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 신 (1)
치에샤는 거리를 두고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지적인 외모. 기품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 찡그린 치에샤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못했다.
저자가 바로 모든 일의 원흉, 휴레가크였으니까.
치에샤가 말했다.
“날 왜 데려왔지?”
나른한 웃음을 걸친 휴레가크가 진한 녹색의 눈을 휘었다.
“그냥 그 유명하신 신 제브라드가 누군지 보고 싶었거든.”
“그 난동을 피우면서? 차라리 대놓고 말하지 그래? 파산한 신의 말로를 보고 싶었다고.”
“이런,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저 호기심이야.”
“한 번만 더 호기심이 생겼다가는 미국을 날려 버리셨겠어?”
그만큼 휴레가크가 벌인 일은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통령의 죽음과 난데없는 우도현의 출현, 그리고 목숨을 희생한 영웅인 아바가 떡하니 살아 있다는 것도. 협회의 사이커 맥켈 아가스의 죽음까지.
난입한 FBI가 대통령 살해죄로 우도현을 짚은 것도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우도현이 남기고 사라진 말 때문에 미국은 온갖 추측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꼬일 대로 꼬인 치에샤의 도발에도 휴레가크는 느긋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말 안 듣는 머리를 없애는 데 이 정도의 퍼포먼스는 있어야지. 그리고 실제로 타격 입은 건 없어. 오히려 이득이라면 이득이지.”
그건 그랬다. 모두 몰살당할 거라 예측했던 것과 달리, 도현은 누구도 죽이지 않고 갔으니까. 의외라면 FBI에게 달아 둔 카메라에 그런 메시지까지 남겼을 줄은 몰랐다고 할까.
휴레가크가 치에샤에게 물었다.
“왜 넌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무엇을?”
“왜 신을 포기하면서까지 한낱 인간에게 집착하느냐는 거다. 그리고 이 지구라는 행성을 살리려는 것도 말이야.”
치에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무척 놀란 상태였다.
설마 그 부분까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알고 있는 듯 휴레가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덧붙였다.
“다시 신이 될 생각은 없나?”
“……!”
이번만큼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치에샤는 크게 뜬 눈으로 휴레가크를 봤다. 어디까지 거짓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만큼은 알 것 같았다.
저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던 치에샤는 허탈하게 웃었다.
“너 우도현이 정말 두려운 거구나?”
“부정하지는 않겠어.”
“도대체 왜?”
“그놈한테 당한 신이 넷이야.”
휴레가크가 몸을 사리는 결정적 이유였다.
정확히 둘은 소멸했고, 남은 둘은 분명 아직 존재는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우도현이 무슨 수를 쓴 거겠지.
휴레가크는 불안하고 혼란했다. 뭔가 일은 일어나는데 전혀 없다고 할 정도로 예측을 할 수 없다.
자신이 여태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있던가?
오히려 모든 걸 뒤에서 주무르고 휘두르는 게 자신이다.
그런데 우도현은 힘으로 가장 강한 중국의 리갈루스를 없앴고, 지구의 선택을 받은 도깨비 신 휘와 몬스터의 대모라는 린 아니사를 숨겼다.
여기까지만 생각했을 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놈이 과연 인간일까? 혹시 신의 대리자는 아닐까?’
휴레가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우도현이라는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 골고타를 없앴던 그날부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휴레가크의 몸에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때였을 거다. 겪은 적 없던 일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이지만 분명 어딘가 존재했던 과거.
자신이 지구를 지배하고 모든 헌터들을 발아래 꿇리는 자신의 이상향으로 흐른 과거 말이다.
하지만 늘 끝은 한국이었다. 그 나라만 남았을 때 갑자기 나타난 우도현이 판을 뒤엎으며 자신을 궁지에 내몰았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같았다. 지구를 지배해 격을 높이려 했던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지구의 격과 힘을 폭발시켜 절정에 이르렀을 때 통째로 삼키는 것.
