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 일상 (1)
한국대학교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
300명은 수용할 대강의실에서 학과장인 김문열 교수가 ‘신의 농장’ 도감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두가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기 일쑤.
그 시선이 닿은 곳에 한 학생이 있었다.
맨 뒷줄 기다란 책상에 턱을 괴고 심드렁한 얼굴로 강의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 도현이었다.
리포트 위크 이후 5개월이 지났다. 2학기 기말고사만 남겨 둔 상황에서 나타난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왔고, 그에 대해 누구 하나 입을 대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워프가 터졌을 때 먼저 나섰던 헌터도, 타국에 먼저 도움의 손을 뻗은 헌터도 오로지 도현이었으니까.
그가 있었기에 지구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지구는 워프가 없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려 달까지!
그 상황에 세계는 ‘제로급 헌터 우도현의 기적’이라 칭송했고, 한국에서는 기적을 기념해 우도현 헌터의 ‘동상’과 ‘박물관’ 설립에 착공했다.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자취를 감췄던 도현이 소리 소문 없이 다시 강의실에 나타났으니 모두 엉덩이가 들썩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강의가 끝나기까지 참아야 한다는 게 고역이었다.
심지어 학과장 김문열 교수도 그러했다.
그런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입이 찢어지는 이들이 있었으니-
1학기 리포트 위크를 함께했던 고창하, 시민형, 김승재, 이민준이었다.
도현이 오지 않은 뒤로 2학기가 시작되고, 4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도현이 늘 앉던 지정석에서 그를 기다렸다. 연락처를 알고 있었지만, 먼저 연락을 하기에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겨우 통신 매체와 뉴스 기사로 도현의 소식을 접하는 게 다였던 나날들이지만, 사실은 정말 바빴다.
도현의 소개로 인연이 되었던 주나근 차장과 워프 연구의 선구자인 진미경 박사를 도우며 블랙홀 랜드를 오가게 된 것이다.
그 덕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꽤 알게 되었고, 각성자 7급에서 헌터의 턱걸이라 할 수 있는 5급까지 성장도 했다.
학교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을 무렵, 멸망하지 않을까 싶었던 지구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어쩔 수 없이 학생의 의무를 이어 가게 된 거다.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헌터는 그러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헌터 교육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워프가 사라지면서 워프를 대신한 건 블랙홀 랜드였기 때문이다.
그중 제일 먼저 개편을 시작한 곳은 한국대학교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
2학기가 시작되며 강의는 워프가 아닌 ‘신의 농장’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제는 누구나, 언제든 오갈 수 있는 블랙홀 랜드였기에 몬스터의 대지라 불리는 ‘신의 농장’에서 수업 대부분을 진행하는 실습과 실전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한 이유로 제일 힘든 이들은 학과 학생들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알고 있던 지식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 넷은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개편이야말로 그들이 바빴던 이유였으니까.
그럼에도 학교에 가야 했던 건 블랙홀 랜드의 입사 최소 조건이었기 때문.
그런 무료한 일상 중에 도현이 다시 학교에 찾아온 거다!
넷은 강의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트북과 휴대폰으로 채팅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트롤승(블루):오오오, 블랙이 돌아왔다아아아!
트롤승(블루):졸라 멋짐. ㅎ 왠지 더 잘생겨진 듯.
맴보(퍼플):ㅇㅇ~ 다음 오징어.
트롤승(블루):누가 매미람보 아니랄까 봐 맨날 나한테 시비셈. ㅗㅗㅗ
트롤준(그린):ㅋㅋㅋㅋ 맴찢폭 ㄱㄱㄱㄱ
트롤승(블루):ㅋㅋㅋ 맴찢폭 ㅋㅋㅋㅋ ㅅㅂ, 나 매미 비명에 터져 죽으라는 거임?
맴보(퍼플):ㅅㅂ, 니들 뒤짐.
곱창(레드):맴 때문에 산 게 누구?
트롤준(그린):뼈 때리지 마셈.
트롤승(블루):팩폭 ㄴㄴ
트롤승(블루):근데 진짜 블랙 일반인 같지 않음?
트롤준(그린):ㄴㄴ 잘생기면 일반인 아님.
