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 진실? 현실? (3)
짜증과 당황, 불쾌감이 합쳐진 목소리가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엄마?”
“하, 이래서 사내새끼들은…….”
“뭐?”
날카로운 눈초리에 움찔했지만, 그녀는 주먹을 꽉 쥐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일반인! 아니아니, 헌터라 해도 그렇게 큰 세계를 맡기면 어떡해요?”
큰 세계라면 블랙홀 랜드 말인가?
전혀 이해 못한 듯 도현의 고개가 삐뚜름해지자,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격을 대신하는 건 생명뿐이라고요.”
“생명……?”
눈이 커진 도현이 벌떡 일어났다. 바로 임혜정에게 달려가려는 그를 붙잡은 건 치에샤였다.
“아직은 괜찮으니까, 말 다 듣고 가요!”
“말해.”
“휘가 도와주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까지는.”
“그 도깨비 신?”
왜냐고 묻는 말이었다.
치에샤는 조금 전 도현처럼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본론만 말하라더니, 이제 궁금해요?”
“…이상하게 넌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재주가 있어.”
“칭찬으로 듣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정말 침이라도 뱉고 싶을 정도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혀를 차며 다시 주저앉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몇몇 나라가 신의 통치를 받는 건 알고 있겠죠?”
“몰랐는데.”
“네……?”
“알려고 해서 알게 되는 건가?”
수소문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리갈루스의 경우는 대놓고 신의 힘을 뿌렸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던 거지, 골고타 같은 경우는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치에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여러모로 이런 미래의 당신은 처음이네요…….”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잔말 말고.”
“으흠, 대부분 제가 봤던 과거에서 신들은 그 나라의 사활을 책임질 인물과 손을 잡아요. 한국은 당신의 어머니고요.”
도현이 의아해했다.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지?”
치에샤는 잠시 첫 지구의 과거를 회상했다.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세상에 살아남은 도현의 가족은 하지현이 전부였다.
그녀마저도 도현이 도착하자마자 신의 대리자가 된 차도식에게 죽어 버렸다.
이후 다른 방향으로 과거를 비틀며 만난 게 휘였고, 휘는 도현의 아버지, 우대성을 택했었다.
엄마인 임혜정을 택한 건 이번이 처음.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사업이 세계로 확장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에샤는 회상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이전까지는 당신의 아버지였다는 것만 알 뿐.”
“알려 줄 거면 제대로 좀 알려 주지?”
“비서를 찾으려면 오젠타 아르샤 씨를 부르시죠?”
“조금 전이랑 너무 다른 거 아냐?”
“오히려 당신이 나한테 자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한테 다 떠넘길 거라면서요? 아니면 그새 마음이 바뀌었어요?”
도현이 피식 웃었다.
“사가도 있는데?”
순간 ‘짜증 나!’를 외치려던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억지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대로 되돌려 받을 줄이야!
“그래서 해결책은?”
그만 뜸 들이라는 위협이 물음과 함께 자신을 팍팍 찔렀다.
…정말 맞추기 더럽게 힘든 인간인 건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런 부분에서 반가워해야 하냐고오-!
그녀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심호흡한 치에샤가 검지와 중지를 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도현이 인상을 쓰자 뜨끔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임혜정 씨가 신이 되는…….”
“오늘부터 기일 1일로 시작하면 되나?”
“무, 물론 마음에 안 들 테니, 격을 갖추는 두 번째 방법으로 가죠!”
“아무래도 넌 그냥 없는 게 낫겠어.”
도현이 벌떡 일어나 손을 뻗자, 그녀는 눈을 감고 발악처럼 소리를 질렀다.
“왜요, 왜! 해결책을 내줘도 지랄이야! 나도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그래, 차라리 죽여!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개고생을 했는지!”
눈을 감은 채 소리를 질렀던 탓일까.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슬쩍 눈을 뜬 치에샤는 당황한 도현의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너 사실은 한국인이지……?”
“에……?”
“무슨 다른 차원 신이… 한국어 패치가 그렇게 좋아?”
“그야…….”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구, 그것도 한국이 너무 좋아 파고 또 팠다는 건 죽어도 말 못한다.
“그야?”
“다, 당신을 얼마나 많이 봐 왔는데! 그,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흐음… 그래?”
“그, 그래요!”
미심쩍어했지만, 그래도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조심히 쓸어내리는 그녀는 다시 말없이 빤히 보는 도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네가 말한 격을 갖추는 방법이 뭔데?”
“그건…….”
다시 차분해진 치에샤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도현은 짜증과 분노, 어이없음이 뒤섞인 얼굴로 그녀를 죽일 듯 쳐다봤다.
“정말 그 방법뿐이야?”
“아니고선 10년 이상 걸리는 일이에요. 그것도 빠른 거지만.”
“하,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당신도 이미 겪어서 알잖아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요?”
도현은 말없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크으으! 사이다!’
짜증 날 때의 습관을 본 치에샤는 그 모습에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그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도현이 입을 뗐다.
“그러니까,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거지?”
“네.”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던 도현은 다시 물었다.
“너 말고 또 누가 알아?”
“린 아니사. 그녀도 알고 있을 거예요.”
주변을 보란 말이 이 뜻이었구나…….
쯧, 혀를 찬 도현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임혜정 씨에게 가려구요?”
