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적 포식자-1화 (1/66)

프롤로그

2015년 1월 1일, 세계 곳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문(門)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가지각색, 형태도 크기도 색도 다른 다양한 문들은 오직 하나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었다.

모래시계.

정체 모를 문들은 전부 모래시계를 머리 위에 짊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 문의 정체는 몰랐지만, 그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는 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란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예상대로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는 순간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문에서 등장한 건 다름 아니라 인류가 이제껏 본 적 없었던 가지각색의 괴물들, 몬스터들이었다.

세상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이제는 끝이라고 말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저 문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희망은 저 안에 있겠지!”

그 말과 함께 희망을 찾기 위해 몇몇 멍청한 자들이, 훗날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이 그 모래시계문 너머로 몸을 던졌고, 그들 중 일부가 돌아왔다.

희망이라 부르게 될 마법을 품은 아이템, 아티팩트를 든 채로!

마법과 유적 그리고 몬스터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1화. 총꾼

거울 앞에 선 사내는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볼은 쏙 들어가 있었고 눈 밑은 짙은 재를 문지른 듯 시커멓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꽤 괜찮은 인상이었다. 180센티미터를 넘는 몸, 다부진 체격, 턱이 약간 사각형으로 각지긴 하지만 시커먼 눈썹과 제법 짙은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그야말로 사내다운 외모였다.

“이게 대체…….”

거울에 비친 사내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주변을 가득 채운 온갖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에는 9개의 검은 고리가 있었다. 개중 가장 왼쪽에 있는 고리의 1/10이 빛나고 있었다. 사내가 거울 가까이 접근하자, 가장 왼쪽에 있는 고리 위에 적힌 9%라는 글자를 볼 수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사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이런 게 보이는 거야? 내가 지금 환각을 보는 건가? 환각?’

이 순간 사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며칠 전 자신이 경험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불사황제의 권능…….”

말과 함께 사내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거울에만 비치는 문자를, [능력치]라고 적힌 문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만졌다.

그러자…….

[이강우]

-마력: 1서클 개발 중(9% 완료)

-보유 마법: 1개

-마법 슬롯: 1개

-섭취 마력: 1,120포인트

거울에 초록빛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무슨 게임도 아니고,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 순간 이강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나흘 전, 2020년 1월 4일의 기억이었다.

* * *

-오빠, 엄마 신장이식을 하려면 일단 수술비로 2천만 원 정도가 필요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셔.

“네 몸은 어때?”

-나? 내가 뭐? 나는 괜찮아. 멀쩡해.

“저번에도 그런 소리 했다가 쓰러졌잖아? 객기 부리지 말고 너도 종합검진 다시 한번 받아.”

-하지만 돈이…….

“걱정 마. 돈은 어떻게든 구할 테니까.”

-설마 오빠 총꾼…….

거기까지였다.

이강우는 여동생이 말을 마치기 전에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고, 곧바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추운 겨울, 스마트폰은 핫팩처럼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을 통해 그 온기가 느껴졌지만, 반대로 이강우의 낯빛은 냉동고에 갇힌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젠장.”

기어코 그의 입에서 쓴소리가 나왔다. 이강우가 스마트폰으로 제 이마를 툭툭 쳤다.

‘내가 미쳤지. 돈 좀 벌었답시고 주제에도 없는 사업 따위를 하다니, 병신 새끼. 천하의 등신 새끼. 그냥 차라리 그 돈 은행에 때려 박고 알바나 하지, 이 등신 새끼.’

이강우는 자책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책의 끝은.

“빌어먹을! 그 돈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후회로 끝나는 법.

비탄, 절규 섞인 한숨을 내뱉은 이강우가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에는 여러 개의 초콜릿이, 투명한 비닐에 포장된 그 ABC초콜릿이란 놈이 들어 있었고 이강우는 그중 하나를 꺼내 곧바로 입에 넣었다.

씹지 않았다. 입 안에 넣고 초콜릿을 천천히 녹였다. 당분의 등장에 여러 감정으로 하얗게 질렸던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굳어 있던 머릿속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떻게든 잊으려고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의 기억들, 지옥이나 다름없었던 나날들. 그 기억을 회상하던 이강우의 심장이 다시 그곳으로 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2천만 원…….”

심장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마련해야 한다, 그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주제에 그런 큰돈을 당장 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

이윽고 이강우가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짧게 고민을 한 뒤 잽싸게 11개의 숫자를 눌렀다. 뚜르르뚜르르, 투박한 발신음이 여섯 번 정도 이어졌을 때.

-예, 핏불 크루입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석 형.”

-응?

“저 강우입니다. 이강우.”

-어!

걸걸한 목소리가 이강우를 반겼다.

-강우야! 이야, 이게 얼마 만이냐? 목소리 멀쩡한 거 보니 큰일은 없었나 보구나. 야 이 자식아! 아무리 우리가 빌어먹을 일을 한다고 해도, 3년 동안 몸 비비면서 지냈는데 어떻게 은퇴하고 1년 동안 전화 한 통화를 안 할 수 있냐? 내가 몬스터도 아니고, 널 잡아먹기라도 하냐?

연거푸 터져 나오는 그 목소리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이강우는 기뻐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이를 꽉 물었다. 꽉 문 어금니에서 초콜릿이 뭉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콜릿이 입 안에서 폭발하는 듯한 느낌도 났다.

이윽고 이강우가 입을 열었다.

“우석 형. 당장 돈이 좀 필요해요.”

-돈?

“그래서 말인데 총꾼…… 선수금으로 2천만 원쯤 받을 수 있는 총꾼 의뢰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뭐?

“좀 급합니다. 열흘…… 아니, 일주일 안에 선수금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일을 소개해주세요.”

-야, 잠깐. 너 진짜 복귀하게?

복귀.

그 말에 이강우는 빠득! 재차 이를 갈았다. 이강우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말을 하면서도 거듭 후회를 하는 표정.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 이강우는 그렇게 이를 갈면서 억지로 대답을 쥐어 짜내듯 내뱉었다.