트롤승(블루):아니, 헌터처럼 안 보인다고. 흉터도 없고, 검 쓰는데 손에 구든살도 없음.
맴보(퍼플):굳은살임.
트롤승(블루):아나, 저 고나리질.
트롤준(그린):스토커임? ㅋㅋㅋ 흉터랑 굳은살 어찌 봄?
트롤승(블루):ㅅㅂ, 바로 옆이니까 보인다고.
곱창(레드):5급이 어디서 제로급 평함?
트롤승(블루):ㅅㅂ.
트롤준(그린):ㅅㅂ.
도현은 심드렁하니 옆의 4명을 슬쩍 봤다. 키득거렸다가 씩씩댔다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이 거슬리기보단 즐거운 것 같아 픽 웃고 말았다.
도현이 강의실에 들어왔을 때 자신의 지정석이었던 자리 옆에 앉은 4명을 보고 다른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앉았다.
리포트 위크 이후 잊고 지냈던 것도 있었고, 궁금하기도 했다.
제로급 헌터라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의 출석이라서인지 강의실 학생들의 신경이 자신에게 집중됐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동안 농장일이 바쁘기도 했고, 차원 전체와 연결된 뒤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진상 신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쉬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에 짧았던 대학생 생활이 기억날 리가.
겨우 여유가 생겨 요리 좀 하고 쉬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차도식이 도현을 닦달했다.
‘처남님! 학교 안 가십니까? 학교!’
‘학교요……?’
‘대학교 말입니다! 처남님 한국대 헌사과이셨죠? 지금 지구에 워프가 사라지고 교육이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으음…….’
인제 와서 학교에 가려니 뭐랄까,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함의 극치랄까.
굳이 학교에 갈 이유도 없어진 탓에 어물쩍 넘기려고 했더니, 딱 걸렸다.
사실 ‘내 알 바 아니잖아요.’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차도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과도한 업무 탓에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를 가끔 방송에 나가 푼다고 하기는 하던데, 꼭 그 전에 한 사람, 아니 신 하나씩은 볶아 댄다더니 그게 도현 자신에게까지 올 줄은 몰랐다.
‘매부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좀, 많이, 귀찮다.
예전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예! 처남님!’이라고 대답하며 수긍하던 매부는 어디 가고, 상사 아닌 상사를 모시는 기분이라고 할까.
교묘하게 공적으로 따지고 드니 뭔가 기분 나쁜데 기분 나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었다.
지구는 이제 평범했던 그때로 돌아갔으나 각성자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헌터도 그대로, 아니 더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들을 수용할 곳은 블랙홀 랜드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해결책 중 하나가 교육받은 각성자와 헌터를 블랙홀 랜드에서 인재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헌터 총본부의 회장 차도식 헌터의 노력이 가장 컸다.
그 때문에 한국대학교의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 학생들은 졸업만 해도 블랙홀 랜드에 100퍼센트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워프가 사라지고 실업자가 되었던 헌터들을 보며 진로에 대해 회의감을 가졌던 학생들은 갑자기 대기업 입사 코스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그런 변화 조짐에 내년부터는 학과명도 헌터 사무 공무원학과에서 헌터학과로 곧 바뀔 예정이라고.
그러니 그 전에 (주)신의 회장인 도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차도식의 조언(임무를 가장한 명령)을 받고 오게 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감찰? 아니, 감시가 맞으려나?
‘그래 봤자 이런 분위기 속에서 뭘 알겠어.’
모두 자신을 우리 안 원숭이 보듯 하는데.
학과장도 강의를 위해 준비한 자료를 달달 외운 대로 뱉기 바빴다.
긴장할 만하겠지. 학과가 도현의 입김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겠지만, 학과장 교체 정도는 실현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 보니 이 자리에서 가장 긴장할 사람은 김문열 교수였다. 하지만 그건 도현의 생각일 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지.”
“오오오오!”
결국 강의를 3분의 1도 진행 못하고 끝낸 김문열 교수는 도현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대신 오랜만에 출석한 제로급 헌터의 강의는 어떤가?”
“오오오오! 우도현! 우도현!”
이게 선동질이라는 건가?
학과장을 확 잘라 버려?
삐딱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났지만 김문열 교수는 능글맞게 도현을 향해 손짓했다.
