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69화 (168/200)

# 169

169. 염탐 (2)

이오르의 식당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식사를 해치운 도현은 오랜만에 토토와 모르달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향했다.

“아빠, 바다 왜 왓써?”

“소인도 궁금함다요. 도련님, 바다에 왜 온 검까요?”

그저 바다에 간다는 말만 해서인지 둘은 계속 이유를 물어 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동안 바다에도 오지 못했는지 하얀 백사장을 보자 금세 신이 나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뭔가 만드는 것 같더니, 노는 것도 마다하고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뭘 만드는 건지 궁금하긴 한데.’

꼬치꼬치 캐묻고 싶진 않았다.

뭐, 언젠가 이야기해 주겠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을 머리 한쪽으로 젖혀 두고 꺄륵, 웃어대는 토토와 모르달을 보며 평온을 느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휘와 치고받고 싸웠는데 말이야.’

그 과정에서 집도 날려 먹고, 아파트 주민들이 한밤에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게 꿈이었던 것처럼 다시 조용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할 일은 많은데.’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기억을 지우고 삭제하듯 사라진 치에샤도 찾아 받은 만큼 되갚아 줘야 하고, 지레 겁먹고 모든 접근을 막아 버린 미국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워프 브레이크로 만신창이가 된 지구도.

‘어차피 외눈박이만 정리하면 끝날 일이니까.’

결국 모든 게 미국으로 결론이 나 버리는 상황.

거기에 비해 한적하다 못해 따분하기까지 한 이 바다의 모습은 어느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엔딩 같지 않나?

‘참 아이러니하네.’

다르게 생각하면 곧 들이닥칠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평온함에 흠뻑 취하는 몸과 정신을 보고 있으니, 한동안 바빴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니 사람은 성격에 맞게 살아야 한다니까.”

매일 눈 뜨고 싶을 때 일어나 그날 무얼 할 건지 고민하고, 그러다 훌쩍 여행도 가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한참 떠들고 맛있는 것도 먹고, 다시 헤어지는 그런 여유로운 삶.

하,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훅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외눈박이를 빨리 치워 버려야지.’

그러고 나면 뒷일은 알아서 정리될 거다.

그래서 휘와 거래도 했고.

백수. 그것도 요리를 취미로 가진 백수의 삶이 머지않았다는 게 체감되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도현은 파도에 흠뻑 젖은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수면 위를 걸었다.

“아빠, 토토도! 토토도 갈 꺼얏!”

“도련님, 소인도 데려가셔야지욧!”

모래사장에서 언제 물에 들어간 건지, 한창 수영하던 두 펫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빠르게 쫓아왔다.

도현은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잡힐 듯 말듯 속도를 조절하며 지그재그로 바다를 휘저으면서 토토와 모르달을 농락했다.

그렇다고 지쳐 떨어질 애들이 아니지만.

“우이띠, 아빠아앗!”

“엥? 토, 토토 님?”

약이 바짝 오른 토토가 눈에 불을 켰다. 그 증거로 꼬리의 얌전했던 불이 두 배로 커져 타오른다.

물속에서도 타오르는 불이라니. 모습은 그대로라 몰랐지만, 새삼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토토를 놀려 먹다 보니 모르달이 저 멀리 점이 되어 있었다.

“소인, 모르달도 감다요오옷!”

우렁찬 기합이 들리더니 한눈에도 엄청나 보이는 물보라를 등에 단 모르달이 보였다.

‘무슨, 꼬리가 프로펠러야?’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드는 건 꼬리였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물보라도 높고 넓게 퍼졌다. 그 행동에 없던 바람까지 일었다. 마치 수상 오토바이 같은 추진력을 선보이며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모르달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토토가 도현의 오른팔을 잡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잡앗따! 토토가 아빠 잡았써! 꺅! 꿀꺽! 우엑, 켁! 켁! 모르달!”

모르달이 일으킨 물보라를 그대로 뒤집어쓰는 것으로도 부족해 꿀꺽 넘어간 바닷물에 사레가 들린 토토가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모르달 왔, 우왁! 토토 님! 왜, 왜 이러심까욧?”

둘은 또다시 투닥거렸다.

예전의 도현이었다면 시끄럽다며 모르달을 쥐어팼을 텐데, 아까도 그렇더니 오늘따라 그 복작거림이 좋다 못해 반갑기까지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젠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변했구나.’

새삼 느껴졌다.

귀를 닫고 외면했던 자신이 어느샌가 이 시끄러움을 그리워하다니.

“아욱! 토토 님! 뜨, 뜨겁슴다욧! 그만, 그만 좀 하심쑈!”

도현의 팔에 꼬리를 감고 선 토토가 씩씩대며 주먹만 한 불덩이를 모르달에게 던지고 있었다.

모르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도현 주변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나구나.’

제브라드의 화풀이를 모르달에게 했던 그때의 자신처럼, 토토가 그 모습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애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이오르 식당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괜히 휘가 나서 이오르를 꼬드기려다 엄마 소리나 듣고. 생각지도 않은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까지 올 뻔했다.

거기에 가출 소동 이후 조용히 돌아온 모르달은 큰 죄책감을 느꼈는지 몇 번이고 말할 타이밍을 쟀다.

그 시간이 장장 일주일.

물론 농장 시간이라 실제 지구 시간으로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장 시간의 체감은 밖과 똑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먹을 걸 줘도 마다하고 이야기하고, 밥 먹을 시간이 되어 요리해야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딱 잘라 끊어 낼 수도 있었지만 도현은 그러지 못했다.

제브라드가 기억을 지워 버렸다고.

사가가 슬쩍 해 준 이야기였지만, 듣자마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라질 줄 알았으면 한 대 패 주는 건데.’