“복귀는 아니고…… 급하게 목돈이 필요합니다. 한 번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단기 알바 식으로.”

-총꾼은…… 통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 사무실 알지? 만나서 이야기하자.

“예.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그래, 준비해두고 있을게.

통화가 종료됐다.

“후우!”

이강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이 손에 쥔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그 순간 이강우의 눈앞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처절했던 3년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지옥에서 운 좋게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는데…… 그 대가로 알게 된 건 아버지나 나나 절대 사업을 해서는 안 될 팔자란 사실뿐이군.’

이강우.

3년 동안 백 번이 넘는 유적 사냥에 참여한 전직 총꾼이다.

* * *

2015년 모래시계문이 등장하고, 모래시계문을 통해 몬스터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당연히 그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군대가 움직였다. 그 무렵 이강우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런 이강우가 퇴역을 하고, 마법사들의 졸개나 다름없고 어느 직업보다 사망률이 높은 총꾼이 되어 유적 사냥에 나선 이유는 오직 하나, 돈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모래시계문이 등장할 무렵 사업을 크게 벌였던 아버지가 몬스터에게 살해당하면서 모든 재산을 날렸고, 당시 아버지를 위해 자기 명의로 돈을 빌렸던 어머니 이름 앞으로는 적잖은 빚이 생겼다. 설상가상 충격으로 쓰러진 어머니가 병원 검사 결과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여동생이 간 이식을 위해 간을 기증했다가 이후 후유증으로 쓰러지면서 생긴 수술비, 병원비는 직업군인 월급으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이강우가 할 수 있는 건 총 들고 은행을 털거나 유적을 털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총꾼이 된 이강우는 3년 동안 백 번이 넘는 유적 사냥에서 살아남으며 모든 빚을 갚았다. 빚만 갚은 게 아니라 억 소리가 나는 돈도 모을 수 있었다.

만약 이강우가 그렇게 번 돈으로 사업을 한답시고 나대지 않았다면…….

“쯧쯧.”

이강우가 후덕한 몸집을 가진 사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도 푹푹 내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냥 술 처먹고 도박을 해서 날리지, 사업을 하다가 그 돈을 전부 날리다니…… 그게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걸 그렇게 날리냐?”

최우석의 말에 이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래, 속 쓰린 건 내가 아니라 너일 테니 괜한 말은 할 필요가 없겠지.”

그런 이강우의 반응에 최우석은 쯧쯧, 혀를 두어 번 더 찬 후에 자신이 보고 있던 태블릿PC를 이강우에게 건네줬다.

“자, 봐봐. 일단 네가 말한 조건에 맞는 의뢰들 정리해뒀다. 네가 원하는 조건 맞는 의뢰는 당장은 하나밖에 없고, 비슷한 조건들은 따로 정리해뒀어.”

이강우가 거리낌 없이 태블릿PC를 받았다.

“참고로 이 바닥이 1년 전…… 네가 은퇴했을 때랑은 많이 달라졌어. 예전에는 9등급 유적 사냥도 인심 넉넉한 마법사들 만나면 선수금으로 천만 원은 가뿐하게 받아냈지만, 요즘은 9등급 유적 사냥에 투입되는 총꾼들 몸값이 5백만 원 안팎이다. 아무리 비싸도 천을 넘기 힘들어. 심지어 요즘 3백만 주면 총꾼 하겠다고 나대는 놈들까지 있다니까.”

최우석이 설명을 이어갔다.

“선수금 2천만 원짜리 의뢰는 결국 8등급 유적 의뢰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마저도 그냥 8등급은 안 돼.”

거듭된 설명에 이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석 형, 나도 백 번 넘게 유적 탐사한 몸입니다. 초짜들처럼 설명해주실 필요 없어요. 하이에나 크루답게 지금 이 의뢰 실패 횟수나 말해주세요.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모래시계문 너머에 유적이 있고, 그 유적에서 마법 아티팩트와 몬스터 사체에서 마나스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는 제2의 골드러시가 시작됐다. 정부와 기업, 개인이 경쟁적으로 모래시계문을 확보하고, 유적 사냥에 나섰다.

혼란이란 짤막한 단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었던 과도기를 거친 이후 세계는 모래시계문을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됐다. 그중 하나로, 각국 정부는 모래시계문을 정부 소유물이라는 법을 제정했다. 당연히 그런 법이 등장한 이후에는 모래시계문 너머의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서는 정부 공식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허가를 받은 집단들을 길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길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모로 초기 투자금도 많이 들어가고, 인맥도 필요하고, 뇌물을 주고도 걸리지 않을 만한 배경도 필요했고, 결정적으로 유적 사냥을 할 때마다 부과되는 세금 등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무허가로 유적 사냥을 하는 집단이 등장했고, 그 집단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크루였다.

어차피 모래시계문은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만큼, 정부 모르게 모래시계문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래시계문을 암거래하는 암시장도 있었다. 정부가 모래시계문 신고자에게 신고 포상금을 주지만, 암시장에서는 그보다 더 비싼 값에 현금거래가 가능했으니까. 모래시계문 암시장은 이미 정부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고, 크루들은 그런 암시장에 기생하듯 살아오며 세를 불리고 있었다.

물론 길드에 비해 편법, 불법 그리고 주먹구구식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크루들은 유적 사냥 실패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법.

그런 실패가 연거푸 반복되면서 쉽사리 유적 사냥을 시도할 수 없게 된 문들, 들어가기에는 위험하고, 그렇다고 문을 파괴하기에는 아까운 그야말로 계륵 같은 문들은 당연히 시세조차 저렴한 가격에 모래시계문 암시장에 올라오게 된다. 그런 모래시계문 유적만을 전담하는 게 바로 하이에나 크루다. 남들이 먹다 버린 것들을 주워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강우가 찾아온 핏볼 크루는 하이에나 크루에 속하는 크루였고, 당연히 그들에게는 모래시계문의 등급보다는 실패 횟수가 더 중요했다.

