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 결착 (3)
고막이 터질 정도로 강한 굉음이 거리를 잠식했다.
치에샤는 윙윙대는 이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신음이 절로 나왔지만, 이를 악물며 버텼다.
움직임에 따라 건물 잔해가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팔을 들어 대충 쳐 낸 치에샤는 자신의 무장이 해제된 걸 깨달았다.
“우도현… 우도현을 찾아야 해.”
격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찾아 숨통을 끊어야 했다.
망설임으로 흔들리던 눈동자는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겨 건물을 나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녀가 처박혔던 건물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치에샤는 그 소음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계속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자신이 격을 터트렸던 그 거리가 나왔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깊고 넓게 팬 구멍이 분화구처럼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주변은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결계 안이라는 것 정도. 싸움이 끝난 뒤 결계를 해제하면 원상 복구가 된다지만, 이 정도의 격을 발산해 버리면 결계는 버틸 수 없다. 그렇게 결계가 깨져 버리면 복구는커녕 다시 이어질 전투의 여파에 사람들이 휩쓸리고 말 거다.
‘재고 자시고 할 상황도 아니었지.’
그런 뒷일을 생각하고 저지른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그 결과로 이미 결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하늘에 자잘한 균열이 보였으니 말이다.
치에샤는 입술을 씹으며 다시 우도현과 그의 편을 든 3명의 신을 찾기 시작했다. 차라리 격의 방출에 휩쓸린 게 그 3명이었다면, 그래서 큰 타격을 입혔다면 오히려 일이 수월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현을 포함한 4명은 거리 반대편 5층 정도 높이의 건물 옥상에서 치에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온전한 모습. 거기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거리를 제외하고 그들의 주변은 말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건 한마디로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자신들을 응시하는 치에샤를 보고 혀를 찼다.
“가시나야, 니는 대체 왜 그라노? 처음 말한 대로 이놈을 신으로 만드는 거로도 충분하지 않나? 아니면 억울하드나?”
조롱이 아니었다. 휘는 말 그대로 치에샤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 신에게 동정이라…….’
자신보다 못한 신. 그것도 임시 신에게 받는 동정은 불쾌하기만 했다. 대꾸 없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웃은 치에샤는 도현을 향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했는데, 최상급의 신격이었어.”
도현은 시겔로를 검지에 걸고 빙빙 돌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랐어.”
옆에서 아흐라나가 고개를 저었다.
“지배자님, 자각은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이름 부르라니까. 무슨 중2병도 아니고 지배자래.”
너무 가벼운 모습에 린 아니사와 휘, 아흐라나는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그게 도현다웠으니까.
“그리고-”
아흐라나는 운을 떼며 치에샤를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고작 최상급 신?”
“……?”
“우습군. 넌 신의 진정한 격을 모른다.”
치에샤는 얼굴을 굳혔다. 아흐라나에게서 느껴지는 신격이 자신의 예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흐라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신으로서 존재했던 때에도 들어 보지 못한 조잡한 신이 지배자를 입에 담다니.」
신어(神語)와 함께 방출된 격은 황금을 머금은 청록색의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올랐다.
부푼 단발이 격에 넘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 모습만 봤다면 누구나 탄성을 내질렀겠지만, 자신을 향한 위압감과 살기에 치에샤는 저의 목숨을 앗아 갈 사신을 본 듯 하얗게 질려 갔다.
세로로 찢어진 푸른 눈동자가 날것의 살기를 뿜으며 외쳤다.
「네 목을 뜯어- 켁!」
곧장 달려들려 했던 아흐라나는 복부에 박히는 발길질에 바닥에 고꾸라졌다.
도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여기 농장 아니잖아. 결계 깨지기 직전인 거 안 보여? 그냥 지구 담당팀으로 바꿔 줄까? 빡시게 굴러 볼래?”
엎어졌던 아흐라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배자이시여! 저 조잡한 신의 무례를 더는…….”
“시끄럽고. 내 이름, 부르라고.”
“…도현 님.”
도현은 이마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강한 그 자식을 안 데려와서 다행이다 싶었더니, 이놈도 송강한과였어. 하아…….”