그 모습에 도현은 픽 웃고 말았다. 5개월 전 지구의 신이 된 도현에게 지구를 되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문제였다.
전조 증상 없이 되돌리려니 (주)신의 직원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생색낼 건 내야 된다나.
이른바 쇼맨십이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도현이 나서서 몬스터를 처리했고, 오염된 땅도 돌아오자 도현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나마 가족인 부모님과 하지현, 차도식만 가끔 사적으로 만난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릴 뿐.
그런 도현이 갑자기 학교에 출몰한 거다. 그나마 학교이니까 다행이지, 헌터 협회였다거나 도심이었다면 몰린 인파부터 시작해 기자, 방송국에서도 달려와 공식 인터뷰 자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대한민국 국민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다.
블랙홀 랜드의 포탈 서비스가 시행되고 세계 각지 어디서든 블랙홀 랜드에 들어서면 가고 싶은 나라로 바로 갈 수 있었다. 이른바 비행기 없이 어디로든 바로바로 떠날 수 있게 된 거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데 1분이면 충분하니,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세상 참 좋아졌지.
블랙홀 랜드가 처음 오픈됐을 때만 해도 가장 많이 나돌았던 말은 인류의 이동이었다. 쉽게 말해 지구를 버린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현재는 오히려 일상과 헌터의 생활이 분리되면서 선순환을 이루었다.
뭐, 세세하게 파고들면 독점이니 왕이니 하며 반발이 거세어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더미였지만.
도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교수를 쳐다봤다. 얄밉게 웃고 있는 얼굴이 없던 미움도 꼬투리 잡아 만들고 싶을 지경이다.
‘매부 밑에 붙여 굴려 볼까? 아니면 휘 밑에?’
이런 고문도 좋을 것 같고.
진상의 끝판왕인 신들 전담팀으로 보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입맛을 쩝, 다신 도현은 추리닝 바지에 흰 티, 슬리퍼를 질질 끌고 교수 옆에 섰다.
무수히 꽂히는 시선들에 앞으로 나오고 보니 공식적인 우리 안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말재주는 없으니 질문 몇 개만 받겠습니다.”
인사도 없다. 귀찮고 심드렁한, 밀림의 왕 사자 같은 모습.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꼴통의 정석 패션으로 보던 도현의 옷차림이 이제는 수수한 헌터, 꾸밈없는 헌터로 칭송되었다.
도현은 대충 넘길 생각으로 나왔다가 눈앞에 펼쳐진 거수 밭에 신음을 흘렸다. 손을 안 든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지도…….
잠깐 고민하던 도현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블랙홀 랜드 관련 질문은 제외.”
훅 줄어들 것 같았던 거수는 차이가 없었다. 아니, 그냥 그대로라고 하는 게 나았다.
난감해진 도현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다시 조건을 붙였다.
“사적인 질문 제외.”
후두두둑.
3분의 2가 떨어져 나갔다.
오히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여자들이 그런 거라면 이해하겠는데, 대부분 사내놈들이 손을 내리니 말이다.
남은 수는 100명쯤.
“맨 뒷줄 오른쪽에서부터 질문 받겠습니다. 중복된 질문이면 건너뛰고요.”
첫 질문의 명예를 쥐게 된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팬 미팅 안 하십니까!”
“오오오! 팬 미팅!”
“아 씨, 내가 할랬는데!”
도현은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매부가 만들었다던 팬 카페가 있다고 했었지.
“그, 우도현교… 으흠, 거기요?”
“예!”
대답에 강의실이 울릴 정도였다.
왜 이럴 때는 단합이 잘되는 건지.
진짜, 솔직히, 진심으로 귀찮았지만, 저 초롱초롱하게 번뜩이는 눈빛들을 보니 안 한다고 했다가는 몰매라도 맞을 기세다.
“매부… 아니, 차도식 협회장님과 조율해 보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이렇게 좋아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다행인 건 이 질문 하나로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는 거다.
두 번째는 여학생이었다. 뭔가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데.
“토토와 모르달이 보고 싶습니다!”
함성과 야유가 함께 공존했다.
도현은 또다시 눈을 깜빡이다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거지?
고민하던 도현은.
“부를까요?”
“우오오오오!”
“꺄아아아악!”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비명이 강의실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