“두 번.”

“두 번? 꽤 적네요?”

“참고로 2서클 마법사가 포함된 파티가 이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패했어.”

“그래서 암거래 시장에 나온 겁니까? 그 정도 사고는 일상 아닙니까?”

“네 말이 맞아. 솔직히 말하면 이 문거래 시장에서 이 문이 싸게 나온 건 아니었거든.”

“그래요? 그런데 왜 샀답니까?”

“난들 아냐?”

“유적 등급은 어떻게 됩니까?”

유적의 등급은 그 유적 안에 상주하는 몬스터 최고등급을 따른다. 때문에 몬스터가 9등급부터 1등급까지 존재하는 것처럼, 유적 등급 역시 9등급부터 시작된다. 안에 있는 몬스터의 최고등급이 7등급이면 7등급 유적이 된다.

“내구성 검사했을 때도 8등급 판정이 나왔어.”

더불어 유적에 있는 몬스터의 등급이 높을수록 모래시계문의 내구성도 높아진다. 9등급 유적의 모래시계문은 석공(石工)이 정과 망치만으로 부술 수 있을 정도의 내구성이지만, 8등급 몬스터가 있는 모래시계문을 부수려면 폭탄 정도는 써야 한다.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유적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방법으로 유적을 가늠한다. 더불어 이 방법을 통해 유적의 등급이 정해지고, 암시장에서 그 등급으로 거래가 된다.

“두 번밖에 실패하지 않았고 제값 주고 구매…….”

문의 가격은 유적 사냥 실패횟수가 늘어날수록 떨어진다. 리스크가 올라갈뿐더러, 유적 사냥 실패횟수가 늘어났다는 건 모래시계문에 달린 모래시계의 모래가 꽤 떨어졌다는 의미니까.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는 순간, 모래시계문은 몬스터가 등장하는 깜짝 상자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은 약소한 수치다. 때로는 20번 넘게 사냥에 실패한 모래시계문이 문시장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제값을 주고 샀다는 건, 구매한 쪽도 없는 돈을 털어 로또를 노렸다기보다는 나름 제대로 유적 사냥을 준비할 만한 자금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나마 추천하는 거야. 내가 보기엔 그렇게 위험한 유적으로 보이진 않아.”

이강우는 그 말에 속으로 실소를 지었다.

위험하지 않은 유적은 없다. 마법사들은 아니지만, 총꾼들에게는 9등급 유적도 지옥이다.

“의뢰인은 누구입니까?”

“3서클 마법사, 박준영이라고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긴 한데, 본인은 7등급 유적도 가뿐하다고 자신하더군. 그냥 유적에서 길 안내나 해줄 사람이 필요하니 적당히 일곱 명만 채우라고 하더라고.”

“3서클 마법사…….”

“왜? 뭐 걸리는 게 있어? 들어본 이름이야?”

최우석의 반문에 이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걸리는 건 없다. 단지 배알이 꼴릴 뿐.

‘3서클 마법사면 못해도 1년에 10억은 벌 수 있지.’

마법 아티팩트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마법 아티팩트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며, 이 마력은 두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하나는 몬스터의 몸에서 얻을 수 있는 마나스톤을 정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력을 만들어내는 고리, 마나 서클을 가진 마법사가 직접 마력을 주입하는 방법이다.

때문에 아티팩트의 시대가 오면서, 마법사의 시대도 같이 왔다. 하지만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자들은 5만 명 중 1명꼴로 등장했다.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이라고 치면,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이는 1천 명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자연스럽게 마법사는 국가 차원에서 대우를 해줬다.

그렇게 귀한 몸이기에 총꾼이란 직업이 탄생했다. 돈을 받고 마법사 대신 총알받이가 되어주고, 살아있는 미끼가 되어주고, 고기방패가 되어줄 소모품이 필요했으니까.

총꾼들이 마법사 덕분에 돈을 받지만, 그런 마법사에게 일회용 소모품 취급을 받는 이상, 마법사를 향해 좋은 마음을 가진 총꾼은 있을 수 없다. 특히 이강우는 백 번 넘는 유적 사냥을 하면서 정말 마법사라면 치를 떨 만큼 고생했다. 개중에 좋은 사람이 없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이강우를 일회용품 취급하는 자들이었다.

어쨌거나 3서클 마법사라면 자금력은 확실할 것이다. 부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걸리는 건 없습니다. 어쨌거나 내용은 괜찮군요.”

“생각보다 조건이나 상황이 좋아. 유적 사냥 실패는 고작 두 번뿐. 여기에 의뢰인이 3서클 마법사. 보수도 기본 1천만 원, 리더는 2천만 원. 클로즈 보너스는 지위 여부 상관없이 1천만 원. 발견된 아티팩트는 전부 의뢰인 소유자고, 몬스터 사체에서 나오는 것들은 의뢰인과 총꾼들이 7 대 3으로 분배. 문은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계방산이고, 디데이는 1월 4일이야.”

기타 조건도 적당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너니까 주는 거야. 네가 돈이 급하다고 해서, 너랑 의리를 위해서 널 꽂아주는 거다.”

이강우는 최우식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봤을 때 지금 이 시점에서 이만한 조건과 대우가 걸린 의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운이 좋아. 이런 의뢰가 곧바로 잡히다니…….’

당장 돈이 급하기도 하다.

‘그래, 어차피 수술비만 벌면 돼.’

결정적으로 이강우는 복귀할 생각이 없다. 이번 일은 그저 단기 알바, 돈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뿐이다.

이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최우식에게 건네줬다.

쪽지를 본 최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여기로 입금해줄게.”

계좌번호와 은행 이름이 적힌 쪽지였다.

* * *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계방산의 1월은 추웠다. 강원도 그리고 겨울, 여기에 엊그제 제법 내린 눈은 작심하고 계방산을 찾아온 등산객들조차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 정도였고, 겨울답게 해가 슬슬 꺼지는 게 보이는 시각, 오후 4시에 접어들었을 때 계방산은 모든 생명체가 죽은 듯 고요했다.

