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 대책 (4)
도깨비 신, 휘를 소개해 줄까 하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도현은 빠르게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치에샤를 소환했다. 하지만 도현 앞에 나타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농장의 모든 이를 부를 수 있는 신의 힘인데, 소환이 안 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더 화가 났다.
“날 가지고 놀아?”
이를 빠득빠득 갈며 치에샤와 관련 있는 이들 모두를 소환했다.
“이놈아, 한창 사냥 중인데 왜 부르고 난리인 게냐!”
캭캭대는 사가와,
“엥? 도련님? 소인 부르셨슴까요?”
토토와 함께 있었는지 검댕으로 떡칠한 채 뜨거운 열기를 뿜는 모르달과,
“여, 왜 불렀어? 그렇지 않아도 한잔하자고 할랬더니.”
손에 쥔 술병을 흔드는 에놀드까지.
전부 모르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도현 님! 여기 도현 님의 충실한 종, 미도론이 신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바닥을 다 닦을 기세로 부복하는 미도론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담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아…….”
이것들, 연기하는 거 아니지?
괜한 의심까지 들자 뭣 하는 짓인가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제브라드!’
깊게 생각에 잠기자 한밤중에 불려 온 넷, 아니 펫 둘과 에놀드는 심각해졌다.
미도론은 도현이 다시 입을 뗄 때까지 돌처럼 경건히 기다릴 모습이었고…….
에놀드가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도현은 두 눈덩이를 꾹꾹 눌렀다.
“…치에샤 어디 있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모두 왜 자신들에게 묻느냐는 눈치다.
“치에샤 걔는 대체 뭐야?”
이를 갈며 기가 차서 묻자, 표정이 이상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모르달이었다.
“도련님, 그분이 누굼까요?”
“뭐?”
사가가 말했다.
“농장 순례한다더니 그때 알게 된 인간인 게냐?”
에놀드가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혹시 그거냐? 한국말로 썸?”
장난스럽게 ‘내 거 아닌 내 것 같은 너?’라며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미도론을 봤다.
미도론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반려를 맞이하시는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도현 님!”
도현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모두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먼저 사가를 찾아갔다.
키리카를 풀어 둔 강 주변에 앉아 있던 사가는 옆에 앉은 도현의 눈치를 봤다.
최근 사고를 많이 친 탓이었다.
“사가, 회의 때 부른 거 기억나? 미국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던 사가는 고양이 얼굴로 인상을 팍 썼다.
“설마 이 몸이 치매라도 왔다고 생각하는 게냐? 이젠 깽판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 한다, 이놈아!”
말을 하고 보니 그때 생각이 난 건지 사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그 전에 제브라드 차원에 갔던 건?”
“커, 커흠… 괜히 내가 노파심에 갔다가 모르달 그놈이 사고만 치고……. 그래서 사과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넘기기로 했으면 좀 들추지 말 거라, 이 썩을 놈아!”
전에 들었던 말과 썩 다르지는 않은데 뒤통수가 싸해졌다.
도현은 가라앉은 눈으로 좀 더 명확하게 물었다.
“…제브라드는?”
“하아… 도현아, 대체 왜 이러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그러니까, 제브라드는!”
집요하게 묻는 모습에 사가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헤집는 말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영면에 드셨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알아들을 테냐! 찾! 지! 못! 했! 다! 고! 말하지 않았느냐!”
도현의 눈이 커졌다.
뭔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도현은 벌떡 일어났다. 사가는 털을 바짝 세우며 거리를 벌렸다. 순간 도현의 몸에서 뻗어 나온 살기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굳은 도현을 보고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뭐, 뭔가 터졌다!’
심각해진 사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이놈아, 왜 그러냐? 무슨 일인 게야? 말이라도 좀……!”
사가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있어야 할 도현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도현이 두 번째로 찾아간 사람은 미도론이었다.
농장과 차원이 동화되고 미도론은 아도노스 제국의 우도현교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첫 번째 대신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100평에 가까운 타운하우스 하나를 통째로 쓰는 미도론은, 최근 블랙홀 랜드에서 제공받아 꾸민 거실에서 300인치는 될 것 같은 TV로 도현이 헌팅했었던 인어의 메아리 워프 동영상을 시청 중이었다.
고급 카펫이 깔린 바닥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아 눈물을 찍어 내며 ‘도현 님’을 중얼거리는 모습에 조용히 나타난 도현은 그 모습을 보고 되돌아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도론.”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미도론은 재깍 바닥에 부복했다.
“예, 신이시여! 신명을 받들 준비가 되었나이다!”
너무 격한 반응에 말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함께 지냈다던 여자아이…….”
“아… 이 미천한 종의 하소연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시는 겁니까? 크흡…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따뜻하시고 자애로우시며 사소한 것조차 가벼이 여기지 않으시는 품성은…….”
***
도현은 현실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아…….”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거실. 그 적막감만 감도는 곳에서 멍하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달이 사라지고, 흐릿한 별빛이 전부인 밤하늘은 자신의 머릿속처럼 답답했다.
도현은 조금 전 미도론과 나눈 이야기를 회상했다.
‘제브라드교의 성녀입니다. 16세에 목숨을 잃는 건 순례라고도 하지요. 다만, 마지막 성녀였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겨우겨우 말을 잘라 가며 치에샤를 알아내는 데 30분.
마지막으로 찾아간 건 엄마였다.
예상대로 불과 한 시간 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엄마조차 치에샤를 기억하지 못했다.
“씨발… 장난해?”
헛웃음이 났다.
과거만 몇천 번 반복하더니, 이제는 현재도 꼬아 조작할 능력이라도 생기셨나?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의심하고 자백을 받아 냈어야 했던 걸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그녀가 한 노력이 결국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을 동정했던 게 잘못일까?
