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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의 자취방-176화 (175/200)

# 176

176. Re-Player (4)

치에샤의 얼굴은 검게 죽어 있었다. 아니, 주체할 수 없는 화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분노를 대변하듯 원피스를 움켜쥔 주먹은 하얗게 탈색되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깊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하나만, 하나만 묻고 싶어.”

“말해.”

“왜 묻지 않는 거지?”

“도현이?”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우도현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할 거라 생각했다. 그 대답으로 주도권을 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준비했던 질문은 아예 묻지 않았다.

단 하나도!

계획대로 흘렀다면 우도현의 이야기를 애매하게 풀어 애끓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성이 흐려진 사이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계속해서 우도현을 인질로 삼아 휴레가크를 처리하는 데 철저하게 이용할 계획이었는데.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인간 아닌가! 인간이, 그것도 우도현의 친우라면 친우에 대해 먼저 궁금해해야지! 왜 신을 잡는 데 꽂혔느냔 말이다!

치솟는 분노와 이유 모를 억울함에 씩씩대는 속마음과 달리, 그녀의 겉모습은 무척이나 차갑기만 했다.

그런 치에샤의 기분에 전혀 관심 없던 송강한은 그녀의 물음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당연하잖아. 친절하게도 네가 전부 말해 줬는데.”

“뭐?”

내가 언제! 소리 지른 적…….

‘……!’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려던 치에샤는 붕어처럼 입만 뻥끗거렸다.

화가 나서 떠들어 댔던 말이 떠올라서다.

‘내가 이 지구를 구하려고 신까지 포기했다고! 휴레가크 그놈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나는데! 망할 우도현 그 새끼는 쳐부수는 것만 생각하지,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단지 화가 나서 떠든 말인데 이해했다고? 고작 그것만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이상……!

가, 같은 경험? 설마?

치에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이 수많은 시간을 되돌아갔지만 송강한이라는 인간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우도현이 제브라드에 넘어오기 전에는 친우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다시 지구로 돌아간 뒤로 나타난 적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다른 차원의 휘말림…….’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송강한이 확인 사살을 시작했다.

“네가 신이었던 차원에 도현이가 끌려갔겠지. 그리고 꽤 오랫동안 지냈을 거야. 그 새낀 내 친우지만 성격도 지랄 맞고 고집도 똥꼬집이라 절대 못 이기거든. 뭐, 부러지긴 하겠지만. 게다가 뭐든 시큰둥해. 그러면서 자신의 인내심은 좁쌀만큼 작다고 떠벌리지. 틀린 말은 아니야… 스위치 같달까. 하여튼 스위치가 켜지면 무조건 쳐부숴. 앞뒤 안 가리고 끝장을 봐야 하지. 그러면서 효율은 엄청나게 따진다? 그 효율이란 게 원인만 제거하는 거야. 그게 해결 방법이라 철석같이 믿는 좀 멍청한 놈이지.”

치에샤는 경악으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네가 떠들어 대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어. 설마 나처럼 도현이도 다른 차원에서 세월을 보냈을 줄이야. 보니까 목적은 달랐던 것 같네. 도현이를 신으로 만든다라……. 지구겠지? 넌 네 차원을 잃어버렸을 거고. 음, 지구에 붙어먹을 생각인가? 뭐, 그거야 도현이가 결정할 일이니 왈가왈부 안 하겠어.”

치에샤는 할 말을 잃었다. 소리치기 전에 나눈 대화라 해 봤자 지구를 지배하려는 신이 있고 그 신을 해치워야 한다는 말이 다였다.

머리가 비상하다는 말로는 정의가 안 되는 뛰어난 인간.

‘정말 인간이 맞는 거야……?’

어쩌면 휴레가크보다 무서운 놈이 송강한일지도.

더 무서운 점은 저렇게 뛰어나면서도 우도현 아래를 자처한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충신이라지만 이런 확고한 믿음과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

더 소름 돋는 건 말하는 얼굴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마치 우도현을 앞에 두고 충성 서약을 하듯이.

‘저게 우도현의 친우…….’

치에샤는 우도현이 부러워졌다. 동시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눈앞의 인간보다 자신이 우도현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우도현은 그저 그녀 머릿속에만 있을 뿐. 우도현이 그녀에 대해 알게 된 건 ‘현재’에만 존재했다.

