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 대책 (5)
도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화? 그래, 해 보자. 대화라는 거!”
도현이 왼손을 움켜쥐었다. 푸르다 못해 새파랗게 변한 주먹을 휘의 얼굴에 꽂았다.
꽈- 앙-!
채 1년도 살지 못한 도현의 자취방이 용암을 뿜어내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갔다.
그 여파로 아파트 한 동 전체가 쿠구궁! 비명을 지르며 무너질 듯 들썩였다.
“꺄아아악!”
“뭐, 뭐야? 워프? 워프 브레이크?”
“무, 무너진다! 피해애앳!”
거칠게 흔들리는 아파트에 층층이 불이 켜지고, 비명이 사이렌처럼 울렸다. 강한 진동이 옆 동까지 전해지며 아파트 전체에 대피 소동이 일어났다.
발코니를 통해 가족을 안고 뛰어내리는 각성자들이 있는가 하면, 상황을 빠르게 판단한 아파트 주민 헌터들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거나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지상과 달리 아파트 최상층, 문제의 근원지인 도현의 자취방은 더는 집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버렸다.
방과 거실, 주방 등을 나누는 벽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비스킷처럼 바스러진 콘크리트 골조 사이로 두꺼운 철근이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폐허가 된 도현의 자취방이 한눈에 보이는 하늘 위.
어둠이 짙게 깔려 뭐 하나 구분하기 힘든 그곳에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들렸다.
휘는 목을 타고 올라온 피를 뱉으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하, 새끼, 살살 쫌 치지. 이게 뭐꼬?”
말짱한 얼굴로 인상을 쓰며 투덜대는 휘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공포라기보단 즐거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런 휘 앞으로 10미터쯤 떨어진 허공을 밟고 선 도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대화하자며? 꽁지 빠지게 튀는 게 네가 말한 대화냐?”
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신나서 달려들 줄 누가 알았겠노. 혹시 욕구불만… 이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현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휘가 머리를 뒤로 젖혀 피하자 도현은 무릎을 들어 휘의 명치를 찍어 올렸다. 제대로 들어갔으나 휘의 몸은 잔상처럼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타난 휘가 짧게 혀를 찼다.
“아따, 그 말이 뭐라꼬 득달같이 달려드노? 이거 뭐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
“그럼 입 다물어!”
이번엔 등 뒤에서 나타난 도현이 휘의 옆구리를 향해 다리를 날렸다. 하지만 흉흉한 바람 소리와 함께 덧없는 허공만 갈랐다.
사라진 휘가 20미터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머리 위로 도현의 깍지 낀 양손이 해머처럼 떨어졌다. 휘가 훅 하고 꺼졌다. 도현은 휘를 찾아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튀었나……? 무슨 신이란 새끼… 큽!”
꽈앙-!
단단하고 묵직한 한 방이 도현의 등을 내려쳤다. 무방비한 상태로 당한 도현은 잔해밖에 남지 않은 자취방에 처박혔다.
또다시 울리는 굉음과 진동으로 아파트가 부르르 떨리자 지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으악! 또, 또 무너진다!”
“도망쳐요!”
“신고한 거 맞아? 왜 아무도 안 와?”
아파트 단지 밖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건물을 타고 울리는 가운데, 무덤처럼 덮인 콘크리트 더미를 헤치고 나온 도현은 바닥에 착지한 휘를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뭐지?”
“도깨비감투다. 와? 꼽나?”
뭐가 웃긴지 휘는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어 댔다.
“이 삭막한 새끼. 진짜 모르나? 마, 고마 째려봐라. 눈빛으로 찢어 죽일라카네.”
그렇게 투덜대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휘는 아무렇지 않게 허공에 손을 찔러 넣어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곰방대 끝, 대통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가 꺼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쓰읍, 하고 머금은 연기를 뿜어낸 휘는 희미하게 빛을 뿜는 별들을 보며 말했다.
“옛날에는 초롱초롱하게 박혀서 꽤 볼만했는데, 인제는 깜깜하기만 하네.”
“늙은 거 아니까, 본론만 말해. 신을 넘긴다니, 무슨 말이야?”
“딴말 아니다. 빈말도 아니고.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니가-”
“내가 죽는다는 말은 들었지.”
휘가 호오, 감탄하며 물었다.
“누가?”
“사가. 아, 이쪽 이름으론 린 아니사던가?”
“아, 그 새침떼기 가시나? 가도 쫌 이상타 했더니, 제브라드 가시나랑 같은 차원인가베.”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휘가 다시 곰방대를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근데 닌 가능하다.”
“내가? 왜?”
“500년.”
500년?
“사람이 그만큼 살 수 있다 보나?”
“살 수 없는 건가?”
“미친다.”
아까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말하고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어- 그러니까, 육신만 남고 혼은 녹아 버리는 거다. 구멍 숭숭 뚫린 치즈 있다 아이가.”
갑자기 등이 서늘해졌다. 믿지는 않지만 찜찜한 건 같다.
도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휘에게 말려 이야기가 계속 딴 곳으로 새 버린다. 도현은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뗐다.
“난 신에 관심 없어. 이미 제브라드에게 휘말려 그 차원의 신이 되긴 했지만, 더는 질색이야. 겨우 돌아왔…….”
“어? 신이 됐다고? 신이라고? 진짜가?”
깜짝 놀란 휘가 허둥지둥 일어나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뚫어져라 얼굴과 몸을 살피더니 인상을 구겼다.
“니 도대체 뭐꼬? 뭐 하는 놈이고?”
도현도 구긴 얼굴로 아니꼽게 말했다.
