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 신 (2)
치에샤의 몸이 총알보다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콰드득!
지면을 박찼던 다리가 불에 지진 듯 화끈거리더니 감각이 사라졌다. 분명 옆에 있던 인간이 잡았겠지. 하지만 마나석으로 증폭된 힘에 다리를 잃었어도 몸은 제대로 열린 유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크으읍!’
한참이나 늦게 몰려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와이어트 콜튼을 넘어 유리를 닫을 초록 버튼을 향해 주변의 마나를 모아 날렸다.
파아앙!
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와이어트 콜튼의 손이 시야를 덮었다. 치에샤는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웃었다. 그러면서 오른팔 전체에 마나를 끌어모아 터트렸다.
경악한 와이어트 콜튼의 얼굴 위로 자신의 팔이었던 살덩이들이 핏물과 함께 폭사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저 시야를 방해하는 잔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붉은 마나가 넘쳐 나는 곳에서는 그 어떤 폭발물보다 무서운 게 인간의 몸이다.
퍼버버버벅!
고깃덩이가 두 인간의 피부를 뚫고 박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움직일 수 없었던 둘은 그렇게 치에샤를 놓쳤다.
‘들어간다!’
그녀의 몸이 미끄러지며 유리 벽을 넘어 그 공간에 들어갔다.
“제브라드으-!”
악의에 찬 휴레가크의 외침이 들렸다. 아직 한 뼘이나 남은 유리 틈 사이로 신력이 짓쳐 들어왔지만, 붉은 마나로 가득 찬 공간은 그 힘을 흩어 버렸다.
당황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휴레가크가 이도 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본 치에샤는 푸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유리 벽은 굳게 닫혀 버렸다.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만신창이가 된 두 인간이 치에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웃음이 떠나가지 않은 치에샤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피를 너무 쏟은 탓이긴 했지만,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은 타격도 컸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복구하면 된다. 이 붉은 마나라면 가능하니까. 그래서 목숨을 건 도박을 했고 성공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이다. 붉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건 치에샤 자신뿐만이 아니니까.
“하아, 그래… 껍데기는 인간이라도 신은 신이었단 말이지…….”
휴레가크는 잔뜩 굳은 얼굴과 달리 찢어 죽일 듯 치에샤를 노려봤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레드 코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녀가 사용할 줄 알았다면 마나석을 이용해 벌써 상처를 지혈했을 거다. 남은 팔다리야 마나 제어장치 때문에 더는 모으지 못하겠지.
남은 건 유리를 부수고 저년의 정신을 지배하면 된다.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방어가 새겨진 마나석으로 가공 처리한 유리 벽이다. 마나로 대응하면 더 강한 반발력을 보이기 때문에 오로지 순수한 힘으로 부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와이어트 콜튼과 리암 루카스를 불렀다.
휴레가크는 리암 루카스에게 명령했다.
“시작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암 루카스의 주먹이 유리를 때렸다.
꽈과광!
바로 무너져 내릴 줄 알았던 유리는 움푹 꺼지며 공격을 받아 냈다. 한 번 버텨 낸 것만으로도 놀랍지만, 벽은 곧 깨질 거다.
초조해해야 할 치에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마 넌 모를 거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신격을 모두 포기하고 인간이 됐는지.
어째서 인간의 몸으로 농장이란 차원에서 지구로, 지구의 미국으로 왔는지.
치에샤는 남은 왼손을 뻗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붉은 마나석이 손에 잡혔다.
그것을 가볍게 든 그녀는 휴레가크를 향해 가르치듯 질문을 던졌다.
“넌 이 붉은 마나석에 대해 얼마나 알지?”
“……?”
“혹시 ‘최상급 신이 나만큼 알겠어?’라고 생각하고 있나?”
“또 무슨 수작이지?”
“내가 용병질만 1만 년이야. 자그마치 1만 년.”
휴레가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신에게 있어 용병질이라는 건 치부라고 여길 만큼 하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내가 만든 거야.”
“……!”
죽어야 하는 신을 위해, 그 차원의 생명체를 이용했던 기억이 떠오른 치에샤의 얼굴은 조금 씁쓸해졌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가 직접 알려 줄게.”
치에샤는 손에 든 붉은 마나석을 망설임 없이 삼켰다. 단단한 돌멩이 같던 붉은 마나석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하얗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마나석을 집어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피를 흘리던 오른쪽 어깨 아래로 팔이 생겨났다.
놀란 휴레가크가 두 인간을 재촉했다.
“빨리! 빨리 부수란 말이다!”
저 안에 가득 찬 붉은 마나석을 다 먹어 치운다면 그때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다급한 휴레가크와 달리 치에샤는 되찾은 팔다리를 확인하고는 손을 움직여 몸을 옥죄는 마나 제어장치를 풀고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줘. 여자는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
치에샤가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툭 건들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유리 위로 붉은 마나가 덮어졌다. 곧이어 리암 루카스의 주먹이 유리를 쳤지만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깨지지도 않았다.
참지 못한 휴레가크가 나섰다.
“비켜라! 내가 직접 한다!”
그 앞에 고급스러운 지팡이가 나타났다. 손잡이에 달린 옅은 녹색의 둥근 보석을 잡고 거칠게 뽑아내자 꼬챙이만큼 얇은 검이 드러났다.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휴레가크가 유리를 향해 그어 내렸다. 깔끔한 동작과 함께 거대한 신의 힘이 유리를 때렸지만, 어째서인지 깨질 듯 말 듯 한 유리는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꿈쩍하지 않았다.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금이 간 유리 너머로 치에샤의 모습이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환한 빛을 뿜어내는 작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공간을 빼곡히 채운 붉은 마나석 때문에 그 힘은 갇혀 있었지만, 저게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신의 힘을 가두는 봉인 구슬.
