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 침투 (4)
모두 경악했다. 너무 놀라 숨넘어갈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경악한 건 치에샤였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은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우, 우도현, 어, 어떻게?”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기다려.”
도현은 치에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대꾸했다. 그리고 못 움직이는 각성자들을 풀어 주며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뇌당한 헌터들을 다시 세뇌시켜 국가의 개로 쓰겠다, 이건가? 왜? 이참에 독재 정치로 바꿔 보려고?”
“그, 그런 뜻이 아니오! 그놈만 없애면…….”
“화장실 갈 때 마음이 나올 때랑 같을 리 없지. 그런데,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알고 설쳐?”
“신… 당신이 베이징에서 없앤 그 몬스터와 같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도현이 피식 웃었다.
“모르네. 신이 어떤 놈인지 전혀 몰라. 모르니까 이 지경이 돼서야 허둥지둥 발악하는 거겠지만.”
가슴을 푹푹 찌르는 말에 대통령은 붉어진 얼굴을 푸들푸들 떨었다.
“우도현!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나라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라!”
뒤쪽 문이 벌컥 열리며 완전무장한 군인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군복 같았지만, 헌터 웨어 소재로 만든 특수 군복이었다. 그리고 손에 든 총에서 마나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같이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아바를 공격했다가 팔이 날아간 각성자처럼 레드 코어를 흡수한 이들이었다. 거기에 작정하고 온 것인지 그들 몸에는 최소 5개, 많게는 20개의 새끼손가락만 한 레드 코어가 군복 여기저기 숨겨져 있었다.
도현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 누가 나쁜 놈인지 알 수가 없네.”
미국을 점령하려는 외눈박이나, 지키겠다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네놈의 오만도 여기까지다!”
대통령이 발악처럼 외쳤다. 그게 신호가 되어 군인들의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쿠콰과과!
마나로 만들어진 총알이 네 사람을 감싼 보호막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튕겨 나간 마나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마나 총알이 일으킨 폭발에 휩쓸려 벽을 뚫고 밖으로 떨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사격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만!”
대통령의 목소리에 깔끔하게 공격을 멈춘 군인의 수는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멀쩡한 네 사람을 확인하자 그는 치솟는 분노에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 이……!”
도현이 쯧, 혀를 차며 대통령이 등진 벽을 바라봤다.
“멍청하기까지. 이렇게 요란하게 마나를 써 대면서 그놈이 모를 거라 생각해?”
대통령은 도현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에게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과 조용히 준비해 온 모든 계획을 통째 날려 버린 저 원흉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우도혀어어언!”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등 뒤, 벽을 넘어 무엇이 이곳에 들이닥치는지를.
우우웅!
어둡고 낮은 진동이 묵직하게 울렸다. 마치 기압 변화에 먹통이 된 고막이 울리는 것 같았다.
무형의 기운에 공기가 빠르게 팽창하며 모든 걸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을 때, 이미 벽은 사라진 뒤였다. 캔 따개로 뚜껑을 딴 듯 거칠게 잘린 벽의 단면은 누가 봐도 물 먹은 스펀지 같았다.
“뭐, 뭔……!”
놀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다시 밀려오는 공격에 대통령 옆을 지키던 각성자들이 그의 몸을 누르며 그 위로 자신들의 몸을 포갰다.
--------!
귀를 때리는 불쾌한 느낌이 가시자 방 안에 남은 건 도현과 아바, 송강한, 치에샤, 그리고.
“크으윽……!”
“허억… 허억…….”
각성자 다섯의 목숨으로도 막지 못해 등판이 날아간 대통령과 아바 옆발치에 쓰러져 꿈틀대는 안내자가 전부였다.
방금 새롭게 뚫린 입구로 강한 바람이 난장판이 된 실내를 거칠게 휩쓸고 빠져나갔다. 푸릇푸릇한 초원과 낮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이며 그 주변으론 온통 물이 가득한 정경이 자리했다.
탁, 타닥.
구둣발 소리가 엇박자로 울리며 세 사람이 날아 들어왔다. 양쪽에 선 둘은 실내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중앙에 선 사내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이는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은빛을 내며 반짝였다.
사내는 엎어진 채 부들부들 떨어 대는 대통령 앞에 섰다.
특이한 머리카락 색의 사내, 맥켈 아가스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바닥에서 꿈틀대는 대통령을 감정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가드들이 아깝군. 윌리엄 헨리.”
