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 염탐 (4)
도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휘는 쯧쯧, 혀를 찼다.
“뭐, 그 가시나가 그렇지.”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르달의 부모였던 족제비가 송골매에게 사냥당하고, 형제 중에 제일 약한 모르달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태어난 지 2주도 안 됐던 새끼 때였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휘가 발견했고, 눈은 떴으나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었던 모르달은 가냘프게 울기만 했다고.
“거기서 제브라드, 그 가시나를 만났지.”
“그게 200년 전 일이고……?”
“그래.”
약하게 끙끙 앓기까지 하는 모습에 도현은 다가가 모르달을 품에 안았다. 아까는 모르겠더니 지금은 몸이 불덩이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모르달을 빤히 보던 사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성력!”
“신성력?”
“그래, 이놈아! 신의 심부름꾼 아니었느냐!”
아, 기억을 지우면서 신성력도 사라졌다고 했었지.
“왜 지금에 와서 이런 거야?”
농장과 차원이 동화된 지 한 달이 넘었다.
“몸으로 버텼을 게다. 그러다 충격에 갑자기 심해진 게지. 미련한 녀석……. 쯧! 이놈아, 그렇게 주변 좀 보라 하지 않았느냐?”
“나라고 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휘와 사가가 동시에 말했다.
“당연히 신성력을 써야지!”
어떻게 저렇게 죽이 잘 맞을까?
처음부터 부부였던 거 아냐?
미간을 좁히던 도현은 품에 안고 있는 모르달을 살폈다.
평소의 발랄함은 어디 가고 불덩이 같은 몸에 숨을 내뱉을 때마다 옅게 앓는다.
쯧, 말이라도 할 것이지.
오두방정이란 방정은 다 떨면서 정작 힘들 때는 속으로 삼키니.
작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오른손을 들어 모르달의 머리를 감쌌다.
신성력이라…….
느껴 본 적은 있어도 써 본 적은 없는 그 힘.
농장과 제브라드 차원이 동화되었지만, 신이란 자각은 솔직히 없었다. 그저 편의성 하나만큼은 탁월한 정도랄까.
도현이 신이 되고 정식으로 신의 힘이 발휘되면서 우도현교의 신도들은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 마나.
신성력과 마나 모두를 아우르는 힘.
도현은 픽 웃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돼.’를 외치는 자신 같지 않은가.
맞춰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 모두가 지성이 있고 제각기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굳이 신앙이란 이름 아래 자신을 욱여넣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각자 알아서 살면 되지.’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
신앙이란 건 그저 힘들 때면 잠시 한숨 돌릴 수 있는 그런 쉼터면 될 일.
‘나도 입만 벌리고 있는 놈들 뒤치다꺼리는 사양이야.’
뭐, 모르달이 있어서 편하긴 했지만, 자신이 좋아서 한 거 아닌가.
‘그리고 가출 이후로는 딱히 맡기지도 않았고.’
블랙홀 랜드 사업으로 오제아가 오면서 모르달이 했던 일은 대부분 그녀가 도맡았다.
모르달은 토토를 도운다고 농장의 토토 대장간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고.
어쩌면 그때 현신한 불카누스 때문에 더 힘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쨌든 심부름꾼은 필요 없어.’
모르달은 모르달로 충분하다.
도현은 모르달의 머리에 올린 손으로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모르달, 일어나야지. 아빠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자신이 내뱉고도 낯간지러운지 도현의 표정은 어색했다.
토토에게는 그렇게 쉽게 나오는데.
‘익숙해져야지.’
생각해 보면 제브라드의 심부름꾼이란 이유로 의심하고 미워했다.
좀 민폐이긴 해도, 그게 모르달답지 않나.
‘모르달답다, 라…….’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그사이 남색에 가까운 푸른색의 신성 마나가 청량한 기운을 뿜으며 모르달에게 스며들었다.
뜨끈한 열기를 내뿜던 몸이 천천히 식으며 옅은 신음도 사라졌다.
한결 편안하게 숨을 내뱉는 모르달의 모습은 곤히 잠든 듯 평온했다.
금세 회복되자 한시름 던 도현은 노골적인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음흉하면서도 휘어진 두 쌍의 눈. 사가와 휘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휘가 사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소곤거렸다.
“들었나? 아빠란다. 크크크, 저놈 입에서 저렇게 곱상한 말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 케엑!”
쾅!
사가의 주먹질 한 방에 휘가 날아갔다.