“아니, 그 전에 걸리적거리는 것부터 없애려고.”
걸리적거리는 거?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던 치에샤의 눈이 커졌다.
도현이 쐐기를 박았다.
“한 달. 그 안에 다 끝낼 거야.”
“미, 미쳤어요? 그놈은, 그놈은!”
“머리 쓰는 놈이라며?”
“그게 더 힘들다구요! 애초에 지구를 삼켰던 놈도 그놈이었구요!”
“그래서 뭐?”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며 한쪽 눈썹만 까딱이는 도현을 보고, 치에샤는 갑자기 고구마 100개를 목구멍에 넣은 듯 숨이 턱 막혔다.
“저번에 사가한테도 말했었는데.”
“뭐요?”
“안 되면 통째로 쓸어버리면 돼.”
“아, 아니, 이보세요, 우도현 씨! 그러면 인류는!”
“여기 있잖아.”
“……!”
통째로 옮기겠다고?
처, 천잰데?
아니! 이게 아니잖아!
인류는 살아남을지 몰라도 지구는 아작 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질 거다.
백퍼.
그녀는 어느새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그건 절대, 절… 우도현?”
없다.
방금까지 있었던 도현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으아아악! 우도현 이 미친놈아-!”
휘이잉.
밤바다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처량하게 남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
도현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사가였다.
아니, 집으로 돌아가 불러냈다는 표현이 맞겠지.
찔리는 게 많은 사가는 처음엔 도현과 얼굴도 안 마주치더니, 부른 목적을 듣자 그와는 별개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 마음대로 워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없애는 건 못한다.”
“왜?”
“워프의 목적이 뭐냐?”
“지구에 마나를 뿌리는 거?”
“…그것도 목적이긴 하다만, 최상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하, 진짜. 알아먹기 쉽게 설명해.”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시작했던 도현이었는데, 한층 더 날이 서자 사가는 괜히 억울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요리를 만들기와 같은 거다.”
“요리?”
“신선하고 좋은 재료와 그에 맞는 조리법, 그리고 숙달된 요리사.”
“그러면 워프가 재료 공급처?”
사가는 가슴을 쳤다.
요리란 말에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무슨 대답이……!
“야, 이놈아! 네가 생각할 입장은 인류지, 신이냐?”
도현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또 어딜 가려고?”
“그냥 다 뒤엎으러. 사가는 뜬구름 낚시나 해. 무슨 말이 통해야 말이지.”
“무, 무슨. 네놈이 지구를 멸망시킬 셈이냐? 앉아라! 앉아!”
퀭해진 사가는 몇 번이고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말을 고르고 골라 입을 뗐다.
“워프는 지구의 성장을 빠르게 돕고 있지. 그런데 워프를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늦게 성장하겠지.”
“크흠, 멸망한다.”
“왜?”
“기회라는 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가 있다는 말인가?”
도현이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묻자 짜증을 누그러트린 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힘과 시간이 들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냄비에 맹물만 끓일 때와 만들다 만 음식을 다시 이어 요리할 때가 같더냐?”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던 도현은 수긍했다.
물만 든 냄비는 물만 끓으면 되지만, 요리를 하다 만 냄비는 재료에 열이 전달되어 골고루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다.
최소한 시작 시각부터 다르다는 말이겠지.
“더군다나 재료가 상했다면 더욱더 힘들 게다. 정말 요리라면 냄비를 비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겠지만, 행성을 그럴 수 있겠더냐?”
“음…….”
맞는 말이다.
지구에 7명이란 신이 모여 시작했는데, 그때는 배로 모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수마저 부족하다면?
더 많은 신이 모여들겠지.
문제는 그들이 모두 적이라는 거다.
‘그리고 지구 자체가 그만한 가치가 그때까지 이어질까?’
결국 남은 결론은 멸망인 것이다.
도현이 생각에 잠기자 사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슬쩍 물었다.
“그런데 치에샤 님은 어디 계시냐? 안 보이시는데…….”
“어? 남쪽 바다에.”
“…농장?”
“어.”
화를 잘 내지 않던 사가가 얼굴이 시뻘게져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놈아! 놔두고 혼자 오면 어쩌자는 거냐!”
“왜? 뭐가 문젠데?”
“최소한 농장 공터에 데려다 놔야 할 거 아니냐?”
“신성력 있잖아?”
“땅덩이가 넓어졌지 않으냐! 헌터라도 3일은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가 됐단 말이다! 그리고 한 줌밖에 안 되는 신성력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이럴 게 아니다. 내가 가, 가 봐야지!”
허둥대던 사가는 그렇게 사라졌다. 도현은 조용해진 거실에서 혼자 피식 웃었다.
“그 제브라드가 고작 바다에 좀 있었다고 죽을 리가.”
아무 생각 없이 두고 온 거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재밌었다.
혼자 남아 욕을 욕을 해 댄다면 나름 고소하지 않겠나.
“그런데… 지구가 성장하면 뭐가 좋은 거지?”
머리를 벅벅 긁던 도현은 휴대폰이 진동을 울려 대자 액정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처남님!>
<처남님! 국제 헌터 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 헌터 협회가… 헌터 협회 총본부가 되었습니다!>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
못 본 척, 휴대폰을 소파 위에 툭 던진 도현은 그냥 드러누웠다.
“잠이나 자자.”