“맥켈… 아가스……. 이, 이……!”
척추뼈가 훤히 드러난 대통령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사내, 맥켈 아가스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벌레는 벌레답게 꿈틀거려야지.”
맥켈 아가스는 그 손을 무심하게 보며 구둣발로 지그시 밟아 비볐다.
뿌드득!
“크아아악! 맥… 켈-!”
대통령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고개를 든 맥켈 아가스는 도현을 가리고 선 아바와 송강한을 훑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데. 아바, 잘 지냈어?”
“인사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쌀쌀맞은 대답에 맥켈 아가스는 배를 잡고 웃었다.
“아아, 여전하구나. 나도 나름 강해졌다고 자부했는데, 역시 이래야 재밌지.”
“강해진 게 아니라 그 신이라는 놈에게 영혼을 판 거겠지.”
“하하, 종교를 가져 보기로 했지. 뭐든 강해지면 좋은 거 아닌가?”
“그래서 난 네놈이 싫어.”
아바는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맥켈 아가스는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널 내 마리오네트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는데 말이야. 아쉽지만, 강한 여자를 굴복시키는 것도 꽤 재밌지.”
송강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매를 버는구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바의 주먹이 맥켈 아가스의 얼굴 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공격일 텐데도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
화들짝 놀란 건 아바였다. 빠르게 몸을 빼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의 손은 인두기로 지진 듯 새빨갛게 녹아 있었다. 아바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었다. 엉망이 됐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매끈해졌다.
맥켈 아가스가 감탄하며 손뼉 쳤다.
“대단해. 바로 몸을 빼… 커헉!”
꽈아앙!
조롱하던 그의 몸이 옆으로 튕겨 나가며 벽에 처박혔다.
“진짜 시끄러워서 못 들어 주겠네. 사내새끼가 귀 따갑게 주절대기만 해?”
도현이 검지를 까딱였다.
벽에 박혔던 맥켈 아가스가 그대로 끌려 나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질문에 대답만 해. 왜 왔어?”
그는 입에 들어간 돌조각을 뱉었다. 소매로 입을 닦으며 순순히 말했다.
“쿨럭쿨럭, 인사 차 왔지.”
“할 말은?”
맥켈 아가스의 푸른 눈에 조소가 서리더니 녹색으로 빛났다. 순간 와이어트 콜튼의 손등에서 봤던 눈이 생각난 아바가 다시 나서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을 돌아보자 옆자리를 향해 턱짓했다.
“별일 없을 테니까 앉아.”
그리고 맥켈 아가스의 입이 열렸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 반갑네, 우도현. 난 휴레가크라 하네.」
“쫄아서 숨은 놈이 말은 잘하네.”
도현이 빈정대자 왼쪽에 앉은 송강한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의 힘을 저항한 맥켈 아가스의 몸이 바닥에 착지해 어깨를 으쓱였다.
「부정은 못하겠군.」
“그래서 용건은?”
「대체 자네의 목적이 뭔가? 딱히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겨우 집에 돌아와서 쉬려는데, 개새끼들이 판을 치고 있잖아. 한술 더 떠 개새끼들이 네 거니 내 거니 싸우기까지.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흐음, 주인이라……. 집을 비운 주인 잘못이 아닌가?」
“뭐, 내가 비우고 싶어서 비운 건 아니지만. 비운 동안 쌓인 먼지 청소는 해야겠지.”
맥켈 아가스의 몸이 늙은이처럼 클클 웃었다.
「후후, 그렇다고 이 행성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 텐데? 오히려-」
“거기까지. 뒷일은 신경 꺼. 넌 목이나 깨끗이 씻고 잘 숨어 있으면 돼. 면상 보는 날이 네 마지막 날일 테니까.”
「아아, 기대하지. 멍청한 리갈루스처럼 쉽진 않을 게야. 그때까지 ‘내 격’은 잘 보관하고 있게.」
도현이 코웃음 쳤다.
“이젠 개그도 하냐?”
「…대화는 이쯤 하지. 그럼 마지막으로 선물이네.」
녹색으로 빛나던 눈이 푸르게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맥켈 아가스가 키득 웃음을 터트렸을 때, 돌연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헉!”
심장을 움켜쥔 그는 새카만 피를 쏟아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윽!”
“어억!”
