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 염탐 (5)
박길은 눈을 끔뻑거렸다.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건축물들이 숲속 나무처럼 빼곡하다. 눈에 전부 담을 수 없을 만큼 큰 도시, 아니 나라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건물 사이로 불쑥불쑥 솟은 큰 거인들에게 유독 눈이 간 박길은 마나로 시력을 높였지만, 너무 멀어 얼룩진 안경알처럼 흐릿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마력을 실었다.
그물처럼 퍼져 나간 아주 가는 마력이 주변을 쓸었다.
머릿속에 3D 툴을 돌린 듯 그 모습이 아주 자세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헉! 로, 로, 로봇?”
동시에 헌터들의 몸이 훅,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 일대의 중심이 되는 광장.
그 중심, 50미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원형 돌 위에 착지한 헌터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탄성을 흘렸다.
도현은 그들 사이에서 재우를 불렀다.
“재우야, 이리 와 봐.”
재우는 서울에 처음 상경한 촌놈처럼 얼빠진 얼굴을 수습하며 다가왔다.
도현은 밟고 있는 바닥의 원형 돌을 발끝으로 툭툭 찍었다.
“여기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면 돼.”
재우가 바닥을 훑었다. 50미터 길이의 돌판 위에는 동그란 원 안에 눈곱만큼이나 작은 글자가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중심으로 갈수록 글자라 생각했던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문양처럼 보였다.
“저 아직 5서클도 안 됐어요. 형…….”
이제야 겨우 4서클 중반에 접어든 재우는 도현이 달성한 ‘한 달 만에 6서클 마스터’가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마법진은 외우고 있을 거 아냐?”
“그거야… 이오르 님이…….”
잘 외운다며 일단 머리에 때려 박자는 말이 그렇게 무서울 줄이야. 끔찍한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듯 양손으로 벅벅 긁던 재우는 바닥을 스윽 살펴보고 놀랐다.
“이것도 마법진 아녜요?”
“그렇긴 한데, 쓸모가 없어졌어.”
의문 가득한 시선들이 도현에게 꽂혔다. 한 사람, 노아 이선은 마법진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거리를 이어 주던 포탈이군요. 이어진 좌표가 사라졌으니 다시 쓸 수는 없겠습니다.”
유창한 한국어였다.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4명의 헌터들은 눈이 동그래졌다. 특히 같은 국가 출신인 아바가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던 그였으니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분위기가 그렇든 말든 도현은 한쪽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제브라드 차원에서 100년 묵었더니 보는 눈은 있네.”
“선지자를 답습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신도 없는데.”
적의가 느껴지는 빈정거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노아 이선에게 꽂혔다. 그는 도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적갈색 눈동자에 담긴 적의.
질투와 분노라는 열등감이 점철되어 있었다.
적나라한 감정에 헌터들은 곤란했다. 괜히 여기서 우도현이라는 폭탄을 건드려 봤자 돌아오는 건 끔찍한 굴림일 테니까. 그것도 조교로 이오르가 성심성의껏 나선다면 차라리 죽음이라는 안식을 택할지도 모른다.
그런 굴림을 뼛속까지 아는 그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어?
‘설마, 잃을 게 없어서?’
민혁은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아도노스 제국에서 노아 이선의 공식 명칭은 ‘이오르의 노예’.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왕이자 헤미오르 여황의 첩으로도 까인 안타까운 비운의 왕.
바닥 끝까지 추락한 그를 주운 건 이오르였다, 라는 게 아도노스 제국에 퍼진 소문이었다.
‘노아? 헤미오르가 첩 얘기 듣기 싫다고 던지고 갔는데?’
아바의 물음에 이오르가 흔쾌히 대답해 준 사실이 어떤 의미로는 더 충격적이랄까.
이게 3년 전 이야기였다.
그렇게 버려진 노아 이선은 이오르의 기분에 따라 하루가 멀다고 맞고만 살았다는데…….
‘제국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실상은 훈련이었다. 체력과 정신력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그 상황에서 이어지는 전투의 기술.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이것이 ‘쥐어팬다.’라는 말로 설명이 된 거다.
