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 Re-Player (5)
도현과 아바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저지시티로 들어와 도현이 가는 대로 쫓아다니길 3시간. 편한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서일까, 아바가 갑자기 요동치는 배 속에 뭐라도 먹자고 도현을 꼬드긴 게 현재 상황이었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은 주근깨가 가득한 외국인으로 바뀌었다는 것과 도현은 금발에 푸른 눈으로 바뀐 것이다.
그저 인식하지 못하게만 하려 했던 도현은 CCTV를 피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아바의 말에 생각을 바꿨다.
햄버거를 반쯤 먹은 아바는 먹을 거로 그나마 기분이 조금 풀어진 도현을 보고 물었다.
“트론, 대체 뭘 찾는 거죠?”
심드렁한 얼굴이지만 벌써 7개의 햄버거를 해치우고 8번째 햄버거를 까던 도현은 아바를 슬쩍 봤다.
“내가 말 안 했나?”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외국인 행세를 하기로 했으니 확실히 하기로 한 거다. 물론 이름도 트론과 아나로 정했다.
아바는 무심한 도현의 모습에 ‘이런 사람이지.’ 하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차원에서 누군가 넘어왔어. 그 흔적이 여기로 이어져 있더라고.”
그제야 저지시티를 돌아다닌 이유를 깨달았다.
“흔적이 사라진 거군요.”
볼이 터질 듯 햄버거를 씹어 대는 도현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바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혹시 신이라 생각한 건가요?”
“음. 그 생각도 했었는데, 아닌 것 같아. 너무 약했거든. 감춘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조력자란 말이겠군요.”
“아마도.”
오가던 말이 잠깐 멈췄다. 도현은 치킨너겟을 하나 집어 먹었다. 아바는 치즈 스틱을 야금야금 먹었다. 남은 절반을 입에 다 털어 넣어 맛있게 꿀꺽 삼킨 아바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시청에 가 봐요.”
“시청?”
“네, 헌터 등록은 시청에서 하니까요.”
도현은 말없이 인상만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이 ‘거긴 왜?’라고 묻는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력자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빨리 만나는 방법은 헌터가 되는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그런 조작으로 미국을 삼켜 왔잖아요?”
“똑똑한데?”
“트론이 관심 없어서겠죠.”
도현이 한쪽 코를 씰룩거렸다. 아바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보다 부드러워져 자신도 모르게 놀려 버렸던 아바는 도현이 말하기 전에 먼저 물었다.
“조력자가 언제 도착했는지 알 수 있어요?”
“이제 24시간 조금 넘겼어.”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길을 헤매더라도 조력자도 놀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오늘이나 내일 안엔 등록하지 않겠어요?”
“멀어?”
“조금요. 맨해튼에 있어요.”
도현은 남은 햄버거를 입에 욱여넣고 콜라를 쭉 빨아 먹은 뒤 일어났다.
허드슨강과 이스트강 사이에 위치한 뉴욕 맨해튼은 현재 워프 브레이크의 재해로 어수선했다.
미국의 심장이라고도 하는 뉴욕. 그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관들이 모인 곳이 맨해튼이었기에, 최우선으로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뉴욕 청사나 시청, 월가의 거리 같은 중요한 장소는 재해에 휩쓸렸으나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현상은 ‘신의 기적’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퍼졌고, 미국은 현재 무척이나 어수선하면서도 세상이 변한 뒤 처음으로 평화로웠다.
하지만 재해가 휩쓸고 간 일반 건물이나 공원, 관광지 같은 문화의 거리는 처참할 정도로 무너졌다.
사람들은 불만을 터트리면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는 한편 신을 믿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아바는 눈에 띄지 않으려 택시를 타고 시청에 가길 원했고, 도현은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모습을 숨기고 강을 건너가자고 말했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서로 냈던 의견이 아닌, 농장에 갔다가 다시 맨해튼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감투를 쓴 아바와 도현이 모습을 드러낸 건 시청 앞의 공원이었다. 둘은 나오자마자 재해로 초토화된 주변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주변에 온전한 건 시청뿐, 그 외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폐기물 무덤의 연속이었다.
