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 농장 계획 (2)
오랜만에 방문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문제는 모두 준비 없이 소환된 탓에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다 도현과 서로를 보고 놀랐다는 것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제일 놀란 건 아흐라나와 송강한이었다.
바다를 벗어나지 않았던 아흐라나는 신격을 갖기 전 몬스터였다면 단숨에 찢겨 죽일 강자들이 잔뜩 나타나자 새삼 도현을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송강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이 괜히 됐다는 생각과 자신이 아니면 누가 도현을 보필하겠냐며 겨우 마음을 달래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숨쉬기 불편할 정도의 마기를 뿜어내는 마족 다섯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주인님! 부르셨어요?”
생기발랄한 여인. 이쪽도 분명 마족 같은데, 신이 된 자신보다 오히려 더 큰 존재감에 움찔했다. 그 옆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익숙한 덩치를 보고 눈이 커졌다.
‘채근석!’
입을 열려던 강한을 막은 건 민혁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민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강한은 잠자코 지켜봤다.
“도현 님을 뵙습니다.”
“도현 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적다면 적은 인원이지만, 저마다 한마디씩 하자 귀가 터질 것 같았다.
그 괴로움 속에서도 강한은 당황했다. 나타난 대부분의 강자들이 도현을 향해 한결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였다.
마치 독실한 신도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 이들 중에 불만 가득한 이가 하나 있었다. 정말 같은 사내가 봐도 잘생겼다 싶은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의 사내였다.
“이 새끼야! 제일 바쁜 시간에 갑자기 부르면 어떡하냐고! 아야세만 똥줄 빠지게 됐잖아!”
프라이팬에 요리사 복장의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성질을 버럭버럭 냈다. 더 의문인 건 불려 온 모두가 그 외국인이 화를 낼 때마다 흠칫거리며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강한은 그가 누군지 예상이 됐다. 그래서 슬쩍 민혁을 보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 사람이 이오르라는 블루 드래곤인가.’
더 웃긴 건 도현은 익숙해 심드렁하기까지 하다는 거였다.
“그럼 정리하고 같이 오든가.”
그 한마디에 이오르는 주변을 흘깃거리더니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30분이면 돼.”
“올 때 자는 놈들 다 데려와.”
“어? 설마 저거 때문에?”
그가 하늘 위 은하수를 가리켰다.
“그것도 있고, 내 눈치 본다고 레어에서 못 나오는 놈들도 있을 거 아냐.”
“아버지랑 어머니는?”
“이미 알아.”
머리를 긁적인 이오르는 ‘일단 알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현이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일단 들어가죠.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으니까.”
많은 인원임에도 펜션은 넉넉했다. 애초에 로타네프가 워낙 크기도 했고, 토토와 모르달의 욕심이 잔뜩 들어간 호화스러움의 끝판왕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던 차 부부는 갑자기 불어난 인원에 놀랐다.
“이 인원으로 회의를 하기엔 장소가…….”
난감한 웃음을 짓는 차도식을 본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고, 실내가 순식간에 새로운 공간으로 교체되었다.
편백을 닮은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퍼지는 원목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평평했던 바닥도 계단 형태로 바뀌었고, 넓고 푹신한 의자가 배치되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시선의 중심인 맨 아래 중앙에 선 도현이 입을 열었다.
“설명할 게 많으니 말은 편하게 하겠어. 질문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해.”
먼저 나온 이야기는 도현과 신 제브라드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신 제브라드가 지구와 제브라드 차원을 살리기 위해 과거를 반복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뒤에 이어질 지구를 차지하려 했던 신 놈들과 현재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밑작업이라 봐도 무관했다.
그러나 그건 도현만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탄식하며 울분을 삼키기 바빠 분위기는 무척이나 숙연해졌다. 하지만 제브라드의 환생체인 치에샤가 미국에서 저지른 일에 이어 신이 되었다는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자, 분위기는 불쾌와 황당이란 기름 붓기로 인해 끝을 모르고 과열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 제브라드의 과거 이야기와 지구의 연관된 이야기가 한창일 때 참석한 이오르와 아야세 하루카, 노아 이선, 마지막으로 드래곤들은 전부 머리끝까지 열이 차올랐다.
그들은 신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신의 임무를 이행하는 심판의 종족으로 불렸기에 자존심과 자긍심을 빼면 시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무를 짊어진 것도 전부 신의 의도였는데,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고 봐도 무관했다.
그나마 서로 뿜어내는 힘에 영향받지 않도록 도현이 배려해 주었고, 그 덕에 약한 드워프들은 드래곤들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살기에도 피해가 없었다. 그 현상을 못 느낄 정도로 대부분의 이들이 당장에라도 치에샤를 잡으러 가기 위해 몸을 들썩이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하지만 아직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도현이 이야기가 전부 끝난 다음에 질문을 받겠다고 했으니까.
다시 이어진 이야기는 농장에 대해서였다.
농장이란 차원 자체가 본래 어떤 곳이었는지, 그리고 왜 하늘에 은하수가 나타났는지 간단하게 설명했고, 차원 담당팀의 소개도 끝나자 분위기는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섭게 변해 있었다.
아니, 부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는 게 맞는 말일 듯했다.
