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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의 자취방-184화 (183/200)

# 184

184. 시험 (3)

백지장 같은 하늘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먹물을 뿌린 듯 깜깜한 바탕에 수많은 별들이 총총 떠올랐다.

지구에서도 흔히 봤던 우주이지만, 별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마나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함께 보고 있던 아흐라나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아니… 저 많은 차원이 어떻게 여길……?”

“저게 전부 차원이라고……?”

“예… 차원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보이는군요…….”

아흐라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 힘들어 눈을 비비며 확인했다.

“이렇게 볼 수 없다고?”

“차원은 신에 있어서 강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찾지 못하도록 숨겨 두지요.”

“숨긴다고 숨겨져?”

“바닷속에서 새끼손톱만 한 진주를 찾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적절한 비유에 도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들통났으니… 이거 완전 치킨 게임이겠는데?”

강 건너 불구경이 재밌을 것 같긴 했지만, 휘말리기 딱 좋고 시끄러울 것 같은 게 흠이라면 흠일까.

“뭐, 시비 걸고 짜증 나게 하면 다 엎어 버리면…….”

그러면 되지, 라고 말하려던 도현은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세상이 핑 돌자 당황했다.

“지배자님?”

사아아아-!

놀란 아흐라나의 목소리가 귀를 채우는 다른 소리에 묻혔다. 수억 개의 이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같다가도 저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멎었을 때는 시야가 점점 높아지며 넓어졌다.

발아래 손바닥 크기로 보이는 농장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바다가 보이고, 다시 반대로 돌리면 깊은 숲속에 사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주시하니 저 북쪽 끝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묻힌 산도 보였다.

허리를 편다는 생각으로 상체를 들어 올리니 농장 주위에 떠도는 행성 3개가 눈에 들어왔다.

블랙홀 랜드와 마계, 그리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천계도 전부 ‘보였다’.

‘아… 이거……?’

깨달음과 동시에 시스템 알림이 메시지 창으로 얼굴 앞에 떴다.

[농장(임시) 차원이 성장했습니다! 농장(임시)계로 이름이 변경됩니다.]

[농장(임시)계는 어떤 차원에서도 오갈 수 있는 차원 정거장이 됩니다!]

[농장(임시)계에서는 침략이나 전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이게 뭡니까?”

무척 놀란 아흐라나가 뒷걸음질 치다 벌러덩 넘어졌다.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짓이 허당이다.

“여, 여태 이런 일은… 아니, 농장이… 그러니까…….”

끊긴 말을 계속 혼자 중얼대던 아흐라나는 결국 설명을 바라듯 도현을 바라봤다.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됐네.”

“잘됐다니요! 다른 차원들의 신들이 구경만 하겠습니까? 잘못하면 농장이 정보 싸움터가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거기서 끝나겠습니까? 문제가 터지면 농장까지 엮이게 된다고요! 매일 끊이지 않고 뒤치다꺼리로 차원 전체가 시끄러울 겁니다!”

“잘 아네?”

“…잘 아네? 잘 아네, 라고요? 그렇게 끝날 말입니까?”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화를 내는 모습에 도현은 웃음이 터졌다.

“잘 아니까, 네가 맡아서 처리해 줘.”

“…예? 예? 예에에에?”

아흐라나는 당황하거나 놀라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에러 난 컴퓨터 같다.’

도현은 너무 웃겨서 화난 모습으로 뭐라뭐라 떠드는 아흐라나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겨우 웃음을 참고 귀를 여니,

“아니! 제가! 제가! 격이 있습니까? 예? 힘이 있냐고요? 예? 저기 저렇게 박힌 차원만! 일어어억 개가 넘어가는데? 고작 눈곱만 한 이 힘 가지고! 저! 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예? 신도 아니고! 고작 몬스터! 인 저보고요오오오?”

발을 동동 굴리며 제 가슴을 치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날까. 뭐, 어떻든 옆에 두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럼 힘이 있으면 되겠네.”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게 말처럼……! 어어어?”

아흐라나의 청록색의 머리카락이 단숨에 어깨까지 길어졌다.

도현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격도 필요하다고 했나?”

딱!

정수리 위로 돋은 한 쌍의 뿔이 백색으로 반짝였다.

“아, 아니, 지배자님?”

도현이 팔짱을 끼고 아흐라나를 빤히 보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신에게 꿀리면 안 되지.”

