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90. 휴식 (3)
그렇게 시작된 바캉스.
김경희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찔한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 그 속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형 종의 몬스터들이 바다를 누비며 노닐고 있었다.
꿀꺽.
‘저, 저게 다 씨서펜트…….’
중국에 다녀온 뒤로 헌터 3급 블루가 되었다 하더라도 저건 스치면 중상이다.
다행인 건 인간에게 흥미가 없다는 점일까.
‘아니,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고래 때문이겠지.’
바캉스라고 엄청난 기대를 했었다가 농장으로 간단 말에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농장은 그에게 있어서 훈련소나 다름없었으니까.
오로지 훈련, 훈련, 훈련…….
그래서 농장 포탈을 보자마자 바로 튀려고 했던 김경희는 자신의 뒤에서 기대로 부푼 헌터들을 보고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너무 바쁜 나머지 아직 블랙홀 랜드는커녕 농장에도 한 번 가 본 적 없었으니까.
주민으로 등록된 이들의 이동 능력인 포탈을 차도식이 열었고, 자신을 포함해 헌터 전원이 넘어갔다.
예전이라면 주민 등록이란 절차가 필요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모두가 넘어가지자 의아했던 것도 잠시,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쨍한 하늘 그 위로 밤하늘의 은하수가 펼쳐진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아, 저거? 차원이야.”
언제나 심드렁한 도현의 목소리에 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김경희는 이번만큼은 너무나도 헛되어서 정말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닌가 싶어 볼을 꼬집고서야 현실임을 깨달았다.
‘이젠 정말 놀랄 게 없겠지.’
있어도 놀랄 일은 없을 거다. 어차피 사는 세상이 다른 이들 중 제일 톱인 도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김경희를 비웃듯 귀를 때리는 폭포 소리가 바다에서 울려 퍼졌다.
츄아아악!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난 새카만 땅, 아니 고래 로타네프.
“매부가 그러는데, 서울시 사용 면적이랑 같다던가? 그렇대.”
‘그냥 섬이라고 해! 생물이라고 말하지 마!’
김경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가슴을 쳤다. 그 모습에 함께 따라온 헌터들이 의아해했지만, 너무 기뻐서 그러는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대한 섬 같은 고래 등에 올라가자 장관이 펼쳐졌다.
외국의 대부호들이나 살 만한 초호화 펜트하우스와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구와 인테리어.
심지어 젓가락 한 짝도 백금으로, 나오는 물에는 금가루가 섞여 있었다. 그렇다고 물은 그렇게 흔한 물이 아닌 마나석으로 정수한 마나가 담긴 ‘마나수’란다.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너무 과하다 보니 질린다고나 할까…….
그래 봤자 하루도 안 돼서 모두 적응 완료했지만.
아니지. 정말 깜짝 놀란 게 하나 더 있었다.
“이거 잠수도 할 쑤 잇써!”
무려 이 랜드의 모든 걸 뚝딱 만들었다는 ‘토토’ 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신만 해도 넋이 나갈 지경인데, 처음 온 헌터들은 이미 영혼이 가출한 상태인 게 당연했다.
‘파라다이스다!’
‘난 죽어도 이 바캉스를 못 잊을 거야!’
‘난 여기서 뼈를 묻겠다아아아!’
흥분에 넘쳐 외치는 헌터들의 휴가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보기만 해도 흉흉한 몬스터들은 어느새 해양 레저 스포츠 기구가 되었다.
몬스터가 끄는 줄을 잡고 수상 스키를 즐기거나, 특급 바나나 보트가 되어 바다를 누볐다. 씨서펜트의 꼬리가 수면을 내려치면 20미터가 넘는 파도에 서핑 보트를 즐겼고, 바다 깊은 곳까지 잠수한 고래 로타네프의 등에서 아쿠아리움보다 더 실감 나는 수중 경치를 구경했다.
토토 제작 무기, 방어구배로 비치발리볼도 진행되었고, 바닷속에서 진행된 보물찾기도 하며 지금은 볼 수 없는 대왕 조개의 진주나 광산에서나 찾는다는 스타스톤도 캐냈다.
