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 준동 (5)
도현이 픽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땅 사겠다는 말은 안 해서 다행이네.”
“땅보다는 놀이동산을 사고 싶어 하셨지만 못 샀다네요.”
도현이 이마를 짚었다.
“하, 차라리 블랙홀 랜드에 가라 그래.”
“그렇지 않아도 복귀하시고 블랙홀 랜드로 바로 가셨어요.”
설마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오르 식당. 2호점을 차릴 생각이신 듯했어요.”
뭐… 그건 그나마 정상적인 행동이네.
“다른 건?”
살짝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오제아가 말했다.
“음… 이번 일본 원정에 도움을 준 아야세 하루카라는 인간이 곤란하게 되었어요.”
“아, 그래서 연락을…….”
차도식이 끼어들었다.
도현이 바라보자 차도식이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오르 님의 헌팅… 아무튼 워프 파괴로 일본이 좀 떠들썩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소문이 좀 이상하게 났습니다.”
“소문이요?”
“그게…….”
차도식이 입을 뻥긋대기만 했다.
오제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오르 님의 연인이 되었죠.”
“큽!”
도현은 생각지도 않은 소문에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웃던 도현이 웃음을 겨우 그치며 물었다.
“왜?”
“음.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원인으로는 이런 영상 때문입니다.”
오제아가 손을 휘젓자 테이블 중앙의 빈 공간에 다시 3D 영상이 생겨났다.
워프를 파괴하는 도중에 놀란 아야세 하루카가 주저앉아 펑펑 울자 이오르가 쩔쩔매며 다독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오르에게 안겨 또 울어 댔다.
“하…….”
도현이 감탄했다.
천하의 이오르가 저런 모습을?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살아남았다 해도 숨만 붙어 있겠지.
다른 의미로 대단한 여자였다.
오제아도 동감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원정이 끝나고 난 뒤예요.”
“혼자 남겨져서?”
“그것도 있지만, 이오르 님이 언제 다시 올지, 아니면 함께 사는 건 아닌지, 그런 화제성 때문에 그 사람 집 주변은 이미 여러 사람들로 바글바글 하다네요.”
“그 정도야 뭐. 무시하면 되지.”
차도식이 볼을 긁적였다.
“그게, 통제가 안 된답니다. 집이 외곽에 있어 인적도 드물고, 침입하는 이들이 대부분 헌터들이라 막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헌터잖아요?”
도현이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묻자 하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보조 계열인 데다 그 사람의 구미… 그러니까, 헌터 회사도 무너졌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헌터라 해도 보조 계열인 데다 그중에서도 제일 약해. 일반인이랑 바를 바가 없다는 거지.”
이어서 차도식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 왔던 연락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납치를 당할 뻔했다더군요. 아무래도 정부의 방관도 문제가……. 음, 오히려 부추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왜요?”
강혁이 쉽게 풀어 주었다.
“워프라는 개목걸이가 사라졌으니, 대체할 게 필요했던 거지.”
“그게 이오르다?”
세 사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도식이 마침표를 찍었다.
“겸사겸사 인질로 주도권도 잡을 생각인 겁니다.”
도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오제아가 말했다.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을 블랙홀 랜드로 받을까 해요.”
신변 보호의 이유도 있겠지만, 미친 파란 도마뱀의 목줄로도 나쁘지 않다.
“블랙홀 랜드에 가게도 낼 거라면 딱이네.”
손님한테 진상 짓 하던 사장이 쩔쩔매는 상상을 해 보니 깨소금보다 고소하다.
도현이 키득거리자 오제아가 다시 회의를 이어 갔다.
“그럼 받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음, 다음 안건인 미국 말인데요.”
“외눈박이 신 놈?”
“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미국의 모든 워프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미국 땅 전체가 막혔습니다.”
헌터 협회 쪽에서도 모르는지, 차도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혔다니요?”
“아마 다른 나라에서도 모를 거라 생각되네요. 말 그대로 돔 형태의 거대한 막이 미국 전체를 감쌌어요.”
도현이 피식 웃었다.
“새끼, 쫄았네.”
쫄아……?