딱!

청록색의 머리카락에 금가루가 섞인 듯 반짝였다. 백색의 뿔은 실처럼 가늘어져 무수한 가지를 뽑아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신부의 면사포 같았지만, 여성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중성적인 느낌. 오히려 은은한 색이 후광으로, 신으로 보이기 딱 좋은 마스크랄까.

도현은 만족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게 생각대로 바로 될 줄은 몰랐는데?”

아흐라나는 순식간에 몰려오는 힘이란 격류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져 끊어지고 무뎌진 몸이 넘쳐 나는 힘을 게걸스럽게 처먹는다. 화끈거리는 통증은 짜르르, 쾌락처럼 몸을 훑으며 환희에 차올랐다.

기억 속에 남은 신이었을 때의 자신이라 해도 이만한 힘을 한 번에 받아들인다는 건 죽을지도 모를 일이건만, 오히려 힘이 자신을 격려하며 다치지 않게 다듬어 주었다.

‘아… 이게…….’

창조물이 신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런 걸까.

정말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 충만한 느낌.

‘……!’

하지만 그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째로 밀려온 격에 세상이 빙빙 돌았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경악스러운 상황에 뭐라 말이라도 해야 했다.

“지… 지배자님…….”

감기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도현을 불렀다. 미소가 그려진 입이 사악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너무나 포근한 나머지 뒷말을 듣지 못한 채 아흐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 버렸다.

도현은 기절한 아흐라나를 향해 혼자 중얼거렸다.

“푹 자고 일어나면 잘 부탁한다.”

***

휘는 사가와 함께 숲속의 큰 강 둔치에 앉아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키카인가, 키리카인가 하는 물고기가 여기 있다고 린이 좋아한댔는데.’

도현한테 사가가 좋아할 만한 정보를 얻고 신이 나 싱글벙글했던 그때와 달리 심드렁하다 못해 턱을 괸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가끔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미는 상어만 한 물고기의 소음을 제외하고는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에 휘의 한숨만 늘어 갔다.

괜히 심술이 난 휘가 다시 수면 위로 머리를 들이민 키리카를 향해 돌을 던졌다.

키키키리릭!

돌에 맞은 키리카가 휘를 향해 아가미를 세워 파르르 떨며 원반 같은 비늘을 날렸지만 닿기도 전에 물속에 빠져 버렸다.

“지도 몬스터라고.”

휘는 콧방귀를 팽, 뀌며 다시 돌을 던졌다. 눈과 눈 사이에 맞은 키리카가 잠시 가라앉더니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가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뿐히 다시 자리에 앉은 사가의 옆에는 반쯤 건져 올린 키리카가 놓여 있었다.

휘가 황당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가가 말을 툭 던졌다.

“잘 잡네.”

“어?”

“잘 잡는다고.”

“어허허허……. 더 잡아 줄까?”

입이 찢어져 벌떡 일어난 휘는 당장에라도 강 속 몬스터들을 다 잡아 올릴 기세였다.

“아니.”

어깨가 축 늘어진 휘가 다시 엉덩이를 깔고 앉자, 사가는 강에 시선을 둔 채 그에게 물었다.

“그놈이 지구의 신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게냐?”

“좋지, 뭐. 나도 편하고.”

“…편하다고?”

강에 오고서 처음으로 휘를 돌아본 사가는 화를 내고 있었다.

“넌 죽게 생겼는데 편하단 말이 나오는 게냐?”

일곱의 신이 지구를 먹기 위해 시작된 대격변. 하지만 실제로는 여섯 신들과 그 신들을 감시하고 지구를 보호하는 하나의 신이란 형태였다.

물론 지구를 보호할 신은 자의라기보단 지구가 직접 선택한다. 그렇기에 휘는 자신을 진정한 신이 아닌 ‘임시 신’이라 칭했고, 여섯 신들은 한시적이지만 지구의 모든 힘을 쓸 수 있는 휘를 ‘신’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문제는 침략지가 된 지구의 신은 무조건 죽는다. 반대로 침략자인 여섯 신은 언제든 중도 포기가 가능했다.

그렇기에 사가는 도현에게 다른 신들보다, 미국의 휴레가크를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신 제브라드에게 들었던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휴레가크였으니까.

