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 대책 (3)
“미국 정보 입수팀은 대충 끝났고…….”
이오르에게 박길을 맡기고 나온 도현은 눈앞의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블랙홀 랜드로 이어지는 푸른 포탈. 텔레포트 마법진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워프와 비슷하려나.
도현이 국내 워프를 털었던 그날, 블랙홀 본사에도 블랙홀 팜이라는 사업 계획을 던졌고 이후로 오제아에게 보고만 들었지 실제로 가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넓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농장과 이어진 포탈을 타고 블랙홀 랜드로 넘어오자마자 느껴지는 대지의 크기에 혀를 내둘렀다. 적어도 중국을 가볍게 넘기는 수준이다.
그중에 개발된 이곳의 크기는 대한민국의 3분의 1쯤.
블랙홀 랜드의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반년쯤일 텐데, 벌써 이만큼이나 발전했다니.
속도 하나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동서남북으로 가른 블랙홀 랜드는 각 방향마다 테마가 달랐다. 도착한 이 도심은 서양 테마.
지구의 다양한 사람들을 받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서양식 건축물 사이로 한국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온 듯한 느낌이었다.
번화가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마치 세상이 바뀌기 전 일상으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왜 블랙홀 랜드를 유토피아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기와 질투, 부러움이 크겠지만 박탈감을 느낀 거겠지.
‘그저 헌터들의 생계를 농장으로 옮길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완전히 의도한 방향은 아니지만, 문제점은 차츰 보완해 가면 된다. 하지만 이걸 특권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관건이다.
신을 정리하기 전에 지구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일단 오늘은 잊자.’
도현은 빠르게 블랙홀 랜드 중심부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 시가지가 사라지고 큰 저택 형태들의 주거지를 넘자 절벽을 갖다 놓은 듯 높고 두꺼운 벽이 나타났다.
“이 안쪽이 블랙홀 시티라고 했던가?”
제일 만만한 이오르에게 블랙홀 랜드에 관해 물어봤다.
최근에 블랙홀 랜드를 자주 오가기도 했고, 그나마 주변인들 중에 제일 덜 바쁜 녀석이니까.
생각보다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들으면서 더더욱 발을 들이기 싫어지는 곳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는 없고.”
도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동서남북으로 뚫린 외성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한낮이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현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가자 새카만 빌딩들이 산처럼 즐비해 있었다.
이곳이 블랙홀 랜드를 통치하는 블랙홀 시티였다.
주민과 여행객들에게 왕성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블랙홀 랜드에 오면 꼭 한 번 들러야 할 명소란다.
도현은 블랙홀 시티를 보고 혀를 찼다.
서울시를 통째로 옮긴 듯한 크기.
넓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면 넓은 게 아니라 차가 없으면 걷다가 하루가 다 갈 지경이었다.
“어디 보자. 저 건물인가?”
남쪽에 위치한 제일 높은 건물을 확인하자마자 하늘을 날았다.
건물 입구에 착지한 도현은 익숙하게 1층 로비의 안내 데스크로 직행했다.
숨겼던 기척을 드러내며 물어보려는데, 여직원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목례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님.”
황태자……?
생각지도 않은 말에 굳어 버린 도현은 그제야 이오르가 킬킬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미있을 거라고~’
설마 이게?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로비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제자리에 멈춰 도현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님!”
“황태자님, TV에서 많이 뵙고 있습니다!”
“잘생기셨어요! 황태자님!”
“너무 멋지세요! 황태자님!”
황태자, 황태자, 황태자…….
인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모두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권력자를 지칭하는 의미라기보다 우리 안의 원숭이를 부르는 느낌이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
엄청난 갈등이 번뇌처럼 일었다. 잠깐의 망설임 사이에 처음 인사를 했던 여직원이 데스크 밖으로 나와 안내를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회장님과 대표님의 집무실로 향하는 직행 포탈이 있습니다.”
여직원은 앞을 막은 유리문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마법진이 짧게 빛을 내고 사라지더니 문이 열렸다.
문밖에서 볼 때와 달리 5평 남짓한 공간 중앙의 바닥엔 익숙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 중앙에 올라가 주십시오.”
그녀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그 빛에 따라 마법진이 낮게 공명했다.
현대와 마법이 함께 공존하는 이 이질감.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 무엇보다 탁월하지만, 반대로 그 이질감 때문에 지극히 현실이라는 걸 깨닫자 아이러니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여직원의 모습이 밝은 빛에 가렸다.
도현이 블랙홀 시티를 찾은 건 딱히 큰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거주지를 이곳으로 완전히 옮겨 버렸기 때문.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지구의 시간으로 3일 전, 이오르가 일본에 다녀온 일로 회의를 가졌던 그날이었다.
이오르와 마리나스, 세자나스가 일본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제브라드 차원이 농장에 잘 정착했는지 농장 전체를 둘러보느라 다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고작 변명이 바빠서라니.’
궁색한 변명이긴 했다.