밤에는 달빛 아래 캠프파이어에서 다양한 해산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힐링 바캉스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3일이 지났을 때.
이 낙원에 네 사람이 찾아왔다.
패한 팀이 낚시 떡밥이 되기로 한 내기로 인해 한창 열이 올랐던 비치발리볼이 끊기며 헌터들이 수군거리는데, 도현만이 히죽 웃었다.
“대장 행님, 누군지 아심니꺼? 민혁 행님은 아는데 세 사람은……. 근데 왼쪽 끝에는 사람 같지가 않슴더.”
민인성이 눈치를 보며 슬쩍 묻는 말에 김경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2명은 안다. 훈련할 때 늘 같이 굴렀던 민혁 형이고 그 옆에는 제브라드 차원의… 우도현교 대신관이라는 에놀드 씨. 그런데 뭐랄까, 묘하게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좀 어려진 것 같기도 하고?
‘나머지 둘은 누구지?’
에놀드 옆에 선 사람은 분명히 한국인이었다. 헌터가 맞는 것 같은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한국인에 헌터라면 웬만해서 한 번쯤은 봤을 텐데.
‘더군다나 농장에 오갈 정도면 도현 형과도 친분이 있다는 건데?’
그리고 왼쪽 맨 끝에 선 이는 진짜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오는 미모였다.
‘제브라드 차원의 사람인가?’
그럴 만한 게 일단 색이 화려하니까. 아름답긴 한데 계속 쳐다보니 선이 굵은 것 같기도 하면서 부드러운 게, 꼭 남녀를 섞은 느낌이었다.
그런 넷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도현을 바라보는 표정이 무척이나 아니꼽다는 것이었다.
“오, 왔어?”
남자가 봐도 멋지다는 탄성이 나오는 웃음인데 왜 이렇게 사악해 보일까. 그렇게 느낀 게 김경희만이 아닌지 송강한은 도현의 뻔뻔함에 기가 찬 듯 하, 웃음 섞인 한숨을 터트렸다.
“이… 새끼… 하, 진짜…….”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씹어 먹을 듯 노려보는데, 그 뒤에서 우대성과 임혜정, 그리고 하미인이 걸어왔다.
“우리 스타 혁이, 왜 이렇게 늦었어?”
임혜정은 민혁을 보며 먼저 인사했고, 민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군요, 에놀드 씨. 오신 김에 함께 휴가를 즐기는 건 어떻습니까?”
우대성은 에놀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에놀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대성은 그 옆의 송강한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낯이 익긴 한데…….”
“오랜만에 뵙네요. 아저씨, 아주머니. 저 송강한입니다.”
“어머? 하하, 도현이 친구 강한이? 이게 얼마 만이니?”
“어? 정말 강한이야? 녀석! 연락이라도 하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몇 마디 더 오가며 인사가 끝나고, 모두의 시선이 마지막의 아흐라나에게 꽂혔다.
아흐라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아흐라나입니다. 미흡하지만 남쪽 바다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순간의 정적.
남쪽 바다? 여기?
그렇다면… 사, 사람 맞아……?
헌터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나마 익숙한 우대성과 임혜정이 도현을 쳐다봤다.
“맞아. 이제는 농장을 대표하는 차원 담당팀 책임자이기도 해.”
우대성이 눈을 깜빡였다.
“차원 담당팀 책임자?”
“설마 저 위, 저거?”
눈치 빠른 임혜정이 하늘을 검지로 가리키며 물었다.
헌터들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고, 헤아리기도 힘든 은하수를 보자 처음 바다에 왔을 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저거? 차원이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니까 실감 못하던 헌터들이 하늘을 다시 보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차원 담당자라면 무슨 일을……?
도현이 말을 이었다.
“응, 그 팀원으로 강한이랑 에놀드, 민혁이가 함께 움직일 거야.”
