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 대책 (1)
회의는 박길이 나간 뒤로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주제가 ‘신’이다 보니, 신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이들이라고 해 봤자 치에샤와 사가밖에 없었고, 그 둘은 계속해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도현이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그놈은 미국에서 안 나올 거고, 가서 치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가는 거로. 그럼 해산.”
헌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에샤와 사가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안 돼요! 안 돼! 그게 그놈의 계획이라구요!”
“안 된다! 그게 문제라고 몇 번을 말했느냐!”
“그러면 어쩌라고?”
치에샤가 한숨처럼 말했다.
“끌어낼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죠.”
“그걸 몰라서 한 시간째 입씨름을 하고 있겠어?”
“그럼 어쩌자구요? 그냥 당신이 쳐들어가서 깽판 치는 걸 응원하라는 건가요? 완전 답정너네?”
헌터들이 불안해하면서도 살짝 속 시원한 듯 감탄했다.
누구 하나 도현의 말에 토를 달았던 적이 있던가? 저렇게 대놓고 앞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의 어머니인 임혜정뿐이다.
모두들 새삼 그녀가 신 출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신이 되는 조건 중에 저 더러운 성격도 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현은 이를 갈며 치에샤를 씹어 먹을 듯 쳐다봤다. 그녀는 그 시선에 코웃음 쳤다.
“누가 그렇게 보면 쫄 줄 아나?”
저놈의 뒤끝!
‘신은 무슨 뒤끝발로 되는 거냐고!’
바닷가에서 바람맞힌 그날 뒤로 계속 저 상태인 걸 보니 뒤끝이 상상 이상이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 외눈박이에게 휘둘려야 한다는 게, 그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깊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테이블 위에 식빵 자세로 앉은 사가에게 물었다.
“사가, 포인트가 뭔지 알려 줘.”
사가는 도현의 무식함을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 전용 상점에서 쓰이는 화폐지. ‘상점 오픈’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면 눈앞에 창이 뜰 게다.”
말대로 창이 떴다. 생김새는 늘 보던 창들과 비슷했다.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자면 낡은 느낌의 창.
겉모습은 그럴지 몰라도 상점 자체는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편의를 제공했다.
최신 상품, 인기 상품, 검색, 분류 등등.
이거 마치…….
“게임 경매장 시스템인데?”
모두가 황당한 눈으로 도현을 봤다. 도현은 눈동자를 굴려 치에샤를 슬쩍 봤다. 예상대로 그녀는 도현을 외면하려는 듯 회의실 전경을 훑고 있었다.
“제브라드, 할 말 없어?”
“전 제브라드가 아니라서.”
진짜 언제까지……!
도현은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며 참았던 화를 터트리려던 순간 멈추었다. 갑자기 목덜미를 타고 뇌를 때리는 생각이 떠올라서다.
‘저 모습이 계획된 거라면?’
불렀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뻗대기만 했다. 거기에 미적지근한 태도.
사가야, 본래 성격인 거고. 애초에 사가는 거짓말을 하고 살 이유가 없던 드래곤이었으니 생각 자체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신이었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치에샤는 다르다.
예전에 신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이니까. 그것도 발가락 때만 한 신성력을 가진 성녀…….
‘어……? 신성력?’
신이 없는데, 신성력?
제브라드는 도현에게 넘어가며 신성력이 사라지고 ‘신성 마나’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신성력?
‘이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데.’
의심을 시작하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계획된 행동으로 재해석되었다.
치에샤를 따라 움직이던 도현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녀의 행동이 살짝 삐거덕거린다.
뭔가 있다. 있는 게 분명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며 심문에 들어가려는데, 헌터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국 말입니다만, 아직 지켜봐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정보를 모아 보는 건 어떻습니까?”
프로페셔널 팀 팀장 서재현이었다.
도현이 치에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
“지금 미국은 막혔다는 말 못 들었어요?”
오제아가 짜증스럽게 지적하자, 서재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들었을 리 없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성으로 확인한 상황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그녀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차원이 농장과 동화되고서 권능이 확장되어 마계와 중간계인 농장, 그리고 천계까지 모두 볼 수 있지만 지구는 다른 차원이다.
도현 때문에 오갈 수는 있다고 해도 권능을 쓸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었고, 도현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이런 회사 잡일을 처리하는 게 다라는 것이 늘 속상했다.
‘편의성만 빼면 인간과 다를 게 없네…….’
도현은 침울해지는 오제아를 슬쩍 보고 서재현에게 물었다.
“방법이 있어?”
두 사람에게 설마, 하는 시선이 모였다.
서재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기대했을 때.
달칵.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 길이 헷갈려서…….”
화장실을 다녀온 박길이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며 들어왔다.
서재현이 그런 박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프로페셔널 팀 네 번째 헌터, 박길입니다.”
의문 가득한 시선이 닿자 한마디 더 보탰다.
“능력에는 능력으로 대처해야죠.”
그제야 이해한 헌터들이 박길을 쳐다봤다.
놀란 박길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자신을 언급한 팀장을 원망했다.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망할 팀장이라며 욕을 하면서도 파악하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불쾌하지 않게 슬쩍 눈치를 보며 귀를 열었지만, 모두 약속이라도 했는지 입을 닫고 자신을 훑기만 했다. 마치 상품을 확인하듯 말이다.
그 강렬한 시선에 긴장감이 바늘이 되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또다시 배가 살살 아파 왔다.
‘아, 씨. 헌팅할 때는 괜찮은데 꼭 회의만 하면…….’
고질병이랄까, 징크스랄까.
꼭 이럴 때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속을 들여다보면 나쁜데, 전체로 보면 오히려 좋은, 그런 일이.
