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 농장 계획 (3)
이오르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아야세 하루카를 의아하게 봤다. 그녀가 주변을 살피더니 이오르에게 귓속말을 했다.
“처, 천계 대표이사라는데…….”
모두의 시선이 모인 탓에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는 마족들과 도현, 그리고 이오르가 전부였다.
도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계?”
마계와 달리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
농장에 편입된 이후에도 세계만 존재할 뿐이었던 그곳에 처음으로 관리자가 생긴 것이다.
마족의 왕인 그라드와 그의 친위대인 4명의 마족들은 긴장했다. 본래 마계와 천계는 앙숙 관계이자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니까.
그 공식이 깨진 건 도현의 깽판 때문이었다.
마계야 약육강식의 세계이니, 강자를 숭배한다.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지만 형식적으로는 순순히 따랐다.
그에 비해 천계는 전형적인 집단적 이기주의였다. 세세한 모든 걸 법으로 제약하는 세계. 어린 천족이나 지위가 낮은 이들은 순수함이라도 있었지, 오래 살아온 천족은 이미 법을 입맛대로 굴려 먹기 일쑤였다. 그 코걸이와 귀걸이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도현은 전부 날려 버렸고, 이후 마계로 갔던 것이었다.
그 탓에 손속이 과해져 마계도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누굴 탓하랴.
“적어도 이전과는 다르겠지.”
도현은 튀어나올 것같이 커진 눈을 굴리는 아야세 하루카를 보다가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이오르와 눈이 마주쳤다.
시뻘게진 얼굴과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이가 당장에라도 미친 짓을 해 댈 듯했다.
쯧, 혀를 찬 도현은 차원의 의도를 짧게 설명했다.
“굳이 할 건 없어. 존재만으로도 천계가 돌아갈 테니까.”
겨우 수그러든 이오르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뭐, 아야세 하루카의 성격에 보고만은 못 있겠지만, 그건 그녀의 선택 아니겠나.
도현은 웅성대는 이들과 자신 앞에 떴던 메시지 창을 보고 실소했다.
지구의 기업 시스템을 가져와 적용하다니.
그가 생각 못한 부분은 이들 모두가 신이 되어 직장처럼 직급을 받았다는 거다.
‘그저 돌아가는 상황만이라도 알아 두라고 부른 건데.’
오히려 지구의 인류는 체계가 잡혀 있고 블랙홀 랜드라는 큰 머리가 있어 인력… 아니, 신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브라드 차원은 이제 시스템에 적응하는 단계이니까, 종족별로 상급자가 필요하다.
폐쇄적인 성향도 한몫했을 거다.
‘그런 것치고 드래곤들 직급이 더 낮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도현은 농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 라는 차원의 기준이 직급을 나누었다는 걸 깨달았다.
천계를 맡은 아야세 하루카는 논외로 치고. 아무래도 이건 적성 같거든.
‘그러면 대충 농장 문제는 정리가 된 건가……?’
막연하게 생각한 문제에 차원이 알아서 해결책을 제시해 준 건 고마웠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정리를 잘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남은 건 지구 정리… 응?’
도현은 오랜만에 울린 알람에 고개를 들었다.
띠링!
[차원 오픈 D-7!]
차원과 차원 간의 교류가 시작됩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농장 차원으로 인해 타 차원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원만한 교류를 시작해 봅시다!
-교류 방법:미정
신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봅시다!
[차원의 이름 짓기]
차원의 이름을 공표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미룰 수가 없어요!
차원 오픈 전까지 꼭 이름을 지어 봅시다.
-기한:5일 이내
-성공 조건:70퍼센트 이상의 신이 동의해야 합니다.
-실패 시:차원의 의지가 임의로 변경합니다. 두 번 다시 변경할 수 없습니다.
“으음…….”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모두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같은 퀘스트를 보고 있는 듯했다.
임혜정이 낮게 웃었다.
“정말 회사 같네.”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 차원이 학습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당연히 그 시초는 블랙홀 랜드겠지.
도현은 퀘스트 창에서 눈을 떼고 모두에게 물었다.
“차원 이름은 모인 김에 처리하는 게 낫겠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미오르와 그라드가 동시에 말했다.
“당연히 우도현 차원이지요.”
“당연히 우도현 차원입니다!”
“…….”
제브라드 차원 출신인 직원들은 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르와 드래곤들, 노아 이선이 썩은 얼굴이 되긴 했지만.
지구 출신 직원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못한 게 맞을 거다.
우대성이 웃음을 겨우 삼키며 힘겹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아들이 인덕이 있어. 아니, 신이니 신덕인가?”
푸흡, 웃음을 참는 소리가 더 커졌다.
도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흑역사를 몇 개나 갱신하는 건지.
한숨을 푹 내쉬는데 펜션의 현관문이 열렸다.
벌컥!
“도현아! 이게 뭐시다냐?”
주나근을 옆구리에 낀 채 헐레벌떡 달려온 강혁이 모인 이들을 보고 흠칫했다.
“아빠! 강혁 삼촌 왓써!”
“도련님, 이게 무슨 상황임까요?”
두 사람과 두 아들이 들어오자 도현은 알 수 있었다.
이들까지가 신이라고.
갑자기 갑갑함과 한숨이 다시 몰려오는 이유는 뭘까.
뭐… 강혁 삼촌이나 토토와 모르달이야 이해하겠는데, 주 차장은 왜?