그런 도현 옆에 서 있던 휘가 똥 씹은 얼굴로 아흐라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도 직원 좀 필요한데- 저놈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닐 것 같은데.”
(주)신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그들 부서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부서가 지구 팀이라는 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마음대로 때려 부술 수도 없고, 항의란 항의는 일일이 대응해 줘야 했으니, 신격이 있어 봤자 쓸모가 없다고 할까.
신이라서 그나마 지치지 않는 체력에 피로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이점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요즘 도현은 불평하는 이들에게 전부 지구로 보내 버린다고 선언했고, 모두가 착실하게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었다.
결국 지구 팀은 휘와 한국 헌터 총본부를 맡은 차도식, 그의 아내인 하지현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도현은 본의 아니게 동네북이 된 휘에게 괜히 미안해 인재를 물색하고 있지만, 아흐라나는 넘길 수 없었다.
“안 돼. 신 놈들을 잘 아는 건 아흐라나밖에 없어.”
“하,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내 혼자 뭐 하라고? 이래서 신은 죽어도 안 할랬는데, 저 가시나 때문에 이게 뭐꼬.”
휘가 오리 주둥이처럼 입을 삐죽 내밀어 투덜대자 도현은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이거 뭐, 일만 대충 지휘하고 놀아도 될 줄 알았더니, 진상 중의 진상들을 상대해야 할 판이다.
끄응, 앓던 도현은 아흐라나를 향해 슬쩍 눈을 흘겼다가 휘에게 말했다.
“대신.”
“뭐?”
“강한이가 인수인계 잘 받으면 보낼게.”
“예? 지… 아니, 도현 님!”
청천벽력 같은 결정에 아흐라나는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서 이동만은! 차라리 개처럼 굴려 주십…….”
“시끄러워. 그러니까 누가 나서래?”
어깨가 축 처진 아흐라나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히죽 웃은 휘가 잘 부탁한다며 아흐라나를 다독였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치에샤가 넋이 나간 것처럼 물었다.
“지구 부서……? 팀……?”
도현이 방금 생각난 듯 짧게 탄성을 냈다.
“아, 깜빡하고 말 안 했네. 지구, 내 거야.”
“뭐… 지구가 네 거… 라고?”
“어.”
“언제……?”
“글쎄, 좀 됐지? 내 거이긴 한데, 담당은 휘가 해. 보다시피 좀 바빠서.”
피식 웃는 도현을 멍하니 보던 치에샤는 머릿속에서 뚝, 하고 뭔가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왜?”
“뭘?”
심드렁하게 묻는 도현을 악귀처럼 노려보며 치에샤는 모든 격과 힘을 폭발시켰다.
“왜! 너냐고! 왜애-!”
쩌저저적! 퍼어엉!
위태위태하던 결계는 바스러져 빛 가루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 안 된다아아아! 결계에에엑!”
휘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퍼지고, 도현은 결계를 복구하고 강화하려고 했던 기회를 놓쳐 머리만 긁적였다.
“죽으려고 작정했네.”
“도, 도현아, 제브라드 님은…….”
계속 눈치만 보며 입만 뻥긋거리던 린 아니사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만, 제 성격을 아는 이들에게 물으면 열이면 열, 전부 없앨 걸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도현은 대답 없이 피처럼 붉은 힘을 뿜어내는 치에샤를 보고만 있었다.
치에샤가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발아래 지면이 수박처럼 쪼개지고 뒤집혔다. 꽈르릉,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고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에 도시에서는 비상경보가 앵앵, 울려 퍼졌다.
좀 전에 격을 방출한 탓에 꽤 지쳤을 텐데.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걸 다 쏟아부은 마지막 힘이란 걸까.
도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 한국 다 날아가게 생겼네.”
그 말에 휘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악처럼 소리를 질렀다.
“미쳤나! 막아라, 쫌! 아악! 저기 빌딩 무너진다아악!”
저럴 시간에 결계를 다시 치는 게 빠르겠다…….
도현은 손을 휘저어 결계를 쳤다. 처음 결계는 린 아니사가 대화할 목적으로 대충 친 것으로, 신격을 조금만 뿜어내도 바스러질 정도로 약했다.