프로페셔널 팀 신입인 박길은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살살 아프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일본이야 틈틈이 휴대폰으로 기사를 읽어 대충이라도 알아들었지, 갑자기 미국으로 흐른 이야기에서 ‘신’이 나오더니 돔 형태의 막이 생겨났다고……?
‘그런데 미국 크기가…….’
면적만 해도 중국과 차이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걸 덮을 정도로 거대한 막이라면…….
상상이 안 된다.
그런데 그걸 쫄았다고 표현하다니.
‘대체 우도현 헌터의 힘은 얼마나 강한 거지?’
헌터 제로, 신이라는 말이 기정사실화된 우도현 헌터에 대해 딱히 알려진 이야기는 없었다.
‘아니, 알려진 건 힘밖에 없지.’
사생활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이상한 말만 가득했다.
제일 큰 일례로는 인어 워프 입구에서 일어났던 ‘모르달 해프닝’으로, 성격이 더럽다는 말이 떠돌긴 했는데 모르달의 호들갑은 호불호가 극명하다 보니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주인으로서 그럴 수 있다는 평이 많았다.
그 외에는 초중고 동창들의 이야기와 한국대학교 헌사과 학생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는데, 꿈쩍 않고 잠만 자도 수석이라든가 귀찮아서 택시 드론을 타고 다닌단다.
실습으로 7등급 늑대 동굴에 갈 때도 청바지에 흰 티셔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갔다나.
공통점으로는 늘 심드렁한 얼굴이라는 것이 다였다.
몇 시간을 공들여 조사했던 박길은 후회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부족한 잠을 잘 것이지…….
꿀렁꿀렁!
‘윽!’
복통이 더 심해졌다.
벌써 회의만 2시간째.
긴장하면 배가 아파 조심하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식은땀 한 방울이 턱을 타고 배를 잡은 손등에 툭 떨어졌다.
‘2시간이면 끝날 때 안 됐나…….’
간절한 시선을 강혁과 차도식 헌터에게 보냈지만, 두 사람은 도현에게 꽂혀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차도식 헌터는 최근 대한민국 대표이자 헌터 협회 총 본부장으로 주석이라 불리는 인간 선상의 헌터인데, 그가 존경과 경외를 담아 우도현 헌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시선이 레이저라면 지구 핵까지 관통하지 않을까?
‘하… 그것보다 이제 한계라고…….’
울고 싶다. 창피를 무릅쓰고 입을 떼려는데, 강혁 옆 푸른 눈에 백발의 사내가 먼저 말했다.
“도현 님,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휘르카랬지……?’
블랙홀 랜드에서 유명한 인물 10위인 인어왕.
왜 인어왕이 천사처럼 흰 날개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프로필이 그랬다.
‘실제 나이 500살 이상에 겉으로는 20대 후반처럼 보인다더니, 부럽… 크읍!’
박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식은땀은 샤워기를 튼 것처럼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도현에게 집중한 이상 박길의 이상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도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전문가를 불러야지.”
“전문가요?”
휘르카가 되묻기 무섭게 도현이 손을 튕기자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은빛 눈동자에 엉덩이를 덮는 은발의 긴 생머리의 여인.
치에샤가 품에 안은 고양이 사가를 쓰다듬으며 두리번거리다 도현을 보고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요?”
도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따라 했다.
“뭐요?”
그러자 그녀 품에 안긴 은빛 고양이가 말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라, 이놈아!”
박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
고양이가 마, 말을 한다?
그러나 다들 대수롭지 않은지 별 반응이 없었다.
도현이 가볍게 말했다.
“미국 워프가 다 사라지고 미국 전체를 덮는 막이 생겼대.”
그게 무슨 말인지 다들 이해 못하는데, 둘은 침음을 삼켰다.
치에샤가 말했다.
“확실히 머리가 좋네요.”
사가가 말을 이었다.
“궁지에 몰린 게지요.”
도현은 감흥 없는 투로 사가에게 물었다.
“뚫고 들어가는 건?”
“들어가서 뭘 할 게냐? 휴레가크를 잡으려고?”
“그럼 좋고.”
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가가 혀를 찼다.
“그렇게 쉽게 잡힐 놈이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치에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도현이 조소했다.
“신이 신을 모른다고? 날아가던 퍼런 도마뱀이 배를 잡고 웃겠네.”
