법을 얻을 수 있다.

이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일단 마법사만 되면, 최소한 안정적인 생활은 확보할 수 있어.’

다른 건 모르겠지만, 1서클 마법사로 인정만 받으면 억대 연봉을 받는 건 일도 아니다. 최소한 지금처럼 비루한 인생, 도망자 인생, 하류 인생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지금 이강우가 누릴 수 있는 희소식이다.

거울에 비친 이강우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안정적인 생활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소리지.’

이강우는 바보가 아니다. 그가 천 노인 밑에서 최근 열흘 동안 도축한 몬스터의 사체 수는 서른이 넘어간다. 하루에 평균 세 마리의 몬스터가 도축 작업을 거치기 위해 만석루에 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슨 의미일까?

‘유적에서 가지고 나오는 건 절대 아니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유적에서 몬스터를 잡아서 가지고 나오는 건 아니다. 모래시계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 조건들을 충족하면서 몬스터 사체를 가지고 나오는 건 너무 힘들고, 위험하다.

아니, 그런 조건을 배제하더라도 흑혈우같이 사체 체중이 큰 놈은 1톤도 넘어가는 몬스터를 유적 안에서 사람의 힘으로, 간단한 장비의 도움만으로 가지고 나오는 건…… 못 할 건 없지만 유적 사냥 한 번을 위해 소모되는 비용과 인력을 생각하면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힘들고, 위험한 걸 떠나서 메리트 자체가 없다.

반면 그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몬스터 사체를 손에 넣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모래시계문 방조. 분명해.’

모래시계문의 모래시계, 그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도록 놔두면 된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면 몬스터가 알아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까.

원하는 장소, 원하는 무기, 원하는 무장, 원하는 전투 상황에서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이리도 편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적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왕지홍, 대체 정체가 뭐야? 이런 짓도 서슴지 않고 하는 걸 보면 그냥 단순한 장사꾼은 절대 아니야.’

문제는 모래시계문을 의도적으로 방조하는 행위는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중범죄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모래시계문 방조는 마나스톤을 얻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원하는 장소에서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으니까. 한때는 국가와 기업이 모래시계 방조를 통해 마나스톤을 수급했다.

하지만 이런 모래시계문의 특징이 테러에 이용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는 순간 몬스터가 등장하는, 그야말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으니까. 또한 이런 모래시계문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만약 뉴욕에서 정체를 감춘 채 활동 중인 테러리스트가 7등급 유적이 있는 모래시계문을 확보한 다음 그 모래시계문을 몰래 뉴욕 지하철 구석에 숨겨놓는다면?

이런 이유로 각국 정부는 모래시계문을 방조하는 자들, 그를 통해 이익을 누리는 자들을 아주 강력하게 처벌한다. 모래시계문 방조를 통해 얻는 이익보다는 리스크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크루와 총꾼들도 아니다 싶으면 사냥에 실패한 모래시계문을 정부에 신고한다. 아니, 애초에 크루와 총꾼들은 7등급 이상의 유적에 손을 대지 않는다. 8등급 몬스터까지는 현실에서 등장해도 그나마 사고로 처리할 수 있지만, 7등급 몬스터가 등장하면 그건 사고가 아니라 재앙이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지금 왕지홍은 모래시계문 방조를 통해서 몬스터 사체를 확보하고 있었다.

총알 자국도 얼마 없고, 깔끔하게 잡힌 몬스터의 사체는 그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였다. 유적에서 잡으면 절대 그렇게 깨끗한 상태로 잡을 수 없다.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나서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고작 9등급 몬스터를 잡기 위해 나선다?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

‘제대로 된 시궁창에 발을 담갔군.’

당연한 말이지만 걸리면 끝장난다.

지금 왕지홍이 하는 몬스터 도축 사업은 외줄 타기나 다름없다. 만약 이 사실이 정부에 알려지면, 왕지홍은 이제까지 번 돈 전부를 토해내는 건 물론, 아마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혹은 정부에서도 봐주는 눈이 있거나. 어쨌거나 왕지홍이 자기 힘과 깜냥만으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마 몬스터 도축 및 고기 유통 사업에는 꽤 대단한 권력들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범 소굴에 들어왔어.’

핵심은 그런 왕지홍의 사업에 깊게 관여해서 이강우에게 좋을 게 없다는 점.

이강우는 굳이 왕지홍을 신고해서 정의구현을 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착한 인간도 아니다.

단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이 되는 건 사양이다.

이강우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인생은 타이밍. 이번에 있는 유적 사냥만 끝나면…… 기술도 얻었겠다, 왕지홍 나와바리에서 발을 빼야지.’

그로부터 5일 후, 유적 사냥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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