한참을 둘러보던 아바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게 워프 브레이크로 인한 재해라구요……?”
“일부분이지. 아까 저지시티가 어떤지 봤잖아.”
도현은 지구 시간으로 2주 전쯤 오제아에게서 보고받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바를 제물로 사용했던 1등급 워프 브레이크.
도현의 명령으로 오제아는 지구를 오갈 수 있는 테이스에게 아바를 구해 올 것을 명령했다.
그 과정에서 워프 브레이크는 방치됐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변 도시들이 짊어져야 했다.
오제아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테이스를 재교육하려 했지만, 도현은 그런 오제아를 타일렀다.
애초에 아바의 희생으로 재앙을 막으려 했던 외눈박이와 국가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바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도현의 피를 흡수한 아바 혼자 워프 브레이크를 막아 냈더라면 미국은 진혈의 뱀파이어라는 더 큰 재앙에 자멸했을지도 모른다.
‘그 전에 외눈박이 놈이 아바를 먹어 치웠겠지만.’
아바를 구출한 이유가 이 때문이긴 했다.
그래서 도현은 ‘신의 기적’이라 떠벌리는 온전한 시청 건물을 보고 코웃음 쳤다. 같은 입장이 되니 무슨 작업을 하는지 빤하달까.
“참 애쓴다.”
기적이라는 게 고작 건물 몇 개 지키는 거라니. 그래 놓고 얼마나 힘에 허덕였으면 신교를 만들 생각을 하나.
뭐, 그만큼 위험을 느꼈다는 거겠지.
“네? 뭐라고 하셨어요?”
두서없는 도현의 말에 깜짝 놀란 아바가 되물었지만 도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온 것 같진 않은데.”
“이제 어쩌죠?”
“음.”
도현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이대로 올 때까지 기다릴 건지, 아니면 아바의 말대로 헌터 협회에 쳐들어갈 건지.
‘기다린다 해서 정말 놈이 올까?’
도현은 저지시티까지 어설프게 남았던 흔적을 쫓아 뒷골목까지 들어갔었다. 하지만 도현을 반긴 건 뒷골목 공터에 모인 탈선한 어설픈 각성자들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가 쌓인 게 많은지 바로 달려들었다.
건진 정보는 자신들은 기절했다는 것과 한 놈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요금 폭탄을 맞았다며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해 댔다.
검색어는 자신이었다. 우도현 헌터에 관한 기사와 동영상.
‘그러곤 흔적이 뚝 끊겼지.’
그 공터에서 나와 골목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였다.
그렇게 흔적을 깔끔하게 없앨 능력은 신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
‘아니면 외눈박이 놈이 데려갔을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길 바라지만.
“도현 님?”
아바가 부르자 상념에서 깬 도현이 쳐다봤다.
“트론이라 불러.”
“아, 네. 트론,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어요.”
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방법?”
“아바로 들어가는 거죠.”
시청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하자 도현의 얼굴은 금세 심드렁해졌다.
“죽고 싶으면 뭔들 못해.”
아바가 살짝 이를 악물었다.
“그럼 어떡해요? 조력자라는 놈도, 신이란 놈도 다 숨었는데, 언제 다 찾으려구요? 차라리 적지에 들어가는 게 낫지!”
“어?”
괜찮은 방법인데?
아바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같이 간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힘으로 해결할 문제야 자신이 하고, 세세한 부분은 오히려 아바가 더 잘 알 테니까.
“그럼 난?”
“죽기 직전인 아바 헌터를 구해 준 시민?”
“너만 들어가려고?”
“재해에 휩쓸려 각성했다고 하면 되죠. 대신에 기억을 잃었고.”
뭔가 술술 나온다. 그런데 너무 허점이 많은데?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작위적이잖아.”
“그러니까 먹힌다는 거예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잖아요?”