신이 아닌 도현이 휴레가크를 없애 버리면 남은 신들은 자격을 포기하고, 휘는 도현에게 신의 자리를 양도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간들이 목숨을 잃겠지만, 지구가 파괴되어 모두 사라지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하지만 그 선택지도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도현이 제브라드 차원의 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사가는 울분에 차 낮게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을 게야. 어떻게든… 안 되면 도현이 그놈을 다른 차원에 보내 격을 더 올려 지구를 맡…….”

휘가 웃음으로 사가의 말을 잘랐다.

“그 전에 지구는 끝장난다.”

“…….”

사가도 안다. 다만, 휘가 안타까웠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도깨비이자 영물. 식도락을 좋아하고 발 닿는 곳 어디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허허로운 자.

얽매인다거나 책임을 진다는 것에 학을 떼는 자가 제브라드의 끈질긴 설득에 신을 맡았다.

그 전까지는 그저 지구의 생명들이 안타까워 도와주는 선에서 끝냈던 휘가 나선 거다.

그 덕에 사가가 짰던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도현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었는데.

모든 게 도현이 돌아오고서 엉켜 버렸다.

‘그놈이 나서서 복잡하게 만들 줄이야.’

울화가 치밀어 한숨을 내뱉고 보니 휘가 심각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속도 없는 도깨비 같으니라고!’

다시 울컥 솟는 화에 고개를 팩 돌려 버리니 휘가 딱딱하게 굳어 말했다.

“서… 설마 나 좋아하나?”

“헛소리.”

무슨 개소리야?

바로 쏘아주고 싶었지만, 곧 죽을 놈이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자신이 신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던 아들, 이오르와 가슴으로 품었던 도현을 위함이었다.

두 차원이 공멸하게 되는 상황보단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신 제브라드의 도움으로 과거의 지구로 온 사가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오기만 한 게 다른 신들에게는 먹이로 보였던 거다.

그걸 막아 준 게 휘였고, 오히려 보이지 않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신 제브라드에게 들었던 그의 성격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당황했던 게 한두 번인가.

지었던 신세가 얼마나 많은데, 시한부 인생이라니.

부글부글 끓는 가슴이 왜 이렇게 답답한지, 옆에서 태평하게 말해 대는 당사자까지 보고 있으려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 휘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뭐, 뭐냐?”

“린아…….”

‘이놈이 왜 이래?’

휘가 다른 마음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건 1년 전이었다. 그에게 받기만 했던 도움에 보답하고자 사가도 노력했기에 차라리 이쯤에서 거리를 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이 싸움의 결말이 어떻든 자신도 끝날 테니까.

그것이 과거로 돌아온 대가였다.

‘아… 같은 처지라 짜증이 났던 건가…….’

심각하게 생각에 빠진 사가는 큰 눈을 끔뻑이며 휘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첨에 봤을 때 그 새끼들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거 보고 뭐 이런 드센 가시나가 있나 싶었는데, 다치고 약한 사람들 챙기는 거 보고… 니힌테 뿅 갔다!”

용기 낸 고백이었다.

사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의미였지만 말이다.

‘동류…….’

참 싫은 말이지만 그래서 더 속이 끓었다. 괜한 죄책감에 뭐라 떠드는 휘의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얼굴을 마주 볼 자신도 없었다.

“짧은 여생이지만… 같이 지내는 건 어떻노……?”

사가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빚은 갚아야지. 어떻게든 이놈만큼은 살려야 한다.’

그 모습을 부끄러움으로 해석한 휘는 입가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정을 주체 못한 휘가 사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사가는 여태 생각에 빠져 듣지 못했던 휘의 마지막 말만큼은 들을 수 있었다.

“그래. 내도, 내도 린이 니가 너무 좋다!”

‘어……?’

무슨 상황……?

그제야 흘려들었던 휘의 말이 전부 머릿속에 떠올랐고, 사가의 벌게진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 이놈을 떼 내야…….’

더 오해하기 전에 거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덩치 큰 놈이 얼싸안고 있으니 사가는 꼼짝을 못했다.

오해가 깊어져 가는 가운데 조용하던 농장 세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꼬?”

둘은 벌떡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갑자기 열리듯 확장되더니 그 위로 수많은 별들이 떠다니는 우주가 나타났다.

그리고 도현이 둘 앞에 등장했다.

처음 보는 생명체를 어깨에 짊어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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