쯧, 그냥 부려 먹을 생각만 했던 게 실수다.

제브라드 차원이 농장과 동화되었다는 데서 마음을 놓아 버린 것도 실수라면 실수.

거기에 제브라드가 인간이 되었다고 아무것도 못할 거라 지레짐작한 것도.

다른 이였다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 대응책이라도 만들어 뒀겠지만, 도현의 대응책은 늘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와서 바뀔 생각도 없었다.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가 아니다, 라.’

머릿속에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을 시작으로 한국 헌터와 중국 헌터, 그리고 제브라드 차원의 방문자들까지.

‘나쁘지 않네.’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왼손으로 토토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들었다. 살짝 버둥거리던 토토가 도현을 확인하고 헤헤 웃으며 왼손에 매달렸다.

“토토, 그러면 못써.”

“웅, 아빠!”

살짝 엄하게 말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머리가 굵어졌다는 게 왜 이렇게 아쉬운지, 입맛을 쩝 다신 도현은 물속에서 허둥대는 모르달을 건져 손가락을 튕겼다.

흠뻑 젖었던 토토와 모르달이 쨍쨍한 햇볕에 말린 빨래처럼 뽀송뽀송해졌다.

축축함이 가시자 다시 기분이 좋아진 토토와 모르달이 두서없이 조잘조잘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도현은 먼 바다를 향해 말했다.

“먹보 고래, 나와 봐.”

막상 부르려니 이름을 몰라 대충 불렀다. 혹시나 못 듣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뿌- 웅!

묵직한 뱃고동 소리가 바다를 진동시키며 새카만 섬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토토와 모르달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이 나 소리 질렀다.

“우와아아, 고래! 아빠, 고래야! 새까만 고래! 엄청 커!”

“히이익! 저, 저 고래는 언제부터 있던 검까요? 또 중국에서 가져온 검까요?”

깜짝 놀란 모르달은 도현의 다리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훔쳐봤다.

토토처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겁을 먹고 그러지?

의아함도 잠시, 피부색과 구분 안 되는 커다란 검은 눈, 동굴 입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눈 하나가 이쪽을 살피더니 아직 까먹지 않은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로타네프랍니다! 부르셨어요?」

“꺄아- 말도 해! 싱기한 고래야!”

너무 좋아 호들갑을 떠는 토토와 다르게 모르달은 덜덜 떨어 댔다.

무슨 고양이 앞의 쥐처럼.

지금은 할 일이 있으니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도현은 로타네프에게 물었다.

“지낼 만해?”

「신기한 세계예요.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네요. 쫀득쫀득한 게 엄청 맛있어요! 그리고 바다 주인도 자상하고요.」

동굴 같은 새카만 눈이 살짝 휘었다.

바다의 주인?

“아흐라나?”

로타네프는 대답 대신 숨구멍으로 물을 뿜어 댔다. 100미터쯤 솟은 물이 퍼지며 바다 위에 무지개가 생겨났다. 토토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왜 부르셨나요?」

“다른 맛집도 소개해 주려고.”

「맛집? 맛……? 먹이인가요?」

“여기보단 좁겠지만, 다 먹어도 돼.”

로타네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다? 정말이죠? 정말 다 먹어도 되는 거죠?」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어.”

「안 그래도 조금 눈치가 보여서 적당히 먹었거든요. 그래서 요즘 살이 계속 빠져서 걱정이었는데!」

적당히? 살이 빠져? 그대론데……?

크기가 좀 커야 말이지.

「어디인가요?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마치 산책하러 가려고 현관 앞에 선 댕댕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좀 걸려. 사전 작업이 필요해서. 참.”

「네!」

“몸에 마법진 좀 새겼으면 하는데. 집도 하나 넣고.”

「네!」

어…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네 몸속에 짓고, 새긴다니까?

오히려 도현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 말에 더 즐거워한 건.

“집? 아빠, 고래 집 지어?”

잠깐 무슨 말인지 설명하려던 도현은 멈칫했다.

저번에 토토의 상태창에 분명히 언어 마스터에 한국어가 있었는데?

하는 짓은 이제 막 한글을 배우는 아이다.

언어를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다른 영역인가?

‘뭐, 발음은 계속 좋아지니까.’

차근차근하면 되겠지.

“아빠?”

도현은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명했다.

“아니, 고래 몸속에 집 하나 지을 거야.”

“헉! 그럼 고래 아야 하자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은 보고만 있기 아까울 정도로 깜찍했다. 그래, 역시 아직 어린 거야.

흐뭇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말해 주려는데, 로타네프가 대답했다.

「괜찮아요. 처음은 아니니까요!」

“어? 처음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미 몸속에 사는 생명체가 있다고?

「네. 제가 좀 크죠.」

이번엔 눈이 더 진하게 휘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뭔가 아련한 게 회상에 잠긴 듯했다.

“그럼 지금은?”

「당연히 다 죽었죠. 당신과 처음 만났던 날 다른 세상에 나오면서. 저만 살았어요.」

그래서 말이 통했던 건가? 하여간 1등급 워프는 뭔가 워프라기에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사가한테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사가가 워프를 두라고만 하는 통에 제대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몬스터 때문인지 몰라도 지구의 마나 농도는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인류가 다 죽어 날 판이다.

어차피 이 고래, 로타네프가 바다로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의 몬스터들도 씨가 마를 테니 이제 제대로 이야기 해 봐야 하겠지.

생각의 정리가 끝나자 토토가 볼을 와락 안으며 떼 아닌 떼를 썼다.

“아빠, 아빠! 토토, 토토가 지을래!”

“뭐 만든다고 안 했어?”

“다 만들었… 앗! 아빠 주께!”

토토가 허공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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