여덟 명의 사내가 그런 산을, 눈으로 덮여 족적조차 얼마 없는 계방산을 타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등산객은 아니었다. 나름 등산을 위한 준비를 했지만 일곱 명의 사내들은 누가 보더라도 과할 정도로 많은 것이 들어간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일곱 명의 사내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한국군이라면 당연히 입는 군복을 입고 있는 것 역시 아니었다. 복장은 군인이라기보다는 공항에서 볼 수 있는 무장경비요원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만약 5년 전이라면 그들을 발견한 이들은 모두가 당연히 간첩을 떠올리며 잽싸게 경찰에 신고를 했겠지만 지금 시대는 조금 다르다. 요즘 이런 사람을 산에서 보면, 일반인들도 간첩이라는 표현보다는 총꾼이란 단어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총꾼이 맞았다.

계방산에 등장한 모래시계문, 그 모래시계문 너머의 유적을 사냥하기 위해 온 파티였다.

그 순간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던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사내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오른손을 들고 수신호를 줬다. 총꾼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처벅처벅!

일곱 명의 총꾼들과 달리 아무런 무장도, 짐도 들지 않은 채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처럼 단출한 옷차림을 한 20대 중반의 사내는 수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맨 뒤에 있던 20대 중반의 사내는 가장 앞장서던 사내 옆까지 왔다.

“아니, 뭐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 아깝게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저기 바로 문이 보이는데, 그냥 가면 될 것이지.”

그리고는 푸념 섞인 질책을 내뱉으며 사내보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번 의뢰를 맡게 된 총꾼 리더 이강우의 얼굴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이 새끼…… 유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확실해.’

처음에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의뢰인도 그렇고 3서클 마법사가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보수도 그렇다.

하지만 의뢰인이자 참가자인 박준영을 보는 순간 이강우의 가슴 속에는 불안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그러나 이 순간 이강우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어머니와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억눌렀다.

이미 돈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불길함 때문에 의뢰를 포기한다? 당장 이강우에게 위약금을 지불할 능력은 없다.

‘그래도 3서클 마법사인데 8등급 유적 정도는 쉽게 처리하겠지.’

때문에 이강우는 애써 자신의 본능을, 백 번 넘게 유적을 사냥하면서 그를 살려준 본능을 외면했다.

* * *

계방산의 외진 곳, 등산로를 한참 벗어난 곳, 조난신고를 해도 찾기 힘든 곳에 보통 크기의 문 하나가 비탈진 경사면에 오롯하게 서 있었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문은 단순한 문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돌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문틀에는 음각으로 괴상한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고 문짝에도 비슷한 문양이 음각이 아닌 양각으로, 입체적인 느낌이 나도록 새겨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문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스스스.

문틀 위에 달린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미약한 소리였으나, 이제는 밤중에 가까워지고 눈마저 짙게 깔려 짐승들마저 숨을 죽인 계방산에서는 그 어떤 소리보다 컸다.

그런 소리 사이로.

깡!

청아한 소리 하나가 길게 울려 퍼졌다.

모래시계문의 문틀 오른쪽을 정과 망치를 이용해 석공이 석상을 만들듯 망치로 정을 내리친 사내, 이강우는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최소 8등급. 그런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일반적인 8등급은 아니란 말이야.’

그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20대 중반의 청년, 박준영이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치면 답이 나와요?”

박준영.

나이는 24세.

딱히 그 외에 경력이라고 내세울 만한 건 하나도 없는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청년. 하지만 반년 전 우연히 마력 개방, 서클을 각성하면서 그는 집에서 밥만 축내던 백수에서 단숨에 수십억 원의 연봉을 언제든 받을 수 있는 대단하신 분이 됐다.

흔히 이런 이들을 모래시계문이 만든 세계의 행운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더군다나 3서클이라면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매년 로또 1등 당첨금 정도는 당연하게 벌 수 있는 행운의 소유자들이다.

그 빌어먹을 돈 때문에 다시 지옥으로 돌아오게 된 이강우는 원래도 마법사를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박준영 같은 부류는 더더욱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이강우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이 박준영이란 인간이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모래시계문과 유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초짜라는 점이었다.

‘그럼 답이 나오니까 치지, 설마 할 일이 없어서 칠까? 설마 이 정도 기본도 모르는 건가?’

물론 그런 심중의 마음과 행동은 달랐다.

“예, 어느 정도 가늠은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정과 망치로 흠집이 가면 7등급은 절대 아닙니다.”

친절한 대답.

그 대답에 박준영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럼 안 깨지는 게 좋을 뻔했네. 조금 전 깨진 거 맞죠?”

“살짝 흠집이 났습니다. 9등급이라면 조각이 떨어질 정도였겠지만, 이 정도 내구성이라면 8등급 이상입니다.”

“기왕 나오는 게 7등급이었으면 대박인데.”

박준영은 말을 하면서 아쉬움이 잔뜩 섞인 투정을 술술 내뱉었다. 그 말을 듣던 이강우는 쓴웃음이 지어지는 수준을 넘어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었다.

‘3서클이라고 해서 기본은 해줄 놈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이거 똥 밟았다.’

유적 사냥에서 마법사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마법이 총보다 순수하게 위력이 강한 건 아니다. 3서클 이상 마법은 분명 놀랍지만, 총이 가지는 위력과 정확성, 효율은 마법보다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사가 대우를 받는 건, 총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의 존재 때문이다.