오제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치에샤가 짜증스럽게 이를 갈았다.
“죄송하네요. 전 한낱 인간이라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럼 가 봐도 되죠?”
도현의 얼굴이 구겨지자 이번엔 사가가 큭큭 웃었다.
“대체 그놈이 뭔데 그렇게 조심하라는 거야?”
도현이 뚱하게 묻자 치에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무서운 법이니까요.”
“음.”
“보통 힘이 강하다면 전면전을 펼치죠. 그런데 그럴 힘이 없다면? 숨고 숨어 덫을 놓잖아요.”
덫이란 말에 연구실이자 집을 던전처럼 꾸며 들어오는 이들을 죽여 언데드로 굴리는 족속들이 떠올랐다.
“리치처럼?”
“좀 달라요. 천천히 갉아먹히는 거죠.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도현이 치에샤를 빤히 봤다.
이번엔 치에샤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뭐요?”
“너 솔직히 한국인이지?”
“아니라니까요!”
얼굴이 붉어진 치에샤가 씩씩댔다. 그러든 말든 도현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막을 씌운 이유가 힘을 키우기 위해서다?”
고개를 끄덕인 사가가 덧붙였다.
“제대로 할 생각인 게다. 워프가 사라졌다면 전부 터트렸겠지. 그리고 막으로 씌웠다면 마나는 그곳에 머물 거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현신?”
“그렇죠. 하지만 대항할 힘이 약하니, 미국이라도 확실하게 손에 넣을 생각인 거예요.”
“그러면 뭐가 이득인 건데?”
치에샤와 사가가 동시에 말했다.
“포인트를 얻는다.”
“포인트를 얻죠.”
“포인트?”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에샤가 눈을 깜빡였다.
“설마… 몰라요?”
도현은 눈동자를 굴려 오제아를 봤다. 기대와 달리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사가가 창피한 듯 앞발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저런 머리로 어떻게 검과 마법을 배웠는지 알 수가 없구나.”
진지하게 대화를 지켜보던 차도식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에샤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어요.”
치러 간다고 해 봤자 거리도 멀뿐더러, 갈 수 있는 사람도 도현이 전부다.
혼자 가서 깽판을 친다?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사가가 숨을 훅, 하고 내뱉었다.
“혹시나 혼자 가서 깽판 칠 생각은 말거라.”
“왜?”
“그 땅의 인간들을 전부 죽일 셈이냐?”
갑자기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백정 짓이야 지겹게 했겠지. 하지만 그걸 지구에서도 할 수 있겠느냐?”
“…필요하다면 해야지.”
“전부 이성을 갖고 있다. 꼭두각시가 아니야.”
도현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혀를 찬 사가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마 대비한다면 지구의 각성을 당길 수밖에 없지.”
“각성이요?”
하지현이 물었지만, 헌터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단어였다. 오히려 도현이 생뚱맞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찡그렸다.
“워프?”
“그래, 최상위급 워프를 푸는 게지.”
사가가 수긍하자, 도현은 다시 심드렁해졌다.
“그게 왜?”
“그놈이 모을 수 있는 포인트가 줄어들지.”
“그럼 처음부터 그랬으면 됐잖아.”
인상을 쓰며 말하자, 사가가 살짝 눈을 깔았다.
“…포인트가 없다.”
치에샤와 도현이 탄식했다.
“드래곤 로드가 거지라니.”
“포인트가 없다구요……?”
“그… 차원…….”
의미를 알아들은 치에샤는 미안한 얼굴로 사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면 도현은 빈정거렸다.
“그러니 누가 가랬어? 그냥 있을 것이지.”
오히려 그 말에 사가가 발끈했다.
“나 혼자 갔으면 괜찮았다! 그런데 모르달 그놈이! 그놈이!”
얼굴이 붉어진 치에샤가 작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린 아니사…….”
도현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어깨가 축 처진 치에샤가 입을 떼려는데, 테이블 왼쪽 끝에서 손이 올라왔다.
“저, 저기…….”
박길이었다.
열한 쌍의 시선이 몰리자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하지만 물러서기엔 이미 한계였다.
“저, 저 화… 장실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