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 준동 (4)
“과… 관광이요?”
아야세 하루카는 1인 소파에 등을 기대고 거만하게 앉은 이오르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유카타 차림으로 왼쪽 다리를 올려 꼬고 팔걸이에 세운 손으로 비스듬히 머리를 받친 모습은 거만하면서도 오만해 보였다. 그리고 의아하게도 그 모습이 정말 질 나쁜 양아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낯이 뜨거워졌다.
속으로 ‘미쳤어!’를 외치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다시 이어진 이오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어. 관광. 여기 관광의 나라라며?”
“에… 그렇긴 하지만…….”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그랬긴 했다.
“왜?”
“워, 워프 때문에요…….”
“워프? 그거 없앴잖아?”
심드렁한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뭔가 모를 불쾌감도 함께 느껴졌다.
그러니까 얼굴 자체로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뒷맛이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남긴달까?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온갖 시비는 다 걸릴,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오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그러겠지, 저게 미끼라고 생각해 봤겠나.
어제 워프 브레이크를 없애고 오자마자 라멘을 먹겠다는 요구(협박)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갔다.
그리고 이오르에게서 느꼈던 불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사소한 시비였다.
일본 전체가 이 셋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고작 몇 시간 전 이야기로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시비를 걸었던 헌터를 통해 ‘다진다’는 단어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숨’만 붙은 상태.
‘…그것도 뭔가 어쩔 수 없이 멈춘 느낌이었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이놈의 페널티.’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으니까.
만약 그런 제약도 없었다면…….
‘주, 죽었을 거야.’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의 삶은 거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직업이자 의무, 삶 그 자체이기 때문.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다 보면 헌터는 ‘살기’가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이 학습된 경험이자 각성자와 헌터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오르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본능’이었다.
아야세 하루카는 그 본능을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 목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이, 이러면 안 돼! 소, 손님이라구!’
주먹 쥔 손으로 허벅지를 꾹 누르던 그녀는 얕게 심호흡하며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아… 직 남은 2주기 워프가 더 많아요……. 곧 워프 브레이크가 다시 일어날 거구요.”
“또?”
“네, 네…….”
살짝 이 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괜히 말한 걸까 하는 후회가 밀려올 때, 꼰 다리를 풀며 반대쪽 팔걸이에 팔을 얹은 이오르가 턱을 들어 까딱였다.
“설명해.”
“워프요……?”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자신의 목표이자 의무를 다시금 되새겼다.
“워프는…….”
달이 사라지고 세상이 바뀐 그날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워프에 중점을 두며 이어 갔다. 생성되는 워프의 등급과 햇수가 쌓일 때마다 발생하는 주기까지.
그리고 워프 브레이크에 대해서도.
각국은 비상 체제에 들어갔고, 일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워프 파괴를 위해 헌터란 헌터는 다 긁어모아 곧 문제가 될 워프와 이미 터진 워프 브레이크에 투입했다.
7만이라는 어마어마한 헌터가 전부 동원됐지만 그 결과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꼬박 20시간을 버텨 막아 낸 5등급 워프 브레이크는 막았다기보단 헌터라는 제물을 던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 제물만 해도 300명.
재앙의 시작이었다.
하루걸러 터지는 워프 브레이크에 헌터의 희생은 당연시되었다. 폭탄이나 화학 무기를 다뤄 봤자 그건 몬스터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10배나 되는 희생이 더 따랐다.
겨우 몬스터를 몰아낸 땅은 몬스터 체액의 독으로 땅이 썩어 들었고, 누구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그렇게 삶의 터전을 잃듯, 희망도 점점 사라졌다.
워프 브레이크가 시작되고 일주일.
일본 열도의 10분의 1이 몬스터의 땅으로 변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 발악하는 와중에 이오르와 쌍둥이 엘프가 나타났다.
어제와 방금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열도 전체에 퍼진 워프 브레이크를 깨끗하게 청소해 버렸다.
썩어 버린 땅이 아닌, 살 수 있는 땅 말이다.
강하다는 말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는 그 강함…….
상상의 틀을 벗어난 강함은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꾼 것 같다는 말이 더 현실 같을 정도였다.
아무튼 워프 브레이크 파괴 행보에 TV에서는 24시간 내내 그와 쌍둥이 엘프의 헌팅 영상을 송출했고, 인터넷은 이틀째 검색어가 셋으로 도배되어 오류가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간간이 실시간으로 행적을 좇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말 그대로 난세의 영웅.
