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 휴식 (1)
커진 휘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흔들렸다.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을 뚫어져라 보며 침을 꿀꺽 삼키던 휘는 도현이 두말하기 전 빠르게 치워 버릴 생각으로 재빨리 손을 움직이려 했다.
“자, 잠깐 기다려라!”
그런 휘의 손을 다급하게 덥석 잡은 사가가 제지했다.
“와, 린아?”
“휴레가크, 그놈은?”
“아직 있는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가는 휘의 붉어진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도현에게 물었다.
“도현아, 넌 제브라드 님을 어떻게 할 생각인 게냐……?”
“뻔히 알면서 왜 물어?”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사가의 눈에서 맺히지 못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절대 오지 않았으면 했던 상황이 결국에는 오고 말았다.
도현과 신 제브라드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가는 누구의 편을 들 수도,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사가를 못마땅하게 보는 건 휘였다.
그가 볼 때 앞뒤가 제일 꽉 막힌 건 다름 아닌 사가였기 때문이다.
‘그 가시나도 지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데.’
적당한 이유를 찾았을 뿐이지, 할 짓 못할 짓 다 하지 않았나.
그에 비해 사가는 책임에 휘둘려 그 무엇도 마음 가는 데로 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그 가시나가 죽었다는 말을 못 믿고 차원에 다녀왔다고는 하든데.’
그것도 업무의 연장선이 됐으니, 책임이란 갈래 중 하나라 보는 게 맞지.
‘그래서 뿅 갔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우직한 대나무처럼.
최소한의 책임도 꼼수를 부려 피하고 싶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격이 너무 좋았다.
진중하고, 진실하고, 순수하고, 정직하고 또…….
‘암튼, 이런 건 내가 질러 줘야지.’
휘는 제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사가의 볼에 입술을 부딪쳤다.
“이, 이놈아! 무슨 짓이야?”
놀란 사가가 저만치 떨어져 헉헉대자 휘는 빵긋 웃어 주고 빠르게 손을 놀렸다.
[신 ‘우도현’에게 지구의 모든 권한을 넘기시겠습니까?]
[(예/아니요)]
가볍게 ‘예’를 눌렀다.
“아, 안 된다! 휘야!”
달려온 사가가 다시 휘를 덮쳐 왔지만 이미 저지르고 난 뒤였다.
“오?”
“엥?”
도현의 탄성과 휘의 탄성이 교차했다.
“왜, 왜? 무슨 일이 일어난 게야?”
둘은 답답해하는 사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도현은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지구의 권한을 넘겨받았습니다.]
[지구가 차원-농장에 복속됩니다!]
[지구의 최고 관리자가 됩니다!]
지구를 넘겨받는다고만 생각했던 도현은 지구마저 농장에 들어오게 될 줄은 전혀 생각 못했다.
그리고 다시 뜬 알림에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 관리자가 필요합니다. 이전 관리자가 존재합니다. 이전 관리자를 지구 관리자로 유지하시겠습니까?]
도현은 알림을 보던 눈동자를 굴려 해탈한 수도승처럼 웃는 휘를 확인한 뒤 ‘예’ 버튼을 눌렀다.
[지구 관리자를 유지합니다. 지구 관리자:휘(도깨비 신)]
[최고 관리자로서 지구 관리자에게 부분 권한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단 5초도 안 걸렸고, 휘의 얼굴은 찜찜함으로 가득했다.
이유를 모르는 사가만 말 없는 휘의 위에서 멱살을 잡고 소리칠 뿐이었다.
도현이 환하게 웃으며 휘에게 말했다.
“휘 팀장, 지구 잘 부탁해.”
“팀장?”
“팀장?”
“지구가 농장에 복속됐거든. 지구는 관리자가 따로 필요하다던데? 추천으로 뜬 게 휘더라고.”
“왜 내 의사는 없는 건데? 난 싫다고오-!”
팔과 다리를 쿵쾅대며 애처럼 떼쓰는 휘에게 도현이 썩은 미소를 날렸다.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아? 쓸 놈들은 다 굴릴 거라고. 뭐, 대신에 부담은 없잖아?”
