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 대책 (2)
재우는 작게 심호흡하며 배구공을 잡듯 양손을 펼쳤다.
우웅, 하는 낮은 울림과 함께 짙은 푸른빛의 마나가 손바닥이 마주한 중앙에 응집하기 시작했다.
콩알만 한 크기가 점점 몸집을 불려 가며 주먹만큼 커졌을 때, 빚어지는 반죽처럼 쭉 늘어났다.
“워터 애로우!”
마법 이름을 외치며 양손을 앞으로 뻗자, 물처럼 일렁이는 50센티미터의 화살 10발이 쏜살같이 날아가 몇백 년 묵은 나무에 박혔다.
퍼버벅- 콰앙!
습기를 머금은 나뭇조각과 흙이 허공에 비산했다.
폭발의 여파로 놀란 짐승들이 허겁지겁 더 깊은 숲으로 대피한다. 양떼구름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새들과 몬스터들도 숲 여기저기로 피신했다.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재우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반쯤 꺾인 나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 뭐냐?”
팔짱을 낀 채 옆에서 지켜보던 이오르가 뚱한 얼굴로 재우를 흘겼다.
“다, 다시 할까요?”
야단맞았다고 생각한 재우가 다급히 캐스팅을 시작했지만, 이오르가 손을 한 번 휘젓자 모여들던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재우는 현재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이오르가 한 행동은 무척 간단해 보였지만,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오히려 역으로 마나가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헌터들은 다 너처럼 그러냐?”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 재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3일 만에 공용어를 떼더니 바로 3서클까지 올라서냐고! 그러면서 힘든 기색은 하나도 없어!”
‘어, 어려운 건가?’
재우는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공부를 잘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용어라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학생 때 필수이자 제일 쉬운 것이 암기이니까.
오죽하면 암기를 패시브로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암기력은 대단했다.
한글을 시작한다는 6살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만 해도 13년, 대학교까지 하면 17년. 암기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다.
이 정도면 삶의 동반자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암기. 거기에 제1외국어인 중국어에 취미로 배우는 외국어까지 하면 최소 2개.
왜 영어가 없냐고? 당연하니까. 이젠 모국어로 친다.
아무튼 그 험난한 학생을 졸업했던 재우에게 공용어가 어려울 턱이 있나.
처음부터 공용어에 거부감이 없기도 했고.
‘…거부감이라기보단 친숙하게 술술 읽혔지?’
그래, 그랬지. 꼭 한글을 새로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야, 말이라도 좀 하라고!”
정신을 딴 데 팔던 재우는 잔뜩 긴장해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 많이 어려운 건가요?”
“몰라.”
재우는 황당한 대답에 뭔 말인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내가 가르친 인간은 우도현 그 새끼밖에 없으니까.”
“도현 형이요?”
분명 욕이 절반인데, 왜 X알 친구 느낌이지?
의아해하면서도 이때다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현 형도 금방 배웠어요?”
“그러니까 짜증 난다는 거 아냐.”
“얼마나……?”
“한 달.”
한 달?
“6서클을 마스터했지.”
재우는 다시 눈을 끔뻑였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없어서다.
그걸 알아들은 이오르가 픽 웃었다.
“5년.”
“예?”
“네가 6서클이 되려면 최소한 그 정도 걸린다고.”
입이 쩍 벌어졌다.
“아, 아니, 저보고 3서클이라고 하셨…….”
뭘까, 산사태에 파묻힌 것 같은 이 박탈감은?
‘조금 의기양양했는데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것 같은데?’
시무룩해하자 이오르가 비릿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이 녀석 봐라? 너 5년이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지? 헤나지그도 45년을 바쳐서 겨우 5서클이 됐다고. 그런데 고작 5년이야. 너도 미친 속도라고?”
그렇게 칭찬해 줘 봤자 도현 형이라는 산사태에 휘말려 우울하기만 했다. 왜냐면 텔레포트 마법진을-
“뭐, 그래 봤자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리려면 7서클은 돼야 하니까, 한 20년 걸리려나.”
뭐지… 욕하는 걸까, 칭찬하는 걸까?
떨떠름한 얼굴로 슬쩍 쳐다보니 한숨을 푹 내쉰다.
“차라리 검이라도 배우는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냅다 패면 되는데.”
재우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텔레포터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 기색을 알아챈 건지 이오르가 ‘운 좋은 새끼.’라며 쯧, 혀를 찼다.
“그 덩치가 아깝다.”
아쉬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말이지만 재우는 자애롭게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가만, 오늘 과제가 워터 애로우였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인가요?”
눈치를 보며 슬쩍 묻자 이오르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려 숲 한 곳을 응시했다.
저긴 숲 출입구인데?
‘누구라도 오나?’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한 사내가 힘겹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하, 이 새끼야! 뭐 이리 늦어? 죽고 싶어?”