과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몇백 번이고 반복했던 그 과정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휴레가크는 그 기억에서 우도현의 행적을 좇았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얻은 실마리는 제브라드라는 차원이었고, 그곳은 최상급 신 제브라드가 통치하는 세계였다.
그는 한참 동안 희열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결국 같은 길을 걸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의 우도현은 지워진 과거의 우도현과 너무나도 달랐다.
‘결단이 필요하다.’
이전과는 다른 행동이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속여야 했다.
그리고 우도현이라는 놈을 제대로 밟고 이 지구를 파괴하는 게 아닌, 자신의 발아래 둬야 했다. 그렇게 격을 더 높여 상급 신에 올라야 했다.
‘왕. 왕이 되어야 한다!’
신들의 왕. 신을 거느리며 모든 차원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왕.
그것이 휴레가크의 목표였으니까.
첫 시작은 일본의 훼르타였다.
인간으로 치면 채 10살도 안 된 아이의 신이지만 그 격은 자신보다 높았다.
아직 지구에 풀리지 않은 붉은 마나석. 그걸 이용해 리갈루스를 구슬렸고, 중국에서 시작한 그 길이 북한을 넘어 한국 정부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도현이 리갈루스의 꼬리를 따라 중국으로 넘어간 거다!
그사이 휴레가크는 일본의 훼르타를 온전히 삼키기 위한 계획을 짰다.
훼르타가 아끼는 인간을 이용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훼르타를 쉽게 삼킨 휴레가크의 격은 바람에 흔들리는 불안한 촛불에서 모닥불 정도로 커졌다.
‘이제 해볼 만하겠군!’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블랙홀 랜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차원이 나타난 것이다.
다른 차원……?
그것도 우도현의 부모라는 인간의 것.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상 이상의 힘을 보였던 우도현의 뒷배가 신이라니!
휴레가크는 엄청난 충격에 이대로 지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아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방법이 있을 거다, 방법이!
그리고 휴레가크는 그 방법을 찾았다.
그는 치에샤를 향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벽이라 생각했던 휴레가크 뒤쪽, 숨겨진 비밀 공간이 드러나자 치에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에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법한 50대 즈음의 뚱뚱한 아저씨.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7번째 신, 마데아크였다.
두꺼운 유리 벽 넘어 쓰러진 마데아크는 악몽을 꾸는지 계속 인상을 찌푸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럴 만한 게, 그 공간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붉은 마나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것부터 3, 4살짜리 아이 크기만 한 것까지.
신이라면 저 붉은 마나석을 모를 리 없다.
특히 온갖 차원에서 용병을 뛰었던 그녀는 저 어마어마한 양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단번에 파악했다.
헌터로 친다면 최소 1급, 거기에 신의 대리자로 격을 쌓기 시작한 이들까지. 못해도 지구 절반에 해당하는 행성 하나를 쓸어야 겨우 모을 양이었다.
치에샤는 경멸을 담아 휴레가크를 노려봤다.
“정말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지? 차라리 지구를 포기해!”
“쉽게 포기할 수 없지. 그보단 저놈을 잡았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
누구도 잡지 못한 마데아크를 잡은 그의 능력은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한 것 맞다.
리갈루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데아크는 신 중에서도 꽤 격이 높았으니까.
그 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다면 이득이다. 그것도 몇 배나.
마데아크의 행적은 여타 신들과 좀 달랐는데, 제일 큰 차이점은 지배하는 차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차원을 떠돌며 경쟁이 붙은 차원에 가담해 즐길 만큼 즐기고 포기하는 게 그의 별난 행적이었다.
그래서 신들 사이에 불리는 별명은 황금 고블린.
자신을 대신해 창과 방패가 되어 줄 차원이 없는 신을 조롱하는 별명이었다.
마데아크 자신도 그걸 알기에 이 차원, 저 차원을 옮겨 다니며 경쟁에 참여했다. 그러면 한시적이지만 신들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경쟁 상대가 된 신들만 신경 쓰면 된다. 그조차 싫었던 마데아크는 일부러 격이 낮은 신들의 경쟁만 찾아다녔다.