그나마 도현이 전투 중에 피해를 막았기에 그 정도로 끝났다는 것.
어두운 하늘에 푸르스름한 결계가 일렁였다.
“이 정도면 깨질 일은 없겠…….”
“우도혀어- 언!”
치에샤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도현이 있는 옥상으로 뛰어들었다.
카앙!
얼굴로 떨어지는 그녀의 주먹을 잡자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치에샤와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공격이 막힌 것만으로도 당황하거나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겠지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진한 미소를 띠었다.
“꺄하하하핫!”
화염을 뿜어 대듯 몸에서 폭사하는 붉은 힘에 머리카락과 눈은 피를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하얗게 질린 피부는 마치 미친 마녀 같았다.
실체화된 격이 그녀의 몸을 타고 송곳처럼 변했다. 그 수만 수천 개. 팔뚝만큼이나 굵은 송곳들은 형태를 갖추자마자 도현에게 짓쳐 들어갔다.
빈틈도, 사각지대도 없었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신은 즉사시킬 정도의 격이 담긴 송곳은 아흐라나조차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하지만 도현은 피하지도,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하게 치에샤를 바라보다 격의 파도에 휩쓸렸다.
투두두두두!
순식간에 붉은 고슴도치가 된 도현을 보던 치에샤는 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 우도현!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방심하다니. 몸뚱이는 신일지 몰라도 정신은 벌레 같은 인간이었어!”
통쾌하게 웃는 모습과 달리 그녀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린 아니사와 휘, 아흐라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멍하니 벌렸다.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으니까.
치에샤는 아직 자신의 주먹을 쥐고 있는 도현의 손을 내려다보다 신경질적으로 털어 냈다. 아니, 털어 내려고 했다.
“……!”
빠지지 않았다.
꽉 움켜쥔 것도 아닌, 그저 갖다 대고 있는 것임에도.
그때 도현을 꿰뚫었던 송곳들이 먼지가 되어 붉게 흩날렸다.
치에샤는 말짱한 도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 떻게……?”
“네 덕이지.”
“내가……?”
“농장.”
다시 묻지 않았지만, 두 눈동자에 담긴 의미는 하나였다. 그 농장이 이 지구보다 초월한 신격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도현은 좀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최초의 탄생이래.”
“최초…….”
“아주 옛날에 ‘최초의 탄생’을 차지하면 왕이 될 수 있었나 봐.”
“…….”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해가 됐다. 그리고 첫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알았다면, 도현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 자리를…….
“아니, 넌 그 전에 잡아먹혔을 거야. ‘최초의 탄생’이 좀 많이 까다롭더라고.”
“…그렇구나.”
치에샤는 몸을 타고 번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모든 걸 다 쏟아부은 반동이었다.
근육과 신경을 가닥가닥 찢는 고통이 전신을 때렸다. 핏줄이 붉어지며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꿈틀거렸다. 그와 함께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하는 몸 상태에도 치에샤는 웃었다.
도현은 빈손을 들어 그녀의 정수리를 검지로 툭 쳤다. 고통도, 뒤틀리던 몸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도현이 물었다.
“하고 싶었던 게 뭐였어?”
치에샤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도현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도현의 눈썹이 위아래로 휘었다.
“그럼 지구는?”
“그냥… 좋았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지구에서… 인간으로 살고 싶을 정도로…….”
그 자유로움이.
그 생생함이.
그 따뜻함이.
치에샤의 눈동자는 도현을 향해 있었지만, 그를 넘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거의 다 감긴 치에샤의 눈을 보던 도현은 토토와 모르달에게 하듯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래, 이만 자. 좋은 꿈 꾸고.”
그 말이 허락이라도 된 듯 치에샤는 눈을 감았다. 잔잔하게 미소 띤 입술은 정말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빛의 가루가 되어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날아가기 시작했다.
도현은 그 빛무리를 보다 손에 남은 붉은 보석을 흘깃 보고 주먹을 쥐었다.
주변에 친 결계가 소리 없이 사라지며 난장판이 되었던 거리도, 건물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지켜보던 도현은 셋을 향해 말했다.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