“알아듣게 말해. 그 사투리도 귀 따가우니까 그만하고.”
“잘 알아들으면서, 뭘. 니가 제브라드 가시나 차원의 신이 됐다고 했나?”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새끼, 버릇은 죽 쒀서 개한테 줬나……. 아무튼 간에 그게 사실이면 더 희한하네. 내가 볼 땐 닌 신이 아니거든.”
“무슨 개소리야?”
“그니까,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나 해쌌고, 미친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하나 걸리는 게 있네.”
“걸리는 거?”
“니 차원 하나 있제? 농장이랬나? 임혜정 씨… 뭐시기 랜드? 그거 말이다.”
“어.”
휘는 오른손으로 턱을 쓸더니 다시 곰방대를 깊게 빨았다.
“아무래도 그 차원에 뭔가 있는 것 같다. 내도 임혜정 씨 아니었으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대체 무슨 소린지.”
“아새끼 귀먹었나. 지구에 있는 모든 신들도 니한테 그 농장 차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지금이야 알지마는.”
모른다?
밝히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니, 내가 신이란 것도 모르겠다고 했어.’
거기다 지금에서야 알게 됐다?
답은 휘의 입에서 나왔다.
“임혜정 씨 그… 뭐시기 랜드. 고거 때문에 알려졌지.”
그 말을 듣자 도현의 머릿속에 미국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외눈박이가 숨은 것도 그것 때문이다. 무서워서.”
“무섭다고?”
휘는 의자에 앉듯 허공에 몸을 띄워 다리를 꼬았다. 다시 하늘을 보더니 연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신이란 건 거창해 보이지만, 딱 깨놓고 말하자면 농사로 밥 빌어먹고 사는 농부이기도 하고, 가축을 기르는 주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도둑이 들면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니는 어떻노?”
“도둑이 들 수 없다?”
“하 참, 도둑이라 했다고 지도 도둑이라네. 아무튼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니 침입 자체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어떻게 없애겠노?”
도현이 비웃었다.
“이미 들어간 놈들을 매수하는 방법도 있잖아.”
“니 바보가?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니까?”
눈을 깜빡이던 도현은 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해 봤구나.”
“크흐흐흠.”
휘가 도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언제?”
“으흐흠.”
“말하지?”
“…안 때린다면.”
“신이라면서 그러고 싶어?”
“나이 들어 봐라. 안 쑤신 데가 없다.”
도현은 어이가 없어 한참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휘는 입을 달싹거리며 뜸을 들이더니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임혜정 씨… 우왁!”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휘를 발로 까 버렸다. 하지만 날쌔게 피한 휘는 한참 높은 허공에서 부러진 곰방대를 보며 투덜댔다.
“아이고, 내 곰방대! 인마! 니는 남아일언 중천금도 모르나?”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엔 남아일언 풍선껌이라 하더라고.”
“허…….”
곰방대가 흐릿하게 사라지자 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팩 돌렸다.
“말 안 할란다. 무슨 입만 뻥끗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런 휘를 무시하고 도현이 물었다.
“블랙홀 랜드 때문이지? 격 대신 생명을 소모한다던데.”
“보나 마나 그 가시나가 그랬제?”
“그럼 누가 말해 줬겠어?”
“그래, 그렇지. 이기적인 건지, 멍청한 건지. 맞는 말이긴 하다. 내도 그런 줄 알았으니까.”
“어?”
씩 웃은 휘가 배부른 호랑이처럼 다시 허공에 비스듬히 누워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래서 임혜정 씨를 대리자로 두려고 했지. 말은 쉬워도 진짜, 진짜 고민했다.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근데 안 되더라. 그리고 상태를 보니까 전혀 문제도 없고. 그래도 혹시 몰라서 임시방편으로 계약만 해 뒀다.”
“하…….”
도현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휘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그래, 그 맘 안다. 그 가시나가 문제다. 일은 일대로 꼬아 놓고 지 혼자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뭐가 제대로 될 수가 있나? 그렇다고 봉변당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주변 사람이 돌아삐는 거지. 웃긴 건, 지는 모르드라.”
물 먹은 수건을 짜듯 뇌가 조이는 느낌이었다.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도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휘, 혹시 제브라드 봤어?”
“그 가시나? 아니, 한 200년 전에 보고 못 봤는데? 뭐, 설마 아직 살아 있나? 아닌데? 니가 그 차원 신이 됐다면서? 그럼 죽은 건데?”
휘가 현재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도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제브라드, 너 참 대단하다.’
휘는 허공에서 다급하게 내려와 도현을 졸랐다.
“와? 무슨 일인데? 말 쫌 해 봐라!”
간단하게 설명하자 휘도 좀 전의 도현처럼 허허 웃어 댔다.
“진짜 대단하네. 아니, 그 차원이 대단한 건지, 마법? 신성력? 그게 대단한 건지. 허, 참. 그럼 니는 우짤라꼬?”
“우선은 미국 상황 좀 보고 올까 하는데.”
“음, 뭐 니는 괜찮을 거다.”
사가와는 다른 반응에 도현은 의아했다.
“괜찮다고?”
“어. 니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내밖에 없으니까.”
“설마?”
휘가 턱을 삐딱하게 치켜들며 씩 웃었다.
“그래, 내가 쫌 했지.”
도현도 픽 웃었다.
“그건 고맙네.”
“고맙네? 말만?”
말없이 쳐다보자, 휘는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농장이 뭐 하는 덴지 궁금하다~ 궁금해~ 린 그 가시나도 들라닥날라닥하는데~”
도현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사가는 내 펫인데?”
그러자 휘가 입을 쩍 벌리며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