“무슨 뒤통수를 준비하려고?”
도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쨌든 결과는 하나다.
허탕. 그리고 치에샤는 어디에도 없다는 확인.
정확히는 도현의 눈이 닿는 곳에는 치에샤란 인간은 없다.
그래서 현실로 왔다.
해결책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는 필요했으니까.
도현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주방을 향해 말했다.
“휘,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주방 옆 식탁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일어나 거실로 걸어 나왔다.
“잘 지냈나?”
거리를 두고 소파 끝에 앉는 휘를 말없이 쳐다봤다.
“복잡하제?”
슬쩍 웃는 얼굴이 얄밉게도 답답한 가슴을 툭툭 쳐 댔다.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내뱉는데 그게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직설적인 동네 형 같달까.
“그 가시나는 왜 그런다는데? 주위 사람들 다 피곤하게.”
두서없이 나온 말이지만 누굴 말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니도 참 고생이다. 괜히 휘말려서는. 뭐, 내도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같은 처지라는 말에 도현의 입술이 비틀리며 조소가 흘렀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란 건 안다.
휘에게서 풍기는 분노는 자신과 같았으니까.
눈앞에 제브라드가 나타나기만 하면 찢어 버리는 거로 끝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그래 봤자 해결되는 건 없을 테고.’
그래서 더 짜증이 끓었다.
제브라드가 수습해 보려고 움직일 때마다 일은 계속 꼬여 가는 느낌이다.
‘그냥 인간이 됐으면 포기란 것도 좀 알 것이지.’
이래서 신이란 놈들이 싫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니까.
아무리 말을 해 봤자 들어 처먹질 않는다.
하아.
그냥 미국에 쳐들어가?
머리를 빠릿빠릿하게 굴려 봤자, 힘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니까.
그 대갈통을 박살 내 버리고 싶다. 시원하게! 통쾌하게!
‘지구만 아니었어도.’
지킬 게 있으니까.
‘아, 짜증 나.’
절로 이가 갈렸다.
도현은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휘를 봤다.
무척 평범한 인상이었다. 말끔하게 입은 면바지에 무지 반팔 티셔츠. 좀 깔끔한 동네 백수의 모습이랄까.
뭐, 머리는 새 둥지처럼 너저분했지만.
피곤에 전 눈 아래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사가에게 듣기로 신들끼리도 경쟁 중이라던데, 이놈은 뭘 하는 놈일까?
제브라드의 사고 뒷수습? 아니면 엄마와 블랙홀 랜드 합작?
이렇든 저렇든 고생한 기색이 역력한 건 좀 안타까워 보이긴 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실소가 나왔다. 동시에 묻고 싶은 말이 한가득 떠올랐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 봤자 속만 더 끓을 테니까.
그런 마음을 읽은 걸까, 살짝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라.”
“지구 신이라던데.”
기다렸다는 듯이 물음이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관리자다. 땅따먹기 하는 새끼들 감시하고 있지. 괜히 나서 가지고 늘 이 꼬라지다.”
휘는 자신의 다크서클을 검지로 가리키며 킬킬댔다.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이놈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관리자? 감시?”
“심판이라면 이해하겠나? 이쪽도 규칙이란 게 있거든.”
어? 사가가… 지구의 신은 도깨비랬는데……?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쪽이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 적당히 사실만 알려 준 거지.
그렇다는 건…….
도현의 눈이 가라앉았다. 자연스레 나오는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목적이 뭐야?”
“내 말이가? 아니면 땅따먹기 하는 새끼들?”
“전부.”
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 딱히 없다. 그 새끼들이야 뻔한 거고.”
하, 기가 찼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휘가 똑바로 바라보더니 피식 웃는다. 조롱이라기보단 공허했다.
“왜? 니 주까?”
“뭐?”
“지구 신 자리, 니 주까? 니가 신 할래?”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신을 모두 없애야만 하는-
잠깐, 신을 모두 없애……?
‘그건… 내 생각이었지.’
그랬다. 세상이 바뀐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게 만든 놈들이 따로 있었다는 걸 알았고,
‘다 없애면 끝이라 생각했지.’
단순한 화풀이였다.
애초에 해결책이란 걸 생각지도 않은 화풀이.
그러면서 자신은 그걸 해결책이라고 잘도 지껄이고 다녔다.
왜냐고? 그렇게 500년 동안 살았으니까. 다 해결되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일을 저지르는 놈이 따로 있고 수습은 자신이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나서기엔 뒤통수 맞을 일이 너무 많다.
누구나 한둘씩 갖고 있지만 자신만큼은 없었던 것, 약점.
‘손발이 묶인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불쑥불쑥 치솟는 짜증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에 열이 차올랐다. 없애는 게 해결책이 아닌 걸 알았음에도 몸과 마음은 이미 이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대상자를 찾고 있었다.
‘잘하는 거 있잖아? 깽판. 미국을 날려 버려.’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홀린 듯 몸이 달아올랐다. 몸은 이미 미국을 뒤엎고 외눈박이 놈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짓밟은 뒤 던져 버리고 찾아온 쾌감에 젖은 듯했다.
‘그래, 치러 간다.’
신이고 나발이고 뒤는 모르겠고.
벌떡 일어나자 휘가 배를 잡고 웃었다.
“왜? 미국 지울라고? 하, 니도 골 때리는 새끼네. 하기야 500년이나 살았는데, 제정신이면…….”
불을 뿜듯 눈을 번뜩인 도현은 휘의 목을 잡음과 동시에 벽에 처박았다.
쾅!
“죽고 싶으면 무슨 말인들 못해.”
커억, 신음을 토한 휘가 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제 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네.”
즐겁다는 듯이, 속 시원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