식당 뒤, 담벼락 한 곳을 무너뜨리고 저 멀리 거리에 처박혔다.
연기처럼 뽀얗게 날리는 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지만, 대부분이 관광으로 온 한국인들. 제국 국민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이오르 식당을 본 뒤 제 갈 길을 갔다.
손을 탁탁 털며 다가온 사가가 도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했다.”
음, 역시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게 아니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동안 제자리로 돌아온 휘가 의자에 널브러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남편 폭력에 마누라 죽어나네!”
그런 것치고는 맞은 것도 모를 정도로 멀쩡했다. 무너졌던 담벼락도 복구된 걸 보니 거리도 정리가 됐겠지.
“아버지!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큰 소리에 놀란 이오르가 식당에서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소리가 났던 곳을 확인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자 이오르는 둘을 바라봤다.
사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휘가 입을 뻥긋하자 사가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어쩔 수 없이 휘가 허공을 보며 곰방대를 빨았다. 이오르의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친절했다.
“부부 싸움.”
단란한 가족의 시선을 온몸에 받은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열심히 먹어 대는 토토를 데리고 지구의 집으로 돌아갔다.
***
정보팀의 핵심인 재우와 박길이 열심히 구르는 동안, 로타네프 배 속의 이계 문물 정리는 도현이 직접 나섰다. 맡기려면 누구에게 맡기든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계 문물에 딱히 기대하지 않았던 도현은 하지만 그 문명이 마도 시대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대로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법과 기계가 완벽하게 공존하는 문물.
어렸을 적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었던 거대한 로봇이 들어찬 세계였다. 처음에는 거인들이 널브러져 있어 그들의 세계인가 싶었지만 그게 전부 로봇일 줄이야.
기록에는 그 로봇이 ‘타이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사람과 같은 외모의 강철 인간. 기사처럼 무장을 시키고 무기를 들고 있어서일까?
‘다 죽어 버렸다는 게 좀 아쉽네.’
흥미가 생긴 건 좋았지만, 로타네프가 워프에서 빠져나오면서 전부 몰살당해 버렸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기록이 있어 배울 수는 있겠지만, 살아 있는 지식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
‘하여간 미친 새끼는 도움이 안 돼.’
속으로 시겔로를 열심히 씹던 도현은 한 달 넘게 방치되어 악취를 풍기는 시신들을 수습해 태웠다.
그리고 로타네프의 몸속에 파고들어 살아남은 기생충 박멸에 박차를 가했다.
지구의 시간으로 3일이 더 흘러 도현을 포함한 6명이 버뮤다 상공에 나타났다.
프로페셔널 팀의 재우와 박길, 도현의 친구 민혁과 아바, 마지막으로 노아 이선까지.
“으으… 하필 여길…….”
민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속으로 동조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도현의 친우인 그가 유일했다.
실종이란 악명으로 유명한 바다, 버뮤다 삼각지대.
그 명성에 걸맞게 느껴지는 마나는 뭔가 불안정하고 끈적했다.
하필 가장 더운 여름의 한낮.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함께 불쾌지수가 초 단위로 상승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임무의 무게가 전혀 가볍지 않은 탓에 극도로 긴장한 헌터들은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포기해 버렸다.
묘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도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눈 속이기에는 딱 좋은 장소잖아. 가깝기도 하고. 조금만 참아.”
모두 떨떠름한 얼굴로 미국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뉴욕의 맨해튼. 미국 헌터 협회가 있는 곳.
미국을 감싼 돔 막에 뭉개진 듯 흐릿해 보였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달라진 게 없는 미국이었다.
도현은 헌터들과 달리 돔 막을 살폈다.
미국 전체를 감싼 돔 형태의 막.
왜 제브라드와 사가가 말렸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이거 부숴도 문제고, 놔둬도 문제네.’
마나를 가둔 막이다.
부수면 미국에 사는 생명체가 모조리 죽고, 놔두면 마나에 적응 못한 이들이 다 죽는다. 헌터라 해도 4급까지는 위험한 환경.
언제 터질지 모르는 헬륨 가스를 주입한 풍선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피식, 조소가 흘러나왔다.
‘머리를 쓴다더니.’
헛말은 아니다 이건가.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거 정말 꼭꼭 숨었네.”
현신했을 거라는 말과 달리 신의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돔 막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은 바쁘게 거리를 오갔다. 늦은 점심을 먹는가 하면, 가게에 틀어진 TV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도로는 한낮의 체증으로 거북이걸음을 길게 이어 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바뀌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 그 어디에도 ‘헌터’가 없는 일상이었다.