자신이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보일지 몰라도 격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으니까. 즉, 제일 안전한 장소란 말이다.
그런 마데아크가 지구에서 벌어진 신들의 경쟁에 참여한 건 처음으로 행성에 욕심이 생겨서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리갈루스 때문에 몸을 사렸고, 운이 좋게도 리갈루스가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나서려던 걸 휴레가크가 뒤를 쳤다.
그때 당황하던 마데아크의 모습을 회상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휴레가크는 벌레 보듯 하는 치에샤에게 말했다.
“네가 가져.”
순간 상황도 잊고 치에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갈등하는 자신을 향해 욕했다. 아직도 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저 붉은 마나석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려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궁지에 몰린 쥐처럼 보는 놈을 앞에 두고서.
치에샤는 코웃음 치며 휴레가크를 조롱했다.
“뒷말은 왜 삼키지? 내가 저놈의 격과 힘을 갖게 되면 바로 날 칠 생각이 아닌가?”
“내가?”
“당연하지. 내 기억이, 내 경험이 필요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휴레가크는 놀랍다는 듯 손뼉을 쳤다.
“역시 만만치 않아. 하지만.”
그가 싱긋 웃었다. 분명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눈은 뱀처럼 교활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지.”
짝!
휴레가크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현재 미국 사이커 협회의 협회장인 와이어트 콜튼과 헌터 1급인 포스 원으로 불리는 리암 루카스였다.
휴레가크가 자신을 상대할 줄 알았던 치에샤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해 그를 쳐다봤다.
방심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던 계획은 실패다.
‘이럴 때 그놈이라도 있었으면…….’
우도현의 친우라는 송강한. 머리 회전이 빠르고 눈치도 좋은 놈.
괜히 납치됐을 때 기회라 여겨 순순히 따른 걸 후회했다.
그사이 휴레가크 옆에 선 두 사람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섰다.
한때는 신이었다는 조언을 받았는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는 치에샤를 앞에 두고도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정말 최악의 방법이지만, 그것밖에 없다.
이대로 저놈의 손에 놀아날 순 없으니까.
치에샤는 양손을 펴 보이며 항복했다.
“하… 네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 인간들 좀 물려.”
“의외로 포기가 빠른데?”
휴레가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눈은 치에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모든 걸 포기한 듯 그녀는 계속 연기했다.
“마지막이라면 최소한 내가 움직이는 게 낫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사양이야.”
“흠, 그래도 자존심이 있다는 건가? 뭐, 좋아.”
작게 손뼉 치자 두 사람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섰다.
휴레가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앉았던 의자가 사라지고 뒤쪽 두꺼운 유리로 막힌 공간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 앞에 서지.”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듯 우아하게 손짓하는 그의 모습에 치에샤는 이를 살짝 물며 걸어갔다.
멀리서 봤을 때도 두껍다 싶었던 유리. 일반적인 유리가 아닌, 마나가 흘러나오지 않게 가공한 유리였다.
10평 남짓한 공간이 비좁을 정도로 빽빽한 붉은 마나석. 신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래 봤자 너무 보잘것없는 힘이다. 이렇게 모을 수가 없으니까.
반대로 인간에게는 더없는 마나 증폭제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휴레가크가 두 사람에 지시했다.
“마나 제어장치.”
그녀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목에 고리 형태의 마나 제어장치가 걸렸다.
작동을 확인하자 와이어트 콜튼이 유리 옆으로 다가가 붉은 버튼을 눌렀다.
쿠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30센티미터의 유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풍겨 오는 붉은 마나석의 기운이 자욱한 안개처럼 바닥에 깔렸다.
휴레가크는 이미 허공에 떠 방어막을 두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가 가슴께까지 올라갔을 때, 치에샤는 바닥에 깔린 붉은 안개 형태의 마나를 발 크기만큼만 모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