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의 자취방-159화 (158/200)

# 159

159. 준동 (2)

차원과 차원이 합쳐진 지 일주일.

헤미오르는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양옆을 채운 사람들을 보며 두 눈덩이를 집게손가락으로 눌렀다.

정기적이진 않지만 몇 달에 한 번씩은 꼭 모이는 이들이라 익숙하지만, 오늘만큼은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양 서로를 견제하며 눈치 보기 바빴다.

이 불씨를 붙인 건 다름 아닌-

‘퍼런 도마뱀 새끼…….’

이를 악물며 인자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은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날이 서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에요.”

방관자처럼 구경만 하던 헤나지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황님의 말씀이 맞네. 그렇게 열 올리지 말게나.”

그 옆에 앉은 그라드가 차를 홀짝이며 한마디 더 끼얹었다.

“맞습니다. 더군다나 이오르 님과 함께 아닙니까?”

그 한마디에 열 올리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실용 마법 학파의 전설인 제6마탑의 마스터인 헤나지그 카 오르센과 그의 아들이자 마계의 절대자인 그라드 휘고아타가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랄까…….

그 때문에라도 경쟁자 수가 팍 줄어든 것에 감사해야 했다.

진지함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하이든이 살벌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오르 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일은 우도현 님께서 내린 첫 명령.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죠.”

그 말에 검은 머리 쌍둥이 엘프와 백발에 가까운 은발의 하이엘프 하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 엘프, 세자나스가 덧붙였다.

“우도현 님, 아니 이 세상의 신께서 내린 첫 신명입니다. 그것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만이죠. 이건 선택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제라고!’

헤미오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필! 왜, 하필!

3명만 뽑느냔 말이다!

이야기는 1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세계가 합쳐지고, 불안감에 휩싸여야 할 중간계는 의외로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 이유는 눈앞에 뜬 튜토리얼이라는 메시지 창 때문이었는데, 반대로 제국을 운영하는 위치의 사람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명령이 빠르게 전달된다는 이점이 되레 독이 된 거다.

눈에 확실하게 보이니, 머리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괜히 아랫사람들을 볶아 댈 수밖에.

볶는 거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볶는 만큼 업무량은 수배가 되어 되돌아왔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이오르에게 미친 척하고 소리를 질렀다.

“제발,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요!”

은연중에 노처녀 히스테리라 부르는, 그 신경질을 완전히 무시한 이오르는 제 할 말만 떠들어 댔다.

“도현이가 할 일 있다고 3명 데려오래. 장소는 지구 일본, 목적은 몬스터 소탕. 한 자리는 내 거니까, 두 자리 남았다.”

헤미오르는 듣자마자 가겠다고 외칠 뻔했다.

세상에 지구라니!

지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14년 전 입에 댔던 치킨이 떠오르며 침샘이 고장 난 듯 입가를 타고 침을 흘릴 뻔했다.

혼자 있었다면 몰라도 이오르 앞이다.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아니면 평생 놀림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빠르게 수습하며 짧은 순간 들은 말을 곱씹던 그녀는 되물었다.

“누구에게 말했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오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뇌까지 쥐어짰지만, 그녀의 얼굴은 태연 그 자체였다.

이런 일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이 정도 담력이 없으면 안 되지.

키득키득, 마족보다 더 사악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오르가 말했다.

“역시 똑똑해. 그래, 괜히 제국의 여황이겠어?”

“대답이나 해요!”

빽 소리를 지르자 눈을 가늘게 떠 흘기는 모습에 아차 싶었다. 오늘은 어디를 내줘야 하나……?

그런 각오와 달리 이오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배를 긁었다.

“흐응, 오늘은 기분 좋으니 넘어가 주지. 방문자 전부.”

“아…….”

재앙이다. 저건 정말 재앙 덩어리야.

“결과는 내일까지, 메시지로 달라더라. 그럼 수고.”

이오르는 사라지고 킬킬 웃는 소리만 남아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

방문자 전부라 함은…….

“누가 봤으면 제국 하나 새로 건설하는 줄 알겠지…….”

헤미오르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이오르가 소집하는 거라면 이렇게 착잡하지 않았을 거다.

무려 우도현이다.

이 세계의 신, 현존하는 신의 부름.