몬스터들 중에는 그냥 덩치와 힘만 센 놈들도 있지만, 특이한 구조로 된 놈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9등급 몬스터인 안개살이라는 놈이 있는데, 안개로 만들어진 놈은 자신의 몸 일부를 대상에게 먹이는 식으로 사냥을 한다. 안개로 된 놈이기 때문에 총알이나 폭탄은 의미가 없다. 어마어마한 고열로 녹여버리는 게 그나마 답이지만, 반대로 마법사들이 날린 보잘것없는 불꽃 화살에는 조금의 반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대상에게 환각을 보여주거나, 그림자 속을 오고 가는 놈들, 어둠으로 만들어진 몬스터, 죽여도 다시 복구되는 언데드 몬스터 놈들은 총으로 잡는 게 쉽지 않다. 현대무기로 잡으려고 해도 적잖은 주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완벽한 무장을 마친 1개 대대라고 해도 마법사의 도움 없이 물리력이 쉽게 통하지 않는 몬스터 무리를 만나면, 그 몬스터 무리가 9등급이라도 해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괜히 마법사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주는 게 아니다.

이런 이유로 유적 사냥 역시 당연히 마법사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마법사가 핵심이고 총꾼은 부품 같은 거다.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는 일회용 부품, 필요하면 바꾸는 부품.

‘느낌이 안 좋아.’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의뢰인이자, 유적 사냥을 주도하는 마법사 박준영은 최악이었다.

이제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완벽한 초짜였다. 3서클 마법사란 사실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부류. 자신이 디씨 코믹스에 나오는 슈퍼맨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부류다. 마법사가 된 지 얼마 안 되고, 마법사가 되는 순간 주변에서 온갖 칭찬과 칭송만 들으면서 딱히 유적 사냥 경험도 얼마 없는 주제에 백전노장인 것처럼, 자신이 천재인 것처럼 콧대를 세우는 부류.

‘젠장.’

사실 예전 이강우라면 이런 초짜 마법사의 의뢰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박준영이란 마법사에 대한 뒷조사도 해보고, 좀 더 심사숙고해서 의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너무 좋았고, 돈이 급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조건에 눈이 멀어 코가 꿰이는 경우. 1년 동안의 공백이 이강우의 눈을 비롯한 감각을 멀게 했다.

어쨌거나 선택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박준영의 행동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게 낫다. 괜히 그의 자존심을 갉아먹는 소리를 지껄일 필요는 없다. 콧대를 꺾을 필요도 없다.

이강우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자기보다 어린 박준영에게 아부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8등급이라도 해도 3서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가 나올 수도 있잖습니까? 더군다나 3서클 마법사이시니, 그냥 몸 푼다는 느낌으로 가뿐하게 사냥해 주십시오. 이번 일 끝나면, 제가 클로즈 보너스로 정말 물 좋은 곳에서 대접 한번 해드리겠습니다.”

그 아부에 박준영이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이강우라고 했나? 생각보다 뭘 좀 아는 양반이네. 난 경력이 엄청나다고 해서 고지식한 꼰대 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유적 안에서는 마법사가 대빵이고, 총꾼은 졸개입니다. 꼰대고 나발이고 없죠. 까라면 까야지.”

“그래?”

“일단 정리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날씨도 추운데 쉬고 계십시오. 어이, 거기! 하던 일 멈추고 라면이나 하나 끓여라!”

이강우의 거듭된 아부에 박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군. 이강우라고 했지? 이름 꼭 기억해두지.”

그 말에 이강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비결 중 하나다. 이강우가 이제까지 살아남은 비결.

이강우는 괜히 마법사와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다. 유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그런 마법사와 신경전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

결정적으로 마법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총꾼을 버려도 무방하다. 하지만 총꾼은 마법사가 필요 없다고 마법사를 버리는 선택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다.

유적 안에서 마법사는 절대 갑(甲)이고 총꾼은 을(乙), 아니 병정(丙丁) 수준에 불과하다.

그렇게 박준영이 비위를 맞춰 준 이강우는 고개를 돌려 모래시계문을 바라봤다.

츠츠츠!

스산한 소리를 내는 모래시계문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퍽 불안했다. 더군다나 그 느낌은…….

‘이놈이 날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마치 모래시계문이 이강우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은 모래시계문이 인류의 번영을 위해 찾아온 기적이라지만, 이강우가 봤을 때 모래시계문은 그냥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실제로 인간을 계속 잡아먹고 있다.

‘이딴 게 희망은 무슨.’

인류는 이제 모래시계문을 정복했다고 외치지만, 이강우의 생각은 다르다. 모래시계문은 오히려 적당히 인류에게 미끼를 주고 있다. 자신을 배척하지 말라고, 자신을 손에 꼭 쥐고, 품에 꼭 안은 채 보물처럼 다뤄달라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인류 전체를 단숨에 잡아먹을 것이다. 이강우가 보는 모래시계문은 그런 놈이다.

그런 괴물이 먹잇감을 부른다는 건…… 잡아먹기 위해 유혹을 한다는 의미.

물론 이강우 본인의 느낌일 뿐이다. 착각이라도 할 수 있다.

“후우.”

이강우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어차피 이번 한 번이다. 이번 일만 마치면 그냥 차라리 공장에서 취직해서 조금씩이라도 안정적으로 돈을 모아야지.’

마지막.

그 단어를 되새김질하며 이강우는 자신의 가슴팍에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애써 억눌렀다.

* * *

투투투!

총구가 불을 내뿜고 총성을 토해내자, 어둠으로 가득 찼던 길목 안이 산발적으로 환해졌다. 마치 라이트를 가지고 장난을 치듯, 깜빡거리는 시야 속에서 보이는 건 시커먼 몸뚱이를 가진 원숭이였다. 원숭이지만, 부리는 마치 새처럼 뾰족한 놈들.

9등급 몬스터 부리원숭이였다.

“젠장!”

그리고 이강우는 놈을 잘 알고 있었다.

“사격 중지! 부리원숭이는 총이 안 통해!”

처음 놈을 만난 건 2015년 3월 5일, 처음 만났을 때 놈은 무지막지한 덩치를 자랑하는 거대 몬스터보다 더 섬뜩한 공포를 군인들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총알 세례를 퍼부어도 놈은 유유히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근처 군인에게 접근해 그 뾰족한 부리로 눈알이나 콧잔등, 주둥이 같은 야들야들한 살점들을 쪼아 먹었다. 그때 녀석에게 직급보단 형·동생으로 부르던 부하 넷을 잃고, 나중에 녀석이 9등급 몬스터란 사실을 느꼈을 때 이강우가 느낀 허탈함과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나! 백!”