이오르가 끌고 온 노아 이선과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놓은 아야세 하루카, 두 사람만 빼고는 말이다.
팔짱을 낀 채 침묵하던 이오르가 먼저 입을 뗐다.
“그년 그냥 둘 거냐?”
도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자, 이오르가 독기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난 그냥 죽이는 거로 못 끝내. 그런 년은 몇만 년이고 고문할 거다. 그러다 정신이 죽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고 해도 영원히 고문할 거다.”
방문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마족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경험을 떠올려 접목해 보며 입맛을 다셨다.
지구 출신의 사람들은 좀 더 이성적인 분노를 표출했지만 그렇다고 가볍거나 약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족만큼이나 집요하고 괴로운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현의 부모인 임혜정과 우대성은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아들이 5년간 행방불명이었던 이유가 고작 차기 신으로 점찍어서라니.
신의 환생체라는 치에샤, 그 인간이 블랙홀 랜드에 자주 왔었고, 자신들과 만났던 일도 있었다는 것에 더 치를 떨었다.
차라리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하아…….”
임혜정은 덤덤한 도현을 보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려 댔다. 우대성이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달리 허탈감과 환멸이 가득한 한숨에 가족인 하미인과 차도식, 하지현까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농장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채 숨죽였다. 아무리 따르는 신을 위한 감정이라지만, 자식이 제 입으로 덤덤하게 직접 그 일들을 읊어야 했던 이 상황과 그 지구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임혜정은 말없이 일어나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아들을 꼭 안아 다독였다.
“고생했어. 엄마는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
“어…….”
도현의 표정은 미묘했다. 찡그린 것 같으면서도 웃는 것 같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 아빠도 아들 좀 안아 보자.”
우대성까지 다가가 아직 도현을 놓아주지 않는 임혜정까지 한꺼번에 둘을 와락 안았다. 도현의 얼굴이 처음으로 터질 듯 붉어졌다.
“아니, 좀. 그만, 놔줘…….”
도현은 흑역사를 제조했다고 생각했지만,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그리고 한편으로 안심했다.
늘 어디로 튈지 모르고 너무 즉흥적인 데다 모든 걸 부수는 것으로 정리하는 신이지만, 그에게도 기댈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와 달리 실시간으로 당하는 수치사에 도현은 임혜정과 우대성을 살며시 밀었다.
더 골려 줄까 싶었던 부부는 마지못해 팔을 풀었다.
“응?”
“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탄성을 내뱉은 부부는 슬쩍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손을 들어 검지로 허공을 터치했다.
“신격……?”
도현은 자신이 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신이 되자 차원의 결정이란 걸 깨달았다. 주인이 아닌 동반자란 위치였으니까.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세계.
그렇다고 강요한 것도 아니다. 모두가 자신이 선택하고 서로를 위해 노력하는 거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끝까지 유지될 거다.
도현이 그저 떠맡기기 위해 꼼수처럼 생각했던 ‘함께’가 이렇게 큰 의미일 줄이야.
탄성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에게 이어졌다.
“어? 신의 회사… 입사?”
“대리……?”
“연구팀?”
단어의 뜻을 모르고 어리둥절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으하하, 차장이래! 신으로 차장이라니?”
차도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신이 되는 게 기쁜지, 차장이라는 게 어이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던 민혁은 허공을 멀뚱히 보는 아바에게 물었다.
“자기는 어떻게 떴어?”
“어… 특수전담부서 과장… 이라는데? 자기는?”
“차원 담당팀 사원…….”
옆에서 듣던 송강한이 풉, 웃음을 터트리며 민혁에게 어깨동무했다.
“김민혁 사원, 잘 부탁하네.”
“강한이 넌?”
“어허, 송 이사님이라 불러.”
그 말에 아흐라나와 에놀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놀드가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왜 과장이야?”
“훗, 에놀드 과장이라 부르면 되나?”
강한이 거만하게 승리자의 웃음을 지었다.
어깨가 축 처진 민혁을 다독이던 아바는 슬쩍 아흐라나를 바라봤다. 뒤따라 셋의 시선도 아흐라나에게 모였다.
아흐라나는 괜히 목이 탔다.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조용히 네 사람에게 물었다.
“대… 대리가 뭔지…….”
넷은 터지려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때우며 시선을 다른 이들에게 돌렸다.
제일 큰 소리는 당연히 이오르에게서 터졌다.
“특수전담부서 이사?”
커진 아바의 눈과 마주친 이오르는 낮게 호오, 탄식했고, 대뜸 이오르에게 납치되어 온 드래곤들은 무엇이든 생소한 환경에 인상만 좁혔다.
이오르가 드래곤들에게 물었다.
“부서, 직급 불러 봐.”
“이오르 너랑 같은데? 뒤에 붙은 건 인턴?”
“어, 난 사원인데?”
“난 계약직이라는데?”
이오르는 처음에는 비웃어 주려다 연이어 나오는 직급에 괜히 마음이 쓰렸다. 신이라는 직급의 맛을 보고 나면 놓지 못할 텐데. 직급 상승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굴려야 하나?
그런 생각에 잠겼을 때, 데려왔던 아야세 하루카가 조심스럽게 이오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