그 말에 아흐라나와 송강한, 민혁이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에놀드만이 하늘의 은하수를 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들아, 그런데 무슨 일을 한다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지경이던 우대성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 아빠랑 이야기할 부분이긴 한데. 농장이 차원 정거장이 됐어. 저쪽 차원에서도 농장이 보이니까, 손님들이 꽤 올 거야.”
“손님?”
“응. 저 차원들의 주인인 신.”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임혜정이 되물었다.
“신……?”
“응.”
“그럼 얘네들은…….”
‘인간이잖아?’라는 말을 차마 붙이지 못했지만, 뒷말을 들은 듯한 이 느낌.
도현은 별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신이니까.”
“아니,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김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속마음을 내뱉었다는 걸 깨닫고 흠칫했다.
다행이라면, 그 타이밍에 바다에서 다급하게 하지현을 데리고 올라온 차도식의 등장이라고 할까.
“아니! 처남님! 무슨 말입니까? 신이라니요?”
그 말은 마치 왜 자신을 빼놓고 노느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도식이 형, 저기 끼면 안 돼요! 헬이에요, 헬!’
김경희가 그런 의미를 담은 뜨거운 시선을 차도식에게 보냈지만.
“미국 갈 때 저 버리고 가셨지요? 이번에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 꼭 낄 겁니다! 절대 뺄 생각 마십시오!”
김경희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미 몸이 3개라도 부족할 인간이, 이젠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업무까지 맡으려고 하다니!
‘아니야. 아직 기회가 있어! 지현 누님이 계시잖…….’
차도식 옆에 선 하지현을 향했던 김경희의 눈은 썩은 동태 눈깔처럼 퀭해졌다.
하지현은 눈을 반짝이며 네 사람을 쳐다보다 도현에게 물었다.
“싸가지, 신 되면 젊어져?”
그 한마디에 우대성과 임혜정이 눈을 번뜩였다.
“젊어져?”
“젊어진다고?”
“도현아, 작은엄마도 있어~”
도현은 원인 제공자인 하지현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움찔한 하지현은 되레 입술을 꽉 물더니 검지로 민혁을 가리켰다.
“민혁이 쟤, 안 그래도 요즘 헌터 연예인이라고 관리받고 피부도 좋아지고, 젊어 보이고!”
“으응, 나……?”
갑자기 지목당한 민혁은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외모는 요즘 뜬다는 헌터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일 정도로, 한쪽에서는 도현의 친우로 커플링을 엮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하지현의 시선이 제 옆에 선 차도식한테 잠깐 멈췄다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차도식과 민혁을 비교하게 되었고,
“아…….”
“으음…….”
“흠흠…….”
뭔가 모를 수긍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가만히 있던 차도식은 상황도 잊고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도현까지 둘을 비교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차도식은 배신이라도 당한 듯 입을 쩍 벌렸다.
“아, 아니… 처남님…….”
슬픈 상황에 우대성이 나섰다.
“큼, 사내는 자고로 사내다움이 최고지! 가장으로서 토끼 같은 마누라, 여우 같은 처자식 밥 안 굶기고 잘하면 돼! 외모에 너무 연연하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남자 헌터들이 크게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혜정이 미간을 찡그렸다.
“남자도 예쁜 여자 찾으면서 무슨. 여자도 내 남자 젊고 잘생기면 좋지.”
이번엔 여자 헌터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아바 언니.”
“아, 아바 씨……?”
괜히 찔린 민혁이 되물었고,
“더, 더, 더! 아름다워졌다고! 이젠 같이 있으면 내가 언니 같아!”
이번에 처음 넘어온 헌터들은 아바의 존재가 교류 헌터 이후로 돌아간 거로 알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긍하는 건 임혜정과 하지현의 엄마 하미인이었다.
“하긴… 아바 씨는…….”
“지현아, 비교할 걸 비교하렴. 원판부터…….”
그때였다.
“나 왔어-!”
화사한 래시가드 차림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바가 모두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 진짜가 나타났다…….”
김경희는 다시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