총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녀석이 야수형 타입이 아니라, 환수형 타입인 게 이유였다.

환수(幻獸) 타입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환수 타입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마법을 이용한 공격이나 혹은 놈이 있는 공간 자체를 망가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리력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총이 통하는 놈이 아니다. 마법사들의 마법이 아니라면 3층짜리 건물 한 채 정도는 가뿐하게 붕괴시킬 만한 위력을 가진 폭탄으로 잡아야 하는 놈이다.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간다! 모두들 정신 차리고, 총 쏘지 마. 녀석들은 후각이나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야! 어두워지면 녀석들도 긴장한다! 괜히 총을 쓰면 오히려 놈들에게 위치가 들킨다! 플래시 꺼! 끄라고!”

당연히 지금 이 파티에서 놈을 잡을 수 있는 건 마법사뿐!

그러나 이 순간 놈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는…….

“으아아아악!”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이미 바지는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이강우의 등에 업혀 있었다.

‘젠장! 완전히 맛이 갔군.’

사건의 시작은 유적 입장 6시간이 지났을 때 일어났다.

이강우는 총꾼들을 지휘하며 최대한 천천히, 주도면밀하게 자신들 앞에 놓인 갱도 같은 길을 수색했다. 그냥 보면 뻥 뚫린 길이었지만 이강우는 천천히 소리를 죽인 채 이동했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갈림길이라도 생기면, 그때부터는 아예 갈림길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박준영은 이강우에게 몇 번 말했다.

“그냥 쭉쭉 갑시다.”

그러나 이강우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박준영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유적 사냥의 기본은 탐색과 수색이다. 유적은 도망가지 않는다. 또한 유적에는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 숫자에 제한이 있다. 사람이 죽어 빈자리가 생겨야만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아티팩트를 훔치러 올 사람 역시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아티팩트가 발이 달려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유적에서 섣부르게, 급하게 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강우는 그 부분을 박준영에게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박준영 입장에서는 기껏해야 총알받이 신세에 불과한 총꾼이 해주는 조언이 조언이라고 들릴 리 만무했다. 그냥 주제넘게 개가 짖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기어코 그는 폭발했다.

“아니, 여기 뭐가 있다고 그렇게 지랄염병을 떨면서 미친놈처럼 움직이는 겁니까? 빨리빨리! 좀 빨리합시다!”

그 말과 함께 박준영은 대뜸 본인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가볍게 달리기를 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강우가 기겁하며 그런 박준영을 잡으려고 나서는 순간,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부리원숭이가 박준영을 덮쳤다.

그때를 떠올리던 이강우는 자신의 등에 업혀 있는 박준영이 풍기는 진한 오줌 냄새를 맡으며 이를 갈았다.

‘미친 새끼. 이 정도까지 초짜일 줄 알았다면 그냥 유적 들어오기 전에 총으로 쏴 죽였을 텐데…….’

등장한 부리원숭이는 박준영의 몸에 달라붙은 후에 제 날카로운 부리로 박준영의 목덜미와 어깨 부근 살점을 쪼아 먹었다. 살점이 덩어리째 나가떨어질 정도, 허여멀건 것이 보일 정도로 제법 심각한 부상이었고, 그 상황 앞에서 박준영은 정신이 나가 버렸다.

만약 이강우가 그 순간 플래시를 터뜨려 부리원숭이를 잠시 동안 당황케 만들고 그 틈을 노려 잽싸게 박준영을 구하지 못했다면, 박준영은 그냥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이강우니까, 그래도 백전을 치른 이강우니까 박준영을 구할 수 있었다.

‘비싼 돈 내고 총꾼을 고용한 주제에 그 이유를 모르는 건가?’

그리고 그런 일 때문에 마법사들이 총꾼을 고용한다.

막말로 필요하면 마법사들이 총을 들고 유적을 사냥해도 된다. 총이란 건 어느 정도 훈련을 하면 어린아이도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마법사들이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까지 총꾼들을 고용하는 건, 총꾼들의 별명 중 하나인 고기방패, 말 그대로 총꾼들을 방패 혹은 미끼로 쓰기 위함이다.

때문에 정말 경력 있는 마법사들은 잔혹할 정도로 총꾼들만을 몰아세운다. 자신은 뒤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정말 완벽하게 안전이 보장된 후에야 움직인다.

사실 총꾼들 입장에서도 그런 마법사가 차라리 낫다. 괜히 나대다가 마법사가 부상을 입을 경우에는 9등급에 불과한 부리원숭이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게 총꾼들의 현실이니까.

어쨌거나 마법사가 당하는 순간 총꾼들도 당황했다. 경력이 있는 총꾼들이라면 부리원숭이를 보는 순간 방아쇠를 당겨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겠지만, 경력 없는 몇몇 녀석들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당연히 총성은 통로를 따라 곳곳에 퍼졌을 터.

여기에 쫄깃하고 오동통한 먹잇감이 있으니 맛보러 오세요! 아마도 유적 안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총성은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이강우가 긴급하게 후퇴를 외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리원숭이는 시작이다.

‘여긴 8등급 유적. 8등급 몬스터가 필시 오겠지.’

그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접근할 것이다. 그 전에 전력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다음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탄약을 아끼고, 정신이 나간 박준영이 정신 차리도록 뺨이라도 때릴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길을 잡는다. 내 뒤만 따라와!”

하지만 이 순간 이강우는 직감했다.

‘절반은 죽는다.’

이번 유적 사냥은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이 오늘 그와 남은 일곱 명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강우가 이를 꽉 물었다.

‘젠장.’

* * *

총꾼으로 백 번이 넘는 유적을 탐사하면서 이강우가 몸으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으아악!”

뒤에서 비명이 들릴 경우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젠장.’