매번 먼저 찾아와 회의를 끝내고 나면 헤어지는 인사처럼 밥 한 끼 하자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왜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는…….’
타의로 독립한 이후 하루가 멀다고 울려 대던 휴대폰이 화근이었다.
집착인지 걱정인지 모를 그 일방적인 소통에 진절머리가 났고, 때마침 모르달이 나타났었다.
어느 순간 부모님의 전화는 모르달이 담당했고,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에 일곱 신의 정보와 요리에 취미를 들여 헌터로 활동하게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도 있다.
익숙하지 않다는 게 제일 큰 변명이랄까.
제브라드 차원에서의 500년이란 세월이 몸에 배다 못해 뼛속까지 들어찼는데, 겨우 19년의 대한민국 정서가 몸에 익을 리 있나.
‘아무튼, 귀찮아.’
도착한 공간은 1층 여직원이 소개해 주었던 곳과 비슷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님. 이쪽입니다.”
이번에는 남자 직원이 인사를 올리며 앞장섰다.
1층에 비해 거리는 짧았다. 그만큼 집무실로 쓴다는 공간이 엄청 너른 거겠지.
문 앞에 선 남자 직원이 노크했다.
작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어머, 이게 누구셔?”
“훤칠한 사내로군. 누굴 찾아왔나?”
한창 서류를 들여다보던 부모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게 맞네.’
거주지를 여기로 옮긴 이유 말이다.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번만큼은 도현의 잘못이 맞았다.
도현은 직원들이 했던 인사처럼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잘못을 빌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무슨 일로?”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묻는 엄마. 분위기로 봐선 화기애애했지만, 직감으론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어쩌지…….’
도현은 심각했다.
머리를 제아무리 굴려 봐도 답이 안 나왔다. 녹이 슨 게 아니라 이쪽 기능이 아예 상실된 느낌.
눈치를 알아챘는지,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탄식했다.
“역시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어? 아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엄마의 얼굴이 아빠를 향해 홱 하고 돌아갔다. 아빠가 크게 움찔거렸다.
엄마의 옆모습을 보니,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드래곤 피어 못지않았다.
아빠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시정하겠습니다!”
“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의자에 앉은 아빠는 보던 서류에 얼굴을 묻었다.
비록 아빠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지만, 집안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으로서 아주 탁월한 처신임은 분명했다.
고개를 돌린 엄마가 물었다.
“그런데 웬일?”
“…그냥.”
“생존 신고 안 해도 잘 알고 있어. TV에서 얼마나 나오는지, 이젠 TV가 더 아들 같아.”
하… 뒤끝이라 해야 할지, 쌓은 마일리지 폭탄이라 해야 할지.
이게 뭐라고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아빠를 슬쩍 보니 단어까지 분해하려는지 부릅뜬 눈이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인제 보니 슬쩍 서류로 날 가리는 것 같은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목이 타들어 갔다.
정말 아군은 어디에도 없는 건가……?
그렇게 백기를 들려고 했을 때, 생각지도 않은 동아줄이 뒤에서 나타났다.
문이 벌컥 열리고,
“큰엄마! 큰아빠! 저 왔… 어? 싸… 도현이?”
하찌롱이 등장했다.
“큰엄마, 큰아빠 보러 왔어?”
하지현은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익숙하게 들어와 너른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음, 차라리 외동아들이 아니라 외동딸이라고 하는 게 나을 정도네.
다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머, 도현아.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도현의 작은엄마, 하미인은 곱게 눈을 휘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현의 결혼식장에서 봤던 게 마지막이었던 탓에 도현은 상황도 잊고 반갑게 맞이했다.
“작은엄마, 오랜만에 뵙네요.”
“뭐 해? 하 여사! 도현아, 이리 와서 앉아.”
하지현이 옆 빈자리를 팡팡 쳤다.
“저 기집애가 정말!”
하미인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찌롱이의 등짝을 힘껏 때렸다. 쫙, 찰진 소리가 나며 엄살 가득한 찌롱이의 비명이 집무실에 퍼졌다.
이어 하미인의 잔소리가 폭격기처럼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짓는 엄마의 얼굴이 뭔가 좀 씁쓸해 보였다.
슬쩍 도현에게 시선이 닿더니,
“여보.”
“응?”
“우리도 딸 낳을 걸 그랬나 봐. 관심 하나 없는 저 시커먼 게 뭐가 좋다고.”
푹, 하고 도현의 가슴을 찔렀다.
돌아온 아빠의 대답이 가관이다.
“어, 흠! 아직 늦지 않았어!”
“미쳤어? 곧 50대야! 손주나 봐야지.”
의뭉스러운 아빠의 시선이 도현에게 슬쩍 닿았다 떨어졌다.
“볼 수나 있고?”
“하아…….”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왔다.
어차피 늦은 거 차라리 더 늦게 올걸.
하지현이 벌떡 일어났다.
“다 모였으니까, 가요!”
선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물었다.
“차 서방은?”
“2주째 못 보고 있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딱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의 시선이 도현에게 닿았다 떨어지는 게-
“차 서방은 나라 살리겠다고 그렇게 열심인데.”