그 외엔 웬만한 건 다 누리고 산다고 봐도 무방했다.
따끈한 밥, 편한 잠자리, 무기도, 옷도 전부 이오르가 제공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예견한 듯 말이다.
‘정말 이오르 님이 예상한 거라면……?’
민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왜?’, ‘어떻게?’라는 의문은 들지도 않았다.
‘일방통행 미친 퍼런 도마뱀’이란 이미지도, 노아 이선을 키운 것도, 이 모든 게 지금을 염두에 둔 계획이라면?
‘드래곤이란 종족들은 다 그런 건가?’
그저 상상할 수 없는 강함보다 이런 부분이 더 두려웠다.
‘그나마 도현이 친구라서 다행이지.’
그렇게 민혁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도현이 노아의 목을 잡아 들었다.
“커헉!”
머리 하나 차이 나는 노아 이선은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도현의 손에 잡혀 무릎을 꿇었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시뻘게진 얼굴과 달리 눈에는 희열이, 입가에는 조소가 그려져 있었다.
도현이 말했다.
“이오르가 뭐라 안 했냐? 나한테 시비 걸지 말라고.”
아주 잠깐 노아 이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빡치면 이오르 그 새끼도 도망가. 왜, 확인해 보고 싶어?”
쿠궁!
노아 이선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힘과 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발끝부터 잘근잘근 씹히고 있는 듯 저릿한 살기가 고통으로 몸을 잠식했다. 의식 저 멀리 숨겨 두었던 공포가 단숨에 뭍으로 떠올랐다.
경기를 일으키듯 몸이 덜덜 떨려 왔다. 눈이 까뒤집어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세기 시작했다.
‘주, 죽는…….’
3년 동안 미친 도마뱀에게 받은 살기에 대한 내성? 그저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느껴질 만큼 거대한 공포였다.
차원이 농장과 동화되고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무시했던 도현이 인제 와 제 손을 빌리려 들었을 때 얼마나 고까웠나.
우도현이 지구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신이 제브라드 차원에 떨어졌었는데.
그 사실을 알 텐데도 어떠한 사과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으… 으아아악!’
콰드드득!
온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지 않아야 할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반항? 쥐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코끼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정신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울컥, 목을 타고 오른 핏물이 벌어진 턱을 타고 쏟아졌다. 두려움과 함께 왜 이오르가 살기까지 일으키며 신신당부를 했는지 이해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다.
먹먹한 귀에 윙윙거리는 이명을 따라 의식이 멀어지려 했다. 그때 자신을 찢던 기운이 훅, 하고 사라졌다.
실처럼 가늘게 떠진 눈에 무표정한 도현이 보였다.
움직일 수 없는 몸임에도 덜덜 떨렸다.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 마치 무생물을 보는 듯한 눈.
그래서 더 두려웠다. 어떻게 해서든 변명을 해야 단 1초라도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푸들푸들 떨리는 입을 억지로 열려는데,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솔직히 미국이 멸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그런데 내가 요즘 인내심이란 걸 기르고 있거든?”
‘그러니까, 다행으로 알아.’라는 말과 함께 목을 옥죄던 손이 가볍게 떨어졌다. 동시에 노아 이선의 몸이 무너지듯 바닥에 처박혔다. 다 감지 못한 눈꺼풀 안으로 풀린 눈동자가 멀어지는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거운 적막감이 내려앉은 가운데, 한숨을 푹 내쉰 재우가 살짝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건들 사람을 건드려야지.”
민혁과 아바가 입을 꾹 다물고 수긍했다. 박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재우야.”
도현이 재우를 불렀다. 12시 방향 큰 대로로 걸어가는 도현을 확인한 재우는 텔레포트로 빠르게 옆으로 달라붙었다.
슬쩍 도현의 표정을 살핀 재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이제 어떡할 거예요?”
“일단 따라와.”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건물들이 상자처럼 쌓인 곳이었다. 하나하나가 5층짜리 빌라만큼 컸고, 전부 앞을 향한 면 전체가 셔터 같은 철문을 달고 있었다.