하긴, 워프가 사라졌으니 일상이 우선으로 돌아가는 게 맞긴 하겠지만.
그렇게 현실과 단절된 미국과 달리 돔 막 밖은 ‘헌터’가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파지지직! 퍼벙!
돔 막이 펼쳐진 경계의 바다. 그것을 인지할 수 없는 기러기 떼가 육지로 날아들다 바다에 추락했다.
풍덩, 풍덩.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바닷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키에에엑!
불쾌한 괴성을 지른 몬스터가 단숨에 기러기 사체를 텁텁거리며 삼켰고, 뒤를 이어 올라온 5배는 될 법한 큰 몬스터가 그 몬스터를 꿀꺽 삼켜 버렸다.
‘…….’
그 상황을 지켜본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부수고 보자는 의견을 냈던 민혁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런 민혁의 손을 잡으며 위로하던 아바가 도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도현의 시선은 박길을 향했다. 박길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립니다. 들어가지 않는 한.”
이로써 2차 대안까지 시도도 못한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타네프를 불러야겠네.”
도현이 허공에 손짓했다. 그 손짓을 따라 푸른 균열이 허공을 찢을 듯 끝을 모르고 찢어졌다.
그리고 검은 덩어리가 바다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융단폭격이 떨어진 듯 바다가 진동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물보라가 헌터들까지 덮쳤지만, 다행히도 도현이 두른 실드를 타고 바다로 떨어졌다.
허공에 흩날리는 물방울 사이로 강렬한 태양 아래 쌍무지개가 비쳤다 사라졌다.
모두들 환상처럼 펼쳐진 자연적 경관에 입을 쩍 벌리며 넋을 놓았다.
아니, 해수면 위에 뜬 검은 섬에 넋을 놓고 있었다.
‘고, 고래?’
박길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물고기 특유의 타원형 몸이 아닌 공을 하나 띄워 놓은 모습이었다. 그마저 지느러미가 달린 꼬리가 없었다면 공이라 생각했을 빵빵한 공, 아니 고래 몬스터.
도현이 뭔가를 준비한다는 걸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게 몬스터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저렇게 큰 고래가 농장에 있으리라고는…….
‘서울시 절반은 될 것 같은데……?’
박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고 있자 하니 자신이 플랑크톤이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 저 고래는 왜?’
크기가 크니까 섬으로 띄워 놓고 쓰려나?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여름에 그늘 하나 없는 바다에서 지낸다는 건 솔직히 말라 죽으란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럴 리 없지.’
바로 부정했다.
도현을 실제로 본 건 며칠 되지 않았지만,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은 확신이 섰을 때만이었다.
그런 사람의 안목에 대한 믿음.
단지 그게, 가성비를 몹시나 따지다 보니 당사자는 지옥을 겪어야 하는 게 문제였지만.
박길은 자연스럽게 떠오른 훈련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농장 시간으로 약 3주간 진행되었던 지옥 훈련…….
기억나는 건 그저 처맞고, 또 맞고, 또 맞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던 게 전부이긴 했지만, 그 훈련이 끝났을 때 3급 끝자락에 섰다는 걸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 또 이오르 님에게 다져졌지…….’
하루를 꼬박 기절했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곳에 온 거다.
출발하기 직전 나타난 이오르가 찬찬히 한 명씩 정신교육을 시행했고, 박길 그에게는 한마디만 남겼다.
‘갔다 와서 보자.’
차라리 여기서 몬스터 밥이 되는 게 훨씬 편안한 죽음이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모두를 감싼 실드가 바다로 떨어졌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검은 섬… 아니, 로타네프의 등이었다. 제각각 착지를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예상을 깨고 숨구멍으로 직행했다.
검붉은 터널을 한참 들어가 도착한 곳은 어둠뿐인 동공이었다.
“헉!”
“으음…….”
박길을 제외한 헌터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신음을 흘렸다. 명함을 들이밀어도 꿀리지 않는 3급이 됐다지만, 여기서는 최약체라는 건 변함없었다. 3급이었던 민혁과 재우는 더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1급이 되었고, 아바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예전의 붉은 눈과 도드라진 송곳니를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에 노아 이선은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숨만 쉬는 잡초라 욕해도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할 박길은 그저 어둠만 가득한 동굴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고.
후우웅!
환한 불빛이 켜지자 박길은 턱이 빠질 듯 입 크기를 자랑했다.
전부 눈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새로운 문명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