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 침투 (3)
응접실에 들어온 사람은 좀 전에 도현과 아바를 데려다주었던 직원과 같은 정장 차림의 사내였다. 190센티미터의 키에 어두운 갈색의 투블럭 포마드, 옅은 연둣빛 눈동자가 차가우면서도 진중해 보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이동하시죠.”
도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송강한 옆에 섰다. 아바는 치에샤에게 한국어로 통역해 주며 함께 응접실 입구로 갔다.
안내자를 따라 이동한 곳은 복층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몸이 굳을 정도로 몸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아바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안내자에게 따졌다.
“이게 무슨 짓이죠?”
“조금만 참아 주시길.”
그녀가 대표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전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맞춰 주기 위해 인상을 찌푸리는 게 다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아래층과 달리 텅 빈 복층. 그 중앙에는 5미터 크기의 원 형태의 마법진 하나가 두껍게 그려져 있었다.
도현은 아바에게 생각을 전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야. 위장 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 짓이네.
-이거 말처럼 쉽게 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안내자만 봐도 눈치챘을 거 아냐?
-알죠. 예전에 미국에 오자마자 헌터 협회에 쳐들어갔던 그때의 저와 비슷하네요.
막 1급에 올랐던 때였으니, 안내자도 동급이란 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도현과 주고받는 생각에서는 조소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내자가 말했다.
“올라가십시오.”
“모든 건 가서 따지도록 하죠.”
세 사람은 조용히 올라갔지만 아바는 끝까지 한마디 했다. 이것도 연기. 그녀가 가진 힘과 권위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 끝냈다는 게 안내자에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엎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안내자는 아바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에 올랐다.
직원이 사용했던 텔레포트와 달리 마법진 자체가 푸르게 빛이 났다. 농장에서 텔레포트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아바도 특이한 광경에 눈을 깜빡였다. 그 궁금증을 도현이 풀어 줬다.
-마나석을 갈아서 그린 마법진이야. 일회성이지. 장점은 흔적이 안 남는 거고.
-와… 이거 정말 외눈박이가 있는 거 아녜요?
푸른빛이 환하게 터지고 사라졌을 때, 눈앞에 나타난 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40평 정도로 넓은 방. 회색의 벽과 바닥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웠다. 벽 어디에도 창문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삭막하기까지 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소파에 앉은 중년인이 무심한 얼굴로 네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꽝인데?
도현의 장난스러운 말에 아바는 우울해졌다. 동시에 헌터 2급의 각성자 5명이 둘러싼 소파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윌리엄 헨리 대통령님.”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다름 아닌 현재 미국 대통령이었다. 윌리엄 헨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네 사람을 바라봤다.
“우선 앉으시죠.”
네 사람 뒤쪽에 대기 중이던 각성자들이 머릿수에 맞춰 의자를 가져왔다. 아바, 도현, 송강한, 치에샤 순으로 조용히 앉자, 윌리엄 헨리는 무척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먼저 이렇게 모시게 되어 굉장히 미안합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바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대통령님?”
“아바 헌터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군요. 비록 그대가 스스로 워프 브레이크에 뛰어든 건 아니지만, 피해를 줄여 주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살아 계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바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입술을 씹었다. 쾌활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바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를 다시 겪은 일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구출된 뒤로도 그녀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각성했던 워프의 끔찍한 경험이 무한으로 반복됐고, 이제는 워프 브레이크의 기억까지 함께 겹쳐지며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터져 나왔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온 결계는 이 힘을 온전히 다루든, 자신이 죽든 두 경우가 아니면 나갈 수 없었으니까.
광폭한 힘을 홀로 버텨야 했다. 혼자라는 불안과 반복되는 그날의 기억으로 이성을 잃었고, 지쳐 쓰러질 때쯤 돌아온 정신으로 확인하는 건 엉망진창이 된 몸뚱이였다.
어떤 날은 결계 안을 다 채울 정도로 흥건한 피가 가득했고, 어떤 날은 팔다리가 사라진 채 몸뚱이만 남았던 날도 있었다.
기절해서야 겨우 눈을 붙이면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 끝에 공포로 물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진정되지 않는 거친 숨을 내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몸을 더듬는 게 다음 순서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과 자기혐오.
겨우 입에 댔던 물도 그렇게 쏟아 내며 아바는 말라 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던 결계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민혁이었다.
‘살아 줘서 고마워요.’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사람.