맥켈 아가스와 함께 왔던 두 사람마저 검은 피를 흘리더니 그대로 터져 버렸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 제일 가까이 있었던 대통령, 윌리엄 헨리였다.
“끄아아악!”
큰 상처를 입은 탓에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검은 피를 그대로 덮어썼다. 연이어,
“으아아-! 휴레가크으-! 죽……!”
벽을 뚫었던 그 능력이 폭발하듯 몸에서 뿜어졌다. 동시에 눈이 시릴 정도의 강한 빛이 함께 터졌다.
다행히 도현의 보호막에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투다다다다!
천장이 뻥 뚫린 하늘에는 헬기가 떴고,
“꼼짝 마라! FBI다!”
각성자로 이루어진 FBI가 대거 들이닥쳤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욕을 뱉었다.
실내 바닥에는 검게 물든 피가 흥건했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부릅뜬 눈과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거둔 대통령, 그리고 유망주 사이커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맥켈 아가스가 체내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뿜은 채 죽어 있었다.
그리고 아바 옆 바닥에는 왼팔이 잘려 신음하는 맷 딜런이 보였다.
영화였다면 정말 손뼉을 치며 감탄했을 전개이지만, 당한 입장에선 그저 헛웃음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보호막으로 딱히 피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강력한 힘이 터지고도 그저 천장만 날아가 버렸으니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 들이닥친 놈들 하나하나가 헌터캠 같은 카메라를 달고 있었고, 하늘에 뜬 헬기에선 카메라까지 짊어지고 모든 상황을 촬영하고 있었다.
“선물 한번 황당하네.”
한국 대통령 백치 사건에 이어 이젠 미국 대통령 살해라는 타이틀을 달아 주려는 노력인 걸까.
“대통령 살해죄, 당국 사이커 살해죄로 네놈들을 체포한다!”
“빨리 일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강제 집행하겠다!”
도현은 모기처럼 왱왱거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현아! 치에샤가……!”
“뭐?”
“네?”
송강한의 당황한 목소리에 치에샤가 있던 자리로 고개가 돌아갔다.
도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마지막에 맥켈 아가스의 퍼포먼스는 치에샤를 빼돌리기 위한 외눈박이의 페이크였다는 것을.
“하… 한 방 먹었네.”
허탈하게 웃는 도현을 향해 아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현 님, 어쩌죠?”
“뭘 어째.”
도현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위를 에워싼 FBI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그리고 하늘에 뜬 헬기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타다다…….
허공에서 멈춘 헬기가 뭔가에 잡힌 것처럼 그대로 초원에 옮겨졌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어? 촬영된 건?”
송강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놔둬. 아, 한마디 하는 걸 잊었네.”
도현은 기절한 FBI 한 명을 들어 헌터캠을 주시했다.
“외눈박이, 넌 걔 놓치지 말고 꼭 데리고 있길 바란다. 정말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거든. 얼빠질 네놈 면상을 실시간으로 못 본다는 게 좀 아쉽지만. 뭐, 그럼 다음에 보자고.”
“도현 님, 이놈은 어쩌죠?”
농장으로 넘어가려는데, 이번에는 아바가 바닥에 쓰러진 안내자를 콕 집었다.
“미국을 정리하려면 하나 있는 게 낫지 않나요?”
그냥 두라고 하려던 도현은 잠깐 고민했다.
“귀찮은데.”
“제가 할게요!”
아바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아까 빚도 있고, 힘도 써 보려고요.”
“아하. 뭐, 그렇다면.”
“감사해요.”
허락받은 아바는 신난 얼굴로 검지를 튕겼다. 핏방울 하나가 안내자, 맷 딜런의 왼쪽 어깨에 떨어지더니 그대로 흡수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팔을 들어 갖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러붙었다.
지켜보던 송강한이 감탄했다.
“아바 씨, 실력이 대단하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어서 가죠!”
그녀는 장을 본 봉투처럼 맷 딜런의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근데 어딜 간다는 겁니까?”
“가 보면 알아요!”
아리송한 대답에 송강한의 머리가 갸웃갸웃했다.
도현이 허공에 팔을 긋자 그 선을 따라 갈라지며 푸른 포탈이 생겨났다. 송강한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뭐야?”
도현은 멍청하게 서 있는 송강한의 팔을 잡고 포탈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아바가 들어가자 포탈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