사무칠 듯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치에샤는 언제나 혼자였다. 더 나은 것을 위해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자.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신으로 불리는 그런,

고독한 자.

홀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은색 눈동자가 빛을 잃어 갔다. 유리알처럼 공허하게 가라앉던 그녀의 귓가에 쨍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브라드 님! 오늘은 어떤 안주가 좋슴까요? 소인이 멀리 바다에 가서 고래를 잡아 왔슴다욧!’

해맑게 웃으며 그 짧은 앞발로 마법처럼 요리를 만들어 냈던 하얗고 매끈한 흰족제비.

‘모르달…….’

치에샤는 웃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웃고, 울어 주었던 한 생명체가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아래로 떨어지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송강한이 물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계획은?”

그녀는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심드렁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에게 요구했다.

“휴레가크 앞에 데려다줘.”

“위치는?”

“라스베이거스.”

송강한은 턱을 쓸었다.

“의왼데. 이거 도움 좀 받아야겠는걸.”

“도움?”

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흰 고릴라가 제 몸만 한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형님, 저 왔습니다. 식사하실 것 좀 사 왔… 오오오! 큐티! 깨어났구나!”

‘큐… 큐티?’

헤서드 메이슨이 침대에 앉은 치에샤를 보고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치에샤는 등을 타고 퍼지는 소름에 침대 끝의 벽에 붙어 흰 고릴라와 송강한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누구……?”

“이 집 주인. 뭐, 식사와 숙박, 돌봄까지 제공해 준 조력자?”

피식피식 웃는 꼴이 왠지 놀려 대는 것 같았다.

“자자, 먹고 합시다! 형님! 큐티! 이쪽으로 오시죠!”

흰 고릴라가 자신을 보고 손짓했다. 솥뚜껑만큼이나 큰 손이 흉기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치에샤는 송강한을 봤다. 송강한은 피식 웃더니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비장하게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치에샤가 송강한의 옆자리에 앉자 헤서드 메이슨이 익숙하게 종이봉투에서 음식을 꺼냈다.

2리터라 적힌 붉은 라벨 콜라와 산처럼 쌓인 감자튀김, 그리고 피자 한 판으로 착각할 만큼 큰 햄버거가 나왔다. 대가족용 테이블이 순식간에 꽉 찼다. 자연스럽게 햄버거 하나를 받아 까먹는 송강한은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치에샤는 할 말을 잃었다. 순간 맞은편에 앉은 흰 고릴라가 노란 가발을 쓴 알비노 하이 오크가 아닐까, 실은 이곳이 농장이지 않을까, 우도현이 자신을 엿 먹이려 꾸민 짓이 아닐까, 오만 가지 의심이 망상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자, 큐티! 이렇게 쥐고 먹으면 돼!”

하이 오… 흰 고릴라가 손수 포장지를 반쯤 벗긴 햄버거를 건넸다. 분명 그가 한 손에 들었을 때는 조금 큰 햄버거 같던 게 자신 앞에 들이밀어지자 얼굴 두 배만 한 크기로 변했다.

치에샤는 거절하지 못했다. 양손에 들린 햄버거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또 안에 들어간 건 뭐가 이렇게 많은지, 한 입 베었지만 빵만 입에 돌아다닐 뿐이었다.

“큐티, 팍팍 먹어 봐. 그렇게 먹으니 앙상하잖아.”

그 큰 햄버거를 한 손에 들고 안쓰럽게 쳐다보는 헤서드 메이슨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치에샤는 흠칫하며 뻣뻣하게 그를 봤다.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다. 그러자 헤서드 메이슨은 맥주 한 잔 들이켠 듯 크으으, 탄성을 내지르더니 ‘큐티, 큐티!’를 외쳤다.

송강한은 둘을 보고 쿡쿡 웃으며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씹었다.

뒷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불같이 달려들더니 몇 대 맞고서 얌전해졌다. 그래 봤자 불만은 그대로. 하지만 여자, 치에샤를 보고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렇게 작고 가녀린 ‘큐티’는 어른으로서 보살펴 줘야 한다나. 그 덕에 보호를 자처한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먼저 숙였지만, 방금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꼬라박고 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치에샤가 햄버거를 야금야금 갉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헤서드 메이슨이 짧아진 머리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보고 안쓰럽다며 눈물이라도 짜낼 듯한 모습에 송강한은 화제를 돌렸다.

“헤서드, 라스베이거스에 가야 한다.”