이성을 잃은 자신이 그에게 상처를 내도, 감당 못하는 힘에 맞서다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도, 겨우 이성이 돌아온 자신을 보며 만신창이가 된 채 환하게 웃던 김민혁.
그때부터 아바는 민혁을 위해 살기로 했다. 자신의 힘을 인정하고 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야만 그가 다치지 않으니까. 아프지 않으니까.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민혁을 위해 모두 이겨 냈다.
그렇게 그녀는 구원받았다.
‘그 고통도 모르면서… 인제 와서?’
아바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굳어졌다. 겨우 이성을 잡고서야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너무 늦었어요, 대통령님.”
아바는 안다. 이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은 지구의 미국이 아닌 농장이다.
대통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의 얼굴은 씁쓸했다.
“예, 늦었지요. 너무 늦었지요. 대통령으로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나라에 그런 기생충이 있다는 걸 의심했으면서도 늦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지요. 확신을 가졌을 때는 이미 뉴욕이 삼켜진 뒤였습니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치밀함. 어쩌다 잡은 꼬리는 함정이었다. 그것도 3급 이상의 헌터 300명. 주 정부에서 대거 투입한 군인 헌터들을 제외한 숫자였다.
그들은 한순간에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아니, 생생한 핏빛의 마나석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이 바로 아바가 타의로 막았던 워프 브레이크가 터졌던 그 시각이었다.
묻힌 사실은 아바 혼자 워프 브레이크를 막은 것이고, 거기에 희생되었다는 헌터 300명은 그곳을 덮쳤던 군인 헌터와 함께 붉은 마나석이 되었다. 손을 쓰기도 전에 붉은 마나석은 사라졌고, 그것은 기생충의 밑거름이 되었다.
아주 잠깐 도현과 송강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사라졌다.
윌리엄 헨리는 4명을 한 사람씩 천천히 훑고 말했다.
“대충 짐작은 하셨겠지만, 당신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나, 이 나라는 연방 국가이니까요.”
대통령이 막대한 권한을 가졌다고는 하나, 모든 권한을 가진 건 아니다.
법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각 지방 정부의 대소사에 중앙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
그 허점을 기생충이 파고들었다. 버젓이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었다.
아바는 기가 차서 하! 하고 웃었다.
“대통령님, 지금 그 말은 확실하지도 않은 그 확률을 위해 목숨을 걸라는 건가요? 내가 왜?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날 방치한 이 나라를 위해?”
“말이 심하십니다.”
네 사람 옆에 서 있던 안내자였다.
아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내자를 봤다. 폭풍이 몰아치는 서늘한 눈. 맷 딜런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듦과 동시에 마치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마력을 느꼈다.
‘이게 1급 헌터……?’
아니다. 이건 급수로 따질 수 없는 힘이다. 헌터 제로라 불리는 우도현만큼이나……!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아바 헌터, 미안합니다. 힘을 거두어 주십시오.”
윌리엄 헨리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허억!”
아바가 시선을 거두자 안내자, 맷 딜런은 여태 참아 온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으나 1급 헌터라는 정신력으로 겨우 버텼다.
경호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각성자들은 표정이나 행동에 변화가 없었다. 오직 자신에게만 향했다는 걸 깨닫자 더 소름 끼쳤다.
윌리엄 헨리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무리한 부탁이겠지요. 하지만 현재 이 나라의 3분의 2를 집어삼킨 기생충에 더는 점잔 떨고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목을 죄는 넥타이를 끌어내리며 그는 착잡하게 말을 이었다.
“신의 보호막이라는 투명한 막이 생겨나고 이상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시작은 마나 농도였지요.”
마나는 워프가 생겨나고 나타난 이물질이었다. 물 한 컵에 각설탕 하나를 섞은 느낌. 지금은 그 물 한 컵에 각설탕 1,000개 그 이상을 때려 부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일반인의 99퍼센트가 각성자가 됩니다. 그중에 30퍼센트만 살아남지요. 나머지는 갑작스러운 마나 농도에 백치가 되거나 터져 죽습니다.”
빗대자면 삼투압 현상과도 닮아 있었다.
“각성자였던 이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였습니다. 그만큼 마나에 익숙해, 받아들이는 데 심각한 고통이 동반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을 잘 넘긴 각성자들은 3단계나 뛰어넘게 되지요.”
이들을 ‘재각성자’라 불렀다.
“그리고 기생충은 이들을 빠르게 모았습니다.”
그 수가 3천만 명에 달했다.