몬스터를 상대로 도주를 하는 상황 속에서 비명이 나온다는 건 이미 끝난 거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이강우가 마법사라면, 강력한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가진 마법사라면 모르겠지만, 총꾼에 불과한 그가 몬스터에게 이미 잡힌 동료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걸로 여섯 번.’

이강우는 자신이 체득한 그 사실을, 어찌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하고 비참한 진리를 여섯 번 곱씹었다. 비명이 날 때마다 곱씹었다. 달리 말하면 도주를 하면서 여섯 명이 당했다.

최악이었다.

도주가 쉬우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설마 일곱 명의 총꾼 중 자신을 제외한 전부가 죽을 줄은 몰랐다.

‘우석 형 말이 맞아. 총꾼들이…… 수준이 바닥이 됐군.’

처음 이번 의뢰를 받고 총꾼 우두머리가 되어 총꾼들 경력을 봤을 때 상당수가 초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솔직히 그들 잘못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름 유적 사냥 경력이 있는 총꾼들이라면 오히려 박준영이 앞장서서 그 지랄을 했을 때 더 놀랐을 것이다. 그 순간 냉철함을 유지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다. 원래 총꾼들은 마법사를 지키는 병사 같은 역할인데 마법사가 제멋대로 적진에 몸을 던지는 상황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판단을 내리는 건 쉽지 않다.

또한 이번 의뢰는 여러모로 조건이 좋았다. 오히려 정말 베테랑들이었다면 조건이 좋다는 사실을 역으로 의심했을 터. 반대로 어수룩한 놈들이 조건이 좋으니 경쟁적으로 달라붙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총꾼 리더가 된 이강우는 유적 탐사를 천천히 하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을 가르칠 속셈이었다. 유적 사냥은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 동안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나씩 가르쳐서 쓸모 있는 녀석들로 만들 속셈이었는데, 그 생각을 박준영이 6시간 만에 난장판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정말 역대급 폭탄이다.

이윽고 이강우가 좁은 통로를 지나 널찍한 공간으로 나왔을 때.

‘으아아악!’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고.

“빌어먹을.”

말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이강우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철칙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몬스터 소굴이다. 악에 받친 비명은 몬스터들에게 식후 디저트가 있음을 알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는 사이 이강우는 주변을 살폈다.

‘여긴 또 어디지?’

이강우는 자신이 돌아왔던 길을 되짚어서 이동했다. 아무리 어두컴컴한 통로라고 해도, 이강우의 방향감각은 확실하다. 괜히 백 번 넘는 유적 사냥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 보는 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마법인가? 미로에 빠졌나? 아니면 내 실수?’

이강우가 의도치 않게 도달한 그 공간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예전에 한 번 우연히 방문하게 된 야구장, 도쿄돔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 수만 명의 인원 정도는 가뿐하게 소화할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젠장.’

이강우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단순히 길을 잘못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여긴 절대 8등급 유적이 아니야.’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유적은 등급이 높을수록 크기도 커진다. 왜냐하면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몬스터들의 등급이 대개 높기 때문이다. 몸집이 전차보다 더 큰 몬스터들이 움직이려면 그만큼 큰 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유적 안에 도쿄돔 크기의 공간이 있다?

최소 7등급 혹은 그 이상.

이 순간 이강우는 자신이 등에 업고 있던 박준영의 존재가 하찮게 느껴졌다.

‘이렇게 뒈지는 건가?’

이강우는 박준영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그를 악착같이 업고 뛴 게 아니다. 이강우는 까놓고 말해서 박준영이 싫다. 아무리 고용주라고 하지만 초면에 자기보다 분명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하직원 다루듯 막 다루는 것도 그렇고, 노예 보듯 총꾼들을 보던 것도 그렇고, 모래시계문의 내구성을 테스트하는 이강우 앞에서 경력도 얼마 없는 놈이 8등급 유적이란 말에 7등급이 아니라서 아쉽다고 지껄이는 것까지.

이강우가 박준영을 만난 이후 그가 한 행동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린 건, 그가 유일한 구명줄이기 때문이다. 죽은 총꾼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죽은 총꾼 여섯을 다 합쳐도 박준영보다 쓸모가 없다. 당장 부리원숭이에게 당한 것만 하더라도 그렇다. 총이 통하지 않는 놈이다. 마법으로만 해치울 수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살려놓았다. 유적에서 살고 싶으면, 출문(出門)을 찾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꼭 필요했으니까.

살려놓았는데…….

‘이곳이 순수한 7등급 유적이라면…… 박준영 같은 놈이 지금 당장 정신을 차려도 죽은 목숨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박준영을 앞세워서 7등급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군다나 7등급 몬스터는 지금 이강우가 가진 소총 정도로는 생채기도 내기 힘든 놈이다. 이강우가 직업군인이던 시절, 7등급 몬스터인 비늘등곰은 전차 포탄을 맞고도 우어어, 소리만 지르고 전차에 달려와서 전차를 뒤집었던 놈이다. 7등급부터는 실상 개인이 소지할 수 있는 화기로는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물론 3서클 마법이면 해치울 수 있다. 마법은 단순한 위력을 떠나서, 몬스터들이 가지는 항마력을 뚫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박준영이 정말 3서클 마법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3서클 마법사인 거지,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마법 아티팩트의 도움이 필수적이니까. 3서클 마법사가 3서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3서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가 무슨 마법을 쓰는지도 못 봤네.’

그러나 3서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 가격은 실상 30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된다. 말이 30억 원이지, 3서클 이상의 마법 아티팩트는 국가반출금지 품목이다. 국외로 반출했다가 걸리면 처벌이 상당하다. 그리고 소유자는 소유 사실을 정부에 알려야 한다.

물론 암시장을 통해 거래할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암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마법 아티팩트는 기본 평균가의 2배 이상이다. 30억 원이 아니라 50억 원은 잡아야 한다.