즉, 자신이 유리를 향해 내려쳤던 신의 힘이 유리를 부수기 전에 저 구슬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 제브라드으-!”
휴레가크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치에샤는 그런 휴레가크를 무시하고 손에 든 구슬을 쓰러진 마데아크의 배 위에 올렸다. 낮게 웅웅거리던 구슬은 점점 커지더니 마데아크를 삼키고 작아져 그녀의 손에 얌전히 앉았다.
치에샤는 붉게 변한 눈을 접으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제 시작이야.”
질겁한 휴레가크가 상황도 잊고 몸을 뒤로 뺐다.
‘저, 저건 괴물이야!’
왜 우도현이 그런 메시지를 남겼는지 이해가 갔다. 사라진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움직인 자신이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제일 조심해야 했던 건 우도현이 아니라, 신 제브라드였던 저 여자 인간이었다!
‘피, 피해야 한다!’
“마, 막… 아니, 저 여자를 감시해라! 저기서 나오지 못하게 해!”
제물을 두고 도망가려던 휴레가크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고 멈췄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모자이크처럼 깨진 유리 너머 환한 빛을 내는 봉인 구슬을 든 치에샤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알아차렸다.
“붉은 마나석이…….”
그녀가 흘린 피가 흥건한 바닥. 그건 더 이상 피가 아니었다. 의지를 가진 듯 넘실대는 피가 닥치는 대로 붉은 마나석을 먹어 치웠다. 동시에 그 힘이 치에샤의 발을 타고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은빛의 단발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순하고 연약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에 미친 마녀가 존재했다. 그녀는 손에 들린 구슬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그녀의 눈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 차원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는지. 전부 자신의 실수라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책임감을 가지는 신은 없었다.
신들에게 있어서 차원은 존재의 의미라고 하지만, 실상은 액세서리쯤 될까. 많으면 좋고,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버린다.
그러한 신들의 삶 중에서 그녀는 이상한 신이었다. 강했기에 앞에서 말하지는 못했지만, 뒤에서는 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서 더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면서 신이란 것에 염증을 느끼기도 했다. 왜 이렇게 주변은 적밖에 없는지.
‘내가 처음부터 일군 게 아니기 때문이겠지.’
신 ‘제브라드’라는 이름은 대물림이다. 이런 대물림의 장점은 힘들게 살아남으며 격을 쌓아 갈 필요가 없다. 유지만 하며 유희를 즐기다 다시 넘기면 되니까.
신들 사이에서도 대우를 받는다. 그만큼 오랫동안 교류해 왔던 신들의 관계가 이어지겠지만, 이번 일을 시작하며 다 끊어 냈다. 술친구 한 놈만 남겨 두고.
‘그놈은 잘 지내려나.’
대를 이어 온 인연인 그놈은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친절했다. 아니, 너무 관심이 많았다. 다시 시작된 용병 생활에서 적당한 차원을 물색했고, 그놈을 추천해 보내 버렸다.
누군가 들었다면 경악할 일이지만, 꽤 큰 공적을 인정받았던 때이니까.
그때 받았던 것 중에 지금 도현이 성장시킨 농장도 있었다.
어쨌든 장점이 이 정도라면 단점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남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일어난 일을 들 수 있었다.
두 차원의 소멸.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보니까.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인간으로서 살다가 그렇게 눈감고 싶었다.
아무리 자신이 실수했다고 해도 이렇게 고생하게 만든 제멋대로인 우도현을 보고 화가 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도현을 신으로 만들어 고생을 시키려고 했는데.
‘천성인가…….’
배운 게 신질이고, 살아온 세월 동안 한 것도 신질이다.
그래, 신입보다 경력이 낫겠지.
그녀는 피식 웃고는 자신을 두렵게 쳐다보는 휴레가크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삼켰다.
***
부유 섬에서 곧장 사가와 휘가 있는 키리카 서식지에 착지한 도현은 아흐라나를 땅에 내려놓으면서 둘을 봤다.
“사가, 휘…….”
뭔가 묘한 분위기. 마치 불장난하다가 걸린 모습 같다고 할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도현은 아흐라나를 다시 짊어지고 말했다.
“나중에 부를게 하던 거 마저 해.”
“뭐, 뭐, 뭘 말이냐?”
“어… 어!”
괜히 화를 내는 사가와 달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휘가 헤프게 웃으며 대답하자 사가의 분노의 불똥이 휘에게 튀었다.
“이놈이! 뭐가 ‘어!’냐! ‘어!’야?”
목을 잡고 탈탈 털 기세인 사가를 보고 픽 웃은 도현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사가가 그런 도현을 붙잡았다.
“어딜 가, 이놈아! 농장이 이상하게 변하지 않았느냐! 말이라도 해 줘야지!”
사가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새파랗게 푸른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은 평소와 같았지만, 그 하늘 너머 검게 물든 우주는 빽빽하게 들어찬 별들로 가득했다.
마치 낮과 밤의 하늘이 공존하는 듯한 모습.
모두가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웬만한 힘을 가진 이들은 두 겹으로 보이는 하늘이 이상할 만했다.
도현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탄성을 냈다.
“아, 저거? 내가 농장 관리자가 돼서 그래.”
“관… 리자? 니가? 본래 주인 아니었나?”
휘가 관리자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묻자,
“말장난 같긴 한데, 갖고만 있는다고 주인인 건 아니더라고. 인정받았다고 해야 하나?”
도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사가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고, 휘는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랐다.
“인정? 인정이라고 했나?”
“왜?”
도현과 사가의 시선이 휘에게 몰렸다. 그러든 말든 휘가 정말 즐겁게 웃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지구 니 줄게. 좀 가져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