한국이라는 나라에 반감만 가득하던 조국이 이오르와 쌍둥이 엘프가 우도현의 친우이자 지인이란 말을 듣고 ‘일본은 한국의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친우 같은 친국’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극찬했다.
욕이나 질 낮은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 그녀조차 자신도 모르게 ‘개소리’라고 말할 정도로.
아야세 하루카는 황당한 상황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헌터가 되고, 구미를 만들며 승승장구했을 때 받았던 관심도 비슷했으니까.
‘…이젠 아니잖아.’
오히려 관심이 사라진 지금이 편하다. 그런데 왜 자꾸 쓴웃음이 날까.
‘나도 관심받고 싶었던 걸까……?’
유명한 헌터라면 관심받길 원한다. 우스갯소리로 관심받기 위해 헌터가 되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내성적이다 못해 자신의 집도 낯설게 느낀다. 심했을 때는 공황장애로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러니 관심을 바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아야세? 안 들리냐? 나가자니까?”
불쑥 얼굴 앞에 들이밀어진 이오르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꺅, 비명을 질렀다.
“죄, 죄송해요!”
이오르는 허리를 굽히는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벌겋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였으니까.
차라리 쌍욕을 퍼붓거나 주먹을 내지르거나 벌벌 떠는 게 익숙하지, 저런 수줍음은…….
어색함에 이오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쌍둥이 엘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출발하자는 신호였다.
“저, 저기…….”
아야세 하루카의 목소리였다.
“뭐?”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별거 아니라고. 관광하면서 겸사겸사 하자고 했지.”
그러자마자 아야세 하루카는 울먹이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구요……. 워프가 얼마나 많은데 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담긴 감정은 ‘걱정’이었다.
천하의 이오르를 걱정하는 인간이라니.
절로 나오는 한숨을 뱉고 보니 자신을 쳐다보는 쌍둥이 엘프의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살짝 이마를 좁히자 바로 아닌 척 외면했지만.
‘차라리 다른 녀석들이 올 것이지, 하필 얘네야?’
딱히 거슬리는 건 없지만 여행이 아니라 조카 돌보기가 된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말을 안 듣는 것도 아니고. 말이 많다는 마리나스까지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괜히 성격대로 하지는 못하고, 그걸 참으니 아야세라는 여자 인간에게 짜증 섞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이오르 님… 그건 아니에요. 아무리 강하다 하셔도…….”
그래, 저 화법이 문제다. 늘어지는 건 둘째 치고 얼버무리는 저 말. 그런데 저게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게 더 짜증을 돋운다.
그러다 보면 결국 평소보다 더 짜증을 내고, 소리치면 더 미안해하고,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며 다시 사과하고……. 아, 답답해!
그 마음을 담아 이오르는 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우도현 그 새끼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겠냐? 고작 800개쯤이야 시간도 널널한데 관광하면서 없애면 되잖아!”
“에……? 고, 고작 800개요……?”
붉어졌던 얼굴이 이젠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그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아, 이젠 모르겠다.
늘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던 이오르는 그냥 이 셋을 무시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가자!”
“아, 이오르 님, 잠시 기다려 주세요! 차, 차가……! 아니, 어디로 가실…….”
버벅대는 말을 듣고 있으니 울컥울컥 치솟는 화에 이오르는 아야세를 짐짝처럼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쌍둥이를 봤다. 생글거리는 얼굴에 한마디 하고 싶지만 마리나스가 헤실 웃자 말이 막혀 입술만 씰룩거렸다. 그사이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오르 옆에 와서 섰다.
넷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농장 중심부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
개수를 세기도 힘든 수많은 가지 중 한 곳에 잎이 돔처럼 덮은 공간이었다.
20평 크기 너른 방. 중앙이 뻥 뚫린 도넛 형태의 테이블에 10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도현이, 그 오른쪽으로는 오제아와 휘르카, 강혁, 차 부부가 자리했고, 왼쪽에는 프로페셔널 팀이 신입과 함께 착석해 있었다.
모두가 테이블 중앙, 뻥 뚫린 허공에 시선을 모았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3D 입체 영상이었다.
일본의 대표 명소라 할 수 있는 후지산의 장엄함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한 후지산의 제일 높은 산봉우리. 그곳에 가시처럼 박힌 붉은 달 조각이 금빛을 발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2주기를 맞은 1등급 워프.
아니, 실제로는 워프가 나타났던 그때부터 1등급이었던 워프가 2주기를 맞은 현상이었다. 등급을 매겨 보자면 1+++등급이라고 할까.
일본에서만 일어난 유일한 현상으로, 세계가 긴장한 채 일본을 주시하는 이유이자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유인 미지의 워프였다.