길어진 침묵에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바지에 닦던 박길은 강혁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쓸 만할 것 같긴 한데, 애매하기도 하고.”
뭔가 듣기 찝찝한 첫 평가다.
차도식이 수긍했다.
“능력은 탁월한데, 역시나 약해서…….”
평가에 이어 팩폭이라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현이 무심하게 박길을 보다 강혁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예요?”
“길이랑 재우랑 함께 간다면 미국 정보쯤은 껌값이 아닐까 했지.”
도현의 시선이 재우로 향하자, 흠칫한 재우는 눈으로 강혁을 욕함과 동시에 얼굴이 흙빛이 되어 도리질 쳤다.
“아직 부족한데. 적어도 미국까지 왕복하려면 1급쯤 돼야지.”
재우가 벌떡 일어났다.
“저, 전 빠지겠습니다! 3급으로도 충분해요. 행복합니다! 와하하……!”
냉큼 텔레포트를 썼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주변이 그대로다.
재우가 애절한 얼굴로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는 도현을 바라봤다. 그런 도현을 오제아가 불렀다.
“도현 님, 미국 근처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는 건 어떨까요?”
“텔레포트 마법진이요?”
재우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적극적으로 되물었다.
오제아는 재우를 무시하고 도현에게 말했다.
“캐나다나 멕시코 말이에요. 그러면 저만 움직여도 충분하니까요.”
둘은 자신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듯 적극적으로 눈을 반짝였지만, 도현의 대답은 반대였다.
“안 돼.”
“네?”
“모르겠어? 바로 알아채겠지. 머리 좋은 놈이라면 예상 범위일 수 있어. 그럴 거면 차라리 헌터를 파견하는 쪽이 낫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잖아? 병아리 잡는 데 호랑이 잡는 칼 쓰는 것도 웃기고.”
박길과 재우의 눈은 퀭해졌고, 오제아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밝아졌다.
도현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너처럼 유능하고 똑똑한 비서 겸 이사를 그런 데 쓰는 건 낭비야. 블랙홀 랜드와 조율해서 농장 관리에 신경 써.”
“네, 주인님!”
너무 기쁜 나머지 오제아는 호칭이 바뀌었다는 걸 모르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도 토 달지 않았다. 박길을 제외하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빵끗한 웃음과 달리 확정된 두 사람은 침몰했다.
강혁이 말했다.
“그런데 도현아, 위험하지 않겠냐? 아직 워프 브레이크가 정리된 게 아니니 말이다.”
차도식도 한마디 보탰다.
“위험합니다. 워프 브레이크를 잘 넘긴 곳이라고 해 봤자 처남님이 직접 가셨던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 대부분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하지만 미국 상황을 보니 끊긴 게 아니라 끊은 것 같습니다.”
끊었다, 라.
도현도 생각을 되짚었다.
미국의 상황을 봐서도 그게 맞았다.
‘그러고 보니 국제 헌터 협회에서 그랬었지.’
미국이 캐나다와 멕시코로 워프 브레이크 원정에 나선다고 했었다.
‘점점 영역을 넓혀 가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지금 계획은 실행해 봤자다. 오히려 한국까지 프리패스권을 쥐여 주는 셈.
하지현이 탄식하듯 말했다.
“바다에 워프가 없었으면 배라도 타고 가서 해 보겠는데.”
바다?
“아, 그게 있었지.”
도현에게 모든 이목이 쏠렸다.
“미국 정찰 계획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전담할 헌터는 재우와 길 씨?”
“아, 아닙니다! 총책임자님! 길이라 불러 주십시오!”
“총책임자?”
“그… 전 협회장님께서…….”
강혁이 갑자기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커흐흠, 난 좀 바빠서.”
“…아무튼, 길은 나랑 면담.”
다들 일어서는데 재우가 주먹을 움켜쥐며 ‘앗싸!’를 외쳤다. 면담자에서 제외된 것을 자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우의 생각일 뿐.
도현은 신난 재우의 뒤통수를 보며 오제아에게 일거리를 던져 주었다.
“오제아, 쟤 데리고 이오르에게 다녀와.”
“이오르 님이요?”
“텔레포트 마법진. 배워야지?”
“혀, 혀엉… 저, 저 텔레포터인데요……?”
간절한 얼굴이었지만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엠통 늘리는 건 이오르가 전문이거든. 겸사겸사 마법도 배워 두면 좋지.”
“네, 주인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아!”
“혀어어어엉!”
신난 오제아가 도현을 부르짖는 재우의 목덜미를 잡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박길은 아직 남아 도현과 이야기 중인 치에샤와 사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가가 도현에게 물었다.
“도와줄 건 없느냐?”
“딱히.”
“그나마 쳐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뭐, 성격에 맞진 않지만.”
도현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서 있는 치에샤를 보고 빙긋 웃었다.
“원하는 대로 됐으니, 좋으시겠네?”
“…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리가.”
“아, 아니거든요?”
치에샤가 다시 버럭 화를 냈지만 한 방 먹은 표정은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도현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도현은 그런 치에샤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
도현이 말했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방해는 안 할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너나 나나 신을 없애는 게 목적이잖아? 그러니까 놔두는 거라고.”
“…….”
“하지만 오늘처럼 이러면 두 번은 없어.”
치에샤는 모든 걸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니, 안 궁금해.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무척이나 지친 모습. 낯선 모습이었지만, 눈곱만큼도 동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도현은 급격하게 말을 잃은 치에샤 대신 사가를 보며 밖을 향해 턱짓했다.
“데려가. 난 면담자가 있어서.”
사가는 한숨으로 대답하며 고양이의 모습에서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치에샤를 데리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적막해진 공간.
도현은 아직 뻣뻣하게 서 있는 박길을 향해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