도현의 말대로 휘의 얼굴은 사람 같아 보였다.
눈 아래 검게 물들었던 다크서클은 사라지고, 푸석해 보였던 얼굴에는 매끈한 생기가 돌았다. 그것만으로도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사가는 깔고 앉은 휘를 빤히 바라보다 와락 껴안았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도현은 로봇처럼 우뚝 멈춘 휘가 웃겨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분위기를 보니 빠져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늦게 타오른 불이 제일 밝게 타오르지 않겠나.
휘는 모르겠지만, 사가는 연애 한 번 안 했으니 지금 느끼는 저 감정을 깨닫고 나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이제 급할 건 없으니 다시 애들한테나 가 볼까.’
에놀드와 송강한의 대련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아직 깨지 못한 아흐라나를 허공에 띄운 도현은 방해가 되지 않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
도현은 자신의 집에 아흐라나를 눕혀 놓고 로타네프의 배 속으로 향했다. 오기 전까지 살짝 기대하고 있던 도현은 예상과 달리 타이탄끼리 구르는 모습에 의아했다.
그것도 일곱 기의 타이탄이 한 기를 어떻게든 쓰러뜨리려고 달려들다니. 그마저도 일곱 기가 쩔쩔매고 있다.
막강한 한 기의 타이탄을 에놀드나 송강한이 조종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도현은 바닥에 착지하고서 민혁까지 끼워 술판을 벌이고 있는 셋의 모습에 눈을 끔뻑였다.
“뭐야?”
“어? 왔냐?”
“현아! 이리 와서 같이 마시자!”
“도행 이 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도현은 타이탄들을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누구야? 왜 저래?”
맥주잔에 가득 부은 술을 원샷한 송강한이 말해 주었다.
“아, 미국에서 주워 온 헌터.”
“근데?”
안주로 꼬치를 뜯던 에놀드가 낄낄댔다.
“상처 못 내면 내가 친히 일대일로 개인 교습한댔거든.”
민혁이 주는 빈 잔을 받은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기회 아닌가?”
이어서 술을 따르던 민혁이 탄식했다.
“너 에놀드가 어떻게 굴리는지 한 번도 못 봤지? 쟤가 입 털면 끝장이야.”
“왜?”
“신교로 교화시켜 버리거든.”
도현의 눈동자가 굴러 에놀드를 향하자 에놀드는 벌떡 일어나 빈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모든 게 나의 신의 뜻대로.”
무척이나 경건했으나, 왼손에 들린 꼬치가 퍽 인상적이었다. 그 행동에 민혁은 양팔로 팔뚝을 벅벅 긁었다.
“그만해라, 이 자식아! 어우, 이 닭살 어떡해! 내 손발이 오그라들어!”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송강한의 모습이었다.
“내일은 신교에 방문하겠어. 제대로 굴러가는지 확인해야겠군.”
“후후, 꼭 오도록 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될 거야.”
도현은 잔을 비우며 둘의 이야기를 외면했다. 그리고 민혁에게 물었다.
“미국 그놈이 왜 저기 있는데?”
“아, 그거? 아바 씨가 맡기고 갔어. 교육이라던가?”
“교육?”
“권속이라고 하긴 하던데, 적응하려면 여기만큼 적당한 데가 없대.”
뱀파이어의 힘 중 하나인 권속을 말하는 듯했다.
“차라리 마계 쪽으로 가는 게 나을 텐데.”
에놀드가 끼어들었다.
“마계랑 천계는 임시로 막아 뒀잖아.”
“막아?”
“뭐, 아바 씨야 괜찮지만 다른 헌터들은 들어가면 죽는 줄도 모르고 저세상 갈걸?”
“아아, 하긴. 그렇게 보니까 헌터가 너무 약하네.”
이번엔 송강한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헌터들이 왜 이렇게 약하냐?”
그 물음에 도현은 잠깐 사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지구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대. 그 전에 지구가 다른 신 놈에게 넘어가거나 멸망하면 안 되니까.”