정면에 열린 한 곳. 양옆 벽에 창문이라도 뚫렸는지, 새어 들어간 빛에 서 있는 타이탄이 보였다.
“아, 혹시 여기가 로봇… 아니, 타이탄 창고예요?”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린 창고로 들어갔다.
“허억…….”
재우는 창고 안에 세워진 타이탄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5미터는 될 법한 거인. 덩치 때문에 둔해 보일 만도 했지만, 사람을 본떠 만든 외형과 입혀진 갑옷은 쇳조각이 맞는데도 마치 로브를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현은 풀쩍 뛰더니 그대로 날아 타이탄 앞에 멈췄다. 그리고 타이탄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탁해 보이지만 시원함이 감도는 짙은 푸른색의 마나가 거미줄처럼 타이탄의 전신으로 새겨져 빛을 내더니 사라졌다.
푸슈우욱!
압력으로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슴의 덮개가 절반씩 위아래로 열리며 텅 빈 공간을 보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긴 좁고, 한 사람이라면 넉넉한 공간.
바닥에 착지한 도현이 그 공간을 향해 턱짓했다.
“타.”
“예? 제, 제가요……?”
도현은 두 번 말하기 싫은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재우를 빤히 봤다. 침을 꿀꺽 삼킨 재우는 결심한 듯 발을 옮겼다.
탓!
한 번의 뜀박질로 그 공간에 발을 들인 재우는 크으, 감탄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예전이었다면 등반하듯 낑낑거려 겨우 올라왔겠지만, 이오르의 훈련으로 체력이 늘고 근육이 붙었다. 아쉬운 건 곰 같은 덩치가 변함없다는 것 정도.
“마나를 끌어 올려.”
도현의 조언에 재우는 망설임 없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어두웠던 공간이 환해지며 발아래 마법진이 빛을 발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우웅!
멈춰 있던 타이탄이 움직였다. 열렸던 가슴이 닫히며 360도로 시야가 확장되었다.
“헉! 혀, 혀엉! 이, 이게 뭐… 우왁!”
당황한 재우가 몸을 움직이자 타이탄이 그 행동을 따라 했다. 깜짝 놀란 재우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잠깐 창고가 진동하더니 똑같이 넘어진 타이탄이 머리를 긁고 있었다.
“그대로 가서 광장에 마법진 작업해.”
“에……?”
그게 될 리…….
재우는 자신의 몸에서 느껴져야 할 마나의 크기가 수십 배나 확장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지식적 배움은 7서클까지 완료한 상태. 마나가 부족해 다음으로 넘어서지 못한 걸 어떻게 안 건지.
‘아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자신을 데리고 중국에 갔던 그날부터 도현은 재우에게 있어 신이었다. 그저 한결같은 모습에 저 사람이 같은 인간이라고 착각한 것뿐.
재우는 양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 조작이 힘들 줄 알았지만, 그냥 자신의 몸이다. 시야가 높아진 점이나 눈이 안 달린 뒤쪽까지 보게 되니 눈이 핑핑 돌아서 그렇지, 적응만 한다면 정말 무서울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우는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도현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흐흐흐, 다녀오겠습니다!”
쿵쾅쿵쾅, 신나게 달려가는 타이탄의 뒤통수를 보며 도현은 혀를 찼다.
“텔레포트를 쓰면 되지 뭣 하러 뛰어가?”
한동안 체력 좀 늘리라고 했더니, 그새 머릿속에 근육이 찼나?
그래도 금방 도착한 건지, 다른 헌터들의 경악한 탄성이 들려왔다.
픽 웃은 도현은 창고를 나와 검붉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 오기 전 계획은 전부 휴지 조각이 된 상태이고, 남은 건.
“그냥 깽판이지, 뭐.”
그 결과로 생길 문제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거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된 건 여기 타이탄을 쓸 수 있다는 것 정도.
‘해 봤자 바로 쓸 수 있는 타이탄은 20기.’
데려온 헌터들과 한국의 몇몇 이들을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되겠지.
도현은 미국의 돔 막을 떠올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