주변을 향해 손짓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
뭔가 그럴듯하다.
“그럴 거면 헌터 협회로 바로 가도 되잖아?”
처음 목적지가 헌터 협회였으니 만약 거기에 꼬리가 있다면 더 잡기 쉽다. 그렇게 하나를 잡아 골고타처럼 불러낸다면…….
“트론, 꼬리 타고 올라가는 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란 소리예요. 뭣도 모를 때 머리를 쳐야죠!”
으음, 뭔가 파이팅이 넘치는데.
“그리고 트론 방식대로 한다면 지금 재해는 재해 축에도 못 끼는 거 아녜요?”
…이거 누군가 시킨 게 분명하다.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야?”
“네?”
햄버거를 먹을 때만 해도 이렇게 말을 줄줄 내뱉지는 않았다. 달라진 거라고는…….
도현의 시선이 아바 머리의 감투로 향했다.
“휘야?”
어깨가 아주 짧게 움찔거렸다. 도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도깨비랑 통신도 되고, 감투도 참 많이 발전했네.”
아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벼워 보였던 눈은 진지하게 변했다.
“네, 휘 님 조언받고 있었어요. 그래서요?”
“……?”
“도현 님은 치고받으면 좋아요? 즐거워요? 방법은 많잖아요. 그런데 귀찮다고 다 무시하고 목적만 달성하면 끝이에요? 지금 이 재해를 봐도 그런 말이 나오냐구요!”
그녀는 시청 앞 공원으로 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재앙의 결과를 보고 아찔했다.
신을 막지 못한다면 이것이 정말 지구의 미래였으니까.
그런데 함께 목격한 도현은 평소와 같았다. 아니, 평소와 같은 시선이 그렇게 차가울 수 있다는 걸 직접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런 재해에 관심 없다. 오직 조력자와 신이라는 적만 중요할 뿐이었다.
‘어째서!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잖아!’
희생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일까?
독특한 강자의 가치관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다고 이해하려 했던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저 유흥이다. 감정에 치우치는 아이처럼!
“당신의 목적은 지구를 지키는 게 아니야!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치워 버리는 폭군이지! 대체 그 신들이랑 다를 게 뭐야!”
분노와 함께 우도현이란 사람에게서 받았던 호의가 전부 실망이 되어 원망으로 바뀌었다.
천하의 이오르조차 우도현에게는 양보했다. 우도현을 아는 모두가 받들어 모시기만 하는 모습에 충격받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불만이 쌓였을지도 몰랐다.
이 재해가 기폭제가 된 거겠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오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던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 있음에도.
‘하하, 우도현 그 새끼가 인간을 보호한다고? 미친 소리 작작 해. 그 새끼 손에 죽은 인간만 따지면 오히려 지구에 욕심낸다는 그 신이라는 놈들보다 더 악질인 새끼야. 네 목숨이 귀하면 그냥 냅둬. 나라고 안 해 봤겠냐? 나도 그 새끼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지랄 맞지 않았어.’
그때 이오르는 진심이었다.
‘할 말, 못할 말 다 쏟아부었으니 나도 이제 죽이겠지?’
아바는 실소했다.
죽음을 앞뒀던 적이 한두 번인가. 한국에 교류 헌터로 들어갔을 때부터 각오했다.
그저 미련이 있다면 민혁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일까.
‘미안해요, 민혁 씨. 마지막 부탁으로 웃기겠지만… 나 대신 당신이 좀 고쳐 봐요…….’
친구니까. 우도현의 선에 있어 친구는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듣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언젠가 우도현의 손에 끝날지도.
마음속으로 미안함을 담아 닿지 않을 말을 남기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슬쩍 눈을 뜨니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도현이 보였다.
아바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자각하지 못했다.
“뭐 해?”
“네……?”
눈만 끔뻑이며 서 있자 도현은 시청을 향해 턱짓했다.
“가자.”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아바를 지나쳐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아바는 허둥지둥 따랐다.
“가,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