넘어간 땅 크기에 반해 무척 적은 수처럼 보이지만,
“모두 헌터 2급 이상이면 어떻겠습니까?”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숨소리조차 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풋.”
웃음을 터트린 건 송강한이었다.
“진짜 개소리를 찰지게 지껄이네.”
발끈한 경호 각성자들이 압박하려는 걸 대통령이 막았다.
“가만히 있게!”
“각하!”
대통령 오른쪽에 선 사내가 분을 못 이겨 소리쳤지만 대통령은 확고했다.
긴 설명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쉰 윌리엄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리지. 하지만 그들이 세뇌당한 상태라면?”
그의 시선이 치에샤와 도현을 향했다.
그럼에도 송강한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고작 두 사람으로 3천만 명을 상대하라? 차라리 달걀로 바위를 깨트리는 게 더 현실성 있겠어.”
당연한 반응이었다. 테스트로 확정된 치에샤의 등급은 고작 3급. 하지만 그녀는 각성자가 아니다.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모아 마나 테스트를 넘겼고, 어떤 물건으로 특수 능력을 보였으니까.
‘바로 휴레가크의 면상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꼼수를 부리려다 핵폭탄을 맞게 생겼다.
윌리엄 헨리는 자신에게 소리쳤던 경호 각성자에게 말했다.
“그걸 가져오게.”
방을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그의 손에는 검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직사각형의 얕은 케이스. 뚜껑을 열자 손바닥만 한 붉은 수정 5개가 헛구역질이 날 만큼 불쾌한 마나를 뿜어 댔다.
아바는 저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적나라하게 풍겨 대는 죽음의 냄새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반대로 송강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쳤군.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말인가?”
아바가 한국어로 그에게 물었다.
“저게 뭐죠?”
“헌터 3급 이상에게서만 뽑아낼 수 있는 마나의 응집체.”
“네……? 그렇다는 말은…….”
“죽인 거지. 그것도 자신이 죽는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위험을 느끼면 건질 수 없으니까.”
아바가 경멸 가득한 눈으로 대통령을 쏘아봤다.
대통령 왼쪽의 경호 각성자가 대통령 귀에 작게 소곤거리다 떨어졌다.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통역한 것이다.
“잘 아는군. 레드 코어라고 하네.”
대통령의 말투가 바뀌었다.
송강한이 빈정댔다.
“그 재료가 1급 헌터라는 것도 알지.”
아바가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어! 이런 곳이 민주주의라고? 미친 개소리를 어디서 지껄여? 난 돌아가겠어! 트론!”
그녀의 위협적인 기세에 경호로 서 있던 각성자들이 힘을 끌어 올렸다. 윌리엄 헨리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거만하게 말했다.
“거부권은 없네. 우선 자네들을 복종시킬 생각이니까.”
“그래서 이들을 모았어?”
깨달음과 같은 아바의 탄성에 윌리엄 헨리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바. 그래서 자네도 헌터 협회가 아닌 공공기관에 모습을 드러냈지 않나?”
아바는 차갑게 조소했다.
“뭐, 좋아. 그런데 이 잔챙이들로 날 막는다고?”
“물론 제아무리 1급 헌터라 해도 지금의 자네에겐 상대도 안 되겠지. 하지만 레드 코어의 힘을 빌리면 못할 것도 없지.”
케이스를 쥐고 있던 각성자가 레드 코어 하나를 빼내 아바 옆의 안내자에게 던졌다.
“도망쳐!”
송강한이 소리치며 아바 앞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그의 팔을 잡은 사내가 전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 타이밍을 놓쳤다.
그사이 안내자, 맷 딜런이 레드 코어를 손에 쥐자마자 힘껏 쥐어 부쉈다. 붉은 기류가 그의 몸을 감싼다.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며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아바의 하얀 목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맷 딜런의 귀를 스쳤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바의 목이 아닌 팔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팔……?’
익숙한 손과 옷. 얼굴에 촤악, 뿌려지는 핏물에 정신을 차리자 왼팔을 헤집는 불타는 고통에 입이 쩍 벌어졌다.
“크아악!”
팔을 잃고 바닥에 꿈틀거리는 벌레를 제외하고, 방 안의 모든 각성자의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
도현은 이마를 짚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행동과 함께 금발이 검게 변했다. 숙인 상체를 세워 등받이에 기대자 검은 눈동자가 무심한 빛을 띠며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대통령을 응시했다.
도현은 오른쪽 다리를 들어 꼬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역시 안 하던 짓 하려니 못해 먹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