그런 어마어마한 것을 과연 박준영이 가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이강우 앞에서 7등급 아니라서 아쉽다는 소리를 지껄이거나, 총꾼들이 알아서 제 몸뚱이로 지뢰밭을 탐사해주겠다는데 그걸 참지 못해서 자신이 직접 지뢰밭에 몸을 던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가 내 무덤이었군.’

이 순간 이강우는 자신의 등 뒤에 업혀 있는 박준영을 바닥에 버렸다. 기절한 박준영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너부러졌다. 퀴퀴한 오줌 냄새를 내면서. 그 냄새가 이강우의 몸에도 잔뜩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몸뚱이가 썩어 문드러지면 더 퀴퀴한 냄새를 낼 텐데 무슨 고민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면 몬스터가 깨끗하게 먹어줄 터.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반대로 총꾼으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아니, 2015년부터 직업군인으로 몬스터와 전쟁을 치를 때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 왔음을 자각했다. 단지 그때가 왔을 뿐이다.

‘그래, 어쨌거나 어머니 앞에 있는 빚도 갚고, 이번 수술비도 갚았으니까. 내 목숨 써서 빚이라도 없앴으면 수지맞은 장사였지.’

이강우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초콜릿이었다. 이강우는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단맛이 머릿속을 풍요롭게 해줬다. 그래서 초콜릿을 자주 가지고 다녔다. 이 초콜릿이 3년 동안 이강우를 살려준 비결 중 하나였다. 유적이란 제한된 공간, 몬스터란 공포의 존재 앞에서 그나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단 것만큼 좋은 놈도 없으니까. 때문에 이강우는 언제나 몸 구석구석, 주머니가 있는 곳이라면 빠짐없이 초콜릿을 넣었다.

지금도 초콜릿은 위력을 발휘했다. 마치 마약처럼, 공포와 짜증, 분노 등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정리해줬다.

“응?”

그 덕분이었다.

이강우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을, 칙칙한 시야 너머로 제단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3층 건물 높이의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무언가가 오롯하게 서 있었다.

‘뭐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또한 거리도 제법 됐다.

이강우가 그 먼 곳에 있는 것을 직시했다. 그나마 이강우가 자랑할 수 있는 2.0 시력이 제 역할을 했다.

‘……해골? 아니, 잠깐만 해골이라니?’

그 순간.

“오오!”

기괴한 외침과 함께 이강우의 등 뒤에 기절해 있던 박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이강우가 갑작스러운 낌새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박준영이 제 두 팔로 이강우의 어깨를 잡았다.

이강우가 기겁했다.

“뭐, 뭐야?”

이강우의 놀람에도 박준영은 대답 대신 이강우의 어깨를 위에서 아래로 꾹 눌렀다.

‘큭!’

굉장한 힘이었다. 이강우는 어깨가 뭉개지고, 두 다리가 땅에 박힐 것 같은 충격을, 마치 소형차 한 대를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간의 힘은 절대 아니었다.

‘마, 마법?’

그럼 마법일까?

없진 않다. 마법 중에는 대상의 힘을 강화해주는 다양한 종류의 마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박준영이 그런 마법의 소유자일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왔도다!”

박준영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미친!’

비유가 아니었다. 그의 두 눈알은 사라지고 눈두덩이 안에는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불길은 박준영의 두 눈두덩이 주변의 살점을, 눈썹 근처의 살덩어리와 눈 밑의 살점을 양초처럼 녹이고 있었다.

‘화, 환각인가?’

괴상망측한 광경.

이런 산전수전 다 겪은 이강우도 처음이었다. 듣기로는 환각 마법에 걸리면 이런 광경을 보게 된다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강우는 박준영의 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다.

“놔! 놓으라고!”

이강우는 간신히 팔을 구부려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박준영의 팔을 탁탁 쳤다. 하지만 박준영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준영은 활활 타오르는 두 눈덩이를 품은 얼굴을 이강우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드디어 왔도다! 나의 힘을 오롯이 계승할 그릇이, 나의 숙원을 이룩해줄 그릇이 이곳에 왔도다.”

그 말.

“닥쳐!”

이강우가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욕지거리에 박준영은 잔뜩 미소를 지었다.

“바츠무, 그 영생을 꿈꾸는 비릿한 뱀들에게 나를 대신해 복수해줄 그릇이 내 앞에 왔도다!”

이 순간 이강우는 느낄 수 있었다.

‘아!’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이 발견한 제단 위에서 어마어마한 것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보았던 그 붉은 도포를 입은 해골이 왔다는 사실을!

이강우가 이를 꽉 물고 어깨를 부술 듯한 힘을 이겨내며 간신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이강우의 눈에 들어온 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도포를 입고 있는 해골이었다.

해골은 말하지 않았다. 말은 박준영이 계속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워라. 세상의 모든 마법을 먹어 치워 스스로를 살찌워라. 그리하면 네 몸의 살점을 양분 삼아 자라난 나의 권능들이 너의 충실한 종이 되어줄 것이다.”

분명하다.

해골은 살아있으나, 말을 할 수 없기에 박준영의 몸을 빌려 말을 하고 있다.

이강우는 이 순간 이를 꽉 물었다.

‘유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지!’

백 번이 넘는 유적 사냥이 이강우에게 준 건 단순히 돈만이 아니었다.

경험!

그 경험이 이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 속에서 이강우의 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정체가 뭐야?”

그 해골을 향해 이강우가 질문을 했을 때, 해골은 이번에도 박준영의 입을 빌려 대신 대답했다.

“나는 불사황제 야크센. 복수를 위해 세상 마법들을 먹어치워 불멸을 이룩한 존재이며, 세상을 종말로 이끄는 자들을 먹어치우는 그들의 악몽이다.”

이윽고 해골이 손을 뻗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강우의 이마를 만졌다.

푹!

그러자 이강우의 이마가, 단단한 두개골이 두부처럼, 젤리처럼 꿰뚫렸다. 이강우는 이 말도 안 되는 촉감 앞에서, 해골의 손가락이 자신의 두개골을 뚫고 뇌를 만지는 듯한 이 느낌 앞에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그 순간 이강우는 머릿속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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