“라스베이거스요? 흠.”

2리터 콜라를 단 두 모금에 다 마셔 버리고 압축시켜 옆의 주방에 던진 그는 살짝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장 가자고 나설 줄 알았던 송강한은 의아했다.

“왜?”

“가는 방법은 비행기밖에 없습니다.”

알고 있다. 차를 타고 가기에는 3일은 꼬박 달려야 할 거리. 그것도 먹는 거, 기름 넣는 거 등등을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송강한은 다시 햄버거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에샤를 슬쩍 보더니 헤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여권… 아니,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으십니까?”

“아…….”

그런 절차 없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던 송강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돈이야 어제 마련해서 딱히 걱정 없었지만, 이런 부분이 걸릴 줄이야.

한국어를 제외하고 영어는 외래어 정도만 아는 치에샤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송강한에게 물었다.

“왜?”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데, 여권이 없어.”

“여권?”

“…하긴, 신이었으니 그런 게 필요할 리가.”

그녀는 뭔가 불필요한 설명이 오가지 않아 좋긴 했지만, 전부 비아냥대는 것처럼 보여 불쾌했다.

짧은 시간에 햄버거를 공략하고 콜라를 다시 한 통 비운 헤서드 메이슨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님,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됩니까?”

송강한은 고민했다.

썩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인연이라고 도움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구덩이에 같이 뛰어들자고 할 수는 없었다.

헤서드 메이슨이 선수 쳤다.

“어렵고 위험한 일인 거 압니다. 곰 같아 보여도 눈치 하나로 먹고살고 있으니까요.”

그 눈치를 도박에 사용한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다 꼬라박는 게 딱히 눈치가 좋다고 보기도 힘들고.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치에샤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이커 2급이라지만, 솔직히 제가 쓰레기라는 거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작고 가녀린 큐티를 이대로 보낼 수 없습니다.”

송강한은 헤서드 메이슨을 빤히 봤다. 겉으로 봤을 때 30대 후반쯤은 아닐까 싶은 외모. 외국인들은 겉모습만 봐서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적은 나이는 아닐 거다.

그런 사람이 치에샤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앳되어 보인다 해도 성인으로 안 보이는 건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 하나쯤은 있지.’

그래도 목숨을 걸어야 할 일.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도현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성격은 지랄 맞아도 믿을 수 있는, 옆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그런 친우가 너무 보고 싶었다.

“형님?”

“안 돼.”

“왜요!”

“약해.”

“너무한 거 아닙니까?”

헤서드 메이슨이 벌떡 일어나 씩씩거렸다. 마치 성난 불곰 같았다. 웬만한 사람은 기가 질릴 모습이었지만 송강한은 차갑게 말했다.

“불필요한 희생은 개죽음일 뿐이야. 차라리 도박판에서 썩다 죽어.”

헤서드 메이슨은 털썩 주저앉아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햄버거를 다 먹은 송강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서드, 고마웠다. 치에샤, 가자.”

얼떨떨하게 일어난 치에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 않는 헤서드 메이슨을 보다가 먼저 나가는 송강한의 뒤를 따랐다.

“형님, 정말 이대로 가실 겁니까?”

송강한은 대꾸 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헤서드 메이슨이 다시 물었다.

“비행기를 탈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송강한의 몸이 뚝 하고 멈췄다.

“방법?”

“미국 사이커가 되면 가능합니다.”

귀가 쫑긋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다.

‘가만, 괜찮은 방법인데?’

한창 강한 헌터를 찾고 있을 테니, 강하기만 하면 일단 접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겠지. 어차피 치에샤도 그놈 앞에 데려다주면 된다고 했으니까.

송강한은 고개를 돌려 헤서드 메이슨을 봤다.

“정보 고맙군.”

그러고 문을 벌컥 열자,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가시면 등록 못합니다.”

“어?”

“보호막이 생기고 해외 통신이 막혔습니다. 뭐, 형님 정도의 실력이면 귀화 조건으로 가능하겠지만… 큐티는요?”

“…….”

“그리고 증인이 되어 줄 사이커가 필요하죠.”

송강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헤서드 메이슨이 덧붙였다.

“증인이 된 사이커는 등록한 사이커와 한 달을 함께 지내며 멘티-멘토로 직접 교육을 진행합니다.”

송강한이 떨떠름한 얼굴로 문을 닫자 그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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