방문자라는 광신도들에게 있어 그건 신탁이자 신명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이 자리.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꼭 참가하겠다는 이는 하이든과 엘프 셋, 그리고 이오르의 수제자이자 맹약자인 페드릭이었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나라의 왕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이들이지만, 실제 진짜 왕들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 중이다.

퍼런 도마뱀이 물어다 준 소식은 정말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도현이가 함께 가는 것도 아니고, 귀찮은 일 떠맡기는 건데 왜 되지도 않은 의미 부여를 하는데?”

의자에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모를 자세로 심드렁하니 팔짱을 끼고 있던 에놀드가 핵심을 찔렀다.

구경 중인 이들은 무언으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래, 이걸 아니까 끼어들지 않은 거다.

반대로 의미 부여를 해 대며 주장하는 다섯 중 의욕을 불태우는 하이든과 세자나스가…….

여태 존재감도 느끼지 못했던 페드릭이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쾅!

“아니, 에놀드 씨! 말씀은 가려서 하셔야죠! 우도현 님이 어떤 분이신데! 어찌 그런 망발을 하십니까? 더군다나 대신관이면서!”

하나 더 추가다…….

헤미오르가 머리를 싸매든 말든 테이블을 둘러싼 상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에놀드는 픽 웃었다.

“재밌을 거 같아서 한 거야. 그리고 난 그놈이랑 친구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신과 신교의 대신관이 친! 구! 가 말이 됩니까?”

에놀드는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하이든 경이 저런 말을 해 대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어째 용병에서 요리사가 된 놈이 더하냐?”

“왜 쟤는 ‘하이든 경’이고, 전 ‘놈’인데요? 제가 7살이나 더 많습니다만?”

“하이고, 그러면 저보다 13살 많으시니 행님 대접 해 드릴깝쇼? 늙어서 차암 좋겠습니다, 페드릭 씨.”

“저딴 게 무슨 대신관이야? 내가 정말 퍼런 드래곤이랑 친구만 안 먹었어도! 으아아악!”

난장판 속에서 차만 홀짝이던 그라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손주들의 재롱을 보듯 지켜보던 헤나지그가 무척 아쉬워하며 그라드를 바라봤다.

“좀 더 있지 않고.”

“이러고 있는 동안 일은 계속 쌓이니까요.”

몰래 나온 탓에 자신 대신 갈리고 있을 보바와 그의 호문클루스를 떠올린 그라드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최상에 올라도 사는 건 다 같구나.”

쓴웃음을 짓는 헤나지그였지만, 그도 사실 파업을 선언하며 도망 나온 상황이었다.

제국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갈려 나가는 건 마탑 중에서도 실용 마법 학파가 8할 이상이니까.

“그래도 좀 자주 와. 이러다 얼굴도 까먹겠어. 이제 마계도 흐르는 시간이 같지 않더냐?”

“예, 아버지. 자주 찾아뵐게요.”

“그래, 며늘아기감도 좀 데려오고 말이다.”

마지막 한마디에 그라드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폭풍이 몰아치던 테이블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노처녀, 노총각이 아닌 이를 찾기보다 기혼자를 찾는 게 더 빨랐으니까.

“후후후.”

인생에 성공한 하이든이 옆자리에 앉은 하이엘프 아나헤타의 손을 굳건하게 맞잡으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이를 건들고 말았으니…….

까드득-!

여태 두통으로 머리만 움켜쥐며 한숨만 내쉬던 헤미오르가 해사하게 웃으며 헤나지그를 바라봤다.

“요즘 좀 적적하신가 봐요?”

분명 아름다운 미소와 정신을 쏙 빼놓을 매혹적인 목소리임에도 전신이 쭈뼛거릴 음산함이 느껴졌다.

여태 인자한 웃음만 짓던 헤나지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배어 나온 식은땀으로 백발 일부가 축축해졌다.

그는 헛기침하며 벌떡 일어났다.

“크흐흠, 아들이 간다니 뭐 나도 가 봐야겠군. 허허, 다음에 또 보세나.”

“살펴 가십시오.”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모두가 일어나 배웅했다.

헤나지그와 그라드가 사라지자 헤미오르는 의자에 앉은 이들을 훑었다.

에놀드도 어느새 소리 없이 사라졌고, 실제 참가를 원하는 이들만 남은 상태.