엄마의 한 소리가 다시 한 번 가슴을 찔렀다.
아니, 나라고 놀고만 있었나!
이번만큼은 나도 할 말 있다고!
“나도 도왔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덕분에 한국 헌터 협회가 총본부가 되고 차 서방은 하루가 멀다고 뒷수습 중이지.”
“아무리 바빠도 1주일에 한 번은 본 것 같은데, 2주는 너무 심했다.”
2주? 현실 시간이 아니라 여기 시간으로 말하는 거겠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엄마, 아빠의 연계 공격으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신경 쓸게…….”
“흐음~”
엄마의 못 믿겠다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건 다름 아닌 하미인이었다.
“형님, 도현이 저러다 두 번 다시 안 오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농장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잖아요.”
어? 작은엄마가 어떻게 알지?
“하 여사가 블랙홀 랜드에서 농장 담당하셔.”
하지현의 첨언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어머니상. 그러니 작은아빠가 찌롱이 성도 작은엄마 성을 따랐겠지.
“이 기집애가 엄마보고 계속 하 여사라 할 거야?”
다시 이어지는 등짝 스매싱을 보고 도현은 생각을 수정했다.
엄마는 엄마다.
아빠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이러다 뮤지컬 늦겠다. 빨리 가자.”
뮤지컬?
갑자기 네 사람의 시선이 도현에게 꽂혔다.
하지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웃는데 찡그리는, 그러면서도 뭔가 모를 기대감까지 서려 있다.
헤, 벌어지는 하지현의 입에서 찝찝한 말이 튀어나왔다.
“음, 보면 재미있을지도?”
뭔가 날짜를 잘못 맞춘 것 같은데……?
***
블랙홀 랜드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국과 달리 푸른색의 달이지만, 달을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밤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달을 보며 밤의 축제를 즐긴다.
그런 시원한 달을 조용히 볼 수 있는 명당, 부모님의 집무실에 도현과 엄마, 임혜정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도현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녁까지 부모님과 함께 있을 생각이었지만, 이런 일과를 보낼 줄이야…….
“요즘 뮤지컬은 죄다 헌터가 주인공이야?”
한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마주 앉은 엄마가 낮게 웃었다.
“차라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엄마, 아빠 보러 가는데 무슨 연락까지 하고 갈 생각을 하겠나.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대답이 없자 엄마의 뮤지컬 평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엄마는 관객이니까 그렇지, 당사자가 보기엔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라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속내를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얼마나 됐다고 베이징 사건이 뮤지컬이 돼……?”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가 풋 하고 웃었다.
“뮤지컬 중에 인기도 1위인데? 늘 만석이야.”
‘VVIP석은 예외지만.’이라는 말이 덧붙었다.
도현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부정을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든 손해니까.
엄마가 물었다.
“왜 따로 보자고 했어?”
바로 본론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난감할지 몰라도, 도현은 차라리 이게 편했다.
치솟던 화가 푹 하고 꺼졌다. 평소와 같은 엄마의 얼굴인데, 오늘따라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다.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어렵게 뗐다.
“왜 숨겼어?”
“뭘?”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인상을 좁히며 투덜대듯 툭 던졌다.
“휘.”
“치에샤 씨가 그러든?”
빙그레 웃는 얼굴이 음, 방금까지 가벼웠다면 지금은 정말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우리 아들, 뭐가 그렇게 기분 나빠?”
우쭈쭈 달래는 투다. 무슨 10살짜리 애도 아니고.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아니면 누가 우리 아들 짐 좀 덜어 주겠어?”
그 한마디에 가라앉았던 분노가 배로 치솟았다.
“짐을 덜어 줘? 내가 부탁했어? 왜 부탁하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건데? 그것도 수명까지 갉아먹으면서!”
엄마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얘는? 엄만 내일모레면 오십이야. 살 만큼 살았어. 가진 게 돈밖에 없는데, 잘난 아들은 돈도 필요 없지, 얼마나 잘났는지 가만히 놔둬도 다 잘해. 뭘 해 주고 싶어도 얼마나 바쁜지 얼굴 보기도 힘들고. 남은 건 늙은, 이 몸뚱이밖에 더 있니?”
반 농담, 반 진담 같은 가벼운 모습에 도현은 저도 모르게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아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말없이 쳐다본다. 그 시선이 너무나도 따스해서, 더없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조건 없는 애정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래, 왜 잊고 있었을까.
이 사랑이 고파서, 이 따스함이 그리워서, 그래서 돌아오려고 했던 건데.
엄마가 해사하게 웃었다. 다 안다는 듯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도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엄마야. 그러니까 부모고.”
말문이 턱 막히며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 고요 속에서 시간이 흘렀을 때,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딱히 수명이 줄지는 않았는데?”
어……?
분명 치에샤가 격을 대신하는 건 수명밖에 없다고 했는데?
멍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자 풋 하고 웃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두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치에샤 씨가 나빴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