아까는 그나마 좀 투덜대는 수준이더니, 지금은 살기까지 풀풀 풍기는 게 찢어 죽일 기세다.
헉헉대며 나타난 사내는 외국인이었다.
마법을 가르치라며 오제아가 던지고 간 날 피떡이 되어 바닥에서 신음하던 노아 헌터.
‘미국 헌터 1급 노아 이선…….’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안다. 이오르가 주인… 아니, 스승이라는 거.
노아 이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살짝 거칠면서도 고급스러운 공용어였다. 말투만 들어도 몇십 년은 산 것 같은데, 혹시 도현 형처럼 다른 차원에 떨어진 건가?
‘어, 그러고 보니 행방불명된 게……?’
재우는 예전에 도현이 이야기해 주었던 과거를 찬찬히 되짚었다.
다시 집에 돌아온 게 작년 1월쯤.
이야기를 들은 게 중국 가기 전이었으니까 대충 1년 하고도 5개월… 아니, 6개월쯤?
노아 추적꾼이 행방불명됐다는 발표를 들은 게 작년 1월이니……. 설마?
갑자기 등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귀에는 익숙해진 타격음이 BGM처럼 들렸다.
‘또…….’
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 사람, 아니 드래곤은 노아 헌터를 보기만 하면 패지 못해 안달일까?
맞을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가 없다.
한편으론 1급 헌터라는 사람이 저렇게 힘도 못 쓰고 컥컥대는 게, 새삼 드래곤이 얼마나 위대한 생물인지 두렵기까지 했다. 괜히 노아 헌터가 불쌍하다.
‘하, 끝날 때까지 마법이나 더 연습해 볼까.’
어차피 말려 봤자 들리지도 않고, 잘못했다간 자신도 저 꼴 날까 무서우니까.
재우는 없는 사람인 척 몸을 돌렸다.
“이오르 님! 재우도 안녕!”
다시 손을 펼치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등 뒤에 두 사람이 착지했다.
도현의 친우인 김민혁 헌터와 미국에서 교류 헌터로 왔던 아바 헌터였다.
‘이젠 한국인이지만.’
차도식 주석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일주일 전 한국으로 귀화했단다.
“민혁이 형, 아바 누님, 안녕하세요!”
“안녕, 재우 동생!”
재우는 짐짓 쾌활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환상 같은 미모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피처럼 생생한 붉은 눈동자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위험한 걸 아는데도 홀리게 된달까?
그러다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송곳니 한 쌍에 화들짝 놀라 콜록콜록 기침해 댔다.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아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우를 걱정했다.
“어머, 괜찮아? 감기 걸렸어?”
“아, 아, 네네넵! 괘, 괜찮습니다! 후, 후, 훈련받으셔야죠. 전 저쪽에서 마법 연습하겠습니다!”
재우는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며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의아해하던 아바는 손을 흔들고 이오르의 샌드백이 된 민혁에게 다가갔다.
‘휴, 십년감수했네.’
아바의 모습은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전형적인 뱀파이어의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바는 뱀파이어의 정점인 뱀파이어의 여왕.
혹은 진혈의 뱀파이어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4급 헌터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살 떨리는 힘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아직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해 모습이 저렇다는데, 완벽하게 다루면 무시무시하다고.
‘이오르 님도 골치 아플 정도랬으니 사실이겠지.’
듣기론 힘을 다루게 될수록 점차 모습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뭐, 어쨌든 모든 건 민혁이 형이 감당할 일이지.’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돌리던 재우는 우렁찬 아바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곧 다져질 둘을 상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렇게 모두가 숲에 모인 이유는 재우의 마법 숙련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오르의 명령이었다.
저 세 사람을 마음껏 팰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반격조차 못하는 노아 헌터에 비해 두 사람에게는 적당히 전투 상황을 고려한 훈련을 해야 하니까.
‘아, 이럴 게 아니라 피해야겠네.’
아바의 기합 소리가 점점 빨라져서다.
민혁은 주먹 전투를 하니 좁은 공간에서 가능하지만, 아바는 한 번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엄청난 공간을 잡아먹었다.
그 덕에 부수고 태워 먹은 숲만 벌써 5개째.
그래 봤자 하루 만에 복구돼서 표도 안 나지만.
네 사람, 아니 세 사람과 드래곤이 엄지 크기로 보일 만큼 거리를 벌렸다.
‘내가 아무리 헌터 3급 블루가 됐다지만, 여기서는 최고 약골이지.’
저기서 폭발이 터져 휩쓸리면 최소 중상, 전치 6주는 기본으로 깔아야 한다.
‘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그러면 미국까지 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재우는 살짝 혹했지만, 민혁의 주먹을 가볍게 잡은 이오르가 반격으로 그의 얼굴에 사정없이 주먹을 내다 꽂는 모습을 보자 눈에서 땀이 났다.