그녀는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은 아나헤타에게 물었다.

“돌려 말하기 싫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아나헤타 님은 왜 참가하시려는지요?”

아나헤타는 무척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검은 머리의 쌍둥이 엘프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엘프 전체가 큰 은혜를 입었어요. 하이엘프로서 종족의 은인에게 보답해야지 않겠어요?”

“그 은혜는 본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헤미오르는 딱 잘라 말했다.

하이든의 안절부절못한 시선도 시선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방문자들에 한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이든이 목소리를 높였던 이유도 아나헤타 혼자 보낼 수 없어서겠지.’

그녀의 생각은 정확했다.

하이엘프는 강하다.

2천 년이라는 긴 수명으로 배운 경험의 지혜도 있겠지만, 하이엘프라는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수명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그래서 그녀는 더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하이든은 불안한 거다.

수명 때문에 하이든의 프러포즈조차 100번 넘게 까 버렸으니까.

어떤 의미로 대단한 여자인 건 틀림없다.

그런 헤미오르의 시선을 받은 아나헤타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젊은 피는 더 중요한 일에 써야죠. 이럴 때일수록 제가 가는 게 맞아요.”

그녀 옆에 앉은 하이든이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게 보였다.

쌍둥이 엘프는 그 모습을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유명을 달리했을 쌍둥이를 보는 것과 같이 살려 냈다.

그뿐인가. 성인식을 넘어 새로운 엘프를 창조했다.

하이엘프조차 뛰어넘는 능력과 도현을 닮은 검은 머리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끈다. 외모가 아닌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엘프 사이에 일어났던 내부 갈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왕족으로 추대되며 엘프 왕국이 건설되고 있었다.

문제는 여왕이 된 마리나스와 그녀의 기사를 자처한 쌍둥이 남동생 세자나스였다.

너무나도 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7살짜리 아이에게 세상을 파괴할 힘을 준 거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둔다면 어른의 꼭두각시는 당연하고, 어쩌면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걸 모를 리 없음에도 아나헤타는 완고했다.

‘역시 난 엘프가 싫어.’

저런 부분까지 이기적인데 하이든 경은 뭐가 좋다고 쩔쩔매는지…….

어쩔 수 없다.

힘을 가진 이후로 지금까지 쭉 해 온 익숙한 일을 하는 수밖에.

헤미오르의 눈빛이 변했다.

그러자마자 하이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옆에서 보좌하는 이들이라면 숱하게 봐 온 본모습이지만, 외부인에게는 철저하게 감췄던 그것이 폭발했다.

벌떡 일어난 헤미오르는 의자를 발로 차 버리며 저급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XX, 까고 있네. 빚이든 보은이든 지들이 하겠다는데 하이엘프로서 종족 은이이인? 보다아압? XX, 그럴 거면 내부 갈등부터 잠재우든가, 쟤들이 뭔 죈데? 저 어린 나이에 왜 저런 힘든 짐을 짊어지게 하냐고! 니가 어른이라면, 연장자라면 니 X대로 갖다 붙여 행동해도 되는 거야? 어디서 개소릴 지껄여?”

“헤, 헤미오르 님……!”

기겁한 하이든이 벌떡 일어나 헤미오르를 말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넋이 나간 아나헤타의 면상을 보고 있자니 헤미오르는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집어쓴 것만큼 불쾌해졌다.

“야, 데리고 나가. 그리고 두 번 다시 성에 데려오지 마. 집과 일, 확실하게 구분하라고!”

“…여황 폐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하이든은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인 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나헤타를 데리고 나갔다.

“후! 야, 쌍둥이들.”

“예, 예! 여황 폐하…….”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대답하는 병아리 둘을 본 헤미오르는 푸흐흐흐 웃어 버렸다.

얼마나 귀엽나.

이제 세상에 나와 좀 놀아야 할 텐데, 왕이니 기사니…….

뭐 어쨌든.

“이오르 님 잘 모시고 다녀와. 겸사겸사 세상 구경도 하고.”

그제야 뜻을 알아차린 둘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는 조금 전 의자가 탈출하며 깨진 유리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이 짓도 할 게 못 되네.’

서른둘의 노처녀 히스테리를 하나 더 적립한 헤미오르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