워프 앞에 빛이 반짝이며 4명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 셋과 금발 하나.
도현이 보낸 이오르와 쌍둥이 엘프, 그리고 일본 헌터 아야세 하루카였다.
이오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아야세 하루카를 쌍둥이 엘프에게 떠넘기자마자 혼자 워프에 들어갔다.
채 5분도 안 되어 나온 그의 손에는 메론 크기의 금붉은 빛을 내는 워프핵이 들려져 있었다.
이오르는 워프핵을 아공간에 넣자마자, 익숙하게 워프에 주먹을 날렸다.
세상이 쪼개질 듯 산이 흔들리며 워프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말이 구멍이지, 저 정도면 터널이라 해도 믿을 만큼 큰 구멍이었다.
왜 구멍을 냈느냐는 의문이 들기도 전에 하얀 뱀 하나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얼마나 큰지 터널 같은 구멍이 비스킷처럼 부스러기를 뿌리며 더 넓혀졌다.
마침내 탈출한 뱀의 크기는 이오르를 새끼손가락의 손톱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로 거대했다.
500미터를 넘기는 몸길이와 10미터는 될 법한 두께.
그 거대한 뱀이 후지산 산봉우리를 덮은 눈보다 더 시린 하얀 몸으로 산을 친친 감아 똬리를 틀었다.
동시에 자신을 깨운 이오르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아야세 하루카는 졸도하며 쓰러지고, 쌍둥이 엘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함께 주문을 외웠다.
셋을 감싸는 투명막이 빛을 세 번 냈다. 3중첩 실드였다.
그 작업이 끝나기도 전에 뱀은 입을 쩍 벌리며 이오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오르의 주먹 한 방에 강제로 입이 닫히며 하늘로 승천했다.
영상이 흐려지며 사라졌다.
그제야 회의실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현의 오른쪽에 앉은 오제아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일본 워프 청소를 위해 갔던 세 분은 어제저녁 농장에 복귀했습니다. 이오르 님이 잡은 몬스터, ‘오로치마루’는 농장 중심부에서 남서로 5,000킬로미터 떨어진 늪지대를 보금자리로 잡았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만 칠 줄 알았더니, 잘 처리했네.”
만약 퍼런 도마뱀 이오르를 아는 이가 있었다면 몇십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겠지만, 이 자리에 이오르를 아는 이는 도현을 제외하면 오제아가 전부였다.
둘을 제외한 8명은 거대한 몬스터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이오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오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처리는 잘했지만…….”
“했지만?”
심각한 이야기인 줄 알았던 도현의 얼굴에 의아함과 불길함이 추가되었다.
“지출이 너무 심해요.”
“지출?”
생각지도 않은 말에 강혁이 되물었다.
오제아는 아공간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읊었다.
“식사, 옷, 신발, 가방, 보석, 기념품, 예술품, 차, 건물, 온천수까지.”
“예, 예술품?”
“차……? 마, 마시는 차……?”
“거, 건물?”
순서대로 차도식, 하지현, 강혁이 수군거렸다.
프로페셔널 팀은 충격으로 입만 쩍쩍 벌어졌다.
“전부 삼십구억천육백팔십이만오천육백구십오!”
“…….”
“엔이에요.”
경악한 가운데, 휘르카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 엔이 뭡니까?”
오제아가 휘르카를 슬쩍 보고 말해 주었다.
“원화와 일대일 환율이니, 블랙홀 화폐로 환산하면 ‘0’ 하나 더 붙이면 됩니다.”
“뭐, 뭐, 뭐라고요?”
늦게나마 경악한 휘르카를 보던 도현이 턱을 긁으며 오제아에게 물었다.
“뭐, 생각보단 적게 썼네. 근데 건물은 뭐야?”
‘적게’란 말에 주먹을 바르르 떨던 오제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카페요. 바리스타에 흥미를 보이시던데요. 차려 볼 생각인 것 같았어요.”
“그럼 차는?”
“하… 마시는 차였으면 좋겠지만, 교통수단인 자동차예요. 일본 차 브랜드로 ‘토요타 수프라’라는 종이네요. 7백만 엔, 원화로 7천6백만 원쯤입니다.”
“…온천수는?”
“특이한 물이라며 구매하셨답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렀다.
기가 찬 강혁이 물었다.
“그걸 어디 쓴다고? 아니, 파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사 왔답니까?”
미친 행각에 놀람보단 짜증이 샘솟은 오제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100톤이니 워터파크라도 만들려나 보죠.”
“맙소사…….”
재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