겸사겸사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도현은 주나근에게 인사했다.
“주 차장님, 오랜만이네요.”
강혁의 옆구리에서 재빨리 몸을 빼낸 주나근이 헛기침을 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 회장님. 강녕하셨습니까!”
(주)신이라는 회사의 회장이 도현이긴 했으니 틀린 인사는 아니었지만… 이유 없이 불편했다.
도현의 시선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주나근은 관등 성명처럼 자신의 부서와 직급을 밝혔다.
“매니지먼트 부서 주나근 과장입니다.”
“매니지먼트?”
이 부분은 차원이 알려 주지 않으니 도현은 더 이해가 안 갔다.
강혁이 끼어들었다.
“나도 매니지먼트 부서다! 강 이사라 불러!”
그러자 토토와 모르달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빠, 토토는 생산, 개발 부서 대표이사야! 근데 무슨 뜻이야?”
“도련님, 소인은 총무, 비서실장임다욧!”
그때, 조용히 있던 차도식이 울먹거렸다.
“처남님… 왜 제가… 엔터테인먼트 소속입니까……?”
하지현이 푸핫, 웃었다.
도현은 이마를 짚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
왜 농장에서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건지.
그때, 민혁이 짧게 탄성을 냈다.
“어? 나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신이라고 떴어…….”
“그럼 차원 담당은?”
“그것도 있고. 투잡 같은 건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하미인이 말했다.
“혹시 농장을 관광지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 말에 힌트를 얻은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지먼트는 농장에 오는 헌터들 관리 같구나.”
그제야 차원이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도현은 깨달았다.
세분화된 관리자.
거기에 기업의 형태를 넣었을 뿐이라는 걸.
‘제브라드 세계였다면 제국이겠네.’
그렇다 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면 매니지먼트와 엔터테인먼트.
의도도 전혀 알려 주지 않으니 더 의아하달까.
‘설마, 그냥 저지른 건……?’
도현은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
미국의 밤이 없는 도시 라스베이거스. 그곳은 세상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화려해지고 더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에펠 타워 맨 위. 깜깜한 밤 아래 홀로 빛나는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그곳에 앉은 치에샤는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무하네.”
휴레가크에게 끌려온 게 3일 전.
그때만 해도 치에샤는 휴레가크를 무력화만 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도현을 지구의 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집어삼킨 뒤였다.
“우스운 변명이지.”
그래, 우습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직접 나서서 정리하는 건데. 그랬다면 지구도, 자신의 차원도 모두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후회에 잠겨 있었다.
솔직히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도저히 우도현만으로 두 세계가 공존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직접 나서 봤던 적도 있긴 했다. 결과는 제 손으로 직접 지구를 파괴해 버렸다. 차원만 남고 모든 생명체는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원인은 모든 것을 잃은 우도현의 자살이었다.
그때의 충격에 그녀는 미친 척하고 제브라드 차원에 지구를 동화시켜 보기도 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무리 제브라드 차원이 지구보다 수십 배나 더 된 차원이라지만, 질과 양은 지구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랬던 무수한 과거에서도 공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신격과 도현의 신격이 처음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비록 현재 자신의 모습은 예전과는 무척 다르지만…….
“어떻게 됐든, 이제 마지막이야.”
남은 신은 자신이 직접 도왔던 린 아니사와 지구의 신인 휘.
치에샤는 린 아니사에게 신격을 포기할 것을 권할 생각이었다. 그 대신 영혼을 거두어 자신의 첫 창조물이자 질서를 수호하는 수호자로서 편히 생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었고, 우도현이 지구에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텨 지구의 성장을 늦추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까.
치에샤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달이 사라지고 흐릿한 별들만 보이는 어색한 모습.
지구의 인간들은 저 별들의 실체가 신들의 시선이란 걸 알기나 할까……?
지구의 달을 떨어트린 건 더는 신들이 지구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통로를 끊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달을 조각내어 워프로 이용하게 했다. 그러면 린 아니사가 아무리 초보 신이라 해도 다른 신들에게 휘둘리지는 않을 테니까.
치에샤는 정리가 되고 나면 저 하늘에 푸른 달 한 쌍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이름은 ‘모르’와 ‘달’로 지을 생각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의 눈이 살짝 휘었다.
“빨리 끝내야지.”
갑자기 의욕이 밀려온 치에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레가크를 없앤 후 그의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 미국에 퍼진 마나를 없앴지만, 전체를 덮은 보호막만은 유지해 두었다.
세뇌된 헌터들은 휴레가크 옆에 붙어 있던 두 사람에게 일임했고, 그 결과로 미국은 전혀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치에샤는 다시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을 바라보다 꽤 먼 거리의 전광판에서 시선을 멈췄다.
‘우도현…….’
흔들리는 카메라가 정확히 우도현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늘 심드렁한 얼굴이지만 찍힌 영상에서는 유난히 입가의 미소가 짙었다. 마치 조롱하듯.
『외눈박이, 넌 걔 놓치지 말고 꼭 데리고 있길 바란다. 정말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거든. 얼빠질 네놈 면상을 실시간으로 못 본다는 게 좀 아쉽지만. 뭐, 그럼 다음에 보자고.』
미국 대통령을 대면했던 그날, 자신이 납치되고 남긴 메시지.
저것만 돌려 본 게 100번. 그녀는 볼 때마다 속으로만 했던 그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도 곧 편히 보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