어떻게 들으면 황당한 이야기. 이 모든 일이 도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한 제브라드의 작품이었다.
송강한은 씹듯이 중얼거렸다.
“진짜 그년을 살릴 게 아니었어. 괜히 휴레가크를 치려고 그런 년이랑 협상하다니.”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민혁과 에놀드는 그저 눈을 끔뻑였다.
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캔 맥주를 꺼내 따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잘됐지.”
“응? 너 무슨 짓 했지?”
뚜껑을 딴 캔 맥주를 자연스럽게 달라고 손을 내민 송강한은 쩝, 입맛을 다시는 도현을 보며 꿀꺽 한 모금을 삼켰다.
캬아, 탄성을 지르는 사이 3개를 더 꺼내 민혁과 에놀드에게 건넨 도현은 제 캔 맥주를 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제 지구도 내 거야.”
“푸웁-!”
“쿨럭!”
“오, 드디어 지구까지 진출한 거냐?”
에놀드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현아, 무슨 말이야? 진짜 신이 된… 아니구나. 이미 신……. 근데 농장에 지구까지? 가능한 거야?”
민혁은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자 단순화시킨 질문을 했지만, 이게 핵심이라는 건 역시 모른다.
“어. 지구가 커서 그런지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휘를 팀장으로 복직시켰어.”
“어… 휘가 누구?”
“지구 담당했던 도깨비 신.”
“…신이 신을?”
과부하 직전인 민혁에게 에놀드가 인상을 좁히며 말했다.
“신을 의심하다니. 친우로서 실격이군.”
“실격이라니! 의심이 아니라 이해력이 달려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씩씩대는 민혁을 보며 송강한이 탄식했다.
“제 팔자 제가 꼰다고, 신이라면 치를 떨 녀석이 나서서 신을 자처하니……. 하,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휴레가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의미 없지. 뭐, 내가 주인이 된 걸 모를 테니 둘이서 치고받고 싸우고 있으려나?”
그 모습을 상상이라도 한 건지 송강한이 낄낄댔다.
“편하긴 하네. 각오하고 지구로 왔는데 허탈할 지경이야. 그럼 이후 계획은 있냐?”
“농장이 차원 정거장이 되긴 했지.”
“차원 정거장?”
민혁이 농담처럼 말했다.
“우주 정거장도 아니고-”
“음, 비슷해.”
“어……?”
“그게 뭐야?”
애초에 다른 세상 사람인 에놀드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에놀드를 챙겨 줄 새도 없이 민혁이 당황했다.
“외, 외계인을 보는 거야?”
그런 민혁을 놀려 먹으려던 도현의 계획은 송강한 때문에 쑥 들어가 버렸다.
“야, 무슨 외계인을 갖다 붙여? 급이 안 맞잖아. 신이겠지.”
“오, 그럼 신들이 여기를 오간단 말이지? 강한 놈이 있으려나?”
다른 의미로 눈을 번쩍이는 에놀드까지.
참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셋이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겠어.
어쨌든 셋을 보던 도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 분담 좀 하자.”
“일?”
민혁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 되물었고, 눈치챈 송강한과 에놀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할 일 있지?”
“그래, 어디로 갈까?”
“신교에 연무장이 있지.”
만난 지 고작 2시간도 채 안 됐을 텐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도망가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감탄은 감탄이고, 내빼도록 둘 줄 알아?
도현의 입에서 사악한 웃음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어딜 가?”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도현을 중심으로 빛의 파도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으아악! 우도현! 이게 무슨 짓… 크윽!”
“시, 신? 어어억!”
“에엑!”
졸지에 신이 된 세 사람은 밀려오는 힘과 격에 정신을 잃었다.
힘의 출렁임에 타이탄 전투가 멈추며 모두가 도현이 있는 곳을 쳐다봤지만, 도현은 셋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정도면 아흐라나도 파업하지 않겠지……?
“뭐… 강한이 있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말발로 이길 수 없다는 에놀드도 있고, 단순하지만 팩트 폭력이 특기인 민혁도 나름 도움이 될 거다. 신이란 놈들은 죄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