“그게 공격이냐? XX, 오크도 피하겠다!”
카랑카랑한 한마디, 한마디가 칼이 되어 몸을 푹푹 쑤시는 것 같다.
‘저렇게 처맞는 걸 보면 누가 3급이라 하겠어…….’
오싹오싹 돋는 소름에 재우는 등을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곤 마음을 가라앉히고 500미터쯤 떨어진 왜소한 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번에도 마나를 다 비울 때까지!’
재우가 처음 마법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몸속에 가득 찬 마나를 전부 비우는 일이었다.
서클을 올리는 가장 빠른 방법.
‘하… 그래 봤자 언제 텔레포트 마법진을 그리겠냐.’
솔직한 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게 아니라 쪼개란 소리니까.
재우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작을 안 했으면 몰라도, 이미 발을 들였다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니까.
‘도현 형은 한 달이랬지?’
까짓것 넘어 보지, 뭐!
일단은 그게 목표다!
재우는 공을 잡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양손을 둥글게 펼쳤다.
츠즈즛!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오르의 지도에 따라 물 속성의 화살을 빚어냈다.
‘화살을 최대로 만들면 몇 발이나 나올까?’
처음에 10발을 쏘았던 나무가 떠올랐다.
‘반밖에 꺾지 못했지…….’
재우는 입술을 씹었다. 괜히 욕심이 일었다. 목표물을 굵고 두꺼운 나무로 재설정했다.
‘마나를 전부 소모해서- 잠깐.’
워터 애로우를 왕창 만들려던 손이 멈칫했다.
‘압축하면 어떻게 되지?’
호기심이 생겼다. 사내라면 큰 거 한 방이지!
생각을 바꾸자 양손 안에서 낮고 묵직하게 울던 마나가 찌를 듯 얇게 울어 댔다.
손끝을 타고 팔까지 후들거렸다. 방금까지 흘리지도 않던 땀이 눈꺼풀에 맺혀 눈물샘에 들어갔다.
소금을 때려 부은 듯 따끔거리는 고통에 재우는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까득.
이를 악물며 마나를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그리고 마나의 울음이 들리지 않았을 때,
“워터 애로우!”
5미터의 화살, 아니 작살이 빠르게 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콰직!
“오오!”
재우는 성냥개비처럼 뚝 부러진 나무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거야!’
그런데.
콰직, 콰직, 콰과과- 콰아앙!
“어… 어……?”
처음 쓰러뜨린 나무 뒤로 고속도로가 뚫렸다.
다급하게 달려온 이오르가 큰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야, 너 뭐 했어?”
“어, 저… 그냥 큰 거 한 방…….”
“큰 거 한 방?”
“압축해서 큰 거 한 방…….”
우물거리며 말을 흐리는 재우를 이오르가 미친놈 보듯 했다. 그러고는.
“이 미친 새끼,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욕을 해 대는데 표정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재우는 더없이 불안해졌다.
‘튀, 튀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데 뭔가 등에 턱, 하고 받쳤다.
벽이 있을 리 없는데?
벽이 말했다.
“재능으로 따지면 나는 일반인일걸?”
익숙한 목소리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심드렁한 목소리.
재우는 삐걱대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확인했다.
뒤에는 도현과-
“재우 형… 아, 안녕하세요…….”
판다가 된 좀비, 아니 좀비가 된 판다 박길이 있었다.
“왜……?”
대답은 도현의 입에서 나왔다.
“얘네 체력 훈련 좀 시켜. 미국 가기 전에 뻗겠다.”
“예?”
멍청하게 되묻는데, 짜증 가득한 욕설이 날아왔다.
“씨발, 우도현! 내가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서 얘네 봐주는 줄 알아? 개새끼, 다 니 쫄따구잖아? 니가 돌보라고, 새꺄!”
“아야세 하루카.”
씩씩대던 이오르가 뚝 하고 멈췄다.
“몇 시?”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같은 사내가 들어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부드럽다 못해 감미롭기까지. 재우는 자신도 모르게 이오르를 위아래로 훑었다.
“2시간 뒤.”
“내가 최종 병기로 만들어 주지.”
흐흐흐, 마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 죽을지도 몰라!’
재우는 다급하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몸속은 텅 빈 강정처럼 바람 새는 소리만 들렸다.
‘워터 애로우…….’
괜한 실험 정신에 마나 다 때려 붓고 압축시켰던 좀 전의 자신에게 죽빵을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시에 목덜미를 꽉 붙잡는 악력과 함께 발밑이 허전해졌다.
“가자, 얘들아!”
크하하하, 호탕한 웃음 뒤로 도현의 당부가 이어졌다.
“김치찌